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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초원의 말발굽 소리 / 항길신

부흐고비 2021. 5. 25. 13:42

‘몽골’이라고 발음하면 달그락 달그락 말발굽 소리가 나는 듯하다. 바람을 동경하며 떠도는 유목민의 유전자가 느껴져 친근하다. ‘몽고’라는 말에 익숙한 사람들은 ‘몽골’이라고 하면 발음을 잘못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몽고는 중국식 이름이고 정식 국명은 몽골(Mongolia)이다. 몽골의 어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천년의 영웅 ‘칭기스칸’을 배출한 부족 이름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한자의 蒙(입을 몽) 자가 어리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거기에 古(옛 고) 자가 붙어 부정적인 말이 되기 때문에 몽골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몽골과 중국은 4천 8백 킬로미터의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역사적으로 충돌이 잦았다. 만리장성이 태어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몽골 사람들은 중국을 싫어한다. 중국이 겉으로는 몽골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자기네 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의 일부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와 반대로 몽골 사람들은 러시아는 싫어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체제 시절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서도 비교적 관대하다. 러시아는 몽골을 자기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중국과 러시아 강대국 사이에 있는 완충 국가라고 보기 때문이다.

국토면적 156만 평방 킬로에 사막과 초원 각각 40%, 기타 산림 등으로 되어 있다. 가축의 방목으로 인해 초원은 해마다 조금씩 줄어들고 사막은 늘어가고 있다. 인구 300여만 명에 말이 350여만 마리로 말의 숫자가 더 많다. 바람의 목소리와 말발굽 소리는 초원에서 자라고 새의 고단한 깃털은 사막에서 흩날리고 있다. 바람, 말발굽 소리, 새처럼 떠도는 피의 유전자가 몽골에는 있다. 지금도 시골에서는 말이 주요 교통수단이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걷기 시작할 때부터 말타기에 길들여진다. 말타기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유목민의 피를 새긴다는 것. 몸 안에 바람을 동경하는 유전자가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초원에 살면서 가축의 먹이를 찾아 1년에 두세 차례 이동한다. 이러한 유목 생활 때문에 그들의 집은 이동식 천막(게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막집을 해체하여 다시 짓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3-4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들의 초원 생활 중 가장 힘든 것은 겨울나기이다. 천막이 양모 등 보온 원료로 되어 있고 게르 중앙에 난로를 설치해 해결한다. 울란바타르(Ulaanbaatar)는 세계의 수도 중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겨울의 평균 기온이 영하 20도 내외이다. 산간지역은 영하 40도 아래로 내려갈 때도 있다. 주식은 육류와 감자다. 그들은 늦가을에 도축해서 저장해 두고 겨울에 먹는다. 우리의 김장 김치와 같은 식이다.

내가 이 나라에 한국 대사로 간 것은 1997년 4월이었다. 유럽지역 공관장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유럽은 이미 몇 차례 거쳤기 때문에 한 번도 근무해본 적이 없는 아시아 지역 그것도 서울에서 멀지 않은 몽골을 택했다. 공무원 중에서도 외교관은 유목민의 피가 가장 많이 흐르고 있다. 근무 기간이 끝나 근무지를 옮겨야 하는 건기가 찾아오면 나는 유목민처럼 게르와 같은 여행 가방을 챙겨들고 떠난다. 몽골은 또한 우리나라와 고려 시대에 많은 교류가 있었던 나라이며 칭기스칸이 태어났던 나라로서 호기심도 작동했다. 몽골 사람들은 우리와 생김새가 많이 닮았다. 몽골반점이란 게 있고 사고방식도 비슷하다. 몽골에서 수년을 생활한 나도 그들이 한국 사람들과 섞여 있으면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좋아한다. 인종적으로 몽골리안이라고 하면서 현재 남아 있는 몽골리안 중에서는 한국 사람이 제일 똑똑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 일하는데 어려움은 별로 없었다. 그러잖아도 좋아하는데 한국이 경제원조까지 주고 있어서 그 영향도 있었다. 한 가지 불편했던 것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점이었다. 소련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어는 잘하는데 영어는 안 통했다. 민주화 이후 러시아어 자리를 영어가 차지하여 이제 젊은 세대들은 영어가 통한다. 현지인과의 대화는 항상 통역사의 도움을 받았다.

