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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누름돌 / 정성려

부흐고비 2021. 5. 24. 15:11

2018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그런대로 아담하고 반질반질한 항아리 속에서 노란빛이 어린 오이지를 꺼냈다. 펄펄 뛰는 오이들을 사뿐히 눌러 진정시켜주던 누름돌을 들어내니, 쪼글쪼글해진 오이들이 제 몸에서 빠져나간 물에 동동 뜬다. 항아리 속의 오이는 볕이 들지 않은 음지에만 있어야 하기에 조금은 서먹하지만, 누름돌 무게로 숨을 죽이며 제 몸속 물을 토해내고, 간기가 스며들면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숙성되어 짜릿하고도 오독거리는 맛을 냈다. 이렇게 숙성된 오이를 맛깔스럽게 썰어 참기름을 치고, 갖은 양념을 넣어 무치면 그야말로 침이 절로 돌며 식욕을 돋운다. 그래서 오이지는 여름철 내내 우리 집 밥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밑반찬으로 각광을 받는다.

오이지를 유독 우리 집 식구만 좋아해서는 아닐 것이다. 입맛이 없거나 시간에 쫓겨 바쁠 때는 찬물에 밥을 말아, 빠르고 간단하게 먹는 반찬으로 오이지가 제격이다. 아삭아삭 씹을 때마다 입안에서 나는 소리는 옆 사람까지도 입맛을 돋게 해주는 밥도둑이라 해야 맞겠다.

오랫동안 두고 먹을 수 있는 밑반찬이 어디 오이지뿐이겠는가. 깻잎이며 풋고추 등으로 장아찌를 담그자면 누름돌의 역할이 중요하다. 누름돌이 아니면 소금으로 간을 해서 물에 담아놓은 재료들이 동동 떠오른다. 그러면 숙성시키지 못해 제 맛을 낼 수가 없다. 이토록 깊은 맛을 나게 해주는 누름돌이야말로 단연코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지혜다.

음식솜씨가 좋은 집에서는 대물림한 누름돌 한 두 개쯤은 볼 수 있다. 우리 집에도 둥글 넓죽하고 반질반질한 모양의 크고 작은 누름돌이 여러 개 있다. 냇가에 갈 기회가 있을 때면 오이지나 장아찌 담을 때 좋겠다는 생각에 주워온 것들이다. 많은 비가 내려 큰물이 질 때면 물살에 떠밀려 이리저리 나뒹굴며 매끄럽게 갈아지고 널브러져 있던 돌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에게 선택되어 우리 집에 온 뒤, 그 쓰임새가 생기며 꼭 필요한 존재의 누름돌이 되었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온 가족이 다슬기 탕을 유난히 좋아했다. 물이 깨끗하고 넓은 냇가가 집 앞에 있어서 그랬을까?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면 할머니께서는 집 앞 냇가에 다슬기를 잡으러 자주 가셨다. 다슬기를 잡아 돌아오실 때는 둥글 넓죽한 예쁜 돌을 하나씩 안고 오셨다. 나와 동생은 다슬기를 잡으러 가는 할머니를 따라 냇가에 가기라도 하면 모래로 집을 짓고 자갈과 돌로 담을 쌓는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다. 예쁜 돌을 많이 주워 모아놓기도 했다. 할머니는 우리가 모아놓은 많은 돌중에서 제일 맘에 드는 것 하나만 골라 집으로 들고 오셨다. 그런데 그 돌이 누름돌이었던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어디에 사용하려는 것인지조차도 몰랐다. 우리는 할머니 주위를 깡충깡충 토끼마냥 뛰어다니며 일상적인 놀이로 즐기며 놀았다.

재료를 지그시 눌러 음식의 맛을 나게 하듯, 사람에게도 묵직한 누름돌이 필요하다. 딸을 출가시킨 지금 돌이켜 보니, 친정어머니는 묵직한 누름돌을 늘 가슴에 품고, 힘들고 어려웠던 삶을 누르고 살았던 것 같다. 아니, 나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 옛날 어머니들은 모두 그랬으리라.

