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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머리 위의 근심 / 김영인

부흐고비 2021. 6. 15. 09:13

이층 아주머니가 이사 갔다. 나는 곧 뜰의 배경을 바꾸듯 새 손님맞이 할 준비를 했다. 오래된 난방 배관을 촘촘하게 깔고, 외풍을 막으려 벽에 석고보드도 댔다. 기름보일러를 가스보일러로 바꾸고, 도배도 새로 하고 장판도 깔았다.

여러 부동산에 세를 내놓으며 조용한 사람을 부탁했다. 육십 대 부부가 와서 집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이층을 설핏 보고 내려오더니 나를 위아래로 쭉 훑어본 후 대문을 나갔다. 며칠 뒤에는 노모와 둘이 산다는 사십 대 남자가 집을 보러 왔다. 술에 찌든 것처럼 얼굴이 퍼석퍼석했고 표정도 어두웠다. 여러 사람이 다녀갔다. 나는 사람을 고르고 오는 사람은 집을 골랐다. 그러는 사이에 서로 적합한지 여러 잣대를 들이대었다.

어느 날 사십 대 아주머니가 혼자 집을 보러 왔다. 우리네 옛 시골 아낙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내 친구 엄마와 닮아 보였다. 자그마한 키에 펑퍼짐한 몸매, 둥글고 까무잡잡한 얼굴, 짧은 파마머리, 마늘 한 쪽을 엎어놓은 듯 나지막한 코, 자글자글한 눈가 주름,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눈. 왠지 가까이서 오래 보고 산 듯 친근감이 들었다.

그녀가 한동안 잊히지 않았다. 방을 구하지 못했으면 한번 오시라고 전화를 했다. 며칠 후 차를 마시면서 그녀는 무언가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자신은 정부의 임대 지원금을 받고 있다며, 주택공사와도 계약해야 하는데 그래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무척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처지가 어려운 것 같아 선뜻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한 대문을 쓰게 되었다.

따뜻한 커피를 타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삿짐을 싣고 온 인부 두 사람과 그녀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냥 내려오기가 미안하여 포장된 상자를 풀려고 하자 화들짝 놀라며 도움을 거절했다. 그녀에게 열쇠 꾸러미를 건네며 불편한 점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내려왔다.

그 뒤로 우리는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저 전화로 불편한 점은 없는지에 대해 몇 마디 나눴을 뿐이다. 차 한잔하고 싶어 몇 번 올라갔는데 불만 켜진 채였다. 이층은 늘 잠잠했다. 얇은 천장을 울리는 발걸음도, 기분 좋게 시끄러운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배수관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이 산다면 당연히 들려야 할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온갖 상상이 떠올랐다.

그 상상 속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이 무서운 모습으로 튀어나와 밤낮으로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마음이 잡히지 않아 그토록 좋아하는 책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이층 세놓는 문제로 남편과 몇 번 다툰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집안 형편은 생각지도 않고 조용한 사람만 찾는다며 화를 냈었다. 남편 말대로 너무 예민하게 고른 탓에 생각지도 않은 큰 근심을 이고 사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계약 당시에도 어딘가 불안감이 스민 그녀의 몸짓과 중학생이라던 작은아이가 어느 학교에 재학 중이냐고 물어도 대답 없던 거며, 어느 날 전화 한 통 없이 방문한 것이며, 연락 없이 입주 예정일을 앞당겨 이삿짐을 옮겨왔던 일들이 나의 상상을 점점 부풀렸다. 그들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눈과 귀를 대문에만 모았다. 철컥, 열쇠 따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대문을 조용히 밀고 들어왔다. 안방 창문으로 달려갔다. 대문이 훤히 내다보이는 거실 창으로는 그들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함이 그렇게 만들었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그녀와 함께 들어올 남자와 아이들이었다. 열서넛 안팎으로 보이는 키가 작은 사내아이만 뒤따랐다. 작은 키에 뚱뚱한 몸, 납작한 얼굴, 느릿한 몸짓으로 보아 일반인보다 21번 염색체가 한 개 더 많다는 다운증후군으로 보였다. 그녀는 아이의 손을 잡고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의 발자국에 귀를 기울이다가, 아이를 감추듯 살금살금 올라간 그녀를 떠올리니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뭔가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수없이 오갔던 감정이 스르르 무너지면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깊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가 지금까지 조용하게 드나들었던 이유는 그런 아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주인인 내가 행여 싫은 내색이라도 비출까 봐 두려워하는지도 몰랐다. 문득 그녀와 다를 바 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나의 언니 오빠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나보다 더 큰 근심을 이고 산다. 경제적 어려움과 육체적 고통은 둘째다. 곳곳에 도사린 편견, 오해, 눈칫밥, 눈칫세 등이 그녀의 등을 먼저 할퀸다. 그것들 앞에 그저 눈감고 귀 막고 입 다문다. 상처의 깊이만큼 장애아들과 술 중독 남편을 깊이 보듬었을 것이다. 표정을 죽여야만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무표정 무감각이 그녀를 온통 덮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층 가족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였다. 방과 후 매번 우리 초인종을 누르거나, 아무도 없으면 대문 앞이나 베란다에 변을 싸버리는 아이의 행동도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었다. 몇 달 후에는 알코올 중독이 조금 나아진 그녀의 남편이 병원에서 퇴원해왔다. 생각보다 선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나타난 그녀의 딸도 예쁘고 발랄했다.

의심이 사라지면서 내 근심은 근심이 아닌 호사임을 알았다. 생활은 빠듯하지만 봄마다 새로운 꽃을 들여놓을 수 있는 작은 뜰, 성실한 남편, 건강하고 예쁜 두 딸, 책이 가득한 서재, 맘 내키면 언제든 산하를 누비고 올 수 있는 자유, 머리 위에 큰 근심을 인 채 살아가는 그녀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가볍고 호화로운 여자인가. 이웃의 삶에 무심한 채 편안함만 추구하며 살아온 내 모습이 보였다.

출근하는지 쿵, 쿵, 계단을 밟으며 그녀가 내려온다. 머리 위에 얹힌 근심은 끝없어 보이지만 허리끈 한 번 조이고 나면 그만이라는 듯 이제는 가뿐한 표정이다. 삶이란 그저 묵묵히 시간을 채우는 일에 불과하다는 듯이.

거실 창을 활짝 연다. 잎이 짙어져 가는 석류나무에 참새 떼들이 쉼 없이 오가며 지저귄다. 옆집 개도 덩달아 멍멍 짖는다. 앞집 창문 너머로 고등어 굽는 냄새가 솔솔 넘어온다. 오늘따라 유난히 머리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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