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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기림 시인

부흐고비 2021. 6. 10. 08:30

길 / 김기림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나비의 여행 -아가의 방 5 / 김기림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表紙)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阿鼻叫喚)하는 화약 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氣盡脈盡)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연가(戀歌) / 김기림
두 뺨을 스치는 바람결이 한결 거세어 별이 꺼진 하늘 아래/ 짐승처럼 우짖는 도시의 소리 피해오듯 돌아오면서/ 내 마음 어느 새 그대 곁에 있고나/ 그대 마음 내게로 온 것이냐// 육로(陸路)로 천리(千里) 수로(水路) 천리/ 오늘 밤도 소스라쳐 깨우치는 꿈이 둘/ 가로수 설레는 바람소리 물새들 잠꼬대……/ 그대 앓음소리 아닌 것 없고나// 그대 있는 곳 새나라 오노라 얼마나, 소연하랴/ 병 지닌 가슴에도 장미 같은 희망이 피어/ 그대 숨이 가뻐 처녀같이 수다스러우리라// 회오리 바람 미친 밤엔 우리 어깨와 어깨 지탱하여/ 찬비와 서릿발 즐거이 맞으리라/ 자빠져 김나는 뭉둥아리 하도 달면 이리도 피해 달아나리라/ 새나라 언약이 이처럼 화려커늘/ 그대와 나 하루살이 목숨쯤이야/ 빛나는 하루 아침 이슬인들 어떠랴//

태양의 풍속 / 김기림
태양아,/ 다만 한 번이라도 좋다. 너를 부르기 위하여 나는 두루미의 목통을 빌려 오마. 나의 마음의 무너진 터를 닦고 나는 그 위에 너를 위한 작은 궁전(宮殿)을 세우련다. 그러면 너는 그 속에 와서 살아라. 나는 너를 나의 어머니 나의 고향 나의 사랑 나의 희망이라고 부르마.그리고 너의 사나운 풍속을 좇아서 이 어둠을 깨물어 죽이련다.// 태양아,/ 너는 나의 가슴 속 작은 우주의 호수와 산과 푸른 잔디밭과 흰 방천(防川)에서 불결한 간밤의 서리를 핥아버려라. 나의 시냇물을 쓰다듬어 주며 나의 바다의 요람을 흔들어 주어라. 너는 나의 병실을 어족들의 아침을 다리고 유쾌한 손님처럼 찾아오너라.// 태양보다도 이쁘지 못한 시. 태양일 수가 없는 서러운 나의 시를 어두운 병실에 켜 놓고 태양아 네가 오기를 나는 이 밤을 세워 가며 기다린다.//

                 유리창 / 김기림


여보/ 내 마음은 유리인가 봐, 겨울 하늘처럼/ 이처럼 작은 한숨에도 흐려버리니…/ 만지면 무쇠같이 굳은 체 하더니/ 하로밤 찬 서리에도 금이 갔구료//

눈포래 부는 날은 소리치고 우오/ 밤이 물러간 뒤면 온 뺨에 눈물이 어리오// 타지 못하는 정열 박쥐들의 등대/ 밤마다 날아가는 별들이 부러워 쳐다보며 밝히오//

여보/ 내 마음은 유리인가 봐/ 달빛에도 이렇게 부서지니//


새해 앞에 잔을 들고 / 김기림
첫 잔은/ 금이 간/ 자꾸만 금이 가려는 민족을 위하여 들자/ 피는 과연 물보다 진한 것인가/ 아! 그러나 '도그마'는 피보다 진하였다/ 철 철 철/ 넘치는 잔은/ 다시 아믈 민족의 이름으로 들자/ 또 한 잔은/ 지혜롭고 싱싱할 내일과 또 인류에게/ 마지막 잔은-/ 그렇다/ 우리 모두의 한결같은 옛 꿈의 소생을 위하여 들자//

단념 / 김기림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별거 아니었다. 끝없이 단념해 가는것. 그것 뿐인 것 같다./ 산 너머 저 산 너머는 행복이 있다 한다. 언제고 그 산을 넘어 넓은 들로 나가 본다는 것이 산골 젊은이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이윽고는 산 너머 생각도 잊어버리고 아르네는 결혼을 한다. 머지않아서 아르네는 사오 남매의 복 가진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수많은 아르네들은 그만 나폴레옹을 단념하고 셰익스피어를 단념하고 토머스 아퀴나스를 단념하고 렘브란크을 단념하고 자못 풍정낭식한 생애을 이웃 농부들의 질소한 관장속에 마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주 단념해 버리는 것은 용기를 요하는 것이다. 가계를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지위를 버리고 드디어 온갖 욕망의 불덩이인 육체를 몹쓸 고행으로써 벌하는 수행승의 생애는 바로 그런것이다. 그것은 무에 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아주 반대로 끝없이 새로운 것을 욕망하고 추구하고 돌진하고 깨뜨리고 불타다가 생명의 마지막 불꽃마저 꺼진 뒤에야 끊어지는 생활 태도가 있다. 돈 후안이 그랬고 베토벤이 그랬고 장 크리스토프의 주인공이 그랬고 랭보가 그랬고 로렌츠가 그랬고 고갱이 그랬다./ 이 두길은 한 가지로 영웅의 길이다. 다만 그 하나는 영구한 적멸로 가고 하나는 그 부단한 건설로 향한다. 이 두 나무의 과실로 한편의 인도의 오늘이 있고 다른 한편의 서양 문명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극단 사이에 있는 가장 참한 조행 갑에 속하는 태도가 있다. 그저 얼마간 욕망하다가 얼마간 단념하고...... 아주 단념도 못 하고 아주 쫓아가지도 않고 그러는 사이에 분에 맞는 정도의 지위와 명예와 부동산과 자녀를 거느리고 영양도 갑을 보전하고 때로는 표창도 되고 해서 한 편 아담한 통속 소설 주인공 표본이 된다. 말하자면 속인처세의 극치다./ 이십 대에는 성히 욕망하고 추구하다가도 삼십 대만 잡아 서면 사람들은 더욱 성하게 단념해야 하나 보다. 학문을 단념하고 연애를 단념하고 새로운 것을 단념하고 발명을 단명하고 드디어는 착한 사람이고자 하던 일까지 단념해야 한다. 삼십이 넘어 가지고도 시인이라는 것은 망나니라는 말과 같다고 한 누구의 말은 어쩌면 그렇개도 찬란한 명구냐./ 약간은 단념하고 약간은 욕망하는 것이 제일 안전한 일 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단념은 또한 처량한 단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도 학문에 있어서도 나는 나 자신과 친한 벗에게는 이 고상한 섭생법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일체냐, 그렇지 않으면 무냐.'/ 예술도 학문도 늘 이 두 단애의 절정을 올라가는 것 같다. 평온을 바라는 시민은 마땅히 기어 내려가서 저 골짜기 밑바닥의 탄탄대로를 감이 좋을 것이다.//

오후(午後)의 꿈은 날 줄을 모른다 / 김기림
날아갈 줄을 모르는 나의 날개.// 나의 꿈은/ 오후의 피곤한 그늘에서 고양이처럼 졸리웁다.// 도무지 아름답지 못한 오후는 꾸겨서 휴지통에나 집어 넣을까?// 그래도 지문학(地文學)의 선생님은 오늘도 지구는 원만하다고 가르쳤다나./ 갈릴레오의 거짓말쟁이.// 흥, 창조자를 교수대에 보내라.// 하느님,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성한 날개를 다고.// 나는 화성(火星)에 걸터앉아서 나의 살림의 깨어진 지상(地上)을 껄 껄 껄 웃어주고 싶다.// 하느님은 원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있을까?//

