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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라연 시인

부흐고비 2021. 6. 24. 08:29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 더욱//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 박라연
죄 없는 세계의 절반을 점거했을 때에도/ 누군가의/ 따뜻함은 흘러가 사과를 붉어지게 하고/ 상처는 흘러가 바다를 더 깊고 푸르게 하는 걸까//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제 이름을 부르며 어디까지/ 나아갈까/ 아픔에게 포위되지 않으려고 나무를 뚫고/ 물을 뚫고 언제까지 다이빙할까// 그런데 이 마음은 또 뭐지/ 성난 불우에게 아군이고 싶은 이 마음 말이야/ 마음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금빛 물결은 누가 보낸 설렘이지/ 위로의 빛은 어디서 오나// 헤어진 이름을 수없이 부를 때 딱/ 한번은/ 나타나주는 순간 바다였을까/ 내 떨림의/ 물결 한가운데서 붉은 해가 떠올랐다//

그래서 / 박라연
무심도 하셔라/ 불구덩이에 던져놓고 어찌 이리도 태연하시나// 하늘이 나의 애인인 적 없다 그래서// 불타는 귀와 눈과 입을 꺼내어 호미든/ 칼이든/ 낫이든 만들어야 한다//

나의 어머니 / 박라연
배꽃처럼 고우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 무릎을 깎듯 산 하나 깎으시며/ 홀로 지켜주신/ 지아비의 풍류에 산도/ 들도 인정마저 돌아눕던 날/ 고첩까지 외가로 데려가시던// 못다한 어미 사랑/ 초향골 골골이 할미꽃 피더니/ 어느새 칠순/ 자식 사랑은 속사랑이/ 진짜니라 우리는 텃밭에서/ 무우꽃으로 자라고//

내 작은 비애 / 박라연
소나무는 굵은 몸통으로 오래 살면 살수록 빛나는 목재가 되고/ 오이나 호박은 새콤달콤 제 몸이 완성될 때까지만 살며/ 백합은 제 입김과 제 눈매가 누군가의 어둠을 밀어낼 때까지만 산다는 것/ 그것을 알고부터 나는 하필 사람으로 태어나/ 생각이 몸을 버릴 때까지만 살지 못하고/ 몸이 생각을 버릴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단명한 친구는 아침이슬이라도 되는데/ 나는 참!/ 스물 서른이 마냥 그리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슬펐다/ 딱 한 철 푸른 잎으로 파릇파릇 살거나 빨강 보라 노랑 꽃잎으로 살거나/ 출렁 한 가지 열매로 열렸다가 지상의 치마 속으로 쏘옥 떨어져 안기는/ 한 아름 기쁨일 수 없는지 그것이 가끔 아쉬웠다.//

난쟁이 / 박라연
우리는 언제나 맨 앞줄에 섰다/ 궂은 비 내리는 곡마단에서 또 다른 일터에서/ 시든 잎새들을 반짝이게 하면서/ 낮게 삭아내린다/ 우리가 이처럼 낮아질 때/ 비로소 꽃이 피는 이웃의 잎새들/ 우리를 난쟁이라 부르는/ 저 키 큰 미루나무/ 밤마다 오히려 낮아져서는/ 우리 키를 올려다보며 흔들리고// 무릎까지 흘러내린 차디찬 슬픔/ 문득 흰 그림자로 서 있는/ 어둡게 잊었던 내 키를 껴안으며/ 나직이 그리운 이름을 부를 때/ 막다른 골목에서 말갛게 떠오르는 얼굴/ 빨랫줄의 새하얀 속옷처럼 반갑다/ 우리가 또다시 떠돌이별이 되어/ 어두운 어두운 곳으로 흐르지만/ 흐르면서 잊어가는 우리 슬픔 부름켜//

편지 / 박라연
갑자기/ 서로를 모른다고 해야 할 때/ 예전에 무심히 드린 편지/ 편지 쓸 때의 내 고운 생각들이/ 손때 묻은 서랍에서 책갈피에서/ 샛노란 유채꽃으로 피어나/ 그대를 흔들어 깨울/ 튼튼한 아이 하나 낳아주고 떠나온 양/ 마음 든든하다고 그렇다고/ 쓸쓸한 퇴근길 육교 위에서/ 새하얀 눈송이로 펄럭이는/ 편지//

편지 2 / 박라연
15년생 철쭉을 물끄러미 본다/ 너도 이사왔니?/ 이별을 아는 꽃, 그 꽃의 색조는 햇살을 만나면 이슬이 맺히는가?/ 소리없이 우는 여자처럼 아름답다/ 산 속의 미생물조차 春情을 이기기 어렵다는데/ 어미솔 부엉이 곤줄박이 날갯짓/ 내가 두고 온 우면산 내가 두고 온 메타세쿼이아는 잘 있는지?/ 연한 잎새 사이에 불던 바람도 잘 있는지?/ 동굴 깊숙한 곳에 거꾸로 매달려 새끼를 낳는다는/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 출산을 한다는 박쥐/ 박쥐처럼 나는 너의 절망에 대롱대롱 매달려/ 살아있는 흔적들을 낳고 싶었다//

탈 동물적인 / 박라연
밤 9시 뉴스 화면에서/ 자동차 경주하는 도로에 뛰어든/ 캥거루 A를 보는 순간/ A의 그림자 속에서 또 다른 무수한 A를/ 나를 보았다// 저렇게라도 한 번 겨뤄보고 싶었겠지// 용기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줘서 감사해/ 죽지 않고 살아 나와서 축하해/ 카 레이서들에게 피해주지 않고/ 멈춰줘서 고마워// 비겁한 순간들이 양식인 동물세계에서/ 더는 굴욕만을 치료약으로 삼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 저를 다 걸고 세상 밖까지/ 뛰어든 용기에 박수!/ 캥거루 A 만세//

집밥 한 끼 / 박라연
아이 맡길 곳이 절박해지자/ 정으로 똘똘 뭉쳐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물의 대화 사이로 입술을 쭈욱 내밀더군요/ 물결엔 반드시 모성이 있다고 믿게 되었던 거죠/ 주저함 없이/ 겨우 중학생이던 아들의 뼛가루를 뿌리더군요/ 뼛가루가/ 뿌리내린 듯싶은 거기를 해마다 찾아가네요/ 한 해에 한 끼라도 챙기고픈 엄마의 손을 알아본 물결은/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입을 벌려주네요/ 또 그 마음을 알아차린 엄마는/ 흰 국화 꽃잎을 정성껏 따서/ 한참을 던지더군요//

아름다운 너무나 / 박라연
우리가/ 누린 적 있는 눈부신 시간들은// 잠시 걸친/ 옷이나 구두, 가방이었을 것이나// 눈부신/ 만큼 또 어쩔 수 없이 아팠을 것이나// 한 번쯤은/ 남루를 가릴 병풍이기도 했을 것이나// 주인을 따라 늙어/ 이제/ 젊은 누구의 몸과 옷과/ 구두와 가방/ 아픔이 되었을 것이나// 그 세월 사이로/ 새와 나비, 벌레들의 시간을/ 날게 하거나 노래하게 하면서// 이제 그 시간들마저/ 허락도/ 없이 데려가는 중일 것이나//

늦깍이 / 박라연
햇빛만 따라다녔다/ 비탈길 오르던 아픈 스무 살/ 함께 자란 친구들이 지성인의 손수건을 흔들며/ 흔들며 떠나갈 때/ 빈 교정에 남아 우리는/ 누군가 흘린 꿈 조각을 줍는다/ 희고 넓은 이마로 웃고 있는/ 잘 자란 약력들이/ 눈송이처럼 추운 눈동자 속으로 녹아내리는 밤/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창문 너머 그믐달이 손잡아 끌지만/ 귀 붉히며 돌아서는 노란 은행잎/ 떨며 흔들린다 오를 수 없는 나무 아래서/ 잔뿌리며 사랑이며 한세상 헝클어진 넝쿨이며/ 늦게 늦게 우리는 자라/ 허물도 그만큼 늦게 벗는다//

목련 / 박라연
읽어야 할 책 많은데/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들이 손톱끝에 피어나/ 내 손 끌어 문을 열더니 오메!/ 우수수 져버린 목련꽃 새하얀 숨소리/ 유언처럼 어서 귀담아 들어라 하네/ 제 몸에 지닌 것, 그 중에서 귀한 것일수록/ 빨리 잃어야 한다는 일,/ 그 뜻을 분별할 줄 아는 목숨일수록/ 몸 무거워 쉬이 떨어져 눕는다고/ 그 마음 아직 눈치 못 챈 우리는/ 봄 꽃 보고 꽃피었네 꽃피었네 좋아만 했는데/ 땅만 보고 걷는 눈길이며/ 더 이상 추울 수도 없는 가슴들 만날 때마다 목련은/ 에미 젖돌 듯 꽃꼭지에서 더운 피 돌았었다고/ 나는 겨우내 눈이나 붉히며 다시 책장을 여니/ 장자 노자 ....../ 꽃피고 지는 일 그 속뜻부터 읽고/ 다시 만나자면서 내 얼굴 밀어내는 책 속의 얼굴이여/ 남은 봄이 너무 짧구나//

