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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황금찬 시인

부흐고비 2021. 6. 9. 08:31

어머니 / 황금찬
어머니/ 어머니는 항상/ 고향의 하늘 아래에 사십니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손에선/ 고향의 흙냄새가/ 언제나 풍겨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젊어서부터 늙으실 때까지/ 일을 하셨습니다./ 모를 심으시고/ 고추밭을 매시고/ 감자를 캐셨습니다./ 그리고 남루한 옷을 입으시고/ 가난을 견디시며/ 우리들을 기르셨습니다.// 어머니/ 그날 어머님은/ 종일 굶으셨지요/ 저녁이라고 콩죽 한 사발/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그것마저도 배고프겠다고/ 다 저희들에게 나누어주시던 어머니/ 그때 저는 왜 그렇게도 철이 없었던지/ 어머님이 굶으시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진달래가 피는 봄/ 어느 날 제가 늦게 돌아오는 밤이면/ 동구밖 느티나무 옆에/ 별을 이고 서서/ 제 발소리가 저만치 들려오면/ 금찬이냐 부르시던 어머니/ 지금도 그 음성 그대로/ 귀에 남아 있습니다.// 쇠고기국에/ 이팝 좀 먹어봤으면/ 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어머니,/ 그러나 저는 어머니의 그 마지막/ 소원도/ 들어드리지 못한 불효자였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 황금찬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네게 일러 주는 말을/ 잊지 말고 자라나거라.// 네 음성은/ 언제나 물소리를 닮아라./ 허공을 나는 새에게/ 돌을 던지지 말아라.// 칼이나 창을 가까이 하지 말고/ 욕심도 멀리 하라.// 꽃이나 풀은/ 서로 미워하지 않고/ 한 자리에 열리는/ 예지의 포도나무// 강물은 멎지 않고 흐르면서/ 따라 오라/ 따라 오라고 한다.// 하늘을 바라보며/ 강물같이 흘러/ 바다처럼 살아라.// 포도송이에/ 별이 숨듯…/ 바닷속에 떠 있는/ 섬같이 살아라 하셨다./ 어머님이-//

 

어머님의 아리랑 / 황금찬
입술이 푸르도록 꽃을 먹어도/ 허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런 날에/ 어머님이 눈물로 부르던/ 조용한 아리랑//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엔/ 가난도 많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보릿고개 / 황금찬
보릿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블랑은 유럽,/ 와스카란은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배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아의 보릿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별을 찾아라 / 황금찬
별을 찾아/ 나는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러나 찾는 별을 찾고/ 최후의 장막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물음에 나는 쉽게/ 답을 낼 수가 없다./ 찾는 별을 찾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을 나는/ 한번도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사람은/ 한낮의 유리조각을 별이라 했고/ 어느 여인은/ 떨어져 시들어가는/ 꽃잎을 별이라고 했다./ 찾는 별을 찾았다고/ 깃발을 흔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손가락의 보석 반지를/ 가리키며 찾던 별이란다./ 내가 찾는 별을/ 한번 만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R이라는 여인을 만났을 때/ 그는 수선화 한 송이를 내게 주었다./ 별이었다. 내가 찾아야 할 별이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내게 주었던/ 수선화를 도로 가지고/ 세상을 떠났다./ 나의 별은/ 내가 찾는 별은 어느 하늘에/ 떠 있을까/ 어느 마음 호수에/ 잠기어 있을까/ 별이여/ 내게로 오라/ 이제 성문이 닫히기 전에/ 별이여--.//

 

심상 / 황금찬
욕구불만으로 우는 놈을/ 매를 쳐 보내고 나면/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는 새소리도/ 모두 그놈의 울음소리 같다./ 연필 한 자루 값은 4원/ 공책은 3원/ 7원이 없는 아버지는/ 종이에 그린 호랑이가 된다./ 옛날에 내가/ 월사금 4십전을 못냈다고/ 보통학교에서 쫓겨오면/ 말없이 우시던/ 어머님의 눈물이 생각난다./ 그런 날/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도/ 반갑지 않다./ 수신 강화 같은 대화를 귓등으로 흘리고 돌아오면/ 울고 갔던 그놈이 잠들어 있다./ 잠든 놈의 손을 만져본다./ 손톱 밑에 때가 까맣다./ 가난한 아버지는/ 종이에 그린 호랑이/ 보릿고개에서/ 울음 우는/ 아버지는 종이 호랑이/ 밀림으로 가라/ 아프리카로 가라/ 산중에서 군주가 되라/ 아! 종이 호랑이여./ ...가슴 한구석이 많이 아파온다.//

 

촛불 / 황금찬
촛불!/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 때부터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누구의 정신을 배운/ 조용한 희생일까.// 존재할 때/ 이미 마련되어 있는/ 시간의 국한을/ 모르고 있어/ 운명이다.// 한정된 시간을/ 불태워 가도/ 슬퍼하지 않고/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춤추는 촛불.//

 

촛불 / 황금찬
촛불을 켜면/ 그 촛불 한 자리만한/ 크기의 어두움은/ 조용히 물러가고/ 그 어두움이 물러간 자리엔/ 광명이 찬다./ 그 음성이 내 마음에 오면/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주는 것은 촛불이 아니다./ 그것은 조용한 음성이다./ 어두움이 물러간 자리에/ 광명이 오듯/ 그렇게 마음이 밝아지는 것이다.// 어두운 세상에/ 내 마음 밝혀주는 것은/ 오직 그의 음성뿐이다.// 그의 음성으로/ 내 마음에 촛불을 켜고/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든다.//

 

