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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신석정 시인

부흐고비 2021. 6. 16. 08:57

어머니 기억 -어느 소년의 / 신석정
비오는 언덕길에 서서 그때 어머니를 부르던 나는 소년이었다.그 언덕길에서는 멀리 바다가 바라다보였다.빗발 속에 검푸른 바다는 무서운 바다였다.// ''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는 이내 메아리로 되돌아와 내 귓전에서 파도처럼 부서졌다.아무리 불러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고,내 지친 목소리는 해풍속에 묻혀 갔다.// 층층나무 이파리에는 어린 청개구리가 비를 피하고 앉아서 이따금씩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청개구리처럼 갑자기 외로웠었다.// 쏴아...먼 바닷소리가 밀려오고,비는 자꾸만 내리고 있었다.언덕길을 내려오노라면 짙푸른 동백잎 사이로 바다가 흔들리고,우루루루 먼 천둥이 울었다.// 자욱하니 흐린 눈망울에 산수유꽃이 들어왔다.산우유꽃 봉오리에서 노오란 꽃가루가 묻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본 나는 그예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말았다.// 보리가 무두룩이 올라오는 언덕길에 비는 멋지 않았다.문득 청맥죽을 훌훌 마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그것은 금산리란 마을에서 가파른 보릿고갤 넘던 내 소년시절의 일이었다.//

꽃덤불 / 신석정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城)을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噴水)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석정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이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 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 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 오던/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 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田園)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 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산 / 신석정
지구엔/ 돋아난/ 산이 아름다웁다// 산은 한사코/ 높아서 아름다웁다// 산에는/ 아무 죄 없는 짐승과/ 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 모여서 살기에 아름다웁다// 언제나/ 나도 산이 되어보나 하고/ 기린같이 목을 길게 늘이고 서서/ 멀리 바라보는// 산/ 산/ 산//

산으로 가는 마음 / 신석정
내 마음/ 주름살 많은 늙은 산의 명상하는 얼굴을 사랑 하노니// 오늘은/ 잊고 살든 산을 찾아 내 마음 머언길을 떠나네// 산에는/ 고요한 품안에 고산 식물들이 자라나거니// 마음이여/ 너는 해가 저물어 이윽고 밤이 올 때까지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좋다// 산에서/ 그렇게 고요한 품안을 떠나와서야 쓰겠니//

산방일기(山房日記) / 신석정
봉우리 넘어오는 구름/ 추녀를 스쳐가고// 골엔/ 꾀꼬리 화답(和答)하는 소리/ 산이 울린다.// 방을 둘러가는/ 산나비 지친 나랫소리―// 그저/ 해만 설핏하면/ 소쩍새 울고,// 산도 을씨년스러워/ 하늘만 바라보는데,// 밤 들기 전/ 풀벌레 사운대는 속에/ 나긋나긋 잠이 온다.//

산수도(山水圖) / 신석정
숲길 짙어 이끼 푸르고/ 나무 사이사이 강물이 희어// 햇볕 어린 가지 끝에 산새 쉬고/ 흰구름 한가히 하늘을 거닌다.// 산가마귀 소리 골짝에 잦은데/ 등 너머 바람이 넘어 닥쳐와// 굽어든 숲길을 돌아서 돌아서/ 시냇물 여음이 옥인듯 맑아라.// 푸른 산 푸른 산이 천 년만 가리/ 강물이 흘러흘러 만 년만 가리//

산협인상(山峽印象) / 신석정
밋밋한 오리나무 숲을/ 성낸 짐승처럼 함부로 헤쳐나오면/ 성근 소나무 소나무 사이로/ 아스므라한 바라 푸른 언덕에 솟아오르고/ 꾀꼬리 호반새 울어예는 산협에/ 홈초로니 푸른 오월이 지르르 흘러// 시냇물 졸졸졸 사뭇 지즐대는 기슭에/ 전나무 상나무 대 수풀 우거지고/ 간지람 나무 바람풍나무 제자리 잡아 서고/ 언덕을 돌아드는 오월 바람이 간지러워 간지러워/ 나뭇잎새들은 푸른 손을 자꾸만 뒤흔들며 몸부림친다// 나는/ 짐승도 아니란다/ 나무도 아니란다/ 얇은 모시두루마기에 덮인 채/ 백로처럼 날아볼 수도 없고나/ 태화처럼 흔들릴 수도 없고나//

저 무등(無等)같이 / 신석정
성한 육신에/ 비록 누더기 같은 가난을 감고/ 이날 이때 까지/ 알량하게 살고 살아가지만,/ 맑고 의젓한 우리 마음에사/ 설마 그 검은 구름장이/ 어디라고 감히 범할 수야 있겠는가?/ 한때/ 어둠과 절망을/ 안겨주던 날에는/ 이어받은 하늘을 믿고/ 우리 모두 오순도순/ 이날 이때 까지/ 그리 외롭지 않은 얼굴로 살아왔거늘// 설사/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졌다 하기로/ 같은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살아가고 있는 한,/ 이 부끄럽고 욕된 세월을/ 자손 만대에 차마 전할 수야 있겠는가?// 일월(日月)/ 성진(星辰)이 운행을/ 정지한 적이 없기에/ 저 빛나는 시리우스를 뒤에 두고/ 전진을 단념한 역사가 있어/ 치차(齒車)를 뒤로 돌렸다는/ 그런 슬픈 신화는 아직 들은 적도 없거늘// 부패한/ 문명이 문드러지다 지쳐/ 지쳐서 남기고 간/ 전쟁 같은 이야기라거나/ 그 무성한 상채기가 남긴 이야기는/ 새는 날에 앞서/ 이내 종막을 내려야지!// 아무리/ 비정한 날이/ 우리를 에워쌀지언정/ 산은 예대로 뭇짐승을 데불고/ 철철이 꽃과 열매를 다스리고/ 강줄기 또한 저 푸른 벌을/ 굽이굽이 흘러가거늘// 일찍이/ 가슴 깊이 간직한/ 그 벅찬 우리 꿈과 설계로/ 불 머금은 가쁜 숨결을 달래고/ 저토록 어지럽고 너그러운/ 무등을 바라보리로다./ 아아 오늘은 저 무등같이 살 날을 궁리 하리로다.//

