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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비야 청산 가자 / 강호형

부흐고비 2021. 5. 30. 09:34

오늘이 경칩이다. 때맞춰 비까지 내렸다. 봄이 왔다는 신호다.

‘나비 앞장 세우고 봄이 봄이 와요.’

이런 동요대로라면 나비도 나왔으련만 아직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가슴속에서는 벌써 작은 설렘 같은 것이 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봄이 희망의 계절, 약동의 계절, 환희의 계절이라면 응당 기쁨이어야 할 터이지만 선뜻 기쁘다고 말할 수 없고, 그래서 슬픔인가도 싶지만 왜 슬픈지를 꼭 집어 설명할 근거도 없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그렇다. 봄을 맞는 마음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새 풀 옷 입고, 꽃다발 안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봄처녀가 나의 신부라면 어찌 아니 기쁘랴. 그러나 나는 60번이 넘게 맞이한 그 봄처녀를 나의 신부로 삼아 본 적이 한번도 없다. 해마다 나의 신부인가 하고 맞아 보지만 돌아보면 그는 만인의 신부였고 그나마 어느새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자취를 감춰버리곤 했다. 그녀는 번번이 나보다 다른 남자를 더 사랑하는 것 같았으며 다른 남자들의 사랑에 더 도취하여 나의 사랑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만 같았다.

설렘을 안겨주면서 왔다가 슬픔만 남겨 놓고 떠나가 버리는 봄처녀. 그래서 나는 그녀가 올 때 이미 떠날 것을 예감하고 지레 슬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봄은 언제나 내게 설렘으로 왔다가 슬픔만 안겨 주고 떠나가 버렸다. 그래서 봄은 늘 혼자 맞이하기에는 벅차고 그렇다고 남들에게 빼앗기고 싶지도 않은 톱스타 같은 것이었다.

“인생은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 사월은 천치와 같이 중얼거리고 꽃 뿌리며 온다.” 그렇구나. 봄을 맞기가 벅찬 것은 그 꽃 때문이다. 봄은 하고 많은 꽃 중에서도 우선 개나리나 산수유처럼 황금 같은 꽃을 뿌리며 눈부시게 군림한다. 땅속에는 누가 있어 꽃나무 뿌리를 간질이기라도 하는가. 갓난아기가 간지럼타듯 까르르 웃음보 터뜨리는 개나리의 웃음소리를 신호로, 목련, 진달래, 오얏, 복숭아에 은방울, 제비꽃까지 다투어 피고 나면 나는 졸지에 거대한 꽃 대궐의 마당쇠가 되고 만다. 대궐의 마당쇠에게 공주님 같은 봄은 늘 벅찬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가에는 텃밭이 있었다. 그 텃밭에 배추꽃과 장다리꽃이 만발한 어느 봄날이었다. 벌과 나비들이 어지러이 날고 있는 밭머리에서 ‘풋고추’를 곧추세우고 장난스럽게 오줌을 갈기다가 을숙이한테 들킨 일이 있었다. 장다리꽃에 가려, 키가 작은 을숙이가 지나가는 것을 미처 못 보고 저지른 실수였다. 소스라치게 놀라 바지 괴춤에 오줌을 묻힌 나보다 을숙이가 더 놀라는 것 같았다. 을숙이 얼굴이 단박에 토마토처럼 익는 것을 보니 부끄러운 중에도 가슴이 묘하게 설레었다. 을숙이는, 반은 다르지만 나와는 같은 5학년이었다. 놀란 토끼처럼 뛰어 달아나는 을숙이가 사라져간 길가에는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울었다.

이후로 을숙이는 나만 보면 제풀에 얼굴이 빨개지고 나 또한 그 아이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다음 해에 6·25 사변이 나서 헤어진 뒤로는 지금껏 못 만났지만 텃밭 언저리에 나비가 눈송이처럼 어지러이 날던 그날의 정경을 떠올리며 혼자 낯을 붉힐 때가 있다.

‘꽃과 나비는 한철이구요, 연못에 금붕어 사철이라.’

연못의 금붕어처럼 살아온 60여 평생에 단 한철로 지나가 버린 꽃과 나비의 향연을 잊지 못하는 것도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 꽃은 외로울 것이다.

‘나비야 청산을 가자. 호랑나비야 너도 가자. 가다가 날 저물거든 꽃에서나 쉬어를 가자.’ 청산의 나비도 쉬어갈 꽃이 없다면 청산이 아니라 적막강산일 것이다. 꽃피고 새 우는 청산이 어드메뇨.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라도 쉬어나 가자.’

마당쇠라도 좋으니 청산의 꽃대궐에서 나비처럼 살고 싶다.

꽃과 나비가 한철이듯이, 만고 청산도 유한한 인생에 있어서는 어차피 잠시 쉬어갈 여사旅舍인 것을!

 



강호형 수필가:

경기도 광주 출생, 1988년 월간 《문학정신》으로 등단.

수필집: 『돼지가 웃은 이야기』  『행복을 디지인 하는 부부』  『붕어빵과 잉어빵』  『빈자리』

수필선 『바다의 묵시록』  『20세기의 전설』  『정류장에서』 등 다수.

현대수필문학상, 황의순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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