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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생진 시인

부흐고비 2021. 6. 22. 08:36
그리운 바다 성산포 [시집]  목차 1~81 

 

1. 바다를 본다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2. 설교하는 바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3. 끊을 수 없다
성산포에서는 끊어도 이어지는/ 바다 앞에서 칼을 갈 수 없다//
4. 모두 버려라
성산포에서는 지갑을/ 풀밭에 던지고 바다가/ 시키는 대로 옷을 벗는다//
5. 바다의 시녀
성산포에서는 바람은 바다의 시녀/ 사람은 바다의 곤충이고/ 태양은 바다의 화약인데/ 산만은 제 고집으로 한 천년 더 살리라//
6. 산
성산포에서는 언젠가/ 산이 바다에 항복하고/ 산도 바다처럼 누우리라//
7. 바다의 노예
성산포에서는/ 그 육중한 암벽이/ 바다의 노예임을 시인하고/ 자기네들의 멸망을 굽어본다//
8. 만년필
성산포에서는 관광으로 온/ 젊은 사원 하나가 만년필에/ 바닷물을 담고 있다//
9. 생사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죽기 좋은 곳/ 성산포에서는/ 생과 사가 손을 놓지 않아/ 서로 떨어질 수 없다//
10. 자살
성산포까지 와서 자살 한 번 못하고/ 돌아오는 비열 구기구기/ 두었다가 휴지로 쓸 것인가//

11. 절망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12. 술에 취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13. 바다의 성욕
성산포에서는 온종일 산삼을 먹어도/ 산만큼 성욕이 일지 않는다/ 성산포에서는 해삼을 아무리 먹어도/ 바다만큼 성욕이 일지 않는다//
14. 증거
성산포에서는 바다는/ 한 개의 물 나는 한 개의/ 물에서 수 만 가지 소리가 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하늘 되려다/ 실패한 증거도 있다.//
15. 색맹
성산포에서는 푸른색/ 이외에는 손대지 않는다/ 성산포에서는 색맹일지라도/ 바다를 빨갛게 칠할 순 없다//
16. 여유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짐승이 짐승보다 산이 산보다/ 바다가 더 높은 데서/ 더 깊은 데서 더 여유있게 산다//
17. 수많은 태양
아침 여섯 시/ 어느 동쪽에도/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필거야// 아침 여섯 시/ 태양은 수만 개/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와서 해를 보라/ 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해 온/ 해를 보라//
18. 감탄사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 사투리로 말한다/ 그러다가도 해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더 쉬운 감탄사를 쓴다/ 손을 대면 화끈 달아오르는/ 감탄사를 쓴다//
19. 권리
성산포에서는 둘로 막아놓은 권리를 넘어/ 바다는 육지를 육지는/ 바다를 제 것 삼으려 한다//
20. 누가 주인인가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 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를 보고 있는 고립/ 성산포에서는/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 이외의 주인을 모르겠다.//

21. 생활비
성산포에서는 어떤 명목으로도/ 성산포는 그들의 재산 소라는/ 그들의 시라기 보다 그들의 혈장(血漿) 해삼은/ 그들의 장수라기보다/ 그들의 수당 성산포에서는/ 일출도 그들의 생활비//
22. 이해
성산포에서는 살림을 바다가 맡아서 한다/ 교육도 종교도 판단도 이해도/ 성산포에서는 바다의 횡포를 막는일/ 그것으로 둑이 닳는다//
23. 풍요
성산포에서는 그 풍요 속에서도/ 갈증이 인다 바다 한가운데에/ 풍덩 생명을 빠뜨릴 순 있어도/ 한 모금 물을 건질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바다가/ 사방에 흩어져 산다//
24. 바다를 담을 그릇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25. 바다로 가는 길
돈을 모았다 바다를 보러간다/ 상인들이 보면 흉볼 것/ 같아서 숨어서 간다//
26. 화장하는 여인
바다 앞에서 거울을 보며 눈썹을/ 그리는 여인 바다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아서 빙그레 웃었다//
27. 귀신같은 인상
첫 눈엔 무섭다가 차츰 친해져 버리고/ 그 절벽 그 굴곡 그 무식/ 그 잔인 첫 눈엔 무섭다가/ 차츰 친해져 버리고//
28. 기암절벽
한자리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는/ 기암절벽 이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도 되었는데//
29. 입
바다는 입이 하나 찢어도/ 찢어도 말이 나오는 입이 하나//
30. 바다의 오후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31. 해삼
일출봉 입구에서 해삼 파는/ 아주머니 손을 잡아당기며/ 해삼 먹으라고 기운에 좋으니/ 먹고 가라고 내가 바다 앞에서/ 기운을 내면 얼마나 내나/ 해삼을 바다에 주어 바다보고/ 더 기운내라지//
32. 감(感)
바다가 산허리에 몸을 부빈다/ 산이 푸른 치마를 걷어 올리며/ 발을 뻗는다/ 육체에 따뜻한 햇살 사람들이/ 없어서 산은 산끼리 물은 물끼리/ 욕정에 젖어서 서로 몸을 부빈다//
33. 갈매기
바람이 우우 몰려와 갈매기/ 똥구멍에 바람을 넣는다/ 갈매기들 신이나서 물 위를 거닐다/ 물위를 나르고 이번엔 갈매기가/ 우우 몰려가 바다에 바람을 넣는다//
34. 여관집 마나님
"어딜 가십니까?" "바다 보러 갑니다"/ "방금 갔다오고 또 가십니껴?"/ "또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밤새 들락날락 바다를 보았다/ 알몸인 바다가 차가운 바깥에서/ 어떻게 자는가 밤새/ 들락날락 바다를 보았다//
35. 아침 낮
그리고 밤 오늘 아침 하늘은/ 기지갤 펴고 바다는 거울을 닦는다/ 오늘 낮 하늘은 낮잠을 자고/ 바다는 손뼉을 친다/ 오늘 저녁 하늘은 불을 끄고/ 바다는 이불을 편다//
36. 고향
나는 내일 고향으로 가는데/ 바다는 못간다/ 먼 산골에서 이곳에 온 후/ 제 아무리 몸부림쳐도/ 바다는 그대로 제자리 걸음/ 나는 내일 고향으로 가는데/ 바다는 못간다//
37. 저 세상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38. 수평선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을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든 파도에/ 귀를 찢기고/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긴 적은 없었다.//
39. 패배
일어설 듯/ 일어설 듯/ 쓰러지는 너의 패배/ 발목이 시긴 하지만/ 평면을 깨뜨리지 않는 승리/ 그래서 네 속은 하늘이/ 들어앉아도 차지 않는다.//
40. 승리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아니면 일제히 패배하라/ 그러면 잔잔하리라/ 그 넓은 아우성으로/ 눈물을 닦는 기쁨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41. 죽을 기회
도희는 늘 죽음을 방해하지만/ 바다는 기회를 주어도 좋다/ 성산포에서는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어 좋다//
42. 갈증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칼이다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양(量)이다/ 그릇 밖에서 출렁이는/ 서글픈 아우성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갈증이다//
43. 동백꽃
섬에는 어딜 가나 동백이 있다/ 동백이 없는 섬은 동백을 심어야지/ 동백은 섬을 지키기에 땀을 흘렸다/ 동백은 바위에 뿌리박기에 못이 박혔다/ 동백은 고독이 몰려와도 울지 않았다//
44. 하늘에게
하늘이여 바다 앞에서/ 너를 쳐다보지 않는 것을 용서하라/ 하늘이여 바다는 살았다고/ 하고 너는 죽었다고/ 하는 것을 용서하라/ 너의 패배한 얼굴을/ 바다 속에서 더 아름답게/ 건져 내는 것을 용서하라/ 그 오만한 바다가 널 뜯어먹지 않고/ 그대로 살려준 것을 보면/ 너도 바다의 승리를 기뻐하리라/ 하늘이여 내가 너를 바다 속에서/ 보는 것을 용서하라//
45. 고독
나는 때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46. 섬
운동장 국민학교 운동장이/ 바다 쪽으로 기울었다/ 선생도 학생도 바다 쪽으로 기울었다//
47. 섬
묘지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 하라고 산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 두었다//
48. 섬에서 사는 토끼
외로운 섬 토끼 다른 섬에/ 옮겨 살려고 거북이 등에 올라탔다는/ 이야기 지금 그 심정 알겠다/ 허허 망망 바다 한가운데/ 내가 떠 있어 보니 그때 심정 알겠다//
49. 무인도
무인도라고 찌 뿌리는 것은/ 섬이 아니라 물살이다/ 외로워 살 맛이 없다고/ 엄살을 부리는 것은 등대가 아니라/ 소나무 소리다 백 년을 살아도/ 살맛이 없다고 신경질 부리는 것은/ 바위가 아니라 풍란이다//
50. 해상에서
이쯤 오니/ 세상사 모두 금(線) 하나로 끝난다/ 부산과 여수가 그렇고 종로에서/ 미아리가 그렇고 그립다고/ 모여든 커피와 의자 암으로/ 죽은 그 사람이나 생으로 죽은/ 그 사람이나 이쯤 오니/ 모두 금 하나로 끝난다/ 그러다간 모진 섬 하나 지나면/ 나 여기 있다고 소리쳐진다//

