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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歸天)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새 / 천상병
저것 앞에서는/ 눈이란 다만 무력할 따름/ 가을 하늘가에 길게 뻗친 가지 끝에,/ 점찍힌 저 절대 정지를 보겠다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미묘하기 그지없는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橋)는 무슨 상형(象形)인가,// 저것은/ 무너진 시계(視界)위에 깃을 펴고/ 핏빛깔의 햇살을 쪼으며/ 불현듯이 왔다 사라지지 않는가,// 바람은 소리어뵤이 이는데/ 이 하늘, 저 하늘의/ 순수균형을/ 그토록 간신히 지탱하는 새 한 마리.//
새 /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새 2 / 천상병
그러노라고/ 뭐라고, 하루를 지껄이다가,/ 잠잔다---// 바다의 침묵, 나는 잠잔다./ 아들이 늙은 아버지 편지를 받듯이/ 꿈으로 꾼다.// 바로 그날 하루에 말한 모든 말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의 외마디 소리와/ 서로 안으며, 사랑했던 것이나 아니었을까?/ 그 꿈 속에서......// 하루의 언어를 위해, 나는 노래한다./ 나의 노래여, 나의 노래여,/ 슬픔을 대신하여, 나의 노래는 밤에 잠잔다.//
새 3 / 천상병
저 새는 날지 않고 울지 않고 내내 움직일 줄 모른다./ 상처가 매우 깊은 모양이다./ 아시지의 성(聖)프란시스코는/ 새들에게 은총 설교를 했다지만/ 저 새는 그저 아프기만 한 모양이다./ 수백 년 전 그날/ 그 벌판의 일몰(日沒)과 백야(白夜)는/ 오늘 이 땅 위에 눈을 내리게 하는데/ 눈이 내리는데......// 새 -아폴로에서 / 천상병
참으로 오랜만에 음악을 듣는 것이다. 내 마음의 빈터에 햇살이 퍼질 때, 슬기로운 그늘도 따라와 있는 것이다. 그늘은 보다 더 짙고 먹음직한 빛일지도 모른다./ 새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골짜구니를 건너고 있을까? 내 마음 온통 세 내어주고 외국여행을 하고 있을까?/ 돌아오라 새여! 날고 노래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 그늘의 외로운 찬란을 착취하기 위하여!//
그날은 -새 / 천상병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사쓰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게 편다.//
미소 -새 / 천상병
1/ 입가 흐뭇스레 진 엷은 웃음은,/ 삶과 죽음 가에 살짝 걸린/ 실오라기 외나무다리.// 새는 그 다리 위를 날아간다./ 우정과 결심, 그리고 용기/ 그런 양 나래 저으며......// 풀잎 슬몃 건드리는 바람이기보다/ 그 뿌리에 와 닿아주는 바람,/ 이 가슴팍에서 빛나는 햇발.//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갈/ 풀밭 길에서/ 입가 언덕에 맑은 웃음 몇 번인가는......// 2/ 햇빛 반짝이는 언덕으로 오라/ 나의 친구여,// 언덕에서 언덕으로 가기에는/ 수많은 바다를 건너야 한다지만,// 햇빛 반짝이는 언덕으로 오라/ 나의 친구여......//
새 세마리 / 천상병
나는 새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텔레비 옆에 있는 세 마리 새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왜나하면/ 진짜 새가 아니라/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한 마리는 은행에서 만든 저금통 위에 서 있는 까치고/ 두 마리는 기러기 모양인데/ 경주에서 아내가 사가지고 왔다./ 그래서 세 마리인데/ 나는 매일같이 이들과 산다.// 나는 새를 마우 즐긴다./ 평와롭고 태평이고 자유롭고/ 하늘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진짜 새처럼 애지중지한다.//
새소리 / 천상병
새는 언제나 명랑하고 즐겁다./ 하늘 밑이 새의 나라고/ 어디서나 거리낌없다./ 자유롭고 기쁜 것이다.// 즐거워서 내는 소리가 새소리다./ 그런데 그 소리를/ 울음소리일지 모른다고/ 어떤 시인이 말했는데, 얼빠진 말이다.// 새의 지저귐은/ 삶의 환희요 기쁨이다./ 우리도 아무쪼록 새처럼/ 명랑하고 즐거워하자!// 즐거워서 내는 소리가/ 새소리이다./ 그 소리를 괴로움으로 듣다니/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놈이냐.// 하늘 아래가 자유롭고/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는 새는/ 아랫도리 인간을 불쌍히 보고/ '아리랑 아리랑'하고 부를지 모른다.//
날개 / 천상병
날개를 가지고 싶다./ 어디론지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싶다./ 왜 하느님은 사람에게/ 날개를 안 다셨는지 모르겠다./ 내같이 가난한 놈은/ 여행이라고는 신혼여행뿐이었는데/ 나는 어디로든지 가고 싶다./ 날개가 있으면 소원성취다./ 하느님이여/ 날개를 주소서 주소서......//
마음의 날개 / 천상병
내 육신(肉身)에는 날개가 없어도/ 내 마음에는 날개가 있다./ 세계 어디 안가본 데가 없다./ 텔레비전은 마음 여행의 길잡이가 되고/ 상상력(想像力)이 길을 인도한다./ 북극(北極)에도 가 보고/ 남양(南洋)의 오지(奧地)에도 가보았다./ 하여튼 내가 안 가본 곳이란 없다./ 내 마음엔 날개가 있으니까.//
나의 가난은 / 천상병
오늘 아침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나의 가난함 / 천상병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나는 행복합니다 / 천상병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합니다./ 아내가 돈을 버니까!// 늙은이 오십 세 살이니/ 부지런한 게 싫어지고/ 그저 드러누워서/ KBS 제1FM방송의/ 고전음악을 듣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오. 그래서 행복.// 텔레비전의 희극을 보면/ 되려 화가 나니/ 무슨 지랄병(病)이오?// 세상은 그저/ 웃음이래야 하는데/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하고 했는데/ 어찌 어기겠어요?//
