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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혜순 시인

부흐고비 2021. 7. 5. 08:58

지평선 / 김혜순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낮과 검은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자서(自序) / 김혜순
시는 말씀이 아니다. 말하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장르는 운명이다./ 나는 시라는 장르적 특성 안에 편안히 안주한 시들은 싫다./ 자기만의 형식이 없고 목소리만 있는 시들도 싫다./ 나는 시라는 운명을 벗어나려는,/ 그러나 한사코 시 안에 있으려는,/ 그런 시를 쓸 때가 좋았다./ 그 팽팽한 형식적 긴장이/ 나를 시쓰게 한다.// 양수막 속에서 튀어나오려는 태아처럼./ 자루에 갇힌 고양이처럼.//

 

한강물 얼고, 눈이 내린 날 / 김혜순

한강물 얼고, 눈이 내린 날/ 강물에 붙들린 배들을 구경하러 나갔다./ 훔련받나봐, 아니야 발등까지 딱딱하게 얼었대./ 우리는 강물 위에 서서 일렬로 늘어선 배들을/ 비웃느라 시시덕거렸다.// 한강물 흐르지 못해 눈이 덮은 날/ 강물 위로 빙그르르, 빙그르르./ 웃음을 참지 못해 나뒹굴며, 우리는/ 보았다. 얼어붙은 하늘 사이로 붙박힌 말들을.// 언 강물과 언 하늘이 맞붙은 사이로/ 저어가지 못하는 배들이 나란히/ 날아가지 못하는 말들이 나란히/ 숨죽이고 있는 것을 비웃으며, 우리는/ 빙그르르. 올 겨울 몹시 춥고 얼음이 꽝꽝꽝 얼고.// 

 

찬란했음 해 / 김혜순

네 몸에서 내가 씨를 심은 새들이 울퉁불퉁 만져졌음, / 네 피가 새의 피로 채워졌음, / 네 발걸음이 겅중겅중 공중으로 디뎌지는 나날/ 바보 멍청이 네가 네 몸의 문을 찾지 못하는 나날/ 내가 되고 싶은 네가 네 몸에서 나가고 싶어 안달 했음, / 습한 여름에도 발 아래 땅이 한없이 멀어지는 그런 가을이 온 것 같고/ 네 목구멍이 목마름으로 타들어가듯/ 네 몸의 새가 타올랐음, / 키득키득 네 입술 밖으로 연기가 새어 나오고/ 내 몸에 앉고 싶은 새가 더 더 더 달아오르는 나날/ 쿵쿵 울리는 심장의 둥지에서/ 쿵 소리 한 번에 새 한 마리씩/ 미지근한 네 두 눈의 창문 밖으로언뜻언뜻 아우성 치는 새들이 엿보이는/ 그런 나날/ 불붙듯 날개가 크게 돋아났는데도 돌 속인 그런 나날/ 가슴 위에 얹은 네 오른손이 마치 네 엄마처럼/ 새들로 꽉 찬 네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매일 그런 자세로 나를/ 네 안의 새들이 찬란했음, //


별을 굽다 / 김혜순
사당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서/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아침마다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밖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을 이 깊은 땅속을/ 밀물져 가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내는 분 계시겠지만/ 그분이 점지하는 운명의 별빛 지상에 내리겠지만/ 물이 쏟아진 듯 몰려가는/ 땅속은 너무나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보다// 저렇듯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얼굴을 구워내고 있었으니/ 모든 얼굴은 뜨거운 속이 굽는 붉은 흙 가면인가 보다//

판토마임 강사 / 김혜순
촉감 연습 시간이야/ 눈을 감고 열 손가락으로 빚어/ 만들고 느끼는 거야/ 자 지금 이 순간 시궁창으로부터/ 이것을 집어/ 올려 봐/ 그것을 두 손에/ 들어 네 품에 안았다고 상상해 봐/ 눈썹이 없는 아이/ 피돌기가 피부 밖에서도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아이/ 발은 있지만 발가락이 없는 아이/ 머리칼은 없고 손톱도 없는 아이/ 눈은 보일락말락 하고 입술도/ 있을락말락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늘귀보다 작은/ 콧구멍으로 숨을 쉬는 아이/ 배꼽으로 허겁지겁 먹는 아이/ 그리고/ 그리고 그 작은 아이를 이끌고 열 길/ 지옥으로 걸어드는 한 여자/ 네가 마다한/ 여인.//

엄마 / 김혜순
나는 엄마다/ 딸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내가 또 새끼를 근엄하게 훈계하고/ 먹여서 기르니/ 나는 엄마다/ 엄마이기 때문에/ 나는 엄마 행세를 한다/ 그건 안 돼!/ 하지 마!/ 때릴 거야!// 그 전엔 난 엄마가 아니었다/ 어렴풋한 기억 저편/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두 눈이 전우주를 향해 열려 있고/ 손가락들이 명왕성 해왕성을 꼬집고 놀 때/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나의 엄마도 나에게 엄마 행세를 했다/ 별 떨어질라 푸르른 창공 아래엔/ 지붕을 덮고/ 바람 불라 넓은 벌판 한가운데/ 벽을 세우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시야를 좁게 가져라/ 저 까만 우물을 향해 투신해라/ 영혼을 아무데나 흘리고 다녀선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자식의 시야에 칸을 지르고/ 널푸른 영혼에 금을 긋고/ 우물을 파는/ 자못 교훈적인 엄마가 되었다//

 

딸을 낳던 날의 기억 -판소리 사설조로 / 김혜순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 거울을 열고 다시 들어가니/ 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 앉으셨고/ 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 거울 안에 외증조할머니 웃고 계시고/ 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 그 거울 안에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 돌아 앉으셨고/ 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들어가니/ 또 다시 들어가니/ 점점점 어두워지는 거울 속에/ 모든 웃대조 어머니들 앉으셨는데/ 그 모든 어머니들이 나를 향해/ 엄마엄마 부르며 혹은 중얼거리며/ 입을 오물거려 젖을 달라고 외치며 달겨드는데/ 젖은 안 나오고 누군가 자꾸 창자에/ 바람을 넣고/ 내 배는 풍선보다/ 더 커져서 바다 위로/ 이리 둥실 저리 둥실 불리워 다니고/ 거울 속은 넓고넓어/ 지푸라기 하나 안 잡히고/ 번개가 가끔 내 몸 속을 지나가고/ 바닷속에 자맥질해 들어갈 때마다/ 바다 밑 땅 위에선 모든 어머니들의/ 신발이 한가로이 녹고 있는데/ 청천벽력./ 정전. 암흑천지./ 순간 모든 거울들 내 앞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며/ 깨어지며 한 어머니를 토해내니/ 흰 옷 입은 사람 여럿이 장갑 낀 손으로/ 거울 조각들을 치우며 피 묻고 눈 감은/ 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 조그만 어머니를 들어올리며/ 말하길 손가락이 열 개 달린 공주요!//

불쌍히 여기소서 / 김혜순
삼천 개의 뛰는 심장이/ 전동차 열 량을 끌고 간다/ 삼백 개의 따스한 심장이/ 지하로부터 무쇠 에스컬레이터를/ 끌어올리기도 한다/ 다시 삼만 개의 고린내나는 발가락이/ 저 푸른 하늘 아래/ 저 쉼없이 흐르는 강 위에/ 전동차 열 량을 올려놓는다/ 만원 전동차 안, 내 심장 일심실 곁에서/ 삶으면 한 움큼도 안 될/ 쉰 머리칼의 할머니 분홍빛 심장 이심실이/ 뛴다 코티분 분통 터진 것보다/ 더 환한 심장이 뛴다// 저 검은 머리털 아래/ 저 하찮은 에드윈, 언더우드 아래/ 저 붉은 심장들이/ 숨어서 뛴다/ 오우 하나님 보시옵소서/ 따뜻한 속꽃 삼천 송이로 지은 심장 만다라/ 지금 한강 노을 속에 잠시/ 떴나이다//

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 1 / 김혜순
나는 내가 모든 학생인 그런 학교를 세울 수 있지. 쉰 살의 나와 예순 살의 내가 고무줄 양끝을 잡고, 열 살의 내가 고무줄 뛰기 하는 그런 학교. 이를테면 말이야. 지금의 내가 기저귀 찬 나에게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세요 말을 가르칠 수도 있고, 여중생인 나에게 생리대를 바르게 착용하는 법도 가르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열 살인 내가 예순 살인 나에게 인생이란 하고 근엄하게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몰라. 또, 이를테면 말이야, 나는 또 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도 지을 수 있지. 실연당하고 미친 듯이 농약을 구해온 열아홉 살 나와 네가 싫어 그랬다고 우리집 도끼로 부수던 남자를 바라보는 스무 살의 내가 함께 나오는 그런 소설도 지을 수 있을 거야. 이런 소설은 어때? 열 살의 나와 예순 살의 나에게 겸상으로 우리 엄마가 밥상 차려주는 그런 소설. 결혼 전의 내가 공원에 앉은 지금 나의 뺨을 때리고, 일흔 살의 내가 뺨 맞은 나를 위로해주는 그런 소설 말이야.//

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 2 / 김혜순
겨우내 들러붙었던/ 동사, 형용사, 부사/ 다 떼어놓고/ 투피스 탁탁 털어/ 세탁소 간다/ 동현 세탁소 천장엔/ 잘 다려진 主語들이/ 비닐을 쓰고 걸려 있다/ 먹어치운 물처럼 기억은 사라져도/ 노래는 남는 법!/ 병아리떼 쫑쫑쫑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主語도 없이/ 숨쉬는 이 물체 밖으로/ (연초록 병아리떼 가득 차오르는 저 산!)//

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 3 / 김혜순
밤마다 잠들려 하면/ 나는 아이 하나 껴안는다/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아이/ 얼굴도 이름도 지어지기 전의 나/ 그 아이를 깨우지 않으려 나는 조용히 말한다/ 지난 해에 든 감기가 아직도 낫지 않아요/ 나는 그 아이에게 들어간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한 발짝도 크지 않은 아이/ 새파란 아이/ 아직도 ‘내’가 아닌 아이/ 황인종도 아니고 맏딸도 아니고 더구나 김혜순도 아닌 아이/ 지구를 박차고 솟아올라/ 아직도 젊은 별, 푸른 불꽃 자체인 그 아이/ 우리 엄마 뱃속에서 아직도 눈 못 뜬 아이/ 나 죽어도 살아있을 그 아이// 밤마다 잠들려 하면/ 한 노인이 웅크린 나를 껴안는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깨어 있는 그 노인이 나를 껴안는다/ 태반처럼 살갗 주름 사이마다/ 죽음을 재운 징그러운 그가/ 한밤내 나를 껴안고 내려다본다/ 그가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의 얼굴 속에서 이미 지구는/ 지구의 시간을 다 살아내었다/ 한없이 늘어진 젖무덤 속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수억만 번 흘렀고/ 산맥들은 자신들의 리듬을 다 연주했다/ 이름도 얼굴도 삭아버린 그 노인/ 너무도 늙어 여전히 어린 아기인 그 노인/ 나 죽어야 비로소 죽을 그 노인/ 그것이 나를 끌어안는다// 우리는 세 개의 숟가락처럼 포개져/ 베개 위에서 얼굴을/ 함께 돌리기도 하고/ 무서워 무서워/ 가운데 끼인/ 마흔 넘은 내가 이를 갈기도 한다.//

불 다 꺼진 한밤중의 공원 벤치 / 김혜순
나는 지금 가방을 열었어/ 일 년 삼백 육십오일 하고도 곱하기 삼/ 밥상 당번하는 거 지겨워 사춘기 소녀 식모처럼/ 징징거리며 오늘밤 나는 가출했거든/ 그런데 무심코 가방을 열자/ 수많은 나와 가출해 추위에 떠는 내가 동시에 만나버린 거야// 저기 봐, 저기 가방에서 나온 머리통 하나/ 그네 위로 높이 떠올랐잖아?/ 가슴에 수놓인 손수건을 달았어/ 부처 얼굴이 무서워 포교당 유치원을 탈출했어/ 아니, 잘못 봤어 그보다 몇 년 뒤야/ 물 없는 우물에 빠져 소리지르고 울 때야/ 저기 봐, 또 저기/ 가로등 위로 풀빵을 사든 내가 지나가잖아/ 할아버지 몰래 금고에서 동전을 꺼냈어/ 저 발 아래 물웅덩이엔/ 내 무릎 사이로 발가벗은 귀여운 내가 기어오네/ 쭈쭈 아가 이리 온, 맛있는 젖 먹여줄게/ 일흔 살의 내가 마흔인 나를/ 위로하느라 가로수 사이 불어제치네/ 흰 머리칼 다 풀어지고 이마엔 땀이 맺혔어/ 내 몸에서 나온 나의 할머니들과/ 나의 딸들이 달로 뜨고 별로 뜨고/ 나뭇잎 잎잎마다 바람으로 불어제쳤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 김혜순
직육면체 물, 동그란 물, 길고 긴 물, 구불구불한 물, 봄날 아침 목련꽃 한 송이로 솟아오르는 물,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물, 저 직립하고 걸어다니는 물, 물, 물…… 내 아기, 아장거리며 걸어오던 물, 이 지상 살다갔던 800억 사람 몸 속을 모두 기억하는, 오래고 오랜 물, 빗물, 지구 한 방울.// 오늘 아침 내 눈썹 위에 똑, 떨어지네./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저 물이/ 초침 같은 한 방울 물이/ 내 뺨을 타고 어딘가로 또 흘러가네.//

