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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달빛, 꽃물에 들다 / 김새록

부흐고비 2021. 4. 26. 22:25

쭉쭉 뻗은 도로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은 먹이를 찾아 달리는 짐승 같다. 논두렁 밭두렁 골목길에서 볼 수 있는 한적한 곡선의 흐름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달빛처럼 은은하고 부드러운 교통망은 속도를 다투는 도시에 걸림돌일 뿐이다. 새털구름, 조각구름, 그리고 뭉게구름처럼 모양새가 각기 다르게 흘러가는 구름이나 높낮이가 물결 같은 능선, 선의 방향에 구애받지 않고 들쑥날쑥 뻗어가는 나뭇가지. 크고 작은 돌멩이들의 자연스런 곡선은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쉼터이기도 하다 . 그러나 도회지의 땡볕 같은 속도의 흐름 속에 말랑말랑한 정서를 생각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사람도 처음 달빛이었다가 자랄수록 뙤약볕 같은 성격으로 변질되는 인성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천진난만한 신생아의 순수와 부드러움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세상에 차차 눈을 뜨면서 온갖 말과 행동으로 유혹하는 달콤한 눈짓에 흡수되어 미처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뜨거운 날을 세우는 인간형으로 변한다. 남보다 더 빨라야 하고 남보다 더 많이 차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기심으로 앞서기를 다툰다. 그것은 두려움도 없이 도심을 마구 치고 달리는 자동차의 물결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머리에 흰머리가 하나 둘 늘어나고 주름이 새끼를 치면서 직선 같은 성격에도 크고 작은 변화를 갖게 된다. 강직함보다는 유연함을, 직선보다는 곡선 쪽으로 몸과 마음의 변화가 찾아온다. 미래지향형이기보다 과거의 향수에 젖어 때로는 흘러간 유행가에 귀를 기울인다. 빛깔이 화려한 가구들 보다 아늑한 빛이 스민 탁자가 마음속에 깃든다. 질서정연한 백화점보다 사람냄새가 물씬거리는 오일장터가 좋다. 봉숭아 나팔꽃 채송화 맨드라미가 피어 있는 소박한 한옥을 그리워한다. 으리으리한 저택도 부럽지 않다. 진수성찬도 심드렁하다. 텃밭에서 막 따온 풋고추에 생된장을 찍어 술렁술렁 먹었던 어머니 표 밥상이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

봉숭아꽃이 피는 여름철에는 더욱 간절함에 꽃물을 들이고 싶다. 꽃물 속에는 모태의 그리움이 배어있다. 어머니가 보인다.

화려한 매니큐어로 쓱쓱 칠한 손톱이 바쁜 현실이라면 꽃물이 든 손톱에는 세상 때 묻지 않았던 유년의 순수가 살아 있다. 그 속에는 긴장감, 경쟁의식, 미움, 시기 질투가 아닌 맑고 잔잔한 샘물이 보인다. 샘물 속의 달을 보던 날이 먼 메아리처럼 울린다.

몇 해 전부터 짙어진 그리움에 여름마다 손톱에 꽃물을 들이었다. 근데 아파트 주변에는 봉숭아꽃이 흔하지 않다. 어쩌다 작달막한 꽃나무가 몇 그루씩 보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함께 즐겨야할 꽃잎을 혼자 탐낼 수 없어 그냥 지나친다.

그러던 중 지인의 안내로 교외에 있는 J교수님의 밭 구경을 간 적이 있다. 밭의 초입에는 온통 희고 붉고 분홍색을 띤 봉숭아꽃 무리가 무희처럼 나란히 서 있었다. 장미도 아니고 칸나도 아닌 봉숭아꽃, 봉숭아꽃이었다. 꽃을 심은 그분의 가족들이 만개한 꽃잎처럼 환하게 웃고 서서 반겨주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찼다. 봉숭아물을 들여 주시던 어머니를 만난 듯 온몸이 환해지는 행복바이러스를 선물 받는 느낌으로 꽃잎을 땄다. 집에 와서 봉숭아 봉지를 풀어놓으니 거실이 환해진다.

별빛이 총총하던 여름밤, 달빛 가득 찬 툇마루나, 평상에 앉아 베짱이, 쓰르라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옥수수, 감자를 먹으면서 오순도순 꽃물들이던 식구들이 떠올라 꽃과 속삭인다.

봉숭아꽃물이 든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에는 어느새 추억의 달이 뜬다. 허허로움을 느낄 때, 이웃끼리 소원할 때, 사라져간 고향이 그리울 때, 보름달처럼 안온하게 감싸주는 아릿한 곡선을 손톱에서 느낀다.

겨울이 녹아들고 새싹이 돋을즈음 베란다에 봉숭아꽃을 심어야겠다. 햇빛이 아닌 달빛으로 물드는 곡선의 향기가 집안을 은은하게 채울 것이다.

달빛이 봉숭아꽃물이 되어 손톱에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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