행복 / 천상병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게/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광화문 근처의 행복 / 천상병
광화문에,/ 옛 이승만 독재와/ 과감하게 투쟁했던 신문사/ 그 신문사의 논설위원인/ 소설가 오상원은 나의 다정한 친구.// 어쩌다 만나고픈 생각에/ 전화 걸면/ 기어코 나의 단골인/ '아리랑' 다방에 찾아온 그,/ 모월 모일, 또 그랬더니/ 와서는 내 찻값을 내고/ 그리고 천 원짜리 두 개를 주는데---/ 나는 그 때 "오늘만은 나도 이렇게 있다"고/ 포켓에서 이천원을 끄집어 내어/ 명백히 보였는데도,/ "귀찮아! 귀찮아!"하면서/ 자기 단골 맥주집으로의 길을 가던 사나이!/ 그 단골집은/ 얼마 안 떨어진 곳인데/ 자유당 때 휴간(休刊)당하기도 했던/ 신문사의 부장 지낸 양반이/ 경영하는 집으로/ 셋이서/ 그리고 내 마누라까지 참석케 해서/ 자유와 행복의 봄을---/ 꽃동산을---/ 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저와 같은 버러지에게/ 어찌 그런 시간이 있게 했습니까?//
광화문에서 / 천상병
아침길 광화문에서 <눈물의 여왕> 그녀의 장례 행진을 본/ 다. 만장이 나부끼고, 악대가 붕붕거리고, 여러 대의 차와/ 군중이 길을 메웠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죽은 내/ 아버지도 <눈물의 여왕>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댔지......아/ 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문인들 장례식도 예총광장에서 더/ 러 있었다. 만장도 없고, 악대는커녕, 행진은커녕 아주 형편/ 없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임이었다. 그 초라함을 위해서/ 만이 그들은 <시>를 썼다.//
막걸리 / 천상병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막걸리를 마시면/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옥수수로 만드는 막걸리는/ 영양분이 많다/ 그러니 어찌 술이랴//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마시니 취한다는 걸 모른다/ 그저 배만 든든하고/ 기분만 좋은 것이다//
막걸리 / 천상병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달에 한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가지 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 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인 것이다.//
막걸리 / 천상병
나는 막걸리를 퍽이나 좋아한다./ 막걸리는 배가 불러지고/ 목마름을 다신다./ 선조 대대로/ 우리 민족은 이 막걸리를 마셨다./ 오늘의 발전도 막걸리 때문이다./ 오늘도 막걸리/ 내일도 막걸리/ 어찌 잊으랴 이 막걸리를//
술 / 천상병
술없이는 나의 생을 생각 못한다/ 이제 막걸리 왕대포집에서/ 한잔 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젊은 날에는 취하게 마셨지만// 오십이 된 지금에는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하다// 아내는 이 한잔씩에도 불만이지만/ 마시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술 / 천상병
나는 술을 좋아한다/ 그것도 막걸리로만/ 아주 적게 마신다// 술에 취하는 것은 죄다/ 죄를 짓다니 안될 말이다/ 취하면 동서사방을 모른다// 술은 예수 그리스도님도 만드셨다/ 조금씩 마신다는 건/ 죄가 아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다/ 그 괴로움을 달래 주는 것은/ 술뿐인 것이다//
주막에서 / 천상병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詩人)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莊嚴) 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박 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찬물 / 천상병
나는 찬물 잘도 마십니다./ '물민족'이라며, 자꾸자꾸 마십니다./ 그러면 생기(生氣)가 솟구치며/ 남들에게 뒤지지 않게 됩니다.// 자연의 정기(精氣)를, 멀기는 하지만/ 흉내라도 내야 할 일이겠습니다./ 만주의 송화강을 건너서/ 나쪽으로 올 때/ 우리 선조들이/ <물> <물> 했듯이---// 하늘 날으는 새처럼, 하늘투성처럼,/ 나는 그저 찬물투성입니다./ 생기가 있어야/ 인생을 놓치지 않는 법입니다.// 나의 노래는 미약하지만/ 그 노래 끝에는/ 반드시 찬물 생기가 있어서/ 먼 데까지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가지 소원 / 천상병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흙 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드러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껏 살았나 싶다./ 별다른 불만은 없지만,// 똥걸레 같은 지성은 썩어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 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꾹 쥔 십 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길 밤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고향 / 천상병
내 고향은 경남 진동(鎭東),/ 마산에서 사십 리 떨어진 곳/ 바닷가이며/ 산천이 수려하다.// 국교 1년 때까지 살다가 떠난/ 고향도 고향이지만/ 원체 고향은 대체 어디인가?/ 태어나기 전의 고향 말이다.// 사실은 사람마다 고향타령인데/ 나도 그렇고 다 그런데,/ 태어나기 전의 고향타령이 아닌가?/ 나이 들수록 고향타령이다.// 무(無)로 돌아가자는 타령 아닌가?/ 경남 진동으로 가잔 말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의 고향---무(無)로의/ 고향타령이다. 초로(初老)의 절감(切感)이다.//
먼 산 / 천상병
먼 산은/ 나이 많은 영감님 같다/ 그 뒤는 하늘이고/ 슬기로운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다 제각기이고/ 통일이 없지만/ 하늘의 이치를 알게 되면/ 달라지리라고-// 먼 산은/ 애오라지 역사의 거물/ 우리 인간은/ 그 침묵에서 배워야 하리.......//