공동묘지 / 김기림
일요일 아침마다 양지 바닥에는/ 무덤들이 버섯처럼 일제히 돋아난다.// 상여는 늘 거리를 돌아다보면서/ 언덕으로 끌려 올라가군 하였다.// 아무 무덤도 입을 벌리지 않도록 봉해 버렸건만/ 묵시록의 나팔 소리를 기다리는가 보아서/ 바람 소리에조차 모두들 귀를 쭝그린다.// 조수(潮水)가 우는 달밤에는/ 등을 일으키고 넋없이 바다를 굽어본다.//

아롱진 기억의 옛바다를 건너 / 김기림
당신은 압니까./ 해오라비의 그림자 거꾸로 잠기는 늙은 강 위에 주름살 잡히는 작은 파도를 울리는것은 누구의 장난입니까./ 그리고 듣습니까. 골짝에 쌓인 빨갛고 노란 떨어진 잎새들을 밟고 오는 조심스러운 저 발차취 소리를―/ 클레오파트라의 눈동자처럼 정열에 불타는 루비빛의 임금(林檎)이 별처럼 빛나는 잎사귀 드문 가지에 스치는 것은 또한 누구의 옷자락입니까./ 지금 가을은 인도의 누나들의 산호빛의 손가락이 짠 나사의 야회복을 발길에 끌고 나의 아롱진 기억의 옛 바다를 건너 옵니다./ 나의 입술 가에 닿는 그의 피부의 촉각은 석고와 같이 희고 수정(水晶)과 같이 찹니다./ 잔인한 그의 손은 수풀 속의 푸른 궁전에서 잠자고 있는 귀뚜라미들의 꿈을 흔들어 깨우쳐서 그들로 하여금 슬픈 쏘푸라노를 노래하게 합니다./ 지금 불란서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검은 포도송이들이 사라센의 포장에 놓인 것처럼 종용이 달려 있는 덩굴 밑에는 먼 조국을 이야기하는 이방(異邦) 사람들의 작은 잔채가 짙어 갑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순교자의 찢어진 심장과 같이 갈라진 과육(果肉)에서 흐르는 붉은 피와 같은 액체를 빨면서 우리들의 먼 옛날과 잊어버렸던 순교자들을 이야기하며 웃으며 이야기하며 울려 저 덩굴 밑으로 아니 오렵니까.//

연륜(年輪) / 김기림
무너지는 꽃이파리처럼/ 휘날려 발 아래 깔리는/ 서른 나문 해야// 구름같이 피려던 뜻은 날로 굳어/ 한 금 두 금 곱다랗게 감기는 연륜(年輪)// 갈매기처럼 꼬리 덜며/ 산호(珊瑚) 핀 바다 바다에 나려앉은 섬으로 가자// 비취빛 하늘 아래 피는 꽃은 맑기도 하리라/ 무너질 적에는 눈빛 파도에 적시우리// 초라한 경력을 육지에 막은 다음/ 주름 잡히는 연륜(年輪)마저 끊어버리고/ 나도 또한 불꽃처럼 열렬히 살리라.//

새나라 송(頌) / 김기림
거리로 마을로 산으로 골짜구니로/ 이어가는 전선은 새 나라의 신경/ 이름 없는 나루 외따른 동리일망정/ 빠진 곳 하나 없이 기름과 피/ 골고루 돌아 다사론 땅이 되라// 어린 기사들 어서 자라나/ 굴뚝마다 우리들의 검은 꽃묶음/ 연기를 올리자/ 김빠진 공장마다 동력을 보내서/ 그대와 나 온 백성이 새 나라 키워 가자// 산신과 살기와 염병이 함께 사는 비석이 흔한 마을에 모―터와/ 전기를 보내서/ 산신을 쫓고 마마를 몰아내자/ 기름 친 기계로 운명과 농장을 휘몰아 갈/ 희망과 자신과 힘을 보내자// 용광로에 불을 켜라 새 나라의 심장에/ 철선을 뽑고 철근을 늘이고 철판을 피리자/ 세멘과 철과 희망 위에/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 가자// 녹슬은 궤도에 우리들의 기관차 달리자/ 전쟁에 해어진 화차와 트럭에/ 벽돌을 싣자 세멘을 올리자/ 애매한 지배와 굴욕이 좀먹던 부락과 나루에/ 내 나라 굳은 터 다져 가자//

조국의 노래 / 김기림
언제 불러 보아도/ 내 마음 설레는/ 아- 어머니인/ 조국(祖國)이여// 아득히 먼 듯/ 삼한(三韓) 신라(新羅)에 뻗은 맥맥/ 그러나 한없이 가까웁게/ 내 핏줄에 밀려오고 밀려드는/ 물 구비/ 구비마다 감기운/ 그대 숨결// 다보탑(多寶塔) 돌난간 문수(文殊)보살 손길에/ 청자(靑磁)병 모가지에 자꾸만 만지우는/ 다사론 손길// 향가 가요 가사 시조에/ 되쳐 되쳐 올리는 그 목소리/ 강과 호수와 또 비취빛 하늘/ 가는 곳마다 비최는 얼골/ 아- 무시로 내 피부테 닷는 것/ 귀에 울리는 것 닥아오는 것/ 그는 내 조국/ 내 자랑일러라// 지난날/ 그대 없어서/ 우리 너나없이 서럽게 자란 아이/ 나면서 모두가 인 찍힌 망명자(亡命者)/ 그대 갖고 피북어처럼 여위던 족속// 오늘/ 거리 거리/ 바람에 파독이는/ 태극기// 꽃이파린가 별쪼각인가/ 아- 이는 내 희망/ 내가 태어나/ 그 밑에 살기 소원이던 꿈// 인류에게 고하라/ 우리 목숨 앞서/ 그를 다시 빼앗을 길 없음을// 역사의 행진/ 한 모퉁이 떳떳이 나설 우리/ 삐걱이는 바퀴에/ 내 약한 어깨 받치었음/ 한없이 보람 있고나/ 언제 불러 보아도/ 마음 설레는/ 아- 어머니인/ 내 조국이어//

파고다 공원 / 김기림
쓰레기통의 설비가 없는 까닭에/ 마나님들은 때때로 쓰레받기를 들고 이곳으로 나옵니다./ 오후가 되면 하누님은/ 절대로 필요치 않은 第六日(제육일)의 濫造物(람조물)들을/ 이 쓰레기통에 모아놓고는/ 탄식을 되풀이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산양 / 김기림
홀로 자뻐져/ 옛날에 옛날에 잊어버렸던 찬송가를 외워보는 밤/ 산양과 같이 나는 갑자기 무엇이고 믿고 싶다.//

능금 / 김기림
심장을 잃어버린 토끼는/ 지금은 어디가서 마른풀을 베고 낮잠을 잘까?//

우울한 천사 / 김기림
푸른 하늘에 향하야/ 날지않는 나의 비닭이. 나의 절름발이.// 아침해가/ 금빛 기름을 부어놓는/ 상아의 해안에서/ 비닭이의 상한 날개를 싸매는/ 나는 오늘도/ 우울한 어린 천사다.//

요양원 / 김기림
저마다 가슴속에 암종을 기르면서/ 지리한 역사의 임종을 고대한다.// 그날 그날의 동물의 습성에도 아주 익어버렸다./ 표본실의 착한 윤리에도 아담하게 고정한다.// 인생아 나는 용맹한 포수인 체 숨차도록/ 너를 쫓아 댕겼다.// 너는 오늘 간사한 메초라기처럼/ 내 발 앞에서 포도독 날러가 버리는구나.//

