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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육사 시인

부흐고비 2021. 6. 15. 08:20

광야(曠野)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독백 / 이육사
운모(雲母)처럼 희고 찬 얼굴/ 그냥 주검에 물든 줄 아나/ 내 지금 달 아래 서서 있네// 돛대보다 높다란 어깨/ 얕은 구름쪽 거미줄 가려/ 파도나 바람을 귀밑에 듣네// 갈매긴 양 떠도는 심사/ 어데 하난들 끝간 델 아리/ 오롯한 사념(思念)을 기폭(旗幅)에 흘리네// 선창(船窓)마다 푸른 막 치고/ 촛불 향수(鄕愁)에 찌르르 타면/ 운하(運河)는 밤마다 무지개 지네// 박쥐 같은 날개나 펴면/ 아주 흐린 날 그림자 속에/ 떠서는 날쟎는 사복이 됨세// 닭소리나 들리면 가랴/ 안개 뽀얗게 나리는 새벽/ 그곳을 가만히 나려서 감세//

실제(失題) / 이육사
하늘이 높기도 하다/ 고무 풍선 같은 첫겨울 달을/ 누구의 입김으로 불어올렸는지?/ 그도 반넘어 서쪽에 기울어졌다// 행랑 뒷골목 호젓한 상술집엔/ 팔려 온 冷害地處女(냉해지처녀)를 둘러싸고/ 大學生(대학생)의 지질숙한 눈초리가/ 思想善導(사상선도)의 염탄꾼 밑에 떨고 있나// 라디오의 修養講話(수양강화)가 끝이 났는지?/ 마ㅡ장 俱樂部(구락부) 문간은 하품을 치고/ 빌딩 돌담에 꿈을 그리는 거지새끼만/ 이 都市(도시)의 良心(양심)을 지키나보다// 바람은 밤을 집어삼키고/ 아득한 까스 속을 흘러서가니/ 거리의 주인공인 해태의 눈깔은/ 언제나 말갛게 푸르러 오노//

해후 / 이육사
모든 별들이 비취계단(翡翠階段)을 나리고 풍악소래 바루 조수처럼/ 부푸러 오르던 그밤 우리는 바다의 전당(殿堂)을 떠났다// 가을 꽃을 하직하는 나비모냥 떨어져선 다시 가까이 되돌아 보곤/ 또 멀어지던 흰 날개우엔 볕ㅅ살도 따겁더라// 머나먼 기억(記憶)은 끝없는 나그네의 시름속에 자라나는/ 너를 간직하고 너도 나를 아껴 항상 단조한 물껼에 익었다// 그러나 물껼은 흔들려 끝끝내 보이지 않고 나조차/ 계절풍(季節風)의 넋이 가치 휩쓸려 정치못 일곱 바다에 밀렸거늘// 너는 무삼 일로 사막(沙漠)의 공주(公主)같아 연지(脂)찍은 붉은 입술을/ 내 근심에 표백(漂白)된 돛대에 거느뇨 오―안타까운 신월(新月)/ 때론 너를 불러 꿈마다 눈덮인 내 섬속 투명(透明)한 영락(玲珞)으로/ 세운 집안에 머리 푼 알몸을 황금(黃金) 항쇄(項鎖) 족쇄(足鎖)로 매여 두고// 귀ㅅ밤에 우는 구슬과 사슬 끊는 소리 들으며 나는 일흠도/ 모를 꽃밭에 물을 뿌리며 머―ㄴ 다음 날을 빌었더니// 꽃들이 피면 향기에 취(醉)한 나는 잠든 틈을 타/ 너는 온갖 화판(花瓣)을 따서 날개를 붙이고 그만 어데로 날러 갔더냐// 지금 놀이 나려 선창(船窓)이 고향(故鄕)의 하늘보다 둥글거늘/ 검은 망토를 두르기는 지나간 세기(世紀)의 상장(喪章)같애 슬프지 않은가// 차라리 그 고은 손에 흰 수건을 날리렴 허무(虛無)의 분수령(分水嶺)에/ 앞날의 기(旗)빨을 걸고 너와 나와는 또 흐르자 부끄럽게 흐르자//