물음표 하나 / 김혜순
누군가 물음표에서 물음을/ 뽑아 버리고 있다./ 닭털처럼 날리던 물음/ 바람에 몸을 맡긴 물음/ 발가벗기던 물음/ 온몸에 물감을 칠하던 물음/ 얼굴을 가린 물음/ 통곡하던 물음.// 물음의 눈물. 눈물의 홍수. 물음의 무릎. 무릎을 당겨, 물음. 돌아누워, 물음. 좋아, 물음. 개같이 짖어 봐, 물음. 물음, 입 벌려. 물음의 침. 침의 홍수. 물음, 무릎을 조심하라니까. 물음을 물어뜯는 물음. 잠자지 마, 물음. 노래 해, 물음. 바람처럼 흩날려, 물음. 쉼표, 이리 들어와. 물음을 막아 서. 나가지 못하게 하란 말야, 쉼표. 물음, 물음, 제자리. 노래하는 물음. 마침표를 버린 물음. 물음만 남아서 외로운 물음. 꼬리로 만들어진 물음. 비 맞고 꼬리를 세우던 물음. 흩날리며 입술을 깨물던 그 불쌍한 물음.// 꼬리를 잃은 마침표 하나/ 숨죽여 울고 있다./ 이제 누군가 다가가/ 마침표 하나에/ 쓰러진 물음을 쑤셔박으려 하고 있다.//

중앙박물관 길 / 김혜순
이조시대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걸 알았다.// 나는 왕의 밥그릇, 술잔, 수저를 잊혀진 후궁처럼 바라보다 말고 백자연적의 연꽃잎들을 주르르 흘리며 고려시대관으로 달려간다. 나는 비취빛 화병들 사이로 뛴다. 병들이 한쪽으로 쏠리며 무너지는 것 같다. 튀어오르는 가는 학, 어린 소나무, 바닥으로 떨어지는 민물고기, 나는 정신없이 뛴다. 뛰면서 조그맣게 아이의 이름을 불러본다. 부르는 소리는 그릇 굽는 불가마 속으로 들어간 불쏘시개처럼 흔적이 없다. 나는 다시 달려나간다. 고려에서 신라로, 개성에서 경주로 문을 박차고 나간다. 금귀걸이 옥귀걸이 유리귀걸이 소리가 잘그랑잘그랑 나는 방 속을 뛴다. 금을 왕수에 녹일 때처럼 가슴 속에서 기포가 보그르르 올라온다. 어떡하나. 파헤친 왕릉 사이로 아이의 머리가 언뜻 보인 듯하다. 나는 그 무덤의 부장품 사이로 손을 집어넣는다. 단단한 통유리가 손바닥 아래서 탁 ! 나를 막는다. 신라관에서 불현듯 토기시대관으로 건너뛴다. 박물관 밖으로 나가선 안 되는데. 그러면 더 못 찾을 텐데. 흙이 일어서 그릇이 된다. 흙이 일어서 사람이 된다. 흙이 일어서 물동이가 된다. 모든 그릇들이 일어서 아이로 보인다. 깨어진 아이를 본드로 붙여놓은 듯하다. 아이가 물을 담고 서있다. 휘재야 휘재야 나는 운다. 눈물이 카펫 바닥에 스며들고 박물관 입구에서 산 엽서들이 쏟아진다. 석기시대관 입구에서 다시 아이를 부른다. 돌화덕에서 연기가 오르는 듯하여 경황중에 한번 더 쳐다본다. 돌칼 돌화살 돌창 저것들로 잡을 짐승이 있었다니 믿기지 않는다. 문밖으로 달아나는 노루 언뜻 보인다. 그 노루를 쫓아가다 말고 휴게실을 둘러보기로 한다. 어느 나라로 떠나는 대사에게 임명장이라도 내린 방일까. 웅장하고 두껍고 붉은 커튼이 어마어마하다. 한 손으로 머리 위에 종이를 내리며 아프리카로 가라, 그대는 칠레로, 아니면 남의 나라 사람들이 남의 나라 사람들에게 남작 백작 공작 자작 깃털을 하사하며 정오엔 깃을 펴라 뽐내어라 연극하던 방일까. 그곳에서 코카콜라를 판다. 나는 누군가와 부딪치면서 콜라 세례를 받는다. 흰 치마에 콜라가 썩은 피처럼 번진다. 징징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간다. 다시 올라온다. 사각의 미로 같다. 그러다 어느 방에 고꾸라지듯 들어간다. 철기 시대. 철로 만든 검. 철로 만든 방패. 철로 만든 모자. 철로 만든 창을 등지고 다시 나온다. 그러다 계단 위로 꿈결처럼 아이가 걸어 올라오는 것을 본다. 엄마 이게 뭐야? 으응 이건 철갑옷이야. 칼로 싸울 때 맞지 않으려고 입는 거야. 무거운 옷일 거야. 우리는 철기 시대 철갑 병사 앞에서 두 손을 맞잡는다.//

눈썹 / 김혜순
얕은 물속에서 오래 묵은 몸이 부화하나 보다/ 물밖으로 쉴 새 없이 뽀얀 숨이 올라온다// 잠시 후 몸을 암흑으로 잠근 눈꺼풀 한 쌍이 날아오른다// 노란색으로 벌어진 상처 하나가 날아간다/ 물수제비로 떠낸 파문 한 닢 날아간다// 껍질을 버린 내가 팔락팔락 숨을 쉰다/ 잠은 깊어서 노랑나비 한 마리는 멀다// 콩떡 먹고 입 벌리면 뿜어져 나오는 노란 가루/ 발정난 소나무들이 앞산자락으로 송화를 내뿜는다// 부신 햇살에 날아가는 내 어금니처럼 노란 것// 바람도 안 부는데 내 속에 살던/ 바람의 터럭 같은 것이 두근두근 날아간다// 나는 내 영혼에서 냄새가 난다 라고 쓴다/ 나는 두근거리는 노랑을 뱉고 싶다 라고 쓴다// 노랑나비 다리에 수평선이 묶여 있다// 호숫가에서 수천 개의 회초리가 일어나듯/ 버드나무 가지들이 전신을 떨고 있다// 잠깸과 잠듦의 소용돌이가/ 깜빡깜빡/ 낮과 밤 사이에 그어진 빗금 하나를 입에 물고/ 깜빡깜빡// 나는 저 혼자 잘도 날아간다/ 끌려가는 수평선이 내 종아리를 칭칭 감고 있다// 당신이 불씨 한 알처럼 사그라지던/ 눈꺼풀 한 쌍을 훅 불면/ 나비 한 마리 몸은 어디다 두고/ 호수 위로 저 혼자 잘도 날아간다//

입술 / 김혜순
지렁이과. 자웅동체. 밑에 있는 것을 암컷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위에 있는 것을 암컷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으나 그 누구도 수컷과 암컷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 생긴 모양에 따라 성격도 각각. 늘 함께 벌어지고 함께 닫히는 한 몸, 환한 대낮에는 새초롬히 땅속을 헤매는 듯 닫혀 있지만 밤이 오면 밖으로 나와 피부로 숨쉬며 할말 안 할말 다하고 살면서 다른 지렁이 쌍과 몸비비기도 서슴지 않는다 한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즐기면서도 말은 마구 냄새를 피우면서 배설한다는 소문. 입과 항문의 동체. 그 배설물의 독성은 가히 치명적(껄껄거리면서 터지는 헛방귀 소리. 그 앞에선 온갖 동물들이 피해간다). 어두운 곳에선 끝장을 볼 때까지 터널을 파기를 좋아하며 창자와 하나의 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기관. 날카로운 이빨로 부드럽고 간사한 붉은 성감대를 가린다는 소문. 그 수다를 보다못한 두더쥐가 어둠 속에서 잘라 먹어도 잘라진 채 잘도 진흙 뻘밭을 기어나가는 환상동물. 하늘이 걸리는 두 눈 아래, 배를 땅에 묻히고 기는 얼굴 위의 생물 중 가장 하등동물. 붉은지렁이과. 천적은 새. 새의 소리 없는 비상을 내심 두려워하고, 또 부러워한다.//

들숨, 날숨 / 김혜순
나 숨을 들이마시면서/ 먹은 음식들 몸 안에 가둔다/ 나 숨을 내쉴 때/ 먹은 음식들 뿔뿔이 달아나려 한다// 밥들이 저 들판 벼포기로 달아나려 한다/ 생선들 바다로 가 헤엄치려 한다/ 수박이 줄기를 찾으려 기우뚱거린다/ 흙으로 바람으로 햇볕으로/ 가려고 가려고만 한다// 나 오늘 숨을 들이마시면서/ 몸 안에 푸른 콩들을 가둔다/ 나 오늘 숨을 내쉴 때/ 청어 한 마리 튀어나오려/ 가슴을 탕탕 친다// 나 자꾸 가둔다/ 뿔뿔이 흩어지려는 튀는 생명을/ 숨 크게 들이마시며/ 날마다 몸 속에 가둔다/ 나 죽으면 천갈래 만갈래 찢어져/ 흩어질 생물들을//

껍질의 노래 / 김혜순
가르쳐주지 않아도/ 열려진 입술은 젖을 찾아낸다/ 그리곤 내 몸에서 단물을 빼내간다/ 금방 먹고도 또 빨아먹으려고 한다/ 제일 처음/ 입안에서 침이 마른다/ 두 눈에서 눈물이 사라지고/ 혈관이 말라 붙는다/ 흐르던 피가 사라지고/ 산천초목이 쓰러지고/ 낙동강 물이 마르고 강바닥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터진다/ 전신이 흠뻑 빨려 나간다/ 먹은 것을 토하면서도/ 열려진 너희들의 입술은/ 젖꼭지를 물고야 만다/ 마침내 온몸이 텅 비어/ 마른 뼈와 가죽이 남을 때까지/ 천궁이 갈라지고/ 은하수 길이 부숴져 내릴 때까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영혼마저 말라 죽을 때까지.//

도솔가(兜率歌) / 김혜순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신발 좀 빌어달라 그러며는요/ 신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부축해다오 발이 없어서 그러며는요/ 두 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빌어달라 빌어달라 그러며는요/ 가슴까지 벗었더랬죠/ 하늘엔 산이 뜨고 길이 뜨고요/ 아무도 없는 곳에/ 둥그런 달이 두 개 뜨고 있었죠//

종(鐘) 속에서 / 김혜순
잡히기 전에 이슬 맺힌 옷을 말려보겠다// 잡히기 전에 에스컬레이터를 한정없이 오르내리고/ 잡히기 전에 나는 바다바라보기 전문가// 파도를 소란스러운 팔처럼 뻗어보겠다// 다정한 미소를 저 산 너머까지 펼쳐보겠다// 나뭇잎 그림자가 얼굴을 간질이는 기분을 좋아해 보고// 모르는 한 사람을 미행해보고// (어디로 가려고 했을까, 나는/ 머리도 한 올 없는데/ 내 별명은 민대머리, 무모증, 복어대가리, 학교종이 땡땡땡인데)// 뇌 속의 추적자인가/ 철공소의 이명인가// 거칠게 내쉬는 내 숨을 줄에 묶어/ 잡아챘다가 다시 놓아주는 너는// 나는 지금 주름을 닫은 허파/ 나는 지금 주름을 닫은 아코디언// 그렇지만 다정하게 미소짓고 있겠다// (그래, 가발이 휙 벗겨지고 두개골이 내던져진다/ 온 도시에 내 두개골이 내던져진다/ 내 두개골이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는 발자국 같이 흩어진다)// 잡히기 전에 흘러가다 돌부리를 잠시 붙잡아보는 강물// 잡히기 전에 가구점의 침대에라도 눕고 싶어 머뭇거리는 발길// 잡히기 전에 옥상에서 뛰어내리다 7층에 켜놓은 촛불을 응시하는 눈동자// 그래, 네가 줄을 잡아당기기 전에//