지리산(智異山) / 신석정
崇高한 山의 Esprit는/ 모두 이 山頂에 集約되어 있고/ 象徵되어 있다./ -하여/ 神山은 거기에 내려오고/ 사람은 거기 오른다.// 1-六月에 꽃이 한창이었다는 <진달래> <石楠> 떼지어 사는 꼴짝. 그 간드라운 가지 바람에 구길 때마다 새포름한 물결 사운대는 숲바달 헤쳐 나오면, <물푸레> <가래> <전나무> 아름드리 벅차도록 밋밋한 능선에 담상 담상 서 있는 <자작나무> 그 하이얀 <자작나무> 초록빛 그늘에, <射干> <나리> 모두들 철그른 꽃을 달고 갸웃 고갤 들었다.// 2-씩씩거리며 올라채는 가파른 斷崖. 다리가 휘청 휘청 떨리도록 아슬한 산골에 산나비 나는 싸늘한 그늘 <桔梗>이 서럽도록 푸르고 선뜻 돌 타고 굴러오는 돌돌 굴러오는 물소리 새소리 갓나온 매미소리 온 산을 뒤덮어 우람한 바닷속에 잠긴 듯 하여라.// 3-<더덕> <으름> <칡> 서리고 얽힌 넌출 휘휘 감긴 바위서리, 그저 얼씬만 스쳐도 물씬 풍기는 향기, 키보담 높게 솟은 <고사리> <고비> <관중> 群落에 <마타리> 끼워 어깰 겨누는 덤불, 짐승들 쉬어간 폭삭한 자릴 지날 때마다 무침ㅎ고 나도 딩굴고 싶은 산골엔 헐벗고 굶주린 자취가 없다.// 4-발 아래 구름이 구름을 데불고 우뢸 몰고 간 골짝엔 어느덧 빗발이 선하게 누비는데, <전나무> 앙상한 가지에 유난히도 눈자위가 하이얀 <동박새> 외롭게 우는 소릴 구름 위에 位置하고 듣는 斜陽도 향그러운 길섶, 늙어 쓰러진 나무를 나무가 한가히 베고 누워 산바람 속에 숨이 가쁘다.// 5-길 넘는 <억새> <시나대> 번질한 속을 짐승인 양 갈고 나가면 山頂 가까이 <들국화> 산드랗게 트인 꽃벌판 눈부신 언저리에, <山木蓮>도 꽃진 자죽에 붉은 열맬 숱하게 달고, <층층나무>랑 나란히 섰다./ 예서부턴 짝달막한 나무들이 얼굴만 뾰주름 내밀고, 남쪽으로 다정한 손을 흔들며 산다.// 6-해가 설핏하기 앞서 재빠른 귀또리, 산귀또리 서로 부르는 소란한 소리, 어늬 골짜구니에선 벌써 자즈라지게 <소쩍새> 울어예고, 자주 구름이 쓰다듬고 가는 山頂에 산을 베고 누으면, 하이얀 구름의 하이얀 커튼 사이사이 손에 잡힐듯 촉촉 고갤 들고 솟아나는 별. 뻗어 간 山脈의 검푸른 물결도 높아, 으시시 한여름 밤이 차라리 겨울다이 칩다.// 7-불 피워 닦은 자리 아랫목보담 정겨운 山頂. 텐트 자락 살포시 젖히고 고갤 내밀면, 부딪칠 듯 떨어지는 잦은 流星도 골짝을 찾아 묻히는 밤./ 어서 보내야 할 얼룩진 오늘과, 탄생하는 내일의 生命을 구가할 꿈을 의논하는 꽃보라처럼 난만한 露宿. 벌써 쌔근쌔근 산새처럼 잠이 든 벗도 있다.//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 / 신석정
이 투박한 대지에 발은 붙였어도/ 흰 구름 이는 머리는 항상 하늘을 향하고 사는 산// 언제나 숭고할 수 있는 푸른 산이/ 그 푸른 산이 오늘은 무척 부러워// 하늘과 땅이 비롯하던 날 그 아득한 날 밤부터/ 저 산맥위로는 푸른 별이 넘나들었고// 골작에는 양떼처럼 흰 구름이 몰려오고 가고/ 때로는 늙은 산 수려한 이마를 쓰다듬거니// 고산식물들을 품에 안고 길러낸다는 너그러운 산/ 정초한 꽃그늘에 자고 또 이는 구름과 구름// 내 몸이 가벼히 흰 구름이 되는 날은/ 강 넘어 저 푸른 산 이마를 어루만지리…//

나무 등걸에 앉아서 / 신석정
요요한/ 산이로다.// 겹겹이 쌓인 풀 길 없는 우리 가슴같이/ 깊은 산이로다.// 아아라한 오월 하늘 짙푸른 속에/ 종달새/ 종달새/ 종달새는 미치게 울고// 산은/ 첩첩/ 청대숲보다 더 밋밋하고 무성한데// 아기자기한 우리 두 가슴엔/ 오늘사 태양 따라 환히 트인 길이 있어// 이 나무 등걸에 널 껴안은 채/ 이토록 즐거운 눈물이 자꾸만 쏟아지는 것은// 진정 죽고 싶도록 살고 싶은/ 사랑보다도 뜨겁고 더 존엄한 꽃이/ 가슴 깊이 피어난 까닭이리라.//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白鷺)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작은 짐승 / 신석정
란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란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란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란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란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다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네 눈망울에서는 / 신석정
네 눈망울에서는/ 초록빛 五月/ 하이얀 찔레꽃 내음새가 난다// 네 눈망울에서는/ 초롱 초롱한/ 별들의 이야기가 있다// 네 눈망울 에서는/ 새벽을 알리는/ 아득한 종소리가 들린다// 네 눈망울 에서는/ 머언 먼 뒷날/ 만나야 할 뜨거운 손들이 보인다// 네 눈망울에서는/ 손잡고 이야기할/ 즐거운 나날이 오고 있다//

흰 석고상 -젊은 니힐리스트 홍에게서 들은 꿈 이야기 / 신석정
사뭇 푸른 하늘 아래?/ 멀리 트인 푸른 벌판을/ 나는 누구를 찾아 이리 헤매이는 것일까?// 끝없이 헤매이다 다다른/ 소나무 대 수풀 다옥한/ 작은 언덕 아래 작은 마을은/ 혈맥이 정지한 듯 고요한 마을이었다// 아무리 목 놓아 불러보아도/ 마을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고/ 멀리 흐르는 강물소리/ 멀리 흐르는 푸른 강물소리......// 그 언제 한물이 지내갔는가?/ 죽은듯 고요한 이 마을은/ 엄청난 전란을 겪었는가?/ 죽은듯 고요한 이 마을은// 문득 어느 집 층층계를 무심코 오르다가/ 흰 장미처럼 발가벗은 여인이/ 햇볕이 드시게 흐르는 창 옆에/ 가로누워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당황하였다// 꼬옥 다문 입술이랑 감은 눈이랑/ 아무 말이 없다/ 고요하다// 어디서 비롯하여 어디로 끝나는/ 눈 덮인 산맥보다 희고 고운 곡선이여...../ 가슴을 파헤지고 머리를 묻어도/ 볼에 볼을 문질러도 말이 없다// 끝끝내 껴안은 채 흐느껴 흐느껴 목 메이게 울다가/ 차디찬 석고상에 소스라쳐 나는 꿈을 깨었다// 시방 나는 안개 자욱한 거리를 헤매이며/ 다시 붙잡고 목 놓아 울어볼 사람을 찾노라/ 모두 움직이는 석고상인 것을....../ 모두 다 움직이는 석고상뿐인 것을......// 오오/ 멀리 흐르는 강물소리....../ 역력히 들려오는 그 강물 소리......//

              대바람소리 / 신석정

대바람소리/ 들리더니/ 소소한 대바람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거릴지언정/ ―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 소리……//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 신석정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아/ 댓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는 젖어 온 몸이 젖어......// 난아/ 태양의 푸른 분수가 숨 막히게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만 하늘 아래로만/ 흰 나리꽃이 핀 숱하게 핀 굽어진 길이 놓여 있다/ 너도 어서 그 길로 돌아오라 흰나비처럼 곱게 돌아오라/ 엽맥이 드러나게 찬란한 이 대숲을 향하고......// 하늘 아래 새로 비롯할 슬픈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또 먼 세월이 가져올 즐거운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꿀벌처럼 이 이야기들을 물어 나르고 또 물어내는/ 바람이 있고 태양의 분수가 있는 대숲/ 대숲이 좋지 않으냐// 난아/ 푸른 대가 무성한 이 언덕에 앉아서/ 너는 노래를 불러도 좋고 새같이 지줄대도 좋다/ 지치도록 말이 없는 이 오랜 날을 지니고/ 벙어리처럼 목 놓아 울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

대숲에 서서 / 신석정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안개에 벌레 소리 젖어 흐르고/ 벌레 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 대숲은 좋더라/ 성글어 좋더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더라// 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 기억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거나//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어니……//

어느 지류(支流)에 서서 / 신석정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 신석정
운모(雲母)처럼 투명한 바람에 이끌려/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푸른 하늘의 대낮을 흰 달이 소리 없이 오고가며/ 밤이면 물결에 스쳐나려가는 바둑돌처럼/ 흰구름 엷은 사이사이로 푸른 별이 흘러갑데다// 남국의 노란 은행잎새들이/ 푸른 하늘을 순례한다 먼 길을 떠나기 비롯하면/ 산새의 노래 짙은 숲엔 밤알이 쌓인 잎새들을 조심히 밟고/ 묵은 산장 붉은 감이 조용히 석양 하늘을 바라볼 때/ 가마귀 맑은 소리 산을 넘어 들려옵데다// 어머니/ 오늘은 고양이 졸음 조는/ 저 후원의 따뜻한 볕 아래서/ 흰 토끼의 눈동자같이 붉은 석류알을 쪼개어먹으며/ 그리고 내일은 들장미 붉은 저 숲길을 거닐며/ 가을이 남기는 이 현란한 풍경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렵니까/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고운 심장 / 신석정
별도/ 하늘도/ 밤도 치웁다.// 얼어 붙은 심장 밑으로 흐르던/ 한 줄기 가는 어느 난류(暖流)가 멈추고.// 지치도록 고요한 하늘에 별도 얼어 붙어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그대로 서러울리 없다는 너는/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야 갈리라구......//

