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누름돌 / 송종숙

부흐고비 2021. 5. 11. 22:00

제2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금상

장아찌를 담글 때마다 늘 아쉬운 게 누름돌이다. 마땅한 누름돌이 없어서다. 누금돌이란, 장아찌를 담글 때, 항아리 속 재료가 뜨지 못하게 맨 위에 얹어서 지그시 눌러주는 묵직한 돌덩이를 말한다. 대개, 채석장에서 깬 듯, 날 서고 반듯한 돌덩이 보다는 세월의 물살에 닳고 닳아 둥그스름하고 묵직하고 반들반들한, 그런 돌덩이를 누름돌로 쓴다. 양파나 깻잎 등, 해마다 장아찌를 한두 번 담는 것도 아닌데 나는 매번 장아찌 담글 때서야 누름돌을 챙기곤 한다. 생각해보니, 내가 평생토록 살림고수가 못 되는 이유가 바로 그런 부분이었지 싶다.

여름철에 오이지 담글 때는 반드시 누름돌로 눌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남쪽 출신이라서 서울내기들처럼 오이지를 즐겨 담지 않는다. 서울사람들은 여름만 되면 갸름하고 날씬한 백다다기 오이를 접으로 사다가 짠물에 눌러두고 송송 썰어 시원한 물에 동글동글 띄워 물김치로 먹는다. 우리 남녘에선 그저, 삼복더위에, 입맛 없을 때, 절인 오이지를 얇게 썰어 꼭 짜서, 매운 풋고추서껀 불그스름히 무쳐먹는 게 고작이다.

누름돌 돌덩이는 대개 강변에 가야 많았다. 바닷가 몽돌이 딱 제격인데, 반출이 금지됐으니 그림의 떡이고, 하천정비 탓인가, 두리넓적한 돌덩이가 뒹굴던 강가의 자갈밭도 어언 사라졌다. 어느 돌덩이가 항아리 뼘에 맞을까, 반들반들 야무진 돌덩이는 어디 있나, 빨래하러 간 김에 뒷짐 지고 갸웃거리며 어슬렁어슬렁 강변을 훑고 다니던 때가 까마득하다. 장마 뒤 냇가의 돌서덜에서, 큰 물살에 밀려 나온 그 중, 동실 토실한 돌덩이를 끼고 와 언제까지나 장독대에 두고 장아찌 박을 때마다 누름돌로 썼건마는.

누금돌이 어찌 장아찌 담글 때만 필요하랴? 사실, 우리네 삶에서도 누름돌 같은 묵직한 존재는 분명, 필요한 것 같다. 우리들의 허황한 일상에선 너도나도 자아 없이 휩쓸려 부화뇌동하게 되는데, 그렇게 분별없는 혼돈 속에서도 차분한 자제력이 되는 이성적 존재가 바로 누름돌의 역할이지 않을까?

나는 이따금 누름돌의 뚝심 같은 확고한 존재가 그립다. 삶의 줄기를 똑바로 잡아주고 서슴없이 바른 길로 이끌어줄 신뢰 넘치는, 그런 중후한 인격의 어른이 아쉽다. 요즘엔 그런 존경스런 어른의 따끔한 가르침이 없다. 무지하고, 험한 반발이 두려워 보신과 체념으로 물러서는 비겁한 어른세대들 뿐이고, 현실적으로 눈앞의 이익에 약해져서 원칙도 변칙이 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누름돌의 위력을 확실히 경험한 적이 있다. 내가 초등생이던 6·25 동란, 바로 9·28 수복 직후였다. 인민군들이 B29 미군기에 밀려 후퇴하던 때, 우리 동네에도 코쟁이 미군들이 들이닥쳤다. 흥분한 동네 사람들이 태극기를 쳐들고 환경하러 나갔다. 소문을 듣고 황망히 들어오신 어머니도 깊이 감춰둔 태극기를 찾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말렸다. 좀 기다려보자 하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콩 볶는 듯한 따발총 소리가 들리고, 참으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미군은 우리 동네를 잠시 스쳐만 지나갔고 그들이 떠난 후, 근처 산에서 되돌아온 인민군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간 동네사람들을 강둑에 세워놓고 모조리 총살해버린 것이다. 그 참혹한 날, 어머니의 흥분을 눌러준 아버지의 만류는 하마터면 잃은 번한, 우리 가족의 소중한 목숨을 지켜준 크나큰 누름돌이었다.