우체통 / 김혜순
얼굴을 붉힌 채 기다리고 있다 해야 하나. 이별하려고 기다린다는 말을 말아야 하나. 순결이란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굴까.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 사람. 창구에 앉은 여자처럼 받은 것은 무조건 돌려/ 보내는 나를 뭐라고 해야 하나.// 이미 피를 흘려봤다고 해야 하나. 피 묻은 얼굴이라고 해야 하나. 들어온 것은 반드시 내보내는 가엾/ 은 심장이라고 해야 하나. 흰 손바닥이 가슴에 들어왔다 나간다. 영장류의 손바닥은 왜 비닐 코팅된/ 감촉일까. 생은 막幕일까. 나는 너에게 당당히 말한다. 나는 너를 간직하지 않겠다.// 불 꺼진 부화기 안에서 불을 켜달라고 소리쳐야 하나. 익일 특급 우편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아이를/ 싸서 주소를 쓰고 침을 발라 눈을 감긴다. 온몸 가득 스탬프 찍어 아이를 반송한다. 자꾸만 돌아오는/ 아이를 또다시 보내려고, 아침 9시부터 문을 열었다가 정각 5시에 닫는다고 정문 앞에 고지해야 하나.//

고리타분한 시인과 발랑 까진 애인 / 김혜순
이 박물관의 서술은 시대순으로 되어 있다고 시인이 말하는 순간, 그의 애인은 그러나/ 이 박물관은 거꾸로 읽을 수도 있고 중간부터 읽을 수도 있지라고 말하면서 갈빗대 사/ 이로 구두를 밀어넣는다 그렇게 읽으면 역사적 지식이 없는 너로서는 도저히라고 시인/ 이 말을 잇는 순간, 그의 애인은 나는11a부터 25a까지를 먼저 본 다음 7의 b로 가겠어/ 요라고 말하면서 시인의 잇몸을 꽉 깨문다 애인은 걷는다 시인은 이렇게 써내려간다 지/ 가 안 돌아오고 배겨? 반드시 길을 잃을 거야 느닷없이 애인이 19c 방의 불을 탁 켠다/ 피어보지도 않고 시든 늙은 아이야 멀리 가거라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와선 안 된다 어/ 떤 일이 있어도 멀리 가버려라 이 에미가 상상도 못 할 별난 세계로 시인의 에미가 노래/ 하는 초상화가 걸린 방으로 애인이 들어온다 나는 거꾸로 읽을 수도 있어요. 애인은 시/ 인의 탯줄을 들고 문도 없는 입구로 들어온다 들어와서는 나무 좌대 위 대리석으로 떠/ 진 시인의 데스마스크 숲을 손가락질하며 깔깔거린다 시인이 잠든 몸을 뒤척이며 이 박/ 물관의 서술은 시대순으로 되어 있다고 일관성 있게 잠꼬대하는 순간 시인의 상처속으/ 로 애인이 등불같은 뜨거운 입술을 들이민다 애인은 23c의 방을 귀로부터 들어와 입술/ 밖으로 나간다 나가다 말고 다시 들어와선 시인이 밤낮으로 빚는 죽음, 그 방의 문을 두/ 드린다 지하 전시관엔 시인의 자화상들이 베수건에 들러붙은 얼굴처럼 늘어서 있다 시/ 인은 그 방에서 모자 위에 촛불을 얹고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그려내느라 정신이/ 없다 시인은 다시 33a로 들어온 애인의 흐린 실루엣을 자화상 안에 재빨리 그려놓는다/ 너는 지나가면 그뿐, 나는 이 방들을 차례대로 다 지나야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시인이 중/ 얼거리지만 애인은 방마다 붙어 있던 숫자 문패를 뜯어와 시인 앞에 주르르 쏟아놓는다/ 어두운 산에 바람이 부는가 촛불이 일렁인다 어두운 방안에서 시인의 아버지가 시인을/ 뜯어먹다말고 검은 구름 사이로 내다본다 시간이 얼크러진 방안 시인은 출구를 못 찾고/ 우두커니 서 있다//

 

레이스 짜는 여자 / 김혜순
송편을 찌다가/ 떡 반죽을 두 손으로 마구/ 짓뭉개고/ 침을 탁 뱉고/ 마구 내던지고 싶다가도/ ​쟁반 위엔/ ​형형색색의 가지런한 송편// 술을 따르다가/ 술잔을 내던지고/ 깨뜨리고/ 깨어진 술병을 들고/ 마구 찌르고, 뚝뚝 듣는/ 선혈을 보고 싶다가도/ ​약간 떨며 술잔 모서리에/ ​찰랑 알맞게// 언제나 고요한 시선, 고요한 수면/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한숨 한 번 쉬고// 불을 지피다가/ 불붙은 장작을/ 초가삼간 지붕 위로 내던지며/ 나와라 이 도둑놈들아/ 옷고름을 갈가리 찢고/ 두 폭 치마 벗어던지며/ 용천 발광하고 싶다가도// 문풍지가 한밤내 바르르 떨고/ 하이얀 식탁보는 눈처럼 짜여지고//

환한 걸레 / 김혜순
물동이 인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저 아래 우물에서 동이 가득 물을 이고/ 언덕을 오르는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땅속에서 싱싱한 영양을 퍼올려/ 굵은 가지들 작은 줄기들 속으로 젖물을 퍼붓는/ 여자들 가득 품고 서 있는 저 나무/ 아래 누워 그 여자들 가랑이 만지고 싶다/ 짓이겨진 초록 비린내 후욱 풍긴다// 가파른 계단을 다 올라/ 더 이상 올라갈 곳 없는/ 물동이들이 줄기 끝/ 위태로운 가지에 쏟아 부어진다/ 허공중에 분홍색 꽃이 한꺼번에 핀다// 분홍색 꽃나무 한 그루 허공을 닦는다/ 겨우내 텅 비었던 그곳이 몇 나절 찬찬히 닦인다/ 물동이 인 여자들이 치켜든/ 분홍색 대걸레가 환하다//

날개 환상통 / 김혜순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 그들은 말했다/ 애도는 우리 것/ 너는 더러워서 안 돼// 늘 같은 꿈을 꿉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팔을 펼치면 새/ 말 끊지 말라고 했잖아요/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그 콩 두 개로 꿈도 보나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그 이름,새는/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모래의 날개를 가졌다?/ 바람에 쫓겨 가는 저 새는//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혔다 사라집니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새 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죽으려고 몸을 숨기러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주세요//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을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 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밖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물이 나오는 곳/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해주는 곳/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 날개를 들어 올리듯/ 마스카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면// 타일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떠밉니다// 내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이 밤에//

얼음의 알몸 / 김혜순
너의 흰눈을 저장해둔 곳에 가본 일이 있으며/ 우박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너는 바다 밑 얼음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너는 거기서 물로 빚은 물고기들이 숨죽이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너는 마음속에 눈이 내려/ 높이높이 쌓인 눈, 그 속에 숨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그 사람이 잠 깨어 눈뜰 때/ 그 눈 속에 떠오르던 검은 달이/ 우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너는 쏜살같이 달려가는 기차에서/ 쏜살같이 달아나는 흰 산들을 잡으러 해본 적이 있느냐/ 그 산들의 싸늘한 눈길을 견뎌본 적 있느냐// 땡볕 쏟아지는 여름 그 큰 얼음을 아픈 사람처럼 담요에 싸안고/ 눈물을 훔치며 가던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너는 그 적나라하게 뜨거운 얼음의 알몸을 만져본 적이 있느냐// 깊은 밤에 깨어나 우는 사람의 눈물을 받아 먹어본 적 있느냐/ 그 굳센 얼음이 녹는 기분이 어떨까 생각해본 적 있느냐/ 그러니 잘 들어라 얼음아씨가 말하노니/ 너는 우박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다 녹아서 흘러가버린 우박창고에 우투커니/ 서 있어본 적이 있느냐//
*「욥기」38장 22절

달이 꾸는 꿈 / 김혜순
달 어머니가 국을 푸신다/ 퍼올리는 국자마다 달덩이 하나씩/ 폭풍우 끝난 밤/ 달 아기들이 밥상 아래/ 둥글게 앉아 있다// 그 집은 문을 닫아도/ 달 냄새 멀리까지 퍼지는 집/ 꿈 냄새 요란한 여자의 집/ 사람들은 꿈 속에 나타난 달/ 어머니에게 오줌을 누고/ 옷을 벗기고 뺨을 때리고/ 돼지처럼 구석으로 몰아대고/ 엉덩이를 때리고/ 달 아기들은 문 밖에서 울고// 그러나 아무도 달이 꾸는 꿈/ 속의 꿈인 줄도 모르고// (당신의 꿈속은 내 밤 속의 낮/ 내 몸이 당신 꿈으로 환해지나이다)// 달 어머니 탯줄을 자르시고/ 썰물처럼 떠나가는 날// 밤 부엉이 한 마리/ 창밖 어두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어두운 내 몸 속을 노리고// 나는 또 달 어머니 퍼주시는 국 한 그릇/ 빈집처럼 기다리고/ 달 어머니 머리 풀고 어디어디 다녀오시는지/ 그건 아무도 모르고//

분홍 코끼리 소녀 / 김혜순
우리 엄마가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을 때/ 나는 방학하면 시골에 내려가서/ 아이들의 받아쓰기 나머지 공부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 아이는 오직 내가 무엇을 부르든 간에 코끼리라고만 썼다// 어머니 하고 불러도 코끼리/ 아버지 하고 불러도 코끼리/ 선생님 하고 불러도 코끼리// 소녀의 꽉 움켜쥔 연필 아래 손목에는 코끼리의 영혼처럼 붉은 반점 붙어 있고/ 책상 아래 양말은 코끼리의 코처럼 늘어져 있었는데/ 내가 머리를 한번 빗겨준 다음엔 나를 보면 빗을 내밀었다// 공중화장실에서 소녀가 제 몸에서 코끼리를 꺼내고 있다/ 제 몸보다 더 큰 코끼리/ 소녀의 몸통에 긴 코를 붙이고 숨 쉬던 아기 코끼리/ 코끼리의 숨통을 이빨로 끊고 있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렸을 뿐인데/ 코끼리가 들러붙다니/ 얼굴 정중앙에 시체가 매달린 듯/ 죽음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으니// 나는 지금도 내 영혼을 둘로 나누어 가지겠다는 코끼리가 내 몸에 척 달라붙던 그 순간으로 발을 헛디딜 때가 있는데/ 울지도 않으면서 내 몸에서 종유석을 떼어내려 할 때가 있는데// 내가 한 소녀가 혼자 공중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신문기사를 읽다 말고 늙으신 엄마에게 그 코끼리 아이의 안부/ 를 물었더니 그 아이 엄마는 죽고 그 아이 아빠는 탄광에 다녔어 하나도 잊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노을 속에 숟가락 넣고 / 김혜순
이제 노을이나 먹고 싶어./ 밤은 늘 무거웠고/ 별들은 너무 시었어./ 햇빛 조금, 구름 조금, 싱싱한 하늘 조금./ 이제 거짓말 같은 노을이나 먹어 둘래.// 은빛 숟가락아 진군하라/ 일순의 감격처럼 노을은 쉬이 녹고/ 검은 보리떡 밤이 오리니/ 미친 듯이 퍼 올리려므나, 저 노을이나.// 배추 한 포기/ 저 물고기 한 마리/ 무얼 먹고 사는 줄 알아?/ 피로 쑨 죽 한 사발 저거나 먹어 둬야./ 미친 듯이 퍼 올려야지, 저 노을이나.//

그녀의 지휘봉 / 김혜순
사랑에 빠진 나비가 어둠 속을 날아간다/ 어쩌자고 잠도 안 자고 밤중에 돌아다니는 건지// 달도 없는 밤 강물이 입술을 달싹거리는 소리/ 길가의 나뭇잎들이 땅속에서 길어 올린 추억에 잠겨 몸을 떠는 소리// 강물 속에서 조약돌들이 몸을 떨기 시작하자/ 바위들의 억센 피부마다 소름이 돋는다// 소프라노가 테너 위로 올라서자/ 관객 속에서 터지는 느닷없는 고함소리/ 파닥거리던 그녀의 지휘봉이 흠칫 몸을 떤다/ 나비 한 마리에 묶인 음악당이 밤하늘로 이륙한다// 바람이 연주하는 길고 검은 피리 소리/ 창문이 덜컹거리고 복도가 소라고둥처럼 도르르 말리고/ 도시의 골목들이 튿어진 옷고름처럼 날리다 말고/ 공중에 나선형으로 치솟아 오른다// 아기들 잠든 방들이 부서지고/ 길 잃은 바람이 뒤돌아 보며 높이높이 울부짖자/ 자동차들마저 길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클라리넷과 모든 관악기가 불꽃을 길게 내뿜는다/ 모든 聲部(성부)들이 몸을 맞대고 떤다// 사랑에 빠진 나비가 태풍속을 난다/ 치솟아 오르다 쓰러지고 다시 쓰러지는 나비 한 마리/ 미쳐버린 오케스트라를 공중에다 팽개친다// 나는 창문을 열고 우리 아파트 옥상까지 찾아와/ 투신 자살한 젊은 여자의 시신을 오래, 오래 내려다 본다// 태풍의 눈처럼 거대한 고막이 풍경 속을 떠돈다/ 나비가 이제 그만 사랑을 검은 관 속에 가두었나// 나비는 보이지 않고 느닷없이 검은 피아노가 열리고/ 수천만 개로 쪼개진 나비의 떨리는 살점들이/ 강물 위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한 잔의 붉은 거울 / 김혜순
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건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뜻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에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다 온몸을 떠는 나를 내가 본다/ 어디선가 관자놀이를 치는 망치 소리/ 밤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독의 총소리/ 이제 나는 더 이상 숨 쉴 곳조차 없구나// 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 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어 마신다/ 몸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 너는 주점을 나와 비틀비틀 저 멀리로 사라지지만/ 그 먼 곳이 내게는 가장 가까운 곳/ 내 안에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