그 마음에는 / 신석정
그 사사스러운 일로/ 정히 닦아온 마음에/ 얼룩진 그림자를 보내지 말라.// 그 마음에는/ 한 그루 나무를 심어/ 꽃을 피게 할 일이요// 한 마리/ 학으로 하여/ 노래를 부르게 할 일이다.// 대숲에/ 자취 없이/ 바람이 쉬어 가고// 구름도/ 흔적 없이/ 하늘을 지나가듯// 어둡고/ 흐린 날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받들어// 그 마음에는/ 한 마리 작은 나비도/ 너그러게 쉬어 가게 하라.//

오후의 명상 / 신석정
내 소박한 정원을 장식하는 어린 은행나무여/ 봄이 또 너에게 무엇을 준다하여/ 고 가륵한 손들을 차츰차츰 벌리기 시작하였는뇨?// 오후에 내 너를 바라보며 네 옆에 앉아서 명상하는 것은/ 밤에 너와 소곧대는 별들의 푸른 이야기도 아니요./ 다만 너의 변할 줄 모르는 무심한 생활이어니// 나의 어린 은행나무여/ 이윽고 너는 건강한 가을을 맞이하여/ 황금같이 노오란 네 단조한 잎새들로 하여금/ 그 푸른 하늘 시를 쓰는 일과를 잊지 않겠지// "여보! 당신은 어서 그 좁은 주택을 떠나서/ 산새처럼 저 푸른 하늘을 날고 싶지 않소?"/ 네가 쓰는 시에서 이런 그절이 있었나니/ 나의 뙤약볕 시인 은행나무여/ 쪽지 부러진 내 마음의 작은 산새가 또 얼마나 퍼덕이겠니/ 오는 가을에는/ 오는 가을에는/ 오는 가을에는...//

나랑 함께 / 신석정
비낀 햇빛 아래/ 문득 바라보는 나무// 나무 옆에 서보면/ 나무가 되고,// 꽃 옆에 서보면/ 꽃이 되어도,// 두루미 흘러가는/ 저 하늘을 이고 보면,// 너희들의 가슴 언저리에/ 그 뜨거운 가슴 언저리에 있고 싶어라.// 흐드러진 웃음,/ 그 웃음소리에도// 꽃은 피고/ 마냥 꽃은 피어나고,// 빛나는 너희 눈망울이야/ 그대로 한 개 별빛이거늘,// 흘러간 지난날이사/ 돌아볼 겨를도 없다.// 너희들 내다보는 앞날을/ 나랑 함께 걷게 하여라.//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 신석정
어머니/ 산새는 저 숲에서 살지요?/ 해 저문 하늘에 날아가는 새는/ 저 숲을 어떻게 찾아간답디까?/ 구름도 고요한 하늘의/ 푸른 길을 밟고 헤매이는데……/ 어머니 석양에 내 홀로 강가에서/ 모래성 쌓고 놀 때/ 은행나무 밑에서 어머니가 나를 부르듯이/ 안개 끼어 자욱한 강 건너 숲에서는/ 스며드는 달빛에 빈 보금자리가/ 늦게 오는 산새를 기다릴까요?// 어머니/ 먼 하늘 붉은 놀에 비낀 숲길에는/ 돌아가는 사람들의/ 꿈 같은 그림자 어지럽고/ 흰 모래 언덕에 속삭이던 물결도/ 소몰이 피리에 귀기울여 고요한데/ 저녁바람은 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언덕의 풀잎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가 어머니 무릎에 잠이 들 때/ 저 바람이 숲을 찾아가서/ 작은 산새의 한없이 깊은/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꿈의 일부(一部) / 신석정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내가 타고 있는 백마의 갈기도/ 바람에 몹시 날리고 있었다.// 출발 직전/ 백마는 길게 목놓아 울었다.// 잠시/ 지구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내가 탄 백마는/ 무작정 달리고만 있었다.// 동백꽃이 붉게 타는/ 어느 해안선을 돌고 있었다.// 이윽고/ 로마궁전의 원주(圓柱)가 멀리 바라보였다.// 그 뒤 나는/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메콩강(江) 언덕을 달릴 때였다./ 문득 총소리에 내가 깬 것은……//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 신석정
햇볕이 유달리 맑은 하늘의 푸른 길을 밟고/ 아스라한 산너머 그 나라에 나를 담쑥 안고 가시겠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구름이 된다면……// 바람 잔 밤하늘의 고요한 은하수를 저어서 저어서/ 별나라를 속속들이 구경시켜주실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초승달이 된다면……// 내가 만일 산새가 되어 보금자리에 잠이 든다면/ 어머니는 별이 되어 달도 없는 고요한 밤에/ 그 푸른 눈동자로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까?//

아 그 꿈에서 살고 싶어라 / 신석정
푸른 웃음 엷게흐르는 나지익한 하늘을/ 鶴타고 멀리 멀리 갔엇노라// 숲길을 휘돌아 언덕에 왔을 때/ 그것은 지낸 날 꿈이었다고/ 하늘에 떠도는 구름을 보며/ 너는 그렇게 이야기 하드구나 !// 깨워지지 않을 꿈이라면/ 그 꿈에서 길이 살고싶어라// 굽어든 언덕길을 돌아서 돌아서/ 오든 길 바라다보는 아득한 네 눈에는/ 그 꿈을 역역히 보는 듯이/ 너는 머언 하늘을 바래보드구나 !// 꿈이 아니면 찾을 수 없는/ 아 그 꿈에서 살고 싶어라/ 숲길을 휘돌아 실개천 건널 때/ 너는 이렇게 이야기 하드고…/ 그때 山비둘기는 뚝에서 조으느라고// 우리의 이야기를 엿들을 사이도 없었건만/ 낮에 뜬 초승달이 나려다 보던 것을…//

나의 노래는 / 신석정
나의 노래는/ 라일락꽃과 그 꽃잎에 사운대는/ 바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너의 타는 눈망울과/ 그 뜨거운 가슴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저어 빨간 장미의 산호 빛 웃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항상 별같이 살고파 하는 네 마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흰 나리꽃이 가쁘도록 내쉬는 짙은 향기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꽃잎이 서로 부딪치며 이뤄지는 죄 없는 입맞춤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소쩍새 미치게 우는 어둔 밤엘랑 아예 찾지 말라.// 나의 노래는/ 태양의 꽃가루 쏟아지는 칠월 바다의 푸르른 수평선에 있다.//

날개가 돋쳤다면 / 신석정
어머니/ 만일 나에게 날개가 돋쳤다면// 산새새끼 포르르 포르르 멀리 날아가듯/ 찬란히 피는 밤하늘의 별밭을 찾아가서/ 나는 원정(園丁)이 되오리다 별밭을 지키는……// 그리하여 적적한 밤하늘에 유성이 뵈이거든/ 동산에 피는 별을 따 던지는 나의 장난인 줄 아시오// 그런데 어머니/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어머니/ 만일 나에게 날개가 돋쳤다면// 석양에 능금같이 붉은 하늘을 날아서/ 똥그란 지구를 멀리 바라보며/ 옥토끼 기르는 목동이 되오리다 달나라에 가서……/ 그리하여 푸른 달밤 피리소리 들려오거든/ 석양에 토끼 몰고 돌아가며 달나라에서 부는 나의 옥퉁소인 줄 아시오// 그런데 어머니/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네 눈망울에서는 / 신석정
네 눈망울에서는/ 초록빛 오월/ 하이얀 찔레꽃 내음새가 난다// 네 눈망울에서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이야기를 머금었다// 네 눈망울에서는/ 새벽을 알리는/ 아득한 종소리가 들린다// 네 눈망울에서는/ 머언 먼 뒷날/ 만나야 할 뜨거운 손들이 보인다// 네 눈망울에는/ 손잡고 이야기할/ 즐거운 나날이 오고 있다//

