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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구틀이 / 김선자

부흐고비 2021. 5. 26. 14:02

그의 어머니를 나는 아재라고 불렀다. 아재는 외동딸이었다. 뻐드렁니가 흡사 오랑우탄을 닮았지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인정 많고 배려심이 깊어 동네 경조사에 늘 불려 다녔다. 어느 날, 만삭의 몸으로 우리 노 할머니 회갑연에 부엌일을 돕던 아재가 뒷간에서 별안간 비명을 질러댔다. 놀라 달려가 보니, 정낭 구들*에 샛말간 새끼 강아지 같은 핏덩이가 고물거리고 있더라는 어머니 말씀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아기를 ‘구들’이라 불렀고, 그 후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구틀이는 얼핏 좀 어눌해 보였다. 똥자루 같은 키에 코도 훌쩍였다. 게다가 얼굴도 곰보였다. 학력이라고 해야 고작 초등학교 4학년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못하는 일이 없었고 세상사 돌아가는 이치도 모르는 바 없어 보였다. 그런 탓으로 동네 궂은일에는 제일 먼저 불려 다녔다. 그에게 만사형통이란 별명이 붙은 게 괜한 일이 아니었다.

구틀이 아버지는 목수였다. 그가 어렸을 때 하늘로 떠났다. 속설을 믿는 어른들은 집을 짓다가 지골을 맞아 급사했다고 했다. 그의 성격은 털털한 듯 보였지만 강직하고 원리원칙을 찾는 우직하고도 합리적이었다. 혹여 그가 읍내 농협에라도 가면 직원마다 대필을 시켰다. 어쩌다 동네에 농기계가 고장 나면 으레 그를 찾았다. 그뿐인가. 그는 보기보다 머리가 좋고 힘도 장사 못지않았다. 어찌 그리 힘이 세냐고 물으면 일을 많이 하면 힘이 세진다고 대답하곤 했다. 목욕탕에도 자주 간다지만 항상 세수를 하지 않은 것 같이 꾀죄죄해 보였다.

그는 언제나 홀로 된 어머니에게 지극정성이었다. 마을 경조사가 있으면 어머니를 꼭 오토바이에 태우고 오갔으며, 마을어른들은 무척이나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자그마치 장가를 일곱 번이나 갔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에겐 안사람도, 슬하에 자녀도 없어 어머니에게 송구하게 생각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전혀 우울해 하거나 외로움을 보이지 않았다.

항상 코미디언처럼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언행이 반듯하고 유모가 있으며, 감성지수 또한 아주 높아 보였다. 사람들은 구틀이가 공부를 좀 더 했더라면 필경 큰일을 할 인물이라고들 입을 모았다. 밤이면 적적해 할 어머니를 위해 이웃 어른들을 모셔다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저녁마다 그의 집은 시끌벅적했다. 어른들의 귀갓길엔 꼭 집집이 모셔다 드리는 수고도 서슴지 않았다.

내 어머니 장례를 지낼 때였다. 광중을 파고 달구를 했다. 지켜보던 아들이 ‘구틀이 아저씨가 제일 열심히 정성껏 하던데요 ’라고 했다. 매장을 수작업으로 하던 때였다. 그만큼 구틀이는 이웃 일도 자기 일처럼 했다.

한때 그는 듬바우골 정법사 개사 당시 10여 년 동안, 그 절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신도들이 재를 올리고 남은 떡을 우리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갖다 주기도 했단다. 진고개 숲속에 호랑이가 나와 사람을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었다.

‘싸리골’에 우리 집이 있었다. 연곡 6번 국도에서 삼산리 싸리골로 들어서 여자 단속곳처럼 둘러쳐진 곳이다. ‘싸리골 학고재’라 명명한 집이다. 그곳에서 두어 굽이 더 돌며 산줄기를 타고 올라가 ‘꽃피는 펜션’을 뒤로하고 마지막 고개 위에 올라서면 현덕사라는 절이 있다.

그는 이 싸리골 집들을 보살피는 수호천사였다. 무슨 일이든 그에게 부탁만 하면 바람처럼 달려와 처리해주는 해결사였다. 그는 더없는 효자였다. 그의 어머니가 무릎이 아파 잘 걸을 수 없게 되자 더 늦기 전에 일본 온천에 휴양 겸 여행을 시켜 드린다고 만사 젖혀놓고 큐슈의 온천도 다녀왔다. 호사한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자랑했다.

“지팡이라도 집고 걸을 수 있다면 갔다 와 봐. 좋아.”

그 얼마 후였다. 더 걸을 수 없는 그의 어머니를 업고 집밖의 풍광을 구경시키는 모습이 종종 사람들 눈에 띄곤 했다. 불교 신자인 그의 어머니가 사월초파일 절에 가고 싶어 하자 노모를 업고 자동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고갯길 현덕사에 가 예불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돌아가는 길에도 우리 집엘 들렀다. 그의 등에서 내린 아재가 말했다.

“얘 나는 일이 하고 싶어 죽겠다.”

그때 나는 아재의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구러 그의 어머니가 뒷간 출입이 힘들어 방에 요강을 들여 놓았다.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올려놓고 볼 일 보라고 하였지만 번거롭다고 듣지 않았다. 방바닥에 흘리기도 해 서걱거리기까지 했다. 한마디 불평 없이 뒷바라지를 하는 구틀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데요.”

얽은 얼굴로 씩 웃으며 요강을 비우곤 했다.

어느 날 그가 우리 집 일을 도우러 왔다. 세참 시간, 그가 감자부침 한 장을 벗어놓은 윗도리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일을 마치고 가는 길에 두 장을 더 얹어 주었다.

그런 착한 마음 때문이었던가. 집안 형편이 나아지고 좋은 짝지를 만나 매양 싱글벙글 했다. 헌 트럭을 한 대 구입하여 몰고 다니며 마을 어른들 짐도 실어주고 장도 봐주었다. 어머니를 태우고 딸기 밭에도, 코스모스 길도, 단풍 곱게 든 진고개에도 풍광명미를 구경시켜드리며 나들이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그만 교통사고로 황망히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정말 아까운 사람이 갔다. 애연하기 그지없다.

구틀이, 그는 참으로 고운 마음의 소유자였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은 바로 그를 두고 한 말이지 싶다. 그의 명복을 빌려고 청솔공원을 찾았다. 자기가 문화재라며 껄껄대던 그가 정녕 그립다.

* 구틀 : 뒷간 바닥의 좌우에 깔아놓은 널빤지. 부출의 방언(강원도)


▲ 김선자 수필가 ‧ 강원도 강릉 출생 ‧ 월간 수필문학 등단 ‧ 수상 : 대한민국환경문학수기부문 대상, 전국여성문학대전 수필부문대상 ‧ 수필집 : 열개의 바퀴를 굴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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