상습적 자살 / 김혜순
사람들은 저마다 목소리 끝에/ 마침표를 달 듯 무덤을 달고 있다// 나는 어제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 자살하는 모션을 취했다/ 양쪽 다리를 난간에서 떼었을 때/ 비명 소리가 먼저 산으로 가고/ 다음, 내 영혼이 뒤따라가는것을 보았다/ 이제 곧 내 몸도 무덤으로 가게 되리라// 사람들이 말을 할 때가만히 눈감고 듣고 있으면/ 목소리들 속에서/ 무덤들이 굴러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사람들 목소리 속 무덤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시시때때/ 공동묘지를 펼쳐놓고/ 그 사람이 오기를 기다린다// 나는 오늘 무덤으로 먼저 떠난/ 내 말들로부터 사약을 받았다/ 문득, 구만 리 침묵의 무한 공중에서부터/ 희디흰 사약 사발이 내게로 두둥실 떠왔다/ 내가 두 손에 사약 사발을 받고/ 꿀꺽꿀꺽 마셨을 때/ 목젖을 타내리던 소리들이 먼저/ 산으로 갔다/ 다음, 영혼이 항문을 빠져 달아나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제 곧 내 몸도 무덤에 이르게 되리라//

납작납작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 김혜순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들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눈동자 속 / 김혜순
누군가 내 눈거풀 속 한없는 바닷속으로/ 한 삽 두 삽 모래를 퍼/ 가라앉힌 다음/ 눈꺼풀을 닫고 가면// 바닷속에는 물이 산발치에서 산봉우리로 흐르네/ 비늘 돋친 새들이 산 깊이로/ 깊이로 날으네/ 깊은 곳이 높아지고/ 높은 곳이 낮아지네// 그곳에 밤이 오면 내 죽은 할머니들이/ 우리들 발밑에 찬찬히 등불을 밝히고 가네/ 구름은 두 발 아래 맴돌고/ 사람들은 바닥에 창을 매다네// 아버지는 바람 속에 알을 낳고 어머니들은/ 나뭇가지 사이에서 새끼를 기르네/ 그곳의 사람들은 부지런히 산맥을 길러/ 육지를 세우고 달을 퍼올리네// 내 한없는 바닷속 그 깊은 곳에는 참 이상한/ 거꾸로 된 세상이 늘 깊어 있네//

돼지는 말한다 / 김혜순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없어// 나는 선방에 와서 가부좌하고 명상을 하겠다고 벽을 째려본다// 있지. 지금 고백하는 건데 사실 나 돼지거든. 있지,​ 나 태어날 때부터 돼지였어/ 더러워 나 더러워 진짜 더럽다니까. 영혼 나 그런 거 없다니까// 그러나 머리는 좋지 아이큐는 포유류 중 제일 높지 청결을 좋아하지/ 난 화장실 넘치는 꿈 제일 싫어해 그 꿈 꾸고 나면 아이큐가 삼십은 빠져// 나는 더러워 물속에서 아침잠을 깬 사람처럼 쿨적거린다/ 코를 풀고 싶지만 선방엔 휴지가 없다 스님들은콧물 안 나오나?// 있지, 너 돼지도 우울하다는 거 아니? 돼지도 표정이 있다는 거?/ 물컹거리는 슬픔으로 살찐 몸, 더러운 물, 미끌미끌한 진흙// 내가 로테르담의 쿤스트할레에서 얀 배닝이라는사진가가 일제 식민지 치하/ 수마트라 할머니들 찍은 사진을 봤거든 그런데 그 사진 속 표정은 딱 두 종류였어// 불만 아니면 슬픔, 그래서 난 걸어가면서 그 주름 얼굴들에게 이름을 붙여줬지/ 당신은 불안, 당신은 슬픔, 슬픔 다음 불안, 불안, 슬픔, 슬픔,// 나의 내용물, 슬픔과 불안, 일평생 꿀꿀거리며 퍼먹은 것으로 만든 것/ 슬픔과 불안, 그 보리밭 사잇길로 뉘 부르는 소리있어 돼지 한 마리 지나가네// 그런데 돼지더러 마음속 돼지를 끌어내고 돼지우리를 청소하라 하다니/ 명상하다가 조는 돼지를 때려주려고 죽봉을 든 스님이 지나간다//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 없어/ 아무래도 돼지가 죽어서 돼지로 부활한다면 어느 돼지가 믿겠어?/ 아무래도 여긴 괜히 왔나 봐, 나한테 템플스테이는 정말 안 어울려// 있지, 조금 있다 고백할 건데 나 돼지거든 나 본래 돼지였거든//

뒈지는 돼지 / 김혜순
돼지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다. 내내 돼/ 지다. 우울한 돼지다, 늑대가 온다 외치는 돼지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돼지를 왕으로 뽑은 돼지다,/ 오 멋진 시궁창! 외치며 베개를 껴안는 돼지다. 뒈질/ 돼질 낳아주신 엄마를 잡아가면 좋겠네 혼자 웃는/ 돼지다, 온 세상이 다 쌀죽이라고 생각하는 입술이/ 부르튼 돼지다, 4XL 돼지다, 침대에 꽉 찬 돼지이다,/ 그 이름 도무지 돼지다, 바다 건너란 말만 들어도 벌/ 벌 떠는 돼지다,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예예 돼지/ 다, 밤하늘 드넓은 궁창을 우러르기만 해도 무서워/ 뒈져버리는 돼지다, 뒈지는 돼지는 돼지라고 생각하/ 는 뒈지는 돼지다// 팔다리가 축 늘어진 돼지, 꼬리를 가랭이 사이에/ 감추고 쿨적거리는 돼지. 허공을 묶었는데 왜 이리/ 무거워 돼지,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면 뜨거운 구름/ 냄새가 나 돼지, 부드러운 도대체 돼지, 아늑한 이윽/ 고 돼지, 일평생 나를 타고 놀아 돼지, 쥐가 새끼를/ 갉아먹어도 아늑한 돼지, 눈동자에 무엇을 껴입었/ 니 돼지, 왜 돼지가 돼지인 줄 모르나 돼지, 사진은/ 아는데 거울은 아는데 너만 모르는 돼지, 한번도 창/ 문을 내다본 적 없는 돼지, 이빨 뽑힌 돼지, 탄식 돼/ 지, 후회 돼지, 이빨 뽑히고 꼬리 잘린 다음 입 안에/ 혼자 남은 외로운 혀 돼지, 그러나 입만 벌리면 돼지/ 돼지 소리가 나는 돼지, 고기 돼지/ qqqq 까마귀가 머리에 올라 앉을 때 돼지가 따/ 라서 우는 소리/ qqqq 주인은 감옥 가고 똥물이 무릎 위까지 차/ 올라올 때 돼지가 지르는. 당연한 비명/ qqqq 돼지가 돼지가 아니라고 할 때 속으로 외/ 치는 말/ qqqq 엄마를 데려갈 때 뒤돌아보는 건 돼지라/ 고 말하는 돼지가 하는 말// qqqq 무엇보다 제가 돼지인 줄 모르는 우리나/ 라 돼지들의 교성//

​ ​철근 콘크리트 황제 페하! / 김혜순
​ 철근 콘크리트 사벽 황제 페하!/ 기분이 엿 같아본 적은 없으세요?/ 도와달라는 소리 들어본 적은 있나요?/ (다들 그렇게 외치니까)/ 왜 나보고 자꾸만 나를 버리라는 거예요?/ 엿 같다니까요? 정신과 의사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경찰도 아니면서/ 이 세상은 후손 거라면서 왜 자꾸 셋방살이하는 기분이 들게 해요?/ 왜 새벽에 일어나 벽만 바라보라는 거예요?/ 지붕에 올라가서 망원경으로 산 아래 좀 내려다보고 싶어요/ 아니면 부엌에 가서 밥 좀 더 먹고 올게요/ 속의 아이는 절대 성장하지 않고 징징대고 껄떡거리는데/ 왜 내가 벽 보고 나를 버려야 돼요?/ 내가 어디 있어서 나를 버려야 돼요?/ 철근 콘크리트 사벽 황제 페하!/ 어깨에 손 좀 올려도 될까요?/ 나한테 말 좀 해봐요. 당신 말 듣는 건/ 물속에 빠진 내 그림자를 찾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덤벼봐! 사변 벽아! 해봤자 소용없다는 건 나도 알아요./ 죽봉을 든 스님이 이기 뭐꼬? 하면서 내 어깨를 세 번 치네요// 나는 지금 벽 앞에 앉아 꿀꿀거리는 돼지 기분이에요/ 시간을 백열등처럼 매달아 놓고/ 불안이 마련해준 특별 방석에 앉으셔서/ 돼지더러 돼지를 버리라 닦달하시니 대단하시네요/ 뒷주머니에 넣어둔 휴지를 부적처럼 꺼내 보다가/ 철근 콘크리트 사벽 황제 페하!/ 앞으로 내가 먹을 쌀 한 톨 한 톨이 다 회오리치나 봐요./ 몸 바깥이 아파요.// 육체로부터 나가지 못해봤나요?/ 네 분 벽님이 서로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나를 가운데 좌정시킨 다음/ 화두에 끌리지 말고 화두를 끌고 가라니/ 나더러 어디로 가란 말씀이예요?/ 도대체 넌 누구야?/ 글은 왜 쓰는 거야?/ 너 지금 나보고 죽자는 거야?/ 아님 나보고 먼저 죽으라는 거야?/ 타인의 고통을 먹고 사는 년아// 나는 정말 면벽은 못 하겠어/ 벽하고 얘기하는 건 체질에 안 맞아//

피어라 돼지 / 김혜순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 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 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넘기를 할 새도 없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리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 내 입 안의 살을 물어뜯을 새도 없이/ 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 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 새도 없이/ 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을 새도 없이/ 포승줄도 수갑도 없이// 나는 밤마다 우리나라 고문의 역사를 읽다가/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저 산 아래 지붕들에 대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나에겐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 노래여 오늘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에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멧돼지가 와서 뜯어 먹는다/ 독수리 떼가 와서 뜯어 먹는다//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 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치는 밤!/ 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 천지에 돼지 울음소리 가득한 밤!// 내가 돼지! 돼지! 울부짖는 밤!// 돼지나무에 돼지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밤//