51. 점령
저 말없는 섬을 누가 먼저 점령했느냐/ -교회- 다음은 누구냐/ -술집- 그 다음은 누구냐/ -은행- 저 섬을 무엇으로 쓸거나/ -풍경화- 예 이놈 돈으로 써야지/이런 인상 저런 이유 홍도에서/ 흑산도 다시 흑산도에서/ 기자도로 섬을 보며 이기(利己)를 보며/ 생활을 보며 회의를 보며/ 나처럼 사는 것은 외롭고 너처럼/ 사는 것은 지루하고 결론도 해결도 없이/ 기좌도에서 진도로 진도에서/ 다시 추자도로 온다//
52. 무명도(無名島)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53. 낮잠 술에 취한 섬
물을 배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54. 부자지간
아버지 범선 팔아 발동선 사이요/ 얘 그것 싫다 부산해 싫다/ 아버지 배 팔아 자동차 사이요 얘 그것 싫다/ 육지 놈 보기 싫어 그것 싫다/ 아버지 배 팔아 어머니 사이요/ 그래 뭍에 가거든 어미 하나 사자//
55. 우도(牛島)
끊어졌던 물이 서로 손을 잡고/ 내려간다 헤어졌던 구름이/ 다시 모여 하늘에 오르고 쏟아졌던/ 햇빛이 다시 돌아가 태양이 되는데/ 우도(牛島)는 그렇게 순간처럼/ 누웠으면서도 우도야 우도야/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56. 외로움
날짐승도 혼자 살면/ 외로운 것/ 바다도 혼자 살기 싫어/ 퍽퍽 넘어지며 운다.// 큰산이 밤이 싫어/ 산짐승 불러오듯/ 넓은 바다도 밤이 싫어/ 이부자리를 차 내버린다.// 사슴이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밤을 피해가듯/ 바다도 물속으로/ 물속으로/ 밤을 피해간다//
57. 내가 서 있는 곳
낮에 서 있는 나는 원주(圓周)를/ 울타리 삼은 중심에 서 있고/ 밤에 서 있는 나는 원통(圓筒)에 들어/ 있는 감금으로 서 있다//
58. 풀밭에 누운 우도
물에 넘어진 사람들의 유족은/ 물이 원수이겠지만 내 앞의 창해는/ 소 한 마리 누워있는 풀밭 꼬리치는/ 대로 흰 나비 하나 날아갔다 날아온다//
59. 아부
몇 줄의 시를 쓰기 위해/ 창경원 꽃사슴에 아부하고/ 며칠을 더 살기 위해/ 세월에 아부했다 치더라도/ 바다 앞에서는/ 내가 아부할 수 없다.//
60. 한 모금의 바다
어망에 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수문에 갇혔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갈매기가 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하루살이 하루 산 몫의 바다도 빠져 나와/ 한 자리에 모인 살결이 희다/ 이제 다시 돌아갈 곳도 없는/ 자리 그대로 천년만년 길어서 싫다//

