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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미운 안경 / 김민자

부흐고비 2021. 6. 7. 09:13

오늘은 절에 가는 날이다. 남편은 절에만 가면 무엇 하느냐? 심보 하나 고치지 못하는데. 등 뒤에 대고 따끔한 법문을 해댄다. 마음 청소하러 가요, 심보 고치려구요. 톡 쏘아부치고 나서 후회한다. 기도하고 마음 다스리는 좌선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당신 미워하지 않고 한 번 더 양보하고 이해하고 웃어주는 실천이, 마음의 방을 청소하는 좋은 일이라는 걸 왜 모르겠소. 나이가 들수록 더 맑고 사려 깊어지기보다는 탁하고 옹졸해질 때가 많아진다. 하지만 마음의 눈이 흐려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요즘 들어 남편이 미워지는 날이 많다. 남의 몸에 중병보다도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프다더니, 내 큰 허물은 보이지 않고 남편의 작은 허물만 동산만하게 보인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것도 그저 하루 세 끼 먹고 살기 위해서다. 소박한 밥상에 단둘이 마주 앉아 밥그릇 옆에 놓인 국그릇처럼, 숟가락 옆에 놓인 젓가락처럼, 누구하나 없다면 정말 허전할거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남편에게 가져가 한 숟갈 내밀며 간을 보라고 하면, “음, 간이 내 입에 딱 맞네.”하며 맞장구치며 마음이 딱 맞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목숨과도 같은 밥이지만 그 밥 한 끼 때문에 가팔라지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할 때가 있다. 남편은 자신을 찬밥신세라고 한탄한다. 막 지어낸 밥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며 밥알이 서로 떨어질 줄 모르지만, 식은 찬밥이나 찬물에 만 밥은 남남처럼 알알이 흩어진다며 찬밥에 비유하는 것이다.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나가도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단다.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다고 말한다. 10년, 20년, 30여 년 동안 삼시 세 끼 밥을 먹으면서 제 밥 양(量) 하나 못 맞추는 게 사람이다. 밥뿐인가. 사랑의 양도 그렇고 소화할 수 있는 삶의 양도 그렇다. 부부란 좋아서 살다가, 어쩔 수 없이 살다가, 필요해서 살다가, 또 불쌍해서 살다가 나중에는 서로 묻어주려고 사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 어느 새 우리 부부도 근근이 맞추며 살아가는 시기에 들어섰다.

식탁에 앉아 남편이 미운 이유를 종이에 적어 본다. 전혀 이유가 없는 건 아닌데 왜 밉냐고 물으면 딱히 이유를 대지도 못하면서 괜히 미울 때도 있다. 관리비가 얼마 나오는지 알지도 못할 때, TV에 온 정신을 올인하고 있을 때, 지독하게 인색할 때, 지나치게 보수적일 때, 안동양반 행세할 때 등등. 그 속을 아는지 얄궂게도 남편은 “이번엔 대작이 분명 하겠어.”라며 한소리 한다.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고, 정문일침(頂門一鍼)이다. 정수리에 침 한 대를 놓는 것처럼 아주 적절한 충고 한 마디를 던지고 간다. 호된 참말보다는 글을 잘 쓸 확률이 거의 없어도 ‘당신도 노력하면 분명히 잘 쓸 수 있을 거야’하는 신빙성 없는 거짓말이라도 해주면 힘이 날 텐데, 선의의 거짓말이 더 큰 힘이 되고 큰 용기를 주기도 할 텐데 남편이 밉다.

어느 해 네티즌이 뽑은 최우수 작품이라고 하는 이런 글이 생각난다.

남편이 미울 때마다 아내는 나무에 못을 하나씩 박았습니다. 나무에는 크고 작은 못이 수없이 박혀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남편은 아내 몰래 나무를 안고 울었습니다. 그 후부터 남편은 변했습니다.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며 아꼈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남편을 불렀습니다. “여보! 이제는 끝났어요.”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아직도 멀었소, 못은 없어졌지만 못자국은 남아 있지 않소?” 아내는 남편을 부둥켜안고서 고마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만 헤아려 줄 수 있다면 지워지지 않는 상처자국은 가슴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맞벌이를 할 때는 적당한 간격과 거리가 있었다.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남편과 거의 붙어살다시피 하다 보니 남편이 못난 점만 자꾸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오랜 세월을 함께 걸어온 부부는 닮아가기도 하나보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이 한다. 남편은 창문을 열러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우두커니 서 있다. 깜빡깜빡하는 것도 닮아가고 있다. 잠시 연민의 정이 스친다. 이럴 때는 내 마음의 온도를 높여 고맙고 좋았던 일, 미안했던 일들을 돌아보고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 본다.

사람에게도 여백이라는 것이 있다. 꽉 찬 것이 아니라 상대편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사고의 여백.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의 여백. 이런 여백이 있어야 부부란 진정 아름다운 것 아닐까. ‘세상의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반과 반의 여백에 있다’라는 말도 있다. 반이란 절반을 의미하기도하고 동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저 존재할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사람, 그게 바로 동반자다.

안과 증상 중에는 노안이라는 것이 있다. 40대 문턱에 들어서면서 나에게도 노안 증상이 왔다. 우리 신체가 노화되면서 생겨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노안이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이 잘 안 보이듯, 멀리 있는 남편의 허물만 잘 보이고 가까이 있는 내 허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젠 흐린 시야만큼 남편의 허물을 두루뭉수리 덮을 수 있으면 좋겠다. 슬그머니 미운 안경을 벗어놓고 사랑의 안경을 바꿔 끼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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