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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 강연호
그는 오늘도 아내를 가두고 집을 나선다/
문단속 잘 해, 아내는 건성 듣는다/
갇힌 줄도 모르고 노상 즐겁다/
라랄랄라 그릇을 씻고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며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하루가 지나간다 나이 들수록 해가 짧아지네/
아내는 제법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상추를 씻고 된장을 풀고 쌀을 안치는데/
고장난 가로등이나 공원 근처/
그는 집으로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맨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신다/
그는 오늘도 집 밖의 세상에 갇혀 운다//
비단길 1 / 강연호
내 밀려서라도 가야 한다면/ 이름만이로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허나 지나는 마음 쓸쓸하여 영 자갈밭일 때/ 저기 길을 끌어가는 덤불숲 사이로/ 언뜻 몸 감추는 세월의 뒷모습 보인다/ 저렇게 언제나 몇 걸음 앞서 장난치며/ 어디 헛디뎌봐 유혹하는/ 허방이여, 온다던 사람 끝내 오지 않아서/ 기어이 찾아나선 마음 성급하다 발 거는 걸까/ 잠시 허리 굽혀 신발끈이나 고쳐 매면/ 흐린 물둠벙에 고인 행색/ 더는 고쳐 맬 수 없는 생애가 엎드려 있다/ 앞서거나 뒤쳐지는 게 운명이라서/ 대상의 행렬은 뽀얀 먼지 속에서 유유한데/ 비단길, 미끄러운 아름답게 나를 넘어뜨릴 때/ 어디 經을 외며 지나는 수도승이라도 있어/ 저런 조심해야지, 일으켜주며 세상의 흥진/ 온전히 털어내는 법 가르쳐줄까/ 물음표처럼 휘어진 등뼈 곧추세울수록/ 먹장구름은 다시 우르르 몰려와 기우뚱거린다/ 지나가는 저 빗발 긋는 동안이라도/ 내 멈춰서지 못하는 건 영영 모래기둥으로 변할/ 몇천 년의 전설 두렵기 때문이 아니다/ 밀려서라도 가야 할 인연의 사슬/ 질기니 이름만이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얽힌 마음 다잡고 걷다 보면/ 길 잘못 들었다며 앞을 기로막는 이정표조차/ 그렇게 정답고 눈물나는 것을//
비단길 2 / 강연호
잘못 든 길이 나를 빛나게 했었다 모래시계는/ 지친 오후의 풍광을 따라 조용히 고개 떨구었지만/ 어렵고 아득해질 때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마저 가야할 어떤 약속이 지친 일생을 부둥켜 안으리라/ 생각했었다 마치 서럽고 힘들었던 군복무 시절/ 제대만 하면 세상을 제패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내 욕망의 신록이 지금 때절어 쓸쓸한데/ 길 잘못 들수록 오히려 무모하게 빛났던 들끓음도/ 그만 한풀 꺾였는가, 미처 다 건너지 못한/ 저기 또 한 고비 신기루처럼 흔들리는 구릉이여/ 이제는 눈 앞의 고비보다 그 다음 줄줄이 늘어선/ 안 보이는 산맥도 가늠할 만큼은 나이 들었기에/ 내내 웃목이고 냉골인 마음 더욱 시려오누나/ 따숩게 덥혀야 할 장작 하나 없이 어떻게/ 저 북풍 뚫고 지나려느냐, 길이 막히면 길을 버리라고/ 어차피 잘못 든 길 아니더냐고 세상의 현자들이/ 혀를 빼물지만 나를 끌고가는 건 무슨 아집이 아니다/ 한때 명도와 채도 가장 높게 빛났던 잘못 든 길/ 더 이상 나를 철들게 하지 않겠지만/ 갈 데까지 가보려거든 잠시 눈물로 마음 덥혀도/ 누가 흉보지 않을 것이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비단길 3 / 강연호
멀리 가다 보면 길도 저를 포기하던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지고 드러눕는 길을/ 달래는 마음이 또한 기댈 곳 없어 비틀거릴 때/ 지도책에 힘겹게 매달려 있던 낯선 지명들도/ 철 지난 이파리마냥 우수수 떨어져내린다/ 國道 여기서 미련없이 끊겨 버스 지나가면/ 흙먼지 뽀얀 기다림이 자갈마저 튕겨 날리지만/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하기는 정류장이랬자/ 표지판 하나 없는 비포장도로에/ 누구라도 멈춰 서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삶의 뒷덜미를 낚아채며 날은 저물고/ 오늘 안으로 약속해 놓은 목적지도 없는데/ 막차 끊어지기 전에 타기는 타야 할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조급함이 물결 친다, 너 역시 가야 할/ 어떤 定處를 미리 새겨두었다는 걸까/ 보퉁이 짊어진 어둠이 먼저 다복솔로 기어/ 어디론가 부지런히 퍼져간다/ 네가 자는 잠이 언제나 새우잠이듯/ 내가 기다린 건 오랜 습관일 뿐/ 무엇을 기다렸는지조차 모를 세월 흐르도록/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서 이제 너도 가야 한다/ 기억한다면, 철든 짐승처럼 터벅터벅 걸어/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길을 너는 돌아와야 한다//
길 / 강연호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을 선이라 한다/ 최단거리일 때 직선이라 부른다/ 수학적 정의는 화두나 잠언과 닮아 있다/ 때로 법열을 느끼게도 한다/ 길이란 것도 말하자면/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이다/ 최단거리일 때 지름길이라 할 것이다/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동안/ 점들은 언제나 고통으로 갈리고/ 점들은 마냥 슬픔으로 꺾여 있다/ 수학적으로 볼 때 나는 지금/ 임의의 한 점 위에서 다른 점을 찾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처음의 제 몸을/ 가르고 꺾을 때마다 망설였을 점들의 고뇌와 번민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
저문 길 / 강연호
사람 기척에 놀라 그만 막다르게 입 다문 길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게 삼가 열며 걸었습니다/ 적소 따로 없어 세상의 집들 웅크린 채 잠들고/ 불 꺼진 창에서 풀풀 새어나온 어둠이/ 길을 끌어가는 포플라 행렬 흔들어 어지럽혔습니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생각은 숨가쁘게 달려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까지 데불고 오곤 하였습니다/ 혼자서는 작정한 만큼 가지 못할 산책이었을까요/ 귀찮아도 같이 걷자며 어깨를 치는 시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지난 시절은 힘겨웠으니/ 그리 알고 지내라고 이만 줄인다고/ 밑도 끝도 없는 엽서 한 장 우체통에 넣을 때/ 가슴 한 쪽이 먼저 둔탁한 소리로 떨어져내렸습니다/ 바라보면 저기 돌아가 지친 몸 뉘어야 할 거처가/ 자꾸만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습니다//
