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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류미야 시인

부흐고비 2021. 6. 23. 08:24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류미야
지난 생/ 아마도 난 북재비였는지 몰라/ 눈시울 붉게 젖은 노을을 등에 업고/ 꽃지는 이산 저산을/ 넘던 그 시름애비// 어쩌면 그 손끝 뒤채던 북일지 몰라/ 그렁그렁 눈물굽이 무두질로 마르고/ 소슬히 닫아건 한 채/ 울음집인지 몰라// 그렇게 가슴 두드려 텅텅 울고/ 텅텅 비워/ 가시울 묵정밭 지나 산머리에 이르러는,/ 마침내 휘이요―부르는/ 휘파람 된지 몰라//

머리를 감으며 / 류미야
풀고 또 풀어도 엉켜드는/ 낮꿈의/ 가닥을 잡아보는/ 시린 새벽의 의식儀式// 너에게/ 세례를 주노니/ 잘 더럽히는/ 나여//

물고기자리 / 류미야
나는 눈물이 싫어 물고기가 되었네/ 폐부를 찌른들 범람할 수 없으니/ 슬픔의 거친 풍랑도 날 삼키지 못하리// 달빛이/ 은화처럼 잘랑대는 가을밤/ 몸에 별이 돋아 날아오르는 물고기/ 거꾸로 박힌 비늘도 노櫓 되어 젓는// 숨이 되는 물방울…/ 숨어 울기 좋은 방…/ 물고기는 눈멀어 물을 본 적이 없네/ 그래야 흐를 수 있지/ 그렇게 날 수 있지// 생은 고해苦海라든가 마음이 쉬 밀물지는 내가 물고기였던 증거는 넘치지만, 슬픔에 익사 않으려면 자주 울어야 했네//

그래서 늦는 것들 / 류미야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혹은 한자리에서 잊히기나 하는지요/ 날리는 저 꽃잎들 다 겨울의 유서인데요// 그런 어떤 소멸만이 꽃을 피우나 봐요/ 사랑을 완성하는 것 물그림자에 비친/ 언제나 한발 늦고 마는/ 깨진 마음이듯이// 철들고 물드는 건 아파 아름다워요/ 울음에서 울음으로/ 서로 젖는 매미들/ 제 몸을 벗은 날개로 영원 속으로 날아가요// 폐허가 축조하는 눈부신 빛의 궁전/ 눈물에서 열매로/ 그늘에서 무늬로/ 계절이 깊어갈수록 훨훨/ 가벼워지네요//

붉은 피에타 / 류미야
사랑하는 모든 것은 서쪽으로 떠났다/ 쓸리는 상처에 온통 마음이 기울 듯/ 하루가 멍드는 자리/ 눈시울이 붉다// 왼편 심장 가까이 사연을 문지르고픈/ 누군가의 사모思慕로 생의 저녁은 온다/ 서녘에 사무치는 건/ 어린 양이 되는 일// 상처를 빨아주던 네 살 적 어머니가/ 따뜻한 붉은 혀로 시간을 핥으신다/ 무릎을 내어주시는 나의 서쪽/ 어머니//

가을 아침의 기도 / 류미야
버즘나무 코끝이 몰래 붉어졌습니다// 철 늦은 간구는 통회만 무성합니다// 미련한/ 가을입니다// 벌레만 울게 하소서//

호접(胡蝶) / 류미야
강철 돛을 매달라 누군가 말했지만/ 무엇과도 못 바꿀 이것이/ 나의 생시/ 날개는 쉬 찢겼어도/ 다디단 꿈 맛보았지// 나는 슬프지도 나약하지도 않아/ 대낮의 조롱(鳥籠)은 날 가둘 수 없네/ 바람의 궁륭을 타고/ 죄의 눈썹/ 떨구며// 가벼이 허물 벗고 죽도록/ 살다가는/ 사랑 속에 죽겠네, 이것은 나의 방식/ 그림자 죄 다 지우고/ 꿈속이듯 아니듯,//

작약꽃 필 무렵 / 류미야
쓸쓸한 저녁이야 곧 오고 말 테지만// 밤 모르는 아가들 함박 웃음/ 피고// 설움도 모르는 오월은/ 환호작약// 꽃 한때//

아침 호수 공원 / 류미야
얼마나 숱한 슬픔 밤새 흘러들었는지/ 희붐한 아침 물낯서 눈물 냄새가 난다// 마음이 수런대는 날/ 아침 물가로 가면// 서러운 어느 창은 서서 밤을 걸어오고/ 세상엔 슬픔 많아 흰 수선화 핀다// 마음이 수런대는 날/ 아침 물가로 가면// 고단한 몸들은 다 어디서 비 그을까/ 어두운 귀 기울이면 작은 새 울음소리// 마음이 수런대는 날/ 아침 물가로 가면// 호수 닮은 하늘도 하늘 담은 호수도/ 터진 발 내려놓는 된바람도 순하다// 마음이/ 수런대는 날/ 아침 물가에 가면//

