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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양장 추령을 넘으니 내리막길 끝에 널따란 대지가 펼쳐진다. 신비로운 세상이 나타날 것처럼 순하고 연한 땅이다. 추수가 끝난 들녘은 느슨하고, 아직 남은 일이 있는지 손을 더하는 사람들의 동작은 촘촘하다. 메마른 하천엔 이름 없는 돌들이 호기롭게 누웠다. 저기 코앞이 바다인데 굴러갈 내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 이것이 인생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것, 그러기에 오늘만큼은 조금 게을러도 괜찮다.

‘끼익’,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또 지나칠 뻔했다. 여전한 곳을 왜 매번 가늠하지 못하는지. 그만큼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오늘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팔았던 것도 같다.

감은사 터에 왔다. 우습게도 무심히 지나던 곳에 답이 있었다. 건물은 무너지고 흔적만 남은, 급저 그런 곳을 찾아 헤매기를 몇해, 그간 무심하던 것이 극적으로 다가오기까지 실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경주에서 감은사로 넘어가는 길목에 불현듯 두 기의 탑이 나타났다. 야트막한 산과 들과 탑은, 별다른 구분 없이 서 있었다. 무심했던 곳이 기에 기억하는 것이라곤 그저 돌탑이 전부였다. 새로운 것도 없는, 저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 심연에 각인되는 순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격정이었다. 파도가 뒤집히는 것보다 거칠게 다가오는 땅, 험하게 나를 끌어들이는 매혹의 순간엔 마치 저곳엔 도깨비가 사는 듯했다. 시야를 빼앗고, 혼을 빼앗아 저들 마음대로 내 영혼을 놀아나게 했다.

감ㄹ은사는 황룡사의 장자로 신라 30대 임금인 문무왕(재위 661~681년)이 삼국을 통일하고, 불문으로 나라를 더욱 굳건하게 다지기 위해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무왕은 감은사가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절은 이듬해 신문왕에 의해 완공되었다. 창건 당시 문무왕이 지었던 사찰명은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아들 신문왕은 부왕의 업적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감은사는 죽은 왕의 능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능침사陵寢寺 같은 절이었다. 문무왕은 평소 승려 지의에게, 죽은 후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이라는 서원을 자주 남겼다. 용은 축생의 응보인데 어찌 왕이 짐승으로 태어나겠다고 하는지, 지의는 그저 민망했다. 문무왕이 말했다. “세간의 영호를 벌힌 지가 오래되었다. 축생으로라도 나라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외의 시신은 불태워진 뒤 동해의 대왕암大王巖에 뿌려졌다고 한다.

금당은 좀 유별나게 지었다. 바닥은 큰 돌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돌 위에 장대석을 마루 깔 듯 걸쳤다. 사용된 주춧돌을 보면 유별스러운 웅장함이 보인다. 금당 터 앞의 석재엔 태극무늬를 새겼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 같지만 쓸모를 알 수 없다. 위엄있고 엄숙한 절제가 곳곳에 스몄다.

동해와 감은사 사이엔 특별한 길이 있다. 바다와 절을 잇는 용혈이다. 동해에서 대종천을 타고, 절 아래 용담을 지나 금당 아래까지, 바람이 mf고 나는 허공의 길이다. 보이지 않는 길은 그렇게 현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모았다. 금당 아래 공간으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쉴 수 있도록 한 구조라고 해설사는 말했다. 신문왕이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곱자 만든 특별한 구조라는 그럴싸한 설명이 흥미롭다.

신라엔 재밌는 설회가 전해진다. 앞바다에 작은 산이 떠다니며 유유자적했다. 산에는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낮에는 들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기이하게 여긴 신하들이 왕에게 전했다. 신문옹이 직접 산에 들어가니 용이 된 문무욍이 나타났다. 동해의 신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신라에 보내는 것이니,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태평해 질 것이라 했다. 대나무를 베니 산은 거북이가 되어 사라졌고, 피리를 만들어 불었더니 적이 물러가고 질병이 없어지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홍수가 지면 비가 그치고 바람과 물결이 잦아들었다. 이 피리가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해설사가 말했다.

