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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못갖춘마디 / 윤미애

부흐고비 2021. 6. 4. 13:15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그분이 오셨다. 섣달 열여드레 시린 달빛 받으며 오신 모양이다. 서걱대던 댓잎도 잠든 시각. 제주가 위패에 지방을 봉하자 열린 대문사이로 써늘한 기운 하나가 제상 앞에 와 앉는다.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망설이다 들어온 걸음일까. 촛불은 병풍에 두 남자의 실루엣을 그리며 천장을 향해 솟는다. 허리가 꾸부정한 제주가 한 순배 술을 올리고 용서라는 절을 하자, 고개 숙이고 있던 그의 아들은 신뢰라는 절을 한다. 망자의 아들과 그 아들의 업둥이가 지내는 내 아버지 제사 날이다.

큰 오빠는 아버지에게 못갖춘마디 같은 자식이었다. 깨진 유리온실 속의 시들어 가는 화초 같은 아들이었다. 가슴여미는 아픔으로 무섭게 스치거나 소용돌이치다가 비워진 쉼표와 마지막 마디의 음표가 만난 후에야 완성되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자식 때문에 더 많이 아파야했고 더 많이 내어주고 보듬었는지도 모른다.

자식 셋을 연이어 잃은 아버지의 상심은 컸다. 품에 안아보지 못한 자식들로 인해 외아들로 자란 아버지는 한동안 고통 속에서 살았다. 그 일로 쫓겨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찾아 나선 걸음에 얻은 자식이 큰 오빠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태어나자마자 골골대며 잦은 병치레로 부모님의 애간장을 어지간히도 태웠다. 시오리 신작로 길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는 콜록거리며 담요에 쌓여 병원을 오가는 오빠가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아버지 생의 여린내기 음반 위에서 불안정하게 구르고 있는 선율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 후, 내리 아들 딸 넷을 더 얻어 여린내기로 시작된 아버지의 삶은 음역을 넓혔다. 가난했지만 자식으로 인해 마음만은 부자로 살았던 그때, 아버지의 인생연주라는 선율은 안정감 위에서 봄 아지랑이처럼 다복한 꿈을 꾸며 따뜻하게 피어올랐다.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무릎을 독차지하고 응석만 늘어가는 큰오빠 때문에 형제간에 엄살, 정 투정이라는 나지막한 외침들로 아버지의 악보선율은 그리 매끄럽지는 못했다.

약해진 마음이 더 문제였다. 허약한 몸을 무기삼아 오빠는 동생들의 내리사랑까지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형의 도움을 받아야 할 오빠들이 되레 신발 안 돌멩이 같은 그의 가방을 메고 먼 등하굣길을 오갔다. 나와 여동생도 노는 시간이면 손톱 밑 가시 같은 오빠를 살피려 달려갔다. 또래들한테도 따돌림을 당해 외톨이가 되어가는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형제들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어쩌다 미처 그를 돌보지 못해 다치거나 앓아눕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이 날아들었다. 그에 상반되는 벌도 달게 받아야 했다. 보통빠르기의 4분의 3박자, 내림나장조인 아버지의 선율은 못갖춘마디로 인해 가사와 마디가 불일치해 자연스럽지 못했다.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로인해 우리들은 일찍이 가족이란 청하지 않아도 내리는 눈비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 거역할 수 없는 섭리 앞에 작은 나를 느끼며 순응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나이가 들어도 오빠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점점 더 게을러지고 나태해져 갔다. 맏이로써의 책임감도 신뢰도 저버렸다. 어렵게 벌어 보내온 다른 오빠들의 돈마저 사업자금으로 탕진했다. 부도를 내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에도 아버지는 모든 전답을 빚쟁이들한테 내어주고 오빠를 찾아다녔다. 미덥지 못한 오빠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건 아버지였다. 우리는 하나, 둘 아버지 곁을 떠났다. 나 또한 평생 자식 편애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앙칼지게 대들어도 봤지만 그를 향한 당신의 믿음에는 도돌이표도 쉼표도 없었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혈육 인데. 같이 가야지” 하면서.

오빠는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기고서야 결혼을 했지만 생산을 하지 못했다. 그 원인이 당신 아들한테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아버지는 나오지 않는 헛기침 두어 번으로 아린 속을 달래는 듯 했다. 장손으로 조상보기 부끄럽다며 양자들이기를 권하는 일가친척들의 등살에도 아버지는 반응이 없었다. 부실한 몸에 가진 것 없는 오빠에게 양자 줄 사람 또한 없어 보였다. 세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분열이라는 뜨거운 대립과 융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 마디라는 능선을 불협화음으로 숨차게 넘어오던 아버지의 연주는 절정에서 숨고르기가 필요해보였다.

그해 시월, 삶은 완벽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기에 맞잡을 두 손이 필요했을까? 누군가 대문 앞에 놓고 간 업둥이를 오빠는 숙명처럼 거두었다. 그리고 그 업둥이를 안고 온 사람이 바로 당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조금씩 변해 갔다.

마지막에야 완성되는 사람이 있다. 그 무엇에 대해 절실한 결핍을 느끼면서 아주 느리게 성숙했던 내 오빠가 그랬다. 똑똑하고 건강했던 형제들 속에서도 결코 낙오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힘이었다. 즉흥적으로 벌하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실수도 게으름마저도 껴안고 용서하며 기다려주었던 아버지. 헌신과 평범함으로 못갖춘마디의 빈틈을 아우르고 포용력을 보여줌으로써 사랑과 구원이라는 완성된 연주를 이끌어 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게 우리네 삶이다. 때론 놓친 삶이라도 되돌이표로 되돌려 다시 갖춘 삶을 살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가 없다. 연주자들은 말한다. 못갖춘마디를 연주할 때는 앞에 한 박자 쉬는 부분을 명확하게 느껴야 된다고. 그래야만 막판 셈여림의 조절이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놓친 한 박자도 한 번 더 믿어주고 보듬어 주면 마지막에는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진리를.

아버지의 말년은 평온했다. 오랜 병상생활을 하면서도 영특한 업둥이로 인해 일생 다하지 못한 즐거움을 누리셨다. 큰아들의 늦은 성공으로 여유와 효도를 받으며 꼭짓점의 마지막 음표를 완성한 후에야 생을 마감하셨다. 누군가가 그랬다. 결코 갈대는 약한 식물이 아니라고. 속에서 자라나는 새끼 갈대가 바람에 깔리지 않고 자라기를 바라며 지켜주다 저 혼자 힘으로 버틸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몸을 뉘인다고. 갈대가 여름까지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던 그 이유처럼. 그렇게 살다 가셨다.

아버지가 보인다. 생각을 접어보면 그의 사랑과 좌절도 보인다. 아버지를 아버지라는 틀 속에 가둬 놓은 채 기대하거나 요구하기만 했던 지난날들. 이상하다. 아이 다섯을 키우고 이제 겨우 아버지를 이해했을 뿐인데 사랑하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인 것이. 놓친 못갖춘마디의 첫음절을 붙잡고 마디마디 넘어오던 아버지를 기억하면 내 안에 내재되어있는 꿈이 일어나 춤을 춘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제사는 나 자신과의 교감이기도 하다.


윤미애 수필가: 1956년 경북 포항 출생,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 수필대상, 포항소제문학상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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