유럽 통합과 소련의 해체를 몰고 온 민주 자유화의 거센 파도는 중앙아시아까지 덮쳐 몽골도 민주화되었다. 몽골은 북한을 국가로 승인한 세 번째 국가였을 정도로 북한과 긴밀한 관계였다. 중국과 소련 외에 김일성이 방문한 나라가 몽골이었다. 몽골이 우리 대한민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을 때 북한은 항의 표시로 자국 대사를 소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을 더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으로부터는 기대할 것이 없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일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생활 여건이 안 좋다 보니 사생활 면에서는 불편이 있었다. 겨울이 길고 봄여름이 짧은 데다 교통 인프라가 열악해서 주말에 시간 보내기가 따분했다. 건강과 여가를 즐기기 위해 말타기를 배우기로 했다. 내 안의 몽골리안 몸속에서 떠돌았던 유목민의 유전자를 기억해내고 싶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귀를 댄 채 잠이 든다는 유목민의 피를 찾고 싶었다. 승마는 내가 젊을 때부터 해보고 싶었던 꿈의 스포츠였다. 뉴질랜드에 있을 때 배우려고 마음먹었다면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 때는 여건이 좋은 골프에 투자하느라고 못했다. 이제 세월이라는 나이테도 늘어가는데 말의 나라에 와서 승마를 못 배운다면 더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골프 등 다른 운동도 할 만한 것이 마땅치가 않았다. 승마 학교가 없어서 말을 사육하는 농부를 찾아갔다. 시간당 사례비를 주고 그가 자기 말을 타고서 내 말을 이끄는 방식을 이용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나이 들어 순해진 10살 정도의 말로 시작했다. 잘못해서 낙마하면 전치 3개월의 부상을 입기 십상이다. 말은 영리하면서도 겁이 많은 동물이다. 잘 길들여진 말도 놀래서 튀면 제어하기가 어렵다. 그럭저럭 부상 없이 달리기까지 배워서 여가를 즐길 수 있었다. 나도 바람을 동경하는 유목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바람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 시작했다.

일요일은 주로 한인 교회에서 보냈다. 예수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방 여행도 쉽지 않고 교회에 나가면 교민들도 만날 수 있어서 업무 수행에도 도움이 되었다. 목사, 장로는 물론 신도들도 대부분 선교사로 온 분들이라서 분위기도 좋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교회 가는 것이 즐거웠다. 신앙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타이타닉’이 내 인생 여정에 변곡점을 그려 주었다. 배가 침몰하면서 승객들이 구명보트를 먼저 타려고 아수라장이 된 장면, 갑판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내주를 가까이’ 찬송가를 연주하면서 의연하게 가라앉는 장면이 비교되었다. 신앙의 위력이 머리 속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내가 몽골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초원에 1999년 봄 까치 한 마리가 서울에서 큰 뉴스를 물고 왔다. 김대중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일정에 몽골이 포함된다는 소식이었다. 국가원수의 방문은 해외 공관장으로서는 뭣보다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또한 짊어져야 할 책임도 크다. 15년 전에 뉴질랜드에 있을 때 대통령 방문행사를 준비했던 경험이 있으나 그때는 공관 직원의 일원으로서 참여한 것이고 이번에는 공관장의 위치에서 한다는 점이 큰 차이다. 사회 인프라가 열악한 환경에서 큰 행사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었다. 울란바타르 공항은 과거에 보잉 747 항공기가 한 번도 착륙한 적이 없는 공항이었다. 활주로의 길이가 짧았고 양방향 이착륙이 아니고 한방향 뿐이었다. 고도의 착륙 기술이 요구되며 시험비행이 필요했다. 이런 문제는 물론 전문가들이 해결할 일이지 내가 걱정해서 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공관장은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는 심적 부담을 느끼게 되는 자리다.

