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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에의 헌시 / 박두진
오래 잊어버렸던 이의 이름처럼/ 나는 어머니 어머니라고 불러보네/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불러보면/ 나는 먼 어렸을 때의 어린 아이로 되 돌아가// 그리고 눈물이 흐르네/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 입을 떨 때/부르던 첫 말/ 그 엄마 지금은 안계시고/ 이 만큼이나 나이가 들어서야/ 어머니 어머니라는 이름의 / 뜻의 깊이를 아네// 애뙤고 예쁘셨던/ 꽃답고아름다우셨을 때의/ 어머니보다는/ 내가 빨던 젖이/ 빈 자루처럼 찌부러지고/ 이마에는 주름살/ 머리터럭 눈같이 희던 때의/ 가난하고 슬프신/ 그 모습 더 깊이 가슴에 박혀/ 지금도 귀에 젖어/ 음성 쟁쟁하네/ 지금 이렇게 나 혼자 외로울 때/ 마음 이리 찢어지고/ 불에 타듯 지질릴 때/ 그 어머니 지금// 내 곁에 계시다면/ 얼마나 힘이될까/ 얼마나 위로가 될까/ 얼마나 조용조용 드리고 싶은 말씀이 많을까/ 어머니 어머니/ 오래오래 잊어버렸던 이의 이름처럼/ 지금은 이미 없는/ 머나먼 이름/ 뜨거운 이름/ 눈물의 이름/ 사랑의 희생의 영원의 이름/ 이제사 그 어머니/ 어머니라는 부름의 뜻을 알겠네./ 어머니라는 이름/ 뜨거운 눈물의 이름을 알겠네//
아버지 / 박두진
철죽 꽃이 필 때면,/ 철죽 꽃이 화안하게 피어 날 때면,/ 더욱 못견디게/ 아버지가 생각난다.// 칠순이 넘으셔도 老松처럼 정정하여,/ 철죽꽃이 피는 철에 철죽 꽃을 보시려,/ 아들을 앞세우고/ 冠岳山,/ 서슬진 돌 바위를 올라 가셔서,/ 철죽 나물 캐어다가/ 뜰 앞에 심으시고/ 철죽 꽃이 피는 것을 즐기셨기에,/ 철죽 나물 캐어 드신/ 흰 수염 아버지가/ 어제같이 산탈길을 걸어 내려오시기에,// 철죽 꽃이 피는 때면,/ 철죽 꽃과 아버지가/ 한꺼번에 어린다.// 물에 젖은 둥근 달/ 달이 솟아오르면,/ 흰옷을 입으셨던/ 아버지가 그립다./ 달 있는 川邊길을/ 늦게 돌아오노라면/ 두진이냐?/ 저만치서 커다랗게 불러 주시던/ 하얗게 입으셨던 어릴 때의 아버지// 四月은 가신 달,/ 아아, 철죽 꽃도 흰 달도/ 솟아 있는데,/ 손수 캐다 심어 놓신/ 철죽 꽃은 피는데,// 어디 가셨나/ 큰기침을 하시며,/ 흰옷을 입으시고/ 어디 가셨나.//
해의 품으로 / 박두진
해를 보아라. 이글대며 솟아오는 해를 보아라. 새로 해가 산 너머 솟아오르면, 싱싱한 향기로운 풀밭을 가자. 눈부신 아침 길을 해에게로 가자.// 어둠은 가거라, 울음 우는 짐승 같은 어둠은 가거라. 짐승같이 떼로 몰려 벼랑으로 가거라. 햇볕살 등에 지고 벼랑으로 가거라.// 보라. 쏘는 듯 향기로이 피는 저 산꽃들을. 춤추듯 너훌대는 푸른 저 나뭇잎을 영롱히 구슬 빗듯 우짖는 새소리들. 줄줄줄 내려닫는 골푸른 물소리를 아, 온 산 모두 다 새로 일어나 일제히 수런수런 빛을 받는 소리들// 푸른 잎 풀잎에선 풀잎 소리. 너훌대는 나무에선 잎이 치는 잎의 소리, 맑은 물 시내속엔 은어 새끼 떼소리 던져 있는 돌에선 돌이 치는 물소리.// 자발레는 가지에서, 돌찍아빈 민둥에서, 여어어잇! 볕 함빡 받아 입고 질러 보는 만세 소리 온 산 푸른 것. 온 산 생명들의 은은히 또 아 일제히 울려 오는 압도하는 노랫소리// 산이여! 너훌대는 나뭇잎 푸른 산이여! 햇볕살 새로 퍼져 뛰는 아침은 너희 새로 치는 소리들에 귀가 열린다. 너희 새로 받는 햇살들에 눈이 밝는다─ 피가 새로 돈다. 울음을 올라갈듯 온 몸이 울린다. 새처럼 가볍도다 나는 푸른 아침 길을 가면서. 새로 솟는 해의 품, 해를 향해 가면서.//
해 /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하늘 / 박두진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푸른 하늘 아래 / 박두진
내게로 오너라./ 어서 너는 내게로 오너라./ 불이 났다./ 그리운 집들이 타고,/ 푸른 동산, 난만한 꽃밭이 타고,/ 이웃들은, 이웃들은, 다 쫓기어 울며 울며 흩어졌다./ 아무도 없다./ 이리들이 으르댄다./ 양떼가 무찔린다./ 이리들이 으르대며, 이리가 이리로 더뷸어 싸운다./ 살점들을 물어 뗀다./ 피가 흐른다./ 서로 죽이며 자꾸 서로 죽는다./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싸우다가,/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멸하리라./ 처참한 밤이다./ 그러나 하늘엔 별/ 별들이 남아 있다./ 날마다 아직은 해도 돋는다./ 어서 오너라.……/ 황폐한 땅을 새로 파 이루고,/ 너는 나와 씨앗을 뿌리자./ 다시 푸른 산을 이루자./ 붉은 꽃밭을 이루자./ 정정한 푸른 장생목도 심그고,/ 한철 났다 스러지는 일년초도 심그자./ 잣나무, 오얏, 복숭아도 심그고, 들장미, 석죽, 산국화도 심그자,/ 싹이 나서 자라면, 이어, 붉은 꽃들이 피리니……/ 새로 푸른 동산에 금빛 새가 날아오고,/ 붉은 꽃밭에 나비 꿀벌떼가 날아 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섧게 흩어졌던 이웃들이 돌아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푸른 하늘, 푸른 하늘 아래 난만한 꽃밭에서,/ 꽃밭에서, 너는, 나와, 마주, 춤을 추며 즐기자./ 춤을 추며,/ 노래하며 즐기자./ 울며 즐기자.……/ 어서 오너라.……//
별 / 박두진
아아 아득히 내 첩첩한 산길 왔더니라. 인기척 끊이/ 고 새도 짐승도 있지 않은 한낮 그 화안한 골길을 다/ 만 아득히 나는 머언 생각에 잠기여 왔더이라// 백엽 앙상한 사이를 바람에 백엽 같이 불리우며 물/ 소리에 흰 돌 되어 씻기 우며 나는 총총히 외롬도/ 잊고 왔더니라// 살다가 오래여 삭은 장목들 흰 팔 벌이고 서 있고 풍/ 운에 깍이어 날선 봉우리 훌훌훌 창천에 흰 구름 날/ 리며 섰더니라// 쏴아 - 한종일내 - 쉬지 않고 부는 물소리 안은 바람/ 소리 ... 구월 고운 낙엽은 날리여 푸른 담 위에/ 흐르르르 낙화 같이 지더니라.// 어젯밤 잠자던 동해안 어촌 그 검푸른 밤하늘에 나/ 는 장엄히 뿌리어진 허다한 바다의별드르이 보았느니.// 이제 나의 이 오늘밤 산장에도 얼어붙는 바람 속/ 우러르는 나의 하늘에 별들은 쓸리며 다시 꽃과 같이/ 난만하여라.//
하나씩의 별 / 박두진
하나씩의 별들이 죽어가고 있다./ 아픔의 피로 지는/ 침묵(沈默)들의 낙엽(落葉),/ 아무도 오늘을 기록(記錄)하지 않는다.// 더러는 서서 울고/ 더러는 이미 백골(白骨)/ 헛되이 희디 하얀 백일(百日)만/ 벌에 쬐는/ 하나씩의 순수(純粹)의 영겁(永劫)의/ 넋의 분노(憤怒)// 벌판을 치달리던/ 맹수(猛獸)들의 살육(殺戮),/ 그 턱의 뼈도 흐트러져/ 하얗게 울고 있다.//
별 밭에 누워 / 박두진
바람에 쓸려가는 밤하늘 구름 사이/ 저렇게도 파릇한 별들의 뿌림이여/ 누워서 반듯이 바라보는/ 내 바로 가슴 내 바로 심장 바로 눈동자에 맞닿는/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그 삼빡이는 물기어림/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려 하지만/ 무심하게 혼자 누워 바라만 보려 하지만/ 오래오래 잊어버렸던 어린적의 옛날/ 소년쩍 그 먼 별들의 되살아옴이여//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고 있으면/ 글썽거려 가슴에 와 솟구치는 시름/ 외로움일지 서러움일지 분간없는 시름/ 죽음일지 이별일지 알 수 없는 시름// 쓸쓸함도 몸부림도 흐느낌도 채 아닌/ 가장 안의 다시 솟는 가슴 맑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울고 싶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소리지름이어//