내가 좋아하는 여자 / 천상병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으뜸은/ 물론이지만/ 아내이외일 수는 없습니다.// 오십 둘이나 된 아내와/ 육십살 먹은 남편이니/ 거의 무능력자이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이 시 쓰는 시간은/ 89년 5월 4일/ 오후 다섯시 무렵이지만요.// 이, 삼일 전날 밤에는/ 뭉클 뭉클/ 어떻게 요동을 치는지// 옆방의 아내를/ 고함 지르며 불렀으나,/ 한참 불러도// 아내는 쿨쿨 잠자는 모양으로/ 장모님의 "시끄럽다, 잠 좀 자자"라는/ 말씀 때문에/ 금시 또 미꾸라지가 되는 걸/ 필자는 어쩌지 못했어요.//
젊음을 다오! / 천상병
나는 올해 환갑을 지냈으니/ 젊음을 다오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나 자신도 모르게/ 젊음이 다 가버렸으니/ 어찌 부르짖지 못하겠는가.// 내가 젊어서도/ 시인이 되겠지만/ 그러나 너무나 시일이 짧다.// 다시 다오 청춘을!/ 그러면 나는 뛰리라./ 마음껏 뛰리라.//
난 어린애가 좋다 / 천상병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하면서도/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크레이지 배가본드 / 천상병 1/ 오늘의 바람은 가고/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잘 가거라/ 오늘은 너무 시시하다. 뒷시궁창 쥐새끼 소리같이/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2/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담배를 빤다.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물을 마신다.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우물가, 꽁초 토막......// |
세월 / 천상병
세월은/ 하늘이 주시는 것이다/ 세월은 대지가 주시는 것이다/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갈 세월이여/ 얼마나 영원하며/ 얼마나 언제까지나?/ 아침이 밤되는 사이에/ 우리는 생활하고/ 한달이 한해되는 사이에/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으니//
편지 / 천상병
점심을 얻어 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유리창 / 천상병
창은 다 유리로 되지만/ 내 창에서는/ 나무의 푸른잎이다.// 생기 활발한 나뭇잎/ 하늘을 배경으로/ 무심하게도 무성하게 자랐다.// 때로는 새도 날으고/ 구름이 가고/ 햇빛 비치는 이 유리창이여---//
내 집 / 천상병
누가 나에게 집을 사 주지 않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목터/ 지게 외친다. 들려다오 세계가 끝날 때까지...... 나는 결혼/ 식을 몇 주 전에 마쳤으니 어찌 이렇게 부르짖지 못하겠는/ 가? 천상의 하나님은 미소로 들을 게다. 불란서의 아르투르/ 랭보 시인은 영국의 런던에서 짤막한 신문광고를 냈다. 누/ 가 나를 남쪽 나라로 데려가지 않겠는가. 어떤 선장이 이것/ 을 보고, 쾌히 상선에 실어 남쪽 나라로 실어 주었다. 그러/ 니 거인처럼 부르짖는다. 집은 보물이다. 전세계가 허물어져/ 도 내 집은 남겠다......//
촌놈 / 천상병
나는 의정부시 변두리에 살지만/ 서울과는 80미터 거리다/ 그러니 서울과 교통상으로는/ 별다름이 없지만/ 바로 근처에 논과 밭이 있으니/ 나는 촌놈인 것이다/ 서울에 살면/ 구백만 명 중의 한 사람이지만/ 나는 이제 그렇지 않다./ 촌놈은 참으로 행복하다/ 나는 노래 불러야 한다/ 이 대견한 행복을/ 어찌 노래 부르지 않으리요/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의 노래는 하늘의 것입니다.//
계곡 흐름 / 천상병
나는 수락산 아래서 사는데,/ 여름이 되면/ 새벽 5시에 깨어서/ 산 계곡으로 올라가/ 날마다 목욕을 한다./ 아침마다 만나는 얼굴들의/ 제법 다정한 이야기들.// 큰 바위 중간 바위 작은 바위./ 그런 바위들이 즐비하고/ 나무도 우거지고/ 졸졸졸 졸졸졸/ 윗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더러는 무르팍까지/ 잠기는 물길도 있어서....../ (내가 가는 곳은 그런 곳)/ 목욕하고 있다 보면/ 계곡 흐름의 그윽한 정취여......//
약수터 / 천상병
내가 새벽마다 가는 약수터 가에는/ 천하선경이 아람드리 퍼진다./ 요순(堯舜)이 놀까말까한 절대미경이라네.// 하긴 그곳에 벌어지는 사물은 평범하지만,/ 그 조화미의 화목색(和睦色)은 순진하다네.// 반드시 있을 곳에 자리잡고 있고,/ 운치와 조화와 빛깔이 혼연일치하니,/ 이 세계의 극치를 이루었다.//
노래 / 천상병 나는 아침 다섯 시가 되면/ 산으로 간다./ 서울 북부인 이 고장은/ 지극한 변두리다./ 산이 아니라/ 계곡이라고 해야겠다./ 자연스레 노래를 부른다.// 내같이 노래를 못 부르는 내가/ 목청껏 목을 뽑는다./ 바위들도 그 묵직한 바위들도/ 춤을 추는 양하고/ 산등성이가 몸을 움직이는 양하고/ 새소리들도 내게 음악을 주고/ 나무들도 속삭이는 것 같다/ 나는 노래한다 나는 노래한다// |
푸른 것만이 아니다 / 천상병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 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 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듯이 안 보일듯이 흐르는/ 한 떨기 구름// 삼월 사월 그리고 오월의 신록/ 어디서 와서 달은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던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구름 / 천상병
저건 하늘의 빈털터리 꽃/ 뭇사람의 눈길 이끌고/ 세월처럼 유유하다.// 갈 데만 가는 영원한 나그네/ 이 나그네는 바람 함께/ 정처없이 목적없이 천천히 보면 볼수록 허허한 모습/ 통틀어 무게 없어 보이니/ 흰색 빛깔로 상공(上空)수놓네.//
구름 / 천상병
하늘에 둥둥 떠있는 구름은/ 지상을 살피러 온 천사님들의/ 휴식처가 아닐까.// 하느님을 도우는 천사님이시여/ 즐겁게 쉬고 가시고/ 잘되어 가더라고 말씀하소서.// 눈에 안 보이기에/ 우리가 함부로 할지 모르오니/ 널리 용서하소서.//
흰구름 / 천상병