현지의 특수한 사정으로 행사 준비는 군사작전처럼 진행되었다. 공군에서 파일럿 장교가 파견되었고 몽골 당국의 협조하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몽골 정부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자국 방문을 열렬히 원하고 있었기 필요한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운명은 정해진 것일까. 뉴질랜드에서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국가원수 방문 행사를 몽골에 와서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공교롭게도 D-day 3일 전 서울에서 뜻밖의 소식이 들렸다. 행사가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른 아침 외교부 의전장으로부터 긴급 전화가 왔다.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이 취소될 것 같고 따라서 몽골도 그럴 것 같으니 당분간 혼자만 알고 직원들에겐 비밀로 하고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다. 러시아가 취소되면 몽골 한 나라만 방문할 수는 없다. 미국 등 주요 국가가 아니면 대통령은 한 나라만 방문하지는 않는다. 우리 장관이 러시아 외교부 장관과 전화로 협의할 예정이라고 했다. 하늘이 노랬다. 잔뜩 움켜쥐었던 모래알들이 순식간에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듯 허탈했다.

나뭇가지마다 봄의 피가 돌아 연둣빛이 열리는 줄 알았는데 꽁꽁 언 꽃샘추위가 불어닥친 듯했다. 애써 준비하고 있었는데, 닭 쫓던 개가 허탈하게 지붕만 쳐다보는 꼴이 되는 듯했다. 맥이 탁 풀리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멍하니 몇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그날 오후에 답답한 가슴이 뻥 뚤리는 소식이 날아왔다. 양국 장관 간에 협상이 잘 되어 방문 행사가 진행되도록 파란 불이 켜졌다는 내용이었다. 러시아 측 실무진의 실수로 생긴 해프닝으로 일단락되었다. 행사 준비는 다시 활기를 찾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아무리 준비를 완벽하게 했다 하더라도 최종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마무리를 잘 도와주어야 한다. 공항 인프라가 좋지 않아 대통령 전용기가 안전하게 착륙할지 걱정되었다. 악천후로 인해 항공기가 착륙할 수 없는 경우에 대비 대체공항을 마련해 두었다. 몽골에는 대체할 공항이 없어 베이징 공항으로 정했다. 착륙 시 뒤에서 부는 바람(배풍)이 15노트 이상이면 착륙 시도를 포기한다. 그날 날씨는 좋았다. 기상 돌변 사태만 없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이윽고 번쩍번쩍 빛나는 747 전용기가 위용을 드러내면서 활주로에 접근해 오고 있었다. 가슴 조이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순간으로 입력되어 있다. 바퀴가 활주로에 닫는 순간 나도 모르게 휴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행사의 반은 치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일정들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역사상 우리나라 대통령의 최초 몽골 방문이라는 한·몽 외교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가 기록된 것이다.

그 후 1년 이내에 일본 총리와 중국 주석이 연이어 몽골을 방문했다. 몽골 정부 관리들을 만나면 한국 대통령이 시작을 잘 해주셔서 인근 두 강대국의 정상들이 방문하게 되었다는 인사말을 듣곤 했다. 공관장이라는 직함으로 그 다리 역할을 했기에 몽골에서는 이를 계기로 봄꽃이 피기 시작했다. 봄꽃이 앉은 자리마다 향기가 돋아 몽골인들은 행복해 했다.

몽골은 나에게 낭만의 나라다. 바람을 동경하는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곳, 봄의 첫 장 같은 신앙을 선물해준 곳이다. 재임 중에 공적으로 우리나라 대통령의 역사적인 방문이 처음으로 있었던 나라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귀의하여 노후 생활에 영적 자양분을 공급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해보고 싶었던 승마도 배워서 즐겼다. 넓은 초원과 사막을 자동차로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것도 많았다. 말로만 들었던 신기루 현상도 직접 보았다.

말발굽 소리를 낳고 기르는 유목민의 눈길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드넓은 사막과 초원에서 얻은 체험은 감성이 메말라 가는 노년 생활에 한 줄기 시원한 실바람이 되고 있다.

 


 

▲ 항길신 수필가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과 졸업
• 주 몽골 대사, 울란바타르 대학교 교수
• 수필집: ‘초원의 발말굽 소리’
• 월간 문학공간 신인문학상 수필부문
• 가람 이병기 우리말시조문학상, 샘터수필문학상, 대한민국환경문화대상수필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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