눈맞춤 / 신석정
바람은 연신 불고 있었다.// 안개 같은 비 사이로/ 비 같은 안개 사이로/ 엷은 햇볕이 내다보는 동안// 문득/ 떠난 지 오랜 ‘생활’을 찾던 나의 눈은/ 아내의 눈을 붙잡았다./ 아내의 눈도 나의 눈을 붙잡고 있었다.// 불현듯 마주친/ 아내와 나의 눈맞춤 속에/ 어쩜 그토록 긴 세월이 흘러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몰랐다.// 치열(齒列) 한 모서리가 무너진 아내는/ 이내 원뢰(遠雷)처럼 조용히 웃고 있었다./ 조용한 우리들의 눈맞춤 속에/ 우/ 루/ 루/ 루/ 원뢰(遠雷)가 아스라이 또 들려오고 있었다.//

망향(望鄕)의 노래 / 신석정
한 이파리/ 또 한 이파리/ 시나브로 지는/ 지치도록 흰 복사꽃을// 꽃잎마다/ 지는 꽃잎마다/ 곱다랗게 자꾸만/ 감기는 서러운 서러운 연륜(年輪)을// 늙으신 아버지의/ 기침소리랑/ 곤때 가신 지 오랜 아내랑/ 어리디어린 손주랑 사는 곳// 버리고 온 ‘생활(生活)’이며/ 나의 벅차던 청춘이/ 아직도 되살아 있는/ 고향인 성만 싶어 밤을 새운다.//

바다에게 주는 시 / 신석정
바다여/ 날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海岸線)의 바위는/ ‘베―토벤’처럼 귀가 먹었다.// 지구(地球)도 나같이 네가 성가시면/ 참다못해/ 너를 벌써 엎질렀을 게다.// 저 언덕에서/ 동백꽃은 네가 하 우스워/ 파란 이파리 속에 숨어서/ 너를 웃고 있지 않니?// 동백꽃이/ 자꾸만 웃어 대는/ 고 빨간 입술이/ 예뻐 죽겠다.//

파도(波濤) / 신석정
갈대에 숨어드는/ 소슬한 사람/ 구월도 깊었다.// 철 그른/ 뻐꾸기 목멘 소리/ 애가 잦아 타는 노을// 안쓰럽도록/ 어진 것과/ 어질지 않은 것을 남겨 놓고// 이대로/ 차마 이대로/ 눈감을 수도 없거늘// 산을 닮아/ 입을 다물어도/ 자꾸만 가슴이 뜨거워오는 날은// 소나무 성근 숲너머/ 파도소리가/ 유달리 달려드는 속을// 부르르 떨리는 손은/ 주먹으로 달래 놓고/ 파도 밖에 트여올 한 줄기 빛을 본다.//

항구(港口)에서 / 신석정
네가 떠난 항구(港口)에/ 오월 바람이 설렌다.// 머리칼을 날리는 젊은 아낙네들은/ 베피떡이랑 뎀뿌라랑 소주병을 늘어놓고/ 뱃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꼬박꼬박 기두리고 있는 항구(港口).// 가대기의 뒤를 따라다니는 발 벗은 아이들은/ 구호양곡(救護糧穀)의 가마니에서 쑤시알갱이가 빠지면/ 병아리처럼 주워서는 차대기에 넣는 항구(港口).// Singoara같이 사랑하는 이의/ 성한 피가 몹시는 먹고프다는 그 백랍 같은 여인도곤/ 아낙네와 발 벗은 어린 것이 더 안쓰러운 항구(港口).// 오월 바람 설레는 항구(港口)에/ 멀리 떠난 너를 생각하는 눈시울이 뜨겁다.//

발음(發音) / 신석정
살아보니/ 지구(地球)는/ 몹시도 좁은 고장이더군요.// 아무리/ 한 억만년(億萬年)쯤/ 태양을 따라다녔기로서니/ 이렇게도 호흡(呼吸)이 가쁠 수야 있습니까?// 그래도 낡은 청춘을/ 숨가빠하는 지구(地球)에게 매달려 가면서/ 오늘은 가슴 속으로 리듬이 없는/ 눈물을 흘려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여보!/ 안심하십시요,/ 오는 봄엔/ 나도 저 나무랑 풀과 더불어/ 지줄대는 새같이/ 발음하겠습니다.//

밤의 노래 / 신석정
어둠이 범람하는 지역에/ 도도히 범람하는 처참한 지역에,/ 자꾸만 짐승들은 울고/ 목놓고 짐승들은 자꾸만 울고,/ 찌눌린 가슴이라 숨결도 영영 동결되어 가는가?// ‘그렇지만 설마 그래서야 될리라구!’// 시궁창 같은 세월을 꽃도 머물러,/ 그대로 멈출 수 없는 작은 핏줄에/ 핏줄 속에 수떨이는 가느다란 소리 있어,/ 아직은 뜨거운 가슴을 서로서로/ 꽃으로 문지르는가?// ‘아예 그대로 잦아들 순 없는 것이여!’// 몸서리나는 어둔 밤을 비바람 미치게 몰려드는데,/ 번갯불 사이사이 천둥소리 들려오고,/ 머언 먼 천둥소리 산을 넘어 들려오고,/ 새벽을 잉태하는 뼈저린 신음소리,/ 우리 가슴에 밀려드는 파도소리……// ‘그대들의 귀에 젖은 노래소리 아닌가?’//

촐촐한 밤 / 신석정
새새끼 포르르 포르르 날아가 버리듯/ 오늘밤 하늘에는 별도 숨었네./ 풀려서 틈가는 요지음 땅에는/ 오늘밤 비도 스며들겠다.// 어두운 하늘을 제쳐보고 싶듯/ 나는 오늘밤 먼 세계가 그리워// 비 내리는 촐촐한 이 밤에는/ 밀감 껍질이라도 지근거리고 싶구나!// 나는 이런 밤에 새끼궝 소리가 그립고/ 흰 물새 떠다니는 먼 호수를 꿈꾸고 싶다//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 신석정
젊고 늙은 산맥들을/ 또/ 푸른 바다의 거만한 가슴을 벗어나/ 우리들의 태양이/ 지금은 어느 나라 국경을 넘고 있겠습니까?// 어머니/ 바로 그 뒤/ 우리는 우리들의 화려한 꿈과/ 금시 떠나간 태양의 빛나는 이야기를/ 한참 소근대고 있을 때/ 당신의 성스러운 유방같이 부드러운 황혼이/ 저 숲길을 걸어오지 않았습니까?// 어머니/ 황혼마저 어느 성좌로 떠나고/ 밤∼/ 밤이 왔습니다/ 그 검고 무서운 밤이 또 왔습니다// 태양이 가고/ 빛나는 모든 것이 가고/ 어둠은 아름다운 전설과 신화까지도 먹칠하였습니다/ 어머니/ 옛이야기나 하나 들려주세요/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밤을 맞이하는 노래 / 신석정
黃昏을 餞別하고/ 밤을 迎接할 때// 저 깊은 森林들은 작은 산새들로 하여곰/ 黃昏을 餞別하기 위하여 거룩한 音樂會를 열었다합니다/ 그러길래 숲을 넘어가던 나의 어린 비둘기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직도 音樂會의 구경이 끝나지 않은게지요// 黃昏을 餞別하고/ 밤을 迎接할 때// 늙은山은 오랜 冥想 끝에 찾어오는 잠으로 하여곰/ 한손으로 턱을 고인채 고요히 눈을 감었습니다/ 그럼으로 푸른하늘의 한가한 旅行을 무척 좋와하는 저 구름들도/ 시방 잊었던 故國을 찾어가지 않습니까?// 黃昏을 餞別하고/ 밤을 迎接할 때// 고요한 湖水는 힌물새들로 하여곰 餞別의 손수건을 삼었으며/ 힌 명주처럼 부드러운 안개로 하여곰 밤이 오는 길을 닦어 놓왔습니다/ 이윽고 저 湖面에서는 발길에 끌고 오는/ 찬란한 <<밤>>의 夜會服이 안개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黃昏을 餞別하고/ 밤을 迎接할떄// 내 寢室의 窓문에는 이따금 黃海를 건너온/ 밤바람이 속삭이는 "바다의 이야기가" 치웁고/ 머언 하늘은 조용한 별들의 푸른꿈을 지키고…/ 지금 森林은 그 갸륵한 산새들의 보드라운 숨결을 지키겠습니다// 黃昏을 餞別하고/ 밤을 迎接할 때/ 미억 내음새 가득한 寢室에 힌 촛불을 켜고앉어/ 내 人生을 思索하는 거룩한 冥想을 비롯할 때입니다/ 밤이여 이 靜安한 나의 日課가 끝날때까지/ 당신은 언제까지나 보드라운 내 숨결을 지켜주겠읍니까?//

