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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너희를 사랑했다 / 김선자

부흐고비 2021. 5. 26. 14:04

아버지는 양반하회탈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목젖이 보이도록 탄구대소 하는 모습을 이제껏 본 일이 없었다. 가족석에서 하객을 맞이하는 엄마와 나도 헤픈 복사꽃 웃음을 날렸다. 동생의 결혼식장이다. 모두들 반갑고 보고 싶었던 환한 얼굴들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모두 돌아갔다. 동생네도 신혼여행을 떠났다. 늦은 밤 엄마는 나를 불러 앉히고 조용하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귀를 후려치는 청천벽력이었다.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듯 통증으로 전해왔다.

겨우내 무청시래기를 한 경운기씩 드시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결혼식을 불과 20여 일 앞두고 아버지의 위암말기 진단이었다. 그동안 두 분만 알고 있어야 하는 약속으로 정하고 수술에 필요한 모든 검사와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베트남 여행을 다녀오느라 이러저러한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집으로 전화할 때마다 부모님은 부재중이었다. 어쩌다 휴대폰으로 이어지면 야외나들이며, 모임이나 외식중이라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괘념치 않았다. 그게 탈이었다.

큰 수술을 하루 앞두고, 결혼식에 손님맞이를 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튿날 아버지는 곧바로 입원했다. 수술을 기다리는 몇 시간의 경황에서도 아버지는 병실에서 결혼식에 참석해준 친지와 지인들께 고맙다는 인사 편지를 손수 붓으로 쓰셨다. 꼭 진심을 담아 보내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친구 20명에게만 초대장을 냈기에 그 일은 쉽게 끝냈다. 엄마도 나도 각자 초대했던 친척 지인께 인사 편지를 쓰고 동생의 몫은 여행 다녀와서 쓰도록 남겨두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수술실로 실려 가는 아버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회환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평소 강직하고 엄격했던 아버지였다. 직장에서는 대쪽이라 불렸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으나 좋아하진 않았다. 아버지 역시 저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을 숨겨두었는지, 도통 꺼내 보이지 않았다. 놀기 좋아하고 공부에 별 생각이 없던 내게 무던히도 재능을 찾아 갈고 닦아 주려하셨다. 일이 생길 때마다 가족회의를 하자며 메모지를 들고 넷뿐인 식구를 불러 앉혔다. 나의 늦은 귀가가 자주 안건에 올랐다. 그러나 항상 합리적으로 끝나는 가족회의였다. 귀가 시간을 내게 정하게 하고 지켜지지 않을 땐 벌이 주어졌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인가, 나도 말할 땐 개조 식으로 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아버지는 평소 책 속에서 살았다. 늘 배움에 갈증을 느껴 54세 되는 해에 일찍 명예퇴임을 했다. 시인으로 등단도 했다. 원래 꿈은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학자로 시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누구보다도 시를 좋아했던 아버지, 혼자는 좋은 시가 나올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이순 중반에 다시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본격적인 시 창작과 학문을 닦으며 과락(科落) 없이 2학년을 마쳤다. 몇 해 뒤 엄마도 명퇴하자 두 분은 시골에 오두막을 구입해 싸리골 학고재라 명명하고 자연 속에서 전원생활로 지내셨다.

아버지는 예술인이었다. 자연인이 되고 싶다며 퇴직과 동시에 휴대폰도 통장도 없이 지냈다. 그러면서 친구들에게 술과 밥은 왜 그리도 잘 사는지. 그런 날 밤이면 우렁각시가 된 엄마가 잠든 아버지의 빈 지갑을 채워놓곤 하셨다. 아버지의 기를 살리는 엄마의 내조방식이었다. 엄마의 헌신과 배려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지금껏 가정을 꾸릴 수 있었으리라. 현직에 계실 때도 낚시, 분재, 수석, 서각까지 도취되어 작품세계에서 일정수준 인정을 받고, 동우회도 참석하며 전시회도 열었었다. 퇴직 후에는 서예와 문인화에 일가견을 이뤄 화가가 병풍 제작에 필요하다고 글씨를 받아 가기도 하였다. 출품 응모도 권유받았다. 하지만 “내 즐기면 그만이지 이 나이에 뭘 들고 왔다 갔다 해.” 하시던 아버지였다.