남한산성 / 이육사
넌 帝王에 길드린 蛟龍/ 化石되는 마음에 잇기가 끼여// 昇天하는 꿈을 길러준 洌水/ 목이 째지라 울어 예가도// 저녁 놀빛을 걷어 올리고/ 어데 비바람 잇슴즉도 안해라//

산 / 이육사
바다가 수건을 날여 부르고/ 난 단숨에 뛰여 달여서 왔겠죠// 천금(千金)같이 무거운 엄마의 사랑을/ 헛된 항도(航圖)에 역겨 보낸날// 그래도 어진 태양(太陽)과 밤이면 뭇별들이/ 발아래 깃드려 오고// 그나마 나라나라를 흘러 다니는/ 뱃사람들 부르는 망향가(望鄕歌)// 그야 창자를 끊으면 무얼하겠오//

교목(喬木) /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리//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湖水)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호수(湖水) / 이육사
내어달리고 저운 마음이련마는/ 바람에 씻은 듯 다시 명상하는 눈동자// 때로 백조를 불러 휘날려 보기도 하건만/ 그만 기슭을 안고 돌아누워 흑흑 흐느끼는 밤// 희미한 별 그림자를 씹어 놓이는 동안/ 자주빛 안개 가벼운 명상(暝想)같이 나려 씌운다//

절정(絶頂) / 이육사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일식(日蝕) / 이육사
쟁반에 먹물을 담아 비쳐본 어린 날/ 불개는 그만 하나밖에 없는 내 날을 먹었다// 날과 땅이 한줄 우에 돈다는 그 순간(瞬間)만이라도/ 차라리 헛말이기를 밤마다 정녕 빌어도 보았다// 마침내 가슴은 동굴(洞窟)보다 어두워 설레인고녀/ 다만 한 봉오리 피려는 장미(薔薇) 벌레가 좀치렸다// 그래서 더 예쁘고 진정 덧없지 아니하냐/ 또 어데 다른 하늘을 얻어 이슬 젖은 별빛에 가꾸련다.//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아편 / 이육사
나릿한 남만(南蠻)의 밤/ 번제(燔祭)의 두렛불 타오르고// 옥(玉)돌보다 찬 넋이 있어/ 홍역(紅疫)이 만발하는 거리로 쏠려// 거리엔 「노아」의 홍수(洪水) 넘쳐나고/ 위태한 섬 우에 빛난 별 하나// 너는 그 알몸동아리 향기를/ 봄바다 바람 실은 돛대처럼 오라// 무지개같이 황홀(恍惚)한 삶의 광영(光榮)/ 죄(罪)와 곁드려도 삶직한 누리.//

반묘(班猫) / 이육사
어느 사막의 나라 유폐된 후궁(后宮)의 넋이기에/ 몸과 마음도 아롱져 근심스러워라.// 칠색(七色) 바다를 건너서 와도 그냥 눈동자에/ 고향의 황혼을 간직해 서럽지 않뇨.// 사람의 품에 깃들면 등을 굽히는 짓새/ 산맥을 느낄사록 끝없이 게을러라.// 그 적은 포효는 어느 조선(祖先) 때 유전이길래/ 마노(瑪瑙)의 노래야 한층 더 잔조우리라.// 그보다 뜰 아래 흰나비 나즉이 날아올 땐/ 한낮의 태양과 튜립 한 송이 지킴직하고//

꽃 /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방울 나리쟎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없는 날이여// 북(北)쪽「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라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파초 / 이육사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海月)처럼 게을러 은(銀)빛 물결에 뜨나니// 파초(芭蕉)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닷 타는 입술을 축여주렴// 그 옛적 『사라센』의 마지막 날엔/ 기약(期約)없이 흩어진 두 낱 넋이었어라// 젊은 여인(女人)들의 잡아 못 논 소매끝엔/ 고운 손금조차 아직 꿈을 짜는데// 먼 성좌(星座)와 새로운 꽃들을 볼 때마다/ 잊었던 계절(季節)을 몇 번 눈 우에 그렷느뇨// 차라리 천년(千年) 뒤 이 가을밤 나와 함께/ 빗소리는 얼마나 긴가 재어보자// 그리고 새벽하늘 어데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어지세//