청산도 /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 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 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 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티 끝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티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 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 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골 넘어 뻐꾸기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갈보리의 노래 / 박두진
1// 해도 차마 밝은 채론 비칠 수가 없어/ 낯을 가려 밤처럼 캄캄했을 뿐./ 방울방울 가슴의/ 하늘에서 내려 맺는 푸른 피를 떨구며,/ 아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늬………/ 그 사랑일래 지지러져 죽어간 이의/ 바람 자듯 잦아드는 숨결 소리 뿐./ 언덕이어. 언덕이어. 텅 비인 언덕이어./ 아무 일도 네겐 다시 없었더니라./ 마리아와 살로메와 아고보와 마리아와/ 멀리서 연인들이 흐느껴 울 뿐./ 몇 오리의 풀잎이나 불리웠을지,/ 휘휘로히 바람결에 불리웠을지,/ 언덕이어. 죽음이어. 언덕이어. 고요여./ 아무 일도 네겐 다시 없었더니라.// 2// 마지막 내려 덮는 바위 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 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 에여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 꽝 꽝 쳐 못을 박고, 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 입맞추어 배반하고, 매어 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강할 수가 있었는가?/ 파도같이 밀려오는 승리에의 욕망을 어떻게 당신은 버릴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패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약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이길 수가 있었는가?/ 방울방울 땅에 젖는 스스로의 혈적(血滴)으로, 어떻게 만민들이 살아날 줄 알았는가? 어떻게 스스로가 神인 줄을 믿었는가? 크다랗게 벌리어진 당신의 두 팔에 누구가 달려들어 안긴 줄을 알았는가?/ 엘리……엘리……엘리……엘리……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가 매어달아, 어떻게 당신은 죽을 수가 있었는가? 神이여! 어떻게 당신은 인간일 수 있었는가? 인간이여! 어떻게 당신은 神일 수가 있었는가?/ 아! …… 방울방울 떨구어지는 핏방울은 잦는데, 바람도 죽고 없고 마리아는 우는데, 마리아는 우는데, 人子여! 人子여! 마즈막 쏟아지는 폭포 같은 빛줄기를 어떻게 당신은 주체할 수 있었는가?// 3// 무엇이 여기서는 일어나야 하는가. 갈보리의 하늘은 여전하구나. 하늘도 해도 있고 여전하구나./ 비틀거리며 비틀거리며 지고 오른 나무들엔 피와 땀의 기름 번들거려 하늘 아래 고웁기도 하구나./ 내가 쓰는 면류관 가시관 위에, 아으 무지개처럼 이제야 둘러 피는 원광을 보라!/ 진달래를 이기듯, 네 군데의 못자국은 네 군데의 꽃! 솟구쳐 나온 고운 피여!/ 먼 먼 은하에도 한줄기의 피와 강은 서는데, 떨궈지는 방울마다 타는 목마름, 아으 죽음소리,/ 어둠소리……한낮의 갈보리는 캄캄해져 오는데 땅들은 갈라지고 무덤들은 트는데,/ 엘리…… 엘리…… 엘리…… 아으 사랑하게 하라. 사랑하게 하라./ 이제야 다시 한 번 껴안게 하라. 죽음을, 원수를, 어둠을, 밤을 이제야 다시 한 번 껴안게 하라./ 쏟아지는 먹비 대신 찬란한 빛 발하는 함빡 빛발들이 쏟아져 오면 가슴마다 새로 발해 빛이 솟으면,/ 사랑이여! 꽃 빛깔 꽃 빛발에 쓰러지게 하라, 파다아하게 서로 안게 쓰러지게 하라./ 파다아하게 서로 안고 일어나게 하라.//
영혼의 내 낡은 장막 / 박두진
내가 나를 알 수 없어/ 홀로 방황하는// 안에 활활 타 오르는/ 언제나의 이 갈증//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방황과 그 포기// 영혼의 내 낡은 장막/ 홀로 펄럭이는// 훌훌 벗고 당신 앞에/ 울고 싶어라//
꽃 / 박두진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아//
꽃구름 속에 / 박두진 꽃바람 꽃바람 마을마다 훈훈히 불어오라/ 복사꽃 살구꽃 환 한속에/ 구름처럼 꽃구름 꽃구름 환 한속에/ 꽃가루 흩뿌리어 마을마다/ 진한 꽃향기 풍기어라// 추위와 주림에 시달리어 한 겨우내/ 움치고 떨며 살아온/ 사람들 서러운 얘기 서러운 애기/ 아~ 아~ 까맣게 잊고// 꽃 향에 꽃 향에 취하여,/ 아득하니 꽃구름 속에/ 쓰러지게 하여라/ 나비처럼 쓰러지게 하여라// |
꽃과 항구(港口) / 박두진
나무는 철을 따라/ 가지마다 난만히 꽃을 피워 흩날리고,// 인간은 영혼의 뿌리 깊이/ 눌리면 타오르는 자유의 불꽃을 간직한다.// 꽃은 그 뿌리에 근원하여/ 한 철 바람에 향기로이 나부끼고,// 자유는 피와 생명에 뿌리하여/ 영혼의 밑바닥 꺼지지 않는 근원에서 죽지 않고 탄다.// 꽃잎. 꽃잎. 봄 되어 하늘에 구름처럼 일더니,/ 그 바다―, 꽃그늘에 항구는 졸고 있더니,// 자유여! 학살되어 바닷속에 버림받은 자유여!/ 피안개에 그므는 아름다운 항구여!// 그 소녀와 소년들과 젊음 속에 맥 뛰는/ 불의와 강압과 총칼 앞에 맞서는// 살아서 누리려는 자유에의 비원이/ 죽음. 생명을 짓누르는 공포보다 강하구나.// 피는 꽃보다 값지고,/ 자유에의 불꽃은 죽음보다 강하구나.//
꽃사슴 / 박두진
꽃이김에 모가지가/ 난만해져 있었다.// 피 뻗혀/ 서른 울음.// 간만에 極光(극광) 하나/ 피고 있었다.// 넋이는 고운/ 칠색.// 金剛(금강)에,/ 金剛에,// 푸른 물이 눈동자를/ 씻고 있었다.// 입 한번 다물으면/ 영원한 침묵.// 두 뿔은 먼/ 星座(성좌)에 걸어 놓고,// 네 굽,/ 네 굽,// 까만 굽이 山줄기를/ 뛰고 있었다.// 白樺(백화) 하얀/ 山崍(산내).// 방울방울 땅에 젖어/ 꽃피 淋?(임리) 떨구며,// 골골을 못 잊어워/ 울어예는 사슴.// 한밤에,/ 한밤에,// 모가지가 꽃에 척척/ 이겨지고 있었다.//
하늘 펄펄 꽃사태 / 박두진