자명한 생 / 류미야
물음과 울음은 다른 길에서 왔다/ 울음과 웃음은 다른 길에서 왔다/ 물음과 울음과 웃음이 같은 집에서 산다//

가을 / 류미야
사라진 뒤꿈치에서 없는 소리가 나요/ 풀벌레의 울음도 뒤꿈치에서 난다지요 잎마다 입 맞추는 빛을 거둬들이며 날마다 허리 꺾어 요절하던 생입니다 저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지만 미숙한 생의(生意)는 늘 부풀다 꺼졌지요 함부로 예언하는 목소리는 다정합니다 시들고 싶은 게지? 아니요, 안 그래요, 꽃피고 싶은걸요 불멸은 어제 죽었고 찰나는 내일 살아요 조락이 마른 중추(中樞)에 꽃불을 놓잖아요 보름과 삭망의 기울기가 가파른 건 폐허로 가는 길이 좁고 아름다워서/ 그 빨간 장미의 피를 몰래 마신단 뜻입니다// 죄 없는 짐승처럼/ 웅크린/ 그믐입니다// 보셔요,/ 꽉 찬 고요의 귀퉁이에 닿으려// 얼마나 안간힘으로들 멈춰 서고 있는지//

두통약을 먹으며 / 류미야
우리 엄마 가시고 유품 정리하는데요,/ 다 낡은 손지갑서 알이 쏟아졌어요/ 분홍빛 눈물 모양의/ 지끈거리는 알들// 다른 것 다 보내도 그 알들 못 버렸어요/ 먼 데 날아가 버린 어린 날개를 그리며/ 끓이고 품은 가슴을 지울 수 없었어요// 불 꺼진/ 지갑에서/ 재봉틀소리/ 들려요// 생의 바퀴를 굴려/ 밥내 잣던 어머니,// 아직도/ 저린 이마에/ 걱정 맺으시나 봐요//

눈물점 / 류미야
내 왼쪽 눈 아래엔 점이 하나 있다/ 눈물이 많을 거라 누구는 빼라 하고/ 누구는 왼쪽 오른쪽 뜻도 다르다 한다// 태생적 모반(母斑)으로 꿈틀거리는 역심/ 점 하나가 삼켜버릴 거대한 운명이라니!/ 샘 하나 품어주지 않는 자비 없는 생이라고?// 먼지 풀썩거리며 살비듬이나 털다 가는/ 이 생에서 스스로 눈물마저 도려내면/ 예언은 실현되는 것,/ 나는 울어야 한다// 마른 땅 휘적시는 몇 방울 이슬처럼/ 갈증의 한나절에 반역하기 위하여/ 냉담과 눈먼 증오를 애도하기 위하여는,//

꽃 피는 아홉 살 / 류미야
그 아이 손톱은 늘 놀빛으로 물들고/ 풀썩일 때마다/ 먼 곳 냄새가 났다/ 해질녘 푸르스름한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조막손에 이끌려 그 집에 들어서면/ 화들짝 마법처럼 피워 주던/ 지화紙花,/ 동네선 낮은 소리로 상엿집이라 했다// 뜰 안엔 지상을 바스락대던 삶들이/ 마침내 숨죽여 흐드러지게 차린/ 고요의 꽃 대궐 한 채/ 하늘하늘 마른꽃// 어느새 내린 어둠이 시큰거리는 골목길/ 부르는 엄마 소리에 아슴아슴 가슴 졸던,/ 아홉 살 내 물관으론 자꾸/ 푸른 물이 차올랐다//

달에 울다 / 류미야
달빛에/ 기대는 건/ 슬픈 몸을 구부려/ 어머니 옛 궁宮으로/ 잠시 숨어드는 일/ 찾아간/ 처마 아래서/ 서성이다/ 오는 일//

은둔자의 노래 / 류미야
어디든 광장이지요, 낮의 눈 속에 갇힌// 죽은 재와 백합이 번성하는 골짜기, 뜬눈으로 눈먼 채 잠 못 드는 이곳에 첫발을 딛는 순간 우린 모두 울었지요 모천(母川) 을 떠나는 건 돌이킬 수 없다는 거, 한입에 삼켜져 역류는 불가능하단 거, 숨을 참아보지만 숨을 데는 없어서 어디론가 떠난들 어디로도 못 간다는 거, 어둠은 마음 한 겹 가릴 수 없는 허공입니다 술래의 반대말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머리카락 꼭꼭 숨어도 털끝까지 털려서는 모두 제 혀에 묶여 광장으로 나앉지요 독초 먹은 말들이 미쳐 날뛰는 마지막엔 누군가 유리벽에 머릴 박기 마련입니다// 나는 더/ 숨기로 했어요/ 낮의 사람들/ 속으로//

자존 / 류미야
난데없는 돌멩이에/ 물낯이 깨졌으나// 이내 심연 속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오늘 그 강변으로 가/ 내 얼굴 씻고 왔다//

모사(模寫) / 류미야
일생 빛의 뒤를 쫒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홀로 밤의 우주를 유영하는 반딧불이, 건드린 허공마다 영롱히 돋아나는 그 위대한 오디세이를 따라나서 볼까요 스스로 빛나는 건 성좌를 모릅니다 별들은 제 이름을 호명하지 않아요 깨진 빛의 부스러기로 불씨를 지펴내는 두근대는 찬란을 소망이라 부를까요 남루의 골목마다 제 겉옷 벗어주는 빛이 되는 것들은 모두 맨발입니다 부르튼 뒤꿈치로 첨탑 위 올라앉으면 뿔이 돋던 어둠도 귀가 순해지지요 모사꾼의 혀끝에서 갈라져 나간 길 위엔 몰려가고 몰려오는 얼룩진 말의 한 떼, 문 하나가 열리면 다른 문이 막히는 뻔한 스무고개를 속아 넘어가면서/ 죽도록 베낀 것들이 한데, 죄 그림자라니요//