61. 물귀신
귀신도 물귀신은 바다에서/ 세방살이를 하는 놈 나를 보면/ 질투가 심해져 다리를 감는데/ 나는 항상 아버지 말씀대로 왼다리를 감아서/ 왼쪽으로 내던졌다/ 제 놈은 한 번도 바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바다에 살고 나는 바다에 살지 않으면서/ 바다를 좋아하는 것을 안 모양/ 차라리 산돼지라면 우직해서/ 동정이 가겠는데 제 놈은 무식해서/ 바다가 싫은 모양이다//
62. 추억
한 여름 땀을 씻으며/ 일출봉에 올라가 풀 위에 누웠는데/ 햇빛이 벌떼처럼 쏟아지더군/ 여기서 누굴 만날까 장미 같은/ 여인인가 가시 찔린 시인인가/ 그런 것 다 코웃음 치다가 내려오는데/ 신혼여행으로 온 한 쌍의/ 부부 셔터를 눌러달라고 하더군/ 그 사람들 지금쯤 일남일녀 두었을 거다/ 그 사진은 사진첩에 묻어두고/ 이혼할 때쯤 되었을 거다 이혼하거든/ 여기서 바다랑 살지 이혼하거든/ 여기서 돌이랑 살지 이혼하거든/ 여기서 추억이랑 살지//
63. 넋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살아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워 할 것도 없이/ 돌아선다/ 사슴이여 살아 있는 사슴이여/ 지금 사슴으로 살아 있는 사슴이여/ 저기 저 파도는 사슴 같은데/ 산을 떠나 매 맞는 것/ 저기 저 파도는 꽃 같은데/ 꽃밭을 떠나 시드는 것/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살아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움도 없이 말 하나 않지만//
64. 사람이 꽃 되고
꽃이 사람이 된다면/ 바다는 서슴지 않고 물을 버리겠지/ 물고기가 숲에 살고 산토끼도/ 물에 살고 싶다면/ 가죽을 훌훌 벗고 물에 뛰어들겠지/ 그런데 태어난 대로 태어난/ 자리에서 산신(山神)에 빌다가/ 세월에 가고 수신(水神)에 빌다가 세월에 간다//
65. 낮에서 밤으로 일출봉에 올라 해를 본다
아무 생각 없이 해를 본다 해도/ 그렇게 나를 보다가 바다에 눕는다/ 일출봉에서 해를 보고나니/ 달이 오른다 달도 그렇게 날 보더니/ 바다에 눕는다/ 해도 달도 바다에 눕고나니/ 밤이 된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바다에 누워서/ 밤이 되어버린다//
66. 보고 싶은 것
모두 막혀버렸구나/ 산은 물이라 막고/ 물은 산이라 막고//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차라리 눈을 감자/ 눈을 감으면/ 보일거다./ 떠나간 사람이/ 와있는 것처럼/ 보일거다./ 알몸으로도/ 세월에 타지 않는/ 바다처럼 보일거다./ 밤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태어나/ 바다로도 닳지 않는/ 진주로 살거다.//
67. 풀 되리라
풀 되리라/ 어머니 구천에 빌어 나 용 되어도/ 나 다시 구천에 빌어 풀 되리라/ 흙 가까이 살다 죽음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물 가까이 살다 물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아버지 날 공부시켜 편한 사람 되어도/ 나 다시 공부해서//
68. 전설-비문(碑文)
남편의 친구가 남편을 살해하고/ 남편의 친구가 남편이 된 남편과/ 한 평생 살다가도 남편의 친구인/ 남편이 남편을 죽였다는 고백을 듣고는/ 남편의 친구인 남편에게서 낳은/ 아호 형제를 살해하고/ 저도 그 남편 따라 죽었노라 쓰여있다//
69. 전설-이가(李歌)
날마다 숫처녀 하나씩 내놓으라는/ 뱀의 혓바닥에 창을 박은 이삼만은/ 총각으로 쓰러졌지만/ 살아남은 처녀들은 살아서 시집간다/ 바닷가 돌담을 돌아 바닷물에/ 치맛자락 적시오며 시집간다/ 전설도 타지 않고 세월과도/ 관계없이 숫처녀는 살아서 시집간다//
70. 전설-홍가(洪歌)
하루 아침에 장수가 될 수 있는 비결은/ 태몽이고 그 태몽이 들어맞으면/ 한자리 하는 것인데/ 그것이 하늘에 별 따기/ 어쩌다 별을 따와도/ 그걸 숨길 수 없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홍업선(洪業善)짚신에/ 별이 묻어와서 장수 될 뻔 했는데/ 그 애비 겁이 나서 날갯죽지/ 찢은 것이 별은 떨어지고/ 안마당엔 흰 눈이/ 가난만큼 쌓였단다//

71. 전설-옛날의 기근
옛날 옛적에 거짓말이라고/ 웃어버릴 만큼 흉년이 들었을 때/ 흙을 땀에 개어 성을 쌓고 있었을 때/ 바다만은 속 시원히 웃고 있었을 때/ 김통장 장군은 큰 칼을 차고 있었을 때/ 돌보다도 못한 고씨 부씨/ 양씨 돌보다도 못 먹은 손으로/ 큰 돌 위에 또 큰 돌을 쌓고 있었을 때/ 바다만은 속 시원히 웃고 있었는데/ 지금은 여치가 살찐 목소리로 우는구나//
72. 전설-곧은 낚시
끼니가 간 곳 없는 홍씨/ 파도소리 같은 것 귀에 없고/ 절벽 같은 원망 눈에 없고/ 오늘밤 젯상에 물고기 하나/ 곧은 낚시에 물리기만 하면/ 감지덕지 세상은 태평성대 지성이면 감천이라/ 곧은 낚시로 건져낸 물고기/ 그날 밤 젯상에 쓰이고/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73. 전설-구십구암설
구십구 개의 기암 형틀에 매달려서/ 죄와 벌을 번갈아 치루며/ 바닷물이 바닥나길 기다린다//
74. 전설-막산 이란 놈 막산 이란 놈
한 자리에서 백 인분을 먹더니/ 나도 요즈음 불고기 오 인분은 먹겠다만/ 막산 이란 놈 남의 집 머슴 살며/ 한 끼 백 인분을 먹다니/ 식량을 댈 수 없어 쫓겨난 막산/ 이 놈 남의 집 돌담 밑에서/ 처량한 귀뚜라미 된다/ 저 물만 마시고 살 순 없을까/ 성산포 앞바다 그 아래 물까지/ 실컷 마셔 봤으면/ 막산 이란 놈 토굴에서/ 배 곯아 죽었단다//
75. 전설-일출봉
일어서고 쓰러지는 것을/ 승부라 하면 바위는 이긴 거고/ 바다는 진 것인가/ 백 마리의 맹수가 아흔 아홉의 기암으로/ 덤벼들 때 그 때마다/ 바위는 꼿꼿한 승리 백 마리의/ 맹수는 파죽지세 바다는/ 그 때마다 뼈아픈 침묵/ 아흔 아홉 개의 기암은/ 꿀 먹은 벙어리//
76. 전설-조실부모하고
둘 이는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눈물로 자란 사이 둘 이는/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바닷물로 살아온 사이 부부가 된/ 다음날 사내는 바다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이/ 바다는 그들의 조실부모 모르고/ 기막힌 남편인데 바람은/ 그것을 모르고 울며 불며/ 세월이 가도 바람은 그것을 모르고//
77. 전설-장수론(將帥論)
전설을 빌면 저 바위도/ 이 바위도 모두 장수의 짓이라고/ 저 바다를 이 바다로 옮겨 놓은 것도/ 장수의 짓이라고/ 그런데 그 장수 세월을 옮겨놓지 못하고/ 왜 죽었을까//
78. 삼백육십오일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79. 그리운 바다