저 삼각형의 조그만한 구름이/ 유유히 하늘을 떠다닌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을까?/ 아주 천천히 흐르는 저것에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바람은 구름의 연인이다./ 그래서 바람이 부는 곳으로,/ 구름은 어김없이 간다./ 희디 흰 구름이여!/ 어느 계절이든지,/ 구름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오늘이 내일이 되듯이/ 구름은 유유하게 흐른다.//
갈매기 / 천상병
그대로의 그리움이/ 갈매기로 하여금/ 구름이 되게 하였다.// 기꺼운 듯/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 보내어// 이제 파도도/ 빛나는 가슴도/ 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날아 오르는 자랑이었다.//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강물 /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흐름 / 천상병
바다도 흐르고 구름도 흐르고/ 사람도 흐르고 동물도 흐르고/ 흐르는 것이 너무 많다// 새는 날고 지저귀는데/ 흐름의 세계를/ 흐르면서 보리라.// 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 하나님! 하나님도 흐르시나요!//
피리 / 천상병
피리를 가졌으면 한다/ 달은 가지 않고/ 달빛은 교교히 바람만 더불고---/ 벌레소리도 죽은 이 밤/ 내 마음의 슬픈 가락에 우리어 오는/ 아! 피리는 어느 곳에 있는가/ 옛날에는/ 달 보신다고 다락에선 커다란 잔치/ 피리 부는 약관이 피리를 불면/ 고운 궁녀들 춤을 추었던/ 나도 그 피리를 가졌으면 한다/ 볼 수가 없다면은/ 만져라도 보고 싶은/ 이 밤/ 그 피리는 어느 곳에 있는가.//
기쁨 / 천상병
친구가 멀리서 와,/ 재미있는 이야길 하면,/ 나는 킬킬 웃어 제낀다.// 그때 나는 기쁜 것이다./ 기쁨이란 뭐냐? 라고요?/ 허나 난 웃을 뿐.// 기쁨이 크면 웃을 따름,/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라./ 그저 웃음으로 마음이 찬다.// 아주 좋은 일이 있을 때,/ 생색이 나고 활기가 나고/ 하늘마저 다정한 누님같다.//
길 / 천상병
가도 가도 아무도 없으니/ 이 길은 무인(無人)의 길이다./ 그래서 나 혼자 걸어간다./ 꽃도 피어 있구나./ 친구인 양 이웃인 양 있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꽃의 생태여---/ 길은 막무가내로 자꾸만 간다./ 쉬어 가고 싶으나/ 쉴 데도 별로 없구나./ 하염없이 가니/ 차차 배가 고파온다./ 그래서 음식을 찾지마는/ 가도 가도 무인지경이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참 가다가 보니/ 마을이 아득하게 보여온다./ 아슴하게 보여진다./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 걸음을 빨리빨리 걷는다./ 이 길을 가는 행복함이여.//
길 / 천상병
길은 끝이 없구나/ 강에 닿을 때는/ 다리가 있고 나룻배가 있다.// 그리고 항구의 바닷가에 이르면/ 여객선이 있어서 바다 위를 가게 한다.// 길은 막힌 데가 없구나/ 가로막는 벽도 없고/ 하늘만이 푸르고 벗이고/ 하늘만이 길을 인도한다.// 그러니/ 길은 영원하다.//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 천상병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약속 / 천상병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얼 기다리고 있다.//
다음 / 천상병
멀 잖아/ 北岳에서 바람이 불고/ 눈을 날리며 겨울이 온다.// 그날,/ 눈 오는 날에/ 하얗게 덮인 서울의 거리를/ 나는 봄이 그리워서,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어도/ 나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다음>이 있었다.// 이 새벽./ 이 <다음>./ 이 絶對(절대)한 不可抗力(불가항력)을/ 나는 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윽고, 내일,/ 나의 느린 걸음은/ 불보다도 더 뜨거운 것으로 變하고,// 나의 희망은/ 怒濤(노도)보다도 바다의 全部보다도,/ 더 무거운 무게를, 이 세계에 줄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음>은,/ 눈오는 날의 서울의 거리는,/ 나의 세계의 바다로 가는 길이다.//
나무 / 천상병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죽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죽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 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죽은 나무는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죽은 나무가 아니다.//
갈대 / 천상병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로 젖어 있었다.//
빛 / 천상병
태양의 빛 달의 빛 전등의 빛/ 빛은 참으로 근사하다.// 빛이 없으면/ 다 캄캄할 것이 아닌가// 셋상은 빛으로 움직이고/ 사람 눈은 빛으로 되어 있다// 내일이여 내일이여/ 빛은 언제나 있으소서.//
넋 / 천상병
넋이 있느냐 라는 것은,/ 내가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 거나 같다./ 산을 보면서 산이 없다고 하겠느냐?/ 나의 넋이여!/ 마음껏 발동해 다오./ 내 몸의 모든 움직임은,/ 바로 내 넋의 가면이다./ 비 오는 날 내가 다소 우울해지면,/ 그것은 즉 넋이 우울하다는 것이다./ 내 넋을 전세계로 해방하여/ 내 넋을 넓직하게 발동케 하고 싶다//
달 / 천상병
달을 쳐다보며 은은한 마음,/ 밤 열 시경인데 뜰에 나와/ 만사를 잊고 달빛에 젖다.// 우주의 신비가 보일 듯 말 듯/ 저 달에 인류의 족적이 있고/ 우리와 그만큼 가까워진 곳.// 어릴 때는 멀고 먼 곳/ 요새는 만월이며 더 아름다운 것/ 구름이 스치듯 걸려 있네.//
눈 / 천상병
고요한데 잎사귀가 날아와서/ 네 가슴에 떨어져 간다.// 떨어진 자리는/ 오목하게 파인// 그 순간 앗 할 사이도 없이/ 네 목숨을 내보내게 한/ 상처 바로 옆이다.// 거기서 잎사귀는/ 지금 일심으로/ 네 목숨을 들여다보며 너를 본다// 자꾸 바람이 불어오고/ 또 불어오는데/ 꼼짝 않고 상처를 지키는 잎사귀// 그 잎사귀는 눈이다/ 맑은 하늘의 눈 우리들의 눈 분노의/ 너를 부르는 어머니의 눈물어린 눈이다//