작별의 신체 / 김혜순
어째서 아빠, 너는 입술이 파리하니?/ 내 앞에 앉아 있는데도 눈길이 흐릿하니?/ 식탁 앞에 앉아 있는데도 자꾸만 뒤로 물러나는 것 같니?// 우리가 영원을 시작하던 시절/ 늘 시작만 있던 시절/ 아빠, 너와 나와 동생들과 흐린 날개들이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한 영혼의 내부에 있었다)/ 어떤 빛이었는데 그림자는 없었다/ 체온을 받기 이전이라고/ 희끄무레에 흘린 눈빛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땐 그랬었다// 우리는 각자 전등에 갇힌 새 같았는데 그땐 몰랐다/ 투명한 해골에 갇힌 새 같았는데 그땐 몰랐다// 아빠, 네가 본 것을 말해보렴/ 그러나 아빠, 너는 묻기만 한다/ 나는 어디 있니?/ 나는 눈을 감고 대답한다/ 해가 없는 곳, 그러나 빛!// 아빠, 천사는 서로 안을 수가 없어/ 나는 자꾸 대답해본다// 흐린 날개들이 있었다/ 불가사의하게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면서/ 무한히 작아진/ 추방된 빛처럼/ 투명한 쌀알갱이들이 쏟아져 내리듯/ 작은 영혼들이 있었다// (저 작은 쌀알갱이 하나하나의 놀랍도록 예리한 감각들)/ (오, 한 알 한 알 낱알의 영혼들이여!)// 뭉게구름의 무게를 다는 것/ 뭉게구름을 칼로 자르는 것/ 아빠, 너의 입술을 지나 가슴속을 지나/ 얼굴을 어루만지고 사라진/ 손길의 무게를 다는 것/ 손길을 칼로 자르는 것// 무한은 춥고/ 영원은 무서워// 저 공중에서 돌아오는 메아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저 희미한 목소리를 오려놓으려는 헛된 손짓이 있었다// 우린 시작을 시작했으므로/ 이미 작별이었는데 그땐 몰랐다// 아빠, 너를 데려간 그곳/ 생명 하나가 막 날개를 접은 저 무심한 영원으로/ 또다시 투명한 해골 속으로/ 그곳에서 지저귀는 새가 한 마리/ 어디서 내려야 할지 모르는/ 발목이 잘린 새가 한 마리/ 우린 이미 죽음을 시작했으므로/ 모두 평등이었는데/ 그땐 왜 몰랐을까// 흰 두루마기 흰 두건 잘 갖춰 입고/ 태워지려 들어가는 아빠/ 죽어서 나를 배신한 아빠/ 나는 배신자를 배신할 거야// 그곳엔 시작도 없고 마지막도 없고/ 이미도 없고/ 아직도 없고// 여자도 남자도 없고/ 아빠도 자식도 없잖아/ 그래서 평평하잖아/ 그래서 무한하잖아// 떨쳐낼 수가 없어/ 아빠, 네가 태워진 후를 미리 본 것 같은 느낌/ 태초부터 멍한 아빠, 너를 본 느낌/ 아빠, 너는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너로 인해 시간이 있었다/ 작별이 있었다// 나의 과거인 척하더니 나의 미래가 된 아빠/ 그러나 지금은 우리 사이에/ 바람이 불다가 갑자기 딱 멈춘 느낌/ 그 바람이 아빠, 너의 등 뒤에서 모두 돌아가는 느낌// 나무가 죄인처럼 등을 구부리고/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린 흰쥐들이// 아빠, 너를 파먹어 들어가는 느낌// 더 이상 새 책이 들어오지 않던/ 아빠, 너의 폭삭 망한 책방처럼/ 아빠, 너는 왜 말문을 닫니?/ 식사를 하면서 동면에 드니?/ 마주 앉아 있는데도 멀리 가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얼굴에 양말을 쓰고 앉아 있는 것 같아/ 나는 아빠, 너의 누추한 책방에/ 뢴트겐이 쏘인 사람처럼/ 내부를 발가벗고 서 있는 느낌/ 해가 없는데도 빛 안에 있는/ 꿈속 같은 곳/ 그 희끄무레에 들어서는 느낌// 뭉게구름을 휘젓고 휘젓는 천사의 뒤꿈치가/ 식탁 앞에 앉은 우리 입속으로 들어온 느낌// 아빠, 너와 나의 발 없는 새가/ 육신의 안치소를 이미 버렸나 봐// 그래서 이미 죽은 내가 아빠, 너를 계속 맞이하나 봐// 질척한 흙알갱이처럼 흩어진 내가/ 투명한 쌀알갱이처럼 흩어진 아빠를/ 자꾸만 추출하고 있나 봐// 그렇게 아빠, 너는 휙 지나가고 휙 지나가고/ 염장이들이 아빠, 너를 쌀 한 자루처럼 묶어놓고//

여자집승아시아하기 -책머리에 / 김혜순
짐승하기는 퇴행이나 미성숙이 아니다. 일탈이나 (역)진화가 아니다. 내가 쥐를 썼다고 해서 내가 쥐로 퇴행하거나 쥐의 미성숙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 아닌 존재와의 모든 ‘하기’이다. 벌거벗은 생명하기이다. 스스로 그러하기,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라는 두 겹(인간짐승)의 이미지하기. 짐승하기는 정서적 유대다. 짐승하기는 짐승으로 취급하기, 인간 이하로 보기와의 자리 바꾸기이다. 나는 짐승하기를 통해 사람과 짐승 혹은 유령 사이의 어딘가에 있게 된다. 나와 짐승이 서로 흐릿해져서, 어떤 비인칭 지대를 만들고 다시 그곳을 우리가 통과해 간다. 서로에게 서로를 조금씩 내어주는 다른 주파수의 세상을 만들어가면서, 그 세상에서 서로의 삶을 변용해간다. 그리하여 짐승하기는 분열하기이다.//

일인용 감옥 / 김혜순
나는 물속에 들어가 혼자 있는 사람 같아요/ 입을 벌린 목구멍에서 물방울 보글보글 올라가요// 옷을 벗지도 않고 물속에 서면/ 옷에 핀 꽃에서 붉은 물감이 연기처럼 올라가요// 헬리콥터에서 촬영한 구명조끼를 입고 대양에서 떠오른 한 사람/ 두꺼운 사전 속에서 멸종하는 한 음절 단어처럼// 눈감으면 나타나는 검은 바탕에 한 점 환한 벌레 한 마리/ 청진기로 듣는 구멍 막힌 갱도에서 마지막 남은 단 한 청년광부의 숨소리// 누가 바다 가득 젤리를 쏟아 부어 굳힌 다음/ 몸을 하나 똑 떠내어 이 사거리 한복판에 세워두었나요?// 나는 내 몸에 꼭 맞는 일인용 감옥에 살아요/ 나를 피해 내 몸속으로 도망간 소금기둥 같아요//

엘피 공장에서 만나요 / 김혜순
전깃줄 위에 도열한 새들에게/ 로시인이 말한다/ 결국 동물은 발의 세계/ 저마다 닿는 곳에 집이 있다/ 새들도 마찬가지// 로시인에게 저희 집은 뒤집어진 고슴도치 털 속 같은 까만 기억 속에 있어요/ 말해봤자 소용없다/ 그 까난 집으로 들어가면 실컷 찔리고 처음으로 쫓겨나요/ 말해봤자 소용없다// 날개를 반으로 접어 어깨 속에 감추고 더러운 돼지우리에서/ 밴드를 꾸려 괴지들과 함께 꿀꿀거리다 가야한다// 네 음악은 아 돼지/ 뒷걸음치며 입을 틀어막게 하는 음악은 안 돼지/ 배설물 위를 뒤뚱뒤뚱 돌아다니는 음악을 음악이라고 할 수 있어? 안 돼지/ 더러워서 화나는 검은 물결 같은 집 없는 음악은 안 돼지/ 이 품위 없는 단어 돼지가 내 입에서 떨어지지 않음은/ 안 돼지// 우리나라 노래는 왜 미셀러니에요?/ 미셀러니는 왜 그리 힘이 세요?/ 나는 항변하면 안 돼지// 질척거리는 돼지우리를 뱅뱅 도는 검은 돼지들/ 박자가 쿨럭 쿨럭 피어나면 안 돼지// 손가락 끝에서 붉은 압핀이 쏟아지는 날/ 리듬의 날에 베인 상처가 팔뚝에 팍 팍 팍 그어지는 날/ 상처 사이로 망원경을 집어넣으니 새들의 깃털이 폭설처럼 쏟아지는 날// 내 미래의 망루로부터 도래한 오열이 쏟아지나니/ 슬픔으로 나란히 선 빌딩들이 다 주저앉나니// 새는 시방 냄비 뚜껑에 바늘로 홈을 파고 음악을 새긴다/ 새는 시방 내 배꼽 둘레에 바늘로 홈을 파고 음악을 새긴다/ 새는 시방 내 정수리 둘레에 바늘로 홈을 파고 음악을 새긴다/ 새는 어디에나 뾰족한 부리만 있으면 음악을 새길 수 있으니 참자고 생각한다// 새는 시방 땅바닥에 새겨진 홈들이 연주하는 소리를 듣는다/ 새는 감아놓은 축음기처럼 돌아가는 검은 돼지 귀에 귀대면 안 돼지// 제 집은 도착하자마자 떠나는 집이에요 거룩하신 로시인에게 말해봤자 소용없어요//

묘혈 / 김혜순
둥그런 배를 안고 여자가 모로 누워 있다// 숨길 수 없는 우물이/ 핏속을 돌다 어느 날 터졌다/ 터진 수맥을 품고/ 그 여자가 하루 종일 웃었다/ 평생의 모든 순간들이 너무 우스워/ 죽은 여자는 웃다가 울었다// 두레박이 달린 탯줄에/ 햇빛이 실려 내려갔다가// 눈물이 한 동이 올라왔다/ 고층 빌딩을 닦는 사람처럼/ 너는 네 몸 밖의 유리창에/ 매달려 눈물을 닦았다// 너는 저 세상에서 왔건만/ 지금 너는 저 세상을 임신 중이다// 분만대에서 태어나는 중인 신생아처럼/ 제 무덤 속에 목을 집어넣은 여자가/ 휴대폰의 제 사진을 들여다보는 시간// 묘지의 초록색 모자마다 웃는 얼굴들이 들어 있다//

어느 별의 지옥 / 김혜순
무덤은 여기/ 가슴에 매달린 두 개의 봉분/ 이 아래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아직 묻혀/ 숨 들이키고 있는 곳 무덤은 여기/ 바다에 달 뜨고 달 지듯/ 두 개의 무덤 아래/ 죽은 자들이 모여 살면서/ 망망대해를 펼치고 오므리는/ 달을 건져올리고 끌어당기는/ 여자의 깊은 몸 구중궁궐/ 또 한 세상. 무덤은 여기/ 몇 세기 전의 무덤이 아직도/ 피 흘리며 갇혀 있다가/ 초승달 떠오를 때/ 기지개 켜는 곳/ 여우와 뱀이 입 맞추고/ 초록 풀 나무 덩굴이 수천 번/ 되살아나고 되지던 곳/ 무덤은 여기/ 어느 별의 지옥은 여기//

죽은 줄도 모르고 / 김혜순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황급히 일어난다/ 텅 빈 가슴 위에/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메마른 머리칼에/ 반듯하게 기름을 바르고/ 구데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 우유를 쏟아붓고/ 죽은 발가죽 위에/ 소가죽 구두를 씌우고/ 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먼지를 털며 돌아온다/ 죽은 여자의 관 옆에/ 이불을 깔고/ 허리를 굽히면/ 메마른 머리칼이 쏟아져 쌓이고/ 차가운 이빨들이 입안에서 쏟아진다/ 그 다음 주름진 살갗이/ 발 아래 떨어지고/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다시 죽음에 들면서/ 내일 묘비에 새길 근사한/ 한 마디 쩝쩝거리며/ 관 뚜껑을 스스로 끌어올린다.//

 

담배를 피우는 시체 / 김혜순
어디서 접시 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언제나 그 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죽은 여자의 전신이 망가진 기계처럼 흩어졌다./ 꺼어먼 뼈 사이로 검은 독충들이 기어 나왔다.// 내가 한 마리 독충을 들고 웃는다./ 혹은 말을 걸어 보고 싶다./ 내 진술은 여기서부터 더듬기 시작/ 바, 방에는 검은 독충들이 더, 듬, 으, 며 흩어지고// 어리고 섬찌ㅅ한 금을 긋는다./ 내가 죽은 여자의 입술을 주워서 담배를 물려 준다./ 그러다가 이내 뺏아가고 다시 물려 준다./ 불이 우는 것 같다. 어디서 복숭아 냄새가 난다.// 시(詩)속에 사닥다리라는 말을 넣고 싶다./ 사닥다리를 든 내가 계단에서 서성거린다./ 창문이 열리고 흰 스카프를 쓴 죽은 여자의 얼굴이 걸려 있다./ 아, 아직도 접시 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전세계보다 무거운 시체 / 김혜순
죽으면 모두 처들어온다/ 일생 동안 먹었던 밥들이/ 일생 동안 뱉었던 말들이/ 일생 동안 누었던 똥들이/ 일생 동안 마셨던 물들이/ 모두 처들어온다/ 몸 속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되돌아와서/ 창자에서/ 목구멍까지 차곡차곡 쌓인다/ 그리하여 이윽고 나는/ 저 바위보다 더 무거운/ 전세계를 내 몸 속에/ 담아들고/ 저 세상으로 빠져들어간다//

모래여자 / 김혜순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여자의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자 멀리 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감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 보다 깊고 넓었다//

나비 / 김혜순
내 왼쪽 귀와 네 오른쪽 귀로 만든 나비 한 마리/ 두 날개가 파닥이면 맞잡은 전신으로 파문진다// 환한 날개 가루들로 네 꿈을 채워줄게/ 네 꿈속에 내 꿈을 메아리처럼 울리게 할게/ 귓바퀴 속 두 소용돌이가 환하게 공명한다/ 어쩌면 귀먹은 사람이 잠결에 들은 것 같은/ 그런 편지를 내 왼쪽 귀를 다하여 쓸게/ 네 꿈속으로 들어가 혈액을 다정히 흔들어줄게// 이 세상 끝까지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만큼/ 그렇게 가볍게 날개를 파닥일 수 있겠니/ 문드러진 꽃처럼 피어난 우리 입술의 암술 수술로/ 우리가 키우는 이 나비 한 마리// 나중에 나중에 우리없는 세상에 뭐가 남을까/ 우리 몸을 버리고 날아오를 저 나비 한 마리// 우리 몸속에서 아직도 팔딱거리는 어둠처럼/ 아직 생기지도 않은 저 멀고먼 쌍둥이 태아처럼/ 두 손을 맞잡고 누운 침대 위/ 우리는 두 귀를 맞댄 채 생생히 썩어가네/ 우리 무덤 위로 바스라질 듯 두 귀를 팔딱거리는 저/ 나비 한 마리!//