신발의 꿈 / 강연호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다/ 벗어놓은 게 아니라 버려진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 짝쯤 뒤집힐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그 역시 부르트도록 끌고 온 길이 있었을 것이다/ 걷거나 발을 구르면서/ 혹은 빈 깡통이나 돌멩이를 일없이 걷어차면서/ 끈을 당겨 조인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낡고 해어져 저렇게 버려지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내팽개치고 싶은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 그를 완전히 벗어 던졌지만/ 신발은 가지런히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누가 알 것인가, 신발이 언제나/ 맨발을 꿈꾸었다는 것을/ 아 맨발, 이라는 말의 순결을 꿈꾸었다는 것을//
봄 비 / 강연호
오늘은 종일 추억을 관람하였다 오래된 흑백 무성영화의 자막처럼 나른한 비가 내려 지난 겨울의 마른 버짐으로 남은 잔설을 녹이고 있었다 멀리 칡뿌리캐러 산을 오르는 아이들의 날궃이, 종이우산이 바람에 뒤집히면 거기 유년의 나도 섞여 있었다 미나리가 툭툭 살얼음 털고 일어서는 산비탈을 따라 높거나 낮은 봉분들의 생애가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게 역력했다 가는 비에 취한 아이들은 후미진 동굴도 그냥 지나쳐가고 가물가물 죽은 사람들이 한번더 죽는 봄비가 내려 오늘은 종일 추억을 관람하였다//
가을 엽서 / 강연호
훤칠하게 마른 빗줄기가/ 잠시 서성거렸습니다/ 바람 몇 다발 달려가다 넘어져/ 일제히 다시 구두끈을 조일 때/ 건널목 무단횡단하던 낙엽들/ 후이후이 휘파람 불었습니다/ 한 여자가 보도블럭 위에/ 또박또박 화장을 찍으며 지나가고/ 동전만 삼킨 커피자판기를/ 나는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빈 호주머니 속에서 아득하게/ 꼼지락거리는 불빛 불빛들/ 가을은 여전히 낯선 그리움이고/ 막차는 여태 오지 않는데/ 그대여, 얼마나 더 기다리고/ 얼마나 더 저물어야 합니까//
단풍 / 강연호
사랑은 맹목을 잃는 순간 사랑이 아니어서/ 붉은 잎 단풍 한 장이 가슴을 치네/ 그때 눈멀고 귀먹어/ 생각해보면 가슴이 제일 다치기 쉬운 곳이었지만/ 그래서 감추기 쉬운 곳이기도 했네// 차마 할 말이 있기는 있어/ 언젠가 가장 붉은 혓바닥을 내밀었으나/ 그 혀에 아무 고백도 올려놓지 못했네/ 다시 보면 붉은 손가락인 듯/ 서늘한 빗질을 전한 적도 있으나/ 그 손바닥에 아무 약속도 적어주지 않았네// 붉은 혀 붉은 손마다 뜨겁게 덴 자국이 있네/ 남몰래 다친 가슴에/ 쪼글쪼글 무말랭이 같은 서리가 앉네/ 감추면 결국 혼자 견뎌야 하는 법이지만/ 사랑은 맹목을 지나는 순간 깊어지는 것이어서// 지그시 어금니를 깨무는 십일월이네//
9월도 저녁이면 / 강연호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 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겨울의 빛 / 강연호
우듬지에 겨울 햇살이 이명처럼 매달려 있다/ 초록이 없으므로 햇살은 더이상 빛나지 않는다/ 나무는 제 발치께를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발로 쓸어모으는 기억은 누구에게나 허전한 법이다/ 한때 웅숭깊었던 그늘의 넓이를 가늠하며/ 나무는 체온계를 문 아이처럼 생각에 잠긴다/ 텅 빈 고요가 압박붕대에 묶인 허리춤을 더듬는다/ 동그랗게 말린 이파리 몇 장이 마저 떨어져/ 이미 탕진한 삶을 둔탁하게 덧칠한다/ 저 잎들이 움켜쥔 허공조차 내 몫이 아니었구나/ 바람도 없는데 나무는 진저리친다/ 나뭇잎 대신 이명의 햇살이 떨어져내린다/ 그늘이 있던 자리를 비춘다 배추 속 같이 환하다/ 나무를 지탱하는 힘은 이제 고요가 아니다//
첫 눈 / 강연호
죽은 자의 빈집에/ 산 자들이 다들 모여 왁자지껄 신이 난다//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평생 웃음이 없던 그가 영정 속에서 웃고 있다//첫눈이, 아 --- 첫눈이/ 조등을 적시며 밤새 내릴 기세다// 이 세상의 눈은 모두 첫눈인 듯 반갑고/ 이 세상의 사랑은 모두 첫사랑인 듯 그립고//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평생 울고 싶었던 그는 왜 죽자고 웃고 있는가//그럼 울어? 첫눈인데?/우아한 용서는 첫눈이 다 한다//정말 이 세상의 죽음은 모두 첫죽음인데/초상집의 소주는 왜 이리 늘 달디단가//산 자들은 저마다 살 궁리에 바빠 돌아가고/죽어 빈집을 나온 그는 노숙이 걱정이다//
12월 / 강연호
그 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마른 삭정이 긁어 모아 군불 지피며/ 잊으리라 매운 다짐도 함께 쓸어 넣었지만/ 불티 무시로 설마 설마 소리치며 튀어올랐다/ 동구 향한 봉창으로 유난히 풍설 심한 듯/ 소식 갑갑한 시선 흐려지기 몇 번/ 너에게 가는 길 진작 끊어지고 말았는데/ 애꿎은 아궁지만 들쑤시며 인편 기다렸다/ 내 저어한 젊은 날의 사랑/ 눈 내리면 어둠도 서두르고 추억도 마찬가지/ 멀리 지친 산 빛깔에 겨워 자불음 청하는/ 불빛 자락 흔들리며 술기운 오르던 허구한 날/ 잊어라 잊어라 이 숙맥아, 쥐어박듯이/ 그 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빈들 / 강연호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혼자 쌀을 안치고 국 덮히는 저녁이면/ 인간의 끼니가 얼마나 눈물겨운지 알게 됩니다/ 멀리 서툰 뜀박질을 연습하던 바람다발/ 귀 기울이면 어느새 봉창 틈새로 기어들어와/ 밥물 끓어 넘치듯 안타까운 생각들을 툭툭 끊어놓고/ 책상 위 쓰다만 편지를 먼저 읽고 갑니다/ 서둘러 저녁상 물려보아도 매양 채우지 못하는/ 끝인사 두어줄 남은 글귀가 영 신통치 않은 채/ 이미 입동 지난 가을 저녁의 이내 자욱이 깔려/ 엉긴 실꾸리 풀듯 등불 풀어야 합니다/ 그래요. 이런 날에는 외투 걸치고 골목길 빠져 나와/ 마을 앞자락 넓게 펼쳐진 빈들에 나가지 않으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웅크린 집들의 추위처럼 흔들리는 제 가슴 속/ 아 이곳이 어딥니까, 바로 빈들 아닙니까//
들판 / 강연호
들판은 잠들지 못한다/ 먼 도시의 살림이 토하는/ 불빛 같은 졸음 몰려올 때마다/ 흔들어 깨우는 풀잎들의 칭얼거림/ 들판은 잠들지 못한다/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쉴 새 없이 따귀 후려치는/ 바람의 억센 손바닥/ 그러나 얼얼한 뺨/ 부어터진 얼굴의 아픔보다/ 그 손바닥마다 박힌 못자국들 안쓰러워/ 들판은 영영 잠들지 못한다//
바람의 정거장 / 강연호
이 정거장에는 푯말과 이정표가 없고/ 레일은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저 바람의 뒤를 따를 뿐/ 뒤를 따랐던 흔적일 뿐이다/ 이 정거장에서 바람은 사방에서 팔방으로 분다/ 세상의 모든 방향에 눈길을 두면/ 결국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떠나든 도착이든 이 정거장은/ 영원인지 잠시인지 머문 바람의 다른 이름이다/ 이름이란, 일체의 수식을 무정차 통과시킨/ 앙금 아닌가, 문장과 구절과 행간과/ 행간의 여백마저, 여백의 침묵조차/ 스르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 뒤/ 겨우 남은 지시어나 구두점 같은 것/ 그나마 문지르면 깨끗이 지워질 거다/ 그러나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귀를 기우려라, 바람의 언어는 고요인가 소요인가/ 이 정거장은 지금/ 종착이자 시발이며 경유이기도 한데/ 다만 바람의 처분에 맡기려 대죄하고 있다//
환승역 / 강연호
