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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뜨개질 / 한경희

부흐고비 2021. 7. 5. 09:43

2014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시작했다. 먼지가 햇빛의 그물망에 갇혀 온 방을 떠다닌다. 내 유년의 엄마가 햇빛 드는 창가 쪽에 앉아 뜨개질을 할 때도 그랬다.

먼지는 엄마 손끝에서 머리까지 이리저리 부유했다. 엄마는 해가 떨어질 때가 돼서야 숙인 고개를 들었다. 뜨개질을 멈추면 엄마 주변에 갇혀있던 먼지도 풀려났다.

책상 후미진 곳에 쌓인 먼지가 보인다.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데로 무늬가 새겨진다. 그 무늬에는 어떤 과거가 갇혔을까. 밤사이 풀려난 먼지는 내 낙서 위에 고요로 덮였다.

그는 목이 유난히 길고 추워 보였다. 나에게 여섯 살 때 헤어진 엄마 이야기를 했다. 내 손으로 감쌀 수 없는 그의 목에 꼭 맞는 목도리를 뜨기로 했다. 내가 뜬 목도리가 그의 목을 데워줄 생각을 하면 내 가슴이 훈훈해졌다. 절로 손이 빨라졌다.

벌집무늬는 난해하다. 잠시라도 정신을 팔면 무늬가 흐트러진다. 틀린 코를 풀어 다시 바늘대에 끼우기를 반복하며 마지막 코를 마무리했다. 목도리를 내 앞자락에 펼쳐보았다.

엄마는 뜨개질 도중에 간간이 나를 불렀다. 미완의 뜨개옷을 내 가슴에 대어보며 길이를 가늠했다. 한 코로 시작한 스웨터는 날마다 옷의 형태를 갖추어갔다.

내가 백 점을 맞아 온 날이었다.

“아이고, 우리 딸 잘했네. 일주일만 기다려.”

엄마의 손놀림은 더 빨라졌다. 엄마는 계획한 일주일을 다 채우지 않았다. 이틀 먼저 내 옷은 완성되었다. 내게 새 스웨터를 입히며 함박웃음을 거두지 못하던 엄마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엄마를 생각하다 벌집무늬가 흐트러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그를 불러 세우고 싶다. 목도리로 그의 목을 폭 감싸고 싶다. 언제나처럼 나를 보며 웃는 모습이다. ‘넌 참 좋은 내 친구야.’ 그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감은 눈 속에서만 또렷한 그다. 눈을 뜨면 이내 사라지는 그.

내 목에 목도리를 둘러보았다. 길이는 짧고 폭이 너무 넓다. 거울 앞의 내가 목에 깁스를 한 것 같다. 좀 더 따뜻하라고 두 겹으로 떴더니 너무 뻣뻣했다. 마감한 코를 죄다 풀어 되감기를 시작했다.

엄마는 늦가을이 되면 집안을 거두는 일 외에는 늘 뜨개질이었다. 내 옷을 뜨는 엄마 주변을 나는 기분 좋게 맴돌았다. 헐렁한 옷 대신 날선 맵시의 스웨터를 빨리 입어보고 싶었다.

엄마는 항상 조금 큰 새 옷을 사왔다. 키가 클 것을 예비해서다. 하지만 뜨개옷만은 내 몸에 꼭 맞게 떴다. 뜨개옷은 되풀어서 다시 짤 수 있다.

쌀쌀한 바람이 불면 한 해 동안 자란만큼 내 뜨개옷은 작아져 있었다. 엄마는 작아진 스웨터를 풀어 실뭉치로 감았다. 라면발 같은 실을 끓는 주전자 뚜껑에 끼워 주둥이로 뽑아냈다. 스팀을 받은 털실은 다시 살아 곧게 펴진다. 실뭉치를 풀어주는 건 내 몫이었다.

꽈배기 무늬 유행이 벌집무늬로 바뀌면 내 스웨터는 또 풀렸다. 유행에 쳐진 털옷은 입어 본 적이 없다.

실을 펴는 주전자의 뜨거운 김은 엄마의 가슴에 고인 한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굽이굽이 마음속에 쌓인 한숨은 무엇으로 곧게 펼까.

다시 떴던 목도리가 완성되었다.

