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앙금과 빗금 / 김인기

부흐고비 2021. 6. 23. 13:16

연속극에야 언제나 신데렐라 이야기로 넘치지만, 현실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실지로 동화와 같은 이야기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데렐라가 안으로 멍이 들면 어떻게 하느냐. 각자가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그 내용이 너무 달라 서로 용납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 나는 혹시 그 멍이 나중에 앙금으로 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나도 더러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일들이 실지로 일어나니까. 내 어찌 자신의 이해력을 믿겠는가? 당장 누가 라면 한 그릇을 끓여도 저마다 처리하는 방식이 다 다르다. ‘라면을 끓였으면 함께 있는 사람더러 권할 줄도 알아야지, 어째 저 혼자만 먹느냐.’ 세상에는 이런 부류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이미 싫다고 했는데, 왜 자꾸 강요하느냐.’ 이렇게 습성이 상이하다. 이런 습성도 처음엔 누구나 다 그럴 만한 이유에서 생긴 것이다. 여기에도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게 합리성과 무관하게 그 사람을 지배한다.

세상엔 내가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다. 이런 걸 누가 규명하는 것조차 어렵다. 사람들한테는 저마다의 삶이 지운 무거운 짐이 있다. 그들의 생각이 그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누가 함부로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어린 아이들을 상대하는 교사가 언행을 반듯하게 해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더러 술판도 벌이며 거칠게 이권도 다퉈야 하는 사람들은 사정이 달라 그럴 수 없다. 때로는 음담패설로 좌중을 웃겨야 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물론 내게도 나만의 고질병이라 할 버릇이 적지 않다. 이러니 내가 누구와 소통할 일이 있어도 신중할 수밖에 없다.

한때 나는 남들의 일에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고 알았다. 내가 남들한테 간섭 받기를 싫어하는 만큼 남들한테 뭐라 하지도 말자. 이게 이른바 ‘교양인의 당연한 처신’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이제는 이것도 의심스럽다. 혹시 이런 태도가 ‘우아하지만 잔인한 무관심’은 아닐까? 결과를 두고 보면 바로 그렇다. 그렇다면 상대의 자율을 보장하는 조건에서 은근히 지원하는 방도라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누구라도 가난하고 무식한 이들을 무시해도 좋은 게 아니라면, 도리어 이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게 정녕 바른 삶이라면, 누구든지 열린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참혹한 현실도 있다. 오죽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한테 가난마저 도둑을 맞는다는 소설이 다 있을까? 이렇게 보면, 내가 부자야 아니지만, 나 또한 남들의 곤경을 훔치는 꼴이다. 그간 나는 남들의 일에 그다지 참견하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이게 사실이 아니었다. 이렇게 글로 남기는 소행이야말로 누군가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일이 아니랴. 물론 이런 내 행위에도 다 이유가 있다.

당사자가 구차한 인생사를 밝히지 않는다. 직접 경험하는 자가 꼼꼼하게 기록이라도 남기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데도 대체로 그러지를 않는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부끄럽게 여기고 때로는 부인도 한다. 그들로서는 이런 선택을 해야만 하는 이유도 있다. 그런 걸 애써 밝혀서 무슨 영광이 있겠느냐. 당장 이런 거부감이 있다. 이것 또한 가슴 아픈 현실이다.

인간들을 식물에 비유한다면, 나는 아마도 쇠뜨기나 비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터에 내 어찌 향나무나 은행나무 행세를 하랴. 내 상상력은 보잘것없다. 나 또한 이런저런 곡절에서 떠나지도 못했다. 그래도 내가 감히 뭔가를 말한다면, 그건 아마도 어설프게 그은 빗금이 될 것이다. 나야 지극히 희미한 존재가 아니냐. 그래서 내가 그은 빗금 또한 희미하다.

삶의 많은 부분들이 이렇게 버려지고 저렇게 잊힌다. 이러면 결국 그들이 그 현실마저 도둑을 맞는다. 내가 그들의 정서를 모르는 것도 아니나, 기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그들이 자신의 환경을 이런저런 맥락에서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그들도 시비곡직이든 이해득실이든 따져서 누구와 연대를 하거나 경쟁을 할 것이다.

나는 무척 기이하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나 주눅이 들었을까? 사실은 그들이 대단하다 여기는 부류의 인물들이라고 하여 그렇게나 대단한 존재들도 아니다. 예전이었으면 생각만으로도 분명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하였을 정권교체도 당연한 민중의 권리로 아는 시대이다. 하물며 나라의 주인이라는 장삼이사들이 도대체 누구의 주장에 흔들린다는 말인가? 제 꿈이나 사상마저도 모리배들의 농간에 휘둘릴 수야 없다. 그런데 이러는 나도 종종 이렇게 자신을 다독인다.

‘그런다고 해서 내게 무슨 변화가 있으랴.’

사실은 이게 자포자기이다. 내가 자신의 감정을 엉터리로 단속하는 것이다. 이러고도 내가 누굴 탓하랴. 사람은 누구나 내면도 챙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인들이 이런 부분에는 무척 너그럽다. 엄정하게 비판을 받아야 할 것들이 도리어 칭찬을 받다니. 무사안일이 원만한 처신으로 통하면 사태는 더욱 복잡해진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사회에서 특별한 이름도 없이 산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고집을 부려도 결국은 그렇고 그런 부류이다. 내가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들의 생활을 가만히 바라본다.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런데도 그런 것들이 그냥 그대로 묻힌다. 그들한테는 사건을 여론으로 만들 힘이 없으니까. 때로는 그들의 절규마저도 단순한 난동이 되고 만다. 딴은 그렇게 볼 여지가 없지도 않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다.

“이 인간들아! 내가 무식하다고 느그들이 그러느냐? 내가, 내가 이래도, 맹신보간을 열두 번도 더 읽었다!”

요즘엔 『명심보감(明心寶鑑)』도 거의 잊힌 책이 되었지만, 누가 어느 종합병원에서 그렇게 고함을 내질렀다. 병원의 직원들도 업무에 시달려 피곤하다. 그런데 이 양반이 장황하게 설명을 하고자 하였다. 사실은 그 사람의 어법이 요즘 제도교육에 길들여진 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누군가 이런 사정을 세심하게 살폈으면 좋았으련만, 그만 그러지를 못했다. 그래서 이리저리 내돌린 노인이 그렇게 분통을 터뜨렸다.

이 양반은 허공에 빗금을 그은 셈이다. 사실은 그럴 일이 전혀 아닌데도, 현실은 이렇게 처절한 것이다. 아무도 그 할머니가 무식하다고 ‘저기로 가세요.’ ‘아니, 저기요!’ 하며 내몰진 않았으나, 결과를 두고 보면, 그게 그렇게 되었다. 거기에선 으레 그러려니 하는 상식과 관행이 그 사람한테는 아득한 장벽이었다. 그렇다! 어쩌다 찾은 병원에서도 어느 분은 그렇게 좌절을 느꼈는데, 내내 왕궁에 갇혀 지내야 하는 각종 신데렐라들은 또 어떠랴. 하물며 자신을 백조로 굳게 믿는 오리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풀빛 원피스 / 조향미  (0) 2021.06.24
봄꽃이라는 소식 / 김인기  (0) 2021.06.23
수저 한 매 / 김인기  (0) 2021.06.23
산사기 / 이육사  (0) 2021.06.23
청량몽(靑蘭夢) / 이육사  (0) 2021.06.22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