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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고추밭 연가(戀歌) / 장미숙

부흐고비 2021. 6. 10. 08:31

어머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푸른빛이 곰비임비 몰려오더니 어머니의 꽃무늬 모자를 안고 가버렸다. 어머니를 숨겨준 푸른빛이 내 주위에도 낭창낭창 흐른다. 어머니가 사라짐과 동시에 수런대던 바람소리도 잦아들었다. 어머니를 품은 자연은 어머니를 잠시 쉬게 하려는가 보다. 갑자기 찾아든 적요(寂寥)는 오히려 날 흔들어 놓는다. 몸을 낮추고 가만 귀를 기울인다. 자연의 온갖 숨소리가 칸타빌레(cantabile)로 들려온다. 어느덧 나는 술래가 된다. 온 마음을 모아 어머니와의 교감을 시도한다.

“어머니! 어디쯤 계세요?”

부르면 어머니가 금방이라도 여기저기서 나타날 것 같다. 모든 푸른색의 중심인 어머니는 보이지 않아도 보이고, 보여도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의 몸속에 흐르는 푸른색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끝을 알 수 없는 깊고 깊은 어머니의 마음, 그 샘에 두레박을 풍덩! 떨어뜨리면 오래된 기억들이 세찬 물살처럼 튀어오를 것이다. 고추밭 연가(戀歌)는 마음이 통하고, 교감으로 느껴야만 들을 수 있는 노래다. 인사치레의 위무(慰撫)나 지레짐작의 섣부른 판단은 생크림처럼 얇은 맛만 낼 뿐이다.

잘 익은 고추를 똑! 따자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주렁주렁 탐스럽게 매달린 선홍빛 고추에서 배어나오는 경쾌한 리듬, 고추는 흔들리며 익어간다는 걸 비로소 안다. 가만있지 않고 흔들리고 흔들려서 푸른빛을 떨구어내고, 붉은 빛으로 변해가는 고추의 몸빛 속에 어머니가 들어 있다. 흔들리며 살아온 어머니의 삶이 농축되어 붉은 빛으로 도드라졌음이 분명하다.

어머니를 풀어놓은 바람이 어느덧 고춧대의 음표들을 고른다. 바람의 연주는 리드미컬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아 편안하다. 고추를 따는 내 손도 박자를 맞춘다. 탐스러운 고추가 가득 든 자루를 옮기느라 뻣뻣한 허리를 곧추 세우자, 몸속의 뼈마디도 빠르게 음을 고른다. 목덜미에서 시작된 땀방울은 척추를 타고 프레스토(presto)로 흘러내린다. 주르륵 주르륵 미끄러지는 땀방울, 어머니의 등에서도 진한 땀방울이 스트링겐도(stringendo)로 흘러내릴 것이다.

