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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뫼비우스의 띠 / 이은화

부흐고비 2021. 5. 29. 06:33

보일러 수리를 위해 기사를 불렀다.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 도착한 기사는 앞집의 수리가 길어져 시간이 늦었노라 했다. 보일러 배관상태를 살펴보던 청년기사는 주방과 거실을 부지런히 오가며 보일러 수리를 끝냈다. 밖의 추운 날씨를 생각해서 차를 한 잔 건넸더니 급한 다음 약속이 있어서 빨리 가야한단다. 다시 권해 보았지만 청년은 급하게 가방을 챙겨들고 인사와 함께 문밖으로 사라졌다.

저녁 장을 보려고 지갑을 찾았다. 지갑을 둘 만한 곳은 다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다. 서둘러 지갑을 들고 사라졌을 기사에 대한 괘씸한 마음은 몇날 며칠을 두고 누그러들지 않았다. 잃어버린 돈도 돈이지만 카드와 신분증에 대한 해결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기에 짜증이 더했다. 눈에 띄는 곳에 지갑을 둔 나를 탓하면서도 불쾌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일이 잊혀져갈 무렵이었다. 냉장고 뒤로 넘어간 냉장고보를 빌어내는 긴 막 막대 끝에 밀려 빨간 지갑 귀퉁이가 비죽 보였다. 얼마동안이지만 마음속으로 그를 의심하며 도둑취급 했던 것이 미안했다. 문득 오래전 묻혀 버린 일이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누군가 나의 팔을 심하게 흔들었다. 놀라 눈을 뜨니 친구의 얼굴이 바짝 다가앉았다. 친구는 날 깨워 놓고 말이 없이 매섭게 쏘아만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너 이럴 수 있어?”

“…?”

“금고 옆에 찔러둔 돈이 없어졌어, 어떻게 생각해야 돼?”

“무슨 얘기야? 지금 난 잠자다 일어났잖아?”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길 건너 우리 집을 마다하고 그의 가게에 붙은 방에 와서 함께 잔 것이 화근이었다. 황당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몰아세우는 기세에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나의 소행으로 단정지었다. 답답하고 억울한 나보다 그녀가 더 화를 내는 모습도 참을 수 없었다. 분한 마음에 울지 않으려했지만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이렇다 할 변명도 못한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겨우 집으로 왔다. 어머니를 보자마자 소리 내어 한참을 울었다.

출근해서도 마음과 생각이 콩을 볶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의 가게를 두고 골목길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어떻게 친구인 나를 의심할 수 있을까 하는 야속함은 그나마도 그를 위한 배려였다. 새벽녘, 당당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활화산처럼 화가 솟구쳤다.

머릿속을 온통 울분으로 채운 채 집으로 들어서는데 가게에 있어야 할 친구가 내 앞을 막아섰다. 엉겁결에 당했던 새벽이 아니었다. 나도 그녀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미안해. 오빠가 새벽에 장을 다녀오려고 가져간 거래.”

할 말이 없었다. 누명은 벗었지만 마음의 빗장은 걸은 뒤였다. 얼른 그의 눈을 피했고 대꾸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방문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며 서 있었지만 나는 끝내 대답하지도, 나가지도 않았다. 내 뒤를 따라 들어 선 어머니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방문을 닫았을 것이다. 그 뒤로 일부러 그를 피해 다녔다. 길을 가다가 친구와 맞닥뜨리면 되돌아서기도 했다. 새긴 도장처럼 골이 선명한 상처는 오랫동안 아물 리 없었고 이사해서 그곳을 떠나기까지 나는 그를 찾지 않았다.

보일러 수리 기사는 내가 오랜 세월 잊고 지낸 한 친구와 퍼즐의 조각처럼 맞물려 있었다. 이제야 그녀가 지녔을 부담을 떠올렸다. 한동안 떠나지 않았을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짓누르던 죄책감에 나중에는 내가 야속하지는 않았을까. 선뜻 쉽지 않았을 용서를 빈 친구를 다시 만난다면 이제는 내가 사과를 해야 하리라. 닮은 사건을 시차를 두고 겪고서야 내 안에 공존하는 삶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다 보았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해석이 달랐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편리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지만, 보다 오묘하고 헤아릴 수 없이 큰 그릇이 마음이다. 그 그릇에 용서를 담지 못하고, 잊을 수 없다면서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며 또 그 상처를 덧대며 아프게 살았다. 결국 이렇게 잊고 살 수 있다면 그때 용서했어야 후회가 적었을 거였다. 당시 크게 보이기만 했던 나의 알량한 자존심이 감당할 수 없는 벅찬 용서였으리라.

잊을 수 있는 것도 신이 선물한 복이다. 그보다 큰 축복은 용서하되 기억의 단절이 아니라 없던 것처럼 잊는 것이다.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편하기 위해서 용서해야 하고 나를 위해 없던 것처럼 잊어야 하는 것이다. 용서와 잊음은 시작과 끝이 연결된, 앞뒤를 구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였다.

젊은 날, 나를 의심했다는 이유 하나로 용서를 구하는 친구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냉정하게 떠나보냈다. 지금이라면 나은 모습으로 응대했을까. 게서 오십보백보일 게다. 아마도 용서를 했다면 이런 옹졸한 예측은 필요 없었으리라. 애먼 사람을 하나 잡고 나서야 오래 묵은 미안한 감정 하나를 더 얹고 말았다. 내 안의 뫼비우스의 띠는 언제쯤 온전해질까.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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