지하철 환승역, 갈아타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기차든 비행기든 직장이든 혹은 여자든/ 갈아타는 것만큼 가슴 뛰는 일은 없다/ 환승역에는 어디나 미로가 있고 종말론이 있고 복권이 있다/ 삶은 문득 놓친 실끝 같은 거니까/ 삶은 언제나 끝장내고 싶은 거니까/ 삶은 늘 가려운 거니까/ 환승역에는 어디나 미로가 있고 종말론이 있고 복권이 있어서/ 사람들은 더러 이쪽 저쪽 헤매기도 하고/ 열차에 받혀 공중들리기도 하고/ 열심히 긁어대기도 한다/ 사람들은 날마다 환승역에 복작복작 모여들지만/ 갈아탄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섬 / 강연호
한 사나흘만 묵어가고 싶었다 더 이상은 곤란해 아름다움이 외로움으로 바뀌기 전에 뭍으로 나가야 해 그런 굴딱지 달라붙은 다짐들은 먼저 바다로 띄어 보내며 까닭없이 아득해지고 싶었다 그러면 어느 이름 모를 몇 장의 바다를 걷어낸 뒤 또 다른 곳에서 한 사나흘 묵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안개에 곱게 머리 헹궈낸 바람결 따라 뿌우우 뱃고동 순한 물길 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 떠돌수록 말없는 사내되어 제 그림자 스스로 밟을 무렵이면 애쓰지 않아도 잔잔하게 밀려 비로소 뭍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별 / 강연호
1// 오늘 하늘에는 소금쟁이들 가득했습니다/ 파문에 파문을 불러 꼼지락거리고 있었습니다/ 밤새워 걸어야 할 약속처럼/ 파문에서 파문으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소금쟁이들이 젖지 않듯/ 파문은 물에 젖지 않습니다/ 오늘 소금쟁이들 가득한 하늘은 고요했지만/ 그대는 텀벙텀벙 물에 젖어/ 내내 격렬했습니다// 2// 별들이 불러일으키는 고요와 격렬 속에서 그대는 잠들지 못합니다 고요는 하늘의 몫이고 격렬은 다시 잠들지 못하는 그대의 몫입니다 그대 아우성칠 때마다 별들은 자리 바꿔 앉으며 그대 어깨를 다독거려줍니다 그대가 파문이듯 하늘에도 파문은 일고 있지만 입술 깨물며 그대의 성화 견뎌내는 저 별들은 얼마나 완강한 고요입니까 젖지 않는 파문의 고요를 배우기까지 그대는 내내 젖어야 합니다//
저 별빛 / 강연호
그리움도 버릇이다 치통처럼 깨어나는 밤/ 욱신거리는 한밤중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지친다 더 이상 감추어둔 패가 없어/ 자리 털고 일어선 노름꾼처럼/ 막막히 오줌을 누면 내 삶도 이렇게 방뇨되어/ 어디론가 흘러갈 만큼만 흐를 것이다/ 흐르다 말라붙을 것이다 덕지덕지 얼룩진/ 세월이라는 옷섶 채 여미기도 전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구겨버릴 테지만/ 지금은 삼류 주간지에서도 쓰지 않는 말/ 넘지 못할 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너에게/ 가고 싶다 빨래집게로 꾹꾹 눌러놓은/ 어둠의 둘레 어디쯤 너는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마음은 늘 송사리떼처럼 몰려다니다가/ 문득 일행을 놓치고 하염없이 두리번거리는 것// 저 별빛 새벽까지 욱신거릴 것이다//
월식 / 강연호
오랜 세월 헤매 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 헌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
우리 슬픔의 물음표와 느낌표 / 강연호
1.// 나는 문을 연다 이미 열려진 문은/ 문이 아니다 자정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닫힌 문/ 비틀고 주리틀어도 열리지 않는 문을 열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나는 똑똑히 본다// 나는 안다 내가 안간힘쓰며 밀어붙이는 문 반대편에/ 네가 있다는 것을, 너도 몸부림치며 문 연다는 것을/ 우리가 서로 같은 힘으로 문 밀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모른다 도대체 너와 나/ 누가 갇혀 있는가를//
2.// 착한 영혼들이 잠자는 지도를 펼치면/ 먼 대륙으로부터 불어와 흉몽 키우는/ 유행성 인플루엔자의 바람이 한창이다/ 머리맡에 놓인 우윳빛 두통약과 텅 빈 가계부// 도무지 탄불 꺼져 쩍쩍 얼어터진/ 구들장을 오히려 덥혀주는 저 식솔들의 가난한 등뼈가/ 아슬아슬한데 잠자코 있으라며 입 틀어막는/ 새로 두점, 새로 세점의 시계추// 웅크린 이력들을 싣고/ 비장한 꿈을 달리는 밤기차의 굉음이 드세다//
3.// 꿈의 갈피에 곱게 끼워둔 채/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색바랜 고독은 더 이상 고독이 아니라/ 고름이다 세월의 가랑잎 날려/ 몇 개는 발밑에 으깨지고 더러는 종종걸음으로/ 막차를 타기 위해 흩어지는데/ 늦도록 공원 의자에 앉아 고름을 짜는 자들이여// 너는 말했지, 꿈을 갖고 산다는 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냐고/ 얼결에 맞장구치던 나는 정말 어이없어 웃었지만// 아쉬울 것 없다는 듯 예각 찬란하게/ 유유한 경멸을 입꼬리에 흘리는 별똥별 두엇/ 놓치지 않을 테다 가령 네가 가볍게 나를 칠 때마다/ 나는 세게 아팠다는 것을//
4.// 코피처럼 터지는 어둠 속으로/ 한 사내가 걸어간다 주민등록증과/ 사무실의 출근부와 입사원서를 빛내주던 학력과/ 몇 장의 자격증과 생년월일과 연대보증인의 서명으로/ 확실한 신원을 가진 사내가 불확실한 어둠 속으로/ 어둠의 긴 담을 끼고 걸어간다// 어둠은 그가 어둡다고 느끼기 이전부터/ 이미 어둠이었을까 중얼거리는/ 순간, 사내의 뒷덜미를 낚아채며/ 서치라이트가 급히 정지명령을 내린다// 그 불빛에 얼핏 금이 간/ 뒷골목 春畵들이 음탕하게 웃는다//
5.// 오후 내내 채광창을 통해 쏟아지던 햇살을/ 비수처럼, 아니 비애처럼 가슴에 품고/ 내가 내 어둠의 막사를 탈영하여 떠도는 거리/ 自淨力 잃은 선거구호만 난무하는 거리에/ 공사판 하루 삶의 집대성인 전표 한 장이/ 찢겨 쓰러지고 붉은 줄로 교정된/ 꿈을 꾸며 간직한 몇 줌의 햇살은/ 어둠에 마구 겁탈당하면서도 킬킬거렸다/ 죽은 活字 뒹구는 석간의 심인광고에서/ 즐겁게 읽은 모두 용서할테니 돌아오라/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휘파람 불며/ 정작 내 돌아갈 곳은 없어 夢遊하는 거리/ 눕고 싶어 다만 눕고 싶어/ 누울 자리 고르면 그곳은 여지없는 棺 속/ 생전에 故人의 삶을 추모하며/ 노란 국화 한 송이씩 던지고 총총히 사라지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 얼굴들//
6.// 마른 장작비가 내렸다 후려패듯이/ 그때마다 꽃잎들은 자지러지며 기도했다 주여/ 이곳의 시험은 너무 어렵습니다 거두어 가소서/ 여린 종아리를 관능적으로 드러낸 채/ 매맞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낡은 교회당 돌층계 위에 생각이 저물어/ 이끼 피듯 우리가 늙어갈 때// 최후의 만찬을 치르고 떠난 메시아는/ 부활을 잊는다 손톱 밑에 까맣게 세월이 낀다//
7.// 오늘 우리를 연꽃으로 피우려 스스로 진흙탕에 뒹구시는// 오늘 우리를 영원케 하려 스스로 순간인 듯 머무시는// 오늘 우리를 곧게 키우려 스스로 곁가지되어 잘리시는// 오늘 우리를 떠나 보내려 스스로 배경으로 손 흔드시는// 어머니, 저 술 안 취했어요 당신은 아직도 처녀인데/ 처녀처럼 예쁜데, 대처 떠돌수록 자꾸 눈에 밟히는데/ 밟히면 마구 짓밟는데, 저는 아직 성공 못했는데// 술국 끓이랴? 어머니는 등 두드려주며 다만 혀 차실 뿐/ 토사물 속에 국수가락처럼 불어터진 새벽//
