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류근 시인

부흐고비 2021. 7. 6. 08:59

유언 –아들, 딸에게 / 류근
절대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 되지 말아라./ 희생하는 사람 되지 말아라./ 깨끗한 사람 되지 말아라./ 마음이 따뜻해서 남보다 추워도 된다는 생각하지 말아라./ 앞서 나가서 매맞지 말아라./ 높은 데 우뚝 서서 조롱 당하지 말아라./ 남이 욕하면 같이 욕하고/ 남이 때리면 같이 때려라./ 더 욕하고 더 때려라./ 남들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 웃어주지 말아라./ 실패하면 슬퍼하고 패배하면 분노해라./ 빼앗기지 말아라./ 빼앗기면 천배 백배로 복수하고 더 빼앗아라./ 비겁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비겁해라./ 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하느님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큰 교회 다녀라./ 세상에 나쁜 짓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부끄러운 짓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양심과 선의는 네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라./ 네가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 나설 것이라고 생각해라./ 너보다 못나고 덜 가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 말아라./ 패배자들을 경멸하고 혐오해라./ 너에게 기회와 이득이 되는 사람에게 잘 보여라./ 항상 그들과 동행해라./ 들키지 말아라./ 앞에서 못 이기면 뒤에서 찔러라./ 지지 말아라./ 이기고 짓밟고 넘어서라./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확실하게 줄을 서라./ 중도는 죽는다./ 약자를 이용해라./ 어디서든 페미니스트를 자처해라./ 기회주의자들에게 잘 배워라./ 위선자들을 조심하되 위선엔 능해야 한다./ 너의 유식과 성찰이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게 해라./ 무슨 수를 써서든 비싼 밥 먹고 비싼 잠 자라./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라./ 벗은 거지는 굶고 입은 거지는 먹는다는 말 명심해라./ 그러나 겉으로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처세에 도움이 된다./ 너보다 힘 센 자들에게 인사 잘 하고 다녀라./ 세상이 바뀔 거라는 생각 하지 말아라./ 더 좋아질 거라는 생각 하지 말아라./ 너 하나만 잘 살면 된다./ 오직 너 하나만 잘 살면 된다./ 세상의 정의를 믿지 말고 네 안락의 나침반을 믿어라./ 세상에 정의란 없다./ 오래 살아라. 명심해라.//

낱말 하나 사전 / 류근
내가 버린 한 여자// 가진 게 사전 한 권밖에 없고/ 그 안에 내 이름 하나밖에 없어서/ 그것만으론 세상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줄 수조차 없었던,// 말도 아니고 몸도 아닌 흰 눈빛으로만/ 저물도록 버려/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 어머니,//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 류근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에 흘러내리는 못다 한 말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쓸쓸한 사람 되어 고개 숙이면 그대 목소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어느 하루 바람이 젖은 어깨 스치며 지나가고/ 내 지친 시간들이 창에 어리면 그대 미워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 버리기 못다 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 /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 없는 것/ 다만 사랑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獨酌(독작) / 류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은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나에게 주는 시 / 류근
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

가족의 힘 / 류근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등켜 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을 봐 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 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 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 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시인들 / 류근
이상하지/ 시깨나 쓴다는 시인들 얼굴을 보면/ 눈매들이 조금씩 찌그러져 있다/ 잔칫날 울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심하게 얻어맞으면서도/ 어떤 이유에서든 이 악물고 버티는 여자처럼/ 얼굴의 능선이 조금씩 비틀려 있다// 아직도 일렬횡대가 아니고선 절대로 사진 찍히는 법 없는/ 시인들과 어울려 어쩌다 술을 마시면/ 독립군과 빨치산과 선생과 정치꾼이/ 실업자가 슬픔이 과거가 영수증이/ 탁자 하나를 마주한 채 끄덕이고 있는 것 같아/ 천장에 매달린 전구알조차 비현실적으로 흔들리고/ 빨리 어떻게든 사막으로 돌아가/ 뼈를 말려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냐고/ 물어야 할 것 같다// 울어야 할 것 같다//