내가 돈보다 좋아하는 것은/ 바다 꽃도 바다고 열매도/ 바다다 나비도 바다고/ 꿀벌도 바다다/ 가까운 고향도 바다고/ 먼 원수도 바다다/ 내가 그리워 못 견디는 그리움이/ 모두 바다가 되었다/ 끝판에는 나도 바다 되려고/ 마지막까지 바다에 남아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다가 삼킨 바다/ 나도 세월이 다 가면/ 바다가 삼킨 바다로 태어날 거다//
80. 고독한 무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81. 바다에서 돌아오면
바다에서 돌아오면/ 가질 것이 무엇인가/ 바다에선 내가 부자였는데/ 바다에서 돌아오면/ 가질 것이 무엇인가/ 바다에선 내가 가질 것이/ 없었는데/ 날아가는 갈매기도/ 가진 것이 없었고/ 나도 바다에서/ 가진 것이 없었는데/ 바다에서 돌아가면/ 가질 것이 무엇인가//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생진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 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에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주었다// 365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60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그리운 바다 성산포 -1. 바다를 본다 / 이생진
아침 여섯시 어느 동쪽에도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필거야// 아침 여섯시 태양은 수 만 개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와서 해를 보라~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해 온 해를 보라// 성산포에서는 푸른색 이외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성산포에서는 설사 색맹일지라도 바다를 빨갛게 칠할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사투리로 말한다/ 그러다가도 해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더 쉬운 감탄사를 쓴다/ 손을 대면 화끈 달아오르는 감탄사를 쓴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말만 하고 바다는 제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약하다//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을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든 파도에 귀를 찢기고/ 그래도 할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 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긴 적은 없었다// 모두 막혀 버렸구나 산은 물이라 막고 물은 산이라 막고/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차라리 눈을 감자/ 눈을 감으면 보일거다 떠나간 사람이 와있는 것처럼 보일거다/ 알몸으로도 세월에 타지 않는 바다처럼 보일거다/ 밤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태어나 바다로도 닳지 않는 진주로 살거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2. 설교하는 바다 / 이생진
일출봉에 올라 해를 본다 아무생각 없이 해를 본다/ 해도그렇게 나를 보다가 바다에 눕는다/ 일출봉에서 해를 보고나니 달이 오른다/ 달도 그렇게 날 보더니 바다에 눕는다/ 해도 달도 바다에 눕고나니 밤이된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바다에 누어서 밤이 되어 버린다// 날짐승도 혼자 살면 외로운 것/ 바다도 혼자 살기 싫어 퍽퍽 넘어지며 운다/ 큰산이 밤이 싫어 산짐승 불러오듯/ 넓은 바다도 밤이 싫어 이부자리를 차내버린다/ 사슴이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밤을 피해가듯/ 넓은 바다도 물속으로 물속으로 밤을 피해간다// 성산포에서는 그 풍요 속에서도 갈증이 인다/ 바다 한가운데에 풍덩 생명을 빠뜨릴 순 있어도/ 한 모금 물을 건질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바다가 사방에 흩어져 산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죽기도 좋은 곳/ 성산포에서는 생과 사가 손을 놓치 않아 서로 떨어질 수 없다//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살아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워할 것도 없이 돌아선다/ 사슴이여 살아있는 사슴이여/ 지금 사슴으로 살아 있는 사슴이여/ 저기 저 파도는 사슴 같은데 산을 떠나 매 맞는 것/ 저기 저 파도는 꽃 같은데 꽃밭을 떠나 시드는 것/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에 넋/ 파도는 살아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움도 없이 말하지 않지만//

그리운 바다 성산포 -3. 끊을 수 없다 / 이생진
어망에 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수문에 갇혔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갈매기가 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하루살이 하루 산 몫의 바다도 빠져나와/ 한 자리에 모인 살결이 희다/ 이제 다시 돌아갈 곳도 없는 자리/ 그대로 천년만년 길어서 싫다// 꽃이 사람된다면 바다는 서슴지 않고 물을 버리겠지/ 물고기가 숲에 살고 산토끼도 물에 살고 싶다면/ 가죽을 훌훌 벗고 물에 뛰어들겠지/ 그런데 태어난 대로 태어난 자리에서/ 산신에 빌다가 세월에 가고/ 수신께 빌다가 세월에 간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는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그리운 바다 성산포 -4. 모두 버려라 / 이생진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 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를 보고있는 고립/ 성산포에서는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 이외의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집 개는 하품이 잦아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게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 두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 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평생 두고 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그리운 바다 성산포 -5. 바다의 시녀 / 이생진
일어설 듯 일어설 듯 쓰러지는 너의 패배 발목이 시긴 하지만/ 평면을 깨뜨리지 않는 승리 그래서 네 속은 하늘이 들어앉아도 차지 않는다/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아니면 일제히 패배하라/ 그러면 잔잔하리라 그 넓은 아우성으로 눈물을 닦는 기쁨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성산포에는 살림을 바다가 맡아서 한다 교육도 종교도 판단도 이해도/ 성산포에서는 바다의 횡포를 막는 일 그것으로 독이 닳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오늘 아침 하늘은 기지갤 펴고 바다는 거울을 닦는다/ 오늘 낮 하늘은 낮잠을 자고 바다는 손뼉을 친다/ 오늘 저녁 하늘은 불을 켜고 바다는 이불을 편다/ 바다가 산허리에 몸을 굽힌다 산은 푸른 치마를 걷어올리며 발을 뻗는다/ 일체에 따듯한 햇살 사람들이 없어서 산은 산끼리 물은 물끼리/ 욕정에 젖어서 서로 몸을 부빈다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칼이다/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양이다/ 그릇 밖에서 출렁이는 서글픈 아우성/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갈증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짐승이 짐승보다 산이 산보다 바다가/ 더 높은 데서 더 깊은 데서 더 여유 있게 산다//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하늘이여 바다 앞에서 너를 쳐다보지 않는 것을 용서하라/ 하늘이여 바다는 살았다고 하고 너는 죽었다고 하는 것을 용서하라/ 너의 패배한 얼굴은 바다 속에서 더 아름답게 건져내는 것을 용서하라/ 그 오만한 바다가 널 뜯어먹지 않고 그대로 살려준 것을 보면/ 너도 바다의 승리를 기뻐하리라./ 하늘이여 내가 너를 바다 속에서 너를 보는 것을 용서하라.//

바닷가 민박집 / 이생진
바닷가 민박집/ 여기다 배낭을 내려놓고/ 라면 상자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커피 한잔 옆에 놨다/ 오른 쪽 창문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바다가 보이면 됐어’/ 이건 거창하게도/ 내 인생 철학이다/ 철학이 없어도 되는데/ 80이 넘도록 철학도 없이 산다고 할까 봐/ 체면상 내건 현수막이다// ‘바다가 보이면 됐어’/ 인사동에 모인 젊은 친구들이/ 낙원호프집에서 부르는 구호도 이거다/ 그런데 이 민박집에서는 진짜 바다가 보인다/ 그래서 나는 호프집보다 이 민박집이 좋다// 바다는 누가 보든 말든 제 열정에 취해 여기까지 뛰어든다/ 그 모습이 나만 보고 달려오는 것 같아 반갑다/ 다시 돌아갈 때는 모든 이별을 한꺼번에 당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 바다가 창 밖에 있으니/ 보호자 옆에 있는 것 같아 든든하다//

바다를 본다 / 이생진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바다의 오후 / 이생진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바다에 오는 이유 / 이생진
누구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다/ 모두 버리러 왔다/ 몇 점의 가구와/ 한 쪽으로 기울어진 인장과/ 내 나이와 이름을 버리고/ 나도 물처럼 떠 있고 싶어서 왔다.//

설교하는 바다 / 이생진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혼자 사는 어머니 -여서도 14 / 이생진