지리산 고로쇠나무 / 박라연
1/ 오얏골에 봄이 오면/ 사람들의 죄 씻어주기 위하여/ 일제히 눈뜨고 팔 벌리는/ 늙은 고로쇠나무/ 아무런 생각 없이 예수가 되어/ 물관부의 오른쪽과 왼쪽에/ 칼을 꽃고 피 흘린다/ 우리 아픈 점액질은 밤마다/ 산을 물어뜯고/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어서/ 한철 내내 속이 쓰린 나무들/ 전생애의 옷을 벗는다/ 벗어버린 고로쇠나무 몇몇 씨앗들이/ 빛을 향해 뻗쳐오르고/ 오르던 푸른 팔들이/ 하늘 끝에 감전됐다 싸늘히/ 슬픈 눈빛으로 빛나던 수액들은 지금/ 흐르고 싶다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반야봉 낮은 기슭으로// 2/ 시퍼렇게 잘려진 산맥 허리마다/ 깊어가는 죄만큼 슬픔만큼/ 발목에 붕대를 감고 서서 기다리는/ 지리산 고로쇠나무 달궁마을에서/ 산안개 내려와 투박한/ 그대 어깨를 주무를 때/ 눈물 흐른다 흐르는 눈물 밟으며/ 밤새워 걸어가면 만날 수 있을까/ 떠나온 산 안 잊히는 얼굴들을//

겨울 사과나무를 위하여 / 박라연
제 키를 낮춘 만큼/ 탐스럽게 열리는 여자의 아이를 위해/ 앉은뱅이처럼 주저앉으려 하는 당신/ 온몸을 슬프게 구부리고만 있는 당신을 문득/ 태초의 어머니라 부르고 싶다/ 어쩌다가 벗은 몸의 처절한 자태를/ 나는 보고 말았는지/ 그때 그 순간은 이미 친숙한 운명이 되는지/ 내 죽어 한 그루 사과나무로 돌아와야 한다면/ 더 높이 솟아오르기 위해 숨을 쉬는 나무들/ 그들이사 짐작도 못 할 따뜻한 수액들을/ 둥글게 둥글게 공중에 매달아두리/ 어느 쓸쓸한 가을밤 홀로 눈떠/ 온몸의 붉은 반점들을 빠짐없이/ 달디단 사과라 이름 붙이어 놓으리//

사슴꽃장미나무 이야기 / 박라연
누구 본 적 있으세요/ 세상을 뚫고 나아가/ 한마리 새 되어 날지 못했을 때/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새 되지 못한 뼈들이 얼기설기/ 가시가 되거나 철사줄이 되었을 때/ 가시와 철사줄이 사이좋게/ 제 몸의 뼈와 살이 되어주었을 때/ 한 떼의 초록빛 시체들이/ 가시를 뚫고 철사줄을 뚫고/ 나비 되어 날아오르던/ 그 순간을 누구 본 적 있으세요/ 나비들이 두 뿔을 지나 긴 목을 타고/ 허리부터 발끝까지/ 사슴꽃장미나무의 새순으로/ 제 목숨을 바꾸어 매달리던/ 그 순간을 누구 본 적 있으세요/ 안 보이는 길을 걷기 위해 한없이 길어진 다리/ 한 그루 사슴꽃장미나무가 된 그녀를/ 누구 본 적 있으세요//

무화과나무의 꽃 / 박라연
나는 피고 싶다./ 피어서 누군가의 잎새를 흔들고 싶다.// 서산에 해지면/ 떨며 우는 잔가지 그 아픈 자리에서/ 푸른 열매를 맺고 싶다 하느님도 모르게// 열매 떨어진 꽃대궁에 고인 눈물이/ 하늘 아래 저 민들레의 뿌리까지/ 뜨겁게 적시어서/ 새순이 툭툭 터져오르고/ 슬픔만큼 부풀어오르던 실안개가/ 추운 가로수마다 옷을 입히는 밤/ 우리는 또 얼마만큼 걸어가야/ 서로의 흰 뿌리에 닿을 수가 있을까/ 만나면서 흔들리고/ 흔들린 만큼 잎이 피는 무화과나무야// 내가 기도로써 그대 꽃피울 수 없고/ 그대 또한 기도로써 나를 꽃피울 수 없나니/ 꽃이면서 꽃이 되지 못한 죄가/ 아무렴 너희만의 슬픔이겠느냐/ 피어도 피어도 하느님께 목이 잘리는/ 꽃, 오늘 내가 나를 꺾어서/ 그대에게 보이네 안 보이는/ 안 보이는 무화과나무의 꽃을//

메타세퀴이아나무 아래서 / 박라연
메타세퀴이아 그대는/ 누구의 혼인가/ 내 몸의 뼈들도 그대처럼/ 곧게곧게 자라서/ 뼈대 있는 아이를 낳고 싶다// 헤어질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빈 가지를 흔든다/ 주고 싶은 무엇을 찾아내기 위하여/ 슬픔을 흔들어 털어버리기 위해서// 못다한 사랑은 함부로/ 아무에게나 툭툭 잎이 되어 푸르고/ 누구든 썩은 삭정이로 울다가/ 혼자서 영혼의 솔기를 깁는다// 내가 내 눈물로/ 한 그루 메타세퀴이아가 되었을 때/ 쓸쓸히 돌아서는 뒷모습/ 빗물처럼 떨어지는 슬픔을 보았지만/ 달려가 그대의 잎이 되고 싶지만/ 나누지 않아도 함께 흐르는 피/ 따뜻한 피가 되어 흐른다//

지금, 그 나무의, 그림자 / 박라연
지금 여기는 어디쯤일까// 까닭 없이 저 많은 씨앗들이/ 기차로 트럭으로 먼 길 떠나도/ 또다시 비어 있는/ 스스로 비워두는 아득함으로 서 있다/ 헐렁해진 품안에/ 딱딱하게 감겨오는 피로/ 너조차 살아 있는 날의 행복한 이파리/ 밤이면 어린 일을 다독거린다/ 등걸에서 묵은 가지에서/ 주름진 속살로도 연초록 그늘을 드리워/ 긴 여름을 서늘하게 하는 나무/ 새순 트던 자리가 가려워지면/ 스스로 이슬을 빚어 씻어내리는/ 무등산 등나무야 너의/ 긴 그림자로 사라진 것들을/ 덮어다오//

이름 모를 나무 아래서 / 박라연
햇빛을/ 줍기 위해서 찾아간 언덕/ 저 혼자 서 있는 나무/ 나는 그대 이름을 아직 모른다/ 온몸에 버짐처럼 번져 있는/ 살아온 날의 생채기/ 나를 닮아 가늘고 어설프구나/ 바구니의 햇살/ 그대에게 다시 주면/ 근심 많은 뿌리까지 후끈 달아올라/ 부스스한 살갗을 뚫고 나오는/ 새 새끼 가지들/ 이제/ 따뜻한 땅은 너무 좁아/ 제 품안에 제 무덤을 파야 하는 저/ 이름 모를 나무 아래서/ 나는//

연꽃 / 박라연
너와 나/ 생활의 광장에서/ 살아 있는 욕으로/ 아름다운 꽃이 되는/ 오늘은 꽃이지만 어제는/ 널따란 연잎에 목줄을 걸고서/ 죄조차 사랑했겠지/ 크고 작은 근심들은/ 청순한 뿌리 속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간다 오늘은/ 모두가 꽃으로 살다 가는//

풍란 / 박라연
살면서/ 가장 목이 마를 때/ 긴 물관부를 흔들며 꽃눈을 튼다./ 터서는 1백일 지지 못해/ 향기로운 혀 내밀고 서 있다./ 밤이면/ 하얀 뿌리털 잘게 흔드는 한숨 소리/ 떠날 날을 미리 알고/ 한 점 벼랑에서도 대를 잇는 뿌리들아/ 이 땅의 잡초보다 처절하구나/ 숨진 네 그리움의 뿌리를/ 풀이끼로 포근히 감싸준 그날/ 삐죽이 고개 내민 새끼 촉 하나/ 아하, 서로의 눈빛만으로/ 새끼를 치는구나 사랑하므로/ 헤어져 사는 너희들은//

예전에도 우리는 나무의 나뭇잎이었을까 / 박라연
예전에도 우리는/ 나무의 나뭇잎이었을까/ 가을의 목덜미에 잎잎이 매달려/ 눈부시게 흔들리는 한세상/ 멀미하다 쓰러져 누운/ 누군가의 생애 같은 잎새들/ 생각마저 꽁꽁 얼어버리면 우리는/ 또다시 순결한 잎이 될 수 있을까/ 너와 나 세상살이는 때때로/ 혼자서만 손을 흔들게 하지만/ 바퀴도 날개도/ 보호색도 없는 우리는/ 우리 닮은 잡목의 몸체를 하염없이/ 맨살로 타고 오르는 담쟁이나/ 칡덩굴이 되어 흥건히 젖어서 살지라도/ 우리가 우리 이름을 우리 몸 속에/ 쓸쓸히 새기며 살지라도/ 세상 나무의 나뭇잎으로 남아 우리는//

허화*들의 밥상 / 박라연
봄꽃가지에서/ 그렁거리던 눈부신 청색 꽃잎들이/ 가을까지 오래된 생각처럼 골똘하다/ 저 목숨은 山수국이 피운 허화./ 향낭이 없어/ 자연사될 수 없다/ 이쯤이면 가짜도 진짜도 한 몸이라서/ 아플 텐데 山수국 저 가시나// 문득 세상의 허화들은/ 무슨 죄로 가짜 생존의 시간 속으로/ 끌려나왔을까/ 구구절절 누구를 빛내주려고 왔을까/ 1%쯤 모자라서 쓸쓸한/ 生들을 대신 완성해주려고?/ 덩달아 골똘해져서는/ 가짜의 고통을 목졸라준다./ (내일은 잘린 내 목에서 수국이 피어날 것이다)//
* 허화 : 꽃잎이 너무 작은 산수국은 벌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 생을 극복하기 위해 깨알만한 제 꽃잎 둘레 가득 가짜 꽃잎을 크게 피워낸다.