모다들 돌아와 있고나 / 김기림
오래 눌렸던 소리 뭉쳐/ 동포와 세계에 외치노니/ 민족의 소리고져 등불이고져/ 역사의 별이고져/ 여기 다시 우리들 모다 돌아와 있노라/ 눈부시는 월계관은 우리들 본시 바라지도 않은 것./ 찬란의 자유의 새나라/ 첩첩한 가시덤불 저편에 아직도 머니/ 우리들 가시관 달게 쓰고/ 새벽 서릿길 즐거이 걸어가리.//

나의 소제부 / 김기림
오늘밤도 초생달은/ 산호로 판 나막신을 끌고서/ 구름의 층층계를 밟고 나려옵니다.// 어서와요 정마운 소제부./ 그래서 왼종일 깔앉은 띠끌을/ 내 가슴의 河床(하상)에서 말쑥하게 쓸어줘요./ 그러고는 당신과 나 손을 잡고서/ 물결의 노래를 들으려 바닷가로 나려가요./ 바다는 우리들의 유랑한 손풍금.//

향수 / 김기림
나의 고향은/ 저 산 넘어 또 저 구름밖/ 아라사의 소문이 자조 들리는 곳.// 나는 문득/ 가로수 스치는 저녁바람 소리 속에서/ 여엄-염 송아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멈춰선다.//

일요일 행진곡 / 김기림
월/ 화/ 수/ 목/ 금/ 토/ 하낫 둘/ 하낫 둘/ 일요일로 나가는 <엇둘> 소리……// 자연의 학대에서/ 너를 놓아라/ 역사의 여백……// 영혼의 위생 데이……/ 일요일의 들로/ 바다로……// 우리들의/ 유쾌한/ 하늘과 하루/ 일요일/ 일요일//

곡 백범선생(哭 白凡先生) / 김기림
살 깍고 피 뿌린 40년/ 돌아온 보람/ 금도 보석도 아닌/ 단 한알의 탄환// 꿈에도 못 잊는/ 조국통일의 산 생리를 파헤치는/ 눈도 귀도 없는 몽매한 물리여!// 동으로 동으로 목말라 찾던 어머니인 땅이/ 인제사 바치는 성찬은 이뿐이던가// 저주받을 세 옳은 민족이로다/ 스스로 제 위대한 혈육에/ 아로새기는 박해가 어찌 이처럼 숙련하냐// 위태로운 때/ 큰 기둥 뒤 따라 꺾여짐/ 민족의 내일에/ 빗바람 설레는 우짖음 자꾸만/ 귀에 자욱하구나// 눈물을 아껴둬 무엇하랴/ 젊은 가슴마다 기념탑 또하나 무너지는 소리/ 옳은 꿈 사랑하는 이 어던 멈춰서/ 가슴 쏟아 여기 통곡하자// 눈물속 어리는/ 끝없는 조국의 어여쁜 얼굴/ 저마다 쳐다보며/ 꺼꾸러지며/ 그를 넘어 또다시 일어나 가리//
* 1949년 6월 30일 《국도신문(國都新聞)》에 발표.

만세(萬歲)소리 / 김기림
하도 억울하여/ 부르는 소리 피 섞인 소리가/ 만세였다/ 총뿌리 앞에서 칼자욱에서 채찍 아래서/ 터져 나오는 민족의 소리가/ 만세였다//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어/ 그저 부르는 소리가/ 만세였다// 눌리다 눌리다/ 하도 기뻐 어안이 벙벙하여/ 그저 터져 나온 소리도/ 만세였다// 만세는 손을 들어 함께 부르자/ 만세는/ 자유를 달라는 소리/ 꿈이 왔다는 소리/ 못 견디겠다는 소리/ 다시 일어난다는 소리/ 네 소리도 내 소리도 아닌/ 우리들 모두의 소리// 민족과 역사와 원한과 소원을 한데 묶은/ 터질 듯 함축이 너무 무거워/ 걷잡을 수 없는 소리/ 폭죽처럼/ 별과 구름 사이에 퉁기는 소리였다//

청동 / 김기림
녹쓰른 청동 그릇 하나/ 어두운 빛을 허리에 감고/ 현란한 세기의 골목에 물러앉아/흡사 여러 역시를 산 듯하다// 도도히 흘러온 먼 세월/ 어느 여울까에 피었던/ 가지가지 꽃향기를/ 너는 담었드냐//

금붕어 / 김기림
금붕어는 어항 밖 대기(大氣)를 오를래야 오를 수 없는 하늘이라 생각한다./ 금붕어는 어느새 금빛 비늘을 입었다 빨간 꽃이파리 같은/ 꼬랑지를 폈다. 눈이 가락지처럼 삐어져 나왔다./ 인젠 금붕어의 엄마도 화장한 따님을 몰라 볼 게다.// 금붕어는 아침마다 말숙한 찬물을 뒤집어쓴다 떡가루를/ 흰손을 천사의 날개라 생각한다. 금붕어의 행복은/ 어항 속에 있으리라는 전설(傳說)과 같은 소문도 있다.// 금붕어는 유리벽에 부딪혀 머리를 부수는 일이 없다./ 얌전한 수염은 어느새 국경(國境)임을 느끼고는 아담하게/ 꼬리를 젓고 돌아선다. 지느러미는 칼날의 흉내를 내서도/ 항아리를 끊는 일이 없다.// 아침에 책상 위에 옮겨 놓으면 창문으로 비스듬히 햇볕을 녹이는/ 붉은 바다를 흘겨본다. 꿈이라 가르쳐진/ 그 바다는 넓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금붕어는 아롱진 거리를 지나 어항 밖 대기(大氣)를 건너서 지나해(支那海)의/ 한류(寒流)를 끊고 헤엄쳐 가고 싶다. 쓴 매개를 와락와락/ 삼키고 싶다. 옥도(沃度)빛 해초의 산림 속을 검푸른 비늘을 입고/ 상어에게 쫓겨다녀 보고도 싶다.// 금붕어는 그러나 작은 입으로 하늘보다도 더 큰 꿈을 오므려/ 죽여버려야 한다. 배설물의 침전처럼 어항 밑에는/ 금붕어의 연령만 쌓여 간다./ 금붕어는 오를래야 오를 수 없는 하늘보다도 더 먼 바다를/ 자꾸만 돌아가야만 할 고향이라 생각한다.//

못 / 김기림
모-든 빛나는 것 아롱진 것을 빨아 버리고/ 못은 아닌 밤중 지친 瞳子처럼 눈을 감었다.// 못은 수풀 한복판에 뱀처럼 서렸다/ 뭇 호화로운 것 찬란한 것을 녹여 삼키고// 스스로 제 沈默에 놀라 소름친다/ 밑 모를 맑음에 저도 몰래 으슬거린다// 휩쓰는 어둠 속에서 날(刃)처럼 흘김은/ 빛과 빛갈이 녹아 엉키다 못해 식은 때문이다// 바람에 금이 가고 비빨에 뚫렸다가도/ 상한 곳 하나 없이 먼동을 바라본다//

오후의 꿈은 날 줄을 모른다 / 김기림
날아갈 줄을 모르는 나의 날개.// 나의 꿈은/ 오후의 피곤한 그늘에서 고양이처럼 졸리다.// 도무지 아름답지 못한 오후는 꾸겨서 휴지통에나 집어넣을까?// 그래도 지문학(地文學)의 선생님은 오늘도 지구는 원만하다고 가르쳤다나. 갈릴레오의 거짓말쟁이.// 홍 창조자를 교수대에 보내라.// 하느님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성한 날개를 다오. 나는 화성(火星)에 걸터앉아서 나의 살림이 깨어진 지상(地上)을 껄 껄 껄 웃어 주고 싶다.// 하느님은 원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있을까?//