지금 우리 집에서는 남편이 또한 그런 누름돌일 것이다. 가족이란 배를 띄운 인생 항해에서 그는 온 힘을 다해 단단하게 키를 붙들고 출렁이는 뱃전의 중심을 잡고 있는 묵직한 닻이다. 가장이란 자리는 참으로 막중한 누름돌인 것이다.

평생토록 남이 모르는 누름돌도 있다. 여인들 가슴 속에 박힌 오래된 누름돌이다. 늘 자신보다도 엄마의 몫, 아내의 몫으로 살기에,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스스로 짓누르고 사는 누름돌이다. 못난 자존심처럼 세월의 풍상에 은결들은 맘을 누름돌로 누르고 산다.

인생에선 한 줄의 잠언도 고매한 선인들의 발자취도 자신을 돌아보게 한 누름돌이 되곤 한다. 그동안 나는 평범한 일상의 고마움도 모르고 버거워했다. 그러나 때때로 아이들의 말똥말똥한 눈망울을 보면 흠칫 내가 그들의 누름돌이어야 함을 깨닫는다. 또한 내 아이들의 내 인생의 가장 큰 무게, 나의 누름돌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기본을 지키며 원칙대로 사는 것은 힘 드는 일이기는 하다. 나는 갈수록 꾀가 나는지 그저 뻔한 살림살이에도 뭐, 수월한 것이 없나 살피게 된다. 하다못해 누름돌도 맞춤한 게 보이지 않으면 대충 손쉬운 나무젓가락을 적당히 질러 넣고 그 위에 벽돌조각을 비닐로 싸서 올려놓기도 한다. 참으로 볼품없게 거춤거춤 하는 살림살이다. 만일 누름돌이 제대로 골고루 눌러지지 않으며 장아찌 재료는 옆구리로 불거져 나오고 곰팡이도 슬 것이다. 대개 항아리 전두리는 딱 맞춤한 돌이 들어가기 어렵다. 자연히 속에선 빈자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돌이 채우지 못한 나머지 부분은 댓가지로 스크럼 짜 누르거나 군색한 대로 나처럼 만만한 나무젓가락이라도 눌러 주위를 단속해주는 것이다. 판판하게 균형을 잡기 위한 것이다.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균형과 조화로움이 잘 이뤄진 삶을 말할 것이다. 그것은 누름돌 주위를 고루고루 단속하는 것처럼 여러모로 빈틈없는 배려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주부의 소임 역시 바로 그런 오묘한 조화를 위한 누름돌의 덕목이 아닐까? 든든한 누름돌 밑에서 장아찌가 제대로 익듯이, 가정도 사회도 부실한 누름돌 아래서는 건강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시절, 부모님의 잔소리도 선생님의 훈도도 모두가 우리를 보살피고 다독이던 누름돌이었는데, 이제는 다만 회환이고 그리움일 뿐이다.

모르는 사이, 우리는 서로의 누름돌아래 살고 있지 않았을까?

자꾸만 어긋나고 비뚤어지는 세상에 너와 나는 서로서로 굄돌이 되어 의지하고 살아왔을 거다. 서로에게 따뜻한 관심의 누름돌로 다독거리며 사랑했기에 그동안 우리가 안락한 삶을 이루지 않았을까?

세상은 점점 각박하고 한심해진다. 암울한 사회분위기에 삶의 터전은 갈수록 불안하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 속일수록 서로의 힘은 더욱 필요하리라.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가 의지하고 사는 공생의 인연들이다. 그러니 하찮은 존재끼리라도 서로에게는 묵직한 믿음으로 피차간 균형이 되고 조화가 되어줘야 하리라.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각별하고 소중한 누름돌 같은 존재라고.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협상 / 최장순  (0) 2021.05.12
당목 / 조미정  (0) 2021.05.11
도대불에게 길을 묻다 / 양태순  (0) 2021.05.11
송이의 사랑 / 박월수  (0) 2021.05.11
아버지의 바다 / 허상문  (0) 2021.05.11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