해거리 / 박라연
해걸이를 아시는지요?/ 감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지난해에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매 열린 나무는/ 빈 나뭇가지에 바람만 일렁일 뿐/ 감도, 배도, 사과도 좀처럼 제 친구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 그 지루한 그 쓸쓸한 한 해를 짐작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말을 하지만/ 콩과 팥이 만나 살다보면/ 콩도 팥도 아니고/ 콩의 근심과 팥의 오만만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것/ 근심과 오만 덩어리인 채로/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굴러 다니는/ 한평생을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해거리하는 해에 태어난/ 감, 사과, 배/ 그저 이름만 감 사과 배일 뿐/ 제 이름 다정하게 불러주는 이/ 쉽게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분꽃 / 박라연
나는 분꽃/ 밤에만 피는 키 작은 꽃// 알을 밴 꽃 한송이 피우고 싶어/ 내 무수한 씨앗들은/ 밤마다 눈물겨운 교배를 한다// 향기로운 혀 큰 나무를 흔들고/ 나무보다 더 큰 그림자를 흔들지만/ 우리를 기억하는 것은 어둠 뿐/ 어둠 속에 숨어 나부끼면서/ 상처입은 입새끼리 흔들리면서/ 서로의 꽃들로 자란다// 못 자란 키만큼,사랑만큼/ 연분홍 잎을 매다는 꽃초롱 사이로/ 이따금 손들어 답례하는 우리는//

금낭화 / 박라연
꽃이 핀다/ 낮은 산 위에 아파트에 외로운 숲속에/ 꽃이 진다 절색의 배꽃이 진다/ 꽃피고 지는 사이 잠깐이라 해도/ 초록은 피어나 푸른 천지 이룬다 해도/ 봄 위에 여름을 누이고 여름 위에 가을을 누인다 해도/ 나는 단명의 꽃잎으로 살다 가리/ 내 꽃 숨진 자리 위에/ 까치 잡새 풀벌레들 모여서 울면/ 울음이 울림만큼 나는/ 희고 붉은 꽃잎으로 다시 피어나리/ 아침 이슬 우르르 몰려와 간질이면/ 나는 또 수십 년에 수십 번씩 피울 꽃을/ 단 한 번의 새 위에서만 피우고 말리//

아카시아, 반란 / 박라연
꿈꾸는 밤에 더욱 향기로운 나는/ 절망의 꼭대기에서만 꽃을 피우리니/ 스물 몇이나 서른 초입에/ 이 세상 문을 온통 열어버린 듯/ 저승의 문까지 열어본 듯/ 찰랑대는 무한의 물결 소리로 흔들리리라/ 일찍 단물들어 따뜻한 꽃잎들은/ 숲속 고요 속에 비단실처럼 모여서/ 제 아픔보다 더 아프게 친구를/ 역사를 노래하는 사람들/ 그대들의 고단한 발길을 적셔주는/ 첫사랑이 되리라// 한몸에서 피워낸 또 하나의 슬픈 꽃잎들/ 아직 철 안 들어 떫은 꽃잎들의/ 저 아찔한 화냥기!/ 누군가 머리 위에서 함부로 삿대질해도/ 족보도 잊은 채 그저 향기롭구나//

화장(花葬) / 박라연
아마/ 아직도 모르고 있을 거예요/ 어젯밤 누군가/ 그대, 花葬시킨 순간을요/ 장미덩굴로 겹겹이 묶고/ 벚꽃더미에 묻히게 하던 걸요?/ 얼마나 황홀하게 바라다보았던지......../ 구경꾼 모두의 눈빛에서 흐르던 고요,/ 차라리 한 잎의 벚꽃이 되거나/ 장미덩굴이 되고 싶었을 거예요/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네 사는 일 제아무리 고달퍼도/ 그대처럼 누군가 花葬시켜 떠나 보내 준다면/ 우리 등뒤에 그런 사람 하나 있다면/ 살아온 날들이 눈부실 테니까요/ 문득 생각했지요 저렇게 떠난 저 친구는/ 어느집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꽃밭 한 귀퉁이에서 다시 태어날 것 같다고/ 흐믓하게 미소짓는,//

돌무덤 / 박라연
우면산의 나무 한 그루에/ 돌담을 둥그렇게 쌓는다 제 몸집만으로는/ 쉽게 틈이 생길까 두려워/ 아무나 함부로 넘보지 않게 하려고/ 산에 오를 때마다/ 그 나무 옆구리에 돌무덤을 쌓는다/ 저 집은,/ 아픈 마음들이 미리 들어가 쉬기도 하는 곳/ 공중 속의 내 정원으로 가는 길이/ 훤히 보이는 곳, 이라는 임시의 문패를 달았다/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사는 일이 참혹할 때/ 저 집이, 한시적인 죽음으로 시간을 끌어주면/ 죽음의 나체같던 겨울 나뭇가지에 피가 돌 듯/ 시커멓게 그을린 마은 넘은 그림자에도/ 생피가 흐르기를 바라면서,//

무창포에서 / 박라연
추운 얼굴들 모여 모여서 젖은 이야기로 잠이 드는 밤 가라앉/ 으며 떠오르며 끝없이 서성이는 세상은 눈 굵은 그물로 다 가릴/ 수 없는 슬픔인데 출렁일수록 깊어가는 상처 따라서 안 보이는/ 섬 찾아 조금씩 작아지는 푸른 물방울// 소금처럼 빛나는 한줌 슬픔으로 섬을 이룰 수 없는 키 작은/ 어부들의 영혼이 발목 붉은 도요새 되어 뿔뿔이 허공을 떠돌고/ 불빛 찾아 손 흔드는 낯선 안강망 어선들 어디에도 지친 닻을/ 내릴 곳이 없다// 눈물이 강물같이 보이던 날 성욕처럼 들끓는 물거품을 바라보/ 며 누구는 죄를 짓고 누구는 용서하고 목쉰 파도 되어 흐느끼지/ 만 죽어서도 산란하는 늙은 어부의 꿈 만난다 앉은뱅이섬, 혹은//

을숙도 / 박라연
몇몇은 공중에 둥지를 틀었다/ 가난은 깃털 같은 죄라며/ 아직도 뭍이 두려운 사람들/ 대낮에도 발이 빠진다/ 오랜 설움 안으로 안으로만 삭여온 녹슨 종처럼/ 눈물꽃 송이송이 목마른 갈대숲 적시고/ 삐삐꽃 쑥부쟁이 떠난 자리에/ 죽어도 죽지 않는 풀뿌리들 돋아나/ 동행을 재촉한다 모두가/ 잊혀진 어제는 눈발에 젖어/ 상처만큼 깊어지는 강물이 되어/ 한세상 눈시린 풍경으로 떤다/ 뼈아픈 그림자 허옇게 드리운 채/ 속죄하며 흔들리는 늪/ 어둡고 쓸쓸한 지상의 한 끝에서/ 우리를 잠시 취하게 하는 가을산의 어스름/ 하염없이 울고 가는 두루미떼 따라가면/ 밀물과 썰물이 무작정 섞여지듯/ 우리들 인심도 그렇게 섞일 수 있을까/ 그대 묻힐 땅 한 뼘 없어도/ 을숙도의 뿌리 끝에/ 해마다 새끼를 치는 희망을 치는/ 강줄기 따라 만나고 헤어진 이웃들/ 한 떼의 철새가 되어 그 저녁 하늘로 날아들면/ 우리도 등뼈에 묻어둔 비밀 몇 포기씩 안고/ 높이 더 높이 날아올라/ 만삭의 죄를 풀고 가벼이 아침을 따라내려오리라/ 외로운 직립의 투박한 을숙도 뿌리 곁으로//

감은사 가는 길 / 박라연
처음이란/ 얼마나 많은 세포를 배는 일이던가/ 공간이 없어도// 깊은 계곡이/ 촘촘한 산이 사람 사이에도 있으리라/ 살아있기에 깊어지는 계곡/ 살아있기에 촘촘해지는 산/ 두번째 가는 감은사/ 감은사에서 만날 사람은 세번째에도 없으리라/ 그저....그저.../ 생각하는 일만으로도 무수한 세포가/ 핏줄을 간질이리라는 예감에 대해/ 이 길목에 피고 지던 이름없는 풍경들에 대해/ 사물의 해마저 질 때까지/ 차가 멈출 때까지// 처음이란/ 얼마나 많은 세포들을 낳는 일이던가/ 추억만으로도//