知慧(지혜)에게 바치는 노래 / 김기림
검은 機關車 車머리마다/ 장미꽃 쏟아지게 피워서/ 쪽빛 바닷바람 함북 안겨/ 비단폭 구룸장 휘감아 보내마/ 숨쉬는 鋼鐵 꿈은 아는 動物아// 황량한「近代」의 남은 터에 쓸어져/ 병들어 이즈러저 半身이 피에 젖은/ 「헬라쓰」의 오래인 後裔 ․ 이 방탕한 世紀의 아름소리 드르렴/ 자못 길드리기 어려운 즘생이더니/ 知慧의 속삭임에 오늘은 점잔이 귀죽었고나// 풀냄새 싱싱한 山脈을 새어/ 힌물결 선을 두룬 뭇大陸의 가장자리 도라/ 간 데마다 暗黙과 幸福만이 사는 아롱진 都市/ 비취빛 한울밑 꽃밭 속의 工場에서는/ 機械와 皮帶가 樂器처럼 울려오리// 時間과 空間이 아득하게 맛대인 곳/ 거기서□□□ 無限은 벌써 한낱 語彙가 아니고/ 住民들의 한이 시린 味覺이리라/ 얽히고 설킨 太陽系의 數式의 그물에 걸린/ 날랜 橢圓形하나-새로운 별의 誕生이다// 文明과 自然의 아름다운 婚姻/ 知慧와 勝利 눈부시는 나라 나라는/ 말머리 무겁고 눈방울 영롱한 種族에게 주리라/ 歷史는 꿈많은 시절의 自記처럼/ 하로 하로 淸新한「페-지」만이 붙어가리라// 검은 機關車 車머리마다/ 장미꽃 쏟아지게 피워 보내마/ 無知와 不幸과 미련만이 君臨하던/ 재빗 神話는 사라졌다고 사람마다 일러줘라/ 숨쉬는 鋼鐵 꿈을 아는 動物아//
* 해방기념시집, 1945년 12월

우리들의 팔월(八月)로 돌아가자 / 김기림
들과 거리 바다와 기업도/ 모두 다 바치어 새 나라 세워 가리라―/ 한낱 벌거숭이로 돌아가 이 나라 지줏돌 고이는/ 다만 쪼악돌이고저 원하던/ 오― 우리들의 팔월(八月)로 돌아가자.// 명예도 지위도 호사스런 살림 다 버리고/ 구름같이 휘날리는 조국의 깃발 아래/ 다만 헐벗고 정성스런 종이고저 맹세하던/ 오― 우리들의 팔월(八月)로 돌아가자.// 어찌 닭 울기 전 세 번뿐이랴./ 다섯 번 일곱 번 그들 모른다 하던 욕된 그날이 아파/ 땅에 쓰러져 얼굴 부비며 끓는 눈물/ 눈뿌리 태우던 우리들의 팔월(八月)// 먼 나라와 옥중과 총칼 사이를/ 뚫고 헤치며 피 흘린 열렬한 이들마저/ 한갓 겸손한 심부름꾼이고저 빌던/ 오― 우리들의 팔월(八月)로 돌아가자.// 끝없는 노염 통분 속에서 빚어진/ 우리들의 꿈 이빨로 물어뜯어 아로새긴 조각/ 아무도 따를 이 없는 아름다운 땅 만들리라/ 하늘 우러러 외우치던 우리들의 팔월(八月)// 부리는 이 부리우는 이 하나 없이/ 지혜와 의리와 착한 마음이 꽃처럼 피어/ 천사들 모두 부러워 귀순하느니라/ 내 팔월(八月)의 꿈은 영롱한 보석 바구니.// 오― 팔월(八月)로 돌아가자/ 나의 창세기 에워싸던 향기론 계절로―/ 썩은 연기 벽돌더미 먼지 속에서/ 연꽃처럼 홀란히 피어나던 팔월(八月)/ 오― 우리들의 팔월(八月)로 돌아가자.//

봄은 전보도 없이 / 김기림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 말 없는 산허리를 기어 오는/ 차 ㅅ 소리/ 우루루루/ 오늘도 철교는 운다. 무엇을 우누.// 글쎄 봄은 언제 온다는 전보도 없이/ 저 차를 타고 도적과 같이 왔구려/ 어머니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골짝에서 코고는 시냇물들을 불러/ 일으키며 ---/ 해는 지금 붉은 얼굴을 벙글거리며/ 사라지는 엷은 눈에 이별의 키쓰를/ 뿌리노라/ 바뿌게 돌아댕기오.// 포풀라들은 파―란 연기를 뿜으면서/ 빨래와 같이 하―얀 ​午後의 방천에/ 늘어서서/ 실업쟁이처럼 담배를 피우오.// 봄아/ 너는 언제 강가에서라도 만나서/ 나에게 이렇다는 약속을 한 일도 없건만/ 어쩐지 무엇을 ---- 굉장히 훌륭한/ 무엇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애서// 나는 오늘도 광이를 멘채 돌아서서/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기 ― ㄴ 말이 없는 산기슭을 기어오는/ 기차를 바라본다.//

봄 / 김기림
사월은 게으른 표범처럼/ 인제사 잠이 깼다/ 눈이 부시다/ 가려웁다/ 소름친다/ 등을 살린다/ 주춤거린다/ 성큼 겨울을 뛰어 넘는다//

가을의 과수원 / 김기림
어린 곡예사인 별들은 끝이 없는 암흑의 그물 속으로 수없이 꼬리를 물고 떨어집니다. 포풀라의 나체는 푸른 저고리를 벗기우고서 방천 위에서 느껴 웁니다. 과수원 속에서는 임금(林檎)나무들이 젊은 환자와 같이 몸을 부르르 떱니다. 무덤을 찾아다니는 잎 잎 잎……// 서(西) 남(南) 서(西)// 바람은 아마 이 방향에 있나 봅니다. 그는 진둥나무의 검은 머리채를 찢으며 아킬러쓰의 다리를 가지고 쫓겨가는 별들 속을 달려갑니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찾는 광란한 기적소리가 지구의 모―든 철요면(凸凹面)을 굴러갑니다. SOS·SOS. 검은 바다여 너는 당돌한 한 방울의 기선마저 녹여 버리려는 의지를 버리지 못하느냐? 이윽고 아침이 되면 농부들은 수없이 떨어진 별들의 슬픈 시체를 주우려 과일밭으로 나갑니다. 그러고 그 기적적인 과일들을 수레에 싣고는 저 오래인 동방의 시장 바그다드로 끌고 갑니다.//

가을의 태양(太陽)은 플라티나의 연미복(燕尾服)을 입고 / 김기림
가을의/ 태양은 게으른 화가입니다.// 거리 거리에 머리 숙이고 마주선 벽돌집 사이에/ 창백한 꿈의 그림자를 그리며 다니는……// 쇼윈도우의 마네킹 인형은 홑옷을 벗기우고서/ 셀룰로이드의 눈동자가 이슬과 같이 슬픕니다.// 실업자의 그림자는 공원의 연못가의 갈대에 의지하여/ 살찐 금붕어를 호리고 있습니다.// 가을의 태양(太陽)은 플라티나의 연미복을 입고서/ 피 빠진 하늘의 얼굴을 산보하는/ 침묵한 화가입니다.//

