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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영태 시인

부흐고비 2021. 8. 26. 06:13

멀리 있는 무덤 -金洙暎 祭日에 / 김영태
희망의 문학/ 6월 16일 그대 제일(祭日)에/ 나는 번번이 이유를 달고 가지 못했지/ 무덤이 있는 언덕으로 가던/ 좁은 잡초길엔 풀꽃들이 그대로 지천으로 피어 있겠지/ 금년에도 나는 생시와 같이 그대를 만나러/ 풀꽃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못할 것 같아/ 대신에 山 아래 사는/ 아직도 정결하고 착한 누이에게/ 시집(詩集) 한 권을 등기로 붙였지/ 객초(客草)라는 몹쓸 책이지/ 상소리가 더러 나오는 한심한 글들이지/ 첫 페이지를 열면/ 그대에게 보낸 저녁 미사곡이 나오지/ 표지를 보면 그대는 저절로 웃음이 날 거야/ 나같은 똥통이 사람 돼 간다고/ 사뭇 반가워할 거야/ 물에 빠진 사람이 적삼을 입은 채/ 허우적 허우적거리지/ 말이 그렇지 적삼이랑 어깨는 잠기고/ 모가지만 달랑 물 위에 솟아나 있거든/ 머리칼은 겁(怯)먹어 오그라붙고/ 콧잔등엔 기름칠을 했는데/ 동공(瞳孔)아래 파리똥만한 점(點)도 찍었거든/ 국적없는 도화사(道化師)만 그리다가/ 요즘은 상투머리에 옷고름/ 댕기, 무명치마, 날 잡아잡수/ 겹버선 신고 뛴다니까/ 유치한 단청(丹靑)색깔로/ 붓의 힘을 뺀 제자(題字)보면/ 그대의 깊은 눈이 어떤 내색을 할지/ 나는 무덤에 못가는 멀쩡한 사지(四肢)를 나무래고/ 침을 뱉고 송곳으로 구멍을 낸다우/ 간밤에는 바람소리를 듣고/ 이렇게 시든다우/ 꿈이 없어서/ 꿈조차 동이 나니까/ 냉수만 퍼 마시니 촐랑대다 지레 눕지/ 머리맡에는 그대의 깊은 슬픈 시선이/ 나를 지켜주고 있더라도 그렇지/ 싹수가 노랗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어떠우……//

민화(民畵)를 보다 문득 / 김영태
벙거지를 쓴/ 모과처럼 생긴 神仙道人/ 달도 이슥하야 매화는 삼삼해/ 새는 와중에 동네방네 노랠 하니/ 벙거지가 웃는다/ 눈꼬리를 치켜뜨고/ 수정과을 드는 게 小人 보기에/ 곤드레만드레 곶감이/ 물에 누워 있듯 칙칙하다/ 딸산 건 아랫목 평풍 속의/ 비오리/ 눈을 감았다 떴다/ 떴다 감았다 물장구나 치는/ 色紙로 오린 젖은 비오리//

 

내가 부를 너의 이름 / 김영태
내가 부르는 너의 이름 그리움/ 외로운 밤 나의 꿈길 데리고 와서/ 눈이 부시는 아침 햇살에 곱게 깨어나지/ 내가 부르는 너의 이름 그림자/ 잡을 수 없는 빈 손짓 아쉬움으로/ 항상 내곁에 머물러 있는/ 너의 모습이여// 내가 부르는 너의 이름 고독/ 홀로 외로움에 떨 때 함께 하며/ 내가 부르는 너의 이름 슬픔/ 나보다도 아픈 가슴을 위해 우는/ 아~~ 이제 내가 부를/ 너의 이름은 사랑/ 내가 부르는 너의 이름 기다림/ 부를 수 있는 이름만으로 보고 좋으며/ 마침내 오지 않아도 좋은/ 너의 이름이여// 내가 부르는 너의 이름 고독/ 홀로 외로움에 떨 때 함께 하며/ 내가 부르는 너의 이름 슬픔/ 나보다도 아픈 가슴을 위해 우는/ 아~아~ 이제 내가 부를/ 너의 이름은 사랑/ 내가 부르는 너의 이름 기다림/ 부를 수 있는 이름만으로 보고 좋으며/ 마침내 오지 않아도 좋은/ 너의 이름이여/ 마침내 오지 않아도 좋은/ 너의 이름이여//

나는 모슬포가 슬프다 / 김영태
​가보지 않았지만/ 어디에 있는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에게/ 모슬포는 슬프다.// ​서쪽에 기운 해/ 그 주홍빛 눈물을 보면/ 모슬포는 긴 외로움에/ 홀로 바다에 떠 있다.// ​사람 많은 거리에서/ 아는 얼굴 하나 없을 때/ 모슬포는 푸른 바다에 빠져/ 먼 섬의 등대를 홀로 보고 있다.// ​모슬포가 왜 슬픈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있지도 않은 첫사랑이/ 애틋하고 그립듯이 그렇다.//