옥평리 / 박라연
토요일은 언제나/ 옥평리에 갔다 다리를/ 건너 철길 논길을 지나서/ 수수밭 언덕길 그곳에 가면/ 전학 간 순이도 좋았지만/ 올벼쌀 메뚜기 홍시감이 좋았다/ 혼자서 가는 길 쓸쓸해지면/ 눈감고 어디쯤 갈 수 있나 시험하다가/ 큰 다리 아래 숨어 흐르는 슬픔 속으로/ 뚝, 떨어져 눕던 아득한 그날/ 우체부 아저씨의 자전거에 실려왔지만/ 그때 나는 이미 젖어서/ 운동화도 머리카락도 흠뻑 젖어서/ 지금도 툭하면 젖어서 산다/ 옥평리 그 길을 다시 걸을 때/ 속눈썹에 감겨오는 내 살아온 날의/ 오솔길 철길 큰 다리 길/ 길모퉁이에 남아 있는 쓸쓸한 그림자/ 제 그림자를 밟고 떠나가는/ 눈뜨고 가는 길도 안 보이는 우리들/ 우리들 살아서 사는 길//

목계리 / 박라연
가도 가도 산뿐이다가/ 겨우 몇 평의 감자밭 옥수수 밭이 보이면/ 그 둘레의 산들이 먼저 우쭐거린다/ 제 몸을 가득 채운 것들을 신의 흔적이다,/ 라고 믿지만/ 두 눈으로 아직 본 적이 없다/ 사람의 흔적인 옥수수의 흔들림 감자꽃 향기는/ 왕산(王山)이 본 것 중 가장 귀한 것이다/ 가도 가도 산 뿐이다가/ 차 파는 오두막집이 보인다/ 그 주인은 이미 산(山)의 일부이면서/ 바람의 일부일 것t이다/ 적막 속 어딘가에 집 한 채만 보여도/ 왕산(王山)은 그 기(氣)를 바꾼다/ 수십 만평의 산을 거뜬히 먹여 살리는 것은/ 한 됫박 될까 말까 한/ 몇 사람 의 숨소리일 것이다//

마곡사 / 박라연
탑돌이를 한다. 마음의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으리라./ 해탈문을 지나 천왕문을 지나니 오장육부가 약속처럼 빠져버린,/ 온몸이 물 한 점 없이 텅텅 비어버린, 늙은 살가죽도 반의 반쪽만 남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된다. 그가 올 봄에도 어김없이 피워올린 공중의/ 새순들은 무엇으로 얻었을까 오늘은 서까래 몇 개라도 올려야 한다./ 목탁 소리 독경 소리에서 뿜어져나오는 향기./ 계곡 속의 피라미마저 귀가/ 쫑긋해서 온갖 교태를 부리며 튀어오른다. 지금 행복하다면 오히려 가슴이/ 덜켱 내려앉고 지금 힘이 들면 빚을 갚거나 저축을 하는 것처럼 편안해진다./ 그 마음들 모아서 토담처럼 쌓아올리기 위해 돌고 돌아야 한다. 탑돌이하는/ 여자 발 밑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새하얀 클로버 꽃장들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행운의 부스러기들이 피운 꽃이라면 기와 몇 장 연등 몇 개조차 바친 적 없지만/ 이쯤에서 돌아가도 마음의 거처 얻을 수 있으리라.//

삽교천에서 / 박라연
한 해가 저물던 그날/ 우리는 삽교천에 갔었네./ 소주를 마시고 아나고회를 먹으며/ 열두 달 내내 목젖을 간질이던/ 슬픔의 가시들/ 서로의 잔가시들이 안쓰러워/ 젖어버린 눈으로 우리는/ 삽교천 기슭을 안개처럼 떠돌았네./ 지친 사람 모두를/ 모두가 쓰러져도 뉘어줄 그대여/ 잊을 것은 잊으라 말하지만/ 그때 거기서 우리는 보았네./ 갈매기 한 마리가 못다한/ 사랑에 깃을 치며 날아오르던 것을./ 그때 그날의 삽교천은/ 진짜 바다보다 더욱 바다 같았네/ 안 보이는 세상살이의 암초들이/ 소금기 빠진 그대 살 속에서/ 어물쩍 녹아/ 녹아내려도 흐를 수 없을 때/ 건널 다리 하나씩 끌고서/ 한 사람 두 사람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부어오르거나 썩어가던 독기를 풀어/ 저 멀리 떠내려보내고 있었네.//

백담사 칡잎의 기억 / 박라연
그 말머리 따라 여기까지 왔다. 백담사 칡잎을 만나면 전생의 기억 몇/ 잎을 얻을 수 있다기에 깊은 산속에 묻혀 살다보면 전생의 기억 몇 잎에/ 서 파릇파릇 돋아나는 열쇠 꾸러미, 이 세상 삶의 족쇄 풀어줄 초록빛 열/ 쇠 만날 수 있다기에, 해일처럼 밀려드는 해방감에 파르르 칡잎의 기억을/ 울리며 딸랑거리는 초록빛 열쇠,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으로 돌아오던 날/ 대롱대롱 매달린 초록빛 열쇠, 매달려 살 수 있는 날들일지라도 찾으러 갔/ 다가 오히려 잃어버렸을지라도 굽이굽이 돌고돌아 돌아갈 곳이 있다면 山/ 소나무 몸통에 따닥따닥 붙어서 일생을 살아내는 칡잎의 기억도, 기력도/ 여전할텐데…… 잎을 스치는 것은 구경나온 바람뿐이다. 저 사람은 누구더/ 라? 아직도 求道 따위에 목숨을 거는, 아직도 사랑 따위에 목숨을 거는 저/ 열쇠, 초록빛 열쇠꾸러미들은 어디서 보았더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휙 날아가 버리는,//

모현동 중앙하이츠 5동 202호 / 박라연
땅거미가 질 무렵엔/ 낮은 풍경들이 식구처럼 들어와 앉는다/ 맨발의 공터는 몇몇의 밭이 되어 푸르고/ 논들은 겹겹이 조금씩만 살을 대고 출렁인다/ 그 끄터머리쯤엔 잔잔한 물결이 있다/ 누구는 방죽이라 부르고/ 누구는 수렁이라 부르지만/ 세평 거실에 마주 앉아/ 名詩를 읊듯이/ 名畵를 보듯이 세상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렇게 맘에 맞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면/ 저 잔잔한 물결이 숨쉬는 그릇은/ 언제나 호수가 될 터인데/ 명시와 명화의 소재들이 햇살을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잠수해 들어가/ 헤맬 만큼 헤매이다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오면/ 또다른 명시와 명화가 될 것 같았는데/ 호수 너머엔 새길이 있고/ 논이 있고 그 너머엔 마을이 있기에/ 외로움 따위는 문제없다 싶었는데//

달에 내리는 두레박처럼 / 박라연
아무도 모르게 바닷물이/ 하늘에 오르는 사이// 꼭 그 사이만큼만 강화 바다는/ 하늘을 벗어버린 달의 표면// 낮게 내려앉은 저 달의/ 모래 구릉과 작은 골짜기와/ 게가 뚫은 소통과 소통 사이를/ 크고 작은 무덤 사이를// 여름 내내 들끓던 사람의 열망/ 흐르고 흘러 달에 내리는 두레박처럼/ 닿아보리라// 닿자마자 수백 볼트의 사람수련이/ 쑥쑥 솟아오르리라/ 돌로 쳐죽인 허망이 다 빠져나와/ 수련 천지로 붉게 물들일 무렵// 한 떼의 갈매기들 몰려와/ 끼룩끼룩 울어대리라/ 갈매기 울음에 갇힐까 두려워// 궁둥이를 뺀 두레박엔/ 반은 달 또 반은 바다가/ 출렁거렸으리라//

꿈 / 박라연
너 알아?/ 네 앞에서 환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곳에서 인색해야 했는지/ 얼마나 많은 곳에서 빛을 훔쳐와야 했는지/ 너 알아?/ 너에게 가는 길은/ 제 살을 땅에 씨앗 뿌리듯/ 한점한점 떨어뜨려야 걸어들어갈 수 있고/ 걸어나올 수 있다는 거/ 너 알아?/ 머리만으로 너를 만나고 싶은 행렬이/ 이 세계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거/ 그래서 이 세상은 아직도 살 만하다는 거//