어떻게 당신은 내게/ 믿음을 주셨을까./ 당신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셨을까.// 그때 내 영혼 홀로 방황하고/ 칠흑 벌판 끝도 없는 무인 광야 사막/ 소낙비 천둥 번개 우릉대고 깨지고/ 우박 폭풍 폭설 펑펑 퍼붓다가도.// 갑자기./ 햇덩어리 폭양 펄펄 용광으로 끓어// 동남서북 어딜 가나/ 절망뿐인 천지,/ 진실로 나는/ 광야에서 나고 자란 어린 들짐승/ 스스로를 저주하고 스스로를 연민해 온/ 외롭고도 완강한 탕자였나니./ 말을 하는 짐승/ 날 수 없는 영혼/ 피로 이은 향수와 날고 싶은 꿈/ 오늘도 내일도 어제도 모르고/ 목숨도 혼도 영도 그냥 그대로,// 너머지며 일어서며/ 상처뿐인 영혼에/ 놀라워라/ 무지갤지 섬광일지 하늘 사다릴지/ 할렐루야 그 십자가 길/ 피로 사서 이기신/ 부활이신 당신 앞에 황홀하나니.// 진실로,/ 바라는 것의 그 실상이며 영생이신 당신./ 믿음의 그 증거이신/ 사랑이신 당신,/ 하늘 펄펄 꽃사태의 영광 우러러/ 탕자 하나 무릎 꿇고 울음 울어라.//
묘지송 / 박두진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수가 빛나리/ 향그런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어서 너는 오너라 / 박두진
4월_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함께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밭에 누워서 철이야/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실 두둥실 붕새춤 추며/ 먹쇠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뒹굴어 보자.//
오월(五月)에 / 박두진
푸른 한 점 구름도 없이 개인 하늘이 호수에 잠겼읍니다./ 호수는, 푸른 하늘을 잠근 호수는, 푸른 머언 당신의 마음,/ 볕 포근히 쏘이고, 푸른 나뭇잎 하늘대고,/ 하늘대는 잎 사이, 여기 저기 붉게 피는 꽃 무데기.// 오월은, 재재대는, 적은 새의 떼와 더불어,/ 푸른 호수 가로, 호수 가로, 어울리는데,/ 당신은, 오월, 이, 부드러운 바람에도 안 설렙니까./ 소란한 저자에서 나무와 꽃 잎사이,/ 비록 아기자기 대수롭지도 않은 풍경이긴 하나,/ 내 조용히 묻고, 조용히 또 대답할 말 있어,/ 기인 한나절을, 나 어린 소년처럼 혼자 와 거닐어도,/ 당신은, 하늘처럼, 마음 푸른 당신은 안 오십니다.// 이제는, 머언 언제 새로운 날 다시 있어,/ 내, 어느, 바다가 바라뵈는 언덕에 와 앉아,/ 오오래, 당신을 기다리기, 하늘로 맺혀 오른 고은 피의 얼이,/ 다시, 저, 푸른 하늘에서, 이슬처럼 내려 맺어/ 나의 앞에, 붉은 한 떨기 장미꽃이 피기까지,/ 나는, 또, 혼자, 오오래 소년처럼 기달릴가 봅니다//
칠월의 편지 / 박두진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사자(獅子) 새끼 냄새가 난다./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장미(薔薇)꽃 냄새가 난다.// 그 태양을 쟁반만큼씩/ 목에다 따다가 걸고 싶다./ 그 수레에 초원(草原)을 달리며/ 심장(心臟)을 싱싱히 그슬리고 싶다.// 그리고 바람,/ 바다가 밀며 오는,/ 소금 냄새의 깃발, 콩밭 냄새의 깃발,/ 아스팔트 냄새의, 그 잉크 빛 냄새의/ 바람에 펄럭이는 절규// 칠월(七月)의 바다의 저 출렁거리는 파면(波面)/ 새파랗고 싱그러운/ 아침의 해안선(海岸線)의/ 조국(祖國)의 포옹(抱擁).// 칠월(七月)의 바다에서는,/ 내일의 소년들의 축제(祝祭) 소리가 온다./ 내일의 소녀들의 꽃 비둘기 날리는 소리가 온다.//
팔월의 강(江) / 박두진
팔월(八月)의 강(江)이 손뼉친다. 팔월(八月)의 강(江)이 몸부림친다./ 팔월(八月)의 강(江)이 고민한다./ 팔월(八月)의 강(江)이 침잠(沈潛)한다.// 강(江)은 어제의 한숨을, 눈물을, 피흘림을, 죽음들을 기억한다.// 어제의 분노와, 비원과, 배반을 가슴 지닌/ 배암과 이리의/ 갈라진 혓바닥과 피묻은 이빨들을 기억한다.// 강(江)은 저 은하계(銀河系) 찬란한 태양계(太陽系)의/ 아득한 이데아를/ 황금빛 승화(昇華)를 기억한다.// 그 승리를, 도달을, 모두의 성취를 위하여/ 어제를 오늘에게, 오늘을 내일에게 위탁한다.// 강(江)은 팔월(八月)의 강(江)은 유유하고 왕성하다./ 늠름하게 의지한다. 손뼉을 치며 깃발을 날리며, 오직/ 망망한 바다를 향해 전진한다.//
강(江) 2 / 박두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강물은 숲에서 나와 흐르리.// 비로소 채색되는 유유(悠悠)한 침묵/ 꽃으로 수장(水葬)하는 내일에의 날개짓.// 아, 흥건하게 강물은 꽃에 젖어 흐르리./ 무지개피에 젖은 아침 숲 짐승 울음.// 일체의 죽은 것은 떠내려 가리./ 얼룽대는 배암 비늘 피발톱 독수리의,// 이리 떼 비둘기 떼 깃죽지와 울대뼈의/ 피로 물든 일체는 바다로 가리.// 비로소 햇살 아래 옷을 벗는 너의 전신(全身)/ 강이여, 강이여, 내일에의 피 몸짓.// 네가 하는 손짓을 잊을 수가 없어/ 강 흐름 피무늬길 바다로 간다.//
시인 공화국 / 박두진
가을 하늘 트이듯/ 그곳에도 저렇게/ 얼마든지 짙푸르게 하늘이 높아 있고/ 따사롭고 싱그러이/ 소리내어 사락사락 햇볕이 쏟아지고/ 능금들이 자꾸 익고/ 꽃목들 흔들리고/ 벌이 와서 작업하고/ 바람결 슬슬 슬슬 금빛 바람 와서 불면/ 우리들이 이룩하는 시의 공화국/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라도 좋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하늘로/ 스스로의 하늘을 스스로가 이게 하면/ 진실로 그것/ 눈부시게 찬란한 시인의 나라/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에라도 좋다./ 새푸르고 싱싱한 그 바다 ----/ 지즐대는 파도소리 파도로써 돌리운/ 먼 또는 가까운/ 알맞은 어디쯤의 시인들의 나라/ 공화국의 시민들은 시인들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안다./ 진실로/ 오늘도 또 내일도 어제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안다.// 가난하고 수줍은/ 수정처럼 고독한/ 갈대처럼 무력한/ 어쩌면/ 아무래도 이 세상엔 잘못 온 것 같은/ 외따로운 학처럼 외따로운 사슴처럼/ 시인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안다.// 실로/ 사자처럼 방만하고 양처럼 겸허한/ 커다란 걸 마음하며 적은 것에 주저하고/ 이글이글/ 분화처럼 끓으면서 호수처럼 잠잠한/ 서슬이 시퍼렇게 서리어린 비수,/ 비수처럼 차면서도 꽃잎처럼 보드라운/ 우뢰를 간직하며 풀잎처럼 때로 떠는,/ 시인은 그러면서/ 오롯하고 당당한/ 미를 잡은 사제처럼 미의 구도자,/ 사랑과 아름다움 자유와 평화와의/ 영원한 성취에의 타오르는 갈모자,/ 그것들을 위해서 눈물로 흐느끼는/ 그것들을 위해서 피와 땀을 짜내는/ 또 그것들을 위해서// 투쟁하고 패배하고 추방되어 가는/ 아 현실 일체의 구속에서/ 날아나며 날아나며 자유하고자 하는/ 시인은/ 영원한 한 부족의 아나키스트들이다.// 그/ 가난하나 다정하고/ 외로우나 자랑에 찬/ 시인들이 모인 나란 시의 공화국/ 아 달처럼 동그란/ 공화국의 시인들은 녹색 모잘 쓰자./ 초록빛에 빨간 꼭지/ 시인들이 모여 쓰는 시인들의 모자에는/ 새털처럼 아름다운 빨간 꼭질 달자./ 그리고 , 또/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얼마든지 휘날리면 하늘이 와 펄럭이는/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그렇다 비둘기,......./ 너도 나도 가슴에선 하얀 비둘기/ 푸륵 푸륵 가슴에선 비둘기를 날리자./ 꾸륵 , 구 , 구 , 구 , 꾸륵!