쥐 / 김혜순
환한 아침 속으로 들어서면 언제나 들리는 것 같은 비명. 너무 커서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 어젯밤의 어둠이 내지르는 비명. 오늘 아침 허공 중에 느닷없이 희디흰 비명이 아 아 아 흩뿌려지다가 거두어졌다. 사람들은 알까? 한밤중 불을 탁 켜면 그 밤의 어둠이 얼마나 아파하는 지를. 나는 밤이 와도 불도 못 켜겠네. 첫눈 내린 날, 내시경 찍고 왔다. 그 다음 아무에게나 물어보았다. 너 내장 속에 불 켜본 적 있니? 한없이 질량이 나가는 어둠, 이것이 나의 본질이었나? 내 어둠 속에 불이 켜졌을 때, 나는 마치 압핀에 꽂힌 풍뎅이처럼, 주둥이에 검은 줄을 물고 붕 붕 붕 붕 고개를 내흔들었다. 단숨에 나는 파충류를 거쳐 빛에 맞아 뒤집어진 풍뎅이로 역진화해나갔다. 나의 존엄성은 검은 내부, 바로 이 어둠 속에 숨어 있었나? 불을 탁 켜자 나의 지하 감옥, 그 속의 내 사랑하는 흑인이 벌벌 떨었다. 이 밤, 창 밖에서 들어오는 헤트라이트 불빛에 내 방의 상한 벽들이 부르르 떨고, 수만 개의 아픈 빛살이 웅크린 검은 얼굴의 나를 들쑤시네. 첫눈 내린 날, 어디로 가버렸는지 흰 눈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창 밖으로 불 밝힌 집들, 밤은 저 빛이 얼마나 아플까.//

하늘 강아지 / 김혜순
따뜻하고 부드러워 마시멜로 같아 맥박은 작고 빠르고 밤심의 눈앞으로 퍼뜩 지나가버리고 마는 것 분홍색 입 속엔 손가락을 넣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게 뭔지 알아? 그건 껴안을 수 없는 것 늘 우유 한 접시를 부엌에 놔둬야 할걸 저것 좀 봐 잠들면 저렇게 안개공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잖아 그래도 나 그거 안고 싶어서 내 몸은 노을 속 새털구름 같은 미열 물끄러미 바라보면 부엌문 앞에 한 방울 시처럼 맺힌 것 어쩌면 내 몸에서 나 몰래 나온 것일지도 몰라 어쩌면 하늘에서 우리집 부엌까지 내려온 걸까 나 태어나기 전 너무 가벼워 구천을 날던 그 아기 나 데려가려고 다시 온 걸까 세상에서 제일 어여쁜 하늘강아지 또 눈앞을 퍼뜩 지나가네//

백년 묵은 여우 / 김혜순
나는 이번 생에 복숭아 하나 얻으러 왔어/ 당신이 떠나가며 울컥 뱉어놓은/ 그 붉은 얼룩, 그것을 구하러 왔어/ 당신은 저 유령들의 세상에서 병들어 있다는데/ 나는 눈 내리는 이 겨울밤 이 얼어붙은 골짜기/ 그만 눈밭에 홀려 버렸나봐/ 어디에 있는 거야?/ 이 눈밭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붉은 아기는/ 하얀 할머니 되고 하얀 할머닌 붉은 아기 된다는데/ 복사꽃 난분분 난분분 흰눈은/ 밀려오고 다시 또 오는데/ 가도 가도 희디힌 백지/ 발자국 남기자마자 지워지는 내 평생의 족적/ 저 땅 속 깊은 곳 숨어서 눈뜨는 핏발선 눈동자 하나/ 벌어진 내 자궁 속에서 튀어나온 그 뜨거운 것/ 연필은 똑 부러지고, 숙제는 많은데/ 그런데 정말 어디 있는 거야/ 어디선가 복숭아 향기 그윽히 오는 것만 같은데//

여우비 / 김혜순
정릉 산책하고 오다가/ 땡볕 쏟아지는 골목 끝에서/ 난쟁이 여인이 따악 마주친 거다/ 신발도 못 신고 얼굴이 벌개져서/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퍼부으며/ 욕설과 거품을 내뿜으며/ 기우뚱 기우뚱 달려가는 여인을/ 막다른 골목인 줄도 모르고 도망가는 여인을/ 따악 마주친 거다// 어둠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땡볕 속에/ 후두둑 후두둑 삼켜진 눈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온통 영혼만 있는 곳에서 달려온 눈물이/ 미처 육신을 통하지도 못하고/ 후두둑 후두둑 성급하게 쏟아지고 있다// 너무나도 고요한 벌판/ 흰 토끼가 호랑이에게 먹히고 있다/ 벌써 몸통은 없어지고 버둥거리는 다리만 남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토끼가 호랑이한테 시집갔다고 말하다니/ 나는 참 이상하다/ 이 세상 존재하는 것들 중 가장 말종인 것들의/ 눈물이 후두둑 후두둑 거두어지고 있다//

비 / 김혜순
하늘에서 투명한 개미들이 쏟아진다/ 머리에 개미의 발톱이 박힌다/ 투명한 개미들이 투명한 다리로 내 몸에 구멍을 뚫는다/ 마구 뚫는다/ 그를 떠밀면 떠밀수록 그는 나를 둘러싸고 오히려 나를 결박한다/ 내 심장의 화면에 투명한 글자들이 새겨진다/ 글자들 위에 글자들이 또 새겨진다/ 나는 해독하지 못한다/ 글자들이 이어져 어떤 파장을 그린다/ 새겨진다/ 하느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못 알아듣겠어요/ 이 전깃줄은 물이잖아요?//

팔십 년 긴 장마 / 김혜순
무서워 무서워/ 소금 기둥 위에다 비옷을 걸친/ 내가 지나간다/ 십 년 장마에 반쯤 녹아/ 키가 줄어든/ 내가 지나간다// 검은 우산을 끄고/ 다가온/ 네 검은 안경테 밑에서/ 소금물이 줄줄/ 녹아내린다// 그래그래 다 녹자/ 이까짓 소금 기둥/ 다 녹여버리자/ 바닷물 더 짜지게//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그녀의 지휘봉 / 김혜순
사랑에 빠진 나비가 어둠 속을 날아간다/ 어쩌자고 잠도 안 자고 밤중에 돌아다니는 건지// 달도 없는 밤 강물이 입술을 달짝거리는 소리/ 길가의 나뭇잎들이 땅속에서 길어 올린 추억에 잠겨 몸을 떠는 소리// 강물 속에서 조약돌들이 몸을 떨기 시작하자/ 바위들의 억센 피부마다 소름이 돋는다// 소프라노가 테너 위로 올라서자/ 관객 속에서 터지는 느닷없는 고함소리/ 파닥거리던 그녀의 지휘봉이 흠칫 몸을 떤다/ 나비 한 마리에 묶인 음악당이 밤하늘로 이륙한다// 바람이 연주하는 길고 검은 피리소리/ 창문이 덜컹거리고 복도가 소라고둥처럼 도를 말리고/ 도시의 골목들이 튿어진 옷고름처럼 날리다 말고/ 공중에 나선형으로 치솟아 오른다/ 아기들 잠든 방들이 부서지고/ 길 잃은 바람이 뒤돌아보며 높이높이 울부짖자// 자동차들마저 길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클라리넷과 모든 관악기가 불꽃을 길게 내뿜는다/ 모든 성부聲部들이 몸을 맞대고 떤다// 사랑에 빠진 나비가 태풍 속을 난다/ 치솟아 오르다 쓰러지고 다시 쓰러지는 나비 한 마리/ 미쳐버린 오케스트라 공중에다 팽개친다// 나는 창문을 열고 우리 아파트 옥상까지 찾아와/ 투신 자살한 젊은 여자의 시신을 오래, 오래 내려다본다// 태풍의 눈처럼 거대한 고막이 풍경 속을 떠돈다/ 나비가 이제 그만 사랑을 검은 관 속에 가두었나// 나비는 보이지 않고 느닷없이 검은 피아노가 열리고/ 수천만 개로 쪼개진 나비의 떨리는 살점들이/ 강물 위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녀, 요나 / 김혜순
어쩌면 좋아요/ 고래 뱃속에서 아기를 낳고야 말았어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했는데/ 사랑을 하고야 말았어요// 어쩌면 좋아요/ 당신은 나를 아직 다 그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내가 두 눈을 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여자가 울부짖어요/ 저 멀고 깊은 바다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그 여자가 울어요 그 여자의 아기도 덩달아 울어요/ 두 눈을 뜨고 당신을 보지도 못했는데 눈물이 먼저 나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게 분명하지요?/ 그러니 자꾸만 자꾸만 당신이 보고 싶지요)// 오늘 밤 그 여자가/ 한번도 제 몸으로 햇빛을 반사해본 적 없는 그 여자가/ 덤불 같은 스케치를 뒤집어쓰고/ 젖은 머리칼 흔드나 봐요/ 이파리 하나 없는 숲이 덩달아 울고/ 어디선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함박눈이 메아리쳐 와요// 아아, 어쩌면 좋아요?/ 나는 아직 태어나보지도 못했는데/ 나는 아직 두 눈이 다 빚어지지도 못했는데//

풍경 중독자 / 김혜순
풍경이 나를 거닌다/ 내가 밤의 풍경을 쓰다듬는다/ 이렇게 비오는 오늘 밤, 풍경이 침대 위에서 돌아눕는다/ 풍경은 왜 거기 있지 않고 여기 있는가/ 소름이 돋아 우둘투둘한 풍경/ 두 팔로 껴안아도 여전히 온몸 떨리는 풍경/ 왜 풍경은 몸 속으로 들어와 고통이 되고 싶은 걸까요?/ 비 쏟아져 들어가는 지하도를 옆구리쯤에 품은 풍경/ 그 지하도 밖으로 나오자/ 녹슨 철골들이 산발한 채 붉은 물을 뚝뚝 흘리는/ 그 아래, 입을 쓱 닦은 깨진 유리병이/ 피를 뚝뚝 흘리는 밤의 풍경/ 그곳, 우산도 없이 내가 서 있는 밤의 풍경 내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자/ 멀리 안 보이는 관악산이 비켜서고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풍경에게도 깊이가 있나 봐요/ 나날이 풍경이 깊어져요 명치 끝을 파고들어요/ 호흡이 바뀔 때마다 풍경은 바뀌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내 방이 녹아서 강물에 떠내려가요/ 왜 고통이 몸 밖으로 나가면/ 한낱 고물 집하장이 되어버리는 걸까요?/ 안에서 밖으로 내뿜어지는 풍경 속/ 나는 어째서 녹물을 칙칙 뱉는 짓다 만 우정병원 콘크리트에/ 기대고 서 있는지 비는 철썩철썩 내 뺨을 갈기고 있는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바뀌어버리는 예민한 풍경의 살갗/ 그래, 이제 그만 풍경의 문을 닫아 걸자 행복했어요 멀리서 바라보기엔/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참혹했어요/ 비 오는 밤의 풍경이 내 두 팔 안에서/ 나 없이도 울고, 나 없이도 헐떡거린다/ 비오는 밤, 풍경의 한복판 온몸의 피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그곳/ 벙어리 여자처럼 큰 소리로 울며 내가 지나갔지요/ 먹구름이 몇 가닥 얼굴 위로 흘러내려요/ 언제나 한 장의 표면밖에 가진 것이 없는/ 그런데, 이 풍경의 출구는 어디예요?//

