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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동행 / 반숙자

부흐고비 2021. 4. 30. 08:47

우리집 앞 조붓한 오솔길에는 양옆으로 미루나무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논둑쪽의 나무는 앙바도톰 하니 가지가 많고 건너편 실개천쪽 나무는 훤칠하니 키가 크다. 이 두 나무는 서로 마주 서서 동산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반기고 서산마루에 걸리는 햇살에 은발을 날리며 하루를 접는다. 나는 모를 심는 날,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새참이나 점심을 먹고 쉴 때마다 미루나무를 바라보며 서울에 사시는 시부모님을 생각한다.

작년 구월 시부모님은 김포 국제공항에서 동남아로 여행을 떠나셨다. 올해 69세이신 아버님과 73세의 어머님은 여행을 좋아하신 나머지 우리나라 명승고적은 모두 답사하고 이제는 외국 나들이로 가까운 동남아를 택하신 것이다.

아마빛 투피스로 곱게 단장하신 어머님의 주름 진 손을 꼬옥 쥐고 아버님은 마치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처럼 즐거워하셨다. 4년이나 연상인 어머님과 16세에 조혼하여 그 후 53년 동안을 살아오신 잉꼬부부이다. 그래그런지 두 분은 오누이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한 것이 일행의 눈길을 끌고도 남았다.

부모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면서 우리들은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었다. 두 분의 연세가 높아도 외국 나들이를 하실 만큼 건강하시다는 사실이고, 두 분이 동고동락 해로하시는 것이 그렇고 두 분 계심으로 해서 우리들 기쁘고 만족한 것이 그렇다. 그것은 편안하고 따뜻한 마음이고 한편으로 고맙고 자랑스럽기까지 한 마음이었다

행복한 모습의 부모님을 바라 뵈옵는 자식들의 마음이 이렇듯 흐뭇한데 하물며 부모님은 어떠하실까. 보다 근본적인 효란 자녀들인 우리가 합심하여 화평한 가정을 이룩하는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은 가난한 시골에서 논 두 마지기를 유산으로 받아 분가를 하였다. 혈기 왕성한 아버님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보리죽이 죽기보다 싫어서 모를 심어 놓고 도망치고 몇 개월 지난 뒤 돌아와 타작을 마치고 또 도망쳤다. 이러한 철부지 남편을 무던하게 참고 기다리며 힘든 일도 마다 않고 살림을 일구신 어머님은 6년만에 서울로 이사를 하셨다.

나는 어머님의 회고담을 들을 때마다 나이어린 남편을 하늘 같이 믿고 섬긴 부덕에 수없이 감탄한다. 또한 홀로 둔 아내를 생각하고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하신 아버님의 굳센 의지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버님은 일찍 고향을 떠난 탓에 고향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사신다.

선영을 가꾸시는 거며, 족보를 발간하시는 일이며, 늘 앞장서서 남은 여생을 거기에 바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이러한 부모님을 때때로 매보다 더 무서운 사랑으로 외며느리인 나를 채찍하신다. 고령이심에도 불구 하시고 며느리의 생일을 잊지 않고 생일 케이크 상자 속에 명심보감을 싸 넣어 보내시고 부족한 자식들의 못난 짓까지 열두 폭 치마 자락으로 다 감싸 품으신다.

삼 년 전에 아버님은 고향 선산에 당신 형님의 선영 옆에 두 분의 유택으로 신위지(神位地)를 마련하셨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어머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그것을 해야 장수하신다고 부득불 마련하셨다. 아버님의 속마음은 자식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이고 또한 두 분이 나란히 누워 쉬실 유택을 마음에 맞게 가꾸고자 하심일 것이다.

그때 나는 어머님께 예행연습이라는 말씀을 드렸다. 어머님은 그런 연습 그만두고 아버님 떠나시는 날에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것은 반 백 년을 함께 살아오신 두 분이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 영원한 계약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두 분이 어쩔 수 없는 하느님의 소관이지만 나는 어쩐지 숙연해 졌다. 위대한 예술품 앞에 섰을 때처럼 뭉클하고 퍼져오는 감동 같은 것이었다.

두 분은 두 분이 맞들고 계신 인생이란 화폭에 사랑과 믿음, 이해와 협조로 정말 멋지고 훌륭한 작품을 완성 시킨 것이다. 나는 어머님의 소원을 알고부터는 진정한 부부애란 저토록 함께 있자고 하는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지극한 열망임을 알고 두렵게 생각되었다.

두 분이 다정히 손잡고 떠나신 공항에서 아침에는 뒤쪽 작은 나무가 큰나무의 그림자를 온몸으로 받아 안고 저녁에는 큰 나무가 작은 나무의 그림자를 조용히 보듬고 서 있는 미루나무의 모습을 생각했다. 부부란 그렇게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 주며 오래 참고 기다리며 같이 커가는 두 그루이며 하나인 나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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