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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댐과 황매산 자락을 중심으로 들어앉은 집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굽어진 길을 따라 무작정 오르다 보면 어느새 모산재의 기암들이 장엄하게 눈길을 뺏는다. 영암사 터는 황매산(해발 1천108m) 남쪽 자락인 모산재(해발 791m) 아래 정동 쪽을 향해 있다. 모산재 주변 바위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영험한 기운을 쏟아내며 절터를 호위한다. 모산재 바로 아래 마을인 합천 가회면은 화전민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한때는 빨치산의 활동 거점이었을 만큼 깊은 골짜기였지만, 지금은 길이 좋아져 골짜기라는 말이 무색하다.

절터엔 아무도 없다. 새벽의 정적만 사방에 깊이 깔렸다. 공기가 무겁다. 바람에 비 냄새가 섞여 있다. 곧 비가 쏟아지겠다.

엷은 어둠 속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얼마나 해를 묵었을까. 바람 불어도 공양할 잎사귀 한 장 없는 빈 몸으로도 깊은 운치를 자아낸다. 밑둥을 기름지게 넓히기보다 바위산의 강한 기운을 받아 장엄하게 뻗어간 근육질의 몸통에서 스산한 기운이 맴돈다.

나무 아래엔 죽은 벌레 한 마리를 옮기느라 개미들이 분주하다. 저들의 소리 없는 떠들썩함에 눈이 요란하다. 개미나 나나 아름드리 나무 아래 같은 시기, 같은 시간을 지나는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몇 걸음 옮기니 석축이 나타난다. 석축은 어둠 속에서도 붉은 빛을 드러냈다. 치열한 전쟁을 막 치러낸 핏물 밴 성벽 같다. 11단으로 쌓은 석축만 보면 매우 거대하고 웅장해, 절터라기보다 성城에 가깝다. 붉은 성벽 뒤로 모산재의 웅장한 바위산이 버티고 있어, 요새도 이런 요새가 없다. 앞으로는 당산堂山을 비롯해 저수지와 층층이 형성된 다랑논이 훤히 내다보이니, 이곳에 성이 있었다 해도 조금도 이상할 리 없다. 석축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아놓은 쐐기돌이나 반원 모양의 빗물 도랑마저도 견고해, 옛사람들의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엿볼 수 있다.

석축을 돌아 오르니 눈이 호사다. 무엇부터 관심을 두어야 할지 난감하다. 너른 터에 석탑 한기가 보인다. 보물 제480호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이다. 연한 살굿빛의 화강암 탑은, 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의 모습이다. 머릿돌은 사라졌고, 아무런 문양도 새기지 않아 밋밋하고 단조롭다. 절터를 찾아다니며 흔하게 만났던 그저 그런 석탑이 여기에도 남았다.

금당 터로 오르는 석축을 보니 한없이 기쁘다. 엣 빛이 가득하니 더없이 반갑다. 남북으로 길게 쌓은 석축엔 해묵은 돌이끼가 덕지덕지 끼었다. 죽은 듯 살아 있는 이끼들의 문양이 한없이 예스럽다. 군데군데 석태가 서리고, 틈마다 풀들이 뿌리를 내렸다. 폐사된 절터의 느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무너져 가지런하지 못하고 해묵어, 두꺼운 어둠이 산란한 둔탁함 속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금당 터 석축은 가운데를 앞으로 튀어나오게 했고 그 위에 석등을 세웠다. 그래서일까. 무대 위 한껏 조명을 받는 사람처럼, 석등도 도드라져 이목을 끈다. 튀어나온 석축 양쪽엔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계단은 직선의 단조로움을 깨고, 무지개 모양의 느슨한 곡선을 슬쩍 걸쳐 놓았다. 옆에서 보면 믿기지 않을 만큼 유연한 곡선이다. 단단한 돌을 어찌 이렇게 유연하게 다듬었을까.

옛날 사람들도 직선보다는 곡선을 더 아름답고 신성하게 여겼을까. 계단은 비록 여섯 단으로 짧지만, 오를 땐 몸을 앞으로 최대한 숙이고, 정신을 바짝 집중해야 한다. 가파르고 폭이 좁아 발을 반만 걸쳐 밟아야 하기에 자칫 미끄러질 수 있다. 어쩌면 이 무지개 계단은 사람을 위한 계단이라기보다, 신을 위한 통로거나 영적인 의식의 연결을 상징하는 의미, 또는 단순히 예술미를 살리기 위한 조형물이 아닐까 싶다.

계단을 오르니 기다렸다는 듯 석등이 반긴다. 보물 제353호 쌍사자석등은 영암사 터의 꽃으로 불린다. 예술을 논하는 사람들은 영암사 터에서 쌍사자석등을 최고의 예술적 조형물로 친다. 석탑보다 한 단 높은 곳에 있을뿐더러, 석등을 위해 석축까지 앞으로 단을 내 쌓을 만큼 대단한 관심과 조명을 받는 유물이다.