마음 마을 / 천상병
내 마음의 마을을/ 구천동(九千洞)이라 부른다./ 내가 천씨요 구천(九千)만큼/ 복잡다단한 동네다.// 비록 동네지만/ 경상남도보다 더 넓고/ 서울특별시도 될 만하고/ 또 아주 조그만 동네밖에 안 될 때도 있다.// 뉴욕의 마천루(摩天樓)같은/ 고층건물이 있는가 하면/ 초가지붕도 있고/ 태고시대(太古時代)의 동굴도 있다.// 이 마을 하늘에는/ 사시장철 새가 날아다니고/ 그렇지 않을 때는 흰구름이 왕창 덮인다.// 이 마을 법률은/ 양심이 있을 뿐이고/ 재판소 따위로는/ 양심법 재판소밖에는 없다.// 여러가지로 지적하려면/ 만자(萬字)도 모자란다/ 복잡하고 복잡한 이 마음 마을이여//
아침 / 천상병
아침에 기분이 좋다면 그 날은 해피데이다/ 기분이 안 좋은 날은 하루종일 일이 꼬일 때도 있다// 이른 아침시간에 재래시장에 간 적이 있다/ 새벽부터 일을 시작한 시장 사람들의 에너지가 시장안에 넘쳤다/ 추운날인테 온기가 느껴지는듯 했다./ 활기차게 시작하는 아침이 좋았다/ 기분좋은 시작이다// 부지런히 살아야겠다는기운을 받은 아침날이었다/ 오늘도 좋은 하루이다.//
아침 / 천상병
아침은 매우 기분 좋다/ 오늘은 시작되고/ 출발은 이제부터다// 세수를 하고 나면/ 내 할 일을 시작하고/ 나는 책을 더듬는다// 오늘은 복이 있을지어다/ 좋은 하늘에서/ 즐거운 소식이 있기를//
덕수궁의 오후 / 천상병
나뭇잎은 오후, 멀리서 한복의 여자가 손을 들어 귀를 만진다./ 그 귀밑볼에 검은 혹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섬돌에 떨어진 적은 꽃이파리 그늘이 된다.// 구름은 떠 있다가/ 중화전의 파풍(破風)에 걸리더니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는다.// 이 잔디 위와 사도(砂道)/ 다시는 못 볼 광명(光明)이 되어/ 덤덤히 섰는 솔나무에 미안한 나의 병,/ 내가 모르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한다.// 어리석음에 취하여 술도 못 마신다./ 연못가로 가서 돌을 주어 물에 던지면,/ 끝없이 떨어져 간다.// 솔나무 그늘 아래 벤취,/ 나는 거기로 가서 앉는다.// 그러면 졸음이 와 눈을 감으면/ 덕수궁 전체가 돌이 되어 맑은 연못 물 속으로 떨어진다.//
소풍 / 천상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의 삶이 소풍이었다고?/ 그 소풍이 아름다웠더라고?// 오늘/ 한쪽의 일터에서는 굴뚝 위에서 농성을 하고/ 바람이 바뀌었다고/ 다른 쪽의 사람들은 감옥으로 내 몰리는데/ 이 길이 소풍길이라고?// 따르는 식구들과/ 목마 태운 보따리/ 풀숲에 쉬면 따가운 쐐기/ 길에는 통행료/ 마실 물에도 세금을 내라는 세상// 홀로 밤길을 걷고/ 길을 비추는 달빛조차 몸을 사리는데/ 이 곳이 아름답다고?// 항상 행복하게 삽시다./ 작은 행복을 즐기며...//
청록색 / 천상병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산의 나무들은 녹색이고/ 하나님은 청록색을 좋아하시는가 보다.// 청록색은/ 사람의 눈에 참으로/ 유익한 빛깔이다./ 우리는 아껴야 하리.// 이 세상은 유익한 빛깔로/ 채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안타깝다.//
오월의 신록 / 천상병
오월의 신록은 너무 신선하다/ 녹색은 눈에도 좋고/ 상쾌하다// 젊은 날이 새롭다/ 육십 두 살 된 나는/ 그래도 신록이 좋다/ 가슴에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늙었지만/ 신록은 청춘이다/ 청춘의 특권을 마음껏 발휘하라//
봄소식 / 천상병
입춘이 지나니 훨씬 덜 춤구나!/ 겨울이 아니고 봄 같으니,/ 달력을 아래 위로 쳐다보기만 한다.// 새로운 입김이며/ 그건 대지의 작란(作亂)인가!/ 꽃들도 이윽고 만발하리라./ 아슴푸레히 반짝이는 태양이여./ 왜 그렇게도 외로운가./ 북극이 온지대(溫地帶)가 될 게 아닌가.//
봄을 위하여 / 천상병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화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 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간 봄 / 천상병
한때는 우주 끝까지 갔단다./ 사랑했던 여인/ 한봄의 산 나무 뿌리에서/ 뜻 아니한 십 센티쯤의 뱀 새끼같이/ 사랑했던 여인./ 그러나 이젠/ 나는 좀 잠자야겠다.//
봄비 / 천상병
봄비가 온다 봄비가 온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에/ 봄비가 온다 봄비가 온다// 따사로운 이 감촉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큰 은총이다// 봄비는 소리 없이 오는 것 같다/ 보드럽고 촉촉한 봄비여/ 온화한 기분으로 맞아도 좋다//
비 오는 날 / 천상병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 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 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 가방 들고 지나는 학생들이/ 그렇게 싱싱하게 보이고/ 나의 늙음은 그저 노인 같다// 비 오는 아침의 이 신선감을/ 나는 어이 표현하리오?//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깨끗이 눈감으리요//
비 / 천상병
비가 내린다/ 우수를 씹고 있는 나는/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한다// 비는 슬픔의 강물이다./ 내 젊은 날의 뉘우침이며/ 하느님의 보살피심을// 친구들의 슬픈 이야기가/ 새삼스레 생각나누나/ 교회에 혼자 가서 기도할까나.//
비 2 / 천상병
저 구름의 연연(連連)한 부피는/ 온 하늘을 암흑대륙으로 싸았으니/ 괴묵(怪默)은 그냥, 비만 내리니 천만다행이다./ 지금 장마철이니// 저 암흑대륙에 저 만리장성이다./ 우뢰소리 또한 있을 만하지 않은가.// 우주야말로 신비경이 아니냐?/ 달과 별은 한낮에 어디로 갔단 말이냐?/ 비는 그 청신호인지 모르지 않는냐?//
비 3 / 천상병
새벽같이 올라와야 했던/ 이 약수는/ 몇 월 며칠의 빗물인지도 모르겠다.// 산과 옆의 바다는 알 터이나,/ 하늘과 구름은 뻔히 알겠지만,/ 입이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약수를 마시는 데는 지장이 없고,/ 맛이 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니/ 재수형통만 빌 뿐이다.//