/ 너도 나도 어깨 위엔 비둘기를 앉히자./ 힘있게 따뜻하게,/ 어깨들을 겯고 가면 풍겨오는 꽃바람결,// 우리들이 부른 노랜 스러지지 않는다./ 시인들의 공화국은 아름다운 나라다./ 눈물과 외로움과 사랑으로 얽혀진/ 희생과 기도와 동경으로 갈리어진/ 시인들의 나라는 따뜻하고 밝다.// 시인이자 농부가 농사를 한다./ 시인이자 건축가가 건축을 한다./ 시인이자 직조공이 직조를 한다./ 시인이자 공업가가 공업을 맡고,/ 시인이자 원정, 시인이자 목축가, 시인이자 어부들이,/ 고기 잡고 마소 치고, 꽃도 심고, 길도 닦고,/ 시인이자 음악가, 시인이자 화가들이,/ 조각가들이,/ 시인들이 모여 사는 시의 나라 살림을,/ 무엇이고 서로 맡고 서로 도와 한다.// 시인들과 같이 사는,/ 시인들의 아가씨는 눈이 맑은 아가씨,/ 시인들의 아가씨도 시인이 된다./ 시인들의 손자들도 시인이 된다./ 아, 아름답고 부지런한/ 대대로의 자손들은/ 공화국의 시민,/ 시인들의 공화국은 멸망하지 않는다.// 눈물과 고독, 쓰라림과 아픔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아는,/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억누름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착취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도둑질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횡령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증수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미워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시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위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배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아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모가 없다./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당파싸움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피흘림과 살인,/ 시인들의 나라에는 학살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강제수용소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공포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집없는 아이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굶주림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헐벗음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거짓말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란이 없다./ 그리하여 아, 절대의 평화, 절대의 평등,// 절대의 자유와 절대의 사랑./ 사랑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리고,/ 사랑으로 이웃을 이웃들을 받드는,/ 시인들의 나라는 시인들의 비원/ 오랜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어쩌면,/ 이 세상엘 시인들은 잘 못내려 온 것일까?/ 어디나 이 세상은 시의 나라가 아니다./ 아무데도 이 땅위엔 시인들의 나라일 곳이 없다./ 눈물과 고독과 쓰라림과 아픔,/ 사랑과 번민과 기다림과 기도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아는,/ 시인들의 이룩하는 시인 공화국,/ 이 땅위는 어디나 시인들의 나라이어야 한다//
저 고독 / 박두진 당신을 언제나 우러러 뵈옵지만/ 당신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인자하신 음성에 접하지만/ 당신의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서 너무 멀리에 계셨다가/ 너무너무 어떤 때는 가까이에 계십니다./ 당신이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고 할 때/ 나는 나를 더욱 알 수 없고/ 당신이 나를 모른다고 하실 때/ 비로소 조금은 나를 압니다./ 이 세상 모두가 참으로 당신의 것/ 당신이 계실 때만 비로소 뜻이 있고/ 내가 나일 때는 뜻이 없음은/ 당신이 당신이신 당신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서만 나를 찾고/ 나에게서 당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당신 때문에 사실은 울고/ 나 때문에 당신이 우시는 것을 압니다./ 천지에 나만 남아 나 혼자임을 알 때/ 그때 나는 나의 나를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도 나는 나를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
갈대 / 박두진
갈대가 날리는 노래다./ 별과 별에 가 닿아라./ 지혜는 가라앉아 뿌리 밑에 침묵하고/ 언어는 이슬 방울,/ 사상은 계절풍,/ 음은 업고(業苦)/ 사랑은 피 흘림,// 영원 - 너에의/ 손짓은/ 하얀 꽃 갈대꽃/ 잎에는 피가 묻어/ 스스로 갈긴 칼에/ 선혈이 뛰어 흘러/ 갈대가 부르짖는 갈대의 절규다.// 해와 달 해와 달 뜬 하늘에 가 닿아라./ 바람이 잠자는,/ 스스로 침묵하면/ 갈대는/ 고독//
가을 당신에게 / 박두진
내가 당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속도와 거리는,/ 당신이 내게로 오시는 거리와 속도에 미치지 못합니다./ 내 손에 묻어 있는 이 시대의 붉은 피를 씻을 수 있는 푸른 강물,/ 그 강물까지 가는 길목 낙엽 위에 앉아 계신,/ 홀로이신 당신 앞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별에까지 들리고, 달에까지 들리고, 가슴속이 핑핑 도는 혼자만의 울음,/ 침묵보다 더 깊은 눈물 듣고 계시는,/ 홀로 만의 당신 앞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겨울 나무 너 / 박두진
카랑카랑 강추위// 빈 들에 혼자 서서/ 혼자서 너는 떨고 있다.// 몸뚱어리 가지 온통, 오들오들 떨고 있다.// 파아랗게 얼은 하늘/ 서리 엉긴 이마,// 마지막 한 잎까지 훌훌 떨린 채/ 알몸으로 발돋움해/ 손을 젓고 있다.// 영에 얼사 부둥켰던/ 우리들의 영원,/ 활활 달턴 뜨거움,// 해의 나라 달의 나라별의 나라 모두/ 불러보는 이름들의/ 듣고 싶은 음성,// 벌에 혼자 너만 서서/ 울음 울고 있다.//
너는 / 박두진
눈물이 글성대면,/ 너는 물에 씻긴 흰 달./ 달처럼 화안하게/ 내 앞에 떠서 오고,// 마주 오며 웃음지면,/ 너는 아침 뜰 모란꽃,/ 모란처럼 활짝 펴/ 내게로 다가오고,// 바닷가에 나가면,/ 너는 싸포오/ 푸를 듯이 맑은 눈 퍼져 내린 머리털/ 알 빛같이 흰 몸이 나를 부르고,/ 달아나며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푸른 숲을 걸으면,/ 너는 하얀 깃 비둘기./ 구구구 내 가슴에 파고들어 안긴다./ 아가처럼 볼을 묻고 구구 안긴다.//