나이 70./ 1929년생/ 일제 강점하에 태어난 것도 얼울한데/ 말년엔 남편 중풍으로 쓰러져/ 3년 동안 간병하느라 다 죽어가던 세월/ 영감을 산언덕에 묻고 나니/ 휘휘 방안엔 찬바람만 그득하다고/ 그래도 아침엔 동백꽃처럼 단단하다가/ 저녁엔 호박꽃처럼 시들해진다며/ 아랫목에 누울 무렵/ 뭍으로 간 자식들에게 전화가 온다// "어머니 저예요"/ "음 부산이냐"// "어머니 인천예요"/ "음 너냐"// "어머니 안양예요"/ "음 애들은 잘 놀고"// "어머니 저예요"/ "음 목포냐"// 그 다음엔 산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바위를 치는 갯바람 소리/ 그 밖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방/ 문풍지 우는 여서도/ 나이 70./ 아직은 차돌같이 강하다만/ "음 걱정 마라"/ 막내의 전화를 끝으로 자리에 눕는 어머니// 여서도에서 태어나/ 함께 초등학교 다니던 남자를 부모가 맺어줘/ 아들 다섯에 딸 하나/ 부산으로 인천으로 목포로 안양으로/ 다 내보내고 섬에서 혼자 사는 어머니/ "음 걱정 마라, 나는 예가 좋다"//

 

시를 훔쳐가는 사람 / 이생진
'○○ 시인님/ 시 한 편 훔쳐갑니다/ 어디다 쓰냐구요?/ 제 집에 걸어두려고요'// 얼마나 귀여운 말인가/ 시 쓰는 사람도/ 시 읽는 사람도/ 원래는 도둑놈이었다/ 세상에 이런 도둑놈들만 들끓어도/ 걱정을 않겠는데/ 시를 훔치는 도둑놈은 없고/ 엉뚱한 도둑놈들이 들끓어 탈이다// 내 시도 많이 훔쳐가라/ 하지만 돈 받고 팔지는 마라/ 세상은 돈 때문에 망했지/ 시 때문에 망하지는 않았다//

아내 모르게 / 이생진
나는 모르게 하는 소리인데/ 나는 이런 데 오면/ 엉겅퀴가/ 패랭이가/ 민들레가/ 갯쑥부쟁이가 좋아 아내를 잊는다// 또 아내 모르게 하는 소리인데/ 용암석에 부딪치는 파도며/ 뿌옇게 드러낸 톳과 가사리를 보면/ 아내를 잊는다//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취한 사람 / 이생진
취한 사람은/ 사랑이 보이는 사람// 술에 취하건/ 사랑에 취하건/ 취한 사람은/ 제 세상이 보이는 사람// 입으로는 이 세상/ 다 버렸다고 하면서도/ 눈으로는 이 세상/ 다 움켜쥔 사람// 깨어나지 말아야지/ 술에 취한 사람은 술에서/ 사랑에 취한 사람은 사랑에서/ 깨어나지 말아야지//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 / 이생진
소매물도(小每勿島)/ 바람따라 가다 보면/ 갈매기도 되돌아오는 곳/ 그곳에 사는 정씨 할머니보고/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더니/ 모른다고 하면서도/ 어려선 소꿉장난/ 시집가선 남편사랑/ 김도 매고 미역도 따고/ 애들 키우느라 뭐가 뭔지 몰랐다고/ 구부러진 그의 허리가/ 세월을 펴며 말하더라//

고백 / 이생진
이젠 잊읍시다/ 당신은 당신을 잊고/ 나는 나를 잊읍시다// 당신은 내게 너무 많아서 탈/ 당신은 당신을 적게 하고/ 나는 나를 적게 합시다// 당신은 너무 내게로 와서 탈/ 내가 너무 당신에게로 가서 탈/ 나는 나를 잊고/ 당신은 당신을 잊읍시다//

갈매기가 일제히 / 이생진
갈매기가 모두/ '모두'라는 말보다/ '일제히'라는 말이 어울리네//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일제히 침묵을 입에 물고/ 일제히 날아갈 태세로/ 너무나 일제히// 그것 때문에 얼마나 피곤한가/ 나는 자유 때문에 쓸쓸한 놈/ 나는 혼자서 갈매기를 보고/ 갈매기는 일제히 나를 의심하네//

그만 살아야지 / 이생진
이젠 그만 살아야지 하다가도/ 시가 바람을 일으키면/ 벌떡 일어나 시를 쓴다/ 그것 때문에 그럭저럭/ 80을 넘겼다/ 내가 생각해도 그리 미운 짓은 아니다/ 오늘은 아예 옛날처럼/ 배낭을 메고/ 멀리 섬으로 간다고 나섰다/ 목포 앞바다/ 여객선터미널에서/ 뱃시간을 챙기는 나/ 그것 이상의 것이 없다//

까치와 까마귀가 / 이생진
먼저 까치가 짖더니 뒤 이어 까마귀가 짖는다/ 여러 마리가 연달아 짖는다/ 백과 흑의 파로워(follower)들이다/ 그 소리를 검색해보니/ 공갈과 협박/ 내가 떠돌며 쓴 시가 모두 가짜란다/ 가짜라는 뜻이나 알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오늘은 이상하게 까치와 까마귀에게 당하는 기분이다// 걸어온 길이 겨우 1km가 채 안 되는 짙은 안개 속/ 은행나무는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털어버리고/ 겨울에 덮을 나뭇잎 하나 가진 것이 없다/ 9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도/ 저렇게 빈손으로 서 있는데/ 까치와 까마귀가 나를 향해 거침 없이 짖는 소리는/ 떠돌며 쓴 시가 모두 가짜라는 것이다/ 오늘은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다// 그들이 뒤따라오며/ 내 행동을 지켜본 듯이 나를 파헤친다/ 까치는 찢어발기는 소리이고/ 까마귀는 둔기로 내리치는 소리다/ 그래서 나도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놈들아 시에 진짜가 어디 있니 입이나 다물어라”/ 그러고는 얼른 ‘건방진 것들’ 하고 웃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까치와 까마귀가/ 나를 물고 늘어지는 기분이다//

귀뚜라미의 휴대전화 - 귀뚜라미 / 이생진
모든 생물은 생식生殖을 위해서 산다/ 그렇게 간단한 생활관이 복잡해졌다/ 귀뚜라미가 운다/ 우는 것은 암컷이 아니라 수컷이다/ 조심해서 오라는 휴대용 통신이다/ 그들은 날 때부터 통신기를 가지고 나왔다/ 눈치껏 오라는 신호/ 시인이 밤늦게까지 시쓰고 있으니/ 소리내지 말고 오라는 신호다//

내 울음은 노래가 아니다 - 매미 / 이생진
매미의 울음을 노래로 착각하고 싶다/ 그런데 매미도 내 울음을 노래로 착각하면 어쩌지/ 아니다 나는 그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다//