그 옛날 여자이기에 학교를 모르고 살았으니 교과서에서 배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다. 오롯이 가정의 평화와 화목을 위해 당신 자신을 꾹꾹 누르고 희생하며, 어렵고 힘든 시대를 견디어 내셨다. 누름돌을 가슴에 안고 그 무게로 누르고 삭히며 살았던 것이다.

친정어머니는 내 삶의 지침이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나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면 항상 친정어머니가 생각난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환한 미소를 띤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묵묵히 참으며 지혜를 짜내어 기어코 극복하시던 진정한 승리의 모습으로 동그랗게 내 가슴에 떠오르며 누름돌 하나를 안겨주신다.

아버지께서는 암으로 투병하시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린 6남매, 그리고 많은 농사일까지 어머니의 몫으로 맡기고, 너무도 서운한 나이 60세에 무정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후 3년 뒤, 할머니도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기가 힘드셨던지, 기력을 잃고 시름시름 하시더니 유명을 달리하셨다. 결국 홀 며느리가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자식 6남매를 가르치며 살아야 했다. 할아버지도 90세가 되면서 서서히 치매가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힘든 상황에서도 할아버지는 치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그러는 거라며 나이 탓으로 돌렸다.

세월이 갈수록 자식과 손자들도 몰라보셨다. 치매를 앓는 할아버지를 모시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수발하느라 얼마나 힘이 부치셨을까? 그래도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당신의 멍에로 생각하고 자식들의 등불이 되어 주며,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셨다.

내가 역경에 처할 때마다 친정어머니의 삶을 떠올리면 힘들게 느껴지던 고통의 무게가 조금씩 가볍게 줄어든다. 게다가 이겨내야겠다는 용기까지 얻는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면서 장롱 속에 묻혀있던 효행상장을 발견했다. 각각 다른 단체에서 수상한 것으로 4개나 있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며 가문의 얼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자식들은 어머니께서 시장에 서너 번 다녀온 것쯤으로 아무렇지 않게 흘려버렸고, 의미도 크게 몰랐다. 자식이라면 부모님께 당연히 해야 한다는 도리로 생각했었다. 무심이 바로 무식이란 걸 이제야 알게 해주었다.

치매를 앓던 할아버지는 며느리가 농사일로 옆집에 잠시 들려야 하는 틈조차 주지 않았다. 하물며 마을단합대회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이토록 암울한 상황에서도 참고 견디며, 시집 온 후 50년을 넘게 시부모를 모시고 사셨던 친정어머니다. 할아버지께서 97세에 돌아가셨는데도, 두고두고 잘못했던 일만 생각난다며 슬퍼하시던 친정어머니의 모습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이기에 해냈으리라. 사람이 부대끼면서 미운 정과 고운 정이 든다던데, 우리 친정어머니는 할아버지와 고운 정만 들었을까?

그런데 난 그토록 지고하신 친정어머니를 닮지 않았나 보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얼마나 힘들어 했던가? 건강하실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일들이 중풍과 치매를 앓으면서 본의 아니게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시어머님을 끌어안고 펑펑 울기를 수도 없이 했었다. 막내인 우리 부부가 책임을 떠맡은 것 같아 가슴앓이를 많이 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것이 덕이 되었고, 딸자식들에게는 산교육이 되었으련만, 그때의 처지를 한탄하며 힘들어 했던 일이 부끄럽고 창피하기만 하다. 어찌 내게는 가슴을 누르고 삭혀주는 누름돌이 없었던가.

우리의 전통적 토속음식은 대체로 장시간 삭혀서 맛을 낸다. 시간이 흐르면서 곰삭아 깊은 맛이 들고 발효되어 양약보다 더 좋은 효능을 인정받지 않던가.

요즘 내게도 묵직한 누름돌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부터라도 감정을 꾹꾹 눌러 줄 수 있는 누름돌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겠다. 항아리 속의 시퍼런 오이를 지그시 눌러 삭혀서, 깊은 맛을 내어 오이지로 탄생시키는 것처럼, 진정한 좋은 사람의 향기를 숙성시켜주는 누름돌 하나쯤 가슴에 꼭꼭 품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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