몽상가 류보(柳甫) 씨의 일일 / 류미야
무언가 소멸하고 무언가는 살아오는/ 이 시각, 빛과 어둠은 쪼개지며 붙는다/ 한시에 생겨나고도 두 몸인 일란성처럼// 세 시와 네 시 사이/ 네 시 다섯 시 사이/ 자작나무 숲 어디쯤 시인은 태어나고/ 흰 잠의 밑바닥에다 숱한 꿈을 묻는다// 저를 태운 재로 쓴 자작시를 읊으며/ 비밀의 안뜰에서 홀로 웃다 울다가/ 한낮의 현기眩氣 속으로 훅 빨려든/ 순간,// 제 몸 사라지는 꿈을 뜬눈으로 꾸면서 대로를 질주하는 닳아지는 살들*이 백주의 교차로에서 연신 긋는 십자 성호/ 낮의 광장에서는 소음만 통음되므로/ 사람들의 마음은 바스락대지 않는다/ (입술을 달싹여보지만 소리는 나지 않고)// 깨진 보도블록 위 날개 찢긴/ 나비 하나/ 실바람 한 자락이 밀어 올리는 동안/ 하늘로 떨어지는 꿈 같은/ 불면의 밤이 온다//
* 이호철의 단편 제목

종설(終雪) / 류미야
그날/ 내가 본 것이 그해 끝눈이었다/ 궁벽의 창밖으로 아득히 뛰어내리던/ 죄 없이 지는 것들을/ 처음 생각한 그때// 마침표를 찍으려 계속되는 한 세계가 하얗게 길을 내며 변경邊境을 지워가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나는 돌아누웠다// 죽음이 밝히는 아름다운 비극들,/ 흐느껴 부서지고/ 부시도록 죄 씻어/ 세계의 파국에서야 환히 불 켜지는데// 처음처럼 지금 다시 그 눈/ 내리고// 언제나처럼/ 더 늦어 마지막은 알게 되리라// 미지의 출입구에서/ 섣부르게, 간절해진다//

기리는 노래 / 류미야
만약 神이 계셔 세상 살피러 온다면/ 이런 모습쯤으로 다녀가지 않을까요/ 모질게 모지라진 것들, 그 이름마저/ 품어주는// 누구는 발로 차고 낯엔 침도 뱉겠지만/ 세상 끝을 지키고 선 아름다움 모른다면/ 그 어떤 아름다움도/ 세상 지키진 못할 테죠//

잠든 배 / 류미야
전복된 배 한 척 사장(沙場)에 박혀 있다/ 급물살을 헤치며 늠름하던 이물과/ 능숙히 물목을 잡던 삿대는 부서지고// 부끄럼도 잊은 채 허옇게 드러낸 배/ 어안(魚眼)이 벙벙한지 눈도 껌뻑 않는다/ 갑판엔, 저벅거리며 돌아다니는 햇살// 바다와 하늘을 번갈아 비춰보며/ 푸르게 반짝이던 물비늘의 시간도/ 오늘은 숨을 죽이고/ 곤한 잠에 들었다// 난생처음 닻을 내린 항구는 평화롭다/ 더 이상 눈물바람의 이별은 없으리라// 불 꺼진/ 물고기 잔등// 꽃무지개 한 송이//

강과 새 / 류미야
그를 저가/ 봅니다// 저를/ 그가 봅니다// 그리운 족속들/ 이 별에도/ 삽니다// 가슴속/ 내려앉지 못합니다,/ 내주어야 합니다//

장마 / 류미야
찬 새벽 가슴에/ 장대비 꽂습니다// 바늘귀를 꿰려다/ 기억에 찔립니다// 무언가 더 기워보는데// 손등에 와 젖는 비//

아우라 / 류미야
해바라기 그림이었다// 어둠 속에도/ 잘 보였다// 골똘하게 피어난/ 꽃이 해로 떠 있었다// 스스로 환한 그 빛을/ 아무도/ 끌 수 없었다//

시소 / 류미야
앞뒤 없는 저울이 되어보는 일입니다/ 환호 끝 여지없이 추락을 맛볼지라도/ 한순간 머뭇댐 없이 바닥쳐보는 일입니다// 또는 두려움 없는 배가 되는 일입니다/ 들숨날숨 차오르는 생의 바다 복판에ㅔ서/ 내 안의 밑바닥부터 평형을 잡는 일입니다// 그 마음 중심에는 저울추를 드리워도/ 제 심연을 비추는 거울로 밝혀 든다면/ 먹먹한 밤바다에는 별도 띄울 것입니다//

별 / 류미야
어느 밤/ 동굴처럼 캄캄해져/ 울고 있는데// 터진 눈 반짝이며/ 그들이 내게 말했다// 여기 봐, 날 좀 보라고, 별거 아냐 부서지는 거.//

감자 / 류미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내 아는 그이는 그럴 사람/ 아닌데// 속사정 캐다 알았네,/ 줄줄이/ 잡은 손들//

개미와 우공 / 류미야
제 몸 몇 배 먹이를 개미가 지고 가는데/ 장경판 나르는 듯 간절하고 숙연하다/ 순정한 간구 앞에서 멀리 발을 비켜준다// 그러므로 우공이산은 반쯤 오인된 얘기/ 그건 노력 아닌 개심改心의 이야기다/ 발잔등 깎여나가고 제 몸 허물면서도// 그 산이 옮기어준, 불역不易하려는 마음/ 오늘 한 지극에게 길을 내주었듯이/ 나라면 그러하겠다, 하늘이면/ 신이라면//

