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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바람인형의 집 / 한경선

부흐고비 2021. 5. 21. 09:10

긴 담장을 따라 자잘한 바람결이 흐른다. 불그레한 황톳빛으로 물든 골목, 흙이 돌을 품고 돌은 흙을 고이며 시간의 소매 끝을 붙잡고 있다. 골목 첫들머리에 대문 없는 집이 보인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집을 기웃대다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는다. 덩실한 기와집이 인기척에도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있다.

해와 달도 지나쳐 버린 기둥과 마루는 검고 꺼칠하다. 그 옛날에는 댓돌이며 문살 어느 한구석 윤나지 않은 데가 있었으랴. 숨은 쉬지 않지만 정성 들여 지은 흔적이 보이는 집이다. 한때 열두대문 집이었다는 말이 구멍난 문짝 사이를 들락거리는데 하늘을 향해 살짝 들린 처마 끝에서 맑은 하늘이 파르르 떤다.

넓은 터에 열두 채 건물은 자취 없고 너덧 채만 듬성듬성 남아있다. 지체 높고 호방한 주인이 손님과 세상 안팎의 소식을 주고받는 목소리가 출렁거렸을 누마루에 볕 조각이 몇 앉았다. 삼면이 툭 틔어 바람을 들이고 사철 경치를 들여놓았던 사랑채, 주인의 기침 소리와 툇마루를 오가던 발걸음 소리는 먼지가 되어 앉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마루는 붉은 벽돌로 고막이 되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수련이라도 피워 올렸을 물 마른 연못엔 들풀만 앉았는데 담장 안쪽에 쓰지 않는 장독 몇 개에 발길이 머문다. 어떤 이가 손이 닳도록 닦았을 독, 많은 식솔들과 끊이지 않는 손님의 먹을거리를 장만하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갔을 장독대다. 열두대문집 장독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행주치마에 물마를 날 없었던 주인을 잃은 장독대 앞에 홍자단 열매만 실없이 붉다. 같은 집 안채에서, 사랑채에서, 부엌에서 다른 색깔로 제 세상을 살던 사람들이 떠난 고대광실이 주저앉은 바람풍선 인형을 담은 함지 같다.

춤을 춘다. 보아 주는 사람이 있든 없든 펄럭펄럭 신나게 춤을 춘다. 가로수 키만큼 커다란 몸을 긴 다리로 버티고 서서 양쪽 팔을 휘젓는다. 한 번씩 허리를 꺾었다 몸을 젖힌다. 올려 세운 머리카락, 검은색으로 반원을 그린 입은 웃고 있지만 무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귀가 없는 바람풍선 인형은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하루 종일 춤을 출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뜸하다. 가게 주인이 인형 앞세우고 문 앞을 살핀다. 음악 소리가 사람의 귀를 붙잡으면 풍선 인형은 사람의 눈을 잡아 가게 안으로 이끄는 것이 그의 임무다. 더운 날씨에도 땀을 흘리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바람이 관절인 그는 쉴 새 없이 움직여 지친 듯하다가도 금세 힘을 얻는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은 서늘하지만 사람의 발길을 사로잡으려는 열정은 뜨겁다.

아침에 둥근 플라스틱 함지 속에 구겨져 있던 인형을 바람이 일으켜 세웠다. 인형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고 기지개 켜듯이 술렁술렁 일어났다. 잠깐 새에 팽팽해진 인형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바람이 몸을 채우자 인형을 만들어 준 이가 입력해 준 동작을 하루 내 쉬지 않고 반복했다. 인형은 두 팔을 쭉쭉 뻗으며 열심히 춤을 추었다. 좀 더 힘을 쓰면 하늘이라도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들 말했다. 힘을 다해서 일어나 달리라고. 그러면 날 수 있다고, 하지만 몸을 굽히고 펴서 흔들어도 땅에 붙은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인형은 제가 날지 못하는 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죄절하지 않고 붙박인 채로 하루치 삶을 힘껏 살아냈다.

저녁이 되자 주인은 풍선 인형 스위치를 내렸다. 인형은 자신의 힘이 빠지는 줄 알아채기도 전에 스르르 풀썩 주저앉았다. 바람 빠진 인형은 몇 줌 안 되는 비닐이거나 천 조각일 뿐이었다. 풍선이 담긴 둥근 통만 가게문 앞에 덩그러니 있다.

날지 못하는 풍선 인형은 춤을 추면서 하늘을 향해 마음을 모았을 것이다. 그 가게에 손님이 많아서 주인이 함박웃음을 짓기를, 자기 앞을 지나가는 움직이는 풍선 같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고대광실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그 집에 살았을 때 마을에 굶는 사람이 없었다고, 가진 것 나누며 살다 갔다고 봄 햇살 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토담 사잇길에 맴돌고 있다. 바람풍선 인형도 고택에 살던 사람들도 제 몫의 춤 잘 추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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