남대천 / 황금찬
어산동에서 발원하여/ 너는 흐르고 있다.// 너는 마을 사람들처럼/ 신도 신지 않고/ 맨발로 흐르고 있구나// 풀숲과/ 돌밭을 지나도/ 발이 아프지 않더냐/ 한마디의 시름도 없이/ 흘러 바다로 가는구나.// 어느 날/ 냇가에서 나는 너를 보고/ 울기도 했느니// 너는 내게/ 귀를 열어라/ 입을 열라고 했느니// 지금이야/ 생각난다./ 귀를 열어도/ 듣지 말아라./ 입을 열어도/ 말하지 말아라./ 그래 마음 맑게 흘러라.// 나는 너를/ 남대천이라고 했고/ 너는 한 권의 책이라고 했다.// 그래 너는 나에게/ 읽으라고 했다./ 내가 너를 다 읽는 날/ 나도 비로소/ 한 권의 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너를 다 읽지 못하고 있다./ 너를 다 읽는 날/ 나도 물이 되리라 했다.//

 

별과 고기 / 황금찬
밤에 눈을 뜬다./ 그리고 호수 위에/ 내려앉는다.// 물고기들이/ 입을 열고/ 별을 주워먹는다.// 너는 신기한 구슬/ 고기 배를 뚫고 나와/ 그 자리에 떠 있다.// 별을 먹은 고기들은/ 영광에 취하여/ 구름을 보고 있다.// 별이 뜨는 밤이면/ 밤마다 같은 자리에/ 내려앉는다.// 밤마다 고기는 별을 주워먹지만/ 별은 고기 뱃속에 있지 않고/ 먼 하늘에 떠 있다.//

 

문(門) / 황금찬
기울어지는 시각/ 싸늘한 거리에 비가 내린다./ 운명처럼 마련된 내 생존의 길 앞에/ 모든 문은 잠기어 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이 절박한 지대에서/ 나는 몸부림을 치며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門은 열리지 않고/ 가슴에 박히는 수 없는 傷處/ 이것은 너무 심한 장난 같다./ 사람은 平生을 두고/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다 가는 것인가 보다./ 흘린 피는 「갈꽃」으로 피고/ 핀 「갈꽃」바람에 울다 그나마 지고나면/ 조용히 남은 보랏빛 傷處/ 千代를 두고 다시 萬年을/ 이 문 앞에서 비를 맞으며/ 울다 간 사람들―/ 나도 여기 서서 울고 있다.//

 

아침 / 황금찬
아침을 기다리며 산다./ 지금은 밤이래서가 아니고/ 아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을 맞으면/ 또 그 다음의 아침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아침을/ 이에 맞았고 또 맞으리/ 하나 아침은 기다리는 것이다.// 이미 맞은 아침은/ 아침이 아니었고/ 이제 맞을 아침이 아침일 것 같다./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 그 아침에 날아올/ 새 한 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수절 부근 / 황금찬
모두 울고 있다./ 이 계절엔.// 오고 있는가/ 비도 내리고 있는가/ 겨울이 풀린 계곡에/ 메아리도/ 울리고 있는가// 마음의 얼음도/ 풀리려는가/ 너와 나는/ 본래 적이 아니다/ 사랑이 오려는가// 이 반목의 계절은/ 이제 가고/ 이해의 바다가/ 열리려는가.// 우수절/ 강물도 풀리는데/ 나는 너를 미워할 수가 없구나/ 사랑하려고/ 죽기까지 사랑하려고/ 사랑 앞에는/ 원수도 없다고// 들려오는가/ 해빙의 나팔소리가/ 이 계절에/ 메아리처럼 울려오고 있는가/ 이 우수절에.//

 

한글 / 황금찬
한글은/ 우리말의 집이다.// 하늘의 뜻을 받아/ 우리말의 집을 지으신 분에게/ 나는 영원히 감사를 드린다.// 영혼의 말을/ 적는 글은 한글이다.// 내가 살아온/ 평생/ 나는 한글에서/ 우리들의 얼을 찾았고/ 겨레의 음성을/ 또 거기에서 들었노라.// 지금 그는 어찌되었을까/ 43년 동경 신지꾸/ 작은 우리의 책방에서/ 최현배님의 '우리말본'을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성도, 이름도, 고향도 모르면서/ 그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그는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알고 싶구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게 가르쳐주시던/ 한글/ 그 글자 속엔/ 어머님의 음성과/ 아버지의 음성이/ 지금도 숨쉬고 있다./ 한글의 모국어의 집이다.//

 

행복 / 황금찬
밤이 깊도록/ 벗 할 책이 있고/ 한 잔의 차를/ 마실 수 있으면 됐지/ 그 외에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지만 친구여/ 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연인은 있어야 하겠네// 마음이 꽃으로 피는/ 맑은 물소리/ 승부에 집착하지 말게나/ 3욕이 지나치면/ 벗을 울린다네.//

 

행복과 불행 사이 / 황금찬
길은/ 모든 길은/ 행복과 불행 사이로 나 있었다./ 나는 그 길을 가고 있다.// 바람이 파도를 일으킨다./ 내 배는/ 그 물결 위로 가고 있다.// 그네를 타고/ 앞으로 치솟았다간/ 다시 뒤로 물러선다./ 정지되면/ 행복도 불행도 아니다.// 삶이란/ 흔들의자에 앉는 것이다/ 앉는 순간부터/ 흔들리는 의자// 지혜와 의지로 어느 지점에다/ 그네나 의자를 잠시 더/ 머무르게 할 수 있다.// 흔들의자에 앉기까지는/ 신이 할 일이다./ 그 다음은/ 존재자의 철학이다.//

 

행복을 파는 가게 / 황금찬
사랑받기를 원하는가/ 사람아,/ 받고 싶은 사랑보다/ 한 3배쯤/ 남을 사랑하라./ 사람아//, 세상에는/ 행복을 파는 가게가 없다네/ 또 하나의 하늘을/ 창조하고/ 꿈의 성문을 열면/ 열대의 님프가 피워 올리는/ 이름 없는 꽃 한 송이// 보이는 것은/ 모두 순간적인데/ 그러나 보이지 않은 것은/ 영원한 강물// 신앙의 배를 띄우고/ 나 한 마리 백조// 등을 밝히고/ 잃어버린 구름 한 방울/ 그 속에 눈뜨는/ 청자에 그런 새 한 마리//