생 / 류미야
무작정 날고 싶죠/ 어린 날개는 그래요/ 뜰 땐 떠야 하는 거죠/ 날 때가 생이니까요/ 아무렴 또 어떻습니까/ 곧 착륙인걸요//

심금(心琴) / 류미야
밑줄을 친다 해서 중요해지지 않고/ 방점을 얹는다고 깊어지지 않지만/ 가슴속 거문고 한 줄에/ 세상도 우는 이것//

꽃과 책 / 류미야
바람이/ 넘겨보는 꽃잎은/ 시간의 책장// 생각이/ 넘겨 가는 책장은/ 시간의 꽃대// 각자는 절로 꽃피어/ 서로 닮아 있지요//

반디 / 류미야
한밤중 누군가 저글링을 하고 있다/ 어둠 온통 들쳐 멘 명랑한 빛의 바퀴/ 창백한 푸른 지구의 위대한 부양浮揚 같은// 저 한 점 불씨로 대낮은 지펴진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은 좋다지만/ 생은 그 빛 한 귀퉁이가/ 켰다, 꺼지는 잠시//

맹목 / 류미야
세상 가장 앞뒤 없이 아름다운 말 있다면/ 눈앞 캄캄해지는 바로 이 말 아닐까/ 해와 달 눈부심 앞에 그만 눈이 멀듯이// 큰 기쁨 깊은 사랑 크나큰 마음으로/ 아무것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눈멀어, 아주 한마디로 끝내주는 이 말//

질투(嫉妬) / 류미야
말 속에 들어가본다/ 미워하고 샘낸다는,// 돌아앉은 심중에/ 병[疾]도 있고/ 돌[石]도 있다// 이것을 내 품고 있으면/ 무겁고 아프단 뜻이다//

비누, 파르티잔 / 류미야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세상의// 오욕을 씻어내느라/ 지하로/ 흘러들다// 수포水泡로 돌아간대도/ 비루할 순 없는 일//

봄 / 류미야
저기 춤추는 것/ 무언가/ 바라보니// 나비는 꽃피고/ 꽃향기 깃을 치네// 아니네, 눈부셔 보니/ 멈춰있네/ 나 흔들리네//

인도사과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 류미야
불가촉의 기억 속으로 떠나버린 인도사과// 사과가 사라지면서/ 어제도 다, 사라졌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 인도가/ 난 그립다//

발목 / 류미야
끝내 집을 지키는 건 솟을대문 아니라/ 엎드려 벽을 넘고 시간을 나른 주추다/ 한 생을/ 이고 진 채로/ 지금 그가/ 건너간다//

팔월, 소낙비 / 류미야
푸른 숨 들이키던/ 늦여름의 아가미가// 시간의/ 여울목에서/ 파다닥!/ 진저리치다// 불현듯, 벼락같은 그리움에/ 눈물 왈칵/ 쏟는 날//

​그를 기억하는 수인번호 -휴대폰 / 류미야
자고나면 벽과 쇠가 자라는 나라에서// 잘 해독 된 암호로 보안 된 영혼들이// 영어囹圄의 생을 꾸리며// 오늘도 짐짓 붐비다//

내가 종이컵을 버리는 0.1초 사이 / 류미야
산 것들 앓는 시절에 일회용 무섭다지만// 단 한 번이란 말은 실은 아프고 아픈 말/ 아닌 듯 에두른대도 '다시는 못'이라는 말/ 송두리째 뽑히고 다리마저 끊긴 채/ 갈 길 없는 이역에 볼모로 잡혀와선/ 머리 둘 하늘 잃고도 '기껏 한 번' 소릴 듣는 말/ 불귀不歸 불귀不歸 다시 불귀不歸* 사랑을 영영 못/ 보고 눈감는다는 그 말// 박제된 그리움 하나 방금 구겨질 동안//
​* 불귀不歸 : 김소월,「산」

결핍 / 류미야
말하자면, 이런 공허를 본 적이 없다//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도/ 될 수 없는/ 단 하나, 그것 없음으로/ 세상이 다 차버린 것//

목련나무 그늘에 서면 / 류미야
꽃 지면 안 보이는 칠월의 목련나무/ 보든 말든 푸르고 번듯하고 분주하다/ 땅속의 발가락까지 꼼지락대고 있을 한낮.//

공중저울 / 류미야
하늘 위/ 저울 하나 걸려 있다 기운다/ 벡터*의 양 날개가 수평을 가늠하고/ 고요에 가닿기 위해 깃털 하나 쉬지 않는다// 허공은 단단한 올무,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기류에 편승해도 떠날 줄 알아야 한다/ 마지막 저울질 벗으면 눈금 제로/ 자유다//
* 벡터 : 크기, 방향을 가진 힘

양말 / 류미야
보무도 당당하게 전장으로 나아가/ 하루의 바닥을 기다 녹초로 돌아온다/ 뒤집고 뒤집었지만/ 혁명은 어려웠다//

물구나무서기 / 류미야
절벽을 오르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스스로 벽이 되어/ 칼바람도 들이는/ 한 그루 푸른 나무로/ 발춤 추며,/ 날아오르며,//