내일은 비 -청개구리 / 이생진
<내일은 비>/ 오랜 가뭄 끝에/ 청개구리가 뽕나무를 올라간다/ 가장 믿음직한 소리로/ <내일은 비>/ 스무 개의 알덩어리를/ 나무 밑에 묻어 놓고 근심하던 끝에/ 비 올 거라며 터뜨리는 울음소리/ 그 슬픈 소리가 이상하게도/ 믿음직하다// <내일은 비>/ 우산을 준비해야지/ 밤 아홉시 뉴스 시간에도 TV는/ 기상도를 그려가며 내일은 비라고 했지만/ 청개구리가 울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TV보다 청개구리를 믿는다// 청개구리는 그 한 마디를 위해 살고 있는/ 착한 시인/ <내일은 비>//

구인사 -꿀벌 / 이생진
구인사(구인사) 깊은 계곡/ 불전 앞 자판기 두 대/ 커피에 맛들인 꿀벌들/ 가을엔 코스모스 들국화도 많은데/ 종이컵을 따라다니며 구걸하는 꿀벌들/ 수려한 산중에서 꽃에 핀 꿀을 따지 않고/ 종이컵에 묻은 설탕을 핥는 벌/ 꽃이 싫어진 것일까/ 아니면 타락한 것일까/ 웬지 내가 부끄러워지네//

꿈 / 이생진
이 세상에 없는 여자를/ 꿈에서 안아 보고 기뻐했다/ 꿈이 시키는 대로 간음하다가/ 사람에게 들키고는/ 밤새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었는데/ 날이 새어 꿈임을 알고 안심했으나/ 그녀가 없는 세상임을 알고는/ 다시 실망했다//

나만 남았다 / 이생진
다시 나만 남았다/ 영혼을 쫓아다니느라 땀이 흘렀다/ 영혼을 쫓아다니는데 옷이 찢겼다/ 자꾸 외로워지는 산길/ 염소쯤이야 하고 쫓아갔는데/ 염소가 간 길은 없어지고 나만 남았다// 곳곳에 나만 남았다/ 허수아비가 된 나도 있었고/ 돌무덤이 된 나도 있었고/ 나무뿌리로 박힌 나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내가 많아도 나는 외로웠다//

낙엽 / 이생진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때가 좋은 때다/ 그때가 때묻지 않은 때다/ 낙엽은 울고 싶어하는 것을/ 울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엽을 간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 새로운 낙엽을 집을 줄 아는 사람은/ 기억을 새롭게 갖고 싶은 사람이다//

너무 많은 행복 / 이생진
행복이 너무 많아서 겁이 난다/ 사랑하는 동안/ 행복이 폭설처럼 쏟아져서 겁이 난다// 강둑이 무너지고/ 물길이 하늘 끝닿은 홍수 속에서도/ 우리만 햇빛을 얻어 겁이 난다//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 것도 없는 너와 난데/ 사랑하는 동안에는/ 행복이 너무 많아 겁이 난다//

달 보는 시인 / 이생진
-만제도 79// 수근거린다/ "그 사람은 시인이라 하던데"/ 하루는 장바위산 꼭대기에 올라가/ 국도(菊島) 저 너머 수평선을 보고/ 하루는 물생산 꼭대기에 올라가/ 염소랑 바다를 보는데 염소 같더라구/ 하루는 풀숲을 헤치고 등대에 올라가/ 등대 밑에서 바다를 보는데 등대 같더라구/ 밤엔 선착장에 나와 땅바닥에 누워 별을 보는데/ 별 같더라구/ 혹시 사별한 사람 아닌가/ 혹시 짤린 사람 아닌가/ 혹시 자살 기도하는 사람 아닌가 하고/ 마을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목사님께 물어 봤대나/ 그랬더니 목사님 말이/ "시인이란 시래기 같은 사람이지만/ 눈 하나는 수정같이 맑다"고/ 다음 날 마을 여자들은 시인의 눈을 보려고/ 물 길러 가서 마주친 시인의 눈을 보다가/ 물을 엎질렀대나//

벌레 먹은 나무잎 /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복사꽃 / 이생진
나는 가끔 오래된 혼백과 이야기하는 수가 있다/ 북한산 유일한 복사꽃 나무 밑에서처럼// "매월당 김시습이 다녀갔을까"/ "다녀갔겠지 언제고 나보다 한 걸음 먼저/ 왔다 가는 사람이니까 다녀갔겠지"// 복사꽃이 기절한다/ 이걸 못보고 봄이 왔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매월당 김시습이 세 살 때부터 좋아하던 꽃/ 죽어서도 사월엔 복사꽃을 찾겠지//

세상이란 것 / 이생진
가만히 앉았는데/ 세상이란 것이 떠오른다/ 지구의로 보면 둥글고/ 정치로 보면 쑥밭이고/ 역사로 보면 불쌍하고/ 나를 보면 벌레 먹은 잎새 같다/ 나를 왜 평가절하하느냐/ 조금 동정받는 것이 사랑받는 듯해서/ 어떤 땐 사랑에 굶주린 늑대 같아서//

가출기(家出記) / 이생진
배낭 하나 메고 나왔다는 거/ 그리고 낯선 타향이라는 거/ 여관방에 머물며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궁색을 떨지만/ 그래도 그것이 내겐 값비싼 자유라는 거/ 피 흘려 얻은 것은 아니지만/ 자유는 소중하다/ 아껴 써야 한다/ 자유도 소모품이니까/ 밤늦게 창문을 열어/ 바다의 비밀을 볼 수 있고/ 나간다는 말 없이 나갈 수 있고/ 라면을 끓이든 누룽지를 끓이든 상관없고/ 어디로 가든 간섭이 없는 자유/ 세수를 하든 면도를 하든/ 세수를 않든 면도를 않든/ 거지같이 싸매고 다녀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그런 값진 자유를 배낭 하나로 얻었다는 거/ 노숙 직전이지만/ 그것도 쟁취다//

어떤 여자와 나 / 이생진
어떤 여자는 나이 들면서 하고 싶은 일이/ 문경새재 넘어가기 전/ 언덕에 암자를 짓고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이라고/ 나는 깊은 섬에 들어가 바닷가를 돌며 시를 낭송하는 것이고/ 그녀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섬 저 섬 옮겨 다니며/ 뻥뻥 헛소리만 치는데/ 암자로 들어간 여자는/ 꼭 금강경에서 나오는 소리만 토한다/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이이지만/ 나를 만나고 간 어느 젊은이가 문경새재 소식을/ 봄소식처럼 전하고 갔다/ 이 젊은이가 내 소식을 문경새재에 전했는지 모르겠다/ 어떤 여자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우체국 아가씨 / 이생진
우체국 가면서 생각했다/ 꼭 연인네 가는 것 같다고/ 가다가 개울을 건너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꺼내 마시며 생각했다/ 꼭 연인네 집 앞에 온 것 같다고/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난롯가에 앉았던 아가씨가 일어서서/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냐고 묻지도 않고/ 일부인을 꽝꽝 내리친다/ 봉투가 으스러져 속살이 멍드는 줄도 모르고/ 꽉꽉 내리칠 때/ 내 손가락이 바르르 떨었다//

편지 쓰는 일 / 이생진
시보다 더 곱게 써야 하는 편지/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어서면서/ 네 살에 파고드는 글/ 정말 한 사람만 위한 글/ 귀뚜라미처럼 혼자 울다 펜을 놓는 글/ 받는 사람도 그렇게 혼자 읽다 날이 새는 글/ 그것 때문에 시는 덩달아 씌어진다//