반가사유 / 류근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겠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향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俗 반가사유 / 류근
아주 쓸쓸한 여자와 만나서/ 뒷골목에 내리는 눈을 바라봐야지/ 옛날 영화의 제목과 먼 나라와 그때 빛나던 입술과/ 작은 떨림으로 길 잃던 밤들을/ 기억해야지// 김 서린 창을 조금만 닦고/ 쓸쓸한 여자의 이름을 한 번 그려줘야지/ 저물지 않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가난을 저주하는 일 따위 하지 않으리/ 아주 쓸쓸히 여자의 술잔에 눈송이를 띄워주고/ 푸른 손등을 바라보리/ 여자는 조금 야위고/ 흰벽에 아직 남은 체온을 기대며 뒷골목을 바라봐야지/ 내리는 눈과 지워진 길들과/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의 검은 칼자국// 아주 쓸쓸한 여자와 만나서/ 조금은 쓸쓸한 인생을 고백해야지/ 아무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닌/ 그러나 그 모든 것이어서 슬펐던 날들을/ 기억해야지/ 쓸쓸함 아니고선 아무 것 없는/ 아주 쓸쓸한 여자의 눈빛을// 한 번 오래도록 바라봐야지/ 뒷골목 몹시 서성거린 내 눈비/ 누군가 쓸쓸히 바라봐야지/ 아./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아슬아슬한 내부 / 류근
아내 몰래 7년을 끌어온 연애가 끝이 났을 때/ 아들은 문득 백 점을 맞은 받아쓰기 답안지를 꺼내 보이고/ 나는 민방위 소집 훈련에서마저 풀려나/ 어디에서도 부르지 않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새 내겐 아들 하나가 더 생겼고/ 직장은 바뀌었으며 은행 빚은 더 늘었고/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아내는 그동안 내 연애를 눈치채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내가 새삼 각성해야 할 만큼 문제를 삼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이 지혜로운 무관심이거나 참을성 또는/ 나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가족들을 따돌리거나 외출하거나/ 어떤 거짓말로든 늦게 귀가를 하고/ 때로는 외박을 하기 위해 지어낸 노력만큼/ 아내에게도 무엇인가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자존심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내야 할 무엇인가가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 옛날 폭력을 일삼던 수학 선생의 주먹을 참아내던 일/ 더 부당한 폭력에도 저항하지 않고 군대를 마쳤던 일/ 시궁창까지 야비하고 비겁했던 상사와 거래처 인사들을/ 결국 죽여버리지 않고 퇴근해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던 일처럼/ 아내 역시 한꺼번에 뒤엎어버리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경계가/ 무엇인가의 아슬아슬한 내부가 늘 있지 않았을까// 7년의 연애가 끝나고 나는 결국 몹시 헐거워졌으나/ 아이들은 자라고 아내는 그토록 잘 속아주었으나/ 이제 어떤 것도 더는 속여먹을 수 없는 생애가/ 내 앞에 고지서처럼 툭 떨어져 나부끼고 있을 때/ 나 역시 아내의 내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내부의 그 무엇이 되어 있다는 것이 어리둥절/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편지를 쓴다 / 류근
내가 사는 별에는 이제/ 비가 내리지 않는다/ 우주의 어느 캄캄한 사막을/ 건너가고 있는 거다/ 나는 때로 모가지가 길어진 미루나무/ 해 질 무렵 잔등에 올라앉아/ 어느 먼 비 내리는 별에게 편지를 쓴다/ 그 별에는 이제 어떤 그리움이 남았느냐고./ 우산을 쓰고 가는 소년의 옷자락에/ 어떤 빛깔의 꽃물이 배어 있느냐고./ 우편배달부는 날마다 내가 사는 별/ 끝에서 끝으로 지나가지만/ 나는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나는 늘 이 별의 한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날마다 우주의 사막을 가로질러가는 시간의 빛살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거다/ 그래도 나는 다시 편지를 쓴다/ 비가 내리는 별이여/ 우주의 어느 기슭을 떠돌더라도/ 부디 내가 사는 별의 사소한 그리움 한 방울에/ 답신해다오 / 나는 저녁놀 비낀 미루나무 위에서/ 못난 까마귀처럼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운다//

벌레처럼 울다 / 류근
벌레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다/ 우는 것으로 생애를 다 살아버리는 벌레들은/ 몸 안의 모든 강들을 데려다 운다/ 그 강물 다 마르고 나면 비로소/ 썩어도 썩을 것 없는 바람과 몸을 바꾼다// 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 풍금을 만나면 노래처럼 울고/ 꽃나무를 만나면 봄날처럼 울고/ 사랑을 만나면 젊은 오르페우스처럼/ 죽음까지 흘러가 우는 것이다/ 울어서 생애의 모든 강물을 비우는 것이다// 벌레처럼 울자 벌레처럼/ 울어서 마침내 화석이 되는 슬픔으로/ 물에 잠긴 한세상을 다 건너자// 더듬이 하나로 등불을 달고/ 어두워지는 강가에 선 내 등뼈에 흰 날개 돋는다//

법칙 / 류근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허공에 흩어진다/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구름에 매달린다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빗방울 하나로 몸을 바꾼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허공에 흩어진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잎사귀에 매달린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물방울 하나로 몸을 바꾼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인다/ 사는것도 죽는것도/ 한 몸/ 우주 안에서// 도망갈 데가 없다//

