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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참깨송(頌) / 이옥자

부흐고비 2021. 7. 12. 12:48

한 알의 무게는 작은 새의 깃털과 같고, 크기는 모래알 다음 가나, 향미(香味)로는 따를 것이 없어 이 세상 으뜸이다. 부부의 정이 도탑거나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면 '깨가 쏟아진다'하고, 배알이 뒤틀릴 때 상대방이 코 깨질 일이라도 생기면 '깨소금 맛'이라 함은 그 까닭이다.

고기 맛만 최고인가, 산 녘과 들녘에 지천인 나물을 뜯어 삶아 참기름 한 방울 치면 밥 한 그릇도 뚝딱, 그도 저도 마땅찮을 때는 맨 간장에라도 한 방울 둘러치면 그 맛도 괜찮다. 상찬에도 깨맛과 참기름 향이 빠지면 맨송맨송 하찬으로 등락하고, 하찬도 참기름 진향(珍香)이 돌면 상찬이 된다.

곡물이나, 기묘한 향미로 그 값은 천정이다. 금값이나 사향 값보다야 못하지만, 곡물로는 최상으로 매겨지니 물물교환에 고가품으로 농가에서는 보물이었다. 귀한 손님께 보내는 선물로 대신하고, 돈푼이 아쉬운 때는 궁여지책으로 내놓는 품목이다.

아녀자의 못난 음식솜씨도 어여쁘게 단장하고, 거친 음식에도 향미롭게 스며들어 인간의 후각과 미각을 행복감에 젖게 하는 참깨 ― 세상 어느 맛도 따를 수 없이 깊고 고소하고 달고 쌉싸래한 향미를 품어내기까지 얼마나 고된 행로를 거쳐 왔던가. 육혈(肉血)의 추출물인 한 방울의 기름이 되기까지 부대끼고 들볶이고 짓찧으며 지나온 시간들…….

참새 눈물방울보다 작은 몸체로 참깨는 완전한 침묵과 어둠인 땅 속에 떨구어진다. 낟알을 찾아 밭머리를 헤집는 때까치의 날카로운 부리를 피해야 하고, 무겁게 짓누르는 돌 틈도 비껴 나야 한다. 박테리아까지 멸하는 오염된 토양은 빈약한 산소량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게 한다.

어렵사리 세상 밖에서 연둣빛 새싹으로 눈을 뜰 때, 이상기후는 때 아닌 눈을 내리고 우박을 때리기라도 하면 희멀거니 얼어붙거나 여지없이 압사의 처참함을 면할 수 없다.

봄비로 깻잎이 도톰해지고 대궁에 속살이 들면 깻내음이 살포시 밭두렁을 감돈다. 수수한 연분홍빛 참깨 꽃이 필 때면 한 여름 뙤약볕이 잎새 가득 진 초록빛 수액을 담고, 그 잎을 갉아먹은 깻망아지도 꿈틀대며 덩달아 살이 오른다. 꽃과 열매를 탐하여 온종일 이 그루 저 그루 옮겨 다니는 깨밭의 무법자에 깨알은 늘 속수무책이다.

그즈음 반갑지 않은 손님 태풍의 무리는 이 땅을 찾아들어 지축을 뒤흔들며 온 세상을 휘저어 놓고, 이리저리 쓰러지는 깻단마저도 뿌리째 뽑을 듯 밤새껏 폭우를 쏟아 붓는다. 어린 참깨들은 옹기종기 깍지 속에 들어앉아 상하좌우로 요동치는 깻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밤을 지새운다.

여름은 위대하나, 모든 생명을 담보로 살아야 하는 참담한 시간, 두려움의 계절이다.

서녘에서 선들바람이 불어오면 깊은 하늘을 바라보는 식물들의 평화도 넓고 깊어진다. 그 노래 속에서 참깨는 속속들이 영글어간다.

농부는 오진 참깨 송이를 손으로 건드려 톡톡 튀어 오르는 깨알의 재롱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농부의 아내는 수입곡물을 아랑곳 않는 장금(場金)을 가늠하며 까무잡잡한 얼굴을 파하며 들녘을 본다.

깻잎이 누르스름해지고 대궁도 헐춤해질 즈음이면 볕 좋은 날을 잡아 멍석 깔고 사정없이 깻단을 두드린다. 오소소 떨어져 금싸라기 같이 모여드는 신통방통한 참깨, 샅샅이 모으는 재미가 깨소금 맛이요, 깨를 터는 부부의 정리(情理)로 깨가 담뿍 쏟아지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그러나 어찌 이것으로 곡물로 최상의 품위를 유지하는 참깨의 엑기스적 성분을 멋들어지게 뽐낼 수 있을까.

추수를 거쳐 깨알의 형상으로 세상에 나왔으나 참깨는 제 맛을 내지 못한다. 한갓 낟알에 불과하며 참새와 비둘기의 먹이로 적당할 뿐, 인간에게 향미를 제공하기에는 인간이 가하는 크나큰 고통과 처절한 과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참깨는 뜨겁게 달구어진 번철 위에 가볍게 얹혀 달달 볶이는 고난도의 형극을 거친다. 참을 수 없는 화기(火氣)에 화들짝 튀어 올랐다가 주저앉기를 몇 차례, 더도 덜도 아니게 노릇노릇 익어야만 고소한 향내를 한껏 품을 수 있다.

그것도 다음 참형의 예고일 뿐이다. 섭씨 일백 도 이상의 고열에서 피부 빛마저 연갈색으로 익은 참깨는 강한 압축기에 온몸을 밀어 넣는다. 깨지고 부서지고 으스러지며 방울방울 무형의 액체로 변모하는 참깨의 일생 ― 한 알의 참깨가 고육(苦肉)으로 지고지순한 목표, 일생의 결정체를 완성하는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달고 고소한 향미를 예찬한다.

누가 생존을 구차하다 할 수 있을까. 척박한 생의 모습을 천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존재의 생존을 볼모로 이어지는 문화라는 미명의 생활만을 존귀하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폭염 속에서 더 달게 영글고, 들볶일수록 더 고소해지며, 압사의 경지에서 진액을 자아내는 통달과 무욕(無慾)의 생 ― 참깨는 존재를 털어버린 채 향미를 제공하고, 우리는 풍요로운 식탁에 둘러앉아 동물적 미각을 즐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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