고추밭에 번지는 연가는 어머니의 모든 삶을 담고 있다. 풋풋한 열아홉에 한남자의 아내가 되었을 때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하얀 도화지위에 그려나갈 생의 달콤함은 어머니를 자못 들뜨게 했을 것이다. 베틀에 앉아 베를 짰다던 어머니의 손끝은 비바체(vivace)처럼 빠르고 경쾌했다. 그렇게 생기로운 삶을 꿈꾸었을 젊은 어머니, 몸은 고되어도 발걸음에 리듬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병을 얻기 전까지 어머니는 그저 평범한 여자였고,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병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어머니의 삶을 순식간에 바꿔버렸다. 점점 슬픈 라멘토소(lamentoso)에 넋을 놓아버린 어머니는 생의 밑바닥에 깔린 두려움의 맨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꿈틀꿈틀 언제 덮쳐올지 모를 절망의 무서운 눈을 피해 뒷걸음질을 쳤을 것이다. 굽도 젖도 할 수 없을 때 사람은 포기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포기의 실체를 본적 있는가. 포기는 겉모습과 속이 다른 다층적인 구조다. 해독이 다양한 의미로 겹겹이 쌓여있어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포기의 구조를 깊이 들여다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모든 안간힘을 끌어올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어머니는 포기의 순간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의 귀를 세차게 때리던 그 소리는 어머니가 생명을 준 자식들의 불안정한 숨소리였다. 어머니는 신발을 고쳐 신고 고추밭으로 달려갔다. 비쓸비쓸 마르고 병색이 짙은 고춧대가 어머니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을 거름처럼 뿌리며 여린 고추들을 다독거리던 어머니의 손끝에서 고추는 푸른빛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 후로 푸른빛의 중심이 되었다. 슬픔도 깊으면 초연해진다고 했던가. 슬픔에 온몸이 녹아내려도 운명 앞에서 결코 굴복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비바람에 쓰러진 고춧대를 세우며 당신의 삶을 세웠다. 고춧대에는 어머니의 절망과 슬픔이, 희생과 염원이, 그리고 의지와 희망이 스며들었다. 힘찬 리솔루토(risoluto)로 바뀌어가던 고추밭, 결연히 일어서야 할 분명한 이유는, 어머니를 춤추게 할 수 있는 자식이라는 음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 한낮의 땡볕은 어머니의 살갗에 세월의 나이테를 그려 넣었고, 손등에는 노동의 긴 침묵을 새겼다. 해마다 점점 더 어머니의 고추밭은 푸르러졌다. 자식들이 커가는 속도를 따라잡느라 어머니의 숨은 거칠어졌고 허리는 구부러졌다. 자식들이 자식들을 낳고, 입이 점점 많아지는 걸 즐거움으로 알았다. 그에 맞게 고추는 외붓듯가지붓듯 자라났다.

고춧대가 커갈수록 어머니의 키는 작아졌다. 고추가 가득 든 자루를 끌며 산길을 자루와 한 몸으로 내려오던 어머니의 발길에 풀은 자라날 틈이 없었다. 땀이 굳어서 관절이 되고, 얼굴피부는 점점 더 두꺼워져 갔다.

고추가 말라가는 마당의 평화로운 풍경은 어머니가 몸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어머니의 체취가 배인 풍경화에 자식들의 눈빛은 반짝였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눈빛을 보는 훔훔함에 깊이 매료되었다. 더 작고 낮아진 어머니는 자루에 끌려서 산길을 내려오는 일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온몸을 짓누르는 페산테(pesante)로 다가왔다. 벗어버릴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는 항상 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런 순간순간이 어머니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어머니는 산길을 올랐다. 밭둑에 앉아 아버지는 고추를 따는 어머니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는 흙속에서 어머니를 바라보며 지켜주고 있다.

팔순을 넘긴 어머니의 삶은 점점 칼마토(calmato)가 되어간다. 낮아지고 낮아지면서 몸은 쇠해졌지만, 안으로 궁굴린 시간들은 어머니를 지탱해주는 뼈대가 되었다. 거센 태풍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철 기둥보다 강한 어머니라는 이름 앞에 바람도 스스로 무릎을 꿇는다.

아버지가 가신 뒤에도 고추밭은 푸르게 성글었다. 어머니의 진한 땀을 먹고 자란 고춧대는 쑥쑥 키가 자라 걸핏하면 어머니를 숨겨버린다. 고추밭은 한바탕 어머니와 숨바꼭질을 한 뒤에야 어머니를 내어놓는다. 어머니와 함께 하고 싶은 건, 우리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어머니의 손길에 익숙한 고추밭도 어머니를 탐하기는 마찬가지다.

챙이 긴 어머니의 꽃무늬 모자는 점점 색깔이 바래가고 있다. 손잡이가 다 닳은 양동이, 검은색이 회색으로 변해버린 토시, 그리고 까만 어머니의 고무신은 고추밭이 품고 있는 어머니의 분신(分身)들이다. 이들은 또한 고추밭 연가의 주역(主役)이기도 하다.

고추자루를 끌고 고랑을 타고 오는 어머니가 웃는다. 고춧대보다 작은,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어머니가 웃는다. 저토록 환한 미소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내 볼을 타고 흐른다. 어머니의 몸짓에 맞춰 고추밭에 퍼져 나가는 연가, 어머니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사랑에 빠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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