강 건너간 노래 / 이육사
섣달에도 보름ᄭᅦ 달발근밤/ 압내江 ᄶᅢᆼᄶᅢᆼ어러 조이든밤에/ 내가부른 노래는 江건너갓소// 江건너 하늘ᄭᅳᆺ에 沙漠도 다은곳/ 내노래는 제비가티 날러서갓소// 못이즐 게집애 집조차 업다기에/ 가기는 갓지만 어린날개 지치면/ 그만 어느모래불에 ᄯᅥ러져 타서죽겟죠// 沙漠은 ᄭᅳᆺ업시 푸른하늘이 덥혀/ 눈물 먹은 별들이 조상오는밤// 밤은옛일을무지개 보다곱게 ᄶᅡ내나니/ 한가락 여기두고 ᄯᅩ한가락 어데맨가/ 내가부른 노래는 그밤에 江건너 갓소//

나의뮤-즈 / 이육사
아주 헐벗은 나의 뮤―즈는/ 한번도 기야 싶은 날이 없어/ 사뭇 밤만을 왕자(王者)처럼 누려왔소// 아무것도 없는 주제언만도/ 모든 것이 제 것인듯 버티는 멋이야/ 그냥 인드라의 영토(領土)를 날아도 다닌다오// 고향은 어데라 물어도 말은 않지만/ 처음은 정녕 북해안(北海岸) 매운 바람속에 자라/ 대곤(大鯤)을 타고 다녔단 것이 일생(一生)의 자랑이죠// 계집을 사랑커든 수염이 너무 주체스럽다도/ 취(醉)하면 행랑 뒷골목을 돌아서 다니며/ 복보다 크고 흰 귀를 자조 망토로 가리오// 그러나 나와는 몇 천겁(千劫) 동안이나/ 바루 비취(翡翠)가 녹아나는 듯한 돌샘가에/ 향연(饗宴)이 벌어지면 부르는 노래란 목청이 외곬수요// 밤도 지진하고 닭소래 들릴 때면/ 그만 그는 별 계단(階段)을 성큼성큼 올라가고/ 나는 촛불도 꺼져 백합(百合)꽃밭에 옷깃이 젖도록 잤소//

아미 -구름의 伯爵夫人 / 이육사
향수(鄕愁)에 철나면 눈섶이 기나니요/ 바다랑 바람이랑 그 사이 태어났고/ 나라마다 어진 풍속에 자랐겠죠.// 짓푸른 깁장(帳)을 나서면 그 몸매/ 하이얀 깃옷은 휘둘러 눈부시고/ 정녕 「왈쓰」라도 추실란가봐요.// 햇살같이 펼쳐진 부채는 감춰도/ 도톰한 손결야 교소(驕笑)를 가루어서/ 공주의 홀(笏)보다 깨끗이 떨리오.// 언제나 모듬에 지쳐서 돌아오면/ 꽃다발 향기조차 기억만 서러워라/ 찬 젓대소리에다 옷끈을 흘려보내고.// 촛불처럼 타오른 가슴속 사념(思念)은/ 진정 누구를 애끼시는 속죄(贖罪)라오/ 발 아래 가득히 황혼이 나우리치오// 달빛은 서늘한 원주(圓柱)아래 듭시면/ 장미(薔薇)쩌 이고 장미쪄 흩으시고/ 아련히 가시는 곳 그 어딘가 보이오.//

황혼 / 이육사
내 골ᆺ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메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십이 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쎄멘트 장판우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할 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ᆺ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정정히 사라지긴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보다//

노정기(路程記) /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여진 배쪼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을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틔끌만 오래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였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것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짱크」와 같애/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프러 올랐다.// 항상 흐렸한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쌋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빠즌 소라 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들여다보며//

근하 석정선생 륙순 / 이육사
천수가 이 늙은이에게 육순이 되었으니/ 맑은 얼굴에 흰머리 앉음새가 새로워라/ 지내온 한세상 느낌이 많을 텐데/ 멀리 고향산이 꿈에 자주 오더라//

주난흥여(酒暖興餘) / 이육사
술기운과 시정(時情)이 두 가지 한창인데/ 북두성은 돌고 달은 난간에 가득하다/ 하늘 끝 만리 뜻을 아는 이 있으니/ 늙은 돌 맑은 안개가 나로 하여금 차게 하더라//

