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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빈말 / 김상영

부흐고비 2021. 6. 15. 12:27

통제부 감찰실에서 근무하던 때였다. 해군본부에서 청렴도 측정업무 상태를 검열하러 내려왔다. 때는 바야흐로 서슬 퍼런 5공 시절이라 살얼음판 같았다. 삼청교육대를 운영하여 안녕과 질서에 역행하는 껄렁패를 무차별로 잡아넣던 시대였다. 철밥통으로 회자하던 공직사회를 정화한다며 청렴에 반하는 사람을 일벌백계하던 때이기도 했다. 어느 사안보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검열이었다.

수석 검열관이 누구신가를 공문을 받아 미리 알고 있던 감찰실장은 나를 검열장에 올려보냈다. 검열관 주○○ 대령, 교육사령부 교육훈련처장을 역임할 때 내가 모신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옛 부서장을 뵐 겸 검열장에 들어서며 구호와 함께 경례를 척 올려붙였다.

“필승!”

서류를 뒤적이던 주 대령님이 안경 너머로 나를 알아보며 미소 지었다. 못 보던 몇 년 새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셨다. 장교의 세계에서 감찰부서는 한직이었다. 잘해야 본전이요, 자칫 잘못하면 밉보이기에 십상인 보직이었다.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 터였다. 작전 계통으로 승승장구하지 못한 옛 상관이 안쓰러웠다.

“처장님, 많이 늙으셨습니다.”

기껏 반가워서 한다는 첫 마디가 그랬다. 주 대령님은 그렇지? 하는 듯 씁쓸한 표정이었다. 내가 잘했는지, 아니면 배려해 주셨는지 검열은 무탈하게 끝났다.

검열 결과를 고대하든 부서원들이 나를 주시했다. 지적보다 우수사항이 많을 거라는 내 보고에 저녁 회식을 잡으란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여담 삼아 그분과의 인연을 되새겼고, 많이 늙으셨네요. 하며 인사를 드렸단 얘기를 곁들였다. 나이 지긋한 군무원이 “김 상사, 그럴 땐 빈말이라도 여전하시다고 해야지!” 라며 철없는 나를 일깨웠다.

우리 마을 농사꾼 중엔 다리를 인공관절로 바꾼 아주머니가 수두룩하다. 허리를 수술한 이웃도 여럿이다. 제초제와 비닐이 일상화되기 전에 김매고 고추 따느라 골병이 드신 까닭이다.

복대를 의지한 채 땡볕 들판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보인다. 쉬어가며 재활을 해도 수월찮을 텐데, 할일이 태산인 거다. 신작로를 오가는 길에 덕담 삼아 말을 건넨다. 군대에서 겪은 일이 계기가 되어 빈말이라도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자세가 몸에 밴 것이다.

“○○댁은 여장부시더. 힘내소.”

그러면 아주머니도 아이고, 막걸리나 한잔 걸치고 앉았다 가라며 화답한다.

우리 동네 ○○상회 아주머니는 몹쓸 병마와 싸워 기사회생한 분이다. 며칠 전에 친정으로 피접 왔던 대구 딸네가 얘기한 바람에 엄청 위중했었음을 알게 되었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딸내미가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자 코로나가 겁이 나 시골 고향에서 며칠 묵다 갔다. 자식 농사는 집집이 어려운가 보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어머니 치료에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은 신약을 쓰느라 집 한 채 값이 들었다 해서 입이 떡 벌어졌다. 구약이고 신약이고 간에 독하긴 매일반이다. 먹으면 토하고 열에 들떠 그야말로 ‘매란 없는’ 아주머니의 예후에 안테나를 곤두세웠었다. 병색이 완연한데도 이웃들은 박한 말은 애써 삼가고 덕담으로 에둘렀다.

“할마시가 환자 맞나? 뭘 먹고 이리 부티가 날꼬.”

“간호사 딸내미 없는 사람 부러워 살 것나.”

아주머니는 괴로운 중에도 듣기엔 좋은지 각양각색 문병 음료수 상자를 헐어놓는 거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 교회 사택으로 목사님이 이사를 오셨다. 목사님은 사모님과 함께 두유 한 통을 사 들고 우리 집으로 인사를 왔고, 일요일 낮엔 백설기 좀 드시라며 야외탁자에 놓고 가셨다. 들일하는 이웃들에게도 음료수를 권하신다는 소문이 났다. 목사님 봉급이라야 박봉일 텐데 과분한 배려가 마음이 쓰였다. 드릴 게 마땅찮은 나는 내 글이 실린 책을 건네며 말했다.

“목사님, 참 잘 생겼네요.”

핸섬한 모습이 인상 깊어 드린 덕담이지 빈말이 아니었다. 그런 후에 아내 말을 전해 듣자 하니 글을 어찌 그리 맛깔나게 썼냐며 공치사를 하시더란다. 이 또한 빈말이 아닌가 싶다. 따지고 보면 참말 가고 빈말 온 격인데도 유쾌하다. 묵은 책이나마 한 권 더 드리고 싶어진다.

실속이 없는 헛된 말을 빈말이라 정의한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빈말인 줄 알면서도 듣길 원하니 사람살이 참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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