비 4 / 천상병
상식적으로 비는 삼라만상 위에 내린다./ 그런데 지붕뿐인 줄 알고,/ 내실의 꽃병은 아니 맞는 줄 안다.// 생각해 보라/ 삼라만상은 이 우주의 전부이다./ 그러니 그 꽃병으도 한참 맞고 있는 것이다.// 생리는 그 꽃병을 안 맞게 하지만/ 실존은 그 꽃병의 진짜 정신을/ 지붕 위에 있게 하여 맞는 것이다.//
비 5 / 천상병
물의 원소는/ 수소 두 개와 산소이지만/ 벌써 중학생 때 익히 알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 수소와 산소 뒤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단 말인가......// 공포할 만한 야수가 들어 있다./ 수소 뒤에는 수소폭탄이,/ 산소 뒤에는 원자폭탄이......//
비 6 / 천상병
나는 국민학교 때는/ 비가 오기만 하면/ 학교엘 가지 아니하였다.// 이제는 천국에 가신 어머니에게/ 한사코 콩을 볶아달라고 하여/ 몸이 아프다고 핑계하였다.// 이제는 나가겠으나/ 이미 나이가 사십이니/ 이 세계를 거꾸로 한들 소용이 없다.//
비 7 / 천상병
8월 장마비는 늦은뱅이다./ 농사에는 알맞아 들 테지마는,/ 인간에겐 하찮은 쓰레기일 것이니......// 먼 데 제주도 생각이 불현듯 나니....../ 아직 한 번도 못 가본 제주도여,/ 마치 런던 옆에나 있는 것이 아니냐.// 애오라지 못 갈 바에야,/ 바닷가로나 가서 먼 데까지 가야지....../ 그러면은 그 섬 향기가 날지도 모른다.//
비 8 / 천상병
백두산 천지에는/ 언제나 비가 쏟아진다드냐....../ 단군 할아버지께서 우산을 쓰셨겠다.// 압록강의 원류가 큰소리를 칠 것이니/ 정암(頂岩)이 소용돌이 쳐/ 범조차 그 공포에 흐늘흐늘일 것이다.// 백운(白雲)을 읊는 고전시는 있어도/ 이 산을 읊는 고전시는 없었다./ 그러니 내가 읊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비.11 / 천상병
빗물은 대단히 순진무구하다./ 하루만 비가 와도/ 어제의 말랐던 계곡물이 불어 오른다.// 죽은 김관식은/ 사람은 강가에 산다고 했는데,/ 보아하니 그게 진리대왕이다.// 나무는 왜 강가에 무성한가/ 물을 찾아서가 아니고/ 강가의 정취를 기어코 사랑하기 때문이다.//
장마 / 천상병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 비여/ 나를 사랑해 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 심야라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 다오.//
들국화 / 천상병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들국화 / 천상병
84년 10월에 들어서/ 아내가 들국화를 꽃꽂이했다/ 참으로 방이 환해졌다/ 하얀 들국화도 있고/ 보라색 들국화도 있고/ 분홍색 들국화도 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우리방은 향기도 은은하고/ 화려한 기색이 돈다/ 왜 이렇게 좋은가/ 자연의 오묘함이 찾아들었으니/ 나는 일심으로 시 공부를 해야겠다.//
국화꽃 / 천상병
오늘만의 밤은 없었어도/ 달은 떴고/ 별은 반짝였다.// 괴로움만의 날은 없어도/ 해는 다시 떠오르고/ 아침은 열렸다.// 무심만이 내가 아니라도/ 탁자 위 컵에 꽂힌/ 한 송이 국화꽃으로/ 나는 빛난다!//
꽃밭 / 천상병
손바닥 펴 꽃밭 아래 놓으니/ 꽃빛 그늘 앉아 아롱집니다.// 며칠 전 간 비원에서 본/ 그 꽃빛 생각 절로 납니다.// 그 밝음과 그늘이/ 열렬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내 손바닥 위에서//
꽃은 훈장 / 천상병
꽃은 훈장이다./ 하느님이 인류에게 내리신 훈장이다./ 산야에 피어 있는 꽃의 아름다움.// 사람은 때로 꽃을 따서 가슴에 단다./ 훈장이니까 할 수 없는 일이다./ 얼마나 의젓한 일인가.// 인류에게 이런 은총을 내린 하느님은/ 두고 두고 축복되어 마땅한 일이다./ 전진을 거듭하는 인류의 슬기여.//
꽃의 위치에 대하여 / 천상병
꽃이 하등 이런 꼬락서니로 필게 뭐람/ 아름답기 짝이 없고 상냥하고 소리없고/ 영 터무니없이 초대인적(超大人的)이기도 하구나// 현명한 인간도 웬만큼 해서는 당하지 못하리니....../ 어떤 철색황후께서도 되려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이런 이름 짓기가 더러 있었지 않는가 싶다.// 미스터 유니버시티일지라도 우락부락해도....../ 과연 이 꽃송이를 함부로 꺾을 수가 있을까....../ 한다는 수작이 그 찬송가가 아니었을까......//
선경(仙경) 1 -풀 / 천상병
이 풀의 키는 약 1척이나 된다./ 잎을 미묘히 늘어뜨린 모양은,/ 궁녀같기도 하고 황후같기도 하다.// 빛깔은 푸른데 그냥 푸른 것이 아니고/ 농염미가 군데군데 끼인 채,/ 긴 잎을 늘어뜨리니 가관이다.// 엷은 느낌이 날개 있으면 날 것 같고/ 유독히 그 자리에 자라난 것은,/ 흙 속에 뿌리박은 뿌리의 은덕이다.//
동그라미 / 천상병
동그라미는 여자고 사각은 남자다./ 동그라미와 사각형을 두개 그리니까/ 꼭 그렇게만 보여진다.// 상냥하고 자비롭고 꾸밈새없는/ 엄마의 눈과 젖/ 손바닥과 얼굴이 다 둥글다.// 울뚝 불뚝하고/ 매서운 아버지의 눈과 입,/ 손목과 발힘이 네개나 된다.//
소릉조(小陵調) -70년 추일(秋日)에 / 천상병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아버지 제사(祭祀) / 천상병
아버지 제삿날은 음력 구월 초사흘날/ 올해도 부산에 못 가니/ 또! 또!/ 아버님 영혼께서 화내시겠습니다.// 가난이 천생(天生)인 것을/ 아버지 영혼이시여 살펴주소서/ 아버님도 생전에/ "가난하게 살아야 복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는 젊을 때/ 천석(千石)꾼이었는데/ 일본놈에게 속아 다 날리고/ 도일(渡日)하여 돈을 버신 아버님.// 아버지! 아버지!/ 지금까지 생존하였다면/ 팔십이 살짝 넘으셨을 아버지/ 오로지 천국에서 천복(天福)을 누리옵소서.//
산소의 어버이께 / 천상병
두분 아버지 어머니 영혼은,/ 하느님께 인사드렸는지요?/ 죽은 내 친구 인사 받으셨는지요?// 생각건대/ 어버이님은 아무런 죄 없으시고/ 착실하고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님은 아버님보다 10년 더 넘게/ 오래 사셨다 가셨는데/ 하늘나라서 행복한 초혼(初婚) 영원히 비슷하겠군요.// 그저 둘째아들 염려이실 테고/ 요놈이 게으름뱅이 노릇 그만하고/ 천국(天國) 가까이나 와 주었으면 하시겠지요!//
무덤 / 천상병