겨울의 노래 / 김기림
「망또」처럼 추근추근한 濕地기로니 왜 이다지야 太陽이 그리울까 醫師는 處方을 斷念하고 돌아갔다지요 아니요 나는 人生이 더 노엽지 않읍니다 旅行도 했습니다 몇낱 서투른 「러브씬」―무척 우습습니다 人造絹을 두르고 還故鄕하는 御史道님도 있읍니다 저마다 勳章처럼 傲慢합니다 사뭇 키가 큼니다 남들은 참말로 노래를 부를 줄 아나배// 갈바람 속에 우두커니 섰는 벌거벗은 허수아비들 어느 철없는 가마귀가 무서워할까요 저런 沿빛 하늘에도 별이 뜰 리 있나 薔薇가 피지 않는 한울에 별이 살 理 있나 바람이 떼를 지어 江가에서 우짖는 밤은 絶望이 혼자 밤새도록 내 친한 벗이었읍니다 마지막 별이 흘러가도 아무도 소름치지 않읍니다 집마다 새벽을 믿지 않는 頑固한 窓들이 잠겨 있읍니다 六天年 메마른 思想의 沙漠에서는 오늘밤도 희미한 神話의 불길들이 음산한 懷疑의 바람에 불려 깜박어림니다 그러나 四月이 오면 나도 이 추근추근한 季節과도 작별해야 하겠읍니다 濕地에 자란 검은 생각의 雜草들을 불사워 버리고 太陽이 있는 바닷가로 나려가겠읍니다 거기서 벌거벗은 신들과 健康한 英雄들을 만나겠읍니다.//
* 문장, 1939년

기차 / 김기림
레일을 쫓아가는 기차는 풍경에 대하여도 파랑빛의 로맨티시즘에 대하여도 지극히 냉담하도록 가르쳤나 보다./ 그의 끝없는 여수를 감추기 위하여 그는 그 붉은 정열의 가마 위에 검은 강철의 조끼를 입는다./ 내가 식당의 메뉴 뒷등에/ (나로 하여금 저 바닷가에서 죽음과 납세와 초대장과 그 수없는 결혼식 청첩과 부고들을 잊어버리고 저 섬들과 바위의 틈에 섞여서 물결의 사랑을 받게 하여주옵소서)/ 하고 시를 쓰면 기관차란 놈은 그 툰탁한 검은 갑옷 밑에서 커―다란 웃음소리로써 그것을 지워버린다./ 나는 그만 화가 나서 나도 그놈처럼 검은 조끼를 입을까 보다 하고 생각해 본다//

깃발 / 김기림
파랑 모자(帽子)를 기울여 쓴 불란서영사관(佛蘭西領事館) 꼭대기에서는/ 삼각형(三角形)의 깃발이 붉은 금(金)붕어처럼 꼬리를 떤다.// 지중해(地中海)에서 인도양(印度洋)에서 태평양(太平洋)에서/ 모―든 바다에서 육지(陸地)에서/ 펄 펄 펄/ 깃발은 바로 항해(航海)의 일초 전(一秒前)을 보인다.// 깃발 속에서는/ 내일(來日)의 얼굴이 웃는다./ 내일(來日)의 웃음 속에서는/ 해초(海草)의 옷을 입은 나의 ‘희망(希望)’이 잔다.// 추억 / 김기림 종다리 뜨는 아침 언덕 우에 구름을 쫓아 달리던/ 너와 나는 그날 꿈 많은 소년이었다./ 제비 같은 이야기는 바다 건너로만 날리었고/ 가벼운 날개 밑에 머-ㄹ리 수평선이 층계처럼 낮더라.// 자주 투기는 팔매는 바다의 가슴에 화살처럼 박히고/ 지칠 줄 모르는 마음은 단애(斷崖)의 허리에/ 게으른 갈매기 울음소리를 비웃었다.// 오늘 얼음처럼 싸늘한 노을이 뜨는 바다의 언덕을 오르는/ 두 놈의 봉해진 입술에는 바다 건너 이야기가 없고.// 곰팽이처럼 얼룩진 수염이 코밑에 미운 너와 나는/ 또다시 가슴이 둥근 소년일 수 없고나.//

기상도(氣象圖) / 김기림
<제1부 : 세계의 아침>// 비늘/ 돋힌/ 해협(海峽)은/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둘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처럼 미끄러웁고/ 오만(傲慢)한 풍경은 바로 오전 칠시(七時)의 절정(絶頂)에 가로누었다.// 헐덕이는 들 우에/ 늙은 향수(香水)를 뿌리는/ 교당(敎堂)의 녹쓰른 종(鍾)소리./ 송아지들은 들로 돌아가렴으나./ 아가씨는 바다에 밀려가는 윤선(輪船)을 오늘도 바래 보냈다.// 국경 가까운 정거장(停車場)./ 차장(車掌)의 신호(信號)를 재촉하며/ 발을 굴르는 국제열차./ 차창마다/ ‘잘 있거라’를 삼키고 느껴서 우는/ 마님들의 이즈러진 얼골들./ 여객기들은 대륙의 공중에서 티끌처럼 흩어졌다.// 본국(本國)에서 오는 장거리 라디오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하야/ 쥬네브로 여행하는 신사(紳士)의 가족들./ 샴판. 갑판. 안녕히 가세요. 다녀오리다./ 선부(船夫)들은 그들의 탄식을 기적(汽笛)에 맡기고/ 자리로 돌아간다.// 부두에 달려 팔락이는 오색의 테잎/ 그 여자의 머리의 오색의 리본/ 전서구(傳書鳩)들은/ 선실의 지붕에서/ 수도(首都)로 향하여 떠난다./ … 스마트라의 동쪽. … 5 킬로의 해상(海上) … 일행 감기(感氣)도 없다./ 적도(赤道) 가까웁다. … 20일 오전 열 시. …//

<제2부 : 시민 행렬>// 넥타이를 한 흰 식인종(食人種)은/ 니그로의 요리(料理)가 칠면조(七面鳥)보다도 좋답니다./ 살갈을 희게 하는 점은 고기의 위력(偉力)/ 의사(醫師) ‘콜베-르’씨의 처방(處方)입니다./ ‘헬메트’를 쓴 피서객(避暑客)들은/ 난잡(亂雜)한 전쟁경기(戰爭競技)에 열중(熱中)했습니다./ 슬픈 독창가(獨唱家)인 심판(審判)의 호각(號角)소리/ 너무 흥분(興奮)하였으므로/ 내복(內服)민 입은 파씨스트/ 그러나 이태리(伊太利)에서는/ 설사제(泄瀉劑)는 일체 금물(禁物)이랍니다./ 필경 양복(洋服) 입는 법을 배워낸 송미령여사(宋美齡女史)/ 아메리카에서는/ 여자(女子)들은 모두 해수욕(海水浴)을 갔으므로/ 빈 집에서는 망향가(望鄕歌)를 불으는 니그로와/ 생쥐가 둘도 없는 동무가 되었습니다./ 파리(巴里)의 남편(男便)들은 차라리 오늘도 자살(自殺)의 위생(衛生)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하고/ 옆집의 수만이는 석달만에야/ 아침부터 지배인(支配人) 영감의 자동차(自動車)를 불으는/ 지리한 직업(職業)에 취직(就職)하였고,/ 독재자(獨裁者)는 책상(冊床)을 따리며 오직/ ‘단연(斷然)히 단연(斷然)히’ 한 개의 부사(副詞)만 발음(發音)하면 그만입니다./ 동양(東洋)의 안해들은 사철을 불만(不滿)이니까/ 배추장사가 그들의 군소리를 담어 가져오기를/ 어떻게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공원(公園)은 수상(首相) ‘막도날드’씨(氏)가 세계(世界)에 자랑하는/ 여전(如前)히 실업자(失業者)를 위한 국가적(國家的) 시설(施設)이 되었습니다./ 교도(敎徒)들은 언제든지 치일 수 있도록/ 가장 간편(簡便)한 곳에 성경(聖經)을 얹어 두었습니다.// 기도(祈禱)는 죄(罪)를 지을 수 있는 구실(口實)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마님, 한 푼만 적선하세요./ 내 얼굴이 요로케 이즈러진 것도/ 내 팔이 이렇게 부러진 것도/ 마님과의 말이지 내 어머니의 죄는 아니랍니다.‘/ ‘쉿! 무명전사(無名戰士)의 기념제행렬(記念祭行列)이다.’/ 뚜걱 뚜걱 뚜걱……//