8.// 풀꽃들을 치장하는 이슬 몇 방울 기다려/ 긴 밤을 떨며 견딘 곤충들의 생애는/행복했을 것이다 내일을 날기 위해/ 오늘을 잠자는 고치들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면/ 알 것이다 겨드랑이 밑에서 서서히 돋아나는/ 날개의 희미한 비비적거림/ 아, 그런 황홀한 통증은 어디에나 있다// 서리 맞은 낙엽 뒤집어보면/ 거기 얼마나 따뜻한 지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지/ 솟아올라 유리창 뿌옇게 흐려놓는지/ 허나 유리창 바깥의 세상은 과연/ 따뜻하게 밝아오고 있었을까? 있었겠지!// 우리는 인정한다 고개는 좌우로 완강히 흔들면서//
음악 / 강연호
그때 음악과 시가 있는 한/ 영원한 청춘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우리가 쏘다녔던/ 골목과 천변은 빛났던가/ 아니 한 장의 나뭇잎조차 빛나지 않았다/ 우리가 빛이었으므로// 가슴 근원에 잡히는 멍울은/ 울음이 아니라 음악이라고 생각했었다/ 하기는 울음이 큰 음악 아닌 적 있었던가/ 다만 슬프지도 격렬하지도 않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썼고/ 그래서 한 번도 청춘인 적 없었다/ 진작부터 늙은 노을이었다/ 지나가는 말로 묻는 안부처럼/ 무심한 듯 갑자기 가슴을 치는 것/ 음악이란 그런 것인가//
냉장고 / 강연호
누군가 들판 농수로에 내다버린 냉장고/ 여름 다 가도록 그대로 있다/ 지난봄과 달라진 건 이제 문을 활짝 열어/ 제 속을 온통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비탈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제법 선정적이다/ 다들 지나치면서 얼굴을 찌푸리지만 다만 그뿐/ 치우라고 누가 신고 좀 하지 다만 그뿐/ 민원 접수가 없으니 일 만들기 싫은 관청에서도/ 다만 그뿐, 계절만 또 바뀌나 보다/ 저렇게 문 열어놓으면 음식들 다 상할 텐데/ 무엇보다 전기세 만만찮을 텐데/ 사람들이 혀 빼무는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장고는 웅웅웅 밤낮으로 돌아간다/ 들판을 건너가는 바람이 모터 소리를/ 이쪽 아파트 단지까지 실어 나른다/ 바람은 빨래 빨래는 집게 집게는 입 입은 침묵/ 말잇기 놀이에도 심심한 냉장고/ 하늘에 풀칠하다 시들해진 냉장고/ 웅웅웅 들판을 두들기다 지친 냉장고/ 그의 골똘한 생각은 사실이 이렇다/ 전기 코드라도 누가 빼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백야 / 강연호
누구나 그렇듯이/ 더러 잠들고 싶지 않은 밤은 있다/ 하얗게 지새운다는 말뜻 그대로/ 창틀에 턱을 괸 채 골똘해지고 싶은 밤은 있다/ 멀리 나간 마음은 퉁퉁 불어터져/ 어둠 속에 익사하는데 우수수/ 별들은 쏟아져 손톱 밑에서 으깨지는데/ 미처 걷지 못한 밤빨래는/ 언제나 죽음처럼 펄럭이는데/ 진저리치는 전신주의 늑골마다/ 바람은 사무치게 훑어가는데/ 누구나 그렇듯이/ 비듬처럼 쏟아지는 잠꼬대를 또박또박/ 받아적고 싶은 밤은 있다/ 한번 잠들면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는/ 그런 밤은 있다//
벌목 / 강연호
나무들 울면서 숲을 떠났다// 둥지는 구겨지고 새들은 몸져누웠다/ 철거된 살림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음산한 안개가 천천히 수의를 들고 다가왔다/ 즉음은 도처에서 도끼날을 번득이고 그리운 독재 그리운 페퍼포그 그리운 함성/ 오오 그리운 혁명 다 지난 뒤/ 나무들 울면서 돌아왔다/ 모두 빈손이었다// 이제, 숲에는 벌목당한 청춘들이/ 너나할것없이 심심해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기억을 뜯어먹으며 산다//
빈 가방 / 강연호
마지막으로 빈 가방을 버리기 전에 그는 무엇을 버렸을까/ 그가 버린 게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빈 가방을 버리기 전에 먼저 버린 것이 있을 것이다/ 증언에 의하면 언제나 가득 차고 무거웠던 그의 가방은/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씩 비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버린 것들 중에는/ 물론 그가 버리고 싶어서 버린 것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버리고 싶지 않아도 버려야만 하는 것이 있고/ 삶이란 또한 꼼꼼히 챙겨도 조금씩 새어나가게 마련이므로/ 불룩하던 그의 가방은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방이 가벼워질수록 그의 어깨는/ 웬일인지 자꾸 쳐지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마침내 더이상 버릴 것 없어 가방이 텅 비었을 때/ 그는 결국 마지막으로 빈 가방을 버렸을 것이다/ 아니 지금 남은 것은 빈 가방이고 그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빈 가방 대신 그 자신을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식당에서 / 강연호
식당에서 백반을 주문하고 신문을 펼치는데/ 탁자 위 누군가 떨구어놓은 김치 국물 한 방울이/ 그리고 거기 머뭇머뭇 다가서는 파리 한 마리가/ 음식이 나올 때까지의 시간을 죽이는 내 시선을 자극한다/ 문득 인간의 생애란 게/ 삼류 멜로물이거나 위대한 서사거나/ 미처 닦아내지 못한 저 김치 국물 한 방울처럼 치민다/ 또는 그걸 먹어보겠다고 내 눈치를 살피는 파리 같기도 하다/ 나는 펼쳐든 신문으로 김치 국물을 닦아낼 수도 있고/ 척척 접어 파리를 때려눕힐 수도 있지만/ 홀연 허기마저 잊고 녀석과의 눈싸움에 몰입해보기로 한다/ 그 긴장의 거리가 나를 현현시킨다//
바닥 / 강연호
그는 지금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더는 밀려 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이제 박차고 일어설 일만 남은 것 같다/ 한밤중에 깨어나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면/ 들끓는 세상이 잠시 식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갈증은 그런 게 아니다/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가/ 여기가 바로 밑바닥이구나 싶을 때/ 바닥은 다시 천길 만길의 굴욕을 들이민다는 것을/ 굴욕은 굴욕답게 캄캄하게 더듬어 온다는 것을/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어보지만/ 스스로를 달래기가 그렇게 쉬운 게 정말 아니다/ 그는 바닥의 실체에 대해/ 오래 전부터 골똘히 생각해온 듯하다/ 그렇다고 문제의 본질에 가까워진 것은 아니지만/ 바닥이란 무엇인가/ 규정하자면/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이다/ 물론 그게 편안해지면/ 진짜 바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술과의 화해 / 강연호