말 / 이육사
흣트러진 갈기/ 후주군한 눈/ 밤송이 가튼 털/ 오! 먼길에 지친 말/ 채죽에 지친 말이여!// 수굿한 목통/ 축-처진 꼬리/ 서리에 번적이는 네굽/ 오! 구름을 헷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힌말이여!//

광인의 태양 / 이육사
분명 라이풀 선(線)을 튕겨서 올라/ 그냥 화화(火華)처럼 살아서 곱고// 오랜 나달 연초(煙硝)에 끄스른/ 얼굴을 가리션 슬픈 공작선(孔雀扇)// 거칠은 해협(海峽)마다 흘긴 눈초리/ 항상 요충지대(要衝地帶)를 노려가다//

화제(畵題) / 이육사
도회(都會)의 검은 능각(稜角)을 담은/ 수면(水面)은 이랑이랑 떨여/ 하반기(下半旗)의 새벽같이 서럽고/ 화강석(花崗石)에 어리는 기아(棄兒)의 찬꿈/ 물풀을 나근나근 빠는/ 담수어(淡水魚)의 입맛보다 애닲어라//

바다의 마음 / 이육사
물새 발톱은 바다를 할퀴고/ 바다는 바람에 입김을 분다./ 여기 바다의 은총이 잠자고 있다.// 흰돛(白帆)은 바다를 칼질하고/ 바다는 하늘을 간질러본다./ 여기 바다의 아량이 간직여 있다.// 낡은 그물은 바다를 얽고/ 바다는 대륙을 푸른 보로 싼다./ 여기 바다의 음모가 서리어 있다.//

만등동산(晩登東山) / 이육사
천석(泉石) 좋은 곳을 택하여/ 서로 즐겨서 서울에 같이 있더라/ 술잔을 드니 마음이 큰 것을 자랑하고/ 해가 다 지도록 높은 곳에 올랐더라/ 산이 깊으니 새의 지껄임이 차고/ 시(詩)를 이무래 밤빛이 푸르러라/ 돌아가는 배가 왜 이리 급한가/ 별과 달이 천지에 가득하다//

잃어진 고향 / 이육사
제비야/ 너도 고향(故鄕)이 있느냐// 그래도 강남(江南)을 간다니/ 저노픈 재우에 힌 구름 한쪼각// 제깃에 무드면/ 두날개가 촉촉이 젓겠구나// 가다가 푸른숲우를 지나거든/ 홧홧한 네 가슴을 식혀나가렴// 불행(不幸)이 사막(沙漠)에 떠러져 타죽어도/ 아이서려야 않겠지// 그야 한떼 나라도 홀로 높고 빨라/ 어느때나 외로운 넋이였거니// 그곳에 푸른하늘이 열리면/ 엇저면 네새고장도 될법하이.//

서풍 / 이육사
서릿빛을 함북 띠고/ 하늘 끝없이 푸른 데서 왔다.// 강(江)바닥에 깔려 있다가/ 갈대꽃 하얀 우를 스쳐서.// 장사(壯士)의 큰 칼집에 숨어서는/ 귀향가는 손의 돛대도 불어주고.// 젊은 과부의 뺨도 희던 날/ 대밭에 벌레소릴 가꾸어놓고.// 회한(悔恨)을 사시나무 잎처럼 흔드는/ 네 오면 불길(不吉)할 것 같아 좋아라.//

소공원 / 이육사
한낮은 햇발이/ 백공작(百孔雀) 꼬리 위에 함북 퍼지고// 그넘에 비둘기 보리밭에 두고 온/ 사랑이 그립다고 근심스레 코고을며// 해오래비 청춘(靑春)을 물가에 흘려 보냈다고/ 쭈그리고 앉아 비를 부르건마는// 흰 오리 떼만 분주히 미끼를 찾아/ 자무락질치는 소리 약간 들리고// 언덕은 잔디밭 파라솔 돌리는 이국소녀(異國少女) 둘/ 해당화(海棠花) 같은 뺨을 돌려 망향가(望鄕歌)도 부른다.//

연보(年譜) / 이육사

'너는 돌다리목에 줘왔다'던/ 할머니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나는 진정 강(江)언덕 그 마을에/ 버려진 문받이였은지 몰라?//