 

사랑은 / 황금찬
사랑하라/ 그것은 자유이다./ 사랑하지 말아라./ 그것도 자유이다.// 가난은/ 선도/ 악도/ 아니다.// 꽃도 될 수 없고/ 벌레가 될 수 없다.// 과거와 미래/ 그 중간 층계에/ 앉아서/ 진종일// 파도가 밀려가고/ 또 밀려오는 것을/ 보고 있다.// 사랑하라/ 자유를 향유하라// 천사여/ 나의 천사여.//

 

사랑이 자라는 뜰 / 황금찬
아직도/ 내 체온이 식지 않은/ 풀씨를 한 움큼/ 창 앞에 뿌려 놓고/ 새를 기다린다.// 늙은 참새 한 쌍이/ 날아와/ 마음 놓고/ 내 체온을 다 주워 먹었다.// 따사한 정에/ 허기를 면하고/ 몸이 풀려 서늘한 표정으로/ 목례를 하고// 얼마간 졸다가/ 구름밭을 지나/ 어디론지/ 날아가 버렸다.// 지금 창 앞에는/ 새가 두고 간 사랑이/ 풀잎으로/ 자라가고 있다.//

 

사랑과 지혜 / 황금찬
강물이 흐르다가/ 여울을 만나면/ 노래를 부른다.// 나무는/ 바람 앞에서/ 고독한 독백으로/ 구름을 이야기하고.// 나는 삶의/ 여울에선/ 언제나 울고 있다.// 꽃은 사랑으로/ 피고/ 잎은 지혜로/ 자라는데.// 이 밤에/ 외롭게 흘러가는/ 저 별 하나는/ 어느 곳에서 쉬게 될까.// 삶의 사랑과/ 죽음의 지혜를 모르는 나는/ 이 바람 앞에서/ 망각의 피리를 불고 있다.//

 

사랑의 눈 / 황금찬
집들의 눈은/ 창이고// 내 영혼의 창은/ 눈이다// 사랑은 수레바퀴와 같은/ 태양의 눈을/ 항상 뜨고 있었다.//

 

풀과 사랑 / 황금찬
풀은 나처럼 살고/ 나는 풀과 같이 산다.// 서로 미워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풀의 서민의식/ 나의 하늘/ 하늘이어라.// 우리는 똑같이/ 햇살밭에 서고/ 꼭 같은 색깔의 옷을 입는다.// 풀은 나로 하여 울고/ 나는 풀로 하여 웃는다./ 오늘도 웃고/ 오늘도 운다.// 풀이여,/ 이 시대의 슬픈 풀이여.//

 

출발을 위한 날개 / 황금찬
선구자의 길은 험하고/ 또한 가난하다/ 하지만 언제나 광명을 찾고/ 길을 열어 현재를 미래로/ 날아오르게 한다// 어둠 안에서 빛은 하늘이 되고/ 불의와 비정 안에서 선은/ 향기로운 장미의 꽃이 된다/ 이성의 칼날은/ 집 속에 숨어 있지 않고/ 바른 판단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내일의 소망은/ 더 크고 더 넓다/ 어제도 정의롭고/ 오늘도 의가 아닌 길은 가지 않지만/ 내일은 사랑으로 이루는 바다/ 그 바다 위에 구원의 배를 띄우라/ 이 일을 우리는 바라고 있느니// 열매없는 잎만 무성한/ 나무뿌리에 도끼를 놓았다고/ 예언하라/ 저 나단의 입을 빌어/ 하늘은 언제나 푸르라고/ 그렇게 일러야 하고// 이 땅의 올바른 지혜들을 위하여/ 다윗의 가락을 빌어/ 노래하여야 한다/ 선구자의 길은 좁고 험하지만/ 그 길에 하늘의 광명이 있느니/ 그것을 선택하는 이 시대의/ 빛나는 양심이 되자.//

 

보내 놓고 / 황금찬
봄비 속에/ 너를 보낸다.// 쑥순도 파아란히/ 비에 젖고// 목매기 송아지가/ 울며 오는데// 멀리 돌아간 산굽잇길/ 못 올 길처럼 슬픔이 일고// 산비/ 구름속에 조는 밤// 길처럼 애닯은/ 꿈이 있었다.//

 

달밤 / 황금찬
달을 보고 있었다/ 달이 익었다// 그 익은 달을/ 9월의 사과처럼 따/ 먹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들어올린 것은 바다였다/ 사랑의 손톱 자국도 없는/ 칡넝쿨 같은/ 바다였다// 우리가 달을 토해내자/ 바다도/ 수없이 많은 달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늘 / 황금찬
대답하라고/ 천 년을/ 흔들어 깨웠느니라// 들리는 것은/ 언제나 하늘에/ 파도소리// 따라가고 있었다/ 해가 뜨고/ 태양이 기우는/ 그 허공/ 외롭지 않았다// 반복되는 것은/ 아침이 열리는 것과/ 저녁이 오는 것일레// 갈릴리/ 호숫가에/ 발소리// 이제야 알겠노라/ 혼자 가는 것이라고/ 이제서야 알겠노라.//

 

나의 층계 / 황금찬
나의 처음 층계는/ 꽃이었다.// 갈수록 그것은/ 돌층계였다.// 그 위의 층계는/ 형극이었다.// 앞서간 사람들도/ 이 층계를 밟고 갔을까// 한 층계 사이가/ 천 린가, 만 리// 그들도 이 층계에서/ 방황했을까// 산다는 것은 피, 그리고 땀/ 다시 눈물이다.// 이쯤에서 머무를 수 없을까/ 나의 형벌을//.