걸레 / 김영태
자나 깨나 K는 소줏병만 그린다/ 화살표를 긋는 것도 그의 장기에 든다/ 출입구가 막히면 화살표는 통로/ 시든 영혼 같은 자주紫朱꽃도 그리고/ 걸레도 그린다/ 가로세로 몇 센티/ 목탄木炭으로 줄을 긋고 숫자를 기입한다/ 걸레 같은 얼굴로 걸레만 그린다/ 걸레 같은 세상이라 걸레만 그리는지?/ 아니, 부삽도 그린다/ 비에 젖은 국방색 봉투/ 연결 불능인 코드선線/ 찌그러진 고물 가방/ 신호 불통인 전화기는/ 딱정벌레처럼 피부가 매끄럽다/ 닿을 수 없는 창窓도 그린다/ (숨을 몰아쉬기 위해, 창문은 열려 있다)/ ?/ 물음표도 집어넣고/ 입을 벌린 채 옆구리가 잘숙 불거진 대봉투는/ 브론즈 조각이다/ 우산을 많이 그려서/ 구석에 세워두고/ 그는쉬기 위해 점선點線을 따라간다/ 입구入口를 뺑뺑 돌다가 곧장/ 뻗어버리는 걸레!/ 이 시대는 이를 갈아도 갈다가/ 산소가 필요하다 걸레!//

과꽃 / 김영태
과꽃이 무슨/ 기억처럼 피어 있지/ 누구나 기억처럼 세상에/ 왔다가 가지/ 조금 울다 가버리지/ 옛날같이 언제나 옛날에는/ 빈 하늘 한 장이 높이 걸려 있었지//

나비 / 김영태
​​나비는/ 풀밭을 지나/ 징검다리를 건넌다/ 몇 번씩 뒤돌아보아도/ 하늘은 무대의 배경같이 개어 있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 망설임이 잠시 비친다/ 내 손바닥 안에서/ 파닥거린다/ 나비는/ 떨고 있다/ 떨림이 번지다 멎는다//이상한 색깔 같기도 하고/ 한없이 비치는 조그만 천같이---//

길을 걷다가고 딸이 보이는 아버지 / 김영태
피천득 선생과/ 전람회를 보러 가는 길이다/ 아버지같이 따뜻한 분이다/ 포인트 카운터 포인트를/ 서영이가 대학 일학년 때 읽었어요/ 문장 밑에 줄을 쳐 가면서/ 내가 줄을 쳤더라도 같은 자리지요/ 아마, 똑같은 자릴 거예요// 나보다 목 하나는 없는/ 작은 키의 스승이/ 하늘가를 재깍재깍 걷고 있었다//

꿈 / 김영태
오늘 밤도/ 수국(水菊)은 머리를 풀고 있다/ 너는/ 손을 가리고 웃는다/ 가릴 것이 없는데 자꾸만/ 자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지금도 너는 하늘 근처/ 잠자는 내 머리맡에/ 수국색(水菊色) 머리를 풀고 있는데//

꿈 / 김영태
무지렁이/ 무 지 렁 이/ 연두색 목에 감긴/ 물빛 스카프/ 비끗/ 삐뚤게만 걸어온/ 이 품안에서 어리광마저/ 눈 흘길, 투정마저도 이쁜 ---//


꿈속 같다 / 김영태
안개를 먹으면 배가 고프다/ 안개 속에는 개떡모자 쓴 사람이 서 있고/ 정거장이 있다 기차도 멸치도 꽃도/ 허리도 세탁소 지붕마다 안개투성이인데/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안개 사정 거리 안에 수상한 벙거지가 보인다/ 잘숙이가 넘어질 듯 돌고 있다/ 과년한 어깨를 다 드러낸 잘숙이를/ 안개가 거머잡는다 모든 소리는 꿈속 같다//

잠과 꿈 / 김영태
지워진 얼굴 하나/ 點 하나/ 아무것도 아닌 뜬세상/ 섬돌가에 커진/ 등(燈) 하나// 백련암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엄마가 없는 다저녁때 없어진 아빠/ 를 찾지 않았다 형이랑 둘이서 멱을 감고 도룡뇽을 잡았다 놓아주었다// 아무 색도 칠한 적이 없는 금낭화(錦囊花)/ 혼자 식었다 떨떠름하였다/ 조금 슬프다가/ 슬프다 말다 하던 아빠랑 다 저녁에//