해설사의 말에 빠져들 무렵, 바람이 불었다. 절터 뒤편에서 대나무 부딪는 소리가 요란했다. 만파식적이라도 되고 싶은 요량인지, ‘떵, 떵, 땅’ 비슷하나 서로 다른 소리로 더욱 요란하게 부대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해설을 듣고 갔다. 한 쌍의 연인은 탑을 배경으로 수십 장의 사진을 찍었다. 노부부 내외는 더딘 걸음으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와 탑 아래서 한참 합장을 했다.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녀갔고, 수십 쌍의 연인이 사진을 찍고 갔으나 노부부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나처럼 홀로 절터를 찾은 사람들은 유유자적하며 이리저리 훑고, 풀밭을 뒤지고, 사방에서 탑을 바라보며 떠돌다가 가부좌를 틀었다. 오래 있을 요량이었다.

홀로 떠도는 사람들을 향해 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미친 사람들이라고. 그리고는 한마디 말을 나누거나, 잠시 잠깐의 눈빛도 건넨 적 없는 그들이 동지인 양 한없이 반가웠다. 굳이 말을 건네지 않아도 동질감의 어떤 느낌이 먼저 작용한다는 걸 서로 알아챘다. 말을 건네는 것이 도리어 서로에게 방해가 된다는 걸 알기에, 그들이 떠도는 방향에서 그저 멀어져 주는 예의를 갖췄다. 그들도 내게 그랬을 것이다. 서로 떨어지는 것, 떠도는 이유를 가진 자에 대한 서로의 예의였다. 그것이 동질이든 이질이든, 각자의 감정에 충실한 자들만 아는 멀어짐의 예의다.

왕실의 사찰이라고는 하나 금당과 강당, 희랑 터만 존재하는 걸 보면 감은사는 작은 암자 수준으로 보인다. 서쪽 귀퉁이에 작은 승방 터만 있을 뿐, 스님들이 머물렀을 법한 마땅한 공간이 없다. 왕실의 귀족들이 드나들었던 시찰답게 눈과 비를 피해 드나드는 희랑은 잘도 갖췄게지만, 사찰을 지키고 법문을 행하는 스님들을 배려하지 않은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하다. 그러나 어쩌겠나, 옛날은 이미 멀어졌고 이것도 남겨진 역사인 것을.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을 보니 1950년대까지만 해도 감은사 터 곳곳에 민가가 존재했다. 어쩌면 절이 지어지기 전에도 이곳은 사람의 터전이요, 절이 무너진 후에도 천년이 지나도록 사람이 기대어 살아온 삶의 터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깊은 산중 이름 없는 절터를 찾아가면 보인다. 자연을 밀어내고 들어선 절이 무너지고 나면 그곳엔 다시 땅의 주인들이 들어와 무성하곤 했다. 감은사는 분명 사람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신라를 거슬러 인간이 땅에 났을 때,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사적지로 지정되어 사람이 살 수 없지만, 바다에 빌붙어 먹고사는 것을 해결했을 인간은, 본능적으로 볕이 고르게 드는 평온한 터를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껏 많은 절터를 떠돌았다. 사람의 인적이 끊긴 깊은 산중에도, 마을 어귀 경작지에도, 산골짜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절터에 비하면 감은사터는 법등은 끊어졌어도 사람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간 감은사 터가 불편했다. 와글대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불편했고, 빈틈없이 연결된 역사의 이야기와 작위적으로 꾸민 절터의 곳곳이 흥미로우면서도 숨이 막혔다. 빈 공간에서 마음대로 풍경을 떠올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함부로 상상하고픈 습성이 감은사 터에서는 꽉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실체가 있으니 막히고, 형식이 있으니 구속되고, 경계가 뚜렷하니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해 한 해 야위어가는 느티나무는 또 어떤가. 듬직하고 늠름한 3층의 쌍탑 뒤에서, 하나의 배경이 되어 그간 무수히 많은 사진을 장식했을 나무다. 그렇게 무성하던 모습은 어쩌고, 저리도 팍팍하게 찌들어 가는 몰골로 섰는가. 거목의 자태를 부각하기 위해 쌓은 토단이 문제인가, 아니면 벌써 수명이 다해 쇠락하는 것일까. 탑과 어우러져 푸르고 아름답던 자태가 눈에 선하다.