숨 막히는 7시간의 수술이 끝났다. 위장을 모두 들어내고 식도와 소장을 바로 연결했으므로 목안에서 덜렁거릴 수 있을 거라는 게 의사의 설명이었다. 몹시 염려했던 수술이었다. 원래 약체인 아버지는 너무도 힘들게 암을 이겨내고 있었다. 구역질에 온몸의 피부가 벗겨지는 가려움증, 게다가 수없이 화장실을 드나들어야 하는 설사가 아버지를 괴롭혔다. 그야말로 지옥에서의 사투였다. 병실의 냉장고는 아예 테이프로 붙여야 했고 집의 냉장고도 마당으로 들어 내 놓았다. 간호하는 엄마는 병실 화장실에서 식사를 할 때도 있었다.

1년 동안 여섯 차례로 예정되었던 항암 주사는 네 번으로 끝내기로 했다. 오두막에 들어가 투병하는 아버지, 엄마는 1년을 꼬박 매일 새벽, 바닷가 부두에 나가 고깃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려 펄떡이는 생선을 구해왔다. 남은 생이 얼마이든 그 반을 아버지와 함께 나누게 해 달라는 엄마의 간절한 기도가 통한 것인가. 아니면 시골 청명한 공기의 혜택이었던가. 아버지의 병세가 서서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예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오자 배움에 목말라하던 아버지는 3학년에 복학하였다. 그러나 발병한 지 5년의 문턱에서 ‘재발’이라는 진단이었다.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했으나 끝내 30kg의 체중으로 하늘 길 긴 여행에 올랐다.

아버지는 꿈을 펴지 못했다. 늘 가족의 버거운 짐을 두 어깨에 얹고 버티었다. 다섯 살에 할아버지를 여의었고 큰아버지도 30대에 세상을 버리면서 총각인 아버지께 어린 사촌 셋을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할머니를 비롯하여 청각장애인인 큰엄마와 우리 식구 넷, 아홉 식구가 한집에서 15년, 셋방살이의 가장이었다. 그 후 분가했으나 지금껏 두 집 가장 노릇을 하던 상황이었다. 흩어져 있던 조상님 산소도 모두 한데 모아 한 기(基)의 납골묘를 만들었다. 가시기 전 동생 결혼식 때 받은 축의금도 모두 돌려주었다. 오두막 안뒤꼍납골묘 옆에 수목장터도 정해 놓고 묘비명도 써놓고 가셨다.

마지막 가족회의는 아버지의 명령이었다. 우리를 불러 앉혀놓고 누워서 주관하는 결연한 목소리였다.

“내 떠난 뒤 친척 친지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 숨지면 즉시 화장해 수목장해라. 3일까지 갈 필요도 없다. 혹여 알고 찾아오는 내 친구가 있다면 조의금은 받지 마라. 그리고 너희를 사랑했다.”

아버지의 취미 아닌 취미생활은 예술인에서가 아니라 복잡한 가정사를 잊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사촌들과 함께 키워야 하는 우리에게 속을 내보이지 않으셨던 아버지. 엄마에게 무뚝뚝한, 늘 말없던 행동도 두 청춘의 과수댁 눈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날 저녁 하늘에 오른 아버지의 얼굴은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다. 생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너희를 사랑했다. 아버지의 속마음이 메아리로 울려 퍼지는 듯했다.



▲ 김선자 수필가 ‧ 강원도 강릉 출생 ‧ 월간 수필문학 등단 ‧ 수상 : 대한민국환경문학수기부문 대상, 전국여성문학대전 수필부문대상 ‧ 수필집 : 열개의 바퀴를 굴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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