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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오래된 냉장고 / 류영택

부흐고비 2021. 6. 7. 14:12

윙 소리를 내며 냉장고가 돌아간다. 이십오 년을 고장 한 번 없이 늘 한결 같은 소리를 내고 있다.

냉장고를 들여놓던 날 우리 가족은 외식을 했다. 아내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를 안고, 어머니는 아이의 포대기를 든 채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보니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저녁 먹을 시간이 한참이 지났는데도 배고픈 줄도 모를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보통날이 아니었다. 오늘부로 문간방 류 씨라는 호칭에서 놓여나는 날이었다.

아내와 나는 문간방에서 몇 년을 사글세로 살았다. 하지만 우리 부부보다 정작 고생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삼칠일이 지나고부터 아내가 다시 직장에 나가게 되자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게 됐다. 좁아빠진 단칸방에서 식구 넷이 생활을 하다 보니 불편한 것은 당연지사지만, 어머니는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행여나 당신께서 신혼부부의 꿈같은 시간을 방해 하는 것은 아닌가. 아내와 내가 야간작업을 하고 아침에 퇴근을 하면 어머니는 아이를 들쳐 업고 이웃집으로 피신가기에 바빴다.

방두칸짜리 전셋집으로 이사를 했으니 이제 부엌문을 열고 들어 올 때마다 헛기침을 한다거나 애꿎게 세숫대야를 차지 않아도 된다. 내가 노망이 들었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느라 문을 열다말고 당황해하며 황망히 돌아섰던 일을 생각하면 홀가분해져오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전셋집을 계약 하던 날, 어머니는 냉장고를 샀으면 했다. 보증금도 겨우 맞췄는데 수중에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아내와 나는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내년에 사자고 했다.

‘아나.‘ 어머니는 다발 돈을 내놓으며 냉장고를 사라고 했다. 이게 웬 돈일까. 아내와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봤다.

"장가 갈 때 해줘야 되는 긴데……."

뭔가에서 놓여난 듯 어깨가 한결 가벼워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달리 돈이 나올 데는 없을 테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아마도 마늘을 판돈 같았다. 어머니는 틈이 날 때마다 아이를 들쳐 업고 고향에 내려가셨다. 커다란 대야에 아이를 눕혀놓고 텃밭에다 마늘농사를 지으셨다. 어머니는 마늘을 판돈으로 아이에게 먹일 우유도 사고, 옷과 장난감을 사주기도 했다. 변변히 용돈도 못 드렸는데 뭉텅 돈을 만드느라 동생들이 준 용돈까지 꼬깃꼬깃 아껴놓으신 것 같았다. 어머니는 결혼 예물로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이 편치 않으셨던 것 같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입가에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전셋집으로 이사 간 것도 그렇고, 방안에 덩그렇게 놓여있는 냉장고를 생각하니 이게 꿈인지 생신지,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가 않는 모양이다.

아내가 아이를 받아 안으려 하자 너희나 많이 먹으라며 어머니는 손사래를 쳤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자신이 먹는 것보다 자식이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했다. 돈이 아까워 그런 것이지 아무려면 맛있는 음식을 싫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찌하면 고기를 드시게 할 수 있을까. 돈 걱정에서 놓여나게 하려면 정신을 빼놓는 일밖에는 없다.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수다를 떨어야만 한다.

"엄마, 기분이 좋으시죠?"

'쪼매만 더 참으소.' 이런 식으로 가면 머지않아 아파트도 사고 자가용을 굴릴 수 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때가 되면 어머니를 모시고 세상구경 다 시킬 것이라며 큰소리를 치며 불판에 구워진 고기를 슬쩍슬쩍 어머니의 그릇에 갖다 날랐다. 기분이 좋으신지 허허 웃음을 내놓는 어머니의 틀니에는 씹다만 고기뭉치가 갱엿처럼 묻어났다.