푸른 침실 / 신석정
一林아/ 촛불을 꺼라/ 소박한 정원에 강물처럼 흐르는 푸른 달빛을 어서 우리 침실로 맞어 와야지………// 유리창 하나도 없는 단조한 나의 방…/ 침실아-/ 그러나 푸른 달빛이 풍요히 흘러오면/ 너는 갑자기 바다가 될수도 있겠지…// 一林아/ 어서 촛불을 끄렴/ 고양이 새끼처럼 삽작 삽작 저 산을 넘어온/ 달빛은 오직이나 우리 침실이 그리웟겠늬?// 작은 시계의 작은 바늘이 좁은 영토를 순례하는/ 오직 안타까운 나의 침실이여/ 푸른 달빛이 해안처럼 흘러 넘치면/ 너는 작은 배가 되여야 한다// 一林아/ 문을 열어제치고 들창도 축겨 올려라/ 너와 내가 턱을 고이고 은행나무를 바라보는동안/ 너와 내가 사랑하는 난초는 푸른 달빛을 조용히 호흡하겠지…// 여봐/ 침실의 부두에는 푸른 달빛이 물결치며/ 빛나는 여행담을 속은거리지 않늬?// 一林아/ 너와 나는 푸른 침실의 작은배를 잡어타고/ 또/ 어데로 출발을 약속 하여야겠느냐?//

비가(悲歌) / 신석정
‘루오’의 그림처럼/ 어둡게 살아가지만,/ 눈부신 햇볕을 원하는 건 아니다.// 꾀꼬리/ 옥을 굴리듯 우는 소리보다는/ 차라리 가슴을 에어내는/ 귀,/ 촉,/ 도,/ 소리로 멍든 가슴을 채워 달라.// 저 검은/ 까마귀떼가 지구 밖에서/ 하늘을 뒤덮는 건/ 차라리 견딜 수 있는 일이지만// 안쓰러운 것들이/ 눈에 걸리는데/ 자꾸만 자꾸만/ 눈에 걸리는데,// 그저/ 소라껍질을/ 스쳐가는 바람결처럼/ 차마 눈감을 수도 없거늘,// 아아/ 하늘이여/ 피가 돌 양이면,// 저어/ 야물딱진/ 민들레꽃을 피워내듯이/ 어서 숨을 돌리게 하라.//

슬픈 전설을 지니고 / 신석정
나무 사이로/ 가시 사이로/ 잎 사이로/ 엽맥이 드러나게 햇볕이 흘러들고/ 젊은 산맥 멀리 푸른 하늘이 넘어갑니다// 어머니/ 한때는 하늘을 잃어버리고/ 한때는 햇볕을 잃어버리고/ 슬픈 전설을 가슴에 지닌 채/ 죄 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죄 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하늘이 너무 푸르지 않습니까?/ 햇볕이 너무 빛나지 않습니까?/ 어머니/ 당신은 아예 슬픈 전설을 빚어내지 마십시오// 너그러운 햇볕을 안고/ 저 푸른 하늘을 우러러/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슬픈 전설은 심장에 지니고/ 정정한 나무처럼 살아가오리다//

 

슬픈 구도 / 신석정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워 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오,/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더뇨.//

비의 서정시(抒情詩) / 신석정
길이 넘는 유리창에 기대어/ 그 여인은 자꾸만 흐느껴 울었다.// 유리창 밖에서는 놋낱 같은 비가 좌악 좍 쏟아지고/ 쏟아지는 비는 자꾸만 유리창에 들이치는데/ 여인의 흐느껴 우는 소리는/ 빗소리에 영영 묻혀 버렸다.// 그때 나는 벗과 같이 극장을 나오면서/ 그 여배우를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 일이 있다.// 생활의 창문에 들이치는 비가 치워/ 들이치는 비에 가슴이 더욱 치워/ 나는 다시 그 여인을 생각한다.// 글쎄 여보!/ 우리는 이 어설픈 극장에서 언제까지/ 서투른 배우 노릇을 하오리까?//

서정가(抒情歌) / 신석정
흰 복사꽃이 진다기로서니/ 빗날 같이 뚜욱 뚝 진다기로서니/ 아예 눈물짓지 마라 눈물짓지 마라// 너와 나의 푸른 봄도/강물로 흘렀거니/ 그지없이 강물로 흘러갔거니// 흰 복사꽃이 날린다기로서니/ 낙엽처럼 휘날린다 하기로서니/ 서러울 리 없다 서러울 리 없어// 너와 나는 봄도 없는 흰 복사꽃이여/ 빗날같이 지다가 낙엽처럼 날려서/ 강물로 강물로 흘러가 버리는//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 신석정
잔인한 촛불에게 추방을 당하면서도/ 나의 침실을 잊지 않는 충실한 어둠이여// 오늘밤 나는 너를 위하여 촛불을 끄고/ 재 작은 침실의 전면적을 제공하노니// 어둠이여 너는 오늘밤에도 나를 안고/ 새벽이 온다는 단조한 이야기를 계속하겠지?// 그러나 나는 밤마다 네가 속삭이는/ 그 새벽을 한 번도 맞아본 일은 없다// "대체 네가 새벽이 온다는 이야기를 한 것도 오래되건만……"//

생존 / 신석정
체온도 스며들지 않는/ 서글픈 악수에 지친 주민이기에/ 나는 문득/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숨이 가빠/ 그래도 숨이 가빠/ 어항도곤 좁은 지구를/ 뛰어나가고 싶었다.//

서가(書架) / 신석정
개미새끼 흙탑을 쌓아올리듯/ 작은 서가에 틈 없이 책을 쌓아놓고// 마음이 호수처럼 가라앉는 날/ 한 권 두 권 내들고 읽는 한가한 날// 때로는 서가가 드높은 산같이 보이기도 하고/ 나는 그 산을 천천히 오르기도 하고// 곤륜산보다 더 깊숙한 내 서가에/ 오늘은 난초 향기가 그윽이 흐르는 듯하이//

소곡(小曲) / 신석정
산이여/ 그 무슨 그리움이 복받쳐/ 지구와 더불어 탄생한 이후/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느뇨// 산이여/ 나 또한 진정 그리운 것 있어/ 발돋움하고 우러러보아도/ 나의 하늘은 너무 아득하고나//

서정소곡 / 신석정
삼월보다 따스한/ 네 손을 달라// 백목련보다 하이얀/ 네 가슴을 달라// 불보다 불보다 뜨거운/ 네 심장을 달라// 시방 거리에는/ 음악 같은 실비 내리고// 실비 내리는 속에/ 동백꽃 뚜욱 뚝 지는 소리 들려오고,// 돌멩이의 체온도 그리운/ 죽음보다 외로운 오후// 음악같이 내리는 실비 속에/ 나는 산처럼 서서 널 생각한다//

단장소곡(斷腸小曲) / 신석정
추워 지친 하늘/ 서럽도록 짙푸르다.// 물소리 잦아 시린 속에/ 해 지고/ 너는 가고,// 종소리/ 노을에 젖어/ 목메어 은은한데,// 원수도 없는 날을/ 살고파 타는 가슴// 빈 주먹 쥐고 펴다/ 하루 해를 또 보냈다.//

속병상음(續病牀吟) / 신석정
참새소리 문틈을 새여 들려 오거니 포근한 이 아침엔 뜰을 건일었으면…/ 오늘도 탱자나무 수풀 우에는 한종일 참새들이 지저귀겠지// 뜰을 거닐면 푸른 하늘 뵈일것을 푸른하늘 우에는 해볕도 잠자려니/ 해오리 맑은 소리 은은히 들려온다 풀린 하늘이라 나직히 떠가나봐…// 청수히 늙은산이 팔장을 끼고 서서 오늘도 하늘에 기대여 명상을 하리로다/ 산이요 하늘이요 보고싶은 내마음 언제나 하늘 아래를 거닐어 볼거나…// 오후 옅은 해볕 창문을 비꼇는데 산 넘어 가마귀 소리가 멀기도 하여라/ 문 앞에 버드나무에는 산새가 울때언만 그 맑은 노래소리 해가 저도 않들리네// 소박한 집이언만 노대라도 있었드면 난초를 안꼬 올라 머언바다 바라볼걸…/ 이 뒤에 집을 지을때엔 산언덕 찾어가서 바다가 바라다 뵈이는 층층계를 만드르리…//