魔法(마법)의 새 / 박두진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온/ 몇 번만 날개 치면 산골짝의 꽃/ 몇 번만 날개 치면 먼 나라 공주로,// 물에서 올라올 땐 푸르디푸른 물의 새/ 바람에서 빚어질 땐 희디하얀 바람의 새/ 불에서 일어날 땐 붉디붉은 불의 새로/ 아침에서 밤 밤에서 꿈에까지/ 내 영혼의 안과 밖 가슴속 갈피갈피를/ 포릉대는 새여// 어느 때는 여왕으로 절대자로 군림하고/ 어느 때는 품에 안겨 소녀로 되어 흐느끼는/ 돌아설 땐 찬바람/ 빙벽 속에 화석하며 끼들끼들 운다.// 너는 날카로운 부리로/ 내 심장의 뜨거움을 찍어다가 벌판에 꽃뿌리고/ 내가 싫어하는 짐승 싫어하는 뱀들의/ 그것의 코빼기를 발톱으로 덮쳐/ 뚝뚝 듣는 피를 물고 되돌아올 때도 있다.// 너는/ 홀로 쫓겨 숲에 우는 어린 왕자의 말이다가/ 밤마다 달빛 섬에 홀로 우는 학이다가/ 오색 훨훨 무지개 속 구름 속의 천사이다가/ 돌로 치는 군중 속의 피흐르는 창녀이다가/ 한번 맡으면 쓰러지는 독한 꽃의 향기이다가 새여.// 느닷없이 얼키설키 영혼을 와서 어지럽혀/ 나도 너를 알 수 없고 너도 나를 알 수 없게/ 눈으로 서로 보면 눈이/ 넋으로 서로 보면 넋이/ 타면서 서로 아파 깊게깊게 앓는,// 서로 오래 영혼끼리 꽃으로 서서 우는/ 서로 찾아 하늘 날며 종일을 울어예는/ 어쩔까 아 징징대며 젖어오는 울음/ 아직도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묵시록(默示錄) / 박두진
나의 사랑하는 이의 꿈이어 거기에 있거라/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하늘언덕의 노을자락/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하늘꽃의 꽃언덕/ 그 무지개로도 햇볕살로도 바람결로도/ 이슬방울로도 하늘 푸르름으로도/ 짜낼 수 없는 깁,/ 그 맞닿아야 할 가슴과 가슴의 따스함/ 입술과 입술의 보드라움/ 눈과 눈의 깊음/ 살과 살의 향기로움이 내려 엉긴/ 아, 어디까지 가도 그 멀음 끝이 없고/ 언제까지 언제까지 가도 그 오램 끝이 없는/ 너와 나 닿고자 하는 언덕의 사랑이어/ 이루어지고 싶은 그 꿈의 꼭대기/ 자리잡고자 하는 사랑의 알칡이어 거기 있거라.//
바다가 바라 뵈는 언덕의 풀밭 / 박두진
벗꽃이 조금씩 제절로 흩날리는/ 바다가 바라 뵈는 언덕/ 풀 밭에 잠자는 꽃에 물든 바람이어./ 아직은 땅 속에 잠자는 폭풍이어./ 그, 비둘기는 깃쭉지, 작은 羊은 목 줄기에서/ 지금은 죽음,/ 소년과 아낙네와 젊은이의 피 뿌림의/ 꽃잎보다 더 고운 따스한 피의 소리./ 그 위에 무성하는/ 풀뿌리 밑의 울음소리. 가늘은 넋의 소리./ 간간한 사투리소리./ 그 풀 언덕 바다가 바라 뵈는/ 조금씩 흩날리는 꽃이 흩는 풀밭 속에/ 지금은 죽음,/ 손으로 눈을 가린/ 봄. 햇살./ 날아 올라보고 싶은 비둘기여./ 뛰엄뛰고 싶은 羊들이어./ 살고 싶은 소년이어./ 울어보고 싶은 아낙네여./ 말 해 보고 싶은 젊은이여.//
절벽가(絶壁歌) / 박두진
절벽이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별들이네./ 별들이 아니라 서서 우는 절벽들이네.// 별들이 별들 위에/ 절벽이 절벽 위에 있네.// 절벽이 절벽 아래에도 있네./ 절벽이 절벽 앞에, 절벽 뒤에,/ 절벽이 절벽 안에도 있네// 절벽은 절벽끼리 손을 서로 닿지 않네./ 절벽은 절벽끼리 말을 서로 할 수 없네.// 절벽이 절벽끼리 눈을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귀를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입을 서로 막네.// 절벽들의 햇불을 절벽들이 못 보네./ 절벽들의 절규를 절벽들이 못 듣네.// 절벽은 스스로/ 사랑의 뜨거움을 말하지 않네./ 절벽은 그 외로움/ 절벽은 그 분노/ 절벽은 그 내일에의 절망을 말하지 않네.// 절벽의 가슴속엔 쏟아지는 별의 사태,/ 절벽들의 가슴속엔 피와 꿈의 비바람,/ 절벽들의 가슴속엔 펄펄 꽃이 지네.// 어디에나 홀로 서서 절벽들이 우네.//
새벽바람에 / 박두진
칼날 선 서릿발 짙 푸른 새벽,/ 상기도 휘감긴 어둠은 있어,// 하늘을 보며, 별들을 보며,/ 내여젓는 내여젓는 백화(白樺)의 손길.// 저 마다 몸에 지닌 아픈 상처에,/ 헐덕이는 헐덕이는 산길은 멀어// 봉우리엘 올라서면 바다가 보히리라./ 찬란히 트이는 아침이사 오리라.// 가시밭 돌사닥 찔리는 길에,/ 골마다 울어예는 굶주린 짐승// 서로 잡은 따사한 손이 갈려도,/ 벗이여! 우린 서로 불르며 가자.// 서로 갈려올라 가도 봉우린 하나./ 피 흘린 자욱마단 꽃이 피리라.//
서한체 / 박두진
노래해다오. 다시는 부르지 않을 노래로 노래해다오./ 단 한번만 부르고 싶은 노래로 노래해다오./ 저 밤하늘 높디높은 별들보다 더 아득하게/ 햇덩어리 펄펄 끓는 햇덩어리보다 더 뜨겁게,/ 일어서고 주저앉고 뒤집히고 기어오르고/ 밀고 가고 밀고 오는 바다/ 파도보다도 더 설레게 노래해다오./ 노래해다오. 꽃잎보다 바람결보다 빛살보다 더 가볍게,/ 이슬방울 눈물방울 수정알보다 더 맑디맑게 노래해다오./ 너와 나의 넋과 넋, 살과 살의 하나됨보다 더 울렁거리게,/ 그렇게보다 더 황홀하게 노래해다오/ 환희 절정 오싹하게 노래해다오./ 영원 영원의 모두, 끝과 시작의 모두, 절정 거기 절정의 절정을 노래해다오./ 바닥의 바닥 심연의 심연을 노래해다오.//
소 / 박두진
푸른 하늘인들 한 줄기 선혈을 안 흘리랴?/ 의지의 두 뿔이 분노로 치받을 때// 태산인들 딩굴으며 무너지지 않으랴?/ 전신이 노도처럼 맞받아 부딪칠 때// 오늘 한 가락 고삐에 나를 맡겨/ 어린 소녀의 이끌음에도 순순히 따라 감은// 불거진 멍에에 山 같은 짐을 끌고/ 수렁에 철벅거려 종일을 논 갈음은// 네굽 놓아 내달리는 벌판의 자유/ 찌르는 뿔의 승리를 모르는 바 아니라// 오늘은 오오래인 오늘은 다만 참음/ 언젠가는 다시 벅찰 크낙한 날을 위하여// 눈 스르르 감고 새김질하는 꿈 한나절/ 먼 조상 포효하던 산악을 명상하고// 뚜벅뚜벅 한 걸음씩 절렁대는 요령에/ 대지 먼 외줄기길 千里를 잰다.//
오도(午禱) / 박두진
백(百) 천만(千萬) 만만(萬萬) 억(億)겹/ 찬란한 빛살이 어깨에 내립니다.// 자꾸 더 나의 위에/ 압도(壓倒)하여 주십시요.// 이리도 새도 없고,/ 나무도 꽃도 없고,/ 쨍 쨍, 영겁(永劫)을 볕만 쬐는 나 혼자의 광야(曠野)에/ 온 몸을 벌거벗고/ 바위처럼 꿇어,/ 귀, 눈, 살, 터럭,/ 온 심혼(心魂), 전(全) 영(靈)이/ 너무도 뜨겁게 당신에게 닳습니다./ 너무도 당신은 가차이 오십니다.// 눈물이 더욱 더 맑게 하여 주십시요./ 땀방울이 더욱 더 진하게 해 주십시요./ 핏방울이 더욱도 곱게 하여 주십시요.// 타오르는 목을 축여 물을 주시고,/ 피 흘린 상처(傷處)마다 만져 주시고,/ 기진한 숨을 다시/ 불어 넣어 주시는,// 당신은 나의 힘./ 당신은 나의 주(主)./ 당신은 나의 생명(生命)/ 당신은 나의 모두……// 스스로 버리려는/ 벌레 같은 이,/ 나 하나 끓은 것을 아셨습니까./ 뙤약볕에 기진(氣盡)한/ 나 홀로의 핏덩이를 보셨습니까.//
금강전도(金剛全圖) / 박두진
밤에도 낮에도 별이 펑펑 쏟아지고,/ 달이 열 개 해가 열 개 높게높게 걸려 있고,/ 억억만 동해 파도 하얗게 밀고 오고,/ 금사다리 은사다리 일만이천 별사다리,/ 찰박이던 달의 폭포 달의 골짝 거기,/ 육천만 가슴 속 이 저마다의 눈멀음,/ 응어리 안의 넋이 불로 활활 탄다./ 아으, 서로 얽힌 넋의 사슬 끊을 수가 없다./ 넋 철철 피로 솟아 강산 적신다./ 갈수록 더 골짝마다 맹수의 떼 들끓고,/ 하늘 아래 제일강산 검은 먹구름./ 언제나 그 자유 천지 하나의 날 그때일지,/ 온 산을 다 뭉개도 못 다스릴 이 아픔,/ 일만이천 주룩주룩 서서 너는 운다.//
