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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돌매 / 류영택

부흐고비 2021. 6. 7. 14:11

콩콩 마늘을 찧는다. 아래층에 소리가 울릴까봐 사타구니에 백철절구를 끼고 마늘을 찧는다. 절굿공이에 빗맞았는지 메뚜기처럼 마늘한쪽이 절구를 타고 넘는다. 어디로 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손을 뻗는다. 겨우 손이 닿았지만 슬슬 짜증이 난다.

믹스기로 갈면 될 텐데 굳이 절구에 찧어달라는 아내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나는 일에서 놓여나고 싶어 물끄러미 아내를 바라본다. 아내는 보채는 아이 보듯 두 눈을 치켜뜬다.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것 같다. 나는 반항이라도 하듯 쿵쿵 공이를 내리찧는다.

"그게, 그렇게 힘들어요?"

"믹스기로 갈면 편하잖소!"

"찧는 것과 가는 게 같아요!" 아내의 말에 뚱한 표정을 짓지만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내 말마따나 불린 콩을 믹스기에 가는 것은 봤어도 마늘을 가는 것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잠시 멍해 있던 나는 다시 절구질을 한다. 콩콩 마늘을 찧다보니 유년시절 마당한구석에 놓여 있던 돌매가 눈앞을 스쳐간다.

'갈다와 찧는다.' 서로 뜻이 다른 것처럼 절구와 매는 생긴 것부터 다르다. 절구는 절굿공이로 곡식을 찧기 좋게 속이 움퍽 파졌지만, 매는 수매와 암매가 짝을 이루고 있다.

생긴 것이 다른 것처럼 절구는 수직, 매는 수평이다. 절구는 일방통행 한쪽이 내리치지만 매는 그렇지가 않다. 서로 부둥켜안고 돌아간다.

맞물려 돌아가는 매는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암수가 배를 맞대고 있는 것을 보면, 남녀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원초적 모습을 하고 있다. 암매가 여자라면 구태여 여성상위시대라며 부르짖지 않아도 태초부터 여자가 남자 위에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수매는 아래쪽에 그냥 깔려 있는 게 아니다. 가만히 드러누워 있지만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암매를 틀어잡고 있다. 수매의 중심에는 수쇠가 있다. 수쇠는 암매를 잡아주는 축이다. 수쇠가 중심에 턱 버티고 있는 한 암매는 원을 벗어날 수가 없다. 조화의 묘미, 수매는 져주는 척 할 뿐이지 결코 지고 있는 게 아니다.

아내와 나는 한동안 티격태격 많이도 다퉜다. 우리는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신경전을 벌였다.

아내와 나는 성격이 정반대였다. 나는 성질이 급했고 아내는 꽁한 편이었다. 나는 화가 나면 팩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때뿐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풀렸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정작 내가 화를 낼 때는 대꾸도 않던 아내는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아내와 시장을 보러가게 됐다. 몇 걸음 앞서 걷던 아내는 자리에 멈춰선 채 쌩긋이 미소를 지었다. 결혼하고 몇 달이 됐지만 처음으로 함께 시장을 보러가니 기분이 좋아 그런 것 같았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아내는 채소가게에 들려 열무도 사고, 어물전에 들려 갈치도 사야겠다고 했다. 나는 아내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맞잡은 손을 크게 흔들었다.

채소전에 쪼그려 앉은 아내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내 눈에는 그게 그것 같은데 아내는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막상 열무 단을 손에 들고 보면 잠시 전 잡았던 그 다발이 커 보이는 것 같았다. 저러다 주인한테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닐까. 무더기를 뒤적이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자꾸만 조갑증이 났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물전을 찾은 아내는 아까와 같은 행동을 했다. 다른 게 있다면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며 가격만 묻는 것이었다. 나는 빈손으로 돌아설 때마다 창피스럽기도 하고 지겹기도 했다. 괜히 따라나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따라오나 봐라!" 참다못한 나는 쓴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단단히 삐친 것 같았다. 잠시 저러다 말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내는 부뚜막에 내팽개쳐 놓은 갈치가 썩어가도, 열무가 시들어가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누가 이기나 보자며 힘겨루기를 하자는 것 같았다. 나는 썩어가는 갈치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정말 굶고 있는 걸까. 태무심 하려했지만 슬슬 걱정이 돼왔다. 나는 집안 구석구석을 살폈지만 빈우유통은 고사하고 빵부스러기도 눈에 띄지 않았다. 사흘, 나흘, 시간이 지날수록 밥을 굶는 아내보다 내 속이 더 타들어 갔다. 나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한 해에 한두 번, 나는 아내와 싸움을 해오면서 싸우지 않는 방법을 터득했다. 말을 가슴에 담아두는 사람에게는 말을 않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천성이라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때그때 성질을 부리기보다는 아홉 번 참고 한번 화를 냈다. 정말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차라리 입을 닫아버렸다.

처음에는 아내의 단식이 싫어 화를 참았지만, 화를 참다보니 서로의 입장이 바꿔버렸다. 여차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리에 누었던 아내가 오히려 내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혹여 삐치지나 않았나? 아내는 조잘조잘 말이 많아졌다.

오랜 세월 그렇게 살다보니 이젠 성격마저도 바꿔버렸는지. 나는 아내가 뭐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듣고만 있다. 아내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자신이 이긴 줄로 알고 있다. '보약 한 첩 먹어야 갰네요.' 기력이 쇠해 보인다며 승자(勝者)의 여유까지 부린다. 아내의 그 말에 맥없이 웃어주지만 나는 한 번도 내가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방법이 바뀌고, 돌매처럼 상하 위치를 바꿨지만 매일같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부부사이에 어찌 조용할 수만 있겠는가. 드르륵, 암매와 수매의 거친 면이 마찰을 일으켜야 곡식이 갈리듯이 아내와 나는 크고 작은 일로 가끔 삐거덕거릴 때도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갈치를 썩힌다거나 열무를 시들게 하는 일은 없다. 아내는 했던 말을 반복해 늘어놓다가도 내가 입술을 깨물면 한발 물러난다. 암묵 중에 지금까지 그 선을 지켜져 오고 있는 것은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 그런 것이다.

늘 자신이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내는 한 번쯤 져줘야 그나마 면(面)이 서지 않겠는가. 내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그러는 것이고, 나는 입술을 깨물기만 해도 한발 물러서주는 아내의 모습에, 그래도 겁내는 구석은 있구나. 져주는 척 했을 뿐 열 번을 다 이긴 줄로 알고 있다.

암매와 수매가 맞물려 돌아가려면 그 중심에 수쇠가 있어야 하듯, 아내와 나,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생각들이 어우러져 '우리'라는 가족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진한 마늘향이 방안에 가득하다. 눈이 따갑도록 맵고, 두 팔이 뻐근해오지만 믹스기로 간 것보다는 절구로 찧은 마늘이 더 진한 향을 풍기는 것 같다.

콩콩 마늘을 찧은 절구를 내민다. 절구를 받아든 아내가 쌩긋이 웃는다. 나는 괜스레 머리를 긁적인다. 오늘은 내가 열 번을 다 지고 만 것 같다. '갈다와 찧는다.' 살다보면 때로는 돌매가 아닌 절구로 찧을 것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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