참 오래된 호텔 / 김혜순
참 오래된 호텔. 밤이 되면 고양이처럼 강가에 웅크린 호텔. 그런 호텔이 있다. 가슴속엔 1992, 1993……번호가 매겨진 방들이 있고, 내가 투숙한 방 옆에는 사랑하는 그대도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그런 호텔. 내 가슴속에 호텔이 있고, 또 호텔 속에 내가 있다. 내 가슴속 호텔 속에 푸른 담요가 덮인 침대가 있고, 또 그 침대 속에 내가 누워 있고, 또 드러누운 내 가슴속에 그 호텔이 있다. 내 가슴속 호텔 밖으로 푸른 강이 구겨진 양모의 주름처럼 흐르고, 관광객을 가득 실은 배가 내 머리까지 차올랐다 내려갔다 하고. 술 마시고 머리 아픈 내가 또 그 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손잡이를 내 쪽으로 세게 당겨야 열리는 창문 앞에 나는 서 있기도 한다. 호텔이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복도론 붉은 카펫 위를 소리나지 않는 청소기가 지나고, 흰 모자를 쓴 여자가 모자를 털며 허리를 펴기도 한다. 내 가슴속 호텔의 각 방의 열쇠는 프런트에 맡겨져 있고, 나는 주머니에 한 뭉치 보이지 않는 열쇠를 갖고 있지만, 내 마음대로 가슴속 그 호텔의 방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다. 아, 밤에는 그 호텔 방들에 불이 켜지든가? 불이 켜지면 나는 담요를 들치고, 내 가슴속 호텔 방문들을 열어제치고 싶다. 열망으로 내 배꼽이 환해진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방문이 열리지 않을 땐 힘센 사람을 부르고 싶다. 비 맞은 고양이처럼 뛰어가기도 하는 호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창밖으로 내던지기도 하는 그런 호텔. 그 호텔 복도 끝 괘종시계 뒤에는 내 잠을 훔쳐간 미친 내가 또 숨어 있다는데. 그 호텔. 불 끈 밤이 되면, 무덤에서 갓 출토된 왕관처럼 여기가 어디야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자다가 일어나서 보면 내가 봐도 낯선 호텔. 내 몸 속의 모든 창문을 열면 박공 지붕 아래, 지붕을 매단 원고지에서처럼 칸칸마다 그대가 얼굴을 내미는 호텔. 아침이 되면 강물 속으로 밤고양이처럼 달아나 강물 위로 다시 창문을 매다는 그런 호텔.//

환한 방들 / 김혜순
복사기가 일초에 한번씩/ 해바라기를 토해 내고 있다/ 잠시 후 돌아보니 방안 가득 해바라기 만발이다/ 어찌나 열심히 태양을 복사했던지/ 고개마다 휙 젖혀진 해바라기 꽃밭 사이/ 평생 늙지도 않는 소피아 로렌이 걸어 나올 것 같다// 나의 복사기, 네모난 환한 상자/ 나는 복사기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피라밋 투탄카멘에서 출토된 미라처럼/ 가슴에 품었던 검은 꽃다발을 공기 중에/ 산화시키며 미소를 날린다// 밥해서 먹이고 웃겨줘야 할 입들이 들어찬 방/ 외풍과 한숨이 들락날락하는 환한, 나의 방!// 일초에 한번씩 불 켠 복사기가/ 내 몸을 밀었다 당겼다 할 때마다/ 들숨은 들어가고 날숨은 나온다/ 지하철 4호선 긴 의자에 앉은 내 얼굴이/ 복사된 얇은 종이가 벌써 수억만 번째/ 희미한 빛 속에 가라앉고/ 원본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 얼굴/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내가/ 또 한번의 출퇴근 궤도를 그리고 있다// 집에 돌아오면 마멸이라는 이름의 비누로 얼굴을 씻고/ 마멸이라는 이름의 크림으로 얼굴을 지우고/ 오늘 밤 복사된 내가 철(綴)해진/ 스프링 노트를 힘껏 찢어 버린다/ 과연 나는 내 몸에 살고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복사되다만 내 미소가 떠 있는/ 환한 방의 스위치를 내리면/ 복사기 네모난 상자도 어두워지고/ 내 몸도 관(棺) 속처럼 어두워진다//

티티카카 / 김혜순
달팽이처럼 돌돌 말린 길을 따라/ 산을 오르던 내 귀가/ 산꼭대기에 다다르자 공중으로 떠버렸다/ 이상하다. 하루 종일 뜬소문으로 날 깨물며/ 따라오던 새들도 모두 돌처럼 입 다물었다/ 산 아래까지 수십 킬로미터의 정적/ 고통의 음표는 가장 높은 음자리에서 째앵/ 이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귀를 잃고 산정에 누웠다/ 나는 기다림에 화상입은 몸/ 누가 솜으로 내 몸을 둘둘 감아 놓았나/ 네 꿈속에 가사 내 두 손을 꺼내와야지/ 움직일 수 없는 몸 속에서 살점이 끓는다/ 저기 저 먼 하늘의 고막 뒤에 네가 있는가/ 저 고막을 찢으면 네 웃음소리 들 을 수 있는가/ 무섭다 아프기만 하고 풀리지는 않는 길의 반죽이/ 나를 또 친친 감는다 여기는/ 푸른 자물쇠로 잠긴 저 두꺼운 고막이 통치하는 나라인가/ 귀울음마저 바람이 몰아갔는지. 너무나도 무거운 고요// 얼마나 지났는지. 귓속 달팽이집 처마 끝으로/ 핏방울이 매달린다 점점 검은 색으로 변하더니/ 몸 속으로 쿵 떨어진다 느닷없이 내 발 아래서부터/ 온몸 가득 차올라 오는 저 숨막히게 크고/ 검은 호수/ 티티카카//

비명 / 김혜순
겨울 산 나무들은/ 비명을 질러댄다/ 머리를 땅에 처박고/ 긴 목으로 일렁이며/ 가랑이를 공중에 좍 벌린 채/ 거꾸로 선 나무들은/ 비명을 질러댄다// 입으로 흙이 들어가서/ 위장이 꽉 막히도록/ 놀란 머리카락들이/ 땅속에서 철사줄처럼/ 팽팽해지도록/ 비명을 질러댄다// 겨울 산에 가보라/ 겨울 나무들이 벗은 살에/ 매운 매를 맞으며/ 땅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막힌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 보이리라// 추운 겨울 밤이 오면/ 산의 나무들은 더욱 큰/ 비명을 질러댄다/ 아무도 모르게 죽은/ 사람들의 머리채와/ 거꾸로 선 나무들의/ 머리채가 서로 맞닿아/ 질긴 매듭이 지워지고/ 더욱 큰 비명들이 터져나온다// 추운 겨울 밤/ 산 나무들은 더욱 큰 소리를 질러 삼킨다/ 두 가랑이를 휘저으며/ 그 아래 열 손가락을/ 부챗살처럼 펴고 펄렁이며/ 겨울 밤 나무들은/ 꽉 매인 가슴을 쥐어뜯고 울부짖는다/ 겨울 밤 산에 올라보라/ 거기 내가 네 발 아래/ 물구나무서서/ 차가운 별빛 같은 매를 맞으며/ 매서운 바람 같은 두 손바닥의 질타를/ 참고 있는 것이 보이리라/ 언 땅속에서 눈물을 비비고/ 막힌 사연을 품고/ 공포에 떨며떨며/ 비명만 질러대고/ 있는 것이 보이리라//

단식 / 김혜순
십일 일째/ 소문과는 달리/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는 물도 먹기 싫었다./ 다만 하늘의 꺼풀이 벗겨지고 벗겨졌다/ 나는 하루종일 알처럼 도르르 말린/ 그 파란 꺼풀을 벗기고/ 벗기다 말고/ 이래가지구선 평생 벗겨도 모자라지 싶어/ 뜬구름 같은 미음을/ 청해 마셨다./ 십일 일 만에 예보도 없었는데/ 가랑비가 내렸다//

끓다 / 김혜순
밤하늘 깊숙이 날아가는 너/ 그러나 나는 자다가도 너의 열원을 감지한다/ 공대공 미사일 발사!/ 먼 하늘에서의 가열찬 폭파!/ 잠시 후 냄비에서 물이 끓는다/ 잠자기는 글렀으니 커피나 한 잔 마셔야겠다/ 하마터면 냄비 속에 손을 집어넣을 뻔했다/ 끓는 물이 너무도 시려 보여서/ 손 대신 냄비에 얼굴을 집어넣고 뭐라고 뭐라고 해본다/ 수만 겹의 고막이 끓는가?/ 아니면 탄생과 소멸의 은유인가?/ 졸아붙은 물속에서 수만 개의 모스 부호가 요동친다/ 통성 기도 중인 예배당 같다/ 상공으로 치솟아 거친 기류를 헤치고/ 천천히 선회하다가 급강하하는 콘도르/ 그 먼 시선으로 끓는 물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누군가 숲 속에 헬리콥터라도 몰래 숨겨놓았나?/ 저 먼 곳에서 다시 숲의 나무들이 끓는 소리/ 몸 내부로만 꽂힌 수만 개의 붉은 전선들이/ 안으로 안으로 전기를 방출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감각이 아니라 초음파야 물결이야/ 손을 넣기만 해도 감전사해버릴 나의 내부/ 이번엔 내가 전파 냄비처럼 끓기 시작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전파 탐지기야 미사일이야/ 귀에서 끓는 소리가 난다/ 내 몸에서 내가 쉭쉭 빠져나간다/ 물이 다 졸아붙는다//

길을 주제로 한 식사 4 / 김혜순
길은 가다말고/ 갑자기 멈춰/ 초록색 가녀린 이파리/ 피워올린다/ 나는 그 길을 솎아내어/ 국을 끓인다/ 길은 오다 말고/ 갑자기 멈춰/ 푸른 바닷물 속/ 병어떼를 풀어 놓는다/ 나는 바다 한 자락/ 칼로 잘라낸다// 칼을 잘못 놀렸나/ 길 한 자락/ 가슴에 떨어져/ 환한 철쭉 꽃밭으로 끓는다/ 나, 꽃밭의 피 거품/ 숟가락으로 걷어낸다// 빠알간 핏길 위로/ 달이 발등을/ 밀며 치솟아오른다/ 달이 가는/ 그 길이 비릿하다//

기다림에 관하여 / 김혜순
나의 딸이 망원경 사달라고 하도 졸라서, 내가 단호하게 안 돼 돈 없어 했더니 내 딸이 나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엄마라고 안부를 거야 아줌마라고 부를 거야 그래 내가 그래 그래 바라던 바야 했더니 아니 그럼 이제 할머니라 부를 거야 그래 내가 그래 그래 바라던 바야 했더니 다시 좋아 진짜 증조할머니라 부를 거야 그래 다시 내가 그래 그래 바라던 바야 했더니 아니야 이제 진짜 웅녀라고 부를 거야 그래 내가 위가 아파서 마늘은 못먹지만 할 수 없지 뭐 그랬더니 이번엔 진짜야 하등동물이라고 부를 거야 그래 내가 그거 말고 별이라고 불뤄 줘 그 모든 할머니의 엄마는 별이니까 했더니 망원경으로 엄마는 안보여 엄마는 내 별이 아니란 말이야 엉엉 운다// 학교의 소설가 선생님과 부소산성 거닌다/ 선생님 낮에는 왜 별이 안보이지요/ 여기가 너무 밝아서 그렇지요/ 선생님 낮에 별이 보인다면 어떻게 보일까요/ 어둡겠지요/ 선생님 부서진 기왓장 하나 주우시며/ 백제 때 기와일까요 환하지요 하신다// 잠든 시체에서 요 위로 구더기들이 기어나온다/ 구더기들이 내 눈꺼풀 위까지 올라온다/ 돌아누울 대 갑자기 그의 말 들린다/ 아프지 말고 기다려요/ 기다리란 그 말에 모든 구더기들 날아오른다/ 수백 마리 파리떼가 잠든 시체 주위를/ 윙윙거린다/ 너무 가까운 은하수처럼 기다려요 기다려요/ 파란 소리들이 잠 못 든 시체를 감싸고 돈다//

트레인 스포인 / 김혜순
통리역에 서 있으니/ 아무도 타지 않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간이역에/ 춤추는 빨간 구두 벗겨지지 않아 기찻길에 달겨들/ 이제는 은퇴한 그 여배우가 된 기분이다// 급행열차가 지나갈 시간이면/ 파랑주의보에 떠는 고깃배처럼 간이역엔 소름이 돋고/ 석탄을 가득 뱉은 산들마저 진땀을 흘렸다// 간이역도 말을 한다는 거/ 열이 나서 땀 흘리며 잠에서 깬다는 거/ 깊은 밤 철교 위로 산책도 한다는 거/ 어두운 나무 밑에 스러져 울기도 한다는 거/ 술집 구석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한다는 거/ 전화를 해도 받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거/ 맥주를 마실 땐 목을 젖히고 발 받침대에 발을 올린다는 거/ 약 먹고 죽으려 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는 거// 제 결혼역에 내려주실래요?/ 아니면 해마다 생일역에 안부라도/ 그것도 싫으시다면 내 장례역에라도 참석해주실 수 있을는지/ 여기서도 휴대폰은 쉴새없이 울리고// 수백만 마리의 곤충떼가 한꺼번에 지나가는 소리로 급행열차 또 지나가고/ 심지어는 아기 버리는 미혼모처럼 기차 몇 량을 버리고 가고/ 그러다 같이 가! 부르면 아무도 돌아서지 않는다는 거// 서랍이 많은 티켓 박스 속에서/ 서울로 강릉으로 가는 표들은 누렇게 녹슬어 있고/ 한 통의 편지도 오지 않지만 우편함은 매달려 있고/ 나는 또 무한정 키가 커버린 첼로처럼 푸르르 떨며 철길을 내다보고/ 화물기차가 내 늘어진 현을 당겼다 놓고 가버리면// 내 얼굴엔 찬별이 떠서 얼굴이 저려온다는 거/ 다시는 아무도 내게 머물게 하지 않으리/ 는 쇠줄 두른 손목시계의 나사를 하나하나 풀 듯/ 숱한 그림자 타다 만 시체처럼 누워 잇는/ 기찻길의 침목을 하나하나 눈동자 속으로 삼킨다는 거//