이토록 석등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간주석을 대신해 화사석을 떠받치는 두 마리의 어린 사자 때문이다. 천진하게 연화석에 올라선 두 마리의 어린 사자는 천 년 동안 어둠을 밝힌 대단한 상징물이 되었다. 서로 가슴과 배를 맞대고 자연스럽게 다리를 벌리고 선 어린 사자의 몸짓이 가볍고 귀엽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석등의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하는 아이들 같아 마음이 짠하기도 하다. 화사석엔 화창이 뚫렸고, 화창과 화창 사이엔 사천왕상이 조각됐지만 풍상에 흐릿해졌다. 석등 뒤에 앉으니 사자 다리 사이로 석탑이 보인다. 공터에 홀로 처량하게 섰던 석탑을 사자 다리 사이로 구도를 맞추니 따뜻한 느낌이 든다.

석등 뒤에 사각으로 조성된 금당 터가 있다. 언덕에 올라 내려다보면 바둑판에 바둑돌을 놓은 듯 기단과 계단, 주춧돌이 정교하고 반듯하게 놓였다. 빼곡하게 들어찬 초석의 위치를 짚어 보면, 무수한 세월 동안 금당이 세 번이나 일어서고 무너지는 흥망성쇠를 가늠할 수 있다. 한가운데 놓인 네모난 지대석은 불상 대좌가 위치했던 곳으로, 대좌 위치에서 앞을 내다보면 청동 쪽을 향해 석등과 석탑이 차례대로 일직선에 놓인다. 한 치 흐트러짐도 없는 기가 막힌 구도다.

사방에는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놓았다. 돌을 다듬어 사방으로 꾸민 조형물이 예술적 극치를 몰고 온다. 금당 뒤쪽인 서쪽 계단을 제외하고 계단 난간엔 소맷돌을 설치했다. 정면 동쪽 계단 소맷돌은 많이 부서져 일부만 남았지만, 아마도 당시엔 무지개 계단까지 일직선으로 쭉 연결되었던 것 같다. 다른 쪽 소맷돌에는 사람 머리를 하고 새의 몸으로 하늘을 날며 아름다운 소리로 부처의 말씀을 전한다는 가릉빈가迦陵頻伽와 용이 조각됐다. 금당 뒤쪽인 서쪽 지대석엔 작은 팔부중상을, 서쪽을 제외한 세 면에는 사자상을 새겼다.

고개를 돌려 빤히 쳐다보는 사자, 송곳니를 드러내고 익살스럽게 웃는 사자, 엎드린 채 북실한 꼬리를 치켜세운 사자, 두 발에 턱을 괴고 명상에 빠진 사장에 이르기까지, 보기만 해도 온순해 함께 놀고 싶어진다. 잘 그려진 민화 몇 편을 보듯 미소가 절로 퍼진다.

무슨 사자가 이럴까. 용맹하고 사나운 기운은 다 어쩌고, 마냥 헤픈 얼굴로 이리도 정다운 것일까. 석공은 사자를 본 적이나 있었을까? 마을에 뛰어놀던 개를 보고 상상하여 사자를 새긴 걸까. 작품은 작가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니, 분명 석공은 저 석상들처럼 따뜻하고 재밌는 사람이었을 게다.

절터 남서쪽 또 다른 공간으로 오른다. 숲에 폭 싸인 공간은 사방이 고요하고 깊은 적요가 흐른다. 은둔의 누리다. 절의 창건주나 역대 주지 스님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신 조사당祖師堂 터다. 금당 터 양옆엔 지대석과 하대석만 남은 두 기의 돌거북이 엎드려 있다. 보물 제489호로 지정된 귀부다. 영암사를 세웠거나 그 뒤를 이은 고승의 비석일 텐데, 탑비가 모두 사라졌으니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두 귀부는 몸이 거북이고 얼굴은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의 모습이다. 왼쪽(남쪽) 돌거북은 등 무늬가 거의 남지 않았다. 반면 오른쪽(북쪽) 돌거북은 등줄기 골격이나 귀갑무늬, 구름문양이 선명하다. 새김의 깊이가 깊어 입체감이 뚜렷하고 금방이라도 기어갈 듯 강한 기운이 흐른다.

이 중 하나는 적연선사의 자광지탑비慈光之塔碑로 추정한다. 비석은 없고 탁본만 전하는 탑비에는, 1014년(고려 현종 5년) 6월에 적연이 83세로 입적하자 영암사의 서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 적연은 13세 때 출가하여 37세에 중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했다. 성종이 대사로 봉했고, 목종이 대선사로 승진시키며 임금의 곁에서 불법을 전하게 했다. 그러다 80세가 되었을 때, 가수현(지금의 가회면) 영암사에 머물다 입적했다. 인근 중촌리 묵방사 가는 산기슭엔 적연선사 부도가 있다.

