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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물은 말이 없나요 / 이창옥

부흐고비 2021. 4. 22. 09:01

물은 흐르고 살아 움직이는 힘을 줍니다. 가다가 멈추어 노닥거리며 장난질도 합니다. 힘이 겨워 쉬엄쉬엄 이골저골 에서 아장거리며 작은 이야기로 소곤댑니다. 여기엔 정을 나누고 정이 흐르기도 합니다. 가다가 고인 물이 때로는 힘이 벅차 오래도록 멈추기도 하지요. 아마도 멍 들어가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에게는 지식과 체험이 많을수록 인격이 높아 오는데 여기엔 진한 사랑이 멈춘 탓일까요. 샘에서 솟는 청순하고 맑은 물은 뭍에서 조아리다 땅에서 그리고 바위를 뚫고 긴 여행도 합니다. 주변의 온갖 탁음도 귀를 꼭 막은 채 청백의 숭고의 미를 갈고 닦습니다.

어느 땐가 재활 되어 뭇 생명체에 활력소가 되어 물욕의 세계를 띤 순정의 태깔로 옵니다. 사람들에게는 고마움이 크고, 변죽의 뭇따래기에게 탈력의 처방이 되어주고, 안으로는 고고한 품성을 자꾸만 갖고 싶어지는 것은 순수에서 온 진리로서 숨겨진 고매함이 아닌지요. 차안(此岸)의 마각(馬脚)에서 피안(彼岸)을 만난 듯 착한 벗이 되는 듯합니다.

샤넬은 "20세의 얼굴은 자연의 선물이요, 50세의 얼굴은 당신이 만든 얼굴"이라 했듯이 샘물이 지닌 참뜻의 깊이를 이제는 알 것만 같습니다. 사뭇잊지 않고 새겨두어 영겁으로 간직해 보는 것도 작은 힘이 되겠지요. 물은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모습을 실감으로 표출하는 맑은 얼굴이 있어 범인으로는 잘 보이지는 않으나 마음으로 읽습니다.

모난 그릇에는 모가 난대로 둥근 도자기에는 둥근 모양으로 만들어 주어 그 모습에 도자기로 충족시켜 항시 즐겁게 합니다. 바로 이런 형상이 아름다운 자태요, 홍덕(鴻德)이 아닐까요. "최고의 스승은 시간이요, 최고의 선생은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베푼 것도 좋지만 받는 덕망도 길러야 합니다. 사교적인 사회에서 밝은 인사는 퍽 부드럽게 해주는 역할도 되는 것이기에 이는 나누어 갖는 자기 몫이라는 의미는 아닐 지요. 무엇이건 나눌 수 있는 일이라면 물의 이미지와 상통하는 바가 크지요.

우리는 함께 살기에 풍성하고, 때로는 오히려 외롭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위대할수록 남에게 더 많은 것을 건네야 된다는 말도 됩니다. 사람은 상실하지 않고 항시 소유하고 있는 보배로움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사랑이지요. 이웃을 즐겁게 하는 힘이 바로 사랑 아니겠습니까.

노자(老者)는 상선여수(上善如水)라고 해서 물의 철학을 설파했습니다. 물은 가장 뛰어난 선이라고 했지요. 산을 무너뜨리고 바위도 뚫는 힘이 있지요. 나무, 풀, 벌레, 짐승 그리고 생명을 지닌 모든 물체를 살리면서 스스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죽이며 더러움을 씻게 하는 청결함을 지녔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몸을 낮추어 낮은 데로만 흐르는 미덕이 있지요.

우리는 물의 공덕과 물에서 얻는 지혜가 너무도 많은 것 같습니다. 물의 무상(無上)의 덕을 칭송한 바 겸허한 사람의 크나큰 지와 덕에 거듭나는 새 모습이 아닐까요. 숲이 숨쉬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어야 만이 숲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숲속의 하나하나에는 나무와 잎과 태양의 조화에서 동화작용이 됩니다. 나뭇잎에 흐르는 수액은 숲을 이루는 원천이 아닐까요. 그래서 물은 무한한 덕을 지녔다고 합니다.

물은 자유로운 곳으로 여행하는 순리로움을 잘 압니다. 그러나 가다가 오랫동안 머물 때도 있지요. 여기엔 악충이 생성되어 물을 썩게 합니다. 악취가 있어 이웃에 이로움을 멀리한 채 따돌림을 받기도 하지요. 이는 물의 외로움이며 슬픔이 아닐까요. 이처럼 물의 여정에도 고독(苦毒)이 따릅니다.

그런데 더욱 고독경(孤獨經)에 있는 의표(意表)의 인물들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면서 살아가고 정을 나누는 모습이 생의 즐거움이 아닐 지요. 여기에 또 다른 독소적 뇌물에 뇌동부화(雷同附和)하면서 의식까지 빼앗겨 자기를 망치는 존재가 더러 있어 모둠살이를 구정 대는 차가움이 있습니다. 이는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메쯤 와 있는지 그 형체가 없어 답답할 뿐입니다. 이들에겐 청약불문 하겠지만 물의 슬기를 익혀야 되겠지요.

이제는 물이 살아 있다는 교훈에서 소곤대는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이 안에 따가운 정이 수수하는 참모습을 찾게 되었으니 행인가 싶습니다. 샘을 외이는 바가지 샘터에 예인 양 연상케 됩니다. 그때는 맑고 청순한 물동이 여인네의 방년의 미소가 따르겠지요. 물이 갖는 무언의 지시는 오늘을 살리고 또 내일을 기대케 합니다. 물과 샘과 그리고 숲의 생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겸양의 지혜를 탐하는 색감을 아는 듯합니다. 아마도 물은 언제나 말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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