영화로운 나날 / 류근
가끔은 조조영화를 보러 갔다/ 갈 곳 없는 아침이었다/ 혼자서 객석을 지키는 날이 많았다/ 더러는 중년의 남녀가 코를 골기도 하였다/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갈 곳은 생각나지 않아서/ 혼자 순댓국집 같은 데 앉아 낮술 마시는 일은/ 스스로를 시무룩하게 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날은 길었다 다행히 밤이 와 주기도 하였으나/ 어둠 속에서는 조금 덜 괴로울 수 있었을까/ 어떤 마음이든 내가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밖에서 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시간은 공연했다/ 심야 상영관 영화를 기다리는 일로/ 저녁 시간이 느리게 가는 때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식민지 출신이었다/ 아프리카엔 우리가 모르는 암표도 많을 것이다/ 입을 헹굴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나에겐/ 숨기고 싶은 과거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어떤 밤엔 화해를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했다 그래도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그것이 지나갔다는 것 때문에 퍽 안심이 되었다/ 심야 상영관에서 나오면 문을 닫은 꽃집 앞에서/ 그날 팔리지 않은 꽃들을 확인했다 나 또한/ 팔리지 않으나 너무 많이 상영돼 버린 영화였다//

상처적 체질 / 류근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그리운 우체국 / 류근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 류근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친구여 나는 시가 오지 않는 강의실에서/ 당대의 승차권을 기다리다 세월 버리고/ 더러는 술집과 실패한 사랑 사이에서/ 몸도 미래도 조금은 버렸다 비 내리는 밤/ 당나귀처럼 돌아와 엎드린 슬픔 뒤에는/ 버림받은 한 시대의 종교가 보이고/ 안 보이는 어둠 밖의 세월은 여전히 안 보인다/ 왼쪽 눈이 본 것을 오른쪽 눈으로 범해 버리는/ 붕어들처럼 안 보이는 세월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무서운 은둔에 좀먹고/ 고통을 고통이라 발음하게 될까 봐/ 고통스럽다 그러나 친구여 경건한 고통은 어느/ 노여운 채찍 아래서든 굳은 희망을 낳는 법/ 우리 너무 빠르게 그런 복음들을 잊고 살았다/ 이미 흘러가 버린 간이역에서/ 휴지와 생리대를 버리는 여인들처럼/ 거짓 사랑과 성급한 갈망으로 한 시절 병들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버림받는 곳은 우리들의/ 욕망에서일 뿐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고통으로 능히 한 생애의 기쁨을 삼는다는 것을/ 이발소 주인은 저녁마다/ 이 빠진 빗을 버리는 일로 새날을 준비하고/ 우리 캄캄한 벌판에서 하인의 언어로/ 거짓 증거와 발 빠른 변절을 꿈꾸고 있을 때 친구여/ 가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살아있는 나무만이 잎사귀를 버린다//

폭설 / 류근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사과꽃 / 류근
비 맞는 꽃잎들 바라보면/ 맨몸으로 비를 견디며 알 품고 있는/ 어미 새 같다// 안간힘도/ 고달픈 집념도 아닌 것으로/ 그저 살아서 거두어야 할 안팎이라는 듯/ 아득하게 빗물에 머리를 묻고/ 부리를 쉬는/ 흰 새// 저 몸이 다 아파서 죽고 나야/ 무덤처럼 둥근 열매가/ 허공에 집을 얻는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 / 류근
대부분의 파도는/ 육지에 닿기 전에 몸을 잃는다/ 살아서 오는 파도보다/ 푸른 해면에 제 흔적을 놓쳐버린 채/ 죽어버리는 파도가 더 많다/ 몸을 데리고 육지에 오르는 파도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의 자세를 잘 익혔다// 나는 그것에 대해 일찍이/ 들어본 바가 없었으나/ 몸을 잃고 돌아서면서 파도는 내게/ 삼진 아웃 당하고 돌아서는 타자처럼/ 말했다// 나는 여기서 멈추기 위해/ 달의 힘까지 빌려 몸을 일으켰으나/ 육지에 몸을 더럽히지 않은 것으로/ 나의 길을 잘 마쳤다!// 파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파도의 굳은 살이 조금 보이는 것 같았다.//

나날 / 류근
옛 생각 몸에 해롭다/ 멀고 흐린 것들로 집을 지은 여자와/ 아무렇게나 뒤엉켜 꽃을 피우던 정원이여/ 악취만이 정직하게/ 햇빛을 가리던 우물이여/ 뒷길에서만 비로소 이름이 들려왔으니/ 나날이여/ 다시 응답처럼 몸이 흘러서/ 죄의 구멍에 머리를 박고 울었다//

七夕 / 류근
하늘에 죄가 되는 사랑도/ 하룻밤 길은 열리거늘/ 그대여,/ 우리 사랑은/ 어느 하늘에 버림받은 약속이길래/ 천 년을 떠돌아도 허공에/ 발자국 한 잎 새길 수 없는 것이냐//