영암사의 이렇다할 기록은 없다. 적연선사비 탁본과 886년에 세운 강원도 선림원 홍각선사비에, 홍각선사가 영암사에 잠시 머물렀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 후기 홍유선사가 삼가현 묵방사에 왔다가 쓴 ‘유삼가묵방사기游三嘉黙房寺記’에도 숲이 우거진 황량한 들판에 탑, 섬돌들과 돌로 만든 거북 받침만 남았다고 기록돼 있다.

폐사된 채 산사태로 흙에 묻혀 있던 터를 복원한 것은 가회면 사람들이었다. 흙에 묻힌 금당 터를 찾아내고, 넘어진 석탑을 일으켜 세웠다. 쌍사자석등은 1933년 일본사람이 한밤중에 훔쳐 달아나던 것을, 가회면장 허 씨와 주민들이 뒤따라가 되찾은 것이다. 이후 또 다른 도난을 염려해 면사무소에 보관해 두었다가 지금의 영암사 터에 돌려놓았다. 한때는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수난 중에 사자의 한쪽 다리가 부러져 보물로 격하되었다. 복원이 이루어졌지만, 수난의 흔적으로 국보에서 보물로 격하된 것은 두고두고 섭섭한 일이다.

가회 사람들은 영암사 터 남쪽과 북쪽에 집 두 채를 짓고 밤낮으로 절터를 지켰다. 발굴이 시작되고 구실을 잃어버린 집은 뜯겨 사라졌지만, 영암사 터의 이야기에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가회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이야기다. ‘영암사’란 절 이름도 가회면 사람들의 구전으로 전해지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주민들의 노력에도 석탑 옆을 지키던 미륵불은 합천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갔고, 발굴된 금동불도 제집을 떠나 또 다른 곳에 놓였다.

눈을 감는다. 눈이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다. 눈을 감으면 냄새도 소리도 곱절로 다가온다. 바람 소리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 속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깨끗한 소리가 살아 있다. 잠시 들어왔다 아득히 먼 곳으로 가는 소리, 날아가는 소리, 사람의 소리인 듯, 새의 소리인 듯, 가릉빈가의 소리다. 그 누구도 가릉빈가의 소리를 들어본 적 없으나 그 소리 역시 마음에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릉빈가의 소리라고 하면 그것은 그게 된다.

다시 바람 소리가 들린다. 절이 잇엇을 때 이곳에서 산란된 바람, 가만가만 심연의 귀를 열면 절이 살던 시절을 지나온 바람을 만난다. 바람 속엔 옛 절간의 향기도, 소리도, 해학의 앍은 표정도 있으며, 백성을 떠올리며 돌을 다듬던 석공의 소리도 있다. 공상가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해도, 나는 분명 거기에서 듣는 소리, 가장 바른 독경에 나를 한껏 연다.

금당 터 언덕에 올라 자리를 튼다. 좀 오래 있을 참이다. 탄탄한 유물과 화려한 조각술로 조그마한 여백도 허락하지 않는 영암사 터에서 나는 얼마나 긴장했던가. 부드럽게 흘러가던 곡선은 수많은 조각을 낳았고, 끊임없이 뻗어가던 직선은 웅장한 석축이 되었다.

모든 것을 지휘하고 새겼던 석공은, 어쩌면 불상을 다듬으며 구도의 길을 걷던 조각승이 아니었을까. 영원히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거칠고 차가운 돌에 매달려 험하고도 외로운 길을 걸었을 조각승, 불법에 의지하지 않고서야 어찌 은밀한 골짜기 구석까지 찾아내어 품격 높은 조각을 새길 수 있었을까.

한 손에는 망치를, 한 손에는 정을 들고 조심스레 돌을 쪼개고 다듬는 무념무상의 자세로 찌는 더위에도, 살을 에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법을 실천했으리라. 덥수룩한 삽살개의 얼굴도, 다람쥐의 복스런 꼬리도 사자에 접목되어 인간 세상으로 왔다.

장인은 돌을 보면 그 안에 깃든 상象을 읽는다고 한다. 단순한 형상이 아닌 내면에서 어른거리는 상, 신성하고 영험한 기氣가 서린 돌만이 부처가 되고, 석등이 되고, 탑이 되고, 사자가 되고, 돌거북이 되는 것이다. 돌마다 각기 가져야 할 상이 있으니 그것을 꿰뚫어 보는 장인만이 무념무상의 예술의 혼을 전승할 수 있는 것이리라.