다시 꿈꿀 수 있다면 / 박라연
다시 꿈꿀 수 있다면/ 개미 한 마리의 손톱으로 사천오백 날쯤/ 살아낸 백송, 뚫고 들어가 살아보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제 몸의 일부를 썩히는 일/ 제 혼의 일부를 베어내는 순간을 닮아보는 일/ 향기가 악취 되는 순간을 껴안는 일/ 다시 꿈꿀 수 있다면/ 제것인 양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누군가의 슬픔을 소리낼 줄 아는 새가 되는 일/ 새가 되어 살면서/ 미처 못 간 길, 허공에 길을 내어주는 일/ 그 길을 또다시 잃어버리고도/ 개미 한 마리로 살아내게 하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새가 되어 살면서/ 축복은 神이 내리고/ 불운은 인간이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노쇠한 꿈의 노래 / 박라연
보름달이 이우는 틈새 사이에서/ 빠져나오던 K야/ 위험한 풍선처럼 꽉찬 어느 축복에서/ 빠져나오던 S야/ 오랫동안 너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던 내 노쇠한 꿈을/ 저 수평선 너머 아득한 곳으로 실어가다오/ 이편에서 저편으로 쓸리는 파도처럼/ 쓸릴 때의 한순간으로도 제몸이 사르르 분해되어 버리는/ 이제 그만 내 노래가/ 물결의 한 빛깔을 이루게 해다오//

침향(沈香) / 박라연
잠시 잊는 것이다/ 生에 대한 감동을 너무 헐값에 산 죄/ 너무 헐값에 팔아버린 죄,/ 황홀한 순간은 언제나 마약이라는 거// 잠시 잊은 것이다/ 저 깊고 깊은 바다 속에도 가을이 있어/ 가을 조기의 달디단 맛이 유별나듯/ 오래 견딘다는 것은 얼마나 달디단 맛인가/ 불면의 香인가// 잠시 잊을 뻔했다/ 白檀香이,/ 지상의 모든 이별이 그러하다는 것을/ 깊고 깊은 곳에 숨어 사는/ 沈香을,//

질량 보존의 법칙 3 -냉탕 속의 달 / 박라연
냉탕에서 두둥실 떠다니는데/ 차디찬 물 속 어딘가에서 잘 익은/ 복숭아 냄새가/ 설마, 하면서 두둥실 떠다니는데/ 틀림없는 복숭아 냄새가/ 달의 나체를 따라다닌다 아무도 없어/ 고개만 갸우뚱거리는데/ 달의 무릎에서/ 가슴에서 입술에서/ 둥그렇게 살아남았던 복숭아들이/ 젊은 날을 다시 한 번 살짝,/ 아 그래/ 제 높이에서만 꽃피려고/ 더 높이 오르지 못했던/ 제 나무에서만 익으려고/ 떨어져내리지도 못했던/ 그저 눈부시게 바라보기만 했던/ 저 나무/ 저 높이 저 맛의 복숭아/ 붉은 열매들이 건너와/ 내 몸의 일부가 되었는지도/ 요절을 포기한 나무에서만/ 흘러나오는 냄새일지도/ 달의 온몸에/ 복숭아 붉은 꽃잎이 돋아날 때까지/ 붉은 열매가/ 달의 표면을 온통 덮어버릴 때까지/ 진짜 달은/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인지도.//

상황그릇 / 박라연
내 품이/ 간장 종지에 불과한데// 항아리에 담을 만큼의 축복이 생긴들/ 무엇으로 빨아들일까// 넘치면 허공에라도 담아보자 싶어/ 종지에 추수한 복을 붓기 시작했다// 붓고 또 붓다 보니/ 넘쳐흐르다가/ 깊고 넓은 가상 육체를 만든 양// 이미 노쇠한 그릇인데도/ 상황에 따라 변하기 시작했다//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져줄 때의 형상이 가장/ 맛, 좋았다// 허공에도/ 마음을 바쳐 머무르니/ 뿌리 깊은 그릇이 되어 눈부셨다//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 박라연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 처음… 사랑할… 때… 처럼 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나,/ 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

꽃불, 타오르다 / 박라연
봄꽃 나무에 걸치는 화사한 햇살/ 온 누리 가득 활 활 타오르듯/ 꽃봉오리마다 등불을 켜댄다// 찰랑찰랑 물보라 이는 물결/ 팔랑팔랑 바람 이는 산 녘/ 이길세라 질세라/ 내가 먼저 불을 켜겠다고 몸을 열겠다고/ 우르르 몰려나와 수다 떨고 아우성이다// 하얀 구름 띄운 하늘 빛깔/ 소담한 눈송이 꽃무리/ 꽃 비 되어/ 휘 휘/ 사방 날리고/ 봄, 봄 어여쁘다//

꽃비가 흩날리던 날 / 박라연
꽃불이 춤추는 무대의 절정/ 넋을 잃고 바라본 너의 몸짓//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류/ 나 아직/ 꽃잎마다 내 뿜는/ 너의 풋 향기 간직하고 싶은데// 보내기 싫은 너/ 미련 남기고/ 가고/ 가고/ 또/ 홀연히 떠나가고//

어느 비오는 날의 풍경 / 박라연
우리의 고된 노동으로 마련한/ 밥과 잠일지라도/ 어제는 그래서 오늘은 이러해서/ 내일은 또 무엇이 넝쿨손 되어/ 내 목과 내 등을 휘감아 오르겠다며/ 내 밥 내 잠 빌려갈는지/ 열여섯 살 아래인 시댁 조카랑 나란히/ 수업받고 오는 길 비가 내린다/ 차창 밖의 빗소리가 좁은 차 안에서/ 커다란 물방울로 부풀어오른다/ 물방울은 차 안의 모든 것을 적시고/ 우리들 가장 둔탁한 부위까지 스며들더니/ 그만 줄줄 빗물이 되어 흐른다/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털어낸 고통의 비늘들 발 밑으로 가서/ 어느 순간 거름 되어 우리 몸 속에 스며들 거야/ 다시 한번 화사한 꽃 한 송이 피워올릴 힘이 될 거야/ 차창 밖의 빗소리가/ 또 한번 커다란 물방울 되어 부풀어오른다//

작은 물방울의 노래 / 박라연
봄 언덕 달빛 나무 숲 흔드는 초록의 소리/ 예전엔 누군가 떨군 그리움인 줄 알았다/ 시방은 바위 같은 꿈/ 하늘에서 잠시 만나 서로의 눈물 속에/ 머물다가/ 해가 뜨면 헤어지는 찬란한 이별/ 우리 무엇이 되어 흐르면/ 뼈도 없는 그대 살 속에 스밀 수 있을까.//

 

물의 얼굴 / 박라연
하얀 물에게도 상처는 있지/ 가만가만 흐르고 싶지/ 초록의 벼숲으로 흘러가서/ 8월의 가슴 그 뙤약볕 사이를 하얗게/ 하얗게 날아오르는 한 마리 두루미/ 한 줄기 서늘한 빗방울이 되고 싶지//

통유리창 / 박라연
우리가 우리 자신까지 통과할 수 없을 때/ 세계지도 만큼 크게 확대시킨 제 사진을 유리창에 건다/ 무수한 빛을 통과시키는/ 유리창의 둥그런 힘을 닮기 위해/ 폭포인 양 서서 햇빛벼락을 맞기 위해/ 대롱대롱 매달려/ 통유리창의 넓은 가슴을 더듬는다/ 우리 몸 속이 투명해진다/ 지나가 버렸다고, 이미 늦었다고 생각되는/ 인생의 몇가지 길들이 투명하게 열리기도 한다/ 그 길 끝에 또 하나의 통유리창이 있고/ 그 너머엔 푸른 초원이 있다/ 초원 가득 흰 양떼가 담장엔 붉은 넝쿨장미가 있다/ 이따금 투명한 길 위를 투명한 우리들이 질주한다/ 회상의 문, 설계의 문이 닫히기 전/ 우리는 서둘러 돌아와야 한다/ 세상의 잡다한 삶을 환하게 비춰내기 위해서//

갱년기야 / 박라연
침침해진 눈을 비비며 돋보기를 쓴다/ 어허, 벌써 노안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무릎에서 삐거덕/ 이크, 퇴행성 관절이// 손발이 차고, 종아리에 혈관이 솟고, 허리가 아프고/ 이런, 어혈이 뭉쳤나// 오늘은/ 오른쪽 옆구리가 콕 콕 쑤셔댄다/ 가끔은/ 시계태엽이 멈춘 것처럼 기억도 잠시 멈춰 선다/ 이곳저곳/ 나이따라 몸 구석구석 고장이 잦다//

비위 맞추기 / 박라연
눈매가 비수 같은 그가 드는 날엔/ 신경이 곤두선다// 긴장감은 풍선처럼 부풀고/ 이런저런 트집 잡고 늘어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발물에/ 비상대기다// 단 한시라도 편히 지나가길 기다린다/ 소리가 크다 작다/ 실내가 덥다 춥다/ 내미는 꼬투리로 신경과민증세 돋는다// 그를 다룰 수 있을까/ 어린 떼쟁이 어르고 달래듯/ 간 쓸개 다 빼내어/ 투정과 적당히 버무리는/ 이 밤의 비위//

봄 숲을 보면 / 박라연
비 갠 뒤 봄 숲을 보면/ 달려가 후루룩후루룩 빨아들이고 싶다/ 그날의 햇살 그 틈새로 파고드는 가여운 안개/ 그 안개 아래 서 있는 수줍은 봄 숲을 보면/ 봄배 부른 여자 같다/ 저렇게 빽빽한 슬픔을 보면/ 그만 배반하고 싶다//