우정 / 이생진
도시 한복판에서/ 혼자 사는 어부를 생각하는 것은/ 생각부터가 쓸쓸하다/ 홍어잡이 배에서 젊은 팔을 잃은 윤씨/ 이번엔 팔이 되어준 아내를 잃었으니/ 뭐라고 말해야 위로가 될지/ 그래도 나보고 만재도*에 오라한다/ 한 손으로 마늘을 깔 수 있으니 김치를 담글 수 있고/ 통발을 바다에 던졌으니 우럭은 들어있을 거고/ 당신이 좋아한느 별은 밤새 봐도 닳지 않으니/ 만재도에 오라 한다// 인사동 커다란 유리에 비친 윤씨의 얼굴/ 내가 가면 그의 아내처럼 커피잔을 들고 나오겠지/ 통발을 끌어올려 우럭을 꺼내던 손/ 배에서 내리자 마자 그 손이 나를 끌어안는다// 그의 손과 나의 손/ 손끼리 통하는 말/ 그건 언어가 아니라 끈끈한 점액이다//

추억 / 이생진
한여름 땀을 씻으며/ 일출봉에 올라가/ 풀 위에 누웠는데/ 햇빛이 벌떼처럼 쏟아지더군/ 여기서 누굴 만날까/ 장미같은 여인인가/ 가시 찔린 여인인가/ 그런 것 다 코웃음 치다가/ 내려오는데/ 신혼여행으로 온 한 쌍의 부부/ 셔터를 눌러달라고 하더군/ 그 사람들 지금쯤/ 일남일녀 두었을 거다/ 그 사진은 사진첩에 묻어두고/ 이혼할 때쯤 되었을거다/ 이혼하거든 여기서/ 바다랑 살지/ 이혼하거든 여기서/ 돌이랑 살지/ 이혼하거든 여기서/ 추억이랑 살지//

방랑 / 이생진
방랑은 방생(放生)입니다/ 나에게서 나를 떼어놓는 방생입니다/ 내가 너무 나를 잡아놓고 있었기에/ 이젠 내게서 떠나라고/ 나를 놔주는 것입니다/ 저놈이 커서 다시 내게로 돌아올지는/ 두고 봐야 할 일입니다//

평일도 · 나 혼자 / 이생진
앞문을 열어 봐도 주인이 없고/ 뒷문을 열어 봐도 주인이 없어/ 선착장에 한참 서 있다 돌아와서/ 또 그런 식으로/ 앞문을 열어 봐도 사람이 없고/ 뒷문을 열어 봐도 사람이 없어/ 선착장에 한참 서 있다 돌아와서/ 또 그런 식으로/ 이 섬도 이 방도 나 혼자/ 그저 실컷 나 혼자/ 앞문을 열어 봐도/ 뒷문을 열어 봐도/ 그저 나 혼자/ 실컷 나 혼자//

있다는 기쁨 / 이생진
아무도 모르게 눈웃음을 친다/ 무엇과 눈이 맞았을까/ 너였구나/ 구름을 헤치고 태양 앞에서/ 무지개로 다리 놓고/ 너와 나의 눈빛은 다시 마주쳐서/ 산으로 올라가며 진달래 낳고/ 양지바른 곳에 양지꽃 낳고/ 산유화(山有花), 산유화/ 산에 꽃이 있다는 거/ 이 세상에 네가 있다는 말은/ 어떻게 표현하지/ 누가 너를 낳았으며/ 왜 너랑 나랑 있게 했나/ 위대한 건 이 있게 한 거/ 고마워라/ 이 있음이 고마워라//

내가 백석이 되어 /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젋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낯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백석과 자야1 /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 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 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 태어나서 문학할거야'// -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인생은 아름다워 / 이생진
'인생은 아름다워’ 하면서도/ 한숨을 쉬고/ 눈물을 짓는 것은/ 나에게 까닭이 있는 것이지/ 그 아름다움에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고 보니/ 그 한숨에도/ 그 눈물에도/ 아름다움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막걸리 같은 약속 / 이생진
어젯밤 인사동 순퐁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약속했다/ 장마가 끝나면 선유도에 가자고/ 그건 선유도의 풍광을 이야기하다 그도 나도/ 물에 빠진 것인데/ 약속한 다음 날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그곳에 갈 나이가 아니다/ 하는 수 없이 문자를 보내 그 약속을 찢어버렸다/ 그랬더니 그쪽에서도 문자를 보내/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막걸리에 빠져서/ 약속한 것인데 도저히 지킬 수 없어/ 고민 중이었다며/ 취소된 약속을 기뻐한다/ 그래서 막걸리가 좋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은 말하지 않는 것 / 이생진
여름엔 모기 때문에 잠못이루고/ 가을엔 시 때문에 잠못이루다가/ 겨울엔 사랑 때문에 잠못이룬 것을/ 아버지는 보고도 못본척 하신다/ 어머니도 못본척 하시고.// 사랑이 이토록 아픈 것을/ 어머니는 어떻게 참으셨는지/ 한 번도 내게 말하지 않았다.//

山 6 -눈이 내릴 때 / 이생진
山에 눈이 내린다// 침묵 하라는 뜻이다/ 한잠 폭 자라는 뜻이다/ 부산한 생성生成에서/ 가사假死하라는 뜻이다/ 너무 거만했으니/ 자중하라는 뜻이다/ 너무 궁핍했으니/ 풍요하라는 뜻이다/ 가진 자 안 가진 자/ 평등하라는 뜻이다//

山 7 -서로 말이 없다 / 이생진
겨울에/ 山 식구들은/ 서로 말하지 않는다/ 소나무끼리도 그렇고/ 참나무끼리도 그렇다/ 바위는 본래 말없는/ 상징이지만/ 입이 가벼운 싸리나무끼리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고 자라서/ 말하지 않고 살다가/ 말하지 않고 가는/ 山은/ 나보고도 말하지 말라고 한다//

 

두침(頭枕)의 말 / 이생진

왕은 돌아가신 뒤에도/ 왕비와 잠자리를 함께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영혼의 눈을 감자/ 옆에 누웠던 왕비가 놀라는 바람에/ 베갯머리에 앉았던 봉황 두 마리/ 땅에 떨어졌다/ 행복의 미소도/ 권력의 고함소리도/ 생명을 잡아 둘 힘도/ 안개처럼 사라지고/ 흙 묻은 침묵만 남았다 이젠 더 이상 주검에 베개가 필요 없자/ 이 세상으로 돌아왔지만/ 임자 없는 베개 한없이 외롭다//

외로울 때 / 이생진
이 세상 모두 섬인 것을/ 천만이 모여 살아도/ 외로우면 섬인 것을// 욕심에서/ 질투에서/ 시기에서/ 폭력에서/ 멀어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떠있는 섬// 이럴 때 천만이 모여 살아도/ 천만이 모두 혼자인 것을/ 어찌 물에 뜬 솔밭만이 섬이냐/ 나도 외로우면 섬인 것을//