4월이 오면 / 김혜순
내 뒤통수는 서른 개// 나는 세상에서 제일 징그러운 알 서른 개를 순서대로 살살 쓰다듬습니다// 나는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짖을 겁니다// 총알이 따뜻해질 때까지/ 단감이 홍시가 될 때까지/ 밤하늘 별이 녹을 때까지// 암탉이 질병을 낳고 있습니다/ 암탉이 죽음을 낳고 있습니다/ 암탉이 귀신을 낳고 있습니다// 옷을 벗기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서른 명의 신생아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알은 닭이 되고 닭은 튀김이 되고/ 그 누가 이 알들의 앞날을 생각이나 해봤겠습니까?// 자정 너머 헤아려보는 양 떼보다/ 빨리 사라지는 계란 한 판/ 그리고 6월 9월 11월// 4월 17일 목요일 수업에 들어온/ 열다섯 명의 A반 학생들이 신생아실의 간호원들처럼/ 서른 개의 눈을 뜨고 나를 낱낱이 훑어보고 있습니다//

황학동 벼룩시장 / 김혜순
신기료 할아버지 땡볕 아래 혼자 앉아 계신다/ 어휴, 저 많은 구두를 언제/ 서울 사람들이 신다 버린 구두를 남산보다 높이 쌓아 놓고/ 밑창을 갈고, 새끈을 끼우고, 금단추를 달고, 무두질하고/ 아이구, 저 구두는 원래 달렸던 것이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구나/ 행려병자의 시신이었나 해부하고 나니 국물밖에 없네/ 신기료 할아버지 새 구두를 만들어내고 있다/ 거짓말 같다, 새 구두가 남산보다 높이 쌓여간다// 십 년이 지난 모터는 이제 다 닳아 녹이 더 많다/ 기침을 쿨럭쿨럭 하는 할아버지 기침을 쿨럭쿨럭 하는/ 기계 심장을 떼어내어 핏빛 페인트 국물에/ 첨벙 담갔다 꺼낼 때마다/ 새 무쇠 모터가 생겨난다/ 그 무쇠 모터가 천길 땅 속의 핏길을 모아/ 싱싱하게 땅의 체액을 퍼올릴 것 같다// 텅 빈 두개골을 양다리 사이에 끌어안고/ 작업복 입은 청년 하나 머리칼 같은 전선줄을 심고 있다/ 그 앞의 또 다른 청년 하나 마주 보고 앉아 뇌를 심고 있다/ 간혹 연기도 피어오르고 냄새도 매캐하다/ 조금 있다 보면 거짓말처럼/ 그 전자 두개골이 머리칼 사이사이에서/ 전파를 내보내는 것도 보이고/ 전자 뇌의 현재가 폭죽처럼 터지는 것도 보게 된다/ 채널을 맞출 때마다 크나큰 외눈을 깜빡거리는 것도 보게 된다// 수건 쓴 아줌마 둘이 다친 부처들의 숲속에 앉아 있다/ 부처들의 야전병원 같다/ 백시멘트를 맨손으로 으깨어/ 둘이 하나씩 부처의 귀를 붙이고 있다/ 손가락을 이어붙이고 미소를 그려 붙이고/ 점도 하나 그려놓고 있다/ 애 아부진 거기 점이 있는디 말이야/ 잠시 아줌마의 육담에 이끌리다 보면/ 분가루를 뒤집어 쓴 부처가/ 손끝을 말아 쥐는 것도 보게 된다/ 부끄러운 듯 두 발로 아랫도리를 가린 채//

블라인드 쳐진방 1 / 김혜순
블라인드 쳐진 창 아래 둘이 앉아 있다/ 설탕을 나르던 스푼이 잠깐 흔들리고/ 군청색 보자기 덮인 탁자 위로 설탕이 쏟아진다/ 밤하늘 납작한 은하수처럼// 블라인드 쳐진 방은 두 손바닥으로 납작하게/ 누를 수 있다 이 책엔 블라인드/ 쳐진 방이 양면에 걸쳐 실려 있다/ 왼쪽 페이지 상단에 볼펜으로 점을/ 하나 찍고 그 못에 벗은 옷을 갖다 건다/ 나 혼자만 드나들던 옷이 거기 걸려 있다/ 그곳으로부터 금을 그어나와 오른쪽/ 페이지에 닿게 하고 또 거기에 무엇을 걸까/ 머리가 빠진 모자가 바람도 안부는데/ 책장 앞에서 흔들거린다/ 또,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에 걸쳐 있는/ 마룻바닥에 알 수 없는 동그란 점을 하나 찍어 본다/ 그 점이 거기 있으므로 왠지 빈방에 구멍 뚫린 듯하다/ 바늘 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

소나기 속의 운전 / 김혜순
나는 이제 미라처럼 가슴도 말라 슬픔을 마실 기력도 없어 물냄새만 맡아도 진저리가 쳐져// 붉은 꼬리 길게 남기며 자동차들은 물웅덩이를 힘차게 넘어가는데 나는 왜 지금 혼자 땡볕 속에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나 서녘 하늘 타오르는 불모자 속에서 새는 왜 날아나오나 리마 박물관의 미라는 죽어서도 왜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나// 밤이 와도 여전히 내 자동차의 와이퍼는 씩씩하게 이마에 찬 물수건을 걸어놓는데 나는 왜 아직도 너무 높아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나 이 산맥은 왜 이리 넘어도 넘어도 끝이 없나 미라는 왜 아직도 메마른 가슴을 양팔로 안고 있나 미라의 열 손가락은 빚어지다가 잠시 멈춘 점토처럼 왜 젖어 있나// 자동차 본닛 위로 물로 만든 왕관처럼 비꽃들 황급히 피어났다 스러지고 또 황급히 세워지는데 자동차는 왜 엎어진 물잔처럼 이렇게 서 있나 길 모퉁이 우두커니 가다말고 서 버렸나 미라는 왜 뜨거운 눈보라 꺼지지 않는 안데스를 넘다말고 머리를 옆으로 수그리고 가만히 있나// 나는 왜 폐어처럼 숨을 뻐끔거리면서 같은 몸 속에서 이리도 오래 살았나 이 무거운 원피스 밑에서 한숨 쉬나 두 눈은 뜨고 있나 감고 있나 비 세차게 쏟아지는 날 저녁,왜 이리도 광막한 안데스 산맥이 내 앞에 자꾸만 자꾸만 펼쳐지나//

너희들은 나의 블루스를 훔쳐 달아났지 / 김혜순
내 몸에 누군가, 아니 그들이 빨대를 꽂고 있다/ 그 빨대를 통해 나를 빨아마신다/ 내 몸의 지도가 우그러진다/ 나무들이 쓰러지고 대지의 주름은 부서져/ 모래언덕이 치솟는다// 이미지도둑들/ 내 몸에서 엑스레이 사진 찍듯 뼈를 발라가는 것들/ 기회만 있으면 말의 벽돌을 뜯어가는 것들/ 화등잔같이 눈을 켜고/ 주둥이가 빨대처럼 길어진 것들// 사막이란 무엇인가/ 이제 텅빈 시인의 몸이/ 전 대륙에 걸쳐 죽음을 공급하는 곳/ 거기 한 채의 누더기 집이 있고/ 걸레 커튼이 휘날리고/ 죽음의 모래들이 부서져 날리는 곳// 부디,이 모래들마저 들이마셔 주시길//

 

수미산* 아래 / 김혜순
먼 바위 산 속에서/ 바위가 하나 불거져 나오더니/ 컹 컹 짖다가 들어간다/ 잠시 후 바위가 아문다// 산 아래 사원에 있는 부처의 얼굴에서/ 개 한 마리 몸통 불거져 나오더니/ 컹 컹 짖다가 들어간다/ 부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착지하려는 찰나/ 입술 안쪽으로 생쥐 한 마리 씹히는 것 보인다// 한꺼풀 한꺼풀 벗겨지던 파란 하늘에선/ 하루 종일 그을리다만 개 한 마리/ 컹 컹 불을 내뿜듯 구슬프게 짖어대더니/ 설산을 붉게 물들이며 달아나고/ 그 아래 사원에서 호수보다 큰 가마솥이 설설 끓는다/ 하늘에서 희디흰 개떼가 그 가마솥 속으로 투신한다// 내 속에서 나온 들개가 밤새도록 텐트 앞에서 운다/ 들여보내달라고 들어가고 싶다고/ 애걸복걸 내가 짖어댄다// 텐트를 열고 달밤 내다보니 개가 흘린 침이/ 산봉우리 계곡마다 허옇게 흘러내린다/ 내 목구멍에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 목소리가 난다/ 내가 그리 짖을 때마다/ 산 아래 사원에 있는 금부처의 몸통이 줄어든다/ 커엉 컹 이제 금부처가 두꺼비만해졌다//
* 수미산 : 인도에서는 메루, 티벳에서는 캉 린포체, 영어권에서는 카알라스라 부르는 산. 티벳에 있다.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 김혜순
발목 밑으로 줄줄 새는 그림자를 따라 걷는 밤// 머리에 포마드를 짙게 바른 남자의 다리와/ 여자의 이마가 홍색으로 젖는다// 내가 꿈값을 내고 내 얼굴 주위로 뭐가 보이나요/ 타로 점쟁이 할머니에게 물었을 때/ 다시 눈뜨면 너는 다른 세상에 있으리/ 거울 속에 보이는 놈들은 다 가짜/ 저 세상 사람들이니 그들을 잊어라/ 내 하룻밤의 검은 넥타이 천사, 남미 마피아들이/ 무대 맨 아래 좌석에 도열하자/ 탱고는 시작되고, 먼 나라에서 온 나는 마피아의 검은/ 겨드랑이 밑에서 샹그리라를 홀짝거리며 꿈속으로 흘러갔지/ 조명 속에서 인디오 악사들이 목각 인형처럼 떠오르고/ 남녀는 네 다리를 얽으며 시큼한 슬픔을 발자국 가득 찍어내었지// 슬픔이란 말할 수는 없어도 몸에서 흘러내리는 것/ 가슴과 가슴 사이엔 물 넘치는 지구라도/ 품어져 있는 걸까 시큼한 본드라도 붙여 놓은 걸까/ 춤 냄새 한번 고약했었지/ 지독한 슬픔을 견디는 건 저 거친 들숨 날숨 따라서 찍는 발자국뿐/ 다리를 얽으며 쓰러질 듯 다시 돌아오는 질긴 싱코페이션,/ 그대는 나, 나는 그대라고 노래하지만 정녕 너는 내가 아니라는/ 다만 허공에 주형을 뜨듯 찍어보는 육체의 얽힌 형식이 있을 뿐/ 통곡이 올라오는 몸은 앞뒤로 흔들어줘야 하는 법/ 칙칙한 조명 끝자락 속에서 내 이마가 홍색으로 젖는다//

 



김혜순 시인
1955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나 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가 입상하여 비평 활동을 시작했고,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가을호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외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88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에 임용되었다. 제16회 「김수영문학상」, 제1회 「현대시작품상」, 제15회 「소월시문학상」, 제6회 「미당문학상」, 제16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하고 2019년 6월 6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시집 《죽음의 자서전》으로 시집을 영역한 번역가 최돈미와 함께 대한민국 최초로 캐나다 최고 권위의 그리핀 시문학상(Griffin Poetry Prize) 인터내셔널 부문 상을 수상하여 65,000 캐나다달러를 상금(저자 40%와 번역자 60%)으로 받았다.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어느 별의 지옥》《우리들의 陰畵》《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불쌍한 사랑 기계》《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한 잔의 붉은 거울》《당신의 첫》《슬픔치약 거울크림》《피어라 돼지》《죽음의 자서전》《날개 환상통》등이 있다.

 

 

'아시아 여성 최초 그리핀상' 김혜순 시인 “시인의 감수성은 소멸과 죽음에 대한 선험적인 생각

“시인의 감수성은 소멸과 죽음에 대한 선험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의 자서전』은 죽음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의 여성·사회적 경험을 쓴 거예요. 산자로서 죽음과 같은 상황에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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