기(旗) / 박두진
기(旗)! 그것은,―/ 찬란하게, 우리 앞에 나부끼어야 한다./ 바람결 띠끌마다 흐려져 온 것, 미쳐 뛰는 물결마다 휩쓸려 온 것, 아우성의 저자마다 찢겨져 온 것,// 그것은,―/ 어쩌면 핏빛, 어쩌면 별빛, 어쩌면 초록, 어쩌면 눈물, 어쩌면 꿈! 어쩌면 활활 타는 불꽃 빛으로, 가슴마다 살아 있어 나부끼는 것,// 펄펄펄펄 창궁(蒼穹) 위에 펼쳐 오르면, 저마다의 기(旗)폭들이, 아득하게 한 폭으로 피어 살아 오르면, 우리들의 눈은 다시 부시어져 온다. 가슴들이 둥둥 새로 틔어 부퍼 온다. 피가 더욱 새로 맑아 펄덕여져 온다.// 기(旗)! 다시 오른 기(旗)폭은 찢겨지지 않는다. 펄펄펄펄 기(旗)폭에서 빛발들이 흩는다. 펄펄펄펄 기(旗)폭에서 꽃가루가 흩는다. 기(旗)을 향(向)해 우리들은 행진(行進)을 한다. 파다아하게 모여들어 새로 뽑는 합창(合唱).―손뼉들을 흠뻑 친다. 하얀 새를 날린다. 눈빛 같은 하얀 새뗄 파닥파닥 날린다.// 기(旗)! 그것은,―/ 우리들 젊은, 우리들 뛰는, 가슴마다 당신께서 주신 것이다.// 기(旗)! 그것은,―/ 기적(奇蹟)처럼 찬란하게, 당신께서 우리 앞에 날리셔야 한다.//
토루소 / 박두진
지금은 멀디멀은/ 볕살의 나라에서 온 아가씨여/ 나의 앞에서 너는/ 자꾸만 날개돋쳐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고/ 그만큼의 공간에서 나는/ 나혼자 할 수 없이/ 땅으로 땅으로 가라앉네// 너의 예쁘디예쁜/ 영혼의 날개의/ 화사한 무지개에 매달리는/ 내 영혼의 둘레 가의/ 알 수 없는 이 슬픔// 그 볕살의 나라/ 볕살의 궁전에서 내려온/ 곱디고운 영혼의 너의 뜨거움/ 꿈의 뜨거움/ 숨결의 그 뜨거움의/ 순수 인력은// 견디다 못해서 전율하는/ 나의 열기/ 영혼의 날갯짓의 절망 속의 황홀로/ 마지막 부딪치는/ 돌격 앞에서도// 너는 그 너의 영혼/ 몸뚱어리 예쁜 가슴 옹송그리며/ 멀디먼 볕살 속의/ 볕살의 나라/ 무지개 속 훨훨 숨어/ 달아나버리네// 지금은 나의 앞에/ 말도 없이 있는/ 그러면 언제일까 언제쯤일까/ 아가씨여// 그 별이 되어 꽃이 되어/ 이슬이 되어 폭발하는/ 폭발하는 너와 나의/ 영원한 순수/ 하나로의 영원은 언제 쯤을까/ 아가씨여.//
피닉스 / 박두진
햇볕에 반짝이는 먼지/ 바닷가 자잘한 모래알속에서도,/ 아직은 숨어있는 흙 속의/ 풀뿌리/ 골짜기에 딩구는 희디하얀 백골 속에서도/ 일어날 것이라 한다.// 언제나 불안한 저들의 눈동자/ 피묻은 옷자락/ 저절로 떨리는/ 머리카락 속에서도,// 더럽게 엉기는 저들의 피톨/ 썩은 양심// 죄의 손/ 거짓과 횡포와 살인을 기만하는/ 혓바닥 속에서도,// 따습고 맑디맑고 혁혁한 눈의 영원/ 불멸의 의의 부리/ 관용의 앞가슴/ 사랑의 뜨건 심장/ 죽일수록 살아나는 푸른 자유로/ 날개여,// 어디나의 바람/ 어디나의 암흑/ 어디나의 죽음에서 푸득푸득 날개쳐/ 영원 다시 불멸의 넋/ 일어날 것이라 한다.//
향현(香峴) / 박두진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 넘어, 큰 산 그 넘어 산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들어섰고, 머루 다래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깔나무 억새풀 우거진 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 만년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 즉 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확 치밀어 오를 화염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리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 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정(精) / 박두진
그때 처음 열리던 하늘의 응결된/ 푸른 정기 처음 숲의 초록 바람/ 처음 바다 처음 강의 파도 소리 여울 소리/ 네게서 들린다.// 그때 처음 태양의 금빛 촉감/ 처음 타오르던 지열/ 처음 만발한 꽃들의 향기,/ 처음 울음 울던 맹수들의 포효/ 처음 지저귀던 새소리 네게서 들린다.// 그때 처음 헤엄치던 물고기의 비늘무늬/ 처음 걸리던 하늘의 무지개/ 처음 밤의 별빛 달빛, 그때/ 처음 사람들의 입맞춤의 첫대임/ 첫번째 황홀의 울음 울던 부끄러움/ 처음 타오르던 노을빛 네게서 어린다.// 그때 처음 사람들의 첫 낱말/ 처음의 오해 처음의 노여움/ 처음 사람의 첫 증오 피흘림/ 처음 만나는 죽음의 두려움과 서러움/ 네게서 보인다.// 너는 지금 나의 창가 오월/ 바람이 뜰의 그 신록의 잎새 사이 먼/ 천산 산맥의 청청한 햇살에 젖어/ 불어와 서성대는 책상에/ 그러나 의젓이 그러나 잠잠하게 볕살 속에 앉아있다.//
장미 1 / 박두진
디디고 올라가면/ 무너지는 층계/ 바다가 그 하늘 밑에/ 아찔하게 설레는/ 아침이여, 너의 背叛/ 안의 넋의/ 피흐름./ 알았네. 나도 이젠/ 하나씩의 그 戰慄/ 떨어지는 宇宙의 진한 아픔을./ 네가 지면 이 햇살 아래/ 목놓아 울리./ 그 하늘 층계 다 무너뜨려/ 꽃불 지르리.//
장미 4 / 박두진
어쩌리. 나의 앞에 너무 너는 뜨거워. 나 혼자 이렇게 쯤 마음 달뜨는. 무너지렴, 무너지렴, 스스로를 꾀여내어. 입술을, 네 이마를, 네 익은 뺨을 더듬어, 목아지를, 귓부리를, 눈두던을 더듬어. 장미야. 너무 뜨건 진홍 장미야. 대낮 아님 달밤에, 대낮 아님 달밤에, 대낮 아님 달밤에 만 억번 다시 사는 훼닉스처럼. 꿀집 깊 이 파들어 가는 투구벌레 처럼. 모르겠다. 나는 너를 짓이기겠다. 속속들이 안의 너를 짓이기겠다. 장미야. 너 꽃장미야. 짓이기겠다.//
장미의 노래 / 박두진
내 여기 한 이름 없는/ 작은 마을에 태어나// 바람의 토양과 부모와/ 따사한 햇볕에 안겨 자랐으나// 어머니의 젖/ 달큼한 젖의 품을 벗어나/ 외따로 걷는 마을길에 서서/ 처음 우러러 하늘을 볼 때부터// 이내 자고새면 그리워 온/ 머언 그/ 꽃 하나 나의 하늘// 바람부는 벌판/ 두견 우는 골짝// 내청춘은/ 한 사람 살뜰한 연인도 없이/ 걸어와// 눈물은 항시/ 서럼고 맑은 시의 이슬로/ 결정 짓고// 한숨은 묶어/ 떠나가는 구름과 바람에 실어/ 보내며// 다만 깊이/ 내 안에 가꿔온 것/ 붉은 장미를 ---// 언제 새로 바라는 하늘이 열려/ 찬찬히 트이는/ 아침에사 피리라// 다섯 물과 여섯 바다에/ 일제히 인류가 합장을 부르는 날// 그때 마저 내 또 머언 곳에/ 외로이 설지라도/ 나의 시 아끼는 나의 눈물은/ 스스로의 장미우에/ 영롱히 다시 이슬지어 빛나리라//
흰 장미와 백합꽃을 흔들며 / 박두진
눈 같이 흰 옷을 입고 오십시요. 눈 위에 활짝 햇살이 부시듯 그렇게 희고 옷을 입고 오십시요.// 달 밝은 밤 있는 것 다아 잠들어 괴괴-한 보름밤에 오십시요...빛을 거느리고 당신이 오시면, 밤은 밤은 영원히 물러간다 하였으니, 어쩐지 그 마지막 밤을 나는, 푸른 달밤으로 보고 싶습니다. 푸른 월광이 금시에 활닥 화안한 다른 광명으로 바뀌어지는, 그런 , 장엄하고 이상한 밤이 보고 싶습니다.// 속히 오십시요. 정녕 다시 오시마 하시었기에, 나는, 피와 눈물의 여러 서른 사연을 지니고 기다립니다.// 흰장미와 백합꽃을 흔들며 맞으오리니, 반가워, 눈물 머금고 맞으오리니, 당신은, 눈 같이 흰 옷을 입고 오십시요. 눈 위에 활작 햇살이 부시듯, 그렇게, 희고 빛나는 옷을 입고 오십시요.//
연륜 / 박두진