祝詩 / 류근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 내 가장 아픈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이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아니길 바랍니다/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의 손을 놓아주는 힘만큼/ 당신도 누군가의 손을 가장 큰 힘으로 잡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봄날 / 류근
괴산 오일장 막걸리전에서/ 곤달걀 한 봉다리 사서 가는 부부의 눈에/ 봄볕이 말갛게 몸을 개킨다/ 날 벼린 낫 한 자루 빨랫비누 두어 장/ 가뿐했던 나들이가 묵직해진다/ 이보오, 다음 장엔 경운기 몰고 옵시다/ 다리 건너 타박타박 밭길로 돌아드는/ 11문 고무신 아래 냉이꽃이 핀다//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 류근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서로를 외롭게 하지 않는 일/ 사랑 때문에 서로를 기다리게 하지 않는 일//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오히려/ 슬픔을 슬픔답게 껴안을 수 있는 일/ 아픔을 아픔답게 앓아낼 수 있는 일// 먼 길의 별이여/ 우리 너무 오래 떠돌았다/ 우리 한 번 눈 맞춘 그 순간에/ 지상의 모든 봄이 꽃 피었느니//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푸른 종 흔들어 헹구는/ 저녁답 안개마저 물빛처럼/ 씻어 해맑게 갈무리할 줄 아는 일// 사랑 때문에/ 사랑 아닌 것마저 부드럽게/ 감싸 안을 줄 아는 일// 이제 우리가 진실로/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안과 밖 / 류근
어떤 2층에 앉아 있는데/ 어떤 어리고 늙은 남녀가 계단을 내려가다가 문앞에서/ 미친 듯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문 밖에서 서로 모르는 척 헤어졌다//

무위사 / 류근
강진 차밭 지나다/ 푸른 절 배롱나무 아래서/ 또 우는 내 옛날을 보았다/ 지는 꽃 흔들리는 바람에 들어/ 높이 자란 등뼈 쓰다듬는 일로/ 하루를 다 보냈다// 이윽고 저녁이 왔을 때/ 다행히 길은 멎고 다행히 해는 져서/ 모든 슬픔이/ 홀연 낮은 별 아래서 더 빛나는 섭리를/ 우물처럼 바라봤다// 아주 지는 꽃/ 끄트머리처럼 내 그늘이 밝았다//

나쁜 시절 / 류근
10년씩 배경을 뛰어넘는 드라마처럼/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으면 좋겠네/ 숙취에 떠밀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한 국자 비워져버린 간밤의 기억처럼/ 시간이 그렇게 큰 걸음으로/ 풍덩풍덩 달려가줬으면 좋겠네// 내게로 쏟아져 내리는 미분의 시간들/ 아침에서 저녁으로 이르는 길이 천축보다 멀고/ 밤마다 시간이 떨어뜨린 눈썹이/ 죽은 모래의 뼛조각으로 떠밀려 가네/ 한 시절 건너가는 일이 거미줄을 밟고 가듯/ 허공에 발자국 새기는 일처럼 아득하여서/ 내 절망은 적분 같은 것이네 죽는 날까지/ 한순간도 빠짐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 시간이 쪼아대는 부리를 견디며/ 살아남는 것만이 희망인 목숨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 건너가는 것만이 구원인 목숨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두어 달쯤 앞당겨 잘못 찢어낸 달력처럼/ 짐짓 빈 정류장을 지나쳐버리는 버스처럼/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으면 좋겠네/ 세단뛰기 하는 육상선수처럼/ 숨을 몰아 쿵쿵쿵,/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네//

박사로 가는 길 / 류근
교수가 될 어림도 미래도 없으면서/ 학교라도 안 가면 술집 귀신이나 될 터인데 싶어/ 또 비틀비틀 박사 들으러 간다/ 강의실에 앉으면 비로소 숙취가 좀 헹궈지는 것이/ 타고난 박사 체질인가 싶어 싱겁다가도/ 남몰래 창밖 구름과 잎사귀나 훔쳐보고 있는 퇴행을 보면/ 아, 갈데없는 바깥 체질이구나 싶어 곧 안심이 된다/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느라/ 정거장이 지나가고 작년의 나무가 더 자라고/ 담쟁이가 진짜로 담을 넘는 소식에 멈춰 있지 못하였다/ 남편 있는 여자와 옛날 애인들의 소식이 간간이 그리웠을 뿐/ 술집 너머의 연애 같은 것에 등록금을 납부할 수 없었다/ 박사가 깊어질수록 뼛속의 시가 가벼워져서/ 나는 자주 강물까지 날아가 내 하얀 발목을 베고 눕고/ 누워서 어떤 전생을 배신해벌릴까 궁구하였다/ 돌이켜보면 과거가 깨끗한 여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처럼/ 몇 번의 나쁜 전생이 나를 여기까지 엎질러놓았을 뿐이라는 걸/ 에필로그처럼 읽는 날은 즐거웠다 뻔한 것은/ 얼마나 느리고 안락한가 남자가 원해서 거기 털을 밀어주었다는/ 남쪽 후배가 내미는 술잔은 따뜻하고 나는 사막과/ 머리 두 개 달린 염소와 주인 잃은 소녀가 통정하는 소설을/ 박사로 가는 길에 깔아두면 좋을 거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박사는 멀고 내 구두엔 편자를 박지 않았으니/ 너무 쉽게 닳아버리는 열망과 맹목 같은 것도 쉽게 전생이 되고/ 가슴을 흔드는 구름과 잎사귀는 늘 바깥에 있고/ 나는 이제 9만 9천 년째 마지막 학기/ 술집 건너 다시 비틀거리는 내생 저쪽에/ 박사로 가는 기이 뻔히 보인다//