가끔, 아주 가끔 탑이 아니라 나무를 보러 왔던 적이 있다. 웅장하게 선 석탑을 더 돋보이게 하는 건 느티나무였다. 깊은 산중에 마음껏 뿌리 뻗고, 마음껏 그늘을 키우는 나무로 발아했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더 육중하고 푸르렀을까. 낮엔 햇빛으로 광합성을 한다지만, 밤엔 인공의 불빛으로 잠을 재우지 않으니 어찌 견딘단 말인가. 어쩌다 왕실의 천년 사찰 터에 뿌리를 내려 저 고생을 하는지 가련하고 가엽다. 때로는 고요히 쉬고 싶을 테고, 때로는 ㄹ홀로 고독하고 싶었을 게다. 어쩌면 나처럼 유유자적하며 방방곡곡 인적 드문 곳 찾아다니며 맑은 바람, 깨끗한 물을 마시며 나이 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불현 듯’, ‘갑자기’, ‘불쑥’, 내 마음을 요동케 하거나 심연을 건드려 칠흑의 한밤중이나 새벽녘마저 달려오게 했던 것도 어쩌면 저 나무의 까닭 있는 부름이 아니었을까. 방대한 동해를 곁에 두고, 해풍을 견디며 나무는 그렇게 나를 불러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달려와 여기서 저녁을 맞거나 밤을 새우거나 아침을 맞았다. 그러나 무지하게도 탑만 보고 갔을 뿐, 한 번도 저 나무의 소리를 정죄하여 경청한 적 없다.

지난 여름, 장초가 우거졌던 풀밭을 기억한다. 무작정 돌고 돌아, 수십 수백 번, 처음처럼 거닐었다. 말없는 공간에 그냥 퍼질러 앉아 오래도록 바람을 맞거나, 탑을 보거나, 노을에 젖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내 눈에 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을 참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떠들어도 결코, 과하지 않다고 믿었다. 어리석었다.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돌아갔다.

어제 노을 질 무렵에도 나는 이곳에 있었다. 바람만 웅웅대던 허물어진 절터 한복판에서 동쪽과 서쪽에 서 있는 탑을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나보다 몇 곱절 키가 큰 탑은 동쪽과 서쪽에서 나를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갈수록 동쪽으로 길게 드리우던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다가 끝내 어둠과 섞여버렸다. 그림자는 석탑이나 느티나무나 나나 동등하게 길어졌고 동등하게 어둠과 섞였다. 아니 그림자의 그림자가 일어나, 온 허공을 까맣게 물들였다.

조명이 커졌다. 세간의 불빛들이 모여 일제히 탑을 향해 쏘아댔다. 탑은 이내 황금빛으로 빛났다. 대숲에도 고목에도 빛이 촘촘하게 쏟아졌다. 감은사 터에는 굳이 달이 뜨지 않아도 되겠다. 멀리, 동해에서도 탑은 눈부시게 빛날 것이다. 그래서인지 밤에도 경주와 감포를 오가는 사람들이 탑을 복 위해 왔다. 몇 컷의 사진을 찍고 절터를 거닐다가 가는 사람들, 감은사 터는 밤이 이슥하도록, 아니 밤이 새도록 환한 대낮이었으며 이적 또한 끊이지 않았다.