<제3부 : 태풍의 기침시간(起寢時間)>// ‘바기오’의 동(東) 쪽/ 북위(北緯) 15도(度)// 푸른 바다의 침상(寢牀)에서/ 흰 물결의 이불을 차 던지고/ 내리쏘는 태양(太陽)의 금(金)빛 화살에 얼굴을 얻어맞으며,/ 남해(南海)의 늦잠재기 적도(赤道)의 심술쟁이/ 태풍(颱風)이 눈을 떴다./ 악어(鰐魚)의 싸흠동무/ 돌아올 줄 모르는 장거리선수(長距離選手)/ 화란선장(和蘭船長)의 붉은 수염이 아무래도 싫다는/ 따곱쟁이/ 휘둘리는 검은 모락에/ 찢기어 흩어지는 구름빨/ 거츠른 숨소리에 소름치는/ 어족(魚族)들/ 해만(海灣)을 찾아 숨어드는 물결의 떼/ 황망히 바다의 장판을 구르며 달른/ 빗발의 굵은 다리/ ‘바시’의 어구에서 그는 문득/ 바위에 걸터앉아 머리수그린/ 헐벗고 늙은 한 사공(沙工)과 마주쳤다./ 흥, ‘옛날에 옛날에 파선(破船)한 사공(沙工)’인가 봐./ 결혼식(結婚式) 손님이 없어서 저런게지/ ‘오 파우스트’/ ‘어디를 덤비고 가나.’/ ‘응 북(北)으로.’/ ‘또 성이 났나?’/ ‘난 잠잫고 있을 수가 없어 자넨 또 무엇땜에 예까지 왔나?’/ ‘괴테를 찾어 다니네.’/ ‘괴테는 자네를 내버리지 않었나.’/ ‘하지만 그는 내게 생각하라고만 가르쳐 주었지./ 어떻게 행동(行動)하라군 가르쳐 주지 않었다네./ 나는 지금 그게 가지고 싶으네.‘/ 흠, 막난이 파우스트/ 흠, 막난이 파우스트./ 중앙기상대(中央氣象臺)의 가사(技師)의 손은/ 세계(世界)의 1500여(餘) 구석의 지소(支所)에서 오는/ 전파(電波)를 번역하기에 분주하다./ (第一報)/ 저기압(低氣壓)의 중심(中心)은/ ‘발칸’의 동북(東北)/ 또는/ 남미(南美)의 고원(高原)에 있어/ 690밀리/ 때때로/ 적은 비 뒤에/ 큰 비/ 바람은/ 서북(西北)의 방향(方向)으로/ 35미터/ (第二報) 폭풍경보(暴風警報)/ 맹렬(猛烈)한 태풍(颱風)이/ 남태평야(南太平洋) 상(上)에서/ 일어나/ 바야흐로/ 북진(北進) 중(中)이다./ 풍우(風雨) 강(强)할 것이다./ 아세아(亞細亞)의 연안(沿岸)을 경계(警戒)한다./ 한 사명(使命)에로 편성(編成)된 단파(短波)ㆍ단파(短波)ㆍ장파(長波)ㆍ단파(短波)ㆍ장파(長波)ㆍ초단파(超短波)ㆍ모-든 전파(電波)의 동원(動員)ㆍ시(市)의 게시판(揭示板)/ ‘산사(紳士)들은 우비(雨備)와 현금(現金)을 휴대(携帶)함이 좋을 것이다.’//