그러기에 열여덟 새봄은/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보내고// 첫사랑이 흘러간 항구(港口)의 밤/ 눈물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공명이 마다곤들 언제 말이나 했나?/ 바람에 붙여 돌아온 고장도 비고// 서리밟고 걸어간 새벽길 우에/ 간(肝)입만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쇠사슬을 잡아맨 듯 무거워졌다// 눈 우에 걸어가면 자욱이 지리라고/ 때로는 설래이며 파람도 불지//


춘수삼제(春愁三題) / 이육사
1/ 이른 아침 골목길을 미나리 장수가 길게 외고 갑니다./ 할머니의 흐린 동자(瞳子)는 창공(蒼空)에 무엇을 달리시는지,/ 아마도 ×에 간 맏아들의 입맛(味覺)을 그려나보나 봐요.// 2/ 시냇가 버드나무 이따금 흐느적거립니다,/ 표모(漂母)의 방망이 소린 왜 저리 모날까요,/ 쨍쨍한 이 볕살에 누더기만 빨기는 짜증이 난 게죠.// 3/ 빌딩의 피뢰침(避雷針)에 아즈랑이 걸려서 헐떡거립니다,/ 돌아온 제비떼 포사선(抛射線)을 그리며 날려재재거리는 건,/ 깃들인 옛집터를 찾아 못 찾는 괴롬 같구려//

서울 / 이육사
어떤 시골이라도 어린애들은 있어 고놈들 꿈결조차/ 잊지 못할 자랑속에 피어나 황홀하기 장미(薔薇)빛 바다였다.// 밤마다 야광(夜光)충들의 고운 불 아래 모여서 영화로운 잔체와/ 쉴새없는 해조(諧調)에 따라 푸른 하늘을 꾀했다는 이야기.// 온 누리의 심장을 거기에 느껴 보겠다고 모든 길과 길들/ 핏줄같이 엉클여서 역(驛)마다 느릅나무가 늘어서고// 긴 세월이 맴도는 그 판에 고추 먹고 뱅―뱅 찔레 먹고/ 뱅―뱅 넘어지면 「맘모스」의 해골(骸骨)처럼 흐르는 인광(憐光) 길다랗게.// 개아미 마치 개아미다 젊은놈들 겁이 잔뜩 나 차마 차마/ 하는 마음은 널 원망에 비겨 잊을 것이었다 깍쟁이.// 언제나 여름이 오면 황혼의 이 뿔따귀 저 뿔따귀에/ 한 줄씩 걸쳐매고 짐짓 창공에 노려대는 거미집이다 텅 비인.// 제발 바람이 세차게 불거든 케케묵은 먼지를 눈보라마냥/ 날려라 녹아나리면 개천에 고놈 살모사들 승천을 할는지.//

초가 / 이육사
구겨진 하늘은 묵은 얘기책을 편 듯/ 돌담울이 古城(고성)같이 둘러싼 산기슭/ 박쥐 나래 밑에 황혼이 묻혀오면/ 초가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지고/ 고향을 그린 墨畵(묵화) 한 폭 좀이 쳐.// 띄염띄염 보이는 그림 쪼각은/ 앞밭에 보리밭에 말매나물 캐러 간/ 가시네는 가시네와 종달새 소리에 반해/ 빈 바구니 차고 오긴 너무도 부끄러워/ 술레짠 두 뺨 우에 모매꽃이 피었고.// 그네줄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더니/ 앞내江에 씨레나무 밀려나리면/ 젊은이는 젊은이와 뗏목을 타고/ 돈벌러 항구로 흘러간 몇 달에/ 서릿발 잎져도 못 오면 바람이 분다.// 피로 가꾼 이삭에 참새로 날아가고/ 곰처럼 어린 놈이 북극을 꿈꾸는데/ 늙은이는 늙은이와 싸우는 입김도// 벽에 서려 성애 끼는 한겨울 밤은/ 동리의 密告者(밀고자)인 강물조차 얼붙는다.//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 이육사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 개의 별을// 십이성좌(十二星座) 그 숱한 별을 어찌나 노래하겠니// 꼭 한 개의 별! 아침 날 때 보고 저녁 들 때도 보는 별/ 우리들과 아-주 친(親)하고 그 중 빛나는 별을 노래하자/ 아름다운 미래(未來)를 꾸며 볼 동방(東方)의 큰 별을 가지자//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지구(地球)를 갖는 것/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에서/ 한 개의 새로운 지구(地球)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목안에 핏대를 올려가며 마음껏 불러 보자// 처녀의 눈동자를 느끼며 돌아가는 군수야업(軍需夜業)의 젊은 동무들/ 푸른 샘을 그리는 고달픈 사막(沙漠)의 행상대(行商隊)도 마음을 축여라/ 화전(火田)에 돌을 줍는 백성(百姓)들도 옥야천리(沃野里)를 차지하자// 다 같이 제멋에 알맞는 풍양(豊穰)한 지구(地球)의 주재자(主宰者)로/ 임자 없는 한 개의 별을 가질 노래를 부르자// 한 개의 별 한 개의 지구(地球) 단단히 다져진 그 땅 위에/ 모든 생산(生産)의 씨를 우리의 손으로 휘뿌려 보자/ 앵속(罌粟)처럼 찬란한 열매를 거두는 찬연(餐宴)엔/ 예의에 끄림없는 반취(半醉)의 노래라도 불러 보자// 염리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신(神)이란 항상 거룩합시니/ 새 별을 찾아가는 이민들의 그 틈엔 안 끼여 갈 테니/ 새로운 지구(地球)엔 단죄(罪) 없는 노래를 진주(眞珠)처럼 흩이자//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다만 한 개의 별일망정/ 한 개 또 한 개의 십이성좌(十二星座) 모든 별을 노래하자//