4월의 공터에는 / 박라연
공터는 지금 산란 中이다/ 저 촘촘한 비늘들 그 속살들의 오롯한 비명/ 연초록의 기운들이 이제 타인의 것임을/ 그들이 먼저 안다/ 다만, 너무 오래 구부리며 살아온 이유들을/ 쫘악 두 팔 벌려 뿜어내고 싶을 뿐이다/ 그 모습 아주오래 담아 두고싶은 나는/ 통유리창 한 가운데에 서서/ 피 한 방울 안흘리고 온몸을문신한다//

가을 화엄사 / 박라연
그리움에도 시절이 있어/ 나 홀로 여기 지나간다 누군가/ 떨어뜨린 부스럼 딱지들/ 밟히고 밟히어서 더욱 더디게 지나가는데/ 슬픈 풍경의 옛 스승을 만났다/ 스승도 나도 떨어뜨리고 싶은 것 있어 왔을텐데/ 너무 무거워서 여기까지 찾아 왔을텐데/ 이렇게 저렇게 살아온 발바닥의 무늬/ 안 보이는 발그림자 무게를/ 내 다 알지 하면서 내려다 보는 화엄사의/ 눈매 아래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무엇인가/ 탁탁, 탁탁, 탁탁/ 모질게 신발을 털며 가벼웁게 지나가려 해도/ 안 떨어지는 낙엽/ 화엄사의 낙엽은 무엇의 무게인가//

이 가을엔 / 박라연
이 가을엔 차라리/ 떨어져내려도 좋을 옷을 입고서/ 가장 낮은 무릎에 가벼이/ 기대어 누운 잎새/ 지친 손가락 마디마디 추억의/ 실반지를 찾아 끼고서/ 스르르 잠이 들면/ 천정에 매달려 꿈꾸는/ 수수며 옥수수며 빨간 꽈리며/ 한 움큼씩의 희망이 되어/ 한동안 대롱대롱 매달려 살다가/ 봄이 오면 다시/ 떠난 줄 알았던 이웃이 되어/ 성큼 다가서고저/ 이 가을엔 차라리 누렇게 빛바래져서는//

가을이 가네 / 박라연
차가운 비가 내린다/ 촉촉이 젖어드는 외로움이/ 모진 그리움들 헤집는다// 시월을 삼키는 추억의 비/ 가슴 데우는 사랑은/ 아련하게 돋아나고// 세월이 미는 대로/ 숨 가삐 내 달려온 젊은 날도/ 안개처럼 사라져 간다// 은빛머리 흩날리는 갈꽃 따라/ 가을/ 가을/ 가을은 가고/ 지난날이 그리움으로/ 짙어 가고 있다//

슬플 때 모자를 쓴다 / 박라연
외아들인데 아직 후사가 없는/ 그녀는// 사람을 끝까지 섬길 재주가 없는/ 그녀는//햇살이 닿는 자리마다 꽃씨를 뿌리며 산다// 드디어 비와 바람의 세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한 그녀는// 혼잣말을 곧잘하는 그녀는// 옆 사람을 끝까지 붙잡아 둘 재간이/ 없을 때마다// 송이송이 꽃송이의 일부가 되어/ 사라지는 연습을 하는 그녀는// 어쩌면 그녀는/ 이미 그녀의 후세가 되어/ 밥을 짓고 노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녀는// 슬플 때마다 모자를 쓴다// 세상의 이마에 꽃,이라는// 모자를 씌우며 사는 그녀는/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비어있는 흙의 번지마다/ 꽃씨를 뿌리며, 뿌리며,//

지푸라기와 호들갑 / 박라연
막막할 때/ 가끔 동원되는 나/ 내 이름은 지푸라기// 근데 왜 번번이 소용이 없을까?/ 으 응/ 간절함이란 게 대체로 자기중심적인 거잖아?// 혹시 우주의 뇌와/ 사람 뇌의 사진이 유사하다는 말을/ 호들갑/ 너도 들은 적 있니?/ 으 응// 그렇다면 사람은 모두 한 단락의 우주일까/ 우주와 사람은 부자 사이거나 부녀 사이?/ 그럼! 그럼!// 그래서 우주가 마치 너의 일가친척인 양/ 떵떵거리며 호들갑으로 살았던 거야?/ 생태계에 빌붙어 연명하는 나/ 겨우 지푸라기인 내 앞에서 말이야//

토하젓 / 박라연
내 청구릿빛 알몸이/ 아유타의 눈물에 젖어/ 도성 밖 어느 부뚜막에서 뜨겁게/ 사흘 낮밤 그렇게/ 눈도 귀도 우리들 쓰라린 사랑도/ 붉게 붉게 문드러져서는/ 오직 그대의 혀끝에만 스미는/ 맛,//

치사량의 독, 그리고 / 박라연
지독한 꿈의 냄새에 취해버린 몇 년/ 夢死할 수 없어 깨어난다/ 누운 채로 밤새워 걷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 그 길에서 만난 세월/ 이름 모를 분홍색 꽃잎 사이사이/ 검은 나비가 꽃잎을 빨고 있다/ 내 몸 가득한 꿈의 냄새가 빠져나간다/ 한 아비의 마당에/ 한 어미의 옷섶에 뚝 신문 떨어지는 소리/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송이들/ 너희가 우리를 취하게 했구나// 삶은 때로 진부해서 살 만하고/ 꿈은 때로 지독한 제 몸 냄새로 죽음을 밀어낸다/ 허약한 일상들은/ 꿈의 갈비뼈 사이에서 잠이 들고/ 초 분 시간을 따라 송이송이 꽃이 된다/ 누군가의 미숙한 사랑이 되고/ 지상의 하루가 되고 前生이 되고 全생애가 된다/ 치사량의 毒, 그리고//

新 구사일생 / 박라연
침몰된 유조선에 누워/ 9년을 보냈다// 다시 시작해보려고/ 땅 끝 마을까지 찾아갔을 때/ 바닷물은 내 안의 기름 냄새에/ 구역질을 해대고 나는/ 옛날이 부끄러워 헛구역질을 했다// 흘러들어온 굴 다시마의 입덧이라고/ 위로해주며 까마득히 날고 있는/ 한 나라를 이루고 있는 저 새떼들/ 몸이 썩어 본 나는 금방 알아봤다// 새가 아니라 썩은 갯벌에서도/ 살아남은 물고기들이 오래 전에/ 죽은 물고기들의 혼을 겹겹이 물고/ 물속처럼 공중을 헤엄쳐 하늘로/ 오르고 있다는 것// 썩은 바다의 일부를 떼매/ 이고 지듯 침몰된 시간들을/ 겹겹이 물고 따라 올랐다/ 다음 창천까지//

죽음에 대한 예의(禮儀) / 박라연
淸凉飼育이 잠실에 불을 때지 않고/ 자연온도로 누에를 기르는 일이라면,/ 그렇다면 청량고추는// 크기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붉기에 매혹되지 아니하고/ 오직 매운맛이 제 몸에 가득해지기를/ 그 순간이 제 삶의 완성이라고 묵묵히,// 하물며 너와 나의 죽음이여!/ 초록빛 청량고추의 매운맛처럼/ 비바람의 색채로 기다림의 문양으로 물들여져야 하리/ 청량누에가 뽑아내는 비단실이 그러하듯/ 꽃잎을 무수히 떨어낸 과즙이 그러하듯/ 유지매미의 울음이 그러하듯/ 그대에게 가는 길에도 속도와 禮儀가 있으리// 곰삭은 영육들 오늘,/ 청량고추를 만나 하염없다/ 도마 위를 구르는 칼날이 빛난다/ 경배하듯 오랫동안/ 아무리 참혹할지라도 제 죽음에 대해 禮儀를!//

고해성사 / 박라연
기도했다 날마다/ 겨울 산벼랑에 걸린 목숨/ 어쩌다 한번 지은 죄/ 저문 또랑에서 성당 구석에서/ 너와 나의 기억에서 희게 빨려지기를/ 의무인 양 거듭되는 죄 끌고 다니는/ 어떤 한 사람을 본다 무척/ 닮았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러면서 내일은 깨끗해질 거라며/ 어쩐지 안쓰러운 오,/ 누구에게 돌 던지라 나는/ 또 누구의 하루에 뾰쪽이 서 있는/ 바늘 끝이 되었으랴/ 아무래도 잔인한 핏줄이었나보다고/ 투덜투덜 조상 탓을 하면서/ 악몽을 염려했다 오늘 밤의/ 어수선할 일기장의 내용들을//

산골 풍경 / 박라연
속리산자락을 따라 들어간 깊은 골짜기/ 산토끼 고라니 모여들어 가위바위보/ 제멋대로 자란 야생화/ 막바지 봄볕 쬐며/ 자태 뽐내고 있다// 웃자란 잡풀 사이로 고개 내민 삼채/ 타국살이 견딜 만 한가보다/ 끼리끼리 기대어 피어 올리는/ 향수가 진하다// 인적 드문 곳/ 허수아비 너울너울/ 멧새도 덩달아 하늘하늘/ 바람에 담겨온 봄냄새/ 속리산계곡은/ 한밭 가득 희망을 키운다//