동양의 무덤은 자연주의 같도/ 서양의 무덤은 합리주의 같고/ 동양의 무덤은 지연합일(地然合一)이고/ 서양의 무덤은 편리위주이고// 풀과 흙,/ 부드러운 선과 부피/ 아름드리 고요한 분위기,/ 이것이 우리 무덤의 모습이고---// 빈틈없이 짜여진 공간 속에/ 되도록 조그마한 부피로 섰는 십자가/ 찾는 사람 별로 없는 곳/ 이것이 코쟁이의 무덤 모습이고---// 우리 집 산소는/ 경남 창원군 진북면/ 대티마을 뒷산인데/ 일 년에 한 번씩 설날에 찾아간다.//
진혼가(鎭魂歌) -저쪽 죽음의 섬에는 내 청춘의 무덤도 있다(니이체) / 천상병
태고적 고요가/ 바다를 딛고 있는/ 그 곳.// 안개 자욱이/ 석유불처럼 흐르는/ 그 곳.// 새 무덤,/ 물결에 씻긴다.//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 천상병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대우주의 정기(精氣)가 모여서/ 되신 분이 아니실까싶다.// 대우주는 넓다./ 너무나 크다.// 그 큰 우주의 정기가 결합하여/우 리 하느님이/ 되신 것이 아니옵니까?// 8월의 종소리 / 천상병
저 소리는 무슨 소리일까?/ 땅의 소리인가?/ 하늘 소리인가?// 한참 생각하니, 종소리./ 멀리 멀리서 들리는 소리.// 저 소리는 어디까지 갈까?/ 우주 끝까지 갈지도 모른다./ 땅속까지 스밀 것이고,/ 천국에서도 들릴 것인가?//
인생서가(人生序歌) / 천상병
격언은 진리 이상이야,/ 진리는 합리주의 의존이고/ 인생은 진리의 수박 겉핥기이다.// 인간은 체험만이 그것에 반역한다./ 경력은 흥망성쇠의 골짜구니./ 모든 자리는 세월의 액세서리.// 내 친구는 거의 모든 것에,/ 통달했지만 모습이 바보고,/ 인생은 바보까지 관대하게 처분한다.//
동창(同窓) / 천상병
지금은 다 뭣들을 하고 있을까?/ 지금은 얼마나 출세를 했을까?/ 지금은 어디를 걷고 있을까?// 점심을 먹고 있을까?/ 지금은 이사관이 됐을까?/ 지금은 가로수 밑을 걷고 있을까?// 나는 지금 걷고 있지만,/ 굶주려서 배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마는/ 그들은 다 무엇들을 하고 있을까?//
희망 / 천상병
내일의 정상을 쳐다보며/ 목을 뽑고 손을 들어/ 오늘 햇살을 간다.// 한 시간이 아깝고 귀중하다./ 일거리는 쌓여 있고/ 그러나 보라 내일의 빛이// 창이 앞으로 열렸다./ 그 창 그 앞 그 하늘!/ 다만 전진이 있을 따름!// 하늘 위 구름송이 같은 희망이여!/ 나는 동서남북 사방을 이끌고/ 발걸음도 가벼이 내일로 간다.//
회상 1 / 천상병
아름다워라, 젊은 날 사랑의 대꾸는/ 어딜 가?/ 어딜 가긴 어딜 가요?// 아름다워라, 젊은 날 사랑의 대꾸는/ 널 사랑해!/ 그래도 난 죽어도 싫어요!// 눈 오는 날 사랑은 쌓인다./ 비 오는 날 세월은 흐른다.//
회상 2 / 천상병
그 길을 다시 가면/ 봄이 오고,// 고개를 넘으면/ 여름빛 쬐인다.// 돌아오는 길에는/ 가을이 낙엽 흩날리게 하고// 겨울은 별수없이/ 함박눈 쏟아진다.// 내가 네게 쓴/ 사랑의 편지// 그 사랑의 글자에는/ 그러한 뜻이, 큰 강물 되어 도도히 흐른다.//
아가야 / 천상병
해 뜨기 전 새벽 중간쯤 희부연 어스럼을 타고 낙심을 이/ 리저리 깨물며, 사직공원 길을 간다. 행인도 드문 이 거리/ 어느 집 문 밖에서 서너 살 됨직한 잠옷 바람의 애띤 계집애/ 가 울고 있다. 지겹도록 슬피 운다. 지겹도록 슬피 운다. 웬/ 일일까? 개와 큰집 대문 밖에서 유리 같은 손으로 문을 두/ 드리며 이 애기는 왜 울고 있을까? 오줌이나 싼 그런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자주 뒤돌아보면서 나는 무심할 수가 없었/ 다.// 아가야, 왜 우니? 이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우니? 무슨/ 슬픔 당했다고, 괴로움이 얼마나 아픈가를 깨쳤다고 우니?/ 이 새벽 정처없는 산길로 헤매어 가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 는데......// 아가야, 너에게는 그 문을 곧 열어줄 엄마손이 있겠지. 이/ 아저씨에게는 그런 사랑이 열릴 문도 없단다. 아가야 울지/ 마! 이런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음악 / 천상병
이것은 무슨 음악이지요? 새벽녘 머리맡에 와서 속삭이는/ 그윽한 소리. 눈물 뿌리며 옛날에 듣던 이 곡의 작곡가는 평/ 생 한 여자를 사랑하다 갔지요? 아마 그 여자의 이름은 클/ 라라일 겝니다. 그의 스승의 아내였지요? 백 년 이백 년 세/ 월은 흘러도 그의 사랑은 아직 다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 래서 오늘 새벽녘 멀고 먼 나라 엉망진창인 이 파락호의 가/ 슴에까지 와서 울고 있지요?//
한낮의 별빛 / 천상병
돌담 가까이/ 창가에 흰 빨래들/ 지붕 가까이/ 애기처럼 고이 잠든/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슬픔 옆에서/ 지겨운 기다림/ 사랑의 몸짓 옆에서/ 맴도는 저 세상 같은/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물결 위에서/ 바윗덩이 위에서/ 사막 위에서/ 극으로 달리는/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새는/ 온갖 한낮의 별빛 계곡을 횡단하면서/ 울고 있다.//
간의 반란 / 천상병
육십 먹은 노인과 마주 앉았다./ 걱정할 거 없네,/ 그러면 어쩌지요?/ 될 대로 될 걸세......// 보지도 못한 내 간이/ 괘씸하게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쪼무래기가 뭘 할까만은/ 아직도 살고픈 목숨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원래 쿠데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수습을/ 늙은 의사에게 묻는데,/ 대책이라고는 시간 따름인가!//
담배 / 천상병
담배는 몸에 해롭다고 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나는 끊지 못한다./ 시인이 만일 금연한다면/ 시를 한 편도 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시를 쓰다가 막히면/ 우선 담배부터 찾는다./ 담배연기는 금시 사라진다./ 그런데 그 연기를 보고 있으면/ 인생의 진리를 알 것만 같다./ 모름지기 담배를 피울 일이다./ 그러면/ 인생의 참맛을 알게 될 터이니까!//
시냇물가 3 / 천상병
이 시냇물은/ 수락산(水落山)에서 발류(發流)하였으니/ 기어코 한강(漢江)에 삽입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서울의 혈로(血路)요 수류(水流)이다./ 시민(市民)들이 모름지기 그 덕화(德化)를 입을 것이니/ 인격(人格)과 품성(品性)이 월등(越等)할 까닭이다.// 기어이 바다에 들 것이니/ 세계(世界) 칠해(七海)는 서울 시민(市民)과는 무관(無關)하지 않다./ 왜 수락산정(水落山頂)에 등산객(登山客)이 가는가…//