편복(蝙蝠) / 이육사
광명(光明)을 배반(背反)한 아득한 동굴(洞窟)에서/ 다 썩은 들보라 무너진 성채(城砦) 위 너 홀로 돌아다니는/ 가엾은 박쥐여! 어둠에 왕자(王者)여!/ 쥐는 너를 버리고 부자집 고(庫)간으로 도망했고/ 대붕(大鵬)도 북해(北海)로 날아간 지 이미 오래거늘/ 검은 세기(世紀)에 상장(喪裝)이 갈갈이 찢어질 긴 동안/ 비둘기같은 사랑을 한 번도 속삭여 보지도 못한/ 가엾은 박쥐여! 고독(孤獨)한 유령(幽靈)이여!// 앵무와 함께 종알대어 보지도 못하고/ 딱짜구리처럼 고목(古木)을 쪼아 울리도 못 하거니/ 만호보다 노란 눈깔은 유전(遺傳)을 원망한들 무엇하랴// 서러운 주교(呪交)일사 못 외일 고민(苦悶)의 이빨을 갈며/ 종족(種族)과 홰를 잃어도 갈 곳조차 없는/ 가엾은 박쥐여! 영원(永遠)한 「보헤미안」의 넋이여!// 제 정열(情熱)에 못 이겨 타서 죽는 불사조(不死鳥)는 아닐망정/ 공산(空山) 잠긴 달에 울어 새는 두견(杜鵑)새 흘리는 피는/ 그래도 사람의 심금(心琴)을 흔들어 눈물을 짜내지 않는가!/ 날카로운 발톱이 암사슴의 연한 간(肝)을 노려도봤을/ 너의 머―ㄴ 조선(祖先)의 영화(榮華)롭던 한시절 역사(歷史)도/ 이제는「아이누」의 가계(家系)와도 같이 서러워라!/ 가엾은 박쥐여! 멸망(滅亡)하는 겨레여!/ 운명(運命)의 제단(祭壇)에 가늘게 타는 향(香)불마자 꺼젓거든/ 그많은 새즘승에 빌붓칠 애교(愛嬌)라도 가젓단말가?/ 상금조(相琴鳥)처럼 고흔 뺨을 채롱에 팔지도 못하는 너는/ 한토막 꿈조차 못꾸고 다시 동굴(洞窟)로 도라가거니/ 가엽슨 빡쥐여! 검은 화석(化石)의 요정(妖精)이여!//
* 편복(蝙蝠) : 박쥐
 