어머니는 냉장고를 신주단지 다루듯 하셨다. 잠시만 윙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귀를 갖다 대고는 "야야, 아범아 이게 고장 난 것 아이가?" 멀건 눈을 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일일이 설명을 하려면 끝이 없을 것 같고, 그래야 전기를 많이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전기세가 많이 나올까봐 웬만해선 냉장고 문을 열지 않았다. 날마다 뽀얀 수건으로 겉만 닦으셨다. 언제, 이 안에다 고기도 사 넣고 갈치며 고등어를 채워 넣을 수 있을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우리 집 냉장고에는 먹을거리를 꽉꽉 채워본 적이 없다. 냉장고에는 늘 양파, 김치, 호박,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파트로 이사를 오고부터 냉장고가 작다며 아내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젠 냉장고가 찬장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아내는 찬장에 넣어두어도 될 사소한 것 까지 냉장고에 넣었다. 지난날과 달리 냉동고에도 고기가 넘쳐났다. 나는 냉장고 안을 들어볼 때마다 '할마시 지금까지 살아계셨더라면' 이다음에 잘 살면 냉장고에 먹을 것으로 가득 채우겠다며 어머니에게 허세를 부렸던 그날 일을 떠올리곤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내는 냉장고가 좁다는 말을 노래삼아 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나와 의논도 않고 일을 저지르고 말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이 앞섰다. 새로 냉장고를 들여 놓으면 지금의 이 냉장고는 어찌하지.

아내는 그런 일일랑 자신에게 맡겨놓고 새 냉장고를 사자고 했다. 아내의 눈치를 보니 헌 냉장고를 얼마간의 값을 쳐서 내다 팔 것 같았다. 이게 어떤 것인데. 헌 냉장고를 그렇게 없앨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헌 냉장고를 내가 일하는 가게로 옮겨놓았다.

어머니가 사 주신 냉장고, 나는 집에 있는 대형냉장고보다 가게에 있는 헌 냉장고가 더 정이 간다. 비록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때는 그 나름대로 희망이 있었다. 제대로 걸음마도 못 걷는 아이를 보며, 저놈을 공부시키면 판검사는 문제없을 것이다 희망을 걸기도 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머지않아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될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무엇보다 소중했던 건 자신감이었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하룻밤만 자고나면 원기를 회복하는 젊음이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안 될 것이 없는 이루고야 말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삼일 웃고 삼일 운다는 말이 있다. 장사가 삼일만 잘 되면 기고만장 세상 어느 재벌도 부럽지 않고, 반대로 삼일을 허탕 치게 되면 손수레에 신문지를 수집하는 할머니가 부러울 때도 있다.

오늘 장사가 안 되면 내일은 잘 되겠지. 일주일을 허탕 쳐도 결코 어깨가 쳐지거나 한숨을 쉬지 않았었는데. 나이가 들어 그런지, 경기가 좋지 않아 그런지 지금은 하루만 장사가 안 되도 걱정이 된다.

수입이 안 좋다며 한숨을 쉬는 아내를 향해, 걱정 말라며 큰소리를 뻥뻥 치던 지난 날 그 배짱은 어디로 가고, 내일은 손님이 찾아줄까. 마음이 불안하고 자꾸만 초조해진다. 잔뜩 쳐져있는 내 모습을 보며 내일은 잘 될 거라고 아내가 위로를 해올 때마다 오히려 내가 한숨을 내놓는다.

오늘은 기분 전환 겸 외식이라도 할까. 그러면 한결 기분이 나아지려나. 냉장고의 물병을 꺼내들고 냉수를 들이켠다. 아니야, 기분 전환은커녕 오히려 기분을 망치고 말거야. 아내와 아들딸, 맛있다며 볼을 씰룩거리며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며, '많이 무라' 지난 날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낮에 이것저것 주섬주섬 주워 먹었더니 입맛이 없다며 주머니걱정을 하며 딴전을 피우지나 않을까. 아직 어머니 나이가 되려면 한참이나 멀었는데. 벌써부터 나약한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싫다. 아니 내 스스로에게 겁이 난다.

물병을 넣고 냉장고 문을 닫는다. 윙하고 돌아가는 냉장고 소리가 어머니의 숨결처럼 느껴진다. 휴, 길게 한숨을 내놓는다. '엄마, 나 참 못났죠?' '그래 이놈아, 사내자식이 그렇게 패기가 없어서야!' 나를 나무라는 것 같다.

냉장고도 속이 차야 돌아가는 기분이 날 것 아닌가. 허리끈만 졸라맨다고 능사는 아니지. 인생 별건가.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는 거야. 물병하나만 달랑 들어있는 냉장고에 희망과 야망,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채워 넣어야겠다. 잠시 작동을 멈추고 있던 냉장고가 윙하고 다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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