 

바위와 나비 / 황금찬
바위에 나비가 앉는다./ 나비는 얼마동안/ 바위에서 꿈을 꾸다가/ 날아가버렸다.// 바위에는 나비의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았다./ 구름이 호수에 잠겼다 가도/ 체온을 남기지 않는다.// 내가 살던 자리엔/ 무엇이 남을까./ 한마디의 말이/ 그것은 풀벌레의/ 울음 같은 것이리.// 모두 빈 의자일 뿐이다./ 싸늘히 식어가는/ 메아리, 메아리./ 그래도 얼마간//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은/ 사랑했던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바다 위에 뱃길이/ 남아 있지 않는다.//

 

나비의 소녀 / 황금찬
그 나비의 소녀도/ 지금쯤 늙었으리// 구름의 언덕에서/ 장미의 노래를 부르던/ 나비의 소녀// 내가 염소를 몰고/ 언덕을 오를라치면/ 소녀는 단발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한떨기 장미꽃을 부르곤 했었지// 6월은/ 우리들을 슬프게 했었네// 소란스러운 강물/ 6월은// 나비의 소녀는/ 지금 어느 언덕에서/ 날고 있을까// 구름은/ 피어 있는데/ 장미의 노래는/ 들려오지 않네.//

 

              꽃씨 / 황금찬

가을 꽃씨를 받아/ 종이에 접는다./ 종이 속에 봄을 싸서/ 서랍 속에 간직한다.//

눈이 쌓인 날/ 뜰을 쓸고/ 받아두었던 꽃씨를 뿌려/ 들새들의 가슴에/ 황홀한 봄을/ 심는 것이다.//

봄은/ 들새들의 가슴 속에서/ 내일을 꿈꾸고 있다.// 그 찬란한 봄이/ 싹트는 것을/ 볼 수 있을까.//

꽃씨 속에/ 작은 소망을 심는다/ 기울어지는 계절에//

 

꽃 한 송이 드리리다 / 황금찬
꽃 한 송이 드리리다./ 복된 당신의 가정/ 평화의 축복이 내리는/ 밝은 마음 그 자리 위에/ 눈이 내려 쌓이듯 그렇게 -.// 꽃 한 송이 드리리다./ 지금까지 누구도/ 피워본 일이 없고/ 또한 가져본 일도 없고/ 맑은 향기 색깔 고운//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마음의 문을 밀고/ 계절이 놓고 가는 선물처럼// 잎이 살고/ 줄기가 살아나며/ 죽어가는 뿌리,/ 그리고 기후도 살게 하는// 신기한 꽃/ 그 한 송이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이여./ 어린 행복 위에/ 성장한 정신 위에/ 가난한 금고 안에/ 땅 흘리는 운영 위에/ 꽃이여, 피어나라.// 임술년/ 새날 아침부터/ 이 해가 다하는 끝날까지/ 피기만 하고/ 언제나 지는 날이 없는 꽃//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향기 또한 높아/ 하늘의 천사등도 부러워하는/ 그 꽃 한 송이를/ 축원의 선물로/ 드리렵니다.//

 

진실의 나무에게 / 황금찬
언제나 하늘의 입을 열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너 나무여// 바다 같은 귀를 열고/ 사랑의 이야기를 듣는/ 의로운 과실이여// 지금은 20세기말/ 진리를 위하여/ 저 언덕을 넘어야 하고/ 산악 같은 세파도/ 잠재워야 하느니/ 너 진실의 나무여// 이성의 칼날은 선한 꽃인데/ 불의를 일삼는/ 오늘의 녹슨 파편들이/ 이 시대에 홍수처럼/ 흘러가고 있다// 나무여/ 이 시대의 선한 나무여/ 사랑과 이해의 열매를/ 열리게 하라// 간혹 구름이나/ 새들이 날아와 길을 묻거든/ 나무여/ 사랑과 이해의 길이/ 여기 있다고 말하라// 나무여/ 말하려나/ 진실의 길은 언제나/ 등불 앞에 있다고/ 말하려나.//

 

바다 환상곡 / 황금찬
여름 바다에 오면/ 海員이 되고 싶다./ 비단 돛을 올리고/ 검은 해리 전설의 인어가/ 사랑을 찾아 헤엄치는/ 그 찬란한 아침에// 편지 속에/ 어느 독자가 보내준/ 해바라기씨 몇 개/ 지금 저 수평선/ 그 너머 꽃밭에서 피고// 물결에 쓸리어/ 천 년의 연륜 빛나는/ 조개껍질로/ 목걸이를 만들어/ 집시의 살결/ 검은 여인/ 그 긴 목에 걸어주고/ 돌아서리라.// 사랑의 비늘이/ 아직도 잠들지 않은/ 모래언덕에 앉아/ 피리를 불면/ 물새처럼 날아오는/ 바다 바다 여름 바다// 불꽃 같은 열기가 식고/ 바다에 등불이 꺼지면/ 이베리아 반도/ 어느 고독한 섬 물새처럼/ 파도소리가 그리워/ 빈 고동들이 울고 있어라.// 바다는/ 여름 바다는/ 사랑과/ 미움/ 그 사이에/ 살결 깊은 가슴으로/ 열리어 있었다.// 봄 밤 / 황금찬
봄밤엔/ 잠이 오지 않았네/ 이 밤에 내가 네게/ 할 이야기는/ 행복하고도 슬펐던/ 긴 이야기.// 목련꽃 가지에/ 창호지 초롱에/ 불을 켜 달아놓고/ 새벽이 올 때까지/ 편지를 쓴다.// 내 마음 언덕에/ 봄풀이 솟아나고/ 4월 바람은 꽃구름을/ 벽에 걸린 거울 앞까지/ 곱게 밀어올렸다.// 봄을 기다리던/ 겨울나무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밤 바다의 물결은/ 아직도 멎지 않고/ 나의 길고도 짧은 사연은/ 끝이 없었다.//

 