소나무와 갈나무 와/ 사시나무와 함께 나는 산다// 억새와 칡덤불과/ 가시 사이에 서서// 머언 떠나가는/ 구름을 손짓하며// 뜻 없는 휘휘로운/ 바람에 불리우며// 우로와 상설 에도// 그대로 헐벗고// 창궁과 일월과 다만/ 머언 그 성신들을 우러르며/ 나는 자랐다// 봄 가고/ 가을 가는 동안/ 뻐꾹새며 꾀꼬리며/ 접동새도 와서 울고/ 다람쥐며 산토끼며/ 사슴도 와 놀고 하나// 아침에 뚜놀던 어린 사슴이/ 저녁에 이리에게 무찔림도 보곤 한다// 때로 ---/ 초부의 날선 낫이/ 내 아끼는 가지를/ 찍어가고// 푸른 도끼날이/ 내 옆에 나무에 와 번뜩인다// 내가 이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날까지는// 내 스스로 더욱/ 빛내야 할 나의 세기// 푸른 가지는/ 위로 더욱 하늘을 받들어/ 올라가고// 돌사닥 사이를 뿌리는/ 깊이 지심으로 지심으로/ 뻗으며// 언제나 트여질/ 그 찬란한 크나큰 아침을 위하여// 일월을 우러러/ 성신을 우러러// 다만 여기 한/ 이름 없는 산기슭에// 퍼지는 파문처럼/ 작은 내 고운/ 연륜은 늘어간다//
사랑이 나무로 자라 / 박두진
바다로 돌담을 넘어/ 장미가 절망한다/ 이대로 밤이 열리면/ 떠내려가야 할 끝/ 그 먼 마지막 언덕에 닿으면/ 꽃 등을 하나 켜마.// 밤별이 총총히 내려/ 쉬다 날아간/ 풀 향기 짙게 서린/ 바닷가 언덕/ 금빛 그 아침의 노래에/ 하늘로 귀 쭝기는/ 자유의 전설이 주렁져 열린 나무 아래/ 앉아 쉬거라.// 사랑이 죽음을/ 죽음이 사랑을 잠재우는/ 얼굴은 꿈, 심장은 노래/ 영혼은 기도록 가득 찬/ 또 하나 바벨탑을 우리는 쌓자.// 파도가 절벽을 향해/ 깃발로 손짓하고/ 사랑이 나무로 자라/ 별마다 은빛 노래를 달 때/ 그 커다란 나무에 올라/ 비로소 장미로 지붕 덮는/ 다시는 우리 무너지지 않을/ 눈부신 집을 짓자.//
당신의 사랑 앞에 / 박두진
말씀이 뜨거이 동공에 불꽃 튀는/ 당신을 마주해 앉으리까 라보니여./ 발톱과 손바닥과 심장에 생채기 진/ 피 흐른 골짜기의 조용한 오열/ 스스로 아물리리까 이 상처를 라보니여./ 조롱의 짐승 소리도 이제는 노래/ 절벽에 거꾸러짐도 이제는 율동/ 당신의 불꽃만을 목구멍에 삼킨다면/ 당신의 채찍만을 등빠다에 받는다면/ 피눈물이 화려한 고기 비늘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발광이 황홀한 안식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너의 융기(隆起) / 박두진
어떻게 너에게 닿을까/ 가슴이어.// 천만년 또는/ 천만리 멀고 멀은/ 계곡을 불어 치는 윙윙한 하늘 바람,// 한 떼씩의 바다가 일어서려다 주저앉고/ 치달리며 피 흐르는 산맥들의 발목/ 지금은 적막한/ 절름대는 광야의 상한 짐승이어.// 너에의 달디 달은/ 유혹은 꿈의 늪/ 체념은 느린 죽음/ 육신은 마른 흙/ 바다보다 더 설레는 안의 바람 속/ 춤추는 이 회오리 마음 어지러움이어.// 그 죽어도 다시 살을/ 오직 하나 불씨/ 서로 보며 불 튀는 눈과 눈의 영원/ 포옹이 그 육신으로 영으로/ 푸득거릴,// 어떻게 너에게 닿을까/ 사랑이어.//
강강수월래 / 박두진
올려다보는 달이 하늘에 흔들리고 있다./ 강 속을 흐르는 달이 차갑게 흐느끼고 있다./ 조그만 바람에도 출렁이는 달빛/ 조그만 물살에도 산산이 부서져 흐느끼는 달빛/ 옛날에 옛날에/ 옥으로 금으로 만든 도끼로 찍어다 지은/ 계수나무 기둥과 서까래/ 초가 삼간도 헐리고 폐허/ 영하 200도의 침묵의 잿빛 벌판/ 달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달이 물 속을 흐느껴 가고 있다./ 강 강 수월래/ 한가위 하늘이 저 달의 얼굴/ 달의 가슴 달의 사랑/ 눈알이 노란 청년 몇 사람이/ 무거운 기계의 몸으로 올라가 꽂아 놓은/ 순결의 상처에 이마 찡그리고/ 달은/ 강 강 수월래/ 옛날을 생각하고 옛날을 잃어버린 사람/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 꿈을 생각하고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의 우리들/ 부끄러워하는 마음의 저 달빛,/ 달은 하나인데 우리들 둘의 마음/ 천의 마음./ 마음과 사랑 꿈은 하나인데/ 저 둘의 달빛 천의 달빛,/ 강―강 수월래 강 강 수월래/ 올려다보는 달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저마다 우리들/ 하나씩의 가슴의 달이 흐느끼고 있다.//
검법(劍法) / 박두진
칼을 간다.// 달밤에 홀로/ 벌판에서/ 칼을 간다.// 엉겅퀴 한 잎/ 흐르는 강물을 베이기에도 무딘/ 칼날.// 함부로 떼지어/ 광기로 끼얹는 잔내비떼의/ 흙탕물,/ 밤에 와서 뿌리고 가는/ 횡포의 이리떼의/ 유혈로 녹이 슬은,// 달밤에 홀로/ 칼을 간다.// 저렇게 틀어막힌 봉쇄의 입,/ 저렇게 틀어막힌/ 절벽의 귀,/ 저렇게 캄캄하게 눈 칭칭 가리운 채// 묶여서 투하되는 대낮의 자유,// 소용돌이 심해 속의/ 칠색 오로라여.// 더러는 툭툭한 구둣발/ 더러는 투망/ 더러는 공중잡이/ 더러는 배차기로/ 학살되는 지성,// 그 양심,/ 이제는/ 잊어버린/ 밤에/ 홀로,/ 이성의 돌을 닦아/ 칼 쓱쓱 간다.// 대 상단 높이 들어/ 파람을 끊어,// 썽둥 달을 둘로 잘라/ 장강 터 놓는다.//
결투(決鬪) / 박두진
죽어서 평등한 빈 벌의 뼈의 달빛/ 피에 취한 맹수들이 으릉으릉 온다./ 깃발도 하나 없이/ 너도 이미 가버린// 혼자로다 신나는 무인광야 결투,/ 다만/ 별 하나 훌쩍 따서 손아금에 쥐고,/ 맨발로 창 하나로 치고 치고 친다./ 밤의 광야 달빛 활활 불을 지른다.//
결투의 거북 / 박두진
입으로 비수를 받겠다.// 천만 개 별과 별이 칼날이 되어/ 쏟아져도,/ 엎드려 푸른 등/ 등으로 모조리 맞받겠다.// 금으로 번쩍이는/ 내 가슴 한복판의 임금 왕자,/ 찔리면 피 흐르는/ 가슴팍 그대로 맞받겠다.// 그 비수를 받아/ 네게로 다시 뿌리겠다.// 하늘로 윙윙대며/ 바람을 끊고 날아가는/ 내리 꽂는 칼날들의/ 풋풋한 전율.// 단 한 개/ 한 개씩만으로/ 너의 급소와 급소를/ 노려,// 오만한 힘의 근원/ 근원을 모조리 지질르겠다.// 새로 펄펄 나부끼는/ 해와 달은 내 것,/ 일어서서 일제히/ 바다들이 환호하고,// 푸른 내 등의 껍질/ 아침 출렁임,/ 쏟아지는 햇살을/ 심해를 갈고 가며,// 하나씩의 하늘마다 손 흔들겠다./ 스스로 내 피의 상처/ 아물리겠다.//
잔내비 / 박두진
잔내비 칼 휘두른다./ 꽃밭이고 소년이고 양의 떼고 없다./ 피 보면 미친다는/ 이리 넋에 취하여/ 어쩌나 둘러서서 침묵하며 지켜보는/ 대낮 여기 잔내비떼/ 칼 휘두른다./ 심장을 마구 찔러 목숨 다치고/ 은 장식 조상이 내린 거울 깨뜨리고/ 꽃밭 함부로 낭자하게/ 개발 짓밟어/ 남녘에서 들뜬 바람/ 독 어린 발정/ 죽을 줄 제 모르고/ 칼 휘두른다.//
숲 / 박두진
진달래 붉게 피고,/ 杜鵑새며 綠陰 따라/ 꾀꼬리도 와서 울고 하면,/ 숲은/ 새색시같이 즐거웠다.// 우거진 綠陰 위에/ 오락 가락 검은 구름 떼가 몰리고,/ 이어 성난 하늘에/ 우루루루 천둥이 비바람에/ 파란 벗갯불이 질리고 하면,/ 숲은 후둘후둘 무서워서 떨었다./ 찬 비가 내리곤 하다가/ 이윽고 하늘에 서릿발이 서고,/ 찬바람에 우수수수 누렁 나뭇잎들이 떨어지며/ 달밤에 귀뚜라미며 풀버레들이 울고 하면,/ 숲은 쓸쓸하여,/ 숲은, 한숨을 짓곤 짓곤 하였다.// 부우연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고,/ 눈 위에 바람이 일어 눈포래가 휩쓸고,/ 카랑카랑 맵게 칩고,/ 달이며 별도 얼어 떨고,/ 부헝이가 와서 울고 하면,/ 숲은, 웅숭그리며, 오도도 떨며, 참으며,/ 하얀 눈 위에서 한밤내 一 울었다//
고산식물(高山植物) / 박두진