동량역 / 류근
엽서만 보내놓고/ 오지 않는 여자를 생각한다/ 사람을 태우지 않고 온 기차가/ 시멘트회사 로고를 잽싸게 보여주고 나서/ 터널에 대가리를 푹 처박는다/ 사루비아꽃이 포플린 홑청처럼 붉다// 낮에만 문을 여는 중국집/ 한 남자가 수타 반죽을 손에 든 채 뛰쳐나온다/ 뒤이어 양동이와 빗자루와 엽차 잔이 따라 나오고/ 머리에 파마봉지를 뒤집어쓴 여자가/ 날렵한 욕설과 함께 붕 날아 쫓아 나온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늘에서 잠시 몸을 일으킨 개 한 마리가/ 자빠진 항아리 속으로 슬슬 기어든다/ 반쯤 뜯겨져 나간 월간지 안에서/ 한쪽 편이 헐거워진 전직 여자 아나운서의 왼쪽 얼굴이/ 흥흥 흐느껴 운다// 엽서만 보내놓고/ 오지 않는 여자를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에게 엽서를 보냈길래/ 얼마나 많은 세월에게 엽서를 보냈길래/ 어제도 내일도 오지 않는가/ 가을에도 봄에도 오지 않는가/ 기차는 어느 저녁에 이르러야 사람을 실어오는가/ 중국집 남자는 언제 돌아와/ 내 빈 술잔 앞에/ 뜨거운 국물 한 그릇 내어줄 것인가//

겨울이 와서 / 류근
인도 뉴델리의 귀부인들은/ 겨울이 와서 영상 10도가 되면/ 밍크코트를 입고 외출한다/ 길거리에서 헝겊쪼가리 하나로/ 우기와 건기를 다 보낸 사내들은/ 겨울이 와서 영상 10도가 되면/ 웅크린 채 동사하는 일이 잦다// 겨울은 그런 것이다/ 겨울을 믿는 자에게/ 겨울은 외출이거나 죽음이 된다// 믿고 싶지 않으나/ 내게도 믿을 수 없는 겨울이 와서/ 헝겊쪼가리 같은 마음 위로/ 칼빛 바람이 파르르,/ 제 자국을 새기고 지나간다//

겨울나무 / 류근
다시 이 삶은 혼자 서 있는 시간으로 충만할 것이다/ 아주 튼튼하게 혼자여서/ 비로소 이 세상에 혼자인 것들과/ 혼자가 아닌 것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잘 지나간 것들은 거듭 잘 지나가라/ 나는 이제 헛된 발자국 같은 것과 동행하지 않는다/ 혼자가 아닌 것은/ 더 이상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이승이 아니니,//

세월 저편 / 류근
(추억의 배후는 고단한 것 흘러간 안개도 불러 모으면 다시 상처가 된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늘 바라보는 것)// 바람은 아무거나 흔들고 지나간다/ 여름 건너 하루해가 저물기 전에/ 염소 떼 몰고 오는 하늘 뒤로 희미한 낮달/ 소금 장수 맴돌다 가는 냇물 곁에서/ 오지 않는 미래의 정거장들을/ 그리워하였다/ 얼마나 먼 길을 길 끝에 부려두고/ 바람은 다시 신작로 끝으로 달려가는 것인지/ 만삭의 하늘이 능선 끝에/ 제 내부의 붉은 어둠을 쏟아내는 시간까지/ 나 한 번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그 먼 강의 배후까지를/ 의심하였다 의심할 때마다/ 계절이 바뀌어 그 이듬의 나뭇가지/ 젖은 손끝에 별들이 저무는 지평까지 나는 자라고/ 풍찬노숙의 세월 따라/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어디까지 흘러가면 아버지 없이 눈부신 저 무화과 나무의 나라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흘러가면 내가 아버지를 낳아 종려나무 끝까지 키울 수 있을까)// 세상에 남겨진 내가 너무 무거웠으므로/ 때로 불붙은 집 쪽에서 걸어 나오는/ 붉은 짐승을 꿈을 신열처럼 따라가고// 오랜/ 불륜과도 같은 세월 뒤로 손금이 자랐다/ 아주 못 쓰게 된 헝겊 조각처럼/ 사소한 상처 하나 가릴 수 없는 세월이/ 단층도 없이 흘러가 쌓였다/ 이쯤에서 그걸 바라본다// 황혼 건너/ 저 장대비 나날의 세월 저편//

