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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동백의 기별 / 허상문

부흐고비 2021. 4. 27. 08:42

동백에 대한 기억은 비장하고 엄숙하다

어느 겨울날 남도 땅 선운사를 방문했을 때, 절 뒤편에서 하얀 눈 위에 선혈처럼 뚝뚝 떨어진 동백꽃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래전 꽃 한번 피우지 못하고 떠난 시인의 각혈이 생각났다. 평생 직업다운 직업 한번 가져보지 못한 채 오직 한 편의 좋은 시를 남기기 위해 몸부림치다 간 친구였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어린 아들이 지켜보던 장례식 날, 마지막 생명의 햇살은 한 송이 붉은 동백꽃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 대정벌에 귀양 와서 위리안치 되었을 때, 친구였던 초의선사가 그를 방문해서 아내의 타계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때 추사적거지 오두막의 새하얀 눈밭에는 동백꽃이 아내의 붉은 눈물같이 뿌려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추사는 아내에 대한 가없는 사랑과 시대의 아픔을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의 어느 꽃인들 나름의 강렬함과 비장함을 지니지 않을까만 그중에서도 동백은 남다르다. 동백은 한겨울에도 꽃이 피기 때문에 흔히 청렴하고 절개 높은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비유된다. 옛 선비들은 동백을 매화와 함께 한겨울에 만날 수 있는 가까운 친구라도 치켜세우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세한삼우’로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꼽으면서도 동백은 제외해버린다. 아무리 소나무와 대나무가 추운 겨울에도 푸름을 지녀 절개를 지킨다고 하지만 그들이 혹한에 꽃을 피울 수는 없다. 동백은 이른 봄이 아닌 한겨울에도 꽃을 피움으로써 매화보다도 더 고결한 기개를 보여준다.

지금도 출렁이는 남쪽 바라 어딘가에는 동백이 외로이 서있다. 동백에게는 목련과 같은 우아한 자태도 장미와 같은 아름다운 향기도 없다. 모름지기 꽃은 자태가 고와야 하고 향기가 짙어야 하는 줄 알았다. 동백은 헤픈 향기로 지나가는 나그네를 유혹하지도 않고, 보는 이가 없어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꼿꼿이 홀로 서 있다. 자신의 샛노란 꽃가루를 퍼뜨리기 위해 허투루 벌과 나비를 부리지도 않고 오로지 동박새에게만 꽃가루를 준다. 칼날 같은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짠물을 온통 뒤집어쓰며 벌벌 떨고 있지만 함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다.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 오직 한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동백의 꽃말을 ‘나는 그대만을 사랑한다’라고 지은 것인지 모른다.

한겨울의 거친 바닷바람과 백설 속에서 붉디붉은 꽃을 가득 매단 채 동백은 인고와 기다림이 무엇인 보여준다. 동백은 오지 않을 사람을 그리워하며 기다린다. 겨울 바닷가에 동백마저 없다면 얼마나 삭막하고 황량할 것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울다 지쳐 빨갛게 멍든 동백꽃, 그 애련에 피멍이 들어 있다. 그 슬픈 사랑을 감추겠다는 듯이 윤기 나는 도톰한 녹색의 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다. 동백은 슬픔을 인고로 받아들이며 무언의 세월을 살아간다. 그렇지만 동백아, 너무 서러워 마라. 인생은 잠시 꾸는 슬픈 꿈과 같더라. 그리움과 기다림은 꿈속에서도 쉽사리 잡히지 않더라. 나는 동백을 바라보면서 삶에서 인고가 무엇인지 배웠다.

바다 한구석에 앉아 세한의 설중 동백을 바라보다가 문득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낯설고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백만 그런가. 나는 그렇지 않은가. 이 세상의 한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은 비루하면서도 힘겨운 일이다. 이 시리고 비린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마치 어시장의 고무다라이 속에서 누군가의 손에 잡혀 생선시장 바닥에 던져지는 생선처럼 비참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꾸역꾸역 한 끼의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섹스를 한다. 거친 바다에서 낡은 돛배 같은 육신을 이끌고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야 한다. 아무리 봐도 동백이 나의 삶보다 외롭고 쓸쓸하지만 더 높고 경건하다.

동백은 살아있을 때도 아름답지만 죽을 때도 비장한 종말을 보여준다. 동백꽃은 한창 피었을 때와 떨어질 때 두 번 보아야 참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상태에서 목이 뚝 부러지며 자신의 몸을 던져 죽는 동백꽃의 모습을 보며 마치 스스로 피를 토하며 투신하는 듯하다. 소녀처럼 수줍은 매와나 오랜 친구같이 환하데 다가오는 진달래와 달리 동백에서는 한 많고 굴곡진 삶을 살아온 여인의 깊은 비애가 묻어난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저리 처절히 산화하는가. 아무리 찬란한 생명도 위대한 권력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듯 구차한 변명도 아쉬운 미련도 남기지 않는다.

탄생에서 죽는 순간까지의 분연함, 그리도 힘들게 피어난 꽃이 질 때는 잠깐이다. 태어나서 삶의 절정까지 이르렀다 떨어지는 붉은 동백의 모습은 잠깐 왔다 사라지는 우리네 인생과 다르지 않다. 인생의 수많은 환희와 비애는 한 송이 꽃처럼 피었다 시든다. 꽃이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머지않아 우리도 저렇게 시들고 덧없이 스러져 갈 것이다. 지상의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고 만다. 모든 인간 모든 사물 모든 꽃도 소멸하고 만다. 봄날에 그리도 찬란하게 피던 꽃들이 한겨울이 되면 어느새 다 시들어 버리고 그 위로 눈이 내린다. 꽃들은 어찌 저리 눈부신 아픔으로 지는가. 한 생명이 탄생해서 소멸하는 행로는 저렇게 충만하고 경건한 것인가.

사랑도 그렇지 않던가. 태어나 살다가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은 한 송이 꽃이 피고 지는 것과 같다. 꽃은 피었다 지고 누군가는 사랑하다 헤어진다. 그 사랑은 반복된다. 끝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시작을 갈망하고 헤어짐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와 만남을 원한다. 어차피 사랑은 날아왔다 날아가는 파랑새가 아니던가. 지금 이 순간 사랑하거나 헤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의 등을 두드려 주는 것, 그들과 따뜻하게 손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의 길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삶이 어렵고 힘든 것은 누군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데 있다. 빛과 어둠이, 바다와 육지가, 너와 내가 더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 나의 인생도 동백의 인생도 그런 식이었다. 만나고 이별하고 생각하고 잊어지고, 또 아픈 가슴으로 출렁이는 바닷가에 다시 빈손으로 우두커니 서 있으면서도.

어느 바닷가에서 동백이 피고 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나에게는 그것이 어디선가 한 생명이 태어났다 사라지거나, 누군가의 사랑이 피었다 졌다는 기별같이 들린다. 밤새 쓸쓸한 바닷가에서 피를 토하듯 툭툭 떨어지는 동백꽃의 모습이 나의 밤잠을 설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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