“그냥 심심해서 떠 봤어. 실뭉치가 굴러 다니 길래……”

그의 덤덤한 표정이 맹꽁이 같다. 그래도 나는 추운 날 항시 그의 목에 감겨있기를, 그리고 잠시라도 내 생각을 하며 목에 두르기를 바랐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을 목도리 올올에 담았다면 거짓일까.

그날 전화선을 타고 온 그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무섭도록 쿵쾅 찧었다. 그가 긴 여행을 갔다 온 후 처음으로 넘어 온 전화 목소리였다. 즐거운 긴장이 몰려와 내 주변의 공기가 팽팽해지는 걸 느꼈다. 반가운 김에 내 응답이 떨렸나보다.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 들었니?”

“아니 그냥. 저…….”

“아, 그래. 뭐 하나 물어볼 게 있어. 그 친구 전화번호 바뀌었더라. 네가 친하니 알 것 같아서……”

“……으응……”

내 심장은 이내 끝을 모르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친구의 새 번호를 더듬더듬 알려주었다.

며칠 후 친구가 전화를 했다. 그 사람이 ‘고백을 했다.’고 설레는 목소리였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눈에는 뭍사람들 속에서 그만 보였다. 그가 나에게 건넨 말 하나하나가 커다랗게 다가왔었다. 나는 내 마음의 방 속에 그의 말들을 꽁꽁 가두고 수시로 꺼내어 들었다.

그를 알고부터 무의미했던 내 삶에는 생기가 돌았었다. 의미가 커질수록 그의 방도 커져갔다. 그 방에 푸른 물이 점점 차오르더니 넘실대며 아름답게 빛났다. 그때부터였다. 그리움이란 당의정이 내 입 속에 들어온 것은. 달달한 맛에 빠져들었다가 그 쓰디쓴 약의 속살에 치를 떨곤 했다. 다시 뱉고 싶었지만 이미 내 속은 달고 쓴 맛으로 꽉 차 있었다.

그는 전화 이후로도 나를 보면 그전과 똑같이 환하게 웃었다. 나는 내 속의 모든 것들을 금방 비우지 못해 허덕이고 있었는데…….

나는 대바늘이 아닌 코바늘로 자동차 방석을 뜨기로 했다. 엄마에게 일부러 복잡한 무늬를 부탁했던 내 마음을 그는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너무 어려운 무늬였다. 1분 1초라도 설사 그게 그에 대한 생각일지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뜬 만큼 다시 풀어야 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였을까. 한 줄이 완성되기도 전에 무늬는 흩어졌다. 생각의 조그만 포말은 파도가 되어 어느새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한참을 허우적거리면서도 손가락이 일정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나는 자동인형처럼 코를 떴다. 절정에 이른 파도가 힘을 다하여 사구(砂丘)를 밀쳐 내고는 바다로 되돌아갔다. 그러면 또 내 손에는 엉망으로 뒤틀려버린 무늬만 남아 있었다.

방석을 다 완성하기까지 나는 수 없이 풀고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해가 져도 아빠가 돌아오지 않을 때면 엄마의 뜨게 무늬는 사정없이 흩어졌다. 아빠는 술 속이 좋지 않았다. 술을 마신 날은 집안이 시끄러웠다. 엄마는 돌부처처럼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았다. 그런 날의 엄마는 굳은 표정으로 뜨개질만 하였다. 한숨소리에 실을 엮었다.

엄마는 뜨개질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뜨개질을 했다는 걸 나는 방석을 뜨면서 깨달았다. 털실과 바늘대와 손놀림의 반복, 그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끼어들면 스웨터고 방석이고 무늬는 엉망이 된다.

코와 그 옆의 코가 맞닿아 무늬가 되기까지 나는 실을 짜는 게 아니라 생각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짜고 있었다. 점점 머릿속은 비워지고 그에 대한 감정이 다 정리될 때쯤 내 생각의 너비만큼 큰 방석이 완성되었다.

나는 방석을 그의 차에 깔아주었다. 비로소 그를 향한 내 마음도 실려 보냈다. 그에게 방석을 준 후 열네 번의 봄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그에게 줬던 방석이 낡기도 전에 그는 나를 잊었을 것이다.

방안의 먼지가 햇빛의 그물망에 걸려 끝없이 떠돈다. 이리저리 부유하다 언제든 내 속에 들어와 뿌옇게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뜨개바늘을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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