3월은 말이 없고 / 황금찬
얼음이 풀린 논둑길에/ 소리쟁이가 두 치나 솟아올랐다./ 이런 봄/ 어머님은 소녀였던 내 누님을 데리고/ 냉이랑 꽃다지/ 그리고 소리쟁이를 캐며/ 봄 이야기를 하셨다.// 논갈이의 물이 오른 이웃집/ 건아 애비는/ 산골 물소리보다도 더 맑은 음성으로/ 메나리를 부르고/ 산수유가 꽃잎 여는 양지 자락엔/ 산꿩이/ 3월을 줍고 있었다.// 흰 연기를 뿜어 울리며 방금/ 서울행 기차가 지나가고/ 대문 앞에서 서성이며/ 도시에서 올 편지를 기다리는/ 정순이의 마음은/ 3월 아지랑이처럼 타고 있었다.// 이 3월이/ 두고온 고향에도/ 찾아왔을까/ 천 년 잠이 드신 어머님의 뜰에도/ 이제 곧 고향 3월을/ 뜸북새가 울겠구나.// 고향을 잃어버리면/ 봄도 잊고 마느니/ 우리들 마음의 봄을 더 잃기 전/ 고향 3월로 돌아가리라./ 고향의 봄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4월이 오면 / 황금찬
언제부터 창 앞에 새가 와서/ 노래하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심산 숲내를 풍기며/ 4월의 바람이 불어 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산의 꽃이 바람에 지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꽃잎 진 빈 가지에 사랑이 지는 것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오늘 날고 있는 제비가/ 작년의 그 놈일까 ?/ 저 언덕에 작은 무덤은/ 누구의 무덤일까 ?// 4월은 3월보다/ 정다운 달/ 병풍에 그린 난초가/ 꽃피는 달// 미류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달/ 4월이다.//

 

오월이 오면 / 황금찬
언제부터 창 앞에 새가 와서/ 노래하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深山 숲내를 풍기며/ 오월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산의 꽃이 바람에 지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꽃잎진 빈 가지에 사랑이 지는 것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오늘 날고 있는 제비가/ 작년의 그놈일까?/ 저 언덕에 작은 무덤은/ 누구의 무덤일까?// 오월은 사월보다/ 정다운 달/ 병풍에 그린 蘭草가/ 꽃피는 달,// 미루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달/ 오월이다.//

 

6월 / 황금찬
6월은/ 녹색 분말을 뿌리며/ 하늘 날개를 타고 왔으니,// 맑은 아침/ 뜰 앞에 날아와 앉은/ 산새 한 마리/ 낭랑한 목청이/ 신록에 젖어있다.// 허공으로/ 날개 치듯 뿜어 올리는 분수/ 풀잎에 맺힌 물방울에서도/ 6월의 하늘을 본다.// 신록은/ 꽃 보다 아름다워라./ 마음에 하늘을 담고/ 푸름의 파도를 걷는다.// 창을 열면/ 6월의 액자 속의 그림이 돼/ 벽 저만치 위치에/ 바람없이 걸려 있다.// 지금 이 하늘에/ 6월에 가져온/ 한 폭의 풍경화를/ 나는 이만한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다.//

 

여름 여자 / 황금찬
장미밭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꺽어/ 머리에 꽂고/ 여름 바다로 간다.// 해변에 달이 뜨면/ 바다는 한 마리의 사자가 되어/ 장미꽃이 향기로운/ 사랑의 언덕으로 기어오른다.// 파도를 베고 누운/ 여름 여자는/ 바다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숭어 한 마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바람은 비파를 치며/ 바다에 떠 있는/ 장미꽃을/ 따라가고 있었다.//

 

가을바다 / 황금찬
지금 이 바다엔/ 아무도 없고/ 물새 한 마리와/ 나뿐이다.// 우리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다.// 너와 나는/ 항해사// 파도는/ 우리들의 길이다.// 가야 한다./ 저 하늘과/ 산맥을 넘어서// 바다는/ 인류의 눈물이다./ 물새가 울고 있다./ 나도 울고// 바닷가에선/ 장미꽃 한 송이도/ 울고 있었다.//

 

가을 / 황금찬
감나무/ 가지에/ 매미가 벗어 걸어놓은/ 여름옷/ 한 벌/ 밤 이슬에/ 젖고 있다// 가을에 / 황금찬
내 평생 넘은 고갯길에서도/ 찾지 못했다.// 신을 들고 걸으면서도/ 보지 못했다.// 가을 나뭇잎 한 장/ 물에 띄우고/ 그 위에 내려앉는 채색의 구름/ 손바닥에/앉아/ 무게를 갖지 않는/ 하늘 구슬/ 한사코 놓을 수 없는/ 늦가을 햇살이다.// 저녁 하늘은/ 구름으로 물들고/ 하늘 구슬은/ 나의/ 영원과/ 같이 있었다.//

 

가을 연인 / 황금찬
가을 벌레가 울고 있는가/ 내 사랑했던 여름의 연인은/ 서울 종로 마로니에 공원/ 식어가는 거리 위에/ 짙은 웃음소리만 남겨놓고/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86년의 여름도/ 지줄대던 빗소리도/ 내 연인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여름 연인의 빈 커피잔/ 교차로 위에 계절의 꽃잎지듯/ 싸늘한 우리들의 대화가/ 담기고 있다.//

 

늦가을비 / 황금찬
늦가을에/ 내리는 비 때문엔/ 우산을 준비하지 않아도 좋다./ 여름비처럼 세차지 않고/ 다정한 두 사람의 밀어같이/ 은혜롭다.// 가을비를 부르며/ 종로나/ 명동을 걸어본다.// 빈 커피잔에 담기는/ 가을 벌레소리// 여름 여인은 싸늘한 모래 위에/ 발자국만 남기고/ 지금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까?// 다시 돌아올까./ 그 발자국으로/ 여인아!// 기다리는 마음은/ 아직도 심중에 채 피지 못한/ 사랑의 꽃봉오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후회하지 않으리라./ 다시 가을비가/ 머리 위에/ 내리지 않는다 해도/ 나는 결코/ 후회하진 않으리라.//

 