날벌레 와글대던 계절은 가고, 제법 쌀쌀하고 서글픈 늦가을 바람이 불었다. 옷깃을 여미다가 시린 손가락 끝에 ‘호’하고 입김을 불었다. 따뜻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시렸다. 그제야 오늘이 입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억새 풀어질 대로 풀어져 바람을 따라 날아갔다. 느티나무는 헐벗었다. 망한 절을 두고 떠나던 스님들처럼 나무도 곧 떠날 채비를 하는 것 같다. 억새가 미래를 꿈꾸며 가벼이 날아갔다면 망한 절을 두고 떠나던 승려들은, 저 거대하고 웅장한 탑을 두고 애석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떠났을 것이다. 언제고 다시 절이 일어서기를 염원하며 다시 돌아오마 기약했을 것이다. 쌍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을 승려들은 다들 어디서 해탈하셨을까. 여기서 발아해 한평생 절터를 지키며 늘어가는 저 느티나무는 감은사가 다시 일어서기를 기다리다 열반에 든 노승의 환생인 것만 같다.

다음 해, 그 다음 해, 바람은 다시 돌아와 나무를 흔들고, 대로는 바람도 이곳에 둥지를 틀고 산란하고 갔다. 바람이 시위를 당길 때마다 우람하게 흔들리던 나무였다. 그럴 때마다 하늘 향해 잔가지 핏줄 같이 뻗어 아름다운 성장을 했다. 인적 요란한 절터에서 무수한 발자국을 읽으며 밑둥치엔 무수한 지문이 늘어붙었다. 사람들이 저 단단한 돌탑에 부처가 있다고 믿으며 염불을 빌 때마다 한 잎 한 잎 소원 등 켜듯 잎사귀가 돋았다. 살아 있는 부처, 그것은 돌탑 뒤에 서 있는 저 나무였으리라.

묻힌 이야기가 파문처럼 세간으로 번질 때, 사람들은 탑을 들추고, 땅을 파 뒤집어 뭐라도 찾으려 안달했다. 무성한 소문에 대한 흔적은 드물고, 티끌만 한 흔적에도 생각과 추측을 기워 명중하고자 했다. 고문서를 뒤지고, 그것을 해독하느라 애쓴 사람들에 의해 청정하게 펼쳐진 절터의 이름이 밝혀지고, 절이 지어진 시기가 밝혀지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줄을 지었다.

탑은 부처의 무덤이다. 누군가는 저 육중하고 월등한 형태의 무덤을 보며 말없는 울림 한 조각 얻고자 했을 것이다. 장중한 위엄에서 쓸쓸하게 번져오는 가슴 먹먹함. 절집도 소박했을 터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의 웅장한 탑 아래서 눈시울이 아리다.

오직 왕족을 위한 사찰이었다. 누가 누구를 부려 탑을 올리고 절을 지었다. 왕족이라는 말 앞에서 나는 헐벗은 백성들을 떠올린다.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했던 문무왕의 거대한 뜻은 알겠으나, 나랏일에도 엄연히 귀하고 천한 신분이 구분되었다. 백선들이 나라를 위한 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오로지 불심만으로 고된 노동을 자처했을까. 나랏일이라는 명분 속에 노동을 강요하거나 굶주리게 하지는 않았을까. 녹은 후히 쳐주었을까. 웅장하고 거대한 돌탑 아래서, 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였다.

탑 그늘에서 한 줌 햇볕이라도 더 받으려고 애쓰는 풀들이 애처롭다. 바람에도 밟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몸을 흔드는 풀들. 나는 풀섶에서 비켜 앉아 풋내 나는 아련한 침묵의 울림을 극적으로 듣는다. 처연하고 느슨한 풍경이 번진다.

승방터에서 ‘삐그덕’ 하고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입김 보얗게 이는 새벽, 스님은 감은사 경내를 두루두루 밟는다. 별이 촘촘하고 달이 밝다. 감은사 아래 턱밑까지 파도가 인다. 감은사의 새벽예불이 시작된다. 고요히 시작된 도량석과 스님의 염송은 서라벌을 훑고, 토함산을 넘어 다시 감은사 도량을 지나, 용혈로 스며들어 대종천을 따라 동해로 번진다. 몸을 사르던 용이 염송을 따라 동해까지 승천한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무섭고 살벌한 저 용맹은 허공을 돌고 돌아 아주 먼 곳까지 뻗어 우리의 바다와 하늘을 지킨다.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스님의 깨알 같은 염불을 들으며 풀도, 나무도, 탑도, 별도, 달도, 그리고 나도 모두 잠에서 깬다. 참 평화로운 아침이다.