고독의 근육 / 류근
내게서 한 걸음도 달아나지 못하고/ 일없이 왔다 가는 밤과 낮이 아프다/ 며칠씩 눈 내리고/ 길은 홀연 내 안의 굽은 등성이에서도 그쳐/ 여기서 바라보면 아무런 뜻도 아닌/ 열망과 그 너머 자욱한/ 추억의 첩첩 도끼 자국들/ 내 안의 저 게으른 중심에/ 집도 절도 없이 가로누운 뼛조각 환하고/ 이제 어디로든 흘러가 몸 풀고 싶은/ 옛사랑 여기 참 어둡고/ 변방까지 몰린 시간이 오래도록 누워 사는/ 생각의 지붕들 위에 낮은 키로 쌓인다/ 눈 맞은 나무들이 고스란히/ 제 생애의 무게를 향해 손을 내밀 때/ 어디로도 향하지 못한 존재의 저,/ 광활한 배후//

어쩌다 나는, / 류근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명랑한 햇빛 속에서도 눈물이 나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깊은 바람결 안에서도 앞섶이 마르지 않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무수한 슬픔 안에서 당신 이름 씻으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가득 참 목숨 안에서 당신 하나 여의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삶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건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어디로든 아낌없이 소멸해버리고 싶은 건가//

겨울비 대흥사 / 류근
겨울 대흥사에 갔습니다 작년의 겨울나무, 재작년의 겨울나무, 가만히 아무것도 아닌 나무들이 비탈에 기대어 흐려진 내 이마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빗소리 까마득히 고요해서 당신 이름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작부 하나 깨워서, 저녁 연기 푸르른 마을로 가 살림 나고 싶었습니다 땅끝은 아직 먼 길이었으나 동백꽃 봉오리마다 짐짓 새 전생이 지펴지고 있었습니다//

손 씻는 법 / 류근
왼손은 오른손을 씻고/ 오른손은 왼손을 씻는 법이다// 손바닥은 손등을 씻고// 손등은/ 손바닥이 데려가 입힌 때를/ 다른 편 손바닥에/ 기꺼이 맡기는 법이다// 손에서 손까지의 거리/ 손바닥에서 손등까지의 거리// 서로 마주치지 않으면/ 죽어도 씻을 수 없는 거리가/ 가슴 아래 같은 체온으로 매달려 있다//

좋은 아침 / 류근
술에 취해 옛 애인들에게/ 까맣게 기억 끊긴 전화질을 해대고 나서/ 이튿날 쪼그려 앉아 회개하는 나에게/ 숙취의 혼잣말이 어깨를 두드리나니// 그래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와/ 기억나지 않는 섹스를 하고/ 기억나지 않는 여관에서/ 혼자 깨어난 아침보다 낫다//

​배려 / 류근
지구를 가볍게 해주려고/ 새는 자주 지상을 비웠다/ 집안을 가볍게 해주려고/ 아버지는 자주 가족을 비웠다// 어느 날 새도 아버지도/ 제가 비운 것에 돌아와 죽었다/ 새는 지상을 베고서/ 아버지는 가족을 베고서,//

반성 / 류근
하늘이 함부로 죽지 않는 것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별들이/ 제 품 안에 꽃피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조차 제 품 안에서 평화롭기 때문이다/ 보아라, 하늘조차 제가 낳은 것들을 위해/ 늙은 목숨 끊지 못하고 고달픈 생애를 이어간다/ 하늘에게서 배우자/ 하늘이라고 왜 아프고 서러운 일 없겠느냐/ 어찌 절망의 문턱이 없겠느냐/ 그래도 끝까지 살아보자고/ 살아보자고 몸을 일으키는/ 저 굳센 하늘 아래 별이 살고 사람이 산다//

새 / 류근
지혜로운 새는 세상에 와서/ 제 몸보다 무거운 집을 짓지 않는다/ 바람보다 먼 울음을 울지 않는다// 지상의 무게를 향해 내려앉는/ 저녁 새 떼들 따라 숲이 저물 때/ 아주 저물지 못하는 마음 한 자리 병이 깊어져// 집도 없이 몸도 없이/ 잠깐 스친 발자국 위에 바람 지난다/ 가거라.//