고독과 고독 사이 / 이생진
태종대/ 아찔한 이마 위에서/ 마주보이는 섬// 생도// 말 없는 고독/ 과/ 고독 사이// 잠시 후/ 문자가/ ‘여기서도 네가 보인다’고/ 콕콕 찌른다//

고독 입문서 / 이생진
고독은/ 독학입니다/ 항상 열려 있으니/ 섬으로 오십시오//

버리기 / 이생진
버리기/ 그것이 잘 안 된다/ 몇 년째 써오던 농짝을/ 13층에서 끌어다 버리고/ 돌아와서 내려다보니/ 비를 맞고 있다/ 내가 비 맞고 서 있는 것 같아/ 다시 내려가 끌어올리고/ 빗물을 닦는다/ 농짝 하나 버리지 못하는 내가/ 뭘 버린다고/ 욕심 때문이 아니라/ 살아온 정 때문/ 생으로 버리기가/ 그렇게 어렵다//

섬 스케치 / 이생진
거문도에 와서 섬을 그렸더니 그 섬이 나를 닮는다/ 섬은 모두 혼자인 줄 알았는데/ 그들은 그들끼리 다리 위를 왕래하며 연애 중이다/ 고도와 서도/ 그러나 소삼보도와 대삼부도는 다리가 없다/ 선천성 무인도/ 그 대신/ 외로운 곳엔 어김없이 등대가 찾아 든다/ 의지할 나무 한 그루만 있었으면 하기에/ 등대 옆에 허리 굽은 소나무를 그렸더니/ 등대가 내 손을 꼭 잡으며/ '여기서 살자' 한다//

무명도 / 이생진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지팡이와 할머니 -소모도에서 / 이생진
소모도 언덕길을 올라가는 검은 지팡이와 하얀 할머니// 지팡이는 할머니를 만난 지 3년 됐고/ 할머니는 지팡이 없이 80년을 지내다가/ 지팡이를 만난 후부터는/ 지팡이 없이 하루도 지내지 못한다// 할머니는 나를 보느라 지팡이를 세워놨는데/ 지팡이는 나를 보지 않는다/ 할머니는 나를 보겠다고 허리를 펴는데/ 지팡이만큼 펴지지 않는다/ 지팡이는 허리를 굽히지 못하고/ 할머니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지팡이는 할머니 없이 걷지 못하고/ 할머니는 지팡이 없이 걷지 못하고/ 이렇게 못하는 것끼리 만나/ 못하는 일 없이 사는구나//

낚시꾼과 시인 / 이생진
그들은 만재도에 와서 재미를 못 보았다고 한다/ 낚싯대와 얼음통을 지고 배를 타기 직전까지도/ 그 말만 되풀이했다./ 날보고 재미 봤냐고 묻기에/ 나는 낚시꾼이 아니고 시인이라고 ?더니/ 시는 어디에서 잘 잡히느냐고 물었다/ 등대 쪽이라고 했더니/ 머리를 끄덕이며 그리로 갔다//

섬으로 가는 자유인 / 이생진
배 위에서 구두끈을 매는 여인은 아름답다/ 내가 배를 타고 떠도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배 위에서 배낭을 메고/ 귀로 파도소리 들으며/ 눈으로 먼 섬을 가리키는 여인은 아름답다/ 그런 낭만은 어디서 배웠을까/ 학교 선생님이 가르쳐 줬다고 하면 그건 명교사다/ 빈집 문은 어떻게 잠그고 왔을까/ 요즘 도둑이 심하다든데/ 파도소리에 맞춰/ 콧노래 부르며 먼 섬으로 가고 있는 여인은 아름답다/ 여자여서 그럴까 아니 남자라도/ 그런 남자는 세상을 살 줄 아는 남자다/ 사람들은 갈 데가 없어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살 줄 몰라서 방황하는 것인데/ 저렇게 떠돌아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정말 자유를 누릴 만한 사람이다/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할까/ 우리만의 애국가를 부르고 싶다//

가파도 아줌마 / 이생진
가파도 민박집 아줌마가 먼저 말했다/ "하나도 늙지 않았네요/ 10년 전 그대로..."// 나도 따라 말했다/ "아줌마도 10년 전 그대로네/ 미역국도 그대로고 콩장도/ 그때 그 맛 그대로네"// 그럼 그 사이 그 10년은/ 어디서 뭘 했단 말인가/ 참 이상하네//

추포도 소금꽃 / 이생진
염전에서 소금물 받아먹고 사는/ 함초鹹草/ 짜다고 찌푸리는 일이 없다/ 심해숙沈海淑씨도 함초 같다/ 이름 석자가 모두 삼수변이라며/ 바다와의 인연을 자랑하는 여자/ 육지에서 시집와 얻은 벼슬/ 부지런한 여리장女里長/ 깊은 바다 맑은 물 심해숙深海淑/ 추포염전 김대식씨 부인/ 사내는 고무래를 밀고/ 여자는 소금차를 밀고/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목포의 눈물*’은/ 그래서 짜다/ 염도 2도의 바닷물을 폭염에 구워/ 25도의 해수에서 피는 하얀 소금꽃/ 소금꽃이 필 때마다 김씨 부부는/ 얼굴이 환하다/ 암태도에서 또 작은 섬 추포도로 들어와/ 천일염 만들기 30여 년/ 아내를 강원도 삼척에서 추포도까지 데려오는데/ 김씨는 섬이라는 말을 숨겼다는 소문/ 그래서 속은 것 같다는 뒷이야기/ 속아 사는 여자가 어디 한둘인가/ 오늘도 저문 하루 백설 같은 소금을 거둬/ 창고에 밀어 넣는 ‘목포의 눈물’/ 그래서 눈물은 짜다//
* 이난영이 부른 노래

 


 

이생진 시인
1929년 충남 서산 출생의 시인으로, 어려서부터 바다와 섬을 좋아해 해마다 몇 차례씩 섬으로 여행을 다니며 우리 나라 섬의 정경과 섬사람들의 애환을 시에 담아 '섬 시인', '바다 시인'으로 불린다.

1955년 첫 시집 『산토끼』를 펴내기 시작해 1969년 「제단」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시집 서른여덟 권, 시선집 세 권, 시화집 네 권, 산문집 두 권 등을 펴냈다. 1978년에 펴낸 대표작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바다와 섬과 사랑을 노래한 국내 시의 백미'로 꼽히며 사십 년 넘게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2018년에는 구십으로 가는 길목에서 쓴 일기와도 같은 시를 모아 엮은 서른여덟 번째 시집 『무연고』를 구순을 맞아 출간했다. 1996년 『먼 섬에 가고 싶다』로 윤동주문학상, 2002년 『혼자 사는 어머니』로 상화시인상을 수상했다. 2001년 제주자치도 명예도민이 되었고, 2009년 성산포 오정개 해안에 '그리운 바다 성산포' 시비공원이 만들어졌으며, 2012년 신안 명예군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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