절은 망하고 인걸은 더났지만 서조물은 남아 어렴풋한 흔적을 드러낸다. 눈 돌리는 곳마다 새롭고 신기한 것들이다. 그만큼 돌아다니고도 다 품지 못한 허무함이란 이런 것이리라. 헛헛함과 허무함에 고요가 침잠한다. 언제쯤이면 이 많은 것들이 전하는 말을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순간, 석탑이 마음에 깃든다. 허허롭게 서 있으되, 엄격함의 각도와 격식이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빛난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이다. 석탑 아래 빗물이 하염없이 고인다. 무언의 간절함마저 서린다. 나는 저 밋밋하고 단조로운 형식의 탑에서 뿜어져 나오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겪는다. 꼭 화려해야만 볼 것이 있어 좋다는 수백 마디 말보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저 탑도 눈길 받아 마땅하다.

누가 이곳을 오지라고 했을까. 교통이 편리해 진 탓일까. 자동차가 절터 초입까지 들어오고,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수시로 들락일 수 있어, 어쩌면 궁벽한 산골에 자리 잡은 절터의 신비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모산재로 오르는 등산로가 절터를 끼고 양쪽에 나 있다. 몇 무리의 등산객들이 모산재로 올랐다. 이따금 들려오는 인기척이 절터의 고요를 깬다. 오지는 오지를 잃어버렸고, 절터는 절터의 분위기를 그만큼 잃어버렸다.

하루를 꼬박 절터에 머물렀다. 머문 시간이 오래되었음에도 찰나 같다. 옛 석축을 보며 묵은 서정이 내 안에 거처를 튼다. 그저 말[言]을 내려놓는다.

가장 아래로 내려와 절터를 올려다본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는 이질적인 모습에 말을 잃는다. 가슴이 답답하다. 가장 아래 단엔 새로 조성한 석축이 남북으로 웅장하게 뻗었다. 수백 개의 하얀 석축 사이사이에 옛 석축 몇 개가 어둡게 끼어 있다. 웅장하다고는 하나 이런 허탈과 실망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복원’이라는 이름 아래, 근래에 쌓은 듯한 거대한 축대는 옛것의 풍모를 상실케 하고 있었다. 옛 돌 몇 개에 새로 깎은 돌 수백 개 섞어 쌓으면 옛것이 된다고 믿는 것일까.

새로 쌓은 석축은 복원이 아닌 ‘조성’이다. 저 새하얀 석축은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을 보내야 옛것의 풍모를 지니게 될까. 무너진 것을 바로 세우는 것, 어찌 기쁘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마는, 이런 낯선 이질감은 아니 함만 못하지 않은가.

해묵은 돌과 새로운 돌을 섞어 가지런히 이를 맞추어 쌓은 석축에도 누대를 거쳐 이서 시간이 쌓였으면 좋겠다. 천년만년 세월이 흘러 이런 이질감도 사라지고, 석축의 자취만으로도 숙연해지는 그런 시간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절터로 오른다. 절터 가득 빈 충만함이 채워진다. 여러 차례의 발굴에도 아직 미궁인 절터다. 남겨진 유구의 화려함만으로, 회랑의 존재만으로도 영암사의 격이 왕실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 결론은 아직 이르다.

절터를 빠져나와 덕만마을에 차를 세웠다. 주변 풍광을 살필 요량으로 걸어가 볼 참이다. 저 멀리 빗속을 걸어가는 노승에게 달려가 영암사 터 가는 길을 물었다.

‘영암사 구질 말이오? 구질 앞까지 차가 가는데, 비도 오는데…. 뭐 할라꼬 걸어서 갈라캐요. 갔다가 절에 와서 몸이라도 녹이고 가세요.“

옛 영암사는 사라지고 절터 한편에 새로운 영암사가 생겼다. 그곳에 기거하는 노승이 길을 이른다. 예 절터를 ’구질‘로 말하는 노승은 저만치 앞을 내다보며 한 손으로 먼 언덕을 가리킨다. 저 멀리 모산재 하얀 바위 능선이 보인다. 질척대는 논둑을 질러 찔레 넝쿨 무더기무더기 엎드린 한적한 농로를 따라 먼 풍경으로 접어든다. 빈 들에서 느끼는 공허함이 사방에서 몰려온다. 그 가운데 나는 하나의 허허로운 풍경으로 저문다. 쓸쓸함에서 오는 기쁘고 충만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 분명 혼자이면서도 외롭지 않은 느낌, 비를 맞아 온몸이 흠뻑 젖고도 그저 기쁜 이 느낌 말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언덕을 넘으니 영암사 터는 거기 있었다. 나는 영암사 터 맞은편 묵밭으로 올라가 절터를 내다본다. 다시 온 것이 아니라 마치 이제 처음 온 것처럼.

글,사진 박시윤 지음, 디앤씨북스 펴냄


경주 감은사 터 –바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 박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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