폐가 / 박라연
한 사람을 보낸다/ 또 한 사람을 보낸다/ 마지막 눈빛까지 모른 척한다/ 잡초뿐인 내 生의 앞마당/ 무엇을 더 잃어야 내 눈은 투명해질까/ 낮은 어깨 위에 시린 눈썹 위에/ 함께 피던 어제의 꽃잎들아/ 너는 친숙한 그늘/ 그 고운 비늘 아래서/ 길 떠난 추억이 쉬어가고/ 떠난 이름을 불러모으는/ 더없이 가벼운 몸집으로도/ 쓰러뜨려다오 옛날/ 그 옛날의 쓰라린 냄새들을/ 통통거리며 튀어오르던 마지막 물방울/ 물방울들아 너의/ 흰 물거품으로 세상의 허망한/ 앞마당의 내 잡초들을 감추어다고/ 아직은 헤어질 수 없는 죽어가는 눈물들과 섞이어다오//

생밤 까주는 사람 / 박라연
이 사람아/ 산 채로 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을 한번 더 벗겨내고/ 그리고 새하얀 알몸으로 자네에게 가네/ 이 사람아/ 세상이 나를 제아무리 깊게 벗겨놓아도/ 결코 쪽밤은 아니라네/ 그곳에서 돌아온 나는/ 깜깜 어둠 속에서도 알밤인 나는/ 자네 입술에서 다시 한번/ 밤꽃 시절에 흐르던 눈물이 될 것이네//

새의 부리 / 박라연
부리가 길수록/ 목이 긴 항아리 속에 숨겨둔 슬픔까지도/ 흔들어 흘러 넘치게 할 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아/ 산만큼 꽃술은 길고 아름다운 부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한 점 새의 혈육이 되고 싶었다/ 새에서도 가장 가볍고 단단한 부리,/ 부리의 한 점 혈육이 되고 싶었다/ 그해 겨울/ 서른아홉 해의 꽃술을 말려/ 새의 부리를 만들었다//

서른두 바퀴의 슬픈 푸에테 -「백조의 호수」오딜이 되었을 때 / 박라연
깨어보니 나는 흑조였다/ 무대 위의 배역일 뿐이라고 부끄럼 없이/ 검은 쭈쭈를 입는다/ 제 몸의 피를 어지럽힐 만큼 어지럽히면/ 천사의 피를 얻을 수 있다는 듯 돌고 돌고 돈다/ 오직 왼발 하나의 무게로 서서/ 외롭게 서서/ 서른두 바퀴를 쉬지 않고 돌고 돌아/ 깨끗한 피로 제 몸을 다시 이루었을 때/ 진실이란 또 하나의 가짜여서 쓸쓸히 떠나와야 하는/ 한 운명을 춤추다가 물이 들었을까/ 세상의 자로는 잴 수 없는 아름다움에 빠진 나는/ 내 몸의 영혼으로 푸에테를 완벽하게 해낸 나는/ 배역 아닌 진짜 오딜이 된 것일까/ 오딜도 지그프리트도 단지 슬픈 배역일 뿐/ 그뿐이라 믿었는데/ 한번 몸에 밴 배역은 좀처럼/ 새 옷을 입으려 하지 않는다//

상처 / 박라연
그때 그 잎새/ 슬픔이 지나간 자리마다/ 숭숭 뚫리는 비릿한 구멍들/ 망각의 못 박을 일이다/ 그때 그 잎새에/ 꽁꽁 묶여 알몸으로 살 것 같은/ 내 영혼의 팔랑개비여 돌아라/ 바람 없는 날이라도 부디/ 가벼웁게 살 수 있도록//

공중의 집 / 박라연
공중의 모퉁이로 이사하던 날 아무도 모르게/ 슬픔의 문 하나 연다, 제각기의 숲속에서 우리는/ 캄캄한 삶의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면서 혼자서/ 나부끼고 단풍든다, 오늘도 공중으로 되돌아올 작은/ 물방울을 기다리면서// 튼튼한 너무나 튼튼한 공중의 벽이며 세상살이의/ 덧문이며 깨물어도 좀처럼 아프지 않은 쓸쓸한/ 혓바닥이며 우리는 우리에게 사육되면서 공중의/ 잎새로 흔들리면서// 함께 취할 까닭도 뜨거워질 노을도 없지만/ 사방이 조금씩 어두워질 때 누군가의 집에/ 불이 켜지면 내 마음의 불빛처럼 반갑다. 그때/ 어디선가 울리는 벨소리 발자국 소리는 쓸쓸한/ 魂들을 흔들어 깨우는 나뭇잎인 양 잠시 뜨거워지는/ 우리들의 귓불//

공중 속의 내 정원 1 / 박라연
공중의 허리에 걸린 夕陽/ 사각사각/ 알을 낳는다/ 달디단 열매의 속살처럼/ 잘 익은 빛/ 살이 통통히 오른 빛/ 뼈가 드러나도록 푸르게 살아내려는,/ 스물네 시간 중 단 십 분만 행복해도/ 달디달아지는/ 통통해지는/ 참 가벼운 몸무게의 일상 속에서만/ 노을로 퍼지는/ 저 죽음의 황홀한 産卵/ 육백여 분만 죽음의 알로 살아내면/ 부화될 수 있다고 믿을 생각이다/ 시누대처럼 야위어가던 한 生의 그림자/ 그 알을 먹고 사는 나날을 꿈꾼다/ 없는 우물에/ 부화 직전의 太陽이 걸렸다!/ 심봤다!//

공중 속의 내 정원 2 / 박라연
그저/ 새의 친구가 되고 싶었던 그는/ 제 혈관에 살 몇 알을 매단다/ 사람의 피에 흐르는 고압선이 두려운지/ 좀처럼 아무도 날아와 앉지 않는다/ 인정에 약한 새는 뜻밖에도/ 그의 정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 동박새였다/ 동박새는 사람의 따뜻한 눈빛에 이끌려/ 위험한 수혈을/ 돌이킬 수 없는 수혈을 받고 말았다/ 쌀의 피가 돌고/ 사람의 피가 돌기 시작한 새는/ 제 주소를 그에게 내어주고 만다/ 胃 주머니 속의 쌀을/ 공중의 주소에 한 옴큼 매달며/ 그는 하루를 시작한다//

공중 속의 내 정원 3 / 박라연
뜻밖에도 동박새는/ 공중 속의 정원에 제 심장을 내어주고/ 그의 위 주머니 아래 누워 있었다/ 쌀의 피를, 사람의 피를 돌게 해준 그에게/ 죽어서도 보여주고 싶은 표정이 있어/ 그의 위 주머니까지 날아와 죽은 것이다/ 온기가 사라지기 전/ 새의 마음을 받아 아나지 못한 그는/ 죽을 때까지 품고 가야할 질문의 무게가 남고 말았다/ 새의 육체가 바람의 몸이 될 때까지/ 단지 따뜻한 사이가 되기 위해/ 위험한 수혈을 시도한 자책이 잊힐 때까지/ 어디서 어떻게/ 제 주소를 지우고 살 수 있을는지,/ 얼마만큼 그의 피를 흔들어야/ 동박새의 아픈 피를/ 채혈해낼 수 있을는지, 라는//

공중 속의 내 정원 4 / 박라연
좋은 날들을 아직 열어보지도 못한// 입술과 눈매, 심장을 나뭇가지 위에 대롱대롱/ 달아둔다 날고 싶은, 새순 돋아나고 싶은 것들도 덩달아// 매달려서/ 나라개 돋는 순간의/ 새순 돋아나려는 순간의 가려움을/ 아무의 눈에도 미처 안 보이는 초록을 쪼아먹고 있다// 숨구멍마다 부력이 생길 때까지/ 심장을 초록으로 물들일 때까지// 다만 공중의 주소가 없는 방문객은/ 들어설 수 없다 셔터가 내려지지 않았지만//

메주 / 박라연
생콩의 시절은 이제 잊은 지 오래/ 혼자서 가고 싶었던 길도 놓은지 오래/ 우리는 이름을 잃고 함께/ 삶아져서는 함께 섞어져서는/ 함경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복자네 아랫목에서 다시 태어났다/ 해탈의 곰팡이 피어날 때까지/ 몸을 썩히는 일/ 공중에 매달려서 햇살과 바람/ 시간의 일부가 될 때까지/ 몸을 말리는 일을 배운다/즐거운 입맛을 위해/ 이름을 잃고/ 어디선가 매달려 살았을 비릿한/ 내 사랑, 콩/ 우리들의 안 잊히는 이름,/ 의 생무덤//

마음 한 방울과 이 세상의 거리 / 박라연
한 나무의 마음 한 방울에/ 또 한 나무의 전신이 매달려 있습니다/ 그 힘은 오직 닿을 수 없는 거리 덕분입니다/ 마음 한 방울은 자라서/ 제 두 눈만으로도 반지 모양의 오색 무지개를 뿜어 냅니다/ 한 떼의 무지개가 되었을 때/ 세상에서 가장 고운 자태의 그림자로 다가갑니다/ 또 한 나무의 무수한 잎이 됩니다/ 또 한 나무의 몸통은 그 머리에서 발끝까지/ 무지개의 무늬로 물들여집니다/ 살다보면/ 내 마음 한 방울과 이 세상/ 이 세상과 아주 작은 마음들의 거리/ 닿을 수 없는 거리만큼 아름다운 무지개를/ 무지개의 그림자를 낳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때쯤이면/ 마음 한 방울의 무지개와 무지개의 그림자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습니다//