송하논고(松下論古) -어느 畵題 / 신석정
늙은 소나무 아래 두老人이 앉어/ 저 무슨 이야기를 저리 하고 있을고?/ 무척 한가한 그림이여-// 이윽고/ 우리도 저렇게 늙은 소나무 아래 앉어/ 江물처럼 흘러간 옛이야기 할날이 멀지않거니// 어서/ 스럽고 또 빛나는 이야기를 장만하자//

너는 비둘기를 부러워 하드구나 / 신석정
가여운 가을비 선듯 개인 하늘에는/ 가고 오는 힌구름 그 걸음조차 빠르고/ 석양에 상없이 머언강이 실낯같이 빛날 때/ 밝게 퍼지는 山가마귀 소리도 곱게 퍼집니다// 너는 노-란 은행잎을 무척 사랑하드구나!/ 나와 함께 고요한 저 숲길을 거닐어볼거나?/ 해 묵은 느티나무 넌즈시 처진 가지에는/ 포곤한 해볕을 지근거리는 산새의 조름이 깊고/ 금잔디 빛나는 양지쪽에 아이들/ 오브륵이 앉어서 도란도란하는 것 한가로워 뵈입니다// 너는 빛나는 갈대꽃을 유달리 좋와하드구나!/ 나와 함께 바람잔 저 강변으로 나어가볼거나?/ 바람은 또 산기슭을 살그머니 돌아와서/ 하늘에 휘날리는 은행잎과 어우러지더니/ 지내는 길이라 물결과 수작하는 사이로 빠르게/ 숲에 조으는 산새의 그 꿈을 엿보려 갑니다// 너는 저 푸른 하늘에 잠자는 해볕을 사랑하고/ 숲 넘어 날어가는 하-얀 비둘기를 부러워하드구나.//

선물 / 신석정
하늘가에 붉은 빛 말없이 퍼지고/ 물결이 자개처럼 반짝이는 날/ 저녁해 보내는 이도 없이/ 초라히 바다를 넘어갑니다// 어슷어슷 하면서도/ 그림자조차 뵈이지 않는 어둠이/ 부르는 이 없이 찾아와선/ 아득한 섬을 싸고돕니다// 주검같이 말없는 바다에는/ 지금도 물살이 웃음처럼 남실거리는 흔적이 뵈입니다/ 그 언제 해가 넘어갔는지 그도 모른 체하고―// 무심히 살고 또 지내는/ 해∼ 바다∼ 섬∼ 하고 나는 부르짖으면서/ 내 몸도 거기에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꽃상여 가는길 -地下의 秋葉에게 주는 詩 / 신석정
임해산臨海山은 덩스럽게 높았다// 그 아래로 그 아래로/ 다옥한 대수풀이 있는 마을/ 그 마을에서 네 소년의 꿈은 나날이/ 바다처럼 자라났었다// 바욜링을 들고/ 대피리를 들고/ 너와 내가 다니던 길은/ 찔레꽃 열매가 유달리 붉은 길이였다/ 바다건너 연산이 푸르게만 보이는 길이였다//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를 두고/ 아내와 어린 것을 두고/ 네 꽃상여가 떠나던 그 길에/ 오늘 아버지의 꽃상여가 또 떠나야 하는 그 길에// 슬픈 이야기만 빚어내는 찔레꽃 열매가 붉어 심장보다 붉어/ 슬픈 이야기만 빚어내는 바다건너 연산이 푸르게만 푸르게만 보이는구나//

꽃길을 찾어 / 신석정
나리꽃 핀 새이로/ 월견초 핀 새이로/ 선아/ 너도 인젠 돌아다니는 재주를 배워냈고나// 흥근한 향기가 하늘처럼 벅차도 아무리 벅차도/ 향기에는 제발 우리 숨 막히지 말자// 꽃가루가 무침하고/ 네 어깨에/ 네 가슴에/ 네 머리칼에/ 소복이 쌓였고나// 너도 기어코 한 마리 흰 나비가 되어/ 오늘은 어여쁘디 어여쁜 나비가 되어// 선아/ 나리꽃 새잇길로 푸른 하늘 아래로/ 다시 우리는 두 날개 가즈런히 펴고/ 꽃길을 찾어 날아가야 하리라//

연꽃이었다 / 신석정
그 사람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이다/ 내가 사는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 하나 있다/ 눈빛 맑아,/ 호수처럼 푸르고 고요해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침나절 연잎 위,/ 이슬방울 굵게 맺혔다가/ 물 위로 굴러 떨어지듯, 나는/ 때때로 자맥질하거나/ 수시로 부서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삶의 궤도는, 억겁을 돌아/ 물결처럼 출렁거린다/ 수없이. 수도 없이// 그저 그런, 내가/ 그 깊고도 깊은 물 속을/ 얼만큼 더 바라볼 수 있을는지/ 그 생각만으로도 아리다/ 그 하나만으로도 아프다//

은방울꽃 / 신석정
나는/ 그때 외롭게/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나뭇가지를 옮아앉으며/ ‘동박새’가 울고 있었다.// 어쩜/ 혼자 우는 ‘동박새’는/ 나도곤 더 외로웠는지 모른다.// 숲길에선/ 은방울꽃 내음이 솔곳이/ 바람결에 풍겨오고 있었다.// 너희들의/ 그 맑은 눈망울을/ 은방울꽃 속에서 난 역력히 보았다.// 그것은/ 나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너희 가슴속에 핀 꽃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선화(水仙花) -눈 속에 「사슴」을 보내주신 白石님께 드리는 수선화 한 폭 / 신석정
수선화는/ 어린 연잎처럼 오므라진 흰 수반에 있다// 수선화는/ 암탉 모양하고 흰 수반이 안고 있다// 수선화는/ 솜병아리 주둥이같이 연약한 움이 자라난다// 수선화는/ 아직 햇볕과 은하수를 구경한 적이 없다// 수선화는/ 돌과 물에서 자라도 그렇게 냉정한 식물이 아니다// 수선화는/ 그러기에 파아란 혀끝으로 봄을 핥으려고 애쓴다//

난초 / 신석정
난초는/ 얌전하게 뽑아올린 듯 갸륵한 입새가 어여쁘다// 난초는/ 건드러지게 처진 청수한 잎새가 더 어여쁘다// 난초는/ 바위틈에서 자랐는지 그윽한 돌냄새가 난다// 난초는/ 산에서 살던 놈이라 아무래도 산냄새가 난다// 난초는/ 예운림(倪雲林)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추었다// 난초는/ 도연명(陶淵明)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추었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를 보고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와 같이 살고 싶다//

모란 / 신석정
모란이 웃는/ 눈언저릴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모란이 웃는/ 입언저릴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모란이 웃는/ 흐드러진 웃음소릴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모란이 웃는/ 참한 얼굴 속에/ 아무리 찾아도 난 없었다.//

빙하(氷河) / 신석정
동백꽃이 떨어진다/ 빗속에 동백꽃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수(水)/ 평(平)/ 선(線)/ 너머로 꿈 많은 내 소년을 몰아가던/ 파도소리/ 파도소리 부서지는 해안에/ 동백꽃이 떨어진다// 억만 년 지구와 주고받던/ 회화에도 태양은 지쳐/ 엷은 구름의 면사포를 썼는데/ 떠나자는 머언 뱃고동소리와/ 뚝뚝 지는 동백꽃에도/ 뜨거운 눈물지우던 나의 벅찬 청춘을/ 귀대어 몇 번이고 소근거려도/ 가고오는 빛날 역사란/ 모두 다 우리 상처 입은 옷자락을/ 갈가리 스쳐갈 바람결이여// 생활이 주고 간 화상쯤이야/ 아예 서럽진 않아도/ 치밀어오는 뜨거운 가슴도 식고/ 한 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 동백꽃 지듯 소리 없이 떠난다면/ 차라리 심장도 빙하 되어/ 남은 피 한 천 년 녹아/ 철 철 철 흘리고 싶다.//