나는 요즘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나는 한때/ 어떤 적의가 나를 키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크기 위해 부지런히/ 싸울 상대를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 그때는 애인조차 원수 삼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솔직히 말해서 먹고 살만해지니까/ 원수 삼던 세상의 졸렬한 인간들이 우스워지고/ 더러 측은해지기도 하면서/ 나는 화해했다/ 너그러이 용서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더 크고 싶었으므로/ 대신 술이라도 원수 삼기로 했었다/ 요컨대 애들은 싸워야 큰다니까// 내가 이를 갈면서// 원수의 술을 마시고 씹고 토해내는 동안/ 세상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었고/ 책들은 늘어나거나 불태워졌으며/ 머리는 텅 비고 시는 시시해지고/ 어느 볼장 다 본,/ 고요하고 섬세한 새벽/ 나는 결국 술과도 화해해야 했다/ 이제는 더 크고 싶지 않은 나를/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나는 득도한 것일까/ 화해, 나는 용서의 다른 표현이라고 강변하지만/ 비겁한 타협이라고 굴복이라고/ 개량주의라고 몰아 붙여도 할 수 없다/ 확실히 나는 극우도 극좌도 아닌 것이다// 적이 없는 생애는 쓸쓸히 시들어간다/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나도 왕년에는 / 강연호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엔 사내들 몇이서 밥 대신 소주를 들이키며/ 저마다의 왕년을 안주 삼고 있었습니다/ 나도 왕년에는 소주에 밥 말아먹던 시절 있었나요/ 사내들의 뒷덜미를 움켜쥔 그림자 흔들리고/ 불빛에 베인 눈시울은 붉다/ 못해 황량했습니다/ 쓰디쓴 왕년을 입 안에 털어넣으며/ 사내들은 헐거운 삶을 더욱 풀어놓았구요/ 내 늦은 저녁도 소주처럼 쓰고 차가웠습니다/ 쓰디쓴 밥알들을 입 안에 털어넣고/ 왕년인 듯 오래오래 씹고 또 씹었습니다/ 덧난 눈시울 쉽게 아물지 않았습니다//
멜로드라마 / 강연호
멜로드라마는 눈물을 쥐어짠다/ 멜로드라마는 손수건을 적신다// 비웃지 마라/ 멜로드라마가 슬프다면/ 그건 우리 삶이 슬프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가 통속적이라면/ 그건 우리 삶이 통속적이기 때문이다// 보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만이/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있지 않느냐/ 적어도 그들만큼은 겪어봐야 안다/ 삶을 연습하고 싶다면/ 우리는 멜로드라마에 기댈 수밖에 없다// 거룩한 멜로드라마/ 위대한 멜로드라마//
표정 / 강연호
저 돼지머리가 웃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고삿상 위에서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을/ 인간의 미소로, 가령 염화시중의 미소로 잴 일 아니다/ 지폐 몇 장 물렸다고 웃을 그도 아니다/ 그렇게 보는 것은 그의 굴욕을 부채질할 뿐이다/ 누군가 멱을 따고 동강난 머리통을 푹푹 삶아내는 동안/ 그 역시 한숨을 푹푹 내쉬었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큰 콧구멍이 그래서 더 벌름거렸을 것이다/ 누군들 고삿고기로 마감하는 생이고 싶겠는가/ 그는 이제 꿀꿀거리지도 꽥꽥거리지도 않지만/ 고요와 안식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지금 생각에 잠긴 것이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저들이 긍휼히 여길 것인가/ 그의 참담함은 이래저래 깊다/ 어째야 하나 내가 아무리 울고불고 찡그리고 애원해도/ 저들은 내가 여전히 웃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지들은 킥킥 웃는데/ 저런 개돼지만도 못한.../ 욕을 하다 말고 돼지머리는 거의 울상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삼겹이나 되는 깊은 속에 있다/ 그러나 굴욕을 견디는 건 온전히 그의 몫이다//
살다보면 비가 오는 날도 있다 / 강연호
솥뚜껑 위의 삼겹살이 지글거린다고 해서/ 생의 갈증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찍 취한 사람들은 여전히 호기롭다/ 그들도 박박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남루나 불우를 그저 견디겠다는 듯/ 반쯤 남은 술잔은 건너편의/ 한가로운 젓가락질을 우두커니 바라볼 뿐/ 이제 출렁거리지도 기울어지지도 않는다/ 참다 참다 그예 저질러버린 생이 있다는 듯/ 창밖으로 지그시 내리는 빗줄기/ 빨래는 오래도록 마르지 않고/ 쌀알을 펼쳐본들 점괘는 눅눅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마/ 이 밤이 지나가면 냉장고의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야 할 새벽이 온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어쩌면 이 술잔은/ 여기 이 생에 건네질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삼겹살을 뒤집어봐야 달라질 것 없고/ 희망은 늘 실낱같지만/ 오늘의 운세는 언제나 재기발랄 명쾌하다/ 62년생 범띠, 살다 보면 비가 오는 날도 있다//
허구한 날 지나간 날 / 강연호
아무도 오지 않는다/ 허구한 날 내 마음의 공터에는/ 혼자 놀다 심심해진 햇살/ 곰곰한 생각에 지쳐 그늘 키우고/ 기다리는 일 많으면 사람 버리기 십상이라며/ 귓바퀴에 잠시 머물던 바람결 총총히 사라진다.// 저 햇살 저 바람도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는가/ 고개 갸우뚱하면 침착하게 낙법을 연습하던 나뭇잎 몇 장/ 내일 또 오마는 약속처럼 어깨에 얹힌다// 삶이란 이런 거다/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널렸다 걷히면서/ 다시 더러워질 결심을 바투 여미는 흰 빨래의 반짝임 같은// 세월아, 갈기갈기 찢기고 늘어진/ 하품에 지쳐 나는 너에게 줄 그리움이 없는데/ 너는 손 벌리고 자꾸만 손 벌리고/ 사진틀 속에 흑백으로 갇힌 날들이 파닥거린다// 더러 지나간 날들이 예쁘게 이마 짚어주지만/ 아무리 기억의 초인종을 신나게 눌러도/ 그때, 그 들길, 첫 입맞춤/ 풀잎 풀잎 풀잎, 서걱서걱 서투르다며 흉보던 날들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 텅 빈 우편함에는 수취인 불명의 먼지만 쌓여갈 뿐// 내 한 번도 같이 놀자고 한 적 없는/ 세월아, 내가 언제 숨바꼭질 하자 했니?/ 그것도 모자라서 세월아/ 왜 나만 술래 되어야 하니?//
건강한 슬픔 / 강연호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나나 그녀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꽃무늬 벽지 여인숙 / 강연호
어느 여인숙인지/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꽃무늬 벽지를 만났다/ 벽 건너에서 두런두런/ 씻는 소리/ 울음 소리/ 신음 소리/ 도배지 꽃무늬에 얹혀/ 얼룩을 만들었다/ 아, 파도 여인숙이랬다/ 파도조차 숨죽여 들었다/ 세상의 모든 꽃무늬 벽지는/ 쑥스럽고/ 애틋하고/ 서글프다/ 혹은/ 서글프고 애틋하고 쑥스럽다/ 도배지의 내력을 따라가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어느 여인숙인들 어떠랴/ 여인숙에서 여인을 떠올리던 시절이/ 여인숙에서 인숙이를 떠울리던 시절이/ 있었더랬다/ 이제는 아무도 흥정하지 않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빨랫줄에 내걸린/ 꽃무늬 팬티 같은/ 꽃무늬 벽지/ 여인숙//