감정 교육 / 류미야
집으로 돌아가는 도로 위/ 한 지점엔/ 늘 불에 덴 듯이 그을린 바퀴 자국/ 길들도 같은 곳에서/ 매번 접질리는지// 제 꼬리를 물고 도는 마음 앓는 개처럼/ 언제나 한자리서 길을 잃는 습관성/ 미련의 그 미련함도 병이라면/ 병이지만// 곳곳에/ 비대면의 적의敵意​들이 매복한/ 이곳에선 표정을 지워야만 한다/ 마음을 우물거리다 돌아가는 저녁// 깨진 유리 파편에 발바닥을 베이며 질주하는 몸들이 상처를 껴안는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생에 몸을 대보며//

두 눈은 듣고 귀는 보았네 -고흐의 잠 / 류미야
문제는 가난이나 신병이 아니었네/ 실은 귀를 자른 것, 순전히 별빛 탓이지/ 별빛이 쏟아져 들어와 견딜 수 없던 게지// 말하자면, 귀만큼 밝은 눈도 없어서/ 부신 빛의 노래에 그만 눈이 먼 게지/ 노래가 쏟아져 들어와 견딜 수 없던 게지// 찬란이 드나드는/ 두 개 쪽창 밖으론/ 구름의 소용돌이/ 불타는 나무그림자/ 인간의 마을 같은 건/ 밤별들의 휘하麾下// 그렇게 눈은 듣고 귀는 알아보았네/ 먼 시간을 달려와 도착한/ 빛의 타전,/ 그 소식 받아들고야/ 그예 잠에 든 게지//

​레트로액티브 Retroactive* / 류미야
비극의 입구에선 차가 늘 고장 난다/ 파국을 막으려고 뛰어들어 보지만/ 현재는 과거의 오작동, 현실은 낮의 악몽// 우리에게 그런 날 다시 올는지 몰라// 지겨워, 꽃빛 지겨워,// 초록을 낭비하며// 물 쓰듯 뻐꾸기 울음 흘려보낼// 그 봄날//
* 시간여행을 다룬 루이스 모노 감독의 1997년 작.

드리나강의 다리* / 류미야
흐른 건 물 아닌 다리였다, 멍들어/ 핏물 밴 종아리로 흐르며 건너왔다/ 삶이란 되풀이되는 견고한/ 어떤 추상抽象// 사백 년은 살기도, 죽기도 짧은 시간/ 다리가 세워지고 인부들 죽어나가고/ 제국의 흥망성쇠가 여울지는 그사이// 모조리 흘러갔으며, 제자리에서 죽었다 바다로 간 핏물은 하늘로 다시 올라 저무는 지상의 눈가는 늘 붉게 짓무른다// 강의 이쪽저쪽도 변한 건 전혀 없다/ 꽃잎들 흘린 피로 수심만 더했을 뿐/ 적의는 늘 강의 저편을/ 조, 준, 하, 고, 있, 다,// 드리나/ 드리나// 일렁이는/ 물살의// 끝없는/ 핏빛 강물/ 아직 서서/ 건너는// 고통에/ 무릎을 담근/ 세상 모든/ 종아리여//
* 보스니아의 비셰그라드에 있는 강과 다리. 이보 안드리치의 동명의 소설 속에는 이곳에 얽힌 400년 분쟁의 역사가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고독의 안부 / 류미야
버티던 페북*을 일 때문에 시작했다/ ㅡ외로운 섬들이 모여 다도해가 됐구나/ 이곳도 안 계신 분은/ 찾아뵙기로 한다//
* 페북 : 페이스북

그리운 오지奧地 / 류미야
5G* 시대에 오지는 사라졌다// 신전이 도굴되고 땅이 정복되는 동안 활과 활자 사이로 번성하는 폐허, 살 같은 날은 흘러 길은 지하로 스미고 지도가 정교할수록 꿈은 희미해졌다 관광객 나르느라 과로사한 낙타와 인간을 무동태우다 녹아내린 만년설은 셀카의 배경으로나 세계에 타전되고 그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 시궁 뒤편, 궁핍의 민낯은 늘 도색塗色으로 덮였다 불면의 도시에 출몰하는 신기루, 영롱한 빛의 궁륭 홀로그램 그늘에는 고독사한 심장과 몰래 버려진 개들, 렌즈 속에만 사는 야생화, 두메로 가 죽는 별……// 야만을 벗어날수록 인간에서 멀어진,//
* 5G : 초고속, 대용량, 초연결, 초실시간을 특성으로 하는 사물인터넷.

​전지적 지구 시점 / 류미야
이 극劇에 대하여는 평점을 사양느니,// 제1막의 주인공은 망망대해 바위섬, 침묵의 대사를 절도 있게 연기하며 온 생이 해지도록 혼신을 쏟고 있다 제2막의 주연은 눈길을 끄는 주목나무, 그늘 몇 번 흔들자 천년이 훌쩍 간다 그 아래 끄덕이는 단역전문 풀꽃들 ㅡ 관객 하나 안 든 날도 잎 하나 거르지 않는, 기실 이들이야말로 이 무대의 일등공신 ㅡ 일월과 성신이 조명으로 껐다 켜지면 한 천년 또 흐르고 그때마다 투덜대며 지나가는 사람 1, 2……// 대본은 아직 집필 중/ 결말은 알 수 없다//

어떤 풍경 -청량리 / 류미야
철식판/ 튀는 소리// 드잡이…/ 악다구니…// 생을 놓친/ 사람들// 줄 때문에/ 다투는,// 정오의/ 무료급식소// 밥알/ 나누는/ 비둘기 몇.//