<제4부 : 자최>// ‘대(大) 중화민국(中華民國)의 번영(繁榮)을 위하야-’/ 슬프게 떨리는 유리컵의 쇳소리/ 거룩한 환담(歡談)의 불구비 속에서/ 늙은 왕국(王國)의 운명(運命)은 흔들리운다./ ‘솔로몬’의 사자(使者)처럼/ 빨간 술을 빠는 자못 점잖은 입술들/ 색깜한 옷깃에서/ 쌩그시 웃는 흰 장미(薔薇)/ ‘대(大) 중화민국(中華民國)의 분열(分裂)을 위하야-’/ 찢어지는 휘장 저편에서/ 갑자기 유리창(窓)이 투덜거린다…….// ‘자려므나 자려므나.’/ ‘꽃 속에 누워서 별에게 안겨서-’/ ‘쁘람스’처럼 매우 슬픕니다./ 꽃은커녕 별도 없는 벤취에서는/ 꿈들이 바람에 흔들려 소스라쳐 깨었습니다./ 하이칼라한 쌘드윗취의 꿈/ 빈욕(貧慾)한 ‘삐-프스테잌’의 꿈/ 건방진 ‘햄살라드’의 꿈/ 비겁한 강낭족의 꿈/ ‘나리사 나게는 꿈꾼 죄밖에는 없습니다./ 식당(食堂)의 문전(門前)에는/ 천만에, 천만에 간 일이라곤 없습니다./ ‘…………’/ ‘나리 저건 묵시록(黙示錄)의 기사(騎士)ㅂ니까.’// 산빨이 소름 친다./ 바다가 몸부림 친다./ 휘청거리는ㄴ 전주(電柱)의 미끈한 다리/ 여객기(旅客機)는 태풍(颱風)ㅡ이 깃을 피하야/ 성층권(成層圈)으로 소스라쳐 올라갔다./ 경련(痙攣)하는 아세아(亞細亞)의 머리 우에 흐터지는 전파(電波)의 분수(噴水) 분수(噴水)/ 고국(故國)으로 몰려가는 충실(充實)한 에-텔의 아들들/ 국무경(國務卿) ‘양키’씨는 수화기(受話器)를 내던지고/ 창고(倉庫)의 층층계를 굴러 떨어진다./ 실로 한모금의 소-다수(水)/ 혹은 아모러치도 아니한 ‘이놈’ 소리와 바꾼 증권(證券)들 우에서/ 붉은 수염이 쓰게 웃었다./ ‘워싱톤은 가르치기를 정직(正直)하여라.’// 십자가(十字架)를 높이 들고/ 동란(動亂)에 향하야 귀를 틀어막던/ 교회당(敎會堂)에서는/ ‘하느님이여 카나안으로 이르는 길은/ 어느 불ㅅ길 속으로 뚤렸습니까.‘/ 기도(祈禱)의 중품에서 예배(禮拜)는 멈춰섰다./ 아모도 ‘아-멘’을 채 말하기 전에/ 문(門)으로 문(門)을 쏟아진다……/ 도서관(圖書館)에서는/ 사람들은 거꾸로 서는 ‘소크라테쓰’를 박수(拍手)합니다./ 생도(生徒)들은 ‘헤-겔’의 서투른 산술(算術)에 아주 탄복(歎服)하빈다./ 어저께의 동지(同志)를 강변(江邊)으로 보내기 이하야/ 자못 변화자재(變化自在)한 형법상(刑法上)의 조건(條件)이 조사(調査)됩니다./ 교수(敎授)는 지전(紙錢) 우에 인쇄(印刷)된 박사논문(博士論文)을 낭독(朗讀)합니다./ ‘녹크도 없는 손님은 누구냐.’/ ‘…………’/ ‘대답이 없는 놈은 누구냐.’/ ‘………’/ ‘예의(禮儀)는 지켜야 할 것이다.’/ 떨리는 조계선(租界線)에서/ 하도 심심한 보초(步哨)는 한 불란서(佛蘭西) 부인(婦人)을 멈춰 세웠으나,/ 어느새 그는 그 여자(女子)의 스카-트 밑에 있었습니다./ ‘베레’ 그늘에서 취한 입술이 박애주의자(博愛主義者)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붕산(硼酸) 냄새에 얼빠진 화류가(花柳街)에는/ 매약회사(賣藥會社)의 광고지(廣告紙)들/ 이즈러진 알미늄 대야/ 담뱃집 창고(倉庫)에서/ 썩은 고무 냄새가 분향(焚香)을 피운다./ 지붕을 베끼운 골목 우에서/ 쫓겨난 공자(孔子)님이 잉잉 울고 섰다./ 자동차(自動車)가 돌을 차고 넘어진다./ 전차(電車)가 개울에 쓰러진다./ ‘삘딩’의 숲 속/ 네거리의 골짝에 몰켜든 검은 대가리들의 하수도(下水道)/ 멱처럼 허우적이는 가-느다란 팔들/ 구원(救援) 대신에 허공(虛空)을 부짭은 지치인 노력(努力)/ 흔들리우는 어깨의 물결// 불자동차(自動車)의/ 날랜 ‘사이렌’의 날이/ 선뜻 무딘 동란(動亂)을 잘르고 지나갔다./ 입마다 불길을 뿜는/ 마천루(摩天樓)의 턱을 어루만지는 분수(噴水)의 바알/ 어깨가 떨어진 ‘마르코 폴로’의 동상(銅像)이 혼자/ 네거리의 복판에 가로 서서/ 군중(群衆)을 호령(號令)하고 싶으나,/ 모가지가 없습니다./ ‘라디오 비-큰’에 걸린/ 비행기(飛行機)의 부러진 죽지/ 골작을 거꾸로 자빠져 흐르는 비석9碑石)의 폭포(瀑布)/ ‘소집령(召集令)도 끝나기 전에 호적부(戶籍簿)를 어쩐담.’/ ‘그보다는 필요(必要)한 납세부(納稅簿)’/ ‘그보다도 봉급표(俸給表)를’/ ‘그렇지만 출근부(出勤簿)는 없어지는 게 좋아.’// 날마다 갈리는 공사(公使)의 행렬(行列)/ 승마구락부(乘馬俱樂部)의 말발굽 소리/ ‘홀’에서 돌아오는 마지막 자동차(自動車)의 고무바퀴들/ 묵서가행(墨西哥行)의 ‘쿠리’들의 ‘투레기’/ 자못 가벼운 두 쌍의 ‘키드’와 ‘하이힐’/ 몇 개의 세대(世代)가 뒤섞이어 밟고 간 해안(海岸)의 가도(街道)는/ 깨어진 벽돌조각과/ 부서진 유리조각에 얻어맞아서/ 꼬부라져 자빠져 있다.// 날마다 홍혼(黃昏)이 쳐여주는/ 전등(電燈)의 훈장(勳章)을 번쩍이며/ 세기(世紀)의 밤중에 버티고 일어섰던/ 오만(傲慢)한 도시(都市)를 함부로 뒤져놓고/ 태풍(颱風)은 휘파람을 높이 불며/ 황하강변(黃河江邊)으로 비꼬며 간다.………//

<제5부 : 병(病) 든 풍경>// 보랏빛 구름으로 선을 들른/ 회색(灰色)의 칸바쓰를 등지고/ 꾸겨진 빨래처럼/ 바다는/ 산맥(山脈)의 돌단(突端)에 걸려 퍼덕인다.// 삐뚤어진 성벽(城壁) 우에/ 부러진 소나무 하나……/ 지치인 바람은 지금/ 표백(漂白)인 풍경(風景) 속을/ 썩은 탄식(歎息)처럼/ 부두(埠頭)를 넘어서/ 찢어진 바다의 치맛자락을 걷우면서/ 화석(化石)된 벼래의 뺨을 어루만지며/ 주린 강아지처럼 비틀거리며 지나간다./ 바위 틈에 엎디어/ 죽지를 드리운 물새 한 마리/ 물결을 베고 자는/ 꺼질 줄 모르는 향수(鄕愁)/ 짓밟혀 느러진 백사장(白沙場) 우에/ 매맞어 검푸른 빠나나 껍질 하나/ 부프러올은 구두 한 짝을/ 물결이 차 던지고 돌아갔다./ 해만(海灣)은 또 하나/ 슬픈 전설(傳說)을 삼켰나 보다./ 황혼(黃昏)이 입혀주는/ 회색(灰色)의 수의(囚衣)를 감고/ 물결은 바다가 타는 장송곡(葬送曲)에 맞추어/ 병(病) 든 하루의 임종(臨終)을 춘다.……/ 섬을 부둥켜안는/ 안타까운 팔/ 바위를 차는 날랜 발길/ 모래를 스치는 조심스런 발꾸락/ 부두(埠頭)에 엎드려서/ 축대(築臺)를 어루만지는/ 간엷힌 손길// 붉은 향기(香氣)를 떨어버린/ 해당화(海棠花)의 섬에서는/ 참새들의 이야기도 꺼져 버렸고/ 먼 등대(燈臺) 부근에는/ 등불도 별들도 피지 않았다.……//