자작나무 숲을 가던 소년을 위한 詩 / 신석정
자작나무 숲길을 한동안 걸어가면 자작나무 숲 사이로 자작나무 이파리보다 더 파아란 강물이 넘쳐 왔다. 자작나무숲 아래 조약돌이 가즈런히 깔려있는 강변을 한참 내려다 보던 少年은 자작나무 숲 너머 또 구름 밖에 두고 온 머언 먼 고향을 생각해 보았다.// 자작나무는 자작나무대로 눈부신 太陽의 噴水 속에 하이얀 피부를 드러낸 채 강바람에 숨가쁘게 흔들리는 것을 少年은 제 심장의 고동으로 착각했다. 그때 少年의 心臟도 자작나무보다 더 혼란스럽게 뛰는 것을 少年은 알았다.// 이윽고 少年은 강변으로 내려왔다. 자작나무 숲을 빠져 강변으로 내려온 少年의 발길은 어찌 그렇게도 무거웠는지 少年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기에 少年은 강물줄기를 타고 그 아리잠직한 제 꿈과 생시가 도도히 실려가는 강물을 보는 것이 더 서러웠다.// 해가 설핏했다./ 노을은 연꽃빛으로 곱게 타다간 또 사위어 갔다. 구름들이 모두 저희들의 고향을 찾아 가노라고 분주한데 벌써 하늘에는 별들이 죽순처럼 촉촉 솟아 나오는 것을 少年은 강변을 걸어가면서 바라보았다.// 별을 바라보던 少年은 문득 어머니를 불러 보았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어머니를 부르며 바라보는 하늘과 별은 한결 아스므라했다./ 少年의 가슴 속에 어머니가 살 듯 어머니의 마음 속에 少年은 살고 있느지도 모른다.// 저 아득한 별 속에 少年은 있었다. 少年의 마음 속에 별들은 있었다./ 자작나무를 스쳐오는 푸른 강 바람은 少年의 머리칼을 자꾸만 흩날리고 있다. 마치 눈같이 하이얀 白馬의 갈기가 五月바람에 자꾸만 날리듯이-//

파초잎을 밟고 가는 / 신석정
파초잎을 밟고 가는/ 저 바람 뒤에 겨울은 서 있겠지......// -벌써 골 붉은 감잎이 휘날린다.// 파초잎을 밟고 가는/ 저 빗발 뒤에 겨울은 서 있겠지......// ―사철 발 벗은 네가 보고파라.// 파초잎을 밟고 가는/ 저 달빛 뒤에 겨울은 서 있겠지......// ―어디서 귀또리가 안쓰럽게 운다.// 파초잎을 밟고 가는/ 내 어린 꿈 속에 겨울은 서서// ―저렇게 하이얀 눈을 날리는고나.....//

은행잎을 바라보는 마음 / 신석정
저 어린 들국화들에게 수평선을 넘어온 짠바람이/ 충실히 속삭이는 "바다의 이야기"는 얼마나 치웁겠읍니까?// 석류알처럼 붉은 석양하늘 선명한속에/ 포르르 포르르 작고 살아지는 갸륵한 산새들은/ 파란 바다의 또렷한 섬들이 어둠에 꺼지면/ 머언 삼림의 소박한 궁전을 찾어가 그들의 화려한 푸른꿈을 짜낸다합니다// 江언덕 낡은 녹색침대에는 아직도 해볕을 즐기는 洋들의 그림자 꿈같은데/ 벌서 차츰 차츰 나려오는 山그림자의 발자욱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평온한 마음처럼 조용히 가라앉인 江우에는/ 이윽고 저녁안개의 밤을 전하는 단조한 이야기가 비롯하겠읍니다 그려!/ 여보 우리들도 집으로 돌아갈때가 되었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떨어지는 은행잎만 물그럼이 바라보십니까?//

한대식물(寒帶植物) / 신석정
푸른 계절이 모조리 휩쓸려가고/ 건강한 산맥들이 아주 물러앉은 뒤/ 세월은 오로지 슬픈 이야기만 싣고/ 장미처럼 받들던 네 심장을 사뭇 지나갔다// 한사코 태양을 따라다니던 대낮도 인젠 싫다/ 푸른 하늘까지도 단숨에 삼키는 거룩한 밤을 가졌노라/ 한때 곤곤히 흐르던 난류가 멈춘 이후/ 네 심장에는 나날이 자라가는 한대식물이 무성하고나//

입춘 / 신석정
가벼운/ 기침에도/ 허리가 울리더니// 엊그제/ 마파람엔/ 능금도 바람이 들겠다.// 저/ 노곤한 햇볕에/ 등이 근지러운 곤충처럼/ 나도/ 맨발로 토방 아랠/ 살그머니 내려가고 싶다.// ‘남풍이 ×m의 속도로 불고/ 곳에 따라서는 한때 눈 또는 비가 내리겠습니다’//

봄의 유혹 / 신석정
파란 하늘에 흰 구름 가벼이 떠가고/ 가뜬한 남풍이 무엇을 찾어내일 듯이/ 강 너머 푸른 언덕을 더듬어 갑니다// 언뜻언뜻 숲새로 먼 못물이 희고/ 푸른 빛 연기처럼 떠도는 저 들에서는/ 종달새가 오늘도 푸른 하늘의 먼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시내물이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아지랑이 영창 건너 먼 산이 고요합니다/ 오늘은 왜 이 풍경들이 나를 그리워하는 것 같애요// 산새는 오늘 어데서 그들의 소박한 궁전을 생각하며/ 청아한 목소리로 대화를 하겠읍니까?/ 나는 지금 산새를 생각하는 '빛나는 외로움'이 있읍니다.// 임이여 무척 명랑한 봄날이외다/ 이런 날 당신은 따뜻한 햇볕이 되어/ 저 푸른 하늘에 고요히 잠들어 보고 싶지 않습니까?//

대화 / 신석정
모란 순이/ 새끼손가락만치 자랐습데다.// 너는 그렇게도/ 봄을 기두렸고나.// 산수유(山茱萸)꽃이/ 벌써 시나브로 지던데요.// 글쎄/ 봄은 오자 또 떠나는 게지……// 그러기에 우린 아직도/ 경칩(驚蟄)이 먼 지역의 주민인가 봅니다.// 산(山) 같은 침묵(沈?)이 흐른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 신석정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운 핏줄을 타고 오고/ 호흡은 가빠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으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 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대춘부(待春賦) / 신석정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거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은 핏줄을 타고 오기에/ 호흡은 가뻐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봄을 닮은 얼굴 / 신석정
아직 지구에는/ 전쟁의 濁流가 흘러가고 있어도/ 모란은 쑥쑥 순을 올리고/ 백목련도 홀홀 꽃멍덕을 벗고 있기에/ 그래도 지구는 미울 수가 없다// 설령, 저 검은 전쟁이/ 하수구로 영영 자췰 감추지 않드래도/ 옳고 그른것, 바르고 삐뚫어진 것을 배우는/ 우리들의 어진 아들과 딸들의/ 얼굴이야 어찌 이그러질 수 있겠는가// 겨울이 강 건너 머언 길을 떠난 뒤/ 머지않아 개구리들이 수달 떨고/ 산수유꽃 흔들리는 아지랑이 밖에/ 殘雪을 안은 채 산이 조는 날에도/ 너희들은 차츰 봄을 닮아 가야지ㅡㅡ// 그래!/ 부디 봄을 닮은 얼굴로/ 모란이 순을 올리고, 백목련이 겨울을/ 벗어던지듯/ 피가 듣는 싱싱한 얼굴로/ 꼬옥 그렇게들 살아가야지......//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 신석정
따뜻한 햇볕 물 우에 미끄러지고/ 흰 물새 동당동당 물에 뜨듯 놀고 싶은 날이네// 언덕에는 누런 잔디 헤치는 바람이 있고/ 흰 염소 그림자 물 속에 어지러워// 묵은 밭에 가마귀 그 소리 한가하고/ 오늘도 춤이 잦았다…하늘에 해오리…// 이렇게 나른한 봄날 언덕에 누워/ 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 신석정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뱀이 부시시 눈을 떠보았다./ ― 그러나 아직 겨울이었다.// 하도 땅속이 훈훈해서/ 개구리도 뒷발을 쭈욱 펴보았다.// ― 그러나 봄은 아니었다.// 어디서 살얼음 풀린 물소리가 나서/ 나무움들도 살포시/ 밖을 내다보았다.// ― 그러나 머언 산엔 눈이 하얗다.// 핸 멀찌막히 ‘경칩(驚蟄)’을 세워 놓고/ 이렇게 따뜻하게 비췰 건 뭐람?// ― 그러나 봄 머금은 햇볕이어서 좋다.// 미치고 싶도록 햇볕이 다냥해서/ 나도 발을 쭈욱 펴고 눈을 떠본다.// ― 그러나 ‘입춘(立春)’은 칼렌다 속에// 숨어 하품을 하고 있었다.//