그들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 류미야
회벽이 자라나는 도시에 밤이 들면// 낮의 동굴로부터 도망쳐 나온 사람들 유목의 불빛 아래 하나둘 모여든다 피차 꿈속이라는 걸 어쩌면 예감하는, 어디든 황야거나 가설무대이지만 발설의 파국에서 극劇은 끝나버리므로 연신 출렁거리며 마음을 삼켜본다 뒤집는 불판 위에서 춤을 추는 살점들, 눈빛 덜컹거려도 비포장의 어둠 속 마차는 달려가고… 마차가 멈추어도 사람들 달려가고… 세상 큰물에 속 뒤집힌 토사물에 떠내려가고…// 캄캄한 낮의 어둠 뒤 환한 밤의 주막에서//

​순수의 시대 / 류미야
시절을 풍미했던 한 노老시인,/ 행사장에서// 최근작 좋단 말에/ 아이처럼 기뻐했다// 아직도 그의 시대가 가지 않은 증거였다//

레 미제라블 / 류미야
날아든 돌멩이가 뾰족할수록 말여, 맞은 놈 설움이사 갑절 더한 벱이제 그러니 농이나 진탕 눙치든지 말든지// 자자, 이거나 들어 속 푸는 덴 최고니께 속 쎅이고 따짐 뭐혀 죄다 한통속인 걸 참말로 생각헐수록 웃기는 짬뽕들이제// 울 거튼 무지랭이야 안중에나 있겄어? 거 뭐냐 표 구헐 땐 지렝이같이 기더구만 그 담달 이짝 동네는 강제철거 들갔당게// 넨장할, 어째 인생이 살수록 겨울인감 울 엄니 아부지는 세월 어찌 녹이셨누? 철들자 무덤 가겄네… 억울해서 워쩌// 분탕질 쳐보든가 쌈박질 해보든가 머리 박고 대거리한들 뾰죽한 수나 있간디? 자 자 자, 술이나 먹자고 피차 진탕 아니겄어?//

​근린(近隣) / 류미야
전갈과 사막여우가/ 한집서 살 순 없지만/ 먼 듯해도 악어와 악어새는/ 동서同棲이다// 누 옆엔 누가 또 있고 누가 있고 또 누가……// 해바라기 달맞이꽃이/ 같은 볕 쬘 순 없지만/ 지렁이 솔이끼는/ 한 어둠 먹고 산다// 대나무 옆은 대나무 또 대나무 대나무……// 좋은 사람 곁에는/ 맞춤인 듯 좋은 사람/ 아닌 사람 곁에는/ 맞춘 듯이 어깨를 건/ 그 사람, 그 옆의 사람 아닌 사람 아닌……//

물오르는 봄 / 류미야
간절히/ ​사람을 믿고 싶었던 그때// 간신히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다// 허투루 맹세 않은 것은 돌아온다/ 반드시//

붉은 사과를 기다리는 풍경 / 류미야
어디로 부쳤나요?/ 심장처럼 빨갛고/ 다디단 향내와 과즙이 뚝뚝 듣는/ 택배가 오지 않네요/ 대체 언제 오나요?// 그사이/ 들끓는 분화의 입 닫아걸고/ 움푹 팬 가슴은 저를 태운 재에 묻고/ 눈시울 다 해지도록 서녘으로 집니다// 모든 둥근 것들은 눈물이 기른다는데/ 영혼쯤 깃들어야 열매 아니던가요/ 그러니, 붉게 잘 익은/ 진실(眞實)로 보내세요// 올 것은 오지 않고 풍문만 도착하네요/ 듣기엔, 애초 진심은 동봉하지 않았다는데……// 사과를 받지 못했어요/ 대체 언제 오나요?//

호구 이야기 / 류미야
산사 입구 그 묵집, 개 한 마리 있었지요// 어찌 잘 따르는지 사람들 예뻐했죠 주인이 지은 이름도 좋은 개, 호구好狗였어요 머릴 쓰다듬으면 꼬리가 뱅뱅 돌고 먼 데서도 주인을 펄쩍펄쩍 맞는 품이 어디 먼 파병이나 다녀온 듯싶었죠 하룻강아지 때부터 사람 손 탄 호구, 사람을 밥처럼 하늘처럼 믿는 호구, 참말로 니 호구대이, 놀리기나 했지요… 잊었던 그 산사 한참 뒤 찾았을 때 어쩐지 다릴 끄는 호구를 보았어요 어느 봄 꽃잎 터지던 밤 일이었다나 봐요 먼 도시서 원정 온 개도둑 일당들이 순하디순한 호구의 목줄을 홀쳐맸다죠 그렇게 한참 끌려가다 도망쳐 왔다지요… 발톱이 으깨지고 목살 찢기면서도 한사코 돌아왔다죠 사랑하는 제집으로… 그날 이후 밤만 되면 시름시름 앓던 호구, 낯선 손엔 움찔해도 이내 주억거리며 부러진 돛대 같은 꼬리를 펄럭이던,// 호구는 세상 다시없을 착하디착한 개였는데요,//

목격자 / 류미야
나라님이 바뀌고 새 길 수태 났어도/ 그는 한자리서 죽은 듯이 살았다/ 흙먼지 이는 땅에는 머리를 조아리며// 학문은 전무하나 천문을 헤아리니/ 갈급한 마음으로 하늘 향해 기도하며/ 시간도, 살이도 모두 속으로만 새겼다// 한 해는/ 사랑에 목멘 한 청년이 흐느끼며/ 새벽 산 오르는 걸 지켜보기도 했는데,/ 애타는 손사랫짓을 끝내 못 본 듯했다// 가장 오래 살아남아/ 가장 오래 아파온 자,/ 그늘 많은 얼굴로 이곳 어귀를 지키는/ 그이를 동리 사람들은/ 서낭이라 부른다//