낙엽시초(落葉詩抄) / 황금찬
꽃잎으로 쌓올린 절정에서/ 지금 함부로 부서져 가는 ‘너’/ 낙엽이여,/ 창백한 창 앞으로/ 허물어진 보람의 행렬이 가는 소리./ 가없는 공허로 발자국을 메꾸며/ 최후의 기수들의 기폭이 간다./ 이기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저 찢어진 깃발들,/ 다시 언약을 말자/ 기울어지는 황혼에,/ 내일 만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고궁에 국화가 피는데/ 뜰 위에 서 있는 ‘나’/ 이별을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문을 닫으라./ 낙엽,/ 다시는 내 가는 곳을 묻지 마라.//

 

겨울 나무 1 / 황금찬
다 버리고/ 네 앞에 섰다/ 겨울 나무// 지금 너처럼/ 여기가 바로 내가 서야 할/ 그 땅인가부다/ 겨울 나무.//

 

겨울 나무 2 / 황금찬
겨울 나무는/ 하나의 소슬한/ 종교처럼/ 내 앞에 서 있다.// 겨울 나무// 말하려나/ 참고 견디어온/ 긴 세월/ 보석으로 닦은/ 그 한마디의 말.// 한줌/ 자랑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오늘 이 남루한 지대에서/ 주저할 것이 없으리.// 노을이 걷히듯/ 끝나기 전/ 한가락 머리카락에 새겨둘/ 슬픈 피리소리.// 시대의 겨울 나무여./ 말하려나/ 이젠 말하려나.//

 

겨울 나무 3 / 황금찬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다 같은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겨울 나무// 바람이 눈보라를 몰고/ 지나갔다./ 산울림 산울림도/ 울려갔다.// 손수건, 손수건들이/ 수없이 수없이/ 내려와선/ 깔리고 있었다.// 눈떠라/ 그리고 말하라./ 겨울 나무// 이젠 살겠노라/ 겨울이 가고/ 봄 동산/ 잎이 무성하듯이/ 꽃도 피우겠노라.// 메아리/ 메아리처럼/ 말하렴아/ 겨울 나무.//

 

겨울 밤 바다 / 황금찬
겨울 밤에/ 바다를 찾아갔었지// 바다에 등불은/ 남김없이 꺼졌고/ 파도는 잠을 청하고 있었네// 히미론 계곡에 메아리는 숨고/ 속삭임도 없이/ 눈은 내리고 있더이// 찔레꽃/ 나는 찔레꽃이 피어 있는/ 언덕에 서서/ 하늘의 호흡을/ 손으로 막고 있었네// 입술끝에 와선/ 부서지고 마는/ 누구의 이름을/ 끝없이 끝도 없이 부르고// 바다는 어느새/ 잡목이 타고 있는 산장/ 화덕가에 앉아/ 이국풍의 차를 마시며/ 말소리를 기다려/ 연신 문을 열어보고 있었네// 저수지/ 얼어붙은 국경의 강/ 그 강물 위에 쏟아져내리던/ 달무리, 지금도 그러려니// 겨울 밤 바다엔/ 찔레꽃이 하이얗게/ 하이얗게 지고 있었네.//

 

겨울 기도 / 황금찬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장미나무/ 그 마른 잎새 위에/ 기도의 사연처럼/ 쌓이고 있습니다.// 눈나라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흰 장미꽃처럼 순결한/ 그런 사랑으로 당신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눈나라의 성문이 열리듯/ 그렇게 문이 열리고/ 마음밭에 피는 사랑의 꽃.// 소녀의 아침 기도는 끝났는데/ 그래도 눈은 내리고/ 겨울 장미밭에/ 순결한 장미는 피고,// 걸어오려나/ 조용히 길을 내며/ 기다리는 눈언덕에/ 당신은 찾아오려나.//

 

산길 / 황금찬
산길은 꿈을 꾸고 있네./ 아름들이 나무 뒤로 숨고/ 뻐국새는/ 한낮을 울어 골을 메우고 있네.// 긴 사연이/ 영마루를 넘어갔다/ 기다리는 마음이/ 산길이 되네.// 산길은 꿈을 꾸고 있네./ 진종일 혼자서/ 꿈을 꾸었네.//

 

산골 사람 / 황금찬
그는 물소리만 듣고/ 자랐다/ 그래 귀가 맑다// 그는 구름만 보고/ 자랐다/ 그래 눈이 선하다// 그는 잎새와 꽃을 이웃으로 하고/ 자랐다/ 그래 손이 곱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평범한 가르침/ 선하고 착하게 살아라/ 네가 그렇게 살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다// 나는/ 충성과 효도를 모른다/ 다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씀을/ 잊지 못하고/ 살아 갈 뿐이다// 오늘/ 내가 남길 교훈은/ 무엇일까/ 나도 평범한 애비여서/ 선하고/ 착하게 살아라// 사랑하는/ 아들아, 딸들아/ 이 말 밖에/ 할 말이 따로 없다.//

 

그리움 / 황금찬
바람이 불어도/ 눈뜨지 않는/ 나무여.// 파도로 출렁이는/ 그리움으로/ 네 앞에 서 있다.//

 

보석의 노래 / 황금찬
황홀한 모습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네 윤곽 부근에서/ 해가 솟고/ 우리는 목마르게 목마르게/ 너를 지켜보고 있다.// 아름다움은 영원일레라/ 누가 네 앞에서/ 추악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너는 이슬 보자기 속에서/ 눈을 뜨고 있다.// 신화 속의 이카로스도/ 너를 찾아 떠났고/ 눈속에서 피는 매화도/ 너를 부러워했느니라.// 거기가 어디쯤이었을까?/ 꿈 속에서 너를 잃어버린/ 그 회색의 바다// 나는 오늘도 찾고 있다./ 영혼의 보석 한 개/ 하늘 문을 열고/ 너를 찾아 떠나고 있다.//

 