<제6부 : 올빼미의 주문(呪文)>// 태풍(颱風)은 네거리와 공원(公園)과 시장(市場)에서/ 몬지와 휴지(休紙)와 캐베지와 연지(臙脂)와/ 연애(戀愛)의 유향(流行)을 쫓아버렸다.// 헝크러진 거리를 이 구석 저 구석/ 혓바닥으로 뒤지며 다니는 밤바람/ 어둠에게 벌거벗은 등을 씻기우면서/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전선주(電線柱)/ 엎드린 모래벌의 허리에서는 물결이 가끔 흰 머리채를 추어든다./ 요란스럽게 마시고 지껄이고 떠들고 돌아간 뒤에/ 테블 우에는 깨어진 진(盞)들과/ 함부로 지꾸어진 방명록(芳名錄)과……/ 아마도 서명(署名)만 하기 위하여 온 것처럼/ 총총히 펜을 던지고 객(客)들은 돌아갔다/. 이윽고 기억(記憶)들도 그 이름들을/ 마치 때와 같이 총총히 빨아버릴 게다.// 나는 갑자기 신발을 찾아 신고/ 도망할 자세를 가춘다, 길이 없다/ 돌아서 등불을 비틀어 죽인다./ 그는 비둘기처럼 거짓말쟁이였다./ 황홀한 불빛의 영화(榮華)의 그늘에는// 몸을 조려없애는 기름의 십자가(十字架)가 있음을/ 등불도 비둘기도 말한 일이 없다.// 나는 신자(信者)의 숭내를 내서 무릎을 꿀어본다./ 믿을 수 있는 신(神)이나 모신 것처럼/ 다음에는 기(旗)빨처럼 호화롭게 웃어버린다./ 대체 이 피곤(疲困)을 피할 하룻밤 주막(酒幕)은/ ‘아라비아’의 ‘아라스카’의 어느 가시밭에도 없느냐./ 연애(戀愛)와 같이 싱겁게 나를 떠난 희망(希望)은/ 지금 또 어디서 복수(復讐)를 준비하고 있느냐./ 나의 머리에 별의 꽃다발을 두었다가/ 거두어간 것은 누구의 변덕이냐./ 밤이 간 뒤에 새벽이 온다는 우주9宇宙)의 법칙(法則)은/ 누구의 실없는 장난이냐./ 동방(東方)의 전설(傳說)처럼 믿을 수 없는/ 아마도 실패(失敗)한 실험(實驗)이냐./ 너는 애급(埃及)에서 돌아온 ‘씨-자’냐./ 너의 주둥아리는 진정 독수리냐./ 너는 날개 돋친 흰 구름의 종족(種族)이냐./ 너는 도야지처럼 기름지냐./ 너의 숨소리는 바다와 같이 너그러우냐./ 너는 과연(果然) 천사(天使)의 가족(家族)이냐.// 귀 먹은 어둠의 철문(鐵門) 저 편에서/ 바람이 터덜터덜 웃나보다./ 어느 헝크러진 수풀에서/ 부엉이가 목쉰 소리로 껄껄 웃나보다.// 내일(來日)이 없는 칼렌다를 쳐다보는/ 너의 눈동자는 어쩐지 별보다 이쁘지 못하고나./ 도시 십구세기(十九世紀)처럼 흥분(興奮)할 수 없는 너/ 어둠이 잠긴 지평선(地平線) 너머는/ 다른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음악(音樂)은 바다 밑에 파묻힌 오래인 옛말처럼 춤추지 않고/ 수풀 속에서는 전설(傳說)이 도무지 슬프지 않다./ 페이지를 번지건만 너멋장에는 결론(結論)이 없다./ 모퉁이에 혼자 남은 가로등(街路燈)은/ 마음은 슬퍼서 느껴서 우나./ 부릅뜬 눈에 눈물이 없다.// 거츠른 발자취들이 구르고 지나갈 때에/ 담벼락에 달러붙는 나의 숨소리는/ 생쥐보다도 커본 일이 없다./ 강아지처럼 거리를 기웃거리다가도/ 강아지처럼 얻어맞고 발길에 채어 돌아왔다.// 나는 참말이지 산량(善良)하려는 악마(惡魔)다./ 될 수만 있으면 신(神)이고 싶은 짐승이다./ 그렇건만 밤아 너의 썩은 바줄은/ 왜 이다지도 내 몸에 깊이 친절(親切)하냐./ 무너진 축대(築臺)의 근방에서는/ 바다가 또 아름다운 알음소리를 치나보다./ 그믐밤 물결의 노래에 취할 수 있는/ ‘타골’의 귀는 응당 소라처럼 행복(幸福)스러울 게다.// 어머니 어머니의 무덤에 마이크를 가져갈까요./ 사랑스러운 해골(骸骨) 옛날의 자장가를 기억해내서/ 병신 된 나의 귀에 불러주려우./ 자장가도 부를 줄 모르는 바보인 바다.// 바다는 다만/ 어둠에 반란(反亂)하는/ 영원(永遠)한 불평가(不平家)다.// 바다는 자꾸만/ 헌 이빨로 밤을 깨문다.//

<제7부 : 쇠바퀴의 노래>// 하나/ 이윽고/ 태풍(颱風)이 짓밟고 간 깨어진 ‘메트로폴리스’에/ 어린 태양(太陽)이 병아리처럼/ 홰를 치며 일어날게다./ 하룻밤 그 꿈을 건너다니던/ 수없는 놀램과 소름을 떨어버리고/ 이슬에 젖은 날개를 하늘로 펼게다./ 탄탄한 대로(大路)가 희망(希望)처럼/ 저 머언 지평선(地平線)에 뻗히면/ 우리도 사륜마차(四輪馬車)에 내일(來日)을 싣고/ 유량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면서/ 처음 맞는 새 길을 떠나갈게다./ 밤인 까닭에 더욱 마음달리는/ 저 머언 태양(太陽)의 고향(故鄕)/ 끝없는 들 언덕 위에서/ 나는 ‘데모스테네스’보다도 수다스러울 게다./ 나는 거기서 채찍을 꺾어버리고/ 망아지처럼 사랑하고 망아지처럼 뛰놀게다./ 마음에 타는 일이 없을 나의 눈동자는/ 진주(眞珠)보다도 더 맑은 샛별/ 나는 내 속에 엎드린 산양(山羊)을 몰아내고/ 여우와 같이 깨끗하게/ 누이들과 친(親)할게다.// 나의 생활(生活)은 나의 장미(薔薇)/ 어디서 시작한 줄도/ 언제 끝날 줄도 모르는 나는/ 꺼질 줄이 없이 불타는 태양(太陽)/ 대지(大地)의 뿌리에서 지열(地熱)을 마시고/ 떨치고 일어날 나는 불사조(不死鳥)/ 예지(叡智)의 날개를 등에 붙인 나의 날음은/ 태양(太陽)처럼 우주9宇宙)를 덮을게다./ 아름다운 행동(行動)에서 빛처럼 스스로/ 피어나는 법칙(法則)에 인도(引導)되어/ 나의 날음은 즐거운 궤도(軌道) 우에/ 끝없이 달리는 쇠바퀴다.// 벗아/ 태양(太陽)처럼 우리는 사나웁고/ 태양(太陽)처럼 제 빛 속에 그늘을 감추고/ 태양(太陽)처럼 슬픔을 삼켜버리자./ 태양(太陽)처럼 어둠을 살워버리자.// 다음날/ 기상대(氣象臺)의 마스트엔/ 구름조각 같은 흰 기(旗)폭이 휘날릴게다.// (폭풍경보해제(暴風警報解除))/ 쾌청(快晴)/ 저기압(低氣壓)은 저 머언/ 시베리아의 근방에 사라졌고/ 태평양(太平洋)의 연안(沿岸)서도/ 고기압(高氣壓)은 흩어졌다./ 흐림도 소낙비도/ 폭풍(暴風)도 장마도 지나갔고/ 내일(來日)도 모레도/ 날씨는 좋을 게다.// (시(市)의 게시판(揭示板))/ 시민(市民)은/ 우울과 질투와 분노와/ 끝없는 탄식과/ 원한의 장마에 곰팡이 낀/ 추근한 우비(雨備)를랑 벗어버리고/ 날개와 같이 가벼운/ 태양(太陽)의 옷을 갈아 입어도 좋을 게다.//
* 창문사, 1936년

 



김기림(金起林, 1907년~1950년 6월 25일 납북) 시인, 문학평론가
함경북도 학성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김인손(金仁孫, 아명(兒名)은 金寅孫)이며, 아호는 편석촌(片石村)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나온 후 일본의 니혼 대학 영문학과 중퇴를 거쳐 도호쿠 제국대학 영문학과를 학사 학위 취득하였다. 귀국하여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지내면서 조선일보에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같은 신문에 평론 〈시의 기술 인식 현실 등 제문제〉를 발표하며 문학평론에도 뛰어들었다. 1933년 이상, 이효석, 조용만, 박태원 등과 함께 구인회를 결성하였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36년에는 첫 시집 《기상도》를 발표하였다. 1942년 낙향하여 고향 근처 경성중학교(鏡成中學校)의 영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영어 과목이 폐지되자 수학을 가르쳤다. 당시 제자로 시인 김규동이 있다. 1945년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으나, 다음 해 소련이 점령한 북한 지역으로부터 월남하여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즈음에 탈퇴하였다. 중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강사로 일하다 서울대학교 조교수가 되었고, 신문화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시기는 불명이다. 1990년 6월에 동료 시인 김광균, 구상 등이 주도하여 모교인 보성고등학교에 김기림을 기린 시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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