데스마스크 / 류미야
입술을 가렸을 뿐인데 어제가 사라졌다// 모르게 새 나오는 비명을 틀어막듯 소리를 누르느라 창백해진 흰 손바닥, 한 벌의 마스크는 미리 입어본 수의壽衣다 죄 없는 침묵으로 들끓는 지난날들을 제 손으로 염殮할 동안 육탈한 말의 뼈는 고요 속으로 든다 생의 민낯, 맨몸을 처음으로 만지며 거울 속의 다른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간,// 죽음을 살아보면서 비로소 살아 있는//

냉정과 열정 사이 / 류미야
평화를 걱정한다고/ 평화가 오진 않지/ 손에서 다만 총을 버리는 일이 필요할 뿐/ 여린 꽃 꺾는 손길을 붙드는 일 필요할 뿐// 저울을 생각한다고 공평해지진 않지/ 아니, 그보다는/ 공정이 필요할 거야/ 웃자란 것들에게도 더러 사연은 있을 테니// 온 힘으로 무너지는 꽃들을 한번 보아/ 그 어느 잎 하나, 슬픔을 생각하겠니/ 그래서 꽃 피는 거야/ 다음 봄이 오는 거야//

물음표에게 길을 묻다 / 류미야
문問 밖에 내걸렸다/ 귀 닮은 미늘 한 촉// 그 아래 묵직한 납추 같은/ 눈물 한 점// 깊은 곳 드리우라는/ 아주 오래된 전언//

노새의 노래 / 류미야
세상에 없으면서 있는 것이 있지// 오월 장마당은 옛길 너머 사라지고 그을린 농투성이 옷을 바꿔 입었어도 땅은 바로 그 땅 울 엄니 눈물이 밴 그 길 타박이며 하냥 걸어왔다네 목청 다 떼고도 즐거운 나는 노새, 벌거숭이 황톳길 천둥 치듯 닦이고 등꽃 박꽃 칡넝쿨 베어지고 뽑혔어도 길은 기억하지 사라진 것들의 발소리 거친 풀 한 줌이면 푸르르 길을 끌며 근본 없는 목숨이지만 말보다 오래 사는,// 세상엔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 있다네//

백년추어탕 / 류미야
연희동 삼거리를 소롯이 꺾어들면/ 미끄러진 세월 같은 모퉁이길 옆으로/ 한 백 년 기다린 듯한/ 처마 낮은 그 집// 발목 푹푹 빠지는 흙탕길을 헤치고/ 자꾸만 비꾸러지는 진 하루를 부리면/ 한소끔 뚝배기 돌도 어깨를 추어주던,// 오래전 나 거기서 힘을 얻어 오곤 했네/ 파닥이는 꼬리로 어둠을 밀뜨리며/ 서리 낀 가을 저녁을 추어처럼 돌아오던 곳// 이제는 있는지 모를 투박한 간판이나/ 주인은 바뀌어도 내겐 옛집 사랑舍廊 같은/ 되짚어 백년손님처럼 굽이굽이 닿고픈 곳// 다시 한 백 년쯤 더 그곳을 지키다가/ 불 꺼진 가랑잎 같은 누군가 찾아들어/ 뜨겁게 지펴졌으면 싶은/ 그곳, 백년추어탕//

​나비에게 / 류미야
너를 말하기로는 이것이 좋겠네/ 무혈의 전사轉寫, 혹은/ 그림 없는 데칼코마니/ 무위의 붓자국으로/ 그려낸 풍경// 두 귀를 여는 곳/ 두 손을 펴는 곳/ 결코 바닥나지 않고 거덜 나는 법 없는/ 그 자리, 잠깐 사이로/ 흐르는 영원// 세상 젖은 날개로는 날아오를 수 없네/ 하늘대는 숨처럼/ 하늘처럼 가볍게/ 꽃자리, 그마저 잊고/ 다만 빛으로/ 그렇게//


 

            다행한 일 / 류미야

이 생에서 나 하나 잘한 일이 있다면/ 고요한 견딤으로 기다릴 줄 알았단 것/ 이윽히 나비 날갯짓 바라볼 줄 알았던 것//
바람 지난 자리에서 꽃잎 가만할 때까지/ 여윈 겨울나무에 여린 꽃눈 돋기까지,/ 멍 그늘 짙은 숲 속에선/ 가만 손등 감싼 것도//
금빛 햇살 자란자란 물무늬 이는 강변/ 드러난 나무 밑동 위 낙엽을 덮어주며/ 갈대의 겨운 속울음 춤이 되는 걸 바라보네//
별들의 불면 곁에서 선잠을 자다 깬 듯/ 이 생에서 나 무엇도 이룬 것 하나 없지만/ 고요히 바라보는 행복/ 알게 된 일 참, 다행이네// ​

 

눈먼 말의 해변 / 류미야
하루 사이에도 몇 번의 봄과 겨울이 다녀간다./ 그 계절을 근근이 나며/ 나를 잃지 않으려 애쓴다./ 길은 없어도 좋다./ 없는 길은/ 잃지 않을 것이다.// 첫 마음의 불씨 앞에/ 다만, 동그랗게/ 손을/ 모아본다.//

말들의 해변 / 류미야
울음 다 쓰고야 오는 그곳/ 다락 같은 말들과 당나귀 뛰노네/ 일평생 시마詩魔 달래다/ 끝내 눈먼 그들*도//
* 시인 호머는 장님이었으며, 박경리는 말년에 시 ‘눈먼 말’을 남겼다.