시냇물가 5 / 천상병
시냇물이 세차게 흘러가며/ 심지어 파도를 쳤다./ 바위에 부딪쳐, 물결이 거세게 화를 냈다.// 어제와 지난 밤에 비가 억수로 왔으니/ 산에 내린 물이 소나무 밑으로 헤매다가/ 드디어 계곡에 집합하여 이 꼴이다.// 산세와 지세가 바다보다 높아서/ 자연히 밑으로 물이 흐를 수밖에,/ 그렇지만 오늘같이 노도(怒濤)를 치는 것은 처음이다.// 낚시꾼 / 천상병
일심으로 찌를 본다/. 열심히 보는 찌는 꽃과 같다./ 언제 나비처럼 고리가 올까?// 조용하디조용한 강가/ 아무도 안 보는 데서/ 나는 정신의 호흡을 쉴 줄 모른다.// 드디어 찌가 움찍하더니/ 나는 고기 한 마리의 왕/ 승리한 양 나는 경치를 본다.//
한가위 날이 온다 / 천상병
가을이 되었으니/ 한가위 날이 멀지 않았소./ 추석이 되면/ 나는 반드시/ 돌아간 사람들을 그리워하오.// 그렇게도 사랑 깊으시던 외할머니/ 그렇게도 엄격하시던 아버지/ 순하디 순하던 어머니/ 요절한 조카 영준이!/ 지금 천국에서/ 기도하시겠지요.//
만추(晩秋) -주일 / 천상병
내년 이 꽃을 이을 씨앗은/ 바람 속에 덧없이 뛰어들어 가지고,/ 핏발 선 눈길로 행방을 찾는다.// 숲에서 숲으로, 산에서 산으로,/ 무전여행을 하다가/ 모래사장에서 목말라 혼이 난다.// 어린 양 한 마리 돌아오다./ 땅을 말없이 다정하게 맞으며,/ 안락의 집으로 안내한다.// 마리아./ 나에게도 이 꽃의 일생을 주십시오.//
주일 1 / 천상병
이 맑은 가을 하늘 위/ 그 한층 더 위에 구름이 흐릅니다.// 성당 입구 바로 앞/ 저는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구 지키는 교통순경이/ 닦기 끝나면 저도 닦으려구요.// 교통순경의 그 마음가짐보다/ 저가 못한데서야 말이 아닙니다.// 오늘같이 맑은 가을 하늘 위/ 그 한층 더 위에 구름이 흐릅니다.//
주일 2 / 천상병
1/ 그는 걷고 있습니다./ 골목에서 거리로,/ 옆길에서 큰길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과 건물이 있습니다./ 상관 않고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가겠느냐구요?/ 숲으로, 바다로,/ 별을 향하여/ 그는 쉬지 않고 걷고 있습니다.// 2/ 낮에는 찻집, 술집으로/ 밤에는 여인숙.// 나의 길은/ 언제나 꼭 같았는데......// 그러나/ 오늘은 딴 길을 간다.//
연동교회 / 천상병
나는 지금까지 약 30년동안은/ 명동 천주성당에 다녔는데/ 그러니까 어엿한 천주교신도인데도/ 81년부터는/ 기독교 연동교회로 나갑니다./ 주임목사 김형태 목사님도/ 대단히 훌륭하신 목사님으로/ 그리고 기독교방송에서/ 그동안 두번 설교를 하셔서/ 나는 드디어 그분의 연동교회엘/ 나갈 것을 결심하고 나갑니다./ 교회당 구조도 아주 교회당답고/ 조용하고 아늑하여 기뻐집니다./ 아내는 미리 연동교회였으나/ 그동안 가톨릭에 구애되어 나 혼자/ 명동 천주성당에 나갔었으나/ 그런데 81년부터는 다릅니다./ 한번밖에 안 나갔어도 그렇게 좋으니/ 이제는 연동교회에만 나가겠습니다./ 물론 개종은 않고 말입니다./ 배신자라는 말 듣기는 아주 싫습니다.//
하느님 말씀 들었나이다 / 천상병
1950년 10월 5일 정오경/ 나는 종로 2가/ 안국동쪽을 꺾고 있었습니다./ 길 꺾는 모퉁이에/ 한 그루 가로수가 있었는데,/ 그 밑을 지나는 순간/ 하늘에서// 낮으막하나,/ 그래도 또렷한 우리말로/ ´명상은 안돼!´하는/ 말씀이 들리시더니/ 또 일분 후에/ ´팔팔까지 살다가, 그리고 더´라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틀림없습니다./ 2천년만의 하느님 말씀입니다.// 저는 몸둘 바를 모르고/ 그냥 길바닥에 주저앉아/ 한참 명상에 잠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곡(哭) 신동엽 / 천상병
어느 구름 개인 날/ 어쩌다 하늘이/ 그 옆얼굴을 내어보일 때,// 그 맑은 눈/ 한곬으로 쏠리는 곳/ 네 무덤 있거라.// 잡초 무더기./ 저만치 가장자리에/ 꽃, 그 외로움을 자랑하듯,// 신동엽!/ 꼭 너는 그런 사내였다.//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그 잠깐만 두어두고/ 너는 갔다.// 저쪽 저/ 영광의 나라로!//
김관식(金冠植)의 입관(入棺) / 천상병
심통(心痛)한 바람과 구름이었을 게다. 네 길잡이는./ 고단한 이 땅에 슬슬 와서는/ 한다는 일이/ 가슴에서는 숱한 구슬./ 입에서는 독한 먼지./ 터지게 토(吐)해 놓고,/ 오늘은 별일 없다는 듯이/ 싸구려 관(棺) 속에/ 삼베옷 걸치고/ 또 슬슬 들어간다./ 우리가 두려웠던 것은,/ 네 구슬이 아니라,/ 독한 먼지였다./ 좌충우돌의 미학은/ 너로 말미암아 비롯하고,/ 드디어 끝난다./ 구슬도 먼지도 못되는/ 점잖은 친구들아,/ 이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니/ 되려 기뻐해다오./ 김관식(金冠植)의 가을바람 이는 이 입관(入棺)을.//
천상병(千祥炳, 1930년~1993년) 시인, 문학평론가
호는 심온(深溫), 본관은 영양(潁陽)이다. 1930년 일본 효고현(兵庫縣) 히메지(姬路)에서 출생하였다. 한때 일본 효고 현 고베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의 원적지는 경상남도 마산이다. 1949년 마산중학 5년 재학 중 당시 담임교사이던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되었다. 1952년 시 「갈매기」를 《문예》지에 게재한 후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1964년 김현옥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약 2년 간 재직하다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약 6개월 간 옥고를 치르고 무혐의로 풀려난 적이 있다. 1971년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 정신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다. 문학계에서는 손꼽힐 정도로 대단한 주당이자 기인이다. 특히 비슷하게 문학계의 주당으로 이름을 드날렸던 시인 김관식과는 죽이 잘 맞았다. 1967년 불행히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옥고와 고문을 겪었으며, 1993년 지병인 간경화로 인해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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