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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칼 / 장미숙

부흐고비 2021. 6. 10. 08:33

칼을 들었다. 차가운 심장을 가진 칼이 번쩍, 뜨거운 빛을 뿜는다. 날카로운 날을 쓱, 한번 행주로 닦아준다. 다섯 손가락에 힘을 골고루 실어 칼자루를 잡는다. 칼자루가 손에 착 달라붙는다. 체온을 나눈 지 오래되었다는 뜻일 거다. 믿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친숙함에서 우러나는 편안함이기도 하다.

이젠 칼날을 허공에 놓을 시간이다. 수평으로 허공에 꽂힌 칼날, 냉정하다. 뭔가를 잘라야 할 때의 그 냉철함이 손끝에 전해진다. 칼의 본분은 자르는 것, 남겨야 할 것과 잘라내야 할 것의 차이를 분명히 아는 갈은 이지적이다. 가차 없이 잘라내 버리는 일에 익숙한 칼은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지상으로부터 오 센티미터 허공에 걸린 긴 칼이 표적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다. 자신이 꽂힐 자리를 가늠하는 듯 섬세하다. 해야 할 일 앞에서 마음이 흐트러지면 사달이 나기 쉽다. 뜀박질할 때도 주춤거리다가는 넘어지기 일쑤다.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돌아서면 그도 후회하기에 십상이다. 가슴에 담아두고 꺼내지 못한 말은 병이 되기도 한다. 망설이다 놓쳐버린 것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칼이 움직인다. 튀어나와 있던 재료들은 순식간에 잘려나간다. 칼이 만들어놓은 갓짓한 정사각형, 이젠 사각의 날 선 모서리를 잘라야 한다. 변邊이 다른 팔각형은 이차 성형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팔각형을 정확히 네 조각으로 분리하는 일이 남았다. 정해진 용기에 담으려면 네 조각이 자로 잰 듯 일정해야 한다. 눈썰미와 칼의 각도가 중요하다. 이질적인 재료다 한데 섞여 있는 목표물은 조금만 틈이 벌어져도 어긋난다. 어긋나버린 각은 다시 맞추기가 어렵다. 맞춘다 한들 흔적이 남는다.

갈을 잡고 단번에 잘라주는 힘은 손이 아닌 온몸에서 나온다. 한 손으로 재료를 지그시 누르고 칼을 잡은 팔의 힘을 조절한다. 팔 전체로 칼을 잡는 건, 각角을 살피기 위해서다. 또한 재료의 신선함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다. 각각의 재료가 가진 고유한 색은 개성이 강하다.

토마토의 빨강, 채소 특유의 초록, 분홍빛이 도는 햄과 노란 치즈, 흰색 빵은 성질도 촉감도 다르다. 칼은 이들을 아울러 새로운 색과 맛을 만들어낸다. 단조로움이 다채로움으로 변한다. 신선함과 색깔의 조화, 각이 살아 있는 매끈한 단면이 샌드위치의 품질을 좌우한다. 칼과 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삶의 앞에 겸손해진다.

칼로 밥은 번 지 여러 해가 지났다. 내 집의 편안한 부엌에서 대충 잡았던 칼은 흑죽학죽 사용해도 되었다. 식자재를 일정한 두께로 썰거나 각을 살리지 않아도 문제 될 게 없었다. 모양보다 맛을 내는 게 우선이었다. 바쁘면 ‘따다다다닥!’ 소리도 요란하게 마구 칼질을 했다. 쓱쓱, 잘 잘리기만 하면 되던 칼의 존재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샌드위치를 싸기 시작하면서 칼의 무게가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다루어야 할 칼은 뭉툭한 모양이 아니었다. 날렵하고 길쭉했다. 부드러운 빵의 표면이 찢겨나가거나 뭉크러지지 않도록 힘의 분산을 위해 칼날은 톱니 모양이었다. 처음 칼을 들었을 때 손이 달달 떨렸다.

가족에게 먹일 음식이 아니었다. 대충 만들어 눈속임할 수 있는 가벼운 대상도 아니었다. 눈빛 밝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아야 존재 이유를 발휘하는 것들이었다. 모양과 맛, 신선함까지 꼼꼼하게 따지는 손님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야 할 제품이었다. 손님들이 지갑을 여는 데 망설이지 않도록 해야 했다.

칼질에 따라 모양은 달라졌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매번 차이가 났다. 손님들이 미처 보지 못한 부분도 내게는 보였다. 만족스럽지 않을 때면 그 제품을 사 가는 사람에게 미안했다.

온종일 서서 칼질을 하는 사이, 여러 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칼이 춤을 추기 시작한 한 건, 재료만 봐도 모양을 가늠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다. 손과 칼이 하나가 되었다. 여러 종류의 샌드위치가 완성될 때마다 마치 예술 행위를 하듯 훔훔해졌다. 기본 구성에 재료를 바꿔가며 다양한 모양을 만들었다. 사각으로 잘라 각을 맞춰야 하는 게 있는가 하면, 동그랗게 말아서 김밥처럼 잘아야 하는 것도 있다. 네모든 동그랗든 단면이 깔끔하게 나오려면 칼의 역할이 중요했다.

부드러운 것과 단단한 것을 동시에 잘아야 할 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아우르는 힘은 팔에서 나온다. 아니, 그건 절박한 삶에서 나온다. 절실함이 노동 행위에 깃들기 시작하면서 칼은 기우뚱거리지 않고 바로 섰다. 사는 게 치열하지 않았다면 칼을 잡은 손도 헐거웠을 것이다. 누군가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허우룩한 영혼을 채워주고 힘이 되어주는 경건한 일 앞에 숙연해졌다.

나의 수고로 인해 잠시나마 따뜻한 마음을 품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말보다 행동의 가치에 무게가 실렸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힘이 다시 내게로 돌아옴을 알았다. 서로 얽힌 삶은 수레바퀴처럼 굴러갔다. 내가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듯 그들도 나의 허기虛飢를 채워주었다. 칼을 잘 사용한 대가는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들었다. 당당함과 뚝기가 생겼다. 가끔은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알량한 용돈을 드릴 수 있는 기쁨도 선사해주었다. 여행은 못 해도 친구와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덤까지 얹어주었다.

그뿐이랴. 점주의 가게 임대료가 되고 전기세가 되고 수도세가 되었다. 점주의 여행 경비가 되고, 아이 양육비가 되고, 자동차 연료비도 되었다. 아르바이트생의 학비와 데이트 비용에도 얼마간 기여했을 터다. 진정한 칼의 가치는 여러 사람의 행복 만들기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칼도 쓰는 이의 마음 같았다. 내가 흔들리면 덩달아 중심을 잡지 못했다. 불안정할 때, 각은 어긋나고 모양은 흐트러졌다. 칼은 내 마음을 그대로 담아냈다. 체온으로 전해지는 무언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데 둔하지 않았다. 잘라내야 할 것도 남겨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내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칼을 부려보며 인과의 이치를 터득한 셈이다. 칼은 차가움과 따스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그걸 다스리는 건 내 마음이었다. 부리기에 따라 빛이 되기도, 어둠이 되기도 했다. 양날에 세상을 아우르는 힘이 담겨 있었다.

들고 있던 칼을 닦는다. 침묵에 잠겨 있던 칼이 빛을 뿜는다.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에 급급했던, 풀쳐 생각에 서툴렀던 내게 전하는 메시지 같다. 무디어진 마음의 칼날을 벼릴 시간이다. 삶에 달라붙은 걱정, 불안, 원망, 미움을 잘라낼 칼을 다시 야무지게 움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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