 

독자에게 / 류미야
몽테뉴가 수상록* 첫머리에 쓴 말이지// “독자에게.”// 이 얼마나 친애하는 표현인가/ 그리곤/ 자기발각을 시도한 것이라네// 문자는 벗지 못할 불가피의 가면,/ 가문의 성을 내건 몽테뉴 성 안에서/ 스스로 위리안치되어/ 내면에 든 것이네// 사위 벽 내려다보는 램프심지를 돋우며/ 묻기 좋은 그 밤들/ 더듬어 걸었겠네/ 캄캄한 인간의 우주, 삶이라는 칠흑을// 독자獨自인 자신에게 악수를 건네면서/ 제 모습 거울 속에 하염없이/ 비춰본 건/ 영혼이 뼈가 되도록/ 골몰하는 일이었네//
* 수필(essay)의 효시.

곁 / 류미야
상자 속 귤들이 저들끼리 상하는 동안// 밖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무심하다// 상처는/ 옆구리에서 나온다네, 어떤 것도//

그래서 늦는 것들 / 류미야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혹은 한자리에서 잊히거나 하는지요/ 날리는 저 꽃잎들 다 겨울의 유서인데요// 그런 어떤 소멸만이 꽃을 피우나 봐요/ 사랑을 완성하는 것 물그림자에 비친/ 언제나 한발 늦고 마는/ 깨진 마음이듯이// 철들고 물드는 건 아파 아름다워요/ 울음에서 울음으로/ 서로 젖는 매미들/ 제 몸을 벗은 날개로 영원 속으로 날아가요// 폐허가 축조하는 눈부신 빛의 궁전/ 눈물에서 열매로/ 그늘에서 무늬로/ 계절이 깊어갈수록 훨훨/ 가벼워지네요//

한밤의 몽상 / 류미야
빛 없는 어둠 속은 숨을 데가 없지요/ 한 치 앞 못 본단 건/ 쉽게 들킨다는 뜻/ 숨느라 바짝 붙어선 벽 관절이 투둑대요// 냉담했던 냉장고의 흐느낌 들었나요/ 퉁퉁 부은 고독은 골목마다 다니는데/ 목덜미 문득 서늘할 땐 그가 곁에 온 거죠// 오래전 관습들만 그림자로 살아남아/ 흔들의자에 앉아 시간을 짜 늘이면/ 그 줄 끝 붙들린 우린/ 인형처럼 춤춰요// 의지라고 착각한 납덩이를 매단 채/ 새도록 달립니다, 심지어/ 꿈속에도/ 한밤 내 벽을 긁으며 고양이는 경고해요// 빛 없는 어둠일수록 민낯이 잘 보여요/ 숨을 데는 많지만/ 숨 쉴 수 없는 낮을/ 용케들 걸어 왔네요,/ 이리 순한 얼굴로//

기리는 노래 -무명 시인 / 류미야
꽃빛은 열흘이고 연모는 세 해라지/ 해지고 달뜬 마음 밤낮 대신 우느라/ 늙어갈 얼굴이 없어/ 아름다운 사람아//

            ​터미널 국밥집 / 류미야

마음이 종착인 날은 터미널로 가보자/ 보따리에 실려 온 고향 내음도 맡고/ 설렘과 아쉬움이 빚는 풍경에 젖어보자//

그래도 못내 허전커든 국밥집에나 들어/ 소박한 허기가 부른 맑은 식욕을 느끼며/ 어느새 어깨에 내린 어둠까지 말아보자//

마른 생도 젖은 생도/ 밥보다 뜨거울까//

쩔쩔 끓는 국물에 눈콧물 다 쏟아내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삼키고 돌아오자//


괄목 혹은 괄호 / 류미야
한 줄은 허망하게 이렇게 써버렸고// 외줄로 휘청이는 삶을 붙잡는 데만 버티며 버성기며 한 생을 써버렸네 말에도 채 못 담은 마음이 많았으니 하루는 너무 길고 영원은 너무 머네 어제는 봄꿈 같아 해종일을 울다가 제 허물 들쓰고 생사 잣는 누에처럼 사각사각 사각사각 글자를 파먹었네 무성하고 쓰디쓴 잎들을 삼키면서 그늘 속 일들에만 부릅뜨는 나의 능사,// 마지막 이 한 줄 속에 못다 한 말 남기네//

​올해의 시 / 류미야
모든 꽃이 곧 시니/ 모든 시인은/ 절정이다// 10선 100선 안 뽑혀도 산 만큼/ 시의 날들/ 시 쓰는 모든 새벽은/ 태초의 어느 아침// 귀먹은 돌멩이가 늙은 솔을 괴고 있는/ 오늘의 들판이/ 풍경으로 피고 있다// 저 중에/ 고운 백 가지/ 가려 무엇 할 건가//

 



류미야 시인
경남 진주 출생. 서강대 대학원 국어교육 석사 수료.

2014년 제3회 님의침묵 전국 백일장 장원, 2015년 《유심》 시조 등단.

웹진 월간 <공정한 시인의사회> 발행인 겸 주간.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창과 초빙교수.

시집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눈먼 말의 해변』

2018년 공간시낭독회문학상, 2019년 올해의시조집상, 2020년 중앙시조신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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