문득 조금 억울한 인생 / 류근
출근길이 꼼짝도 않는다/ 지렁이 보폭보다 짧게 주춤주춤 엎질러지다 보면/ 저만치서 무슨 바구니 같은 데 올라타서/ 가로수 전지 작업하는 구청 용역 인부들/ 아침부터 길을 막고 저 지랄이냐, 하다 말고/ 가만 생각해보니 나보다 나무가 상전이다/ 출근도 명퇴도 없이 제자리에 멈춰 서서/ 죽는 날까지 사람들 용역으로 부리며/ 세금으로 몸치장하는 상전들/ 국회의원 같은 자세로 일없이 서서/ 흙과 빗물과 햇빛과 바람까지 소집해/ 보좌관 거느리듯 앵벌이로 내세우는/ 하느님 마름 같은 불한당 놈들/ 저놈들 먹여 살리자고 나는 아침부터/ 길 위에 꼼짝도 못 하고 선 채 결국/ 나무 대신 사방팔방 삿대질이나 하고 이 지랄인가/ 근로소득세, 주민세, 고용보험료 벌러 가지 못해/ 쓰지도 못할 발암물질이나 푸들푸들 푸르르르/ 엽록소처럼 합성해내고 있단 말인가//

인문학적 고뇌 / 류근
마누라가 유방확대 수술을 했다/ 나는 그걸 오늘 아침에 참으로 우연찮게 발견했는데/ 마누라른 모처럼 혀를 차며 벌써 세 달이나 지난 것을 이제야 알았냐고/ 섭섭해하는 척 제 가슴을 다시 확인한다/ 나는 순간 생각하는 것이 세 달 전 마이너스통장과 옛날 여수 출신/ 유방 큰 애인과 유방이 커서 울며 살았다는 이영자와 조선 막사발과/ 이제 저 여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같은 것들이다/ 저 여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마누라는 나에게 여러 번 배신당했지만 유방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여러 번 다른 애인과 고궁을 거닐었지만/ 유방 때문은 아니었다/ 마누라는 이제 유방을 키워서 아이에게 젖을 먹일 일도 없고/ 세자 저하 유모로 사극을 찍을 일도 없고 일본 성인비디오/ 배우로 진출해서 아이들 사교육비를 감당할 일도 없고/ 나에게 잘 보여서 다시 시집갈 일도 물론 없을 텐데/ 이제 나는 저 여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어떻게든 이별 / 류근
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다 맘먹고 이별했고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내가 이별하는 동안 빗방울은 구름의 자세와 이별했고 우산은 나의 신발장과 이별했고 사소한 외상값은 현금지급기와 이별했다 몇몇의 벌레들은 영영 목숨과 이별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 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 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 하였다// 아아, 그럴 수 있을까 우리 동네 가난한 극장은 천장이 무너져서 결국 문을 닫고 수리 중,이다 로터리에서 사라질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극장에서 극장이 이별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옛날 애인은 결국 초경 후 폐경하였다 이별이다 아아, 어떻게든 이 별!// 나는 황소표 빨랫비누로 머리 감던 시절을 기억한다 머리카락이 담벼락과 잘 결합하던 시절이었다 노란 곰인형을 팔아서 우리 노란 전구를 살까 애인은 남영역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그때 인천행 전동차는 서울역과 이별하는 것이고 내 친구 김세연이는 망을 보는 것이고 삼표 국숫집 리어카는 나를 태우고 한낮의 전봇대와 충돌하는 것이다 선생님, 더 이상 학교 다니고 싶지 않아요. 부산항에서 민들레를 봤어요, 노랗던데// 그러니 나의 이별을 애인들에게 알리지 마라 너 빼놓곤 나조차 다 애인이다 부디, 이별하자//

옛날 바다 / 류근
옛날 열차를 타고 옛날 바다에 가고 싶다. 응달도 별자리도 없이 옛날만 있는 바다. 사랑도 편지도 문패도 모두 옛날에만 있어서 하나도 아프지 않은 바다. 갈매기와 파도마저 옛날 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바다. 옛날의 애인이 울어주는 바다. 가만가만 울음을 들어주는 바다.// 옛날 바다에 가고 싶다. 옛날의 모래와 햇볕이 성을 쌓는 바다. 무너져도 다시 쌓으면 그만인 바다. 빨간 우체통이 서 있는 바다. 이별마저 옛날에 다 지나간 바다. 이별마저 옛날에 다 잊히고 잊힌 바다. 이별마저 왔다가 옛날로 가버린 바다.// 옛날 열차를 타고 옛날 바다에 가고 싶다. 그 어떤 약속도 옛날이 돼버린 바다. 그래서 이제는 지킬 수 없는 약속만 떠도는 바다. 내가 데리고 간 상처가 가만가만 양말을 벗는 바다. 모든 게 착해진 바다. 다 지나간 바다. 내가 옛날이 되어서 돌아오지 않는 바다. 옛날마저 옛날이 되어서 돌아오지 않는 바다. 돌아오지 않아도 다 용서가 되는 바다.//