해조사(海潮詞) / 이육사
동방(洞房)을 찾아드는 신부(新婦)의 발자취같이/ 조심스리 걸어오는 고이한 소리!/ 해조(海潮)의 소리는 네모진 내 들창을 열다./ 이 밤에 나를 부르는 이 없으련만?// 남생이 등같이 외로운 이 서-ㅁ 밤을/ 싸고 오는 소리! 고이한 침략자(侵略者)여!/ 내 보고(寶庫)를, 문을 흔드는 건 그 누군고?/ 영주(領主)인 나의 한 마디 허락도 없이,/ <코-가사스> 평원(平原)을 달리는 말굽 소리보다/ 한층 요란한 소리! 고이한 약탈자(略奪者)여!// 내 정열(情熱)밖에 너들에 뺏길 게 무엇이료./ 가난한 귀향살이 손님은 파리하다.// 올 때는 왜 그리 호기롭게 몰려 와서/ 너들의 숨결이 밀수자(密輸者)같이 헐데느냐/ 오- 그것은 나에게 호소(呼訴)하는 말 못할 울분(鬱憤)인가?/ 내 고성(古城)엔 밤이 무겁게 깊어가는데.// 쇠줄에 끌려 걷는 수인(囚人)들의 무거운 발소리!/ 옛날의 기억(記憶)을 아롱지게 수(繡)놓는 고이한 소리!/ 해방(解放)을 약속(約束)하든 그날 밤의 음모(陰謀)를/ 먼동이 트기 전 또다시 속삭여 보렴인가?// 검은 벨을 쓰고 오는 젊은 여승(女僧)들의 부르짖음/ 고이한 소리! 발밑을 지나며 흑흑 느끼는건/ 어느 사원(寺院)을 탈주(脫走)해 온 어여쁜 청춘(靑春)의 반역(反逆)인고?/ 시들었던 내 항분(亢奮)도 해조(海潮)처럼 부풀어 오르는 이 밤에// 이 밤에 날 부를 이 없거늘! 고이한 소리!/ 광야(廣野)를 울리는 불 맞은 사자(獅子)의 신음(呻吟)인가?/ 오 소리는 장엄(莊嚴)한 네 생애(生涯)의 마지막 포호(咆哮)!/ 내 고도(孤島)의 매태 낀 성곽(城郭)을 깨뜨려 다오!// 산실(産室)을 새어나는 분만(分娩)의 큰 괴로움!/ 한밤에 찾아올 귀여운 손님을 맞이하자/ 소리! 고이한 소리! 지축(地軸)이 메지게 달려와/ 고요한 섬 밤을 지새게 하는고녀.// 거인(巨人)의 탄생(誕生)을 축복(祝福)하는 노래의 합주(合奏)!/ 하늘에 사무치는 거룩한 기쁨의 소리!/ 해조(海潮)는 가을을 불러 내 가슴을 어루만지며/ 잠드는 넋을 부르다. 오- 해조(海潮)! 해조(海潮)의 소리!//

소년에게 / 이육사
차듸찬 아침이슬/ 진주가 빛나는 못가/ 연꽃 하나 다복히 피고// 소년아 네가 낳다니/ 맑은 넋에 깃드려/ 박꽃처럼 자랐세라// 큰강 목놓아 흘러/ 여울은 흰 돌쪽마다/ 소리 석양을 새기고// 너는 준마(駿馬) 달리며/ 죽도(竹刀) 져 곧은 기운을/ 목숨같이 사랑했거늘// 거리를 쫓아 단여도/ 분수(噴水)있는 풍경속에/ 동상답게 서봐도 좋다// 서풍 뺨을 스치고/ 하늘 한가 구름 뜨는곳/ 희고 푸른 지음을 노래하며// 그래 가락은 흔들리고/ 별들 춥다 얼어붙고/ 너조차 미친들 어떠랴//

자야곡(子夜曲) / 이육사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우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래 치쟎으면 못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소리// 숨막힐 마음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들리라//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우에 이끼만 푸르리라.//
 




이육사(李陸史, 1904년~1944년) 시인
호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또는 원삼(源三), 개명은 활(活). 경북 안동(安東) 출생.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때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이육사가 죽은 후, 1년 뒤에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그 후, 1946년 신석초를 비롯한 문학인들에 의해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고,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다.

 

[안동 선비정신의 미학(8)] 퇴계 이황 14대손으로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육사

나라 되찾을 일념 펜 대신 총을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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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로 살점 떼내는 고문도…이육사의 마지막 인사 “다녀오마”

[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13> 나의 아버지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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