화석이 되고 싶어 / 신석정
하늘이 저렇게 옥같이 푸른 날엔/ 멀리 흰 비둘기 그림자 찾고 싶다// 느린 구름 무엇을 노려보듯 가지 않고/ 먼 강물은 소리 없이 혼자 가네// 뽑아 올린 듯 밋밋한 산봉우리 곡선이 또렷하고/ 명항한 날이라 낮달이 더욱 희고나// 석양에 빛나는 까마귀 날개같이 검은 바위에/ 이런 날엔 먼 강을 바라보고 앉은 대로 화석이 되고 싶어......//

황(篁) / 신석정
댓이파리/ 댓이파리/ 댓이파리에/ 바람이 왔다.// 바람은/ 댓이파리보다/ 더 짙푸르다.// 난 밋밋한 대와/ 나란히 서서/ 쏟아지는 태양의 파란 분수를/ 어린 금붕어 새끼처럼 뻐끔뻐끔/ 마시는 것이/ 좋다.// 나는/ 갑자기 대가 되어버린다.// 파란 대가 섞인/ 나는 나를 잊어버린 채/ 대/ 대랑 산다.//

춘향전 서시 / 신석정
푸르름 머금은 천지가 눈부시어/ 호이 꾀꼬르르 서로 부르는 소리/ 꾀꼬리 애가 잦아 짝 부르는 소리/ 영주 방장 봉래산이 쩌르릉 흔들린다.// 아침 날 늦은 안개 교룡산성 두르고/ 아아라한 지리산 꿈이런 듯 멀어라/ 철철철 요천수 녹음을 누비면서/ 은하 흘러가듯 휘휘 칭칭 감도누나// 광한루 삽작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낙락장송에 뒤덥인 산천이 고울시고/ 방초도 꽃도곤 좋아 언덕엔 실바람인데/ 어디서 뚜욱 뚝 모란 지는 소리 들려라.// 삼백예순 날을 오작교에 묻고 가는/ 견우직녀의 설운 정을 모르리까?/ 새우던 그 밤에도 별은 깔렸으리/ 희뜩 나비 한 마리 소리 없이 스쳐간다.// 춘정을 시새워하는 건 꾀꼬리만도 아니어/ 도도한 취흥에 이도령도 흥에 겨워/ 주안상 밀어놓고 시흥에 잠겼어라/ 고물고물 단청인데 풍경도 울어 예고......// 오월도 단오절은 일 년에 드문 가절/ 삼단같은 검은 머리 두 귀를 눌러 빗고/ 향단이 앞세운 춘향의 추천 나들이에/ 버들도 간지러워 하늘하늘 흔들린다.// 예서 비롯한 아기자기한 사랑이사/ 우리 가슴에 예부터 지녀온 것/ 충신은 불사이군이요 열녀는 불경이부란/ 제나라 왕촉의 허튼 주정이지......// 벼슬아치 토호들의 가렴주구 속에/ 시달린 백성들의 뜨거운 가슴인데/ 정절은 양반놈의 독차지는 아니어/ 월매딸 춘향이가 찾아낸 값진 권리.// 천인혈로 금준에 미주를 담지 말라./ 만성고로 옥반에 가효도 놓지 말라./ 다시는 촉루지는 속에 민루를 지게 말라./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을 못 듣느냐?// 옥문을 열고 나오는 무고한 백성들은/ 바로 빛나야 할 우리들의 내일이거늘/ 큰 칼 벗은 저 아리잠직한 춘향이를/ 우리들 오늘은 뜨거운 박수로 맞아 오자.//

저 하늘을 우러러 보는 뜻은 / 신석정
우리 모두들/ 고이 지녀온/ 마음을 잃은 지 오래로다.// 한때/ 대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밀화부리 노래와 이웃하던/ 그 조촐한 마음 잃은 지 오래로다.// 찔레꽃 짙은 향기에 젖어/ 오월 하늘을 비상하던/ 아아 거울같이 맑은/ 그 마음 잃은 지 오래로다.// 아무리/ 검은 손이 우리 눈을 가리고/ 우리 마음을 가릴지언정/ 차마 어둠을 이웃할 수는 없거늘// 오늘은/ 저문 강가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그 안쓰러운 우리 마음을 찾아/ 어서 출발을 서두를 때로다.// 하여/ 저 하늘을 우러러 보는 뜻은/ 잃어버린 마음을 그리워하는 까닭이로다.//

오한(惡寒) / 신석정
어둔/ 벌판에서는/ 눅대 떼가 울고 있었다.// 대화도 앗아간 가슴에/ 채곡채곡 쌓이는/ 잃어버린 새벽의 찌꺼길 안고/ 무딜 대로 무딘 혓바닥을 깨물면서/ 우리들은/ 역시 어둔 벌판에서 불어대는/ 잔인한 늑대 떼의/ 잔인한 울음소릴/ 듣고 있었다.// 사뭇/ 하늘이 누렇게 고여 드는/ 눈망울 저 속 깊이/ 아직은 파랗게 남은/ 한 조각 하늘을 데불고/ 비만한 어둠에 몰려간/ 싸늘하게 식어가는 대낮을/ 아아 그 눈망울만은/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허덕이면서/ 거꾸러지면서/ 되쳐 일어나면서/ 시체 된 대낮의 엉뚱하게 높은/ 그 언덕을 넘어가면서/ 으스스 오는 오한을/ 우린 자랑하면서 살아도 좋다.//그러기에/ 한 번도 외롭다고 말한 적이 없다.//

떠나는 길에 눈이 나려 -소년 <伯>이에게 주는 詩 / 신석정
네가 떠나는 길에 눈이 나려/ 흰눈이 나려…/ 나려서 쌓여…// 희고 찬 달이 숨고/ 무수한 별마저 숨어/ 눈만 나리는 밤/ 눈만 쌓이는 밤// 소년 백(伯)이는/ 동백꽃 같이 타는 꿈을 지니고/ 멀지 않어 화려한 <명일>이 온다고/ 쓸쓸한 이 고을을 떠나 버렸다// 입술을 깨물면서 떠나는 <백>이는 소년이면서 벌서 소년은 아니었다// <백>이/ 너를 보내고 돌아서는 두청년 아버지와 나의 앞에는/ 한사람의 단 한사람의 <카츄샤>도 없건만/ 조만간 끝없이 끝없이 걸어가야할/ <슬픈 서백리아>만 하늘밖에 아득 하였었다// <백>이 떠나는 길에 <백>의 꿈이 떠나는길에/ 눈은 나려 나려서 쌓이는데…/ 눈만 나려 소리없이 쌓이는데…//

 




신석정(辛夕汀, 1907년~1974년) 시인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는 석정(夕汀)이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했다.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작품활동을 본격화, 그해에 《선물》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혔다. 8 ·15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저서로 《촛불》(1939), 《슬픈 목가(牧歌)》(1947),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을 간행했다. 전형적인 자연 시인이라 불리는 그의 작품은 심화된 자연숭배의 사상이 짙고 특히 산을 즐기고 산에서 배우며, 산을 사유하면서 자연을 노래한, 소박하고 간결한 형식이 많았는데, 후기에 와서는 인생과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14〉 시인 辛夕汀의 후손들

“韓醫와 佛典 버리고 詩의 길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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