숲속 작은 집 / 황금찬
새가 되고 싶어/ 산으로 가네/ 노래부르는 새가/ 그리하여/ 너 닫힌 창 앞에서/ 문이 열릴 때까지/ 사랑의 노래를 부르리// 꽃이 되고 싶어/ 들로 가네/ 겨울에도 피는 꽃이// 사랑이 그리워/ 뿌리로 옮아다니며/ 너의 뜰에/ 하늘 향기로 피어나리// 꽃이 되고자/ 새가 되고 싶어/ 숲 속 작은 집/ 주인되어/ 돌아가리//

 

산새 / 황금찬
창을 열어 놓았더니/ 산새 두 마리 날아 와/ 반 나절을 마루에 앉아/ 이상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아 갔다.// 어느 산에서 날아 왔을까./ 구름빛 색깔/ 백운대에서 날아 온/ 새였으리라.// 새가 남기고 간 목소리는/ 성자의 말처럼/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곧 귀에 남아 있다.// 새가 앉았던 실내에선/ 산 냄새, 봄풀 구름 향기/ 맑은 물소리까지 들리고 있다.// 산새같이 마음 맑은 사람은/ 이 세상에 정녕 없을까./ 그가 남긴 음성은/ 성자의 말이 되어/ 이 땅에 길이 남을.....// 오늘도 나는/ 창을 열어 놓고 있다./ 산새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너와 나의 거리 / 황금찬
우리들이 만나는 날엔/ 언제나 태양이 없었다.// 네가 비운 술잔에/ 달이 뜨고// 나는 견우와 직녀의/ 사랑 이야기를/ 네 귀에 담고 있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멀고 가까움의 거리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나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길 / 황금찬
언덕에는 미운/ 꽃들이 피어 있었다.// 나는 언덕길을/ 전설처럼 걸어내리고 있었다.// 누구나/ 한번은 오고/ 가는 길이라는데// 왜 오늘 이 길엔/ 나 혼자뿐일까?// 가는 길은 모두/ 이렇게 적막했을까?// 이젠 외롭지 않다./ 구름과 같이 가고 있다.//

 

간이역 / 황금찬
지금 이 간이역에/ 머무르고 있는/ 완행열차의 출발 시각이/ 임박해오고 있다.// 출발 시각을 앞에 두고/ 언제부턴가/ 화차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간이역에 머물렀던/ 열차들은/ 한결같이 어제의 구름이 되고 말았다.// 지금 차가 떠나고 나면/ 모든 것들은/ 또 그렇게 구름이나/ 강물로 흘러가고 만다./ 갈매기의/ 긴 날개가/ 하늘 가득히/ 펄럭이고 있다.// 어느 역을 향해/ 지금 기차는/ 또 출발하는 것이다./ 그 역의 이름을/ 누가 알고 있을까?//

 

그대의 모습 / 황금찬
지워본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다./ 그대의 모습.// 하루의 일과로/ 몇 번이나 몇 번이고/ 지워보나/ 다시 살아나는/ 그대의 모습.// 연필로 그렸다면/ 쉽게 지울 수도 있으리.// 사랑의 그림자.// 그대의/ 모습은/ 내 눈 속에 그려져 있다./ 가슴 속에 그려져 있다./ 지워지지 않는다.//

 

깊은 강 / 황금찬
이 강의 깊이를 누가 알까/ 하느님은 알고 있겠지.// 이 마음의 슬픔을 누가 알까/ 하느님이 알고 있겠지.// 살색이 검다고/ 미움받는 줄도/ 하느님이 알고 있겠지./ 나는 '셋'의 후손이 아니라/ '카인'의 후예일 게다./ 검은 대륙은 에덴의 동쪽/ 이른바 '놋'이란 곳일 게고/ 그러면 '애녹'은 나의 조상일 게다.// 세계의 하늘은 창조의 마음/ 흙·물·빛도/ 어느 땅의 나뭇잎도 풀잎 같은데/ 왜 인종의 색깔은 같지 않을까/ 우연일까, 하늘의 의도일까// 일찍이 야훼께/ 예배드리지 못한 죄가/ 이리도 크고 무섭더란 말이냐.// 하느님은 알고 있겠지./ 마음까지 검지 않은 형벌로/ 평생을 울고 있는/ '놋'의 땅의 백성을/ 하느님은 알고 있겠지.// 이 강을 건너야/ 낙원이라는데/ 강물이 너무 깊은 것도/ 하느님은 알고 있겠지.//

 

별이 뜨는 강마을에 / 황금찬
여기 강이 있었다.// 우리들의 국토 이 땅에/ 이름하여 북한강이라 했다.// 태양이 문을 열었고/ 달이 지곤 했다.// 하늘 꽃들이 강물위에 피어나/ 아름다운 고장이라 했다.// 신화의 풀잎들이 문을 열기 전/ 지혜의 구름을 타고 선인(先人) 들이/ 바람처럼 찾아와 보석의 뿌리를 내리고/ 백조의 이웃이 되었다.// 칼날의 날개를 단 흉조들은/ 사악한 터전이라 버리고 강마을을 떠났다.// 비단으로 무지갯빛 다리를 세우고/ 너와 나는 우리가 되어/ 내일 저 하늘에 무리별로 남으리라.// 강은 역사의 거울이다./ 패수에 담겨있는 고구려를 보았다.// 금강에서 백제의 나뭇잎들은/ 시들지 않는 깃발이었지.// 신라의 옷깃이 저 낙동강에 지금도 휘날리고/ 한강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그 참화가/ 시들지 않고 거울 속에 떠 있다.// 북한강 백조의 날개와 하나가 된 우리들의 행복한 삶터,/ 사랑하라. 우리들의 내일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나의 소망 / 황금찬
정결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리라/ 그렇게 맞이한 이 해에는/ 남을 미워하지 않고/ 하늘같이 신뢰하며/ 욕심 없이 사랑하리라// 소망은/ 갖는 사람에겐 복이 되고/ 버리는 사람에겐/ 화가 오느니/ 우리 모두 소망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후회로운 삶을 살지 않고/ 언제나 광명 안에서/ 남을 섬기는 이치를/ 배우며 살아간다.// 선한 도덕과/ 착한 윤리를 위하여/ 이 해에는 최선을 다하리라.// 밝음과 맑음을/ 항상 생활 속에 두라/ 이것을 새해의 지표로 하리라.//