연인 / 박라연
갑자기, 깜깜한 일상을 뚫고 솟아오른/ 아름다운 무지개 꿈처럼 고운 무지개가/ 내 공중에 떠 있다/ 달콤한 햇덩어리색을 주조로 한 무지개가,/ 두번째는 짙은 바다색이 한가운데로 몰려 곱게 원을 그리면/ 연하늘색을 두른 둥근 띠 모양의 무지개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떠오를 수 있다는 듯/ 아름다운 무지개는 거짓말처럼 내 공중에 있었다/ 커다란 행운을 남몰래 선물받은 듯/ 나는 놀라 망막을 졸이다가 늘이고 졸이다가 늘인다/ 사라질 수 없는 무지개를 위하여 내 生의 마지막 신비를/ 내 몸에 끼우기 위하여 두 눈을 잃어도 좋았다/ 이제는 핏빛 자주색 무지개다/ 아무리 슬퍼해도 첫번째나 두 번째처럼/ 아름다운 배색의 둥근 고리 모양의 무지개는 나타나주지 않는다/ 아아 내 망막 속에서 튀어나와 천장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흘러가던 신비로운 형체는 이제 사라진 것이다/ 이 신새벽에 내 눈 속에서 내 공중으로 떠오르던/ 세 가지 형태의 무지개는 누가 보낸 것일까//

꽃피는 병동 / 박라연
나, 잊고 싶지 않은 일이 있네/ 한 사람이/ 몇 가지 운명을 만나/ 너무 높은 곳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을 때/ 곡예사의 신비며 두려움이/ 病 하나를 물어다주었을 때/ 위험한 세포를 떼어낸 자리에/ 부리가 아름다운 혹 하나를 달았다는 일/ 그 일을 잊고 싶지 않다네/ 그 일 사이사이에 피어나던 풀꽃송이들/ 病깊은 사람 눈망울에 가슴에 피어나던/ 처절한 꽃송이들/ 그런 꽃송이를 피워내는 일도/ 그런 꽃송이를 바라보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네/ 아무나 쉽게 앉아볼 수 없는/ 순결한 의자에서/ 아 꽃들은 힘드는 줄도 모르고/ 빈틈없이 피어났네//

꽃 그리기 / 박라연
꽃을 그린다/ 예전엔 별을 그렸는데/ 얼마나 진짜 별에 가까웁게 그렸느냐에 따라/ 하루의 운세를/ 한 해이 운세를 점쳤는데/ 나도 모르게 가냘픈 자태의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너무 먼 곳의 별이 되느니/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다가 스러지는/ 한 송이 꽃을 더 닮고 싶었을까/ 종이와 볼펜만 있으면/ 허공뿐일지라도/ 손으로 눈으로 꽃을 그린다/ 무더기 무더기 어우러져 있는 꽃을 그리다보면/ 꽃들은 내게 안겨오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도 한다/ 꽃들이 아프면 내 병 또한 깊어져서/ 하혈하는 꽃 한 송이 따라 수술실에 들어간다/ 마취하는 순간까지 꽃을 그린다/ 회복실에서 맨 먼저 내가 한 일은/ 꽃 그리기였다//

 

누에 / 박라연
가당찮은, 참/ 골목길 잡상인의 리어카에 오글오글/ 한많은 번데기로 뒹굴지만/ 새하얀 내 영혼의 집은/ 수만 갈래의 비단실을 뽑아내고/ 뽑아내고....../ 아직도 기다리며 사는 이웃들/ 이웃들의 추운 살갗을 위하여/ 네 고운 색실은 즐겁게 쓰러진다/ 이 시대의 비단실을 뽑아내겠다면서/ 오늘도 꾸물꾸물 모여/ 새파란 이념의 뽕잎을 먹는 누에들/ 즐겁게 쓰러질 자유가/ 지금은 쓰라리다//

사마귀 / 박라연
세상이 스무번쯤 바뀌어도/ 내가 나를 건널 수 없는 유충의 生/ 어른이 되어서 죽기 위해 몇 번씩 죽는다/ 더듬이와 다리와 날개를 주시면/ 마지막 죽음을 생각할 수도 있다/ 단 한 번의 처절한 정사로/ 나는 수백 마리 알들의 에미가 된다/ 알들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모습이사 흉측하건 말건 다섯 개의 내 눈은/ 더욱더 툭 불거져 휘둥그려야 한다/ 때론 여자의 비위로도 제 몸보다/ 더 큰 먹이를 단숨에 삼키어야 한다/ 오오 너는 가고 나는 남아/ 진짜 성경 같은 나뭇가지 하나 붙들어/ 대롱대롱 매달려서 나의 알들을 낳는다/ 아빠 엄마 얼굴도 모른 채 우글우글 봄을 기다리겠지/ 어른이 되어 죽기 위해 몇 번쯤 죽겠지/ 더듬이와 다리와 날개를 주시면/ 마지막 죽음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

슬픈 거머리 / 박라연
목련꽃 피어 천지는 눈부시고 내 징그러운 몸은 이동한다/ 저렇게 희고 따뜻한 살에 비유되기 위해 나는 태어나/ 비유의 몸부림으로 한 생을 탕진한 피 피의 거머리/ 단지 사랑할 때처럼 아름답게 헤어지리라/ 아무리 세상 살 속에 진한 피를 바치어도/ 스며들지 않는 거머리의 진실 거머리의/ 슬픈 피//

레 실피드 / 박라연
춤추는 男子 아래서 詩 쓰는 한 女子 그녀는 지금/ 위독하다 아름다운 심장이 해마다 졸아 졸아드는 숨/ 소리 그래도 그리운 전설의 집 문을 열면 쏟아져내/ 리는 푸른 이끼 그 속에서 만난 푸른 눈은 자라 한/ 女子에게 공중의 무대를 원한다 방울방울 물방울 소/ 리 서러운 물방울 소리 행주치마 속주머니 흔들어도/ 그녀는 이끼 소년의 따뜻한 식탁을 위해 공중의 무/ 대를 위해 오랫동안 물방울 소리와 친했다 그녀에게/ 그는 니진스키나 바리시니코프였으므로 사랑의 아다/ 지오며 투르 앙네르를 위한 안전한 무대는 초록 잔/ 디밭 그러니까 그녀의 숱이 많은 심장의 보드라움이/ 다 레 실피드에서 시인으로 열연할 때 그녀의 초록/ 잔디밭은 어김없이 공중에 있었다 지금 우리는 헤어/ 져 산다 춤추는 男子 아래서 詩 쓰는 한 女子 그녀/ 를 위해 춤추는 男子는 매주 수천Km를 왕복한다/ 공중의 무대에서 무수히 쓰러진 그녀 그녀의 초록/ 잔디를 하나하나 다시 심어준다 죽어가는 심장의 돌/ 기를 하나하나 이식하듯 안쓰러운 눈빛으로//
* 레 실피드(Les Sylphides) : 로멘틱 발레의 하나로 공기의 정령들이라는 뜻.

왕오천축국전 / 박라연
男裝을 하고/ 세상을 한번 건너고 싶다/ 그때 그 병원에서 나를 잃었다고/ 차라리 그렇게 생각해줄 수 있다면/ 팔도강산 돼지우리에 세상 그리운 쓸쓸한 풀밭에/ 여장(旅裝)을 풀고/ 온갖 냄새를 한번 맡아보고 싶다/ 왕오천축국전은 아니라도 돌아오는 내/ 머리카락이 다른 슬픔으로 흩날릴 수 있다면/ 내 시가 세상 건너는 자세를/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너무 어려서 잃어버렸거나/ 너무 진지해서 갈 수 없었넌 그 길을/ 찾아 헤매보고 싶다/ 내 영혼 풀리고 풀리어서/ 되감아질 수 없는 시궁창에 이르러서야/ 만나게 될 스승 한 분 계실 것 같아/ 그 병원에 나를 두고/ 길 떠나고 싶다//

 




박라연 시인
1951년 전남 보성 출신.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를 졸업, 수원대와 원광대에서 각각 국문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가 당선돼 등단했다.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공중 속의 내 정원> <빛의 사서함> <노랑나비로 번지는 오후> <우주 돌아가셨다>. 산문집 <춤추는 남자, 시 쓰는 여자> 등.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박두진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부문 대통령상 수상.

 

 

[시인의 등단 뒷얘기⑨박라연] 두곳 동시당선 무효처리···”신문사 자존심이 목숨보다 크냐”

[아시아엔=박라연 시인] 지망생 시절 저는 익산에서 살았습니다. 세상에 와서 별로 갖은 것도 없으면서 딱히 부러운 것도 없어서 책만 있으면 그냥 행복해서 살았지요. 어느 날 해방 이후의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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