머나먼 술집 / 류근
요 몇 달 사이에 나는 피해서 돌아가야 할/ 술집이 두 군데 더 늘었다/ 없던 술버릇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갈 수 없는 술집들도 하나씩 늘어난다/ 그저께는 친하게 지내오던 사채업자와 싸우고/ 어젯밤엔 학원 강사 하는 시인과 싸우고/ 오늘은 술병 때문에 일요일 하루를/ 낑낑 앓는 일에 다 바친다/ 억울하다 갈 수 없는 술집이 늘어날 때마다/ 없던 술버릇이 늘어날 때마다/ 그래도 다시 화해해야 할 사람들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또 술 생각이 난다 맨 정신일 때/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내 선량한 자존심/ 하지만 그들은 왜 하필 술 마실 때에만/ 인생을 가르치려는 것인가 술자리에서만/ 별안간 인생이 생각나는 것인가/ 억울하다 술 마실 때에만 불쑥 자라나는 인생이여/ 술에서 풀려나면 다시 모른 체 껴안고 살아버려야 할/ 적이여 술집이여 그 모든 안팎의 상처들이여/ 갈 수 없는 술집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또 술 생각이 난다 슬슬/ 피해서 돌아가고 싶어진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 류근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명랑한 햇빛 속에서도 눈물이 나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깊은 바람결 안에서도 앞섶이 마르지 않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무수한 슬픔 안에서 당신 이름 씻으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가득찬 목숨 안에서 당신하나 여의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삶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건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어디로든 아낌없이 소멸해 버리고 싶은건가//

무늬 / 류근
그대를 사랑할 때 내 안에 피어 나부끼던 안개의 꽃밭을 기억합니다. 세상에 와서 배운 말씀으로는 이파리 하나 어루만질 수 없었던 안타까움으로 나 그대를 그리워하였습니다. 나무들이 저희의 언어로 잎사귀마다 둥글고 순한 입술을 반짝일 때 내 가슴엔 아직 채 이름 짓지 못한 강물이 그대 존재의 언저리를 향해 흘러갔습니다. 마침내 나는 그대 빛나는 언저리에 이르러 뿌리가 되고 꽃말이 되고 싶었습니다.// 내 꽃밭의 향기와 강물의 깊이를 넘어 밤이 오고 안개를 적신 새벽이 지나갔습니다. 내 그리움은 소리를 잃은 악기처럼 속절없는 것이었으나 지상의 어떤 빛과 기쁨으로도 깨울 수 없는 노래의 무늬 안에 꿈꾸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썩어 이룩하는 무늬, 이 세상 모든 날개가진 목숨들의 무늬, 그 아프고 투명한 무늬를 나는 기뻐하였습니다. 그대를 사랑할 때 비로소 나는 기쁨의 사람으로 피어 오래도록 반짝일 수 있었습니다.// 봄날이어도 좋았고 어느 가난한 가을날이어도 좋았습니다. 그대 더 이상 내 사랑 아니었을 때 내 꽃밭은 저물고 노래의 강물 또한 거기쯤에서 그쳤습니다. 문득 아무런 뜻도 아닌 목숨 하나 내 것으로 남아서 세상의 모든 저문 소리를 견디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지막 한 방울의 절망조차 비워내는 일이었으므로 내겐 내 순결한 슬픔을 묻어 줄 어떠한 언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눈물마저 슬픔의 언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서야 깨달아 버린 것이었습니다.// 날마다 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그대를 사랑할 때 내 안에 피어 나부끼던 안개의 꽃밭을 나 너무 오래도록 기억합니다. 내 목숨에 흘러가 있는 기억의 저 아득한 무늬 위에 이제는 그대를 놓아주고 싶습니다. 그리고도 남은 목숨이 있거든 이쯤에서 나도, 그치고 싶습니다. 스스로 소리를 버리는 악기처럼 고요하고 투명한, 무늬가 되고 싶습니다.//

 



류근(柳根) 시인
1966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충북 충주에서 자랐다. 본관은 진주 류씨.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공부했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으나 이후 작품 발표를 하지 않다가 등단 18년 만인 2010년, "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을 첫 시집으로 출간했다. 대학 졸업 후 광고회사 등에서 일하다가 홀연 인도 여행을 하고 돌아와 강원도 횡성에서 고추 농사를 짓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쓴 노랫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김광석에 의해 불렸다. 현재 소설가 정영문과 이인 동인 '남서파' 술꾼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싸나희 순정》《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상처적 체질》《어떻게든 이별》 등이 있다.

 

 

[노래의 탄생]김광석 ‘너무 아픈 사랑은…’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 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

m.khan.co.kr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영주 시인  (0) 2021.07.08
황인찬 시인  (0) 2021.07.07
김혜순 시인  (0) 2021.07.05
심보선 시인  (0) 2021.07.02
박준 시인  (0) 2021.07.01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