 

         돌아오지 않는 마음 / 황금찬

이웃이/ 봄볕 같기/ 마음의 담을 헐었다.//
꽃잎을 실에 매어/ 지연같이 날렸더니/ 구름 위에 솟은/ 마을 성머리에 걸려/ 돌이 되고 말았다.//

십 년/ 다시 백 년에/ 돌아오지 못하는/ 꽃잎의 전설.//

문을 열어놓고/ 한나절/ 새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 빈 뜰//
돌아오지 않는/ 마음자리에/ 미움의 나무에/ 열매가 연다.//

 

무덤 / 황금찬
천 년/ 눈뜨지 않고/ 그대/ 잠들었는가/ 별이 보이는/ 내 집엔/ 여전히 바람이 많다오.// 바느질하는 손 / 황금찬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아내는/ 바느질을 하고 있다./ 장난과 트집으로 때묻은 어린놈이/ 아내의 무릎 옆에서 잠자고 있다.// 손마디가 굵은 아내의 손은/ 얼음처럼 차다./ 한평생 살면서 위로를 모르는 내가/ 오늘따라 면경을 본다.// 겹실을 꿴 긴 바늘이 아내의 손끝에선/ 사랑이 되고/ 때꾸러기의 뚫어진 바지 구멍을/ 아내는 그 사랑으로 메우고 있다.// 아내의 사랑으로 어린놈은 크고/ 어린놈이 자라면 아내는 늙는다.// 내일도 날인데 그만 자지,/ 아내는 대답 대신/ 쓸쓸히 웃는다.// 밤이 깊어질수록 촉광이 밝고/ 촉광이 밝을수록/ 아내의 눈가에 잔주름이/ 더 많아진다.//

 

연인 / 황금찬
연인/ 너를 부르기 위하여/ 겨우 찾아낸 말이다.// 한 백 년 불러도/ 싫지 않고/ 다시 부르고 싶은/ 이름이다.// 하지만 백아의 동굴을/ 거쳐 나와/ 연인이라는 말이 되기까지는/ 쉰 길 소에서 바위를 머리카락으로/ 달아올리는/ 그런 괴로움이/ 있었느니라.// 연인아, 하고 부르면/ 너와 나 사이는/ 천 리도 지척이 되고 만다.// 멀고 가까움은/ 시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이슬 / 황금찬
아침 풀잎에/ 성모의/ 땀처럼 솟은/ 이슬/ 이슬 방울들// 증발하고 있었다/ 이슬 방울 안에서/ 내 존재도/ 세계도/ 나의 우주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편지 / 황금찬
바다에서/ 편지가 왔다.// 물새도 잠든 밤이면/ 등불을 켜고/ 혼자 있노라고// 자운영밭 같은/ 바다에/ 비가 내린다.// 눈물이 가득한/ 병든 황소의 눈/ 바다야--.// 그 허무의 세상/ 영혼은 어디서 쉴꼬.// 불길/ 외로운 깃발이여// 눈썹 끝에 머무는/ 수평선/ 바다도/ 길은 잃고 있다.//

 

하늘 / 황금찬
대답하려고/ 천 년을/ 흔들어 깨웠느니라// 들리는 것은/ 언제나 하늘에/ 파도소리// 따라가고 있었다/ 해가 뜨고/ 태양이 기우는/ 그 허공/ 외롭지 않았다// 반복되는 것은/ 아침이 열리는 것과/ 저녁이 오는 것일레// 갈릴리/ 호숫가에/ 발소리// 이제야 알겠노라/ 혼자 가는 것이라고/ 이제서야 알겠노라.//

 

조가비의 침실 / 황금찬
바다는 잠자고/ 별들만 눈 떴는데/ 가을 연인아/ 조가비의 침실에/ 등을 밝히고/ 조용한 호수/ 여름바다와/ 물새가 남긴 긴 대화/ 흘러간 노래처럼/ 달이 뜨고/ 싸늘히 식어가는/ 들국화/ 이 침실에 아침이 오기 전에/ 가을 연인아//

 

기도 / 황금찬
내게 눈을 없이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늦가을 버섯 같은 귀도/ 지금은 있어서 오히려 불행합니다.// ― 주체 못할 사연詞緣일 바에는/ 차라리 벙어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바람, 불어오고/ 다시 바람 불어가는 어느 영嶺 마루에/ 의연히 앉아 있는/ 바위처럼 되고자 원願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느니/ 천국이 저의 것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느니」/ ⋯⋯주여?⋯⋯// 이제는 체온이 자꾸 식어 갑니다./ 이러다가 그대로 의식을/ 모를 것 같습니다.// 주여!/ 당신의 마지막 기도처럼⋯⋯/ 아, 돌이고자 원합니다.//

 


 

황금찬(黃錦燦, 1918년~2017년) 시인
강원도 속초(당시 양양군 도천면)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 때 함경북도 성진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시절, <아이생활>이란 청소년 잡지를 보면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해방 후 함북 성진에서 강원도로 내려와, 1946년부터 9년간 강릉에 살았다. 교직 생활을 보내면서도 문인들을 여럿 길러냈고, 1952년에는 시동인지 <청포도>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53년 〈문예〉에 시 〈경주를 지나며〉를 발표하며 등단, 시인 박목월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에 시를 기고하며 문학계에 등단했다. 1965년 첫 시집 〈현장〉을 내고 활발한 문학 활동을 벌였다. 이후 〈五월나무〉와 〈나비와 분수〉, 〈오후의 한강〉 등의 시집을 출간하며 수십여 권의 시집을 냈다. 평생 총 40권의 시집을 펴냈으며, 생활 속 문학과 '다작(多作)'을 강조하며 시 2000여 편을 비롯한 80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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