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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이별의 방식 / 전미란

부흐고비 2021. 5. 20. 07:01

Con sentimento
(감정을 갖고)

피아노를 팔았다. 아니 버렸다는 말이 더 맞다. 거실과 부엌 사이,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에도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가 먼저 나를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상처입고 웅크리고 있는 짐승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저 검고 흰 조각들이 맞물린 가구에 불과했다. 피아노를 돈으로 환산하고 난 후, 어쩌면 이토록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돌부리에 자꾸 걸려 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Capriccioso
(마음 내키는 대로)

피아노가 나에게 왔을 때, 나는 처녀였다. 형식이 없는 자유로운 재즈에 빠져 지내다 혼수로 폼나게 가져왔지만 결혼생활은 처녀 때 배운 재즈적인 것과 무관했다. 남편과의 불협화음은 똑같은 마디에서 자꾸 걸렸다. 서로 스타카토처럼 뚝뚝 끊어 감정을 표현했고 크레센도로 들볶았다. 음은 같지만 라의 플랫과 솔의 샵을 누를 때 마음가짐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젊은 새댁은 몰랐다. 주어진 악보를 읽는 일도 버거웠고 품을 여유도 없었다. 산다는 것이 벙어리장갑을 끼고 건반을 치는 것 같았다.

Tranquillo
(조용하게 쉿!)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는 불협화음의 세계. 말문이 막히게 다투고 나면 피아노 곁으로 다가갔다. 한밤중이라도 뚜껑을 열면 하얀 이를 드러내놓고 웃는 사람처럼 '괜찮아, 괜찮아, 연습하면 다 좋아질 거야' 하고 길게 웃어주었다. 그 치아 사이로 격정을 조율했다. 피아노 의자에 앉으면 페달을 밟아 소리부터 죽였다.

큰소리가 이웃집에 들리지 않도록 반쯤 입을 막은 채 건반을 눌렀다. 상대를 사랑한다면 마음이 버티는 한 오래도록 안단테, 안단테... 어느 날, 피아노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다. 피아노는 곡을 선택해 칠 때마다 내가 무슨 감정인지 잘 알아 채는 사람 같았다. 빠르되 거칠어지지 않게, 느리되 처지지 않게. 악상의 작은 마디와 도막들은 다음 마디로 연결을 고려하지 않는 마디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양팔은 마치 서로 다른 몸인 양 완전히 독립적이어야 했다. 견고한 시간의 마디를 건너기 위한 연습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반복적으로 자각하는 일이었다.

lacrimoso
(애처롭게)

피아노를 실어갈 일행이 도착했다. 그들은 짐승의 눈을 가리듯 검은 천으로 덮어씌우더니 밧줄로 동여매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그리곤 한 사람의 발소리처럼 굴러서 내가 모르는 곳으로 떠나갔다. 멀어져 가버린 피아노. 어쩌다 멀리 던진 공을 잃어버린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머문 자리에 기역자 귀퉁이만 댕그라니 남았다. 피아노는 어제보다 오늘을 잘 살고자 애쓸 때 함께했던 친구였다. 그는 분명 따뜻한 햇빛을 많이 받으며 자란 나무이지 않았을까. 살면서 모든 것을 보여주고 털어 놓아도 좋을 한 사람 쯤 있어야한다지만 나는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좋았다.

Affetuoso
(애정을 담아)

중고 상인 손으로 넘어가기 직전, 나는 갑자기 할 말이 생긴 사람처럼. 아니 마지막을 맞대해야 하는 사람처럼 뚜껑을 열어 피아노를 쳤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이 곡을 한때 얼마나 되풀이하며 연습했던가. 육중한 제 무게에 늙어가던 녹슨 몸이 뻑뻑한 소리를 내었다.

누군가를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가끔 공연장 무대에 놓여있는 피아노를 먼발치에서 바라볼 때면, 왜 그를 버렸는지. 굳이 그럴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밀어내버린 사람 같았다. 그렇지만 사람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일까.

사랑했으나 아름답게 보내주지 못한 사랑. 잘 가라. 그리고 같이 산다고 다 사랑일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나는 이제 익숙해지는 것을 못 견딜 뿐이야.

나의 이별 방식은 놓아주는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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