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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행복한 유배 / 김규련

부흐고비 2021. 7. 16. 08:43

쨍그렁 쨍그렁! 외양간의 소 요령 소리에 잠이 깨었다. 먼 데서 새벽 정적을 깨고 닭들이 홰를 치며 운다. 지창을 열고 뜨락에 나가 괜히 우물가를 서성거려 본다. 돌담 사이에서는 지칠 줄 모르는 미물들이 물레를 잣듯 찔찔 거리며 긴 밤을 지새우고 있다. 밤새 떨어져 나가 앉은 성좌는 아직도 못다 한 구원의 밀어를 아쉽게 속삭이고 있다.

여기는 추풍령에서 동남으로 40리, 백화산 들목에 자리한 한적한 산골이다. 며칠 전 일자리가 바뀌어 대구에서 이 생소한 고을로 찾아들었다. 농가에서 첫 밤을 새우고 맞는 이 새벽에, 나는 왜 부질없이 어지러운 상념으로 별을 보고 섰을까.

방으로 돌아와 책상머리에 조용히 눈을 감고 앉는다. 또 하나의 삶의 건널목을 넘어서면서, 새 삶의 여로를 가만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착잡한 심회로 가슴이 답답하다. 한 열흘 정들었던 마을에서 줄을 거두어, 태평소를 불며 훌쩍 떠나는 곡마단의 표표로운 심정이 때로는 부럽다고나 할까.

수목은 오십여 년을 살아오면, 폭풍을 견디는 깊은 뿌리가 내리고, 너그러운 그늘이며 여유를 풍기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어찌하여 지천명을 살아온 지금에도, 하찮은 영욕의 갈림길을 옮겨 설 때마다 애환에 얽혀 이토록 심란해하는 것일까. 육신은 비록 시속의 인연을 따라 영고성쇠의 계곡을 배회할지라도, 마음은 항시 유란(幽蘭)이고 싶고, 흐르는 강물이고 싶다.

여물죽 냄새가 문틈으로 살며시 스며든다. 오랫동안 잊어 왔던 향수의 냄새다. 문득 일어나 아침 안개가 깔린 들로 산책을 나선다. 영글어 가는 벼이삭 위를 제비 떼들이 직선을 그으며 분주히 날아다니고 있다. 산골의 제비는 추석이 지나면 벌써 강남 갈 채비에 바쁘다. 안개가 걷히자, 청명한 시야에는 우람한 산들이 첩첩히 둘러앉기 시작한다. 단풍이 깃들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늘은 벌써 태고의 심해를 닮아 깊고 고요롭고 짚푸르다.

맑은 물소리에 취해서 개울가에 발이 멎는다. 신발을 벗어 들고 맨발로 흙을 밟아 보고 모래 위로 발을 옮긴다. 십여 년 밟아 온 아스팔트 위에선 느낄 수 없었던 자애로운 모정 같은 것이 수액처럼 전신을 번져 온다. 산의 고향이 하늘이라면 인간의 고향은 역시 흙인가 보다.

투명한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인간의 수족을 감가 보기에는 죄스러울 만큼 맑고 깨끗하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넣어 조약돌 한 알을 캐어 냈다. 카랑한 이 촉감, 답답한 가슴이 금방 텅 비고, 마음은 어느덧 가없는 하늘을 맴돈다. 가을의 나신을 만져 보는 지순의 희열 때문일까.

조약돌에 얽힌 젊은 시절의 슬픈 사랑의 사연이 느닷없이 머리에 떠올라, 실없는 미소를 지어 본다. 사랑도 미움도 세월이 가면 어쩔 수 없이 오늘 아침 풀숲에 맺혔던 이슬인 것을.

저만큼 싸락눈이 소복하게 깔린 하얀 밭이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만발한 메밀꽃이 아닌가. 주렁주렁 달린 고추와 하얀 메밀꽃. 누런 조 이삭과 다갈색의 수수 이삭, 산골의 가을은 빛깔에서 오고, 소리에서 깃들고, 향기며 촉감에서 느껴지는 것일까.

시방 내 이웃은 안으로 짙어 온 스스로의 밀도에 겨워 터지려는 석류알의 풍속이 익어 가고 있다. 나는 지금 한 마리 고추잠자리가 되어 점점 뚜렷해지는 섭리의 자국 위를 한 가닥 운치로 날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억새들풀과 어울려 피고 지는 한 떨기 들국화로 서 있는 것일까. 주제할 수 없는 이 환희와 감격, 호화스런 불만의 영토에서 가을의 산골로 추방된 행복한 유배를 감사 드리고 싶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겠지. 산골의 겨울은 몹시 춥고도 길고 침울하다고 한다. 겨울이 오면 방에 질화로를 들여놓고 긴 밤을 혼자 앉아, 밤마다 문풍지에 흔들리며 잉태되어 가는 봄의 정기에 심취해 보리라.

그리고 간밤에 눈이 몹시 내린 어느 날 이름 아침, 외로운 산책길에서 눈 위에 파르르 떨고 있는 작은 산새의 발자국을 보고 가슴을 앓다가 사별한 누님의 정을 느껴 볼지도 모른다.

참새 떼들이 요란스럽게 머리 위를 스친다. 문득 대구에 두고 온 친구들 생각이 난다. 나는 이 친구들을 복된 나의 귀양지로 한 번쯤 초대하고 싶다. 상주에서 속리산을 가는 길섶 20리에 걸친 참오동 가로수를 보면서 오면 좋겠다. 지중해 연안의 마로니에 가로수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봉황이 깃든다는 청아한 참오동에 비하랴. 돌아갈 때는 추풍령 굽이굽이마다 타오를 단풍과 우정을 음미하면서 가는 것이다.

나는 석천의 물과 소백산에서 따 들인 머루며 다래, 그리고 으름으로 대접하리라.

소슬바람이 분다.

한들거리는 수숫대에 옷소매를 스치며, 여물죽 냄새가 물씬거리는 찬란한 나의 유배지의 하숙으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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