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화쟁百花和諍 / 박양근

입춘과 우수가 지나면 봄이 본격적으로 밀려온다. 천지사방에서 꽃송이들이 연이어 터지고 싱그러운 세엽細葉이 무성해지면 계절의 변화에 무딘 사람조차 한번쯤은 “봄이 왔네!” 하고 거든다. 그럴 쯤이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도 무색해진다. 대자연의 변신을 경이롭게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봄이 늦다고 불평하였던 자신의 투정을 쑥스러워한다. 인간의 가벼운 마음을 경고하려는 듯, 춘래불사춘의 의미도 봄이 아니라 간절히 기다리는 그 무엇이 오지 않을 때를 지칭하는 말로 바뀐다.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을 영춘화迎春化라고 부른다. 봄을 맞이하는 첫 꽃은 가늘디가는 줄기 하나에 긴 겨울을 몰아내려는 화등花燈을 내건다. 그래도 사람들은 꽃이 제때 피지 않는다거나 찔끔찔끔 핀다고 투정을 한다. ‘봄이 왜 안 오냐, 봄이 왜 늦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제비의 내방이 사라져버린 터에 ‘영춘일화인래백화개迎春一花引來百花開’라는 말만 남아있으니 봄꽃에 대한 벅찬 기대가 이해가 되긴 한다. 그래서 봄맞이꽃은 다른 꽃들에게 이제 피어나도 괜찮다고 일러주는 역할을 맡는다. 봄의 진격을 알려주는 전령사이고 나팔수인 만큼 사람들의 경탄과 존경을 받기 마련이다.

세상 만물의 등장과 퇴장에 순서가 있다. 인륜으로 말하면 장유유서이고, 생명체에 견주면 생로병사라 하겠다. 우주에도 천지창조와 블랙홀이 있다. 봄꽃도 순서에 맞추어 등장하는 것이 순리다. 만일 갯버들의 움이 돋지 않았는데 산수유가 성깔을 부리면 반칙을 하는 것이다. 붉디붉은 도화가 희디흰 매화보다 일찍 벙글지 않는 것도 그들의 세계에서 지켜지는 무언의 신사협정이다.

요즈음 그 법칙이 무너졌다. 예외 없는 규칙이 없다지만 봄꽃들이 기분 좋은 음모를 꾸민 듯이 한꺼번에 피어난다. 이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꽃들이 반란하네, 발광하네 하며, 걱정 반 경탄 반의 말을 내던진다. 이유가 무엇이든 요즘의 봄날에 한껏 꽃향기를 즐길 수 있어 고맙다. 산수유 한 줄기, 목련 한 송이······. 달빛 머금은 배꽃만 만나도 반가운 터에 한꺼번에 찾아와 주었다. 한반도가 온대에서 아열대로 변한 기후 탓도 있지만 새치기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는 불안감이 영춘화의 뒤를 이어 차례대로 피어나야 할 꽃들의 머릿속에 입력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꽃들의 폭동만큼 아름다운 풍경도 없다 싶다. 개나리가 봄기운을 느지막이 알려주는가 싶더니 산수유가 ‘나도’하며 일어선다. 섬진강 매화마을이 백야를 맞이한다는 소식이 잦아들기도 전에 늙은 벚나무 줄기에 연분홍 꽃송이가 훈장처럼 달린다. 때맞추어 깔끔한 차림새로 서있는 목련이 흰 종을 울린다. 야트막한 산기슭에 숨어있던 진달래가 말간 가슴팍을 헤집는가 하는데 양지바른 비탈에선 배꽃 무리가 흰 이불을 펼친다. 복숭아 과수원에서 복사꽃이 추파를 날리고 조팝나무가 시골길을 따라 하얀 천 자락을 늘어뜨린다. 그런가 하면 외진 산길에서는 찔레꽃이 숨은 눈물을 흘리고 밤꽃이 요란을 떤다. 그렇게 올봄에 나는 꽃들의 동시출현을 가슴 아프도록 즐겼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가볍지 않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이란 말이 있다. 사상가들은 옛 중국 대륙이 혼란에 빠졌을 때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책을 두고 논란을 벌였다. 그들은 부국강병과 회맹정벌會盟征伐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면서 다른 주장을 배척하였다. 자신을 먼저 다스리는 것을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 한다면 백가쟁명은 천하를 움켜쥐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평화보다는 전쟁을, 화합보다는 논쟁을, 수용보다는 정쟁을 좇는다. 당연히 백가쟁명이 지닌 어감이 조용하지도 평화롭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수년 전부터 봄꽃들이 함께, 더불어, 사이좋게 핀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뭇 봄꽃들이 일심으로 화평한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그 광경을 들여다보면서 백화화쟁百花和諍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백화百花라는 뭍꽃과 화쟁和諍이라는 마음이 합친 것이다. 봄에 피는 꽃들이 백 가지가 넘으련만 나와 시선을 마주한 것은 기껏 십여 종류다. 가만히 헤아려보니 봄 나무만으로도 개나리, 목련, 산수유, 매화, 벚꽃, 진달래, 배꽃, 이팝나무, 복사꽃, 찔레가 떠오른다. 봄에 내가 본 꽃이 이 정도이지만 사철 둘러보면 백화百花가 아니라 천화千花, 만화萬花이다. 그 개개의 존재가 꽃꽃꽃, 말말말, 마음마음마음이다.

화쟁이라는 말이 새삼 귀하게 여겨지는 시절이다. 신라의 자장율사를 거쳐 원효대사가 집대성한 화쟁은 우리나라 불교의 기본 사상인 평등일심을 일컫는다. 신라의 불교 이론가들이 자신의 교리만 옳고 다른 이론들은 틀리다고 주장하였을 때 원효는 경전을 폭넓게 이해하면서 차별 없는 불법을 펼쳐냈다. 백가쟁명을 화쟁사상으로 바꾼 것이다.

꽃花은 ‘풀 초草’에 ‘될 화化’가 합친 말이다. 풀이 꽃으로 변하면서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봄꽃이 이루려는 화和는 무엇일까. 겨울 동안 꽁꽁 언 마음을 녹이고 웅크린 자세를 풀어 함께 살아가는 사상일 것이다. 꽃들을 지켜보면서 원효대사가 일으킨 불법을 새삼 생각해 본다.

봄을 맞이하여 도처에서 영춘화가 핀다. 꽃잎을 열어 말을 하건만 사람들은 개화의 속뜻을 쉬 알지 못한다. 매화가 맺혀도 마이동풍이고 벚꽃이 피어도 서로에게 냉랭하다. 배나무 줄기마다 하얀 꽃이 얹히건만 아직 등 돌리고 복사꽃이 피를 토하듯 외쳐도 서로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참다못한 꽃들이 거사를 일으켰다. 사람들의 속 좁을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화쟁 작전을 세웠다. 노랗고 희고 붉은 언어가 가지마다 피어있다.

꽃꽃꽃, 그 하나하나가 설법보다 귀한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