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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엇박자노래 / 임미옥

부흐고비 2021. 7. 5. 13:37

2014 동양일보 신춘문예 당선

따당~땅, 따당~땅, 왼손으로는 건반을 타건하며 오른손은 햄머로 조율 핀을 조여 간다. 혼을 모아 공중에 흩어지는 맥놀이들을 잡아 동음 시킨 뒤, 현들을 표준 음고에 맞춘다. 엇박자로 두들겨 생기는 맥놀이들, 기억저편서 들려오는 아련한 노래 소리들과 겹쳐진다. 들린다…. 그리운 가락들이 들려온다. 아!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르시던 엇박자 가락들이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몸이 아파 어머니가 몹시 그리운 날은 더욱 선명하게 들리던 소리들이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그윽하고 정겨운 가락들,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던 소리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조율하던 손을 멈추었다. 어머니 손바닥처럼 뻣뻣하고 거칠거칠한 현들을 쓰다듬었다.

현이 파르르 떤다. 두들겨 맞고 또 맞아서 건들기만 해도 우는 피아노현, 이리저리 뒤엉킨 어머니 심사처럼 운다. 제각각 다른 소리로 아우성치며 진동하는 현들을 달래가면서 조율한다. 존재한다는 건 맞고 조이는 고통인 거라고 어른다. 세상과 불협화음으로 밖으로 도시던 아버지, 윙윙 우는 현처럼 터지는 울음을 속으로 삭이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공명(共鳴)의 세월, 어머니의 시간들은 엇박자 세월이었다.

엇박자 소리에 가슴이 뻐근하다. 어머닌 새벽마다 성글은 무릎 뼈에 가만히 스며든 통증을 끌어안고 꼭꼭 주무르셨다. 잘바~닥, 잘바~닥, 아픈 다리를 끌고 일어나 집안일을 하며 새벽을 여는 어머니 걸음걸이 소리다. 좋은 의술 한번 못써보고 엇박자로 걸으셨던 어머니…. 철없던 나는 얼른 일어나 일을 도와드리지 못하고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어릴 적에 고동색 담쟁이바구니를 들고 밭에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갈 때면 후르~쫑 후르~쫑 이산저산서 새들이 울어댔다. 어머니는 노래를 부르며 뽕잎을 따셨고, 나는 입언저리가 거무스름하도록 오디를 따먹었다. 새들 노래도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도 모두 엇박자였다. 어머니 마음을 담아 표현했던 가락에 어린 나의 장래를 축복하는 가사를 실어 부르실 때는 마치 성수가 머리에 뿌려지는 듯 했었다.

어머니의 삶은 온통 엇박자였다. 배고픈 이를 먹여주고 재워주면 이튿날 쓸 만한 물건을 가지고 사라졌고 푼푼이 모은 곗돈은 계주에게 뜯겼으며, 선의를 베푼 이에겐 사기를 당했다. 한 박자 늦게 세상을 따라 가면서도 불쌍한 사람들을 거두는 어머니가 야속했다. 어머니는 사람을 원망하는 대신 자식들의 복을 빌면서 기다림의 소망을 엇박자 가락에 노래로 싣곤 하셨다.

열일곱 살에 시집 오셔서 육남매를 낳아 기르신 어머닌, 외할머니가 그리우면 노래를 부르셨다고 한다. 어머니노래 소리들은 어디서 그렇게 끊임없이 흘러나오던지, 서로 합쳐졌다가 다시 흘러가는 강줄기 같았다. 밭 맬 때에 노래 부르면서 일하면 여름 날 길고 긴 밭고랑이 어느새 지나더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장에 가신 아버지가 들어오시지 않는 날도 아이를 업고 노래를 부르셨단다. 어머닌 노래로 마음을 다스리는 묘리를 터득하셨나보다.

어머니는 악보를 모르셨다. 콩나물처럼 생긴 음표 꼬리 옆에 점을 찍었느냐 안 찍었느냐에 따라 음길이가 변한다는 이론 같은 건 모르셨다. 그것이 오선의 줄에 있는지 칸에 있는지에 따라 음의 높낮이가 달라지는 규칙을 모르고 한세상을 사셨다. 어머니는 목청 자체가 악기였고 노랫말은 자주 만들어 부르셨다. 같은 노래라도 어느 사람이 부르면 비장미(悲壯美)가 느껴지고 어느 사람이 부르면 온유미(溫柔美)가 느껴지는 법, 어머니의 노래들은 회한이 서린 조금은 슬프게 이어지는 엇박자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개인이 가진 사상이 뿌리라면 노래는 꽃이라고나 할까. 뿌리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꽃을 피워내듯이, 사람들은 각양각색 노래들을 토하면서 산다. 어머니가 부르시던 엇박자 노래들은 생각의 뿌리에, 인내라는 자양분을 주어 감정을 다스리고 피워내는 언어였고, 삶을 표현하는 꽃이었다. 어머니 노래는 장엄한 미사곡처럼 다듬어지진 아니했었다. 그러나 마음을 닦는 의식이었고, 그리움을 풀어내고 괴로움을 달래어 소망을 부르는 통로였다.

어머니 노래들이 그립다. 어머니가 그립다. 급하지도 그리 느리지도 않았던 정겨운 엇박자 가락들이 몹시 그립다. 어머니 노래들을 찾아야겠다. 조율을 마치고 돌아와 오선지에 소리들을 따라가며 음표를 그려나갔다. 약간 슬프게 넘어가는 소리들이었으니 서정적인 단조가락이어야 하리. 박자는 조금 느린 팔분의육의 엇박자로 했다. 음표들이 모아져 동기와 악절을 이룬다.

곡조에 노랫말들을 실어 불러보니 소중한 보물을 찾은 것 같다. 따아~띠, 따아~띠, 어머니가 부르시던 엇박자가락을 건반위에 올린 손가락에 맡기니 흥이 나면서 어깨가 절로 들썩거려진다. 멜로디는 건반위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파도를 타듯 넘나든다. 너울너울 날개 짓 하며 둥지를 찾아가는 저녁 새무리들의 풍경처럼 평화롭다. 후르~쫑, 후르~쫑, 잘바~닥, 잘바~닥. 엇박자가락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어머니와 나를 하나로 묶는다. 환희! 엇박자 노래소리들을 악보로 찾은 느낌은 환희였다.

돌아보면 나의 삶도 엇박자다. 찹찹 잘 맞아 돌아가는 비바체나 감미로운 삼박자왈츠가 아닌, 엇박자로 따라가고 있다. 세상과 일치한 박자를 맞추는 곳에 가치를 두어보았을 때, 그것들은 끝내 이루어낼 수 없는 인내를 가장한 신기루 같은 거였다. 운명인 듯 체념하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비바체나 왈츠호흡을 추구할수록 상흔과 균열만 남았다.

산다는 건 결코 비루하지도 그다지 고풍스럽지도 않은 엇박자, 발품을 팔면서 한 박자 늦게 철지난 옷을 찾아다니며 고르는 것 같다. 어머니가 사셨던 엇박자 삶은 체념이 아니고 터득이셨음을 깨닫는다. 잘바~닥, 잘바~닥, 엇박자로 걸으며 따라가는 것이 삶이라면 어머니처럼 흥을 담고서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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