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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특급 장학생 / 김덕남

부흐고비 2021. 5. 24. 15:12

점심이나 같이하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전화를 끊고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내가 지금 뭘 꺼내려 하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남편이 시원한 물 한 잔만 달라 한다. ‘그래 맞아, 물을 꺼내려 했지.’ 내일 친구와 점심 먹기로 했다며 물 잔을 건네는데, 태워다 줄 요량으로 어디서 만나느냐 묻는다. 아뿔싸! 식당 이름을 잊었다. 열두시인지, 열두시 반인지 그것마저도 헷갈린다. 바로 메모해 두지 않은 불찰이다.

수년 전, 머리가 몹시 아파 서울 큰 병원에서 사진을 찍은 일이 있다. 뇌 말초 혈관이 미세하다며 예방 차원으로 혈류 개선 약을 먹어라 해서 지금까지 매일 콩 먹듯 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주말 장터에서 빌려 간 만 원을, 한 달이 넘도록 까맣게 잊고 있는 옆집 여자를 볼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치사했지만 내 정신건강을 위해 결국 내 입으로 받아 냈다. “어머머 나 좀 봐, 나 좀 봐.”를 연발하던 여자는, 나보다 나이도 적은데 치매 어쩌고 했다.

전화기가 보이지 않는다. 아까 친구와 통화하고 어디에 두었는지 못 찾겠다. 완전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일부러 느긋한 척 했는데 벌써 남편이 자기 전화기에 내 번호를 찍고 있다. 희미한 벨 소리가 나는 것 같아 조리 대 가까이에 귀를 쫑긋해 본다. 수색대처럼 전화기를 들고 이리저리 탐지하던 남편이 냉장고 문을 열자 내 전화기가 울음을 터뜨린다.

뇌 건강에 문제가 있지 않나 은근히 걱정되던 날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며 전문의가 치매에 관한 방송을 했다. 잠시 잊었던 기억을 다시 알아차리면 그것은 건망증이고 잊은 것 자체를 잊고 있는 것이 치매라 정의했다. 치매 검진을 한번 받아볼까 싶어 슬쩍 꺼낸 말에 내 맘 상할까 봐 말을 아꼈다던 남편이 크게 화답한다.

[예쁜 치매] 라는 마음 아픈 사연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라며 딸을 볼 때마다 몇 번이고 공손히 인사를 한다는 치매 노인의 이야기다. 공격적이거나, 대변을 벽에 바르는 일이나 가출을 일삼으며 가족을 힘들게 하는 치매에 비하면, 어린애 같은 그 노인은 정말 예쁜 치매이지 않느냐 라는 내 말에 “사랑하는 가족의 정도 몰라보고 우두커니가 된 인생 자체가 이미 비참한 일인데, 예쁘고 미운 치매가 어디 있느냐”며 남편이 내 조기 진단을 밀어붙인다.

머리 촬영을 마치고 면접 테스트를 위해 검사원 앞에 앉았다. ‘사는 곳이 어디냐 ?’ ‘지금이 무슨 계절이냐?’ ‘세 시 반을 나타내는 시계를 그려보라’는 등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내 자존심이 꿈틀댔다. 무식한 할머니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 영 유쾌하지 않아 건방을 떨었는지, 분침을 정확히 그려야 한다며 주의를 준다.

시계를 그리기 전 읽어준 ‘스무 개의 단어들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라’ 한다. 그게 문제일 줄 알았더라면 학창시절에 시험 치던 요령으로 신경 써서 외워둘 것을. 다 생각 날 듯한 몇 분 전의 기억이 반 토막 난다. 코웃음 칠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슬슬 느껴간다. 잠깐 보여 주던 복잡한 도형을 기억해 그려 보란다. ‘큰 사다리꼴 그림 속의 삼각형이 원안에 있었던가? 원 밖에 있었던가?’ ‘그 밑에 줄이 세 개였던가, 네 개였던가?’ 헷갈린다. 만만치 않다. 이번엔 ‘불러준 첫 글자로 시작되는 낱말을 죽 써 보라’ 한다. 욕심이 앞서 마음이 급해지더니, 그 흔한 단어들이 갑자기 콱 막힌다. 당황스럽다. 이어서 색깔을 혼돈하게 써놓은 여러 단어들을 속독하라며 초침을 잰다. 그것도 시험이라고 자꾸 손에 땀이 났다. 산술 문제까지 마치고 한 시간 정도 걸린다던 검사는 이십 분 만에 끝났다.

대기하고 있던 남편을 불러들여, 나는 환자의 자격으로 앉아 있고 남편은 증인이 되었다. ‘사모님이 해주는 반찬이 요즘 간이 짜다든가, 음식 솜씨가 예전만 못해지지 않았느냐?’ 하고 묻는다. “아니요. 요즘 더 맛있게 요리 하고 실력도 훨씬 늘었다’고 남편이 강하게 부정한다.

전에는 경험도 부족했지만, 직장에 매여 시간에 쫓기다 보니, 제대로 요리라고 할 수 있는 음식을 만들지 못했다. 밀린 채소들이 냉장고 안에서 썩어 버리는 일이 허다했으니 살림점수를 후하게 주었을 리 없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만족스럽다는 대답이어 흐뭇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내분이 요즘 물건을 어디에 두고 못 찾거나 기억이 깜빡하는 일이 있느냐”고 묻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네”라고 힘주어 대답한다.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앉혀놓고 맹한 내 치부를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한다. 검사관에게 고자질하느라 신이 났다.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 편이야 ?’ 묘한 기분이 엉키며 점점 더 불쾌해진다. 듣고만 있자니, 나를 벽에다 뭐 바를 사람처럼 몰고 간다.

다음날 다시 병원을 찾았다. 모니터를 한참 살피던 담당 의사는 걱정했던 내 검사 결과를 남편 앞에서 시원스럽게 한 방으로 날렸다.

“부인은 특급 장학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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