강 / 강연호
저 강물/ 내가 반쯤 건넜다고 생각했지요/ 저 강물/ 그대도 반쯤 건넜다고 생각했나요/ 그대가 반 내가 반 건너면/ 우리 강물 한가운데서 만나/ 더 큰 강물 되어 흐를 수도 있었으련만/ 돌아보면 저 강물/ 우리 다만 자리 바꾸었을 뿐/ 이쪽과 저쪽 엇갈린 채 저 강물/ 까마득히 손짓할 뿐//
세월의 강물 / 강연호
내 지도 위의 눈물선을 따라 강은 흘렀네/ 푸른 실핏줄 촘촘하게 얽힌 저 강물/ 건너편엔 연좌하고 나를 불러 손짓하는 풀꽃들/ 죄다 아름답지만 저 강도 어제 건넌 그 강 같아서/ 산을 넘어뜨리는 힘으로 나 고개 떨구어야 했네/ 세상은 넓고 넓어서 내 부르는 노래는/ 메아리를 이루어 화답하지 못했네 지나간 달력에/ 또렷이 새긴 동그라미 두어 개는 무슨 날짜를/ 기억하려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네/ 오 날짜의 파문 물결의 파문을 일으키며 세월은 가고/ 세월은 가서 세월은 가나 세월은 가도 세월은 가지만/ 때로 삶은 시시했고 그래서 나는 시를 썼고 때로/ 시도 시시했지만 시시한 시를 쓰다가 밤을 새운 새벽이면/ 아무에게나 전화하고 싶었고 아무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네 전화번호부책만큼 두꺼운 추억은/ 그 새벽 어디에도 깨어 있지 않았네/ 추억은 말하자면 무수히 몸에 달라붙은/ 도깨비풀 같은 것이었는데 추억은 말하자면/ 은행에서 잠자는 몇백 원쯤 남은 휴면계좌 같은 것이었는데/ 밤 기차가 천천히 기적을 끌고 가서/ 떼어내고 떼어내도 남는 이명처럼 나 너덜거렸네/ 오오 이 악물어 견디면 실핏줄 촘촘한 저 강물/ 죄다 터져 넘치겠네 내 지도 위를 범람하겠네///
물웅덩이 / 강연호
바닷가 모래밭에 물웅덩이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풍경이 참 골똘해서 멀찌감치 돌아가고 싶었습니다만/ 물웅덩이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제 가장자리 한쪽을 허물어뜨렸습니다/ 모래알들이 스르르 물웅덩이 속으로 꺼져들었습니다/ 땅이 꺼지는 한숨이란 저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또 한참 지나 물웅덩이는 제 다른 한쪽을/ 고요한 연기처럼 다시 허물어뜨렸습니다/ 물웅덩이는 그게 저 자신을 넓히는 줄 알지만/ 그래서 마침내 먼 바다 어디론가 흘러가고도 싶겠지만/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모래알들에/ 제 골똘한 깊이가 메워지는 것도 아는 걸까요// 그대 향한 마음이 나에게도/ 바닷가 모래밭의 물웅덩이처럼 고여 있습니다/ 나도 땅이 꺼지는 한숨으로/ 내 가장자리 한쪽을 허물어 그대를 넘보고 싶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대를 향한 마음이 스스로를 깎아/ 참으로 허무하게 허물어지면서/ 웅숭깊던 속내 역시 차츰 메워질 것도 압니다// 어쩌면 그대를 향한 마음이란/ 이렇게 저를 허물어 또 저를 메우는 것일 겁니다/ 이렇게 고여 있는 마음으로만 그대에게 흘러가는 것일 겁니다//
그늘 / 강연호
뙤약볕 아래 대운동장이 칭얼거리고 있었다/ 너무 더우면 저도 못 견디나부다 언제쯤 운동장은/ 제 홀로 그늘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철이 들까/ 그때까지 한가운데 서서 내가 그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럼 내 그늘은?// 내 그늘은 지금 부재중이야//
사람의 그늘 / 강연호
사람의 그늘을 만난 지 오래다/ 어디 그늘이 없었을까, 눈 흐려진 탓이다/ 나이 들면 자꾸 멀리 보게 마련이고/ 멀리 건너다보는 시력으로는/ 사람의 그늘도 흐리게 뭉개지는 법// 그늘을 헤아리는 심사는/ 어느 늙은 나뭇가지 사이로/ 한때 무성했던 세월이 구름처럼/ 뭉텅뭉텅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바람 가는 방향으로 귀를 연 이파리들의/ 여름에는 키가 크고 겨울에는 늘어졌을/ 한 시절의 내력을 가늠하는 일/ 우듬지 여윈 손가락이 바람을 쓸어 넘기듯/ 아, 나도 언젠가 저런 빗질을 받는 적이 있었더랬는데/ 덜 마른빨래처럼 고개 수그리고/ 머리를 맡겨 생각에 잠기는 일// 지금은 없는 누군가의 서늘했던 그늘/ 그 어두웠던 눈 밑으로/ 문득 흔들렸을, 잠깐 반짝였을/ 불빛인지 물빛인지를 놓치지 않았으나/ 그저 놓치지 않았을 뿐/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애써 멀리 외면했던/ 그늘의 길이를, 마침내는 깊이를/ 이제 와 곰곰 되짚는 일이다// 그러나 눈 흐려진 지 오래/ 한 뼘 두 뼘 겨우 더듬을 뿐/ 사람의 그늘을 재어본 지 오래다//
밥의 그늘 / 강연호
지하보도 만물상/ 구석에서 늙은 사내/ 밥을 먹는다/ 늦은 저녁은 시리다// 찬밥에 온도가 있나/ 밥의 온도야말로/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 만물상답게/ 없는 것 없어서/ 백열전구는 휘황찬란하고/ 김치국물 한 방울에 치미는 식욕/ 사람들은 묵묵 지나간다// 밤의 그늘/ 당신의 그늘/ 당신, 이라는 그늘// 지상의 방 한 칸을 위해/ 지하보도 쪽방/ 만물상을 차려 평생이란다/ 없는 것 없어도/ 밥이 만물이란다// 사내의 입 속/ 그늘이 깊다//
오후의 그늘 / 강연호
오후의 그늘 아래 당신이 앉고/ 당신의 그늘에 기대 나는 누웠지// 물 고인 돌확에 부레옥잠 떠다니듯/ 그늘에 그늘이 깊어 잠들기 좋았으나/ 그보다는 나는/ 영원, 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는데// 자리 바꿔 앉기 놀이나 하자는 듯/ 그늘은 심심해서/ 시샘해서/ 조금씩 자리를 바꿔 앉네// 나뭇잎 한 장이 눈을 가리고/ 바람인지 햇살인지/ 영원이란, 영원히 순간이지/ 술래마냥 속삭이네// 오후의 그늘은 문득 늙고/ 당신의 그늘은 자취가 없네/ 물 고인 돌확에 부레옥잠 떠다니듯/ 나는 일어나 빙빙 도네// 누울 자리가 없네/ 앉을 자리조차 없네//
틈 / 강연호
그래요 옷깃만 스쳤던 거예요/ 이 난데없는 격렬함은 말하자면/ 일종의 나비 효과 같은 것이겠지요/ 나비 한 마리의 팔랑거림이/ 태풍이 될 수도 있다지요/ 그 역도 성립하겠지요/ 곧 가라앉을 평지풍파 앞에서/ 나는 수선을 피운 적도/ 빈틈을 내보인 적도 없는데/ 어느 새 내 속에, 당신 참 날렵하군요/ 틈새 공략이 성공했다고요/ 하지만 그대는 다만 무례하게 비집고 들어온/ 잠시의 파문일 뿐/ 그래요 우리는 옷깃만 스쳤던 거랍니다//
예의 / 강연호
아파트 놀이터 옆 그늘에/ 중3쯤 되었을까 여학생 둘이 담배를 핀다/ 피다 말고 나를 본다/ 뭘 쳐다보냐는 듯 꼬나본다/ 내가 먼저 쳐다본 게 사실이므로/ 점잖은 체면에 어긋나므로/ 그쯤 해서 눈을 돌려 줘야 하는데/ 나는 어디 한번 빤히 마주 쳐다보기로 한다/ 그저 내 중3이 아득해졌을 뿐인데/ 아파트 단지가 온통 고요해졌을 뿐인데/ 이윽고 여학생들이 눈길을 돌린다/ 시답잖다는 듯 손끝으로/ 담뱃불 익숙하게 튕겨 내고 자리를 뜬다/ 나잇살이나 먹은 대접을 받아서/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파트는 무사하니 되었다/ 엉뚱하게 관리인 흉내를 낸다/ 여학생들은 어느새 자취가 없다/ 둘이 나란히 손잡고/ 방과 후 야자로 돌아갔을까/ 컴퓨터 게임방에 잠입했을까/ 설마 아파트 꼭대기로 올라가/ 오래도록 서 있을까/ 놀이터 모래밭에 아직 초롱초롱한 불씨가/ 문득 글썽하게 춥다//
검은 밤의 독서 / 강연호