아슬히 깎아질린 벼랑에 산다./ 내 가슴 이 비수(匕首)는 자라 오르는 난(蘭)/ 짙은 안개 비에 서려 바람에 떤다./ 찬 달빛 거울 비치면 맹금(猛禽)의 상한 죽지/ 언덕을 밀물 덮던 현란한 기폭/ 포효(咆哮)가 지금은 꽃으로 떨어져 말이 없는/ 그 침묵 심연(深淵) 이쪽 벼랑에 산다./ 언젠가는 다시 불을 하늘 아침 폭풍(暴風)/ 땅에는 동남(東南) 서북(西北) 혁명(革命) 치달려/ 비수(匕首)가 그 사슬을 그물을 그 밤을 찔러/ 마지막 빛의 개벽 꽃 흐트러뜨릴/ 난(蘭)이여 안개 떠는 벼랑에 산다.//
山脈(산맥)을 간다 / 박두진
얼룽진 산맥들은 짐승들의 등빠디/ 피를 품듯 치달리어 산등성을 가자.// 흐트러진 머리칼은 바람으로 다스리자./ 푸른 빛 잇빨로는 아침 해를 물자.// 咆哮(포효)는 절규. 포효로는 불을 뿜어,/ 죽어 잠든 골짝마다 불을 지르자.// 가슴을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독을 바른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가슴에는 자라나는 애기해가하나/ 나긋나긋 새로 크는 애기해가 한 덩이.// 미친듯 밀려 오는 먼 바다의/ 울부짖는 파도들에 귀를 씻으며,// 떨어지는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다시 솟을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설악부 / 박두진
1.// 부여안은 치맛자락 하얀 눈바람이 흩날린다. 골이고 봉우리고 모두 눈에 하얗게 뒤덮였다. 사뭇 무릎까지 빠진다. 나는 예가 어디 저 북극이나 남극 그런 데로도 생각하며 걷는다./ 파랗게 하늘이 얼었다. 하늘에 나는 후- 입김을 뿜어본다. 스러지며 올라간다. 고요-하다. 너무 고요하여 외롭게 나는 태고! 태고에 놓여 있다.// 2.// 왜 이렇게 자꾸 나는 산만 찾아 나서는 겔까? - 내 영원한 어머니… 내가 죽으면 백골이 이런 양지짝에 묻힌다. 외롭게 묻어라./ 꽃이 피는 때 내 푸른 무덤엔 한 포기 하늘빛 도라지꽃이 피고 거기 하나 하얀 산나비가 날아라. 한 마리 맷새도 와 울어라. 달밤엔 두견! 두견도 와 울어라./ 언제 새로 다른 태양 또 다른 태양이 솟는 날 아침에 내가 다시 무덤에서 부활할 것도 믿어 본다.// 3// 나는 눈을 감아본다. 순간 번뜩 영원이 어린다… 인간들! 지금 이 땅 위에서 서로 아우성치는 수많은 인간들이 그래도 멸하지 않고 오래오래 세대를 이어 살아갈 것을 생각한다./ 우리 족속도 이어 자꾸 나며 죽으며 멸하지 않고 오래오래/ 이 땅에서 살아갈 것을 생각한다./ 언제 이런 설악까지 웬통 꽃동산 꽃동산이 되어 우리가 모두 서로 노래치며 날뛰며 진정 하로 화창하게 살아 볼 날이 그립다. 그립다.//
도봉(道峯) / 박두진 산(山)새도 날러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듯,/ 홀로 앉은/ 가을 산(山)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山)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 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생(生)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
천태산 상대(天台山 上臺) / 박두진
먼 항하사/ 영겁을 바람부는 별과 별의/ 흔들림/ 그 빛이 어려 산드랗게/ 화석하는 절벽/ 무너지는 꽃의 사태/ 별의 사태/ 눈부신,/ 아/ 하도 홀로 어느 날에 심심하시어/ 하늘 보좌 잠시 떠나/ 납시었던 자리./ 한나절내 당신 홀로/ 노니시던 자리.//
천유산 상호 / 박두진
먼 항하사/ 영겁을 바람 부는 별과 별의/ 흔들림/ 그 빛이 어려 산드랗게/ 화석하는 절벽/ 무너지는 꽃의 사태/ 별의 사태/ 눈부신,/ 아/ 하도 홀로 어느날에 심심하시어/ 하늘 보좌 잠시 떠나/ 납시었던 자리./ 한나절내 당신 홀로/ 노니시던 자리.//
흙과 바람 -애경초(愛經抄) / 박두진
흙으로 빚어졌음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리./ 바람으로 불어 넣이었음 마침내/ 바람으로 돌아가리./ 멀디 먼 햇살의 바람 사이/ 햇살 속 바람으로 나부끼는 흙의 티끌/ 홀로서 무한 영원/ 별이 되어 탈지라도/ 말하리./ 말할 수 있으리./ 다만 너/ 살아 생전/ 살의 살 뼈의 뼈로 영혼 깊이 보듬어/ 후회 없이/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고.//
항아리 / 박두진
길어 내리는, 길어 내리는,/ 하늘 가득 먼 푸름 항아리배여./ 입술 갓을 빨고 가는/ 따스한 햇볕,/ 알맞은 보픈 배의/ 자랑스러움이어./ 오랜 날 타 내려온 그리움에 익은/ 가슴 닿는 꽃익임의 향그러운 젖 흐름/ 아, 아기 낳자. 아기 낳자./ 하늘 배임이어./ 길어 안은 하늘 속의/ 햇덩어리여.//
가시 면류관 / 박두진
비로소 하늘로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 죽음의 바닥으로 딛고 내려갈 수 있는 사다리./ 빛이 그 가시 끝 뜨거운 정점들에 피로 솟고/ 비로소 음미하는 아름다운 고독/ 별들이 뿌려 주는 눈부신 축복과/ 향기로이 끈적이는 패배의 확증 속에/ 눌러라 눌러라 가중하는 이 황홀/ 이제는 미련 없이 손을 들 수 있다./ 누구도 다시는 기대하지 않게/ 혼자서도 이제는 개선할 수 있다.//
박두진(朴斗鎭, 1916년~1998년) 시인
본관은 밀양이고 호는 혜산(兮山)이다.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여 한때 경상북도 경주에서 유아기를 보고 그 후 경상남도 밀양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연세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1960년 4·19 당시 학원분규로 물러나게 된다. 그 뒤 우석대학(후에 고려대학교와 합병)과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거쳐서 1972년 다시 연세대학교 교수로 돌아와 근무하다가 1981년 정년 퇴임했다. 이후 단국대학 초빙교수(1981∼1985)와 추계예술대학 전임대우교수(1986∼96)를 역임한 후에, 1998년 9월 16일,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39년 문예지 《문장》에 《향현》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했다. 조지훈(趙芝薰)·박목월(朴木月) 등과 함께 ‘청록파(靑鹿派)’의 한 사람이다. 8·15광복 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좌익계의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 김동리(金東里)·조연현(趙演鉉)·서정주(徐廷柱) 등과 함께 우익진영에 서서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결성에 참여했고, 이어 1949년 한국문학회협회에도 가담하여 시분과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세아 자유문학상과 서울시 문화상, 삼일 문화상, 예술원상 등을 받았으며, 저서로 《해》, 《오도》, 《청록집》, 《거미와 성좌》, 《수석열전》, 《박두진 문학전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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