가슴 벅찬 광대함이 어른거리는 풍경보다, 집요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듣고 싶을 땐 절터를 찾는다. 내가 이렇게 터를 잡고 퍼질러 앉는 것은, 시각보다 무심하고 모호한 감각적 귀환을 듣고자 함이다. 달래고 어르는 집요한 집착, 나는 여기서 무질서한 집착을 무구잡이로 행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오래 여기 머물렀다. 밤이었고 새벽이었고 아침이었다. 학생들이 문화탐방을 왔다 갔고, 모 동호회에서 다녀갔다. 때로는 가족들이, 때로는 관계를 헤아릴 수 없는 모호한 무리가 다녀갔다. 나는 그들을 피해 풀섶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가 관리인으로부터 눈총을 받거나 주의를 받았다.

절터 아래엔 매일 소박한 난전이 섰다. 마을 어르신들은 내가 건네는 눈빛에 반가워하며 가져나온 곡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역사책보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내 귀를 건드렸다.

“저 탑 안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금으로 된 뭣(사리장엄구)이 나왔다 카니더. 우리는 한 번도 보도 못했니더. 우리 같이 나(나이) 많은 늙은이들은 봐도 뭔동 모르지만, 그래도 한번 봤으만 좋지, 암, 좋고 말고지.”

절집은 사라지고 풀밭이 되었고, 바다는 물러나 뭍이 되었다. 저 멀리 가뭄 든 대종천 물줄기가 흐릿하게 흐른다. 곧 바다에 당도할 물줄기다. 대종천은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운 몽골군이 황룡사 대종을 동해로 옮기려다가 빠뜨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로 떠밀려간 종은 비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바다가 뒤집히는 날엔 ‘웅, 웅’ 하고 운다고 했다. 대종이 우는 소리를 저 나무와 석탑은 기억할 것이다. 언젠가 누가 소리 없이 찾아와 겨드랑이를 간질이면 대종의 매무새나 그 울음소리가 어떠했는지 조곤조곤 말해줄 것만 같다.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어느 날 문득 마음이 동하면 나는 또 여기를 찾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또 혼자 감은사 터로 올라온다. 천년을 떠돌던 바람이 그를 알아보고 쏜살같이 마중 나간다. 나무가 내려놓은 잎도, 풀잎도 우르르 달려 나간다. 몸에 묻은 건초를 털 겨를도 없이 나도 그를 마중하러 간다. 사뭇 모호하게 감기는 그의 걸음이 반갑지만, 그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먼저 아는 체하지 않는다. 그는 공기 속 기체처럼 가볍기 때문에 그의 발자국은 허공에 찍힌다. 내 발자국도 허공에 찍힌다. 그림자를 가지지 않은 그를 따라 다시 절터를 거닌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는 토막 난 유구들 사이에서 숨이 멎을 때까지 버둥거린다. 끝이 뾰족하지 않은 유구들의 생을 그는 읽었을까. 명료한 것이 아니라 뭉툭한 신비가 어떤 지극함으로 작용해 그에게 무슨 말을 건넸다. 비워졌지만 아무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무형의 언어들이 그에게 일제히 다가간다. 한 줌 티끌로 동해에 뿌려진 문무왕이 온 것일까. 어떤 지극함이 물밀듯 밀려온다.

동해를 곁에 두고 여유롭고 따사로운 바람이 불다가 차가운 바람이 불다가 이내 빗방울을 긋는다. 쇠락하고 무너진 것들이 비를 맞는다. 그들의 최후는 구실 잃고 누워 상념을 극대화한다.

자, 이제 고즈넉한 분위기를 몰아 무슨 말이든 뱉어야겠다.

 

글,사진 박시윤 지음, 디앤씨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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