그는 두꺼운 책을 읽는다/ 검은 밤 흰 종이/ 검은 글자 흰 여백/ 두꺼운 책은 간단히 정의된다// 그는 두꺼운 책을 읽지만/ 소리내어 읽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두꺼운 책 속에는/ 두꺼운 책을 소리내어 읽는 것은/ 두꺼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두꺼운 책은 앙다문 입술 같다/ 앙다문 입술에서 소리는 나올 수 없다/ 나올 수 없으므로 그가 책 속으로 들어간다/ 쿵, 두꺼운 책의 표지가 닫힌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다// 검은 밤 흰 종이/ 검은 글자 흰 여백/ 두꺼운 책은 앙다문 입술답게 조용하다//
당신의 문체 / 강연호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당신/ 당신에 대한 기억은 귀로 시작되더군/ 당신은 서술어를 잠시 머뭇거리는 버릇이 있고/ 당신은 부정인지 긍정인지 모를 표정을 자주 짓고/ 그럴 때 세상은 비스듬히 깊어지는 것이어서/ 나는 내 속내를 털어놓는 줄도 모르고 다 털어놓아야 했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먼 길을 가기로 작정했다는 것이지요/ 이쯤해서는 내 입술이 당신의 귀에 살짝 닿기도 했으라나/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누가 한 말은 탄식일까요 비명일까요/ 완성이었다면 더 살고 싶은 마음이 도대체 생겼겠어요?/ 유행가 가사에 인생을 실어 나르기 시작하면서/ 이윽고 줄줄 나를 흘리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의 부끄러움을/ 스스로 못 이겨 조금씩 말이 늘어지고 서술어를 잠시/ 머뭇거린 것인데, 아 이건 당신의 버릇인데/ 당신의 버릇조차 닮아 가는 나를 들켜 얼굴이 벌게질 때/ 당신은 부정인지 긍정인지 모를 그 표정은 어딘가 참 익숙하다며/ 누군가와 많이 닮았다며 쫑긋 귀 기울여/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얘기에 더 바싹 다가앉은 것인데/ 말하자면 내가 기어이 가장 먼 길을 가기로 작정하게 만든 것인데/ 참 오래고 오래된 얘기인데 당신의 귀는/ 참 오래고 오래된 얘기인데 당신의 문체는//
언어의 꿈은 바깥에 있다 / 강연호
혀끝에 머물던 격렬함이 사라지자/ 그는 무덤처럼 입을 다문다// 그의 침묵 속에는/ 그가 겨누었던 대상을 향해/ 파르르 떨며 날아간/ 그러나 결코 적중하지 못한 흔적이/ 우울한 갈증에 섞이고 있다// 그의 꿈은 바깥을 향하지만/ 한때 그를 긴장시켰던/ 오금 저리고 팔뚝마다 소름 돋았던/ 몸밖의 세상은 여전히 까마득하다// 거미줄에 걸린 거미처럼/ 축축한 사유의 달팽이처럼/ 제 몸이 바로 존재의 짐이라는 것// 모든 언어에는/ 제 몸을 쥐어뜯은 상처가 있다//
나무와 새 / 강연호
허름한 뒷골목에 나무 한 그루/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더 자라지는 않구요/ 거리를 떠돌던 많은 새들이/ 다녀갔습니다 아예 둥지를 틀지는 않구요// 어느 날이라고 다를까요 나무는 언제나/ 머리 곱게 빗고 두 팔 흔들어/ 자주 지치는 도시의 새들을/ 불러들였습니다 놀다 가세요 쉬어 가세요/ 목이 쉬도록 불러들였습니다// 오래 머물지는 않으면서 많은 새들이/ 놀다 가거나 쉬어 갔지만/ 그리고 그때마다 나무는 놀거나 쉬지도/ 못하고 늘 바빴지만// 허름한 뒷골목에 나무 한 그루/ 말라죽어 있었습니다 세월은 순간이니까요/ 무심한 새들은 또 어디쯤에서/ 놀거나 쉬고 싶었습니다 다시 날아 가려구요//
개미 / 강연호
절구통만한 먹이를 문 개미 한 마리/ 발 밑으로 위태롭게 지나간다 저 미물/ 잠시 충동적인 살의가 내 발꿈치에 머문다/ 하지만 일용할 양식 외에는 눈길 주지 않는/ 저 삶의 절실한 몰두/ 절구통이 내 눈에는 좀쌀 한 톨이듯/ 한 뼘의 거리가 그에게는 이미 천산북로이므로/ 그는 지금 없는 길을 새로 내는게 아니다/ 누가 과연 미물인가 물음도 없이/ 그저 타박타박 화엄 세상을 건너갈 뿐이다/ 몸 자체가 경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노상 엎드려 기어다니겠는가/ 직립한다고 으스대는 인간만 빼고/ 곤충들 짐승들 물고기들/ 모두 오체투지의 생애를 살다 가는 것이다// 그 경배를 짓밟지 마라//
고독의 기원 / 강연호
지금 그의 어깨는 고요하지만/ 그가 잠들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를 둘러싼 입자들의 미세한 파동은/ 어딘지 경건한 데가 있다/ 귀 기울이면 낮게 살얼음이 잡힌다/ 허나 위로 받고 싶지 않아서 그는 돌아눕는다/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만나는 법/ 눈물밖에는 없다//
고요 / 강연호
알전구의 필라멘트가/ 탁 끊어질 때의 잔광, 기억하는지/ 오늘 하늘의 별들은 잔광으로만 남는다/ 모두 우물을 안고 잠들었나보다/ 그래서 더 깊어 보인다/ 깊은 우물은 함부로 철벅이지 않는다/ 잔광의 고요가 깊을 때/ 우리 옷깃만 스쳤다고는 말하지 말자//
마음의 서랍 / 강연호
이제는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자신했던/ 아픈 기억들 바늘처럼 찔러올 때/ 무수히 찔리면서 바늘귀에 매인 실오라기 따라가면/ 보인다 입술 다문 마음의 서랍/ 허나 지금까지 엎지르고 퍼담은 세월 적지 않아서/ 손잡이는 귀가 빠지고 깊게 패인 흠집마다 어둠/ 고여 있을 뿐 쉽게 열리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뻑뻑한 더께 쌓여 있는 걸까/ 마음의 서랍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힘에 겨워/ 나는 어쩔 줄 모른다 거기 뒤죽박죽의 또 한 세상/ 열면 잊혀진 시절 고스란히 살고 있는지/ 가늠하는 동안 어디에선가 계속 전화벨이 울려/ 아무도 수신하지 않는 그리움을 전송하는 소리 적박하다/ 나야, 외출했나보구나, 그냥/ 걸어봤어, 사는 게 도무지 강을 건너는 기분이야,/ 하염없이 되돌아오는 신호음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듯/ 우두커니 서서 나는 마냥 낯설기만 한/ 마음의 서랍 끝내 열어보지 못한다/ 아무래도 외부인 출입금지의 팻말 걸린 문 앞에/ 서성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는/ 대낮에도 붉은 등 켜고 앉아 화투패 돌리며/ 쉬어가라고 가끔 고개 돌려 유혹하는 여자들의 거리에/ 와 있는 것만 같아 안절부절이다 순정만화처럼/ 고만고만한 일에 울고 웃던 날들은 이미 강 건너/ 어디 먼 대양에라도 떠다니는지/ 오늘 풍랑 심하게 일어 마음의 서랍 기우뚱거리면/ 멀미 어지러워 나도 쓸쓸해진다 언젠가/ 뭘 그렇게 감춘 것 많냐고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고/ 나조차 열어보지 못한 마음의 서랍/ 우격다짐으로 열어본 사람들 기겁하여 도망치며 혀차던// 마음의 서랍은 서럽다//
사진 / 강연호
언제였을까 공원에서 한 컷/ 나뭇잎이 나뭇잎끼리 모여 뒹굴 듯/ 그늘은 그늘끼리 모여 뒹구는 속에서/ 누군가 찍어 놓은 사진 한 장/ 내 옆에서 웃고 있거나 눈을 감거나/ 콧등을 찡그린 사람들이 영 낯설다/ 언제 누가 불러 이 공원에 가서/ 오후의 한때를 렌즈 속에 붙잡아 놓았을까/ 햇살은 그늘 틈새로 튀밥처럼 흩어지고/ 저마다 고만고만하게 행복한 표정들/ 하지만 기억은 빛이 들어간 필름처럼 막막하다/ 기억도 기억끼리만 모여 뒹구는지/ 도무지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나는 사진 속의 나와 겨우 눈 맞춘다/ 끼어들지 마,사진 속의 나는/ 나를 힐끗 노려본 뒤 다시 표정을 잡는다/ 이 낡은 사진의 얼룩은 세월의 더께가 아니다/ 그들만의 오후를 침해받고 싶지 않다는/ 완강한 거부의 흔적이다///
서해에서 / 강연호
그대 마음이 묵정밭 같아서/ 우리 함께 서해 바다를 보러 가자 했었지/ 삼각파도나 모래톱이나 칼날진 해풍쯤에/ 그대 마음의 뻗센 잡초 베어질 리 만무했지만/ 어쩌면 서해 일몰 속에 활활 타올라/ 화전이라도 다시 일굴 줄 알았지/ 우리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며 부산떨었는데/ 갯벌 기어가듯 느리고 더딘 행려/ 내 급한 생각만이 솟구치는 물결을 타고/ 지도책에서 배운 산동반도까지 헤엄쳐갔을 뿐/ 정작 그대는 서해로 질러가는 길을 피해/ 왜 자꾸 멀리멀리 돌아서 가자 했을까/ 서해, 죽은 바다와 황사바람 속에서/ 바닷새 몇 마리 사람 기척에 질려 있었지/ 기억해? 붉은 노을이 그대 뺨에 젖어 내리는 동안/ 가슴엔 듯 둔탁하게 자갈 굴러가던 것을/ 그대를 넘어 바다로 가는 길은 멀고멀어서/ 내 지친 목측 서둘러 침몰시키던 것을/ 그대 기억해? 오랜 세월 지나/ 일구어낼 마음밭 없어 황량해질 때마다/ 나 또한 그대 더딘 발걸음을 곰곰 헤아리듯이///
선인장 / 강연호
선인장에 물을 주었다/ 일 주일에 한 번, 딱 한 숟가락씩만 주랬는데/ 어쩌나 보려고 흠뻑 주었다/ 녀석은 불타는 갈증의 혓바닥을 어떻게 식힐까/ 혹시 저렇게 가시로 내뱉는 건 아닐까/ 궁금증을 변명 삼았지만/ 가학에 재미를 붙이는 동물은 확실히 인간뿐이다/ 선인장은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썩어갔다/ 누렇게 담뱃진에 물든 내 손가락 같았다/ 선인장을 향한 이 맹목적인 증오는 물론 헛것이다./ 내 속의 갈증 내 몸의 가시/ 그게 두려웠던 것이다///
슬픈 일만 나에게 / 강연호
사랑은 언제나 조금씩 늦게 온다 박정만 시인이 간 뒤 나는 종로서적에서 처음으로 그의 시집을 만났다 그는 우주로 떠났다는데 그의 시집은 이제야 내 책꽂이에 꽂히고, 안타까웠지만 언제나 사랑은 조금씩 늦게 온다 생전에 슬픈 일만 있어 달라고 생떼를 썼다는 그였지만 죽음 앞에서는 정작 슬프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남은 사람들이 슬퍼 그의 시집을 읽으면 누구든지 더 이상 우주가 어둡지 않다는 걸 알 것이다 그가 그토록 아껴 닦았다는 램프를 켜 들고 저기 우주의 한가운데 길 밝혀 서 있을 것이므로//
울음 / 강연호
새벽 두 시인데 아니 세 시인가/ 어디선가 희미하게 끈질긴 울음처럼 우는/ 전화벨, 아무도 받지 않는다 벽을 타고/ 수도관을 타고 화장실의 통풍구를 타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화벨이 오르내린다// 나는 돌아눕지만 전화벨은/ 돌아눕지 않을 작정인 듯 열두번도 더 운다/ 제발 좀 받아라, 얘기라도 들어봐라/ 받아줄 수 없는 어떤 사연이 더 절절한지도 모르는데/ 어떻든 나는 다시 잠들고 싶다// 한참을 울다 겨우 찾아드는 전화벨/ 그 뒤끝을 채며 이제는 거실의 냉장고가 운다/ 시계바늘이 운다 보일러가 운다/ 한 아이가 우니까 다른 아이가 운다 다들 따라 운다// 울음은 전염병이다, 커다란 악기의 공명통처럼/ 온 아파트가 덩달아 온 도시가 끈질긴 울음을 운다// 그 속에서도 악착같이 잠을 청하는 나/ 나란 놈이 싫어지는 밤이다//
적멸(寂滅) / 강연호
지친 불빛이 저녁을 끌고 온다/ 찬물에 말아 넘긴 끼니처럼/ 채 읽지 못한 생각들은 허기지다/ 그대 이 다음에는 가볍게 만나야지/ 한때는 수천 번이었을 다짐이 문득 헐거워질 때/ 홀로 켜지는 불빛, 어떤 그리움도/ 시선이 닿는 곳까지만 눈부시게 그리운 법이다/ 그러므로 제 몫의 세월을 건너가는/ 느려 터진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자/ 저 불빛에 붐비는 하루살이들의 생애가/ 새삼스럽게 하루뿐이라 할지라도/ 이 밤을 건너가면 다시/ 그대 눈밑의 그늘이 바로 벼랑이라 하더라도/ 간절함을 포기하면 세상은 조용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제는 노래나 시 같은 것/ 그 동안 베껴 썼던 모든 문자들에게/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혹은 그대의 텅 빈 부재를 채우던/ 비애마저 사치스러워 더불어 버리면서//
절벽은 절박하다 / 강연호
여기서 길을 버리면 어떡하냐는/ 내 건짜증만으로도/ 절벽은 무너질 기세로 콜록거렸다/ 침묵이란 사실 이런 거 아니냐는 듯/ 울컥 명치 끝에 걸린 멀미 넘어오지 않고/ 바람은 마음 속에서만 소용돌이쳤다/ 저기 위태로운 칡덩굴 하나/ 목숨 건 곡예 부려 바위를 쪼개는데/ 아, 진짜 침묵은 말 없어도 바위를 쪼갠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얼마나 많은 날들 더 지나야/ 내 들끓는 욕망은 투신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말 없는 사내 될 거라며/ 두 주먹 불끈 쥐어보지만/ 늘 그렇듯이/ 세월은 지나간 세월만 세월이고/ 너무 지루하고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고/ 늘 그렇듯이/ 지금쯤은 침묵해야 한다고 다짐할 때마다/ 절벽 앞에 선 기분이고/ 절벽은 그래서 언제나 절박하다//
행복 / 강연호
이제는 행복해졌느냐는 안부가 그에게 온다/ 혓바늘이라도 일 것 같은 저녁의 비애 속으로/ 뚝뚝 떨어지는 질문의 풍경/ 행복? 그가 낮게 되뇌여 보는 입술의 움직임을/ 귀청이 따라가다 포기한다/ 별들이 빛나 보이는 건 멀리 있기 때문일까/ 멀리서는 그 역시 빛나 보일까/ 생각은 삼십 촉 알전구보다 길게 그늘을 드리우고/ 한때는 그에게도 서늘한 추억이었을/ 연애나 정열 같은 것들이/ 읽다 놓친 신문의 부고란 같이 싸늘하다/ 기를 쓰고 행복해지고 싶었고/ 어쩔 수 없이 행복해져야 했지만/ 그는 안부가 숨겨놓은 행간이 문득 궁금해진다/ 세월은 늘 너그럽지 않았다고/ 자책인지 불화인지 뚜렷하지 않은 날숨이 터진다/ 행복이라는 낱말 근처에는/ 그의 눈시울을 적시는 무엇인가가 어려 있다/ 그는 이제 주간지의 현란한 고백처럼 텅 빈다//
흔적 / 강연호
새가 날아가자 나뭇가지 부러졌네/ 바람 한 점 없었는데/ 한참 뒤에 문득 생각난 듯이 부러졌네/ 모든 게 흔적이네/ 무수한 나무들 중에 그 나무를/ 무수한 나뭇가지들 중에 그 가지를/ 선택하고 선택받은 운명의 흔적이네// 새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 새는 날아가도 흔적은 남네/ 그 여운 고스란히 견뎌내려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용쓰다가, 용쓰……다가/ 나뭇가지 기어이 부러졌네/ 흔적의 무게 견디지 못했네//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네/ 날이 갈수록 흔적은 무게를 더하네/ 아무도 흔적을 지탱하진 못하네/ 이 정도 흔적의 무게쯤/ 너끈히 견딜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시절/ 내게도 있었네, 아니 정말 있었나?/ 잘 모르겠네 기억나지 않네/ 그것 역시 흔적이네//
강연호(姜鍊鎬) 시인
196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원광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학과 정교수이다.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歲寒圖〉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95년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비단길》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기억의 못갖춘마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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