한여름밤의 꿈 / 김영태
머리를/ 수색(水色)쩍으로 두고 잔다/ 기차가 지나가는/ 축축한 하늘/ 들꽃을 머리에 꽃고/ 너는 아무것도 없는 내 가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글씨를 쓰다/ 지워버린다/ 발꿈치를 높이 세워/ 원(圓)을 그리기도 한다/ 치마폭가에 잎사귀들이/ 푸른 우산(雨傘) 같다//


내 슬픔은 / 김영태
​가난한 것이/ 명예가 없는 것이/ 힘들게 일하는 것이/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내 슬픔은 아니다.// ​내 슬픔은/ 새벽 문을 나서는 아내의/ 휴학을 하고 일을 나서는 아들의/ 부모와 한 방에서 엎드려 자는 딸의/ 등에 있다.//

病名을 모른다 / 김영태
사람마다 腎臟이 두 개인데/ 오른쪽 신장에 두꺼비가 붙어 있어/ 하나는 잘라냈다/ 尿管도 안좋아/ 치료받고 있지만/ 나는 나의 병명을 모른다// 춤을 더 오래 보러가고 싶고/ 춤추는 사람을 더 오래 사랑하고 싶고/ 그 곁에 있고 싶은데/ 나는 나의 병명을 모른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 5 / 김영태
66년 主禮를 서주셨을 때*/ 저는 한창 젊은이었습니다/ 부인께서 치시던 쇼팽의 폴로네즈가/ 길 밖까지 울리던/ 명륜동 집에도/ 정초에 갔었지요/ 이민 가실 때 정표로 주신/ 仲燮 펜화 두 점은 팔아먹었습니다(용서하세요)/ 미국 가서 선생님 계신/ 플로리다까지는 못 갔습니다/ 서울 나들이 때 한번/ 뵙고 그게 마지막이군요…//
* 박남수 시인

남몰래 흐르는 눈물 24 / 김영태
너는/ 아프다고 한다/ 나만큼? 네게 말했었지/ 너는 아프구나, 남몰래 숨어 있는/ 우리는 모두 아프구나/ 가슴과 가슴 그 안에/ 손을 넣고 있어도/ 모자라는 듯한 덤덤한/ 우리가 좋아하는 그 曲을/ 듣고 있어도/ '짐노페디'말야/ 그 곡은 만지면 없는/ 가만히 있으면 있는/ 뭐랄까 그게......//

남몰래 흐르는 눈물 26 / 김영태
음악원 시간강사/ 뒤늦게/ 이 나이에/ 金宗三은 생전에 레바논 골짜기에/ 詩人學校를 세웠습니다/ 강사진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해도/ (그가 직접 임명장을 주었으니)/ 缺講하는 선생이 많았습니다/ 60년에 美大를 나와/ 35년 만에 두 시간 강의료 4만 2천 원/ 웃을 일이 아닙니다/ 3학년 기악과, 지휘관 한 명/ 내 학생들 눈빛을 보시기를/ 남몰래 흐르는 눈물/ 주워담던 허리 구부정한/ 선생과는 다른 피어나는/ 막무가내 제 살을 비집고 나오는/ 구슬들의 구석 자리/ 미심쩍어 보았더니 청강생/ 에릭 사티가 앉아 있지 않은가/ 전시간에 「사라방드」에 대해/ 떠든 것, 좀 모자라는 듯하다고/ 모자라는 것은 다른 아름다움이라고/ 내가 칭찬한 것 듣고 웃었겠지/ 학생들 눈빛이 당신의 중절모에/ 리본으로 매달린 그것도 내가 보았다니까//

남몰래 흐르는 눈물 31 / 김영태
탑들에 구혼하는 바람은/ 그녀의 허리를 감아 잡는다/ 네 기사(騎士)가 지나갔다/ 안달루시아 조랑말 타고/ 하늘색과 초록 옷 입고……// 야밤에 밤참 먹듯 나는/ 로르카 시집을 읽었습니다/ 시집에 나오는 코르도바/ 언젠가 이틀 밤 묵었던 스페인 구시가(舊市街)/ 쇼팽이 ‘비’를 작곡하던 그곳/ 코르도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초록 옷 입은/ 비/ 이틀 밤 묵으면서 빗소리만 듣던/ 그때 내 뺨을 적시던 눈물이//

詩 6 / 김영태
너는/ 境界線을 하나 긋기도 하고/ 다시 지우기도 하였다/ 나비가 지워질듯 말듯 허공에/ 사라지고 있었다/ 한쪽 날개가 바다에 기울면서/ 물감이 풀어지고 있었다/ 너무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나비는/ 베르가모風의/ 內容이 없는 이름다움을/ 만나곤 하였다//

그늘 / 김영태
나는 그의 그늘에 가서 그가 나를 멀리한 이후의 그늘 안의 그늘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살 속에 遮陽을 매달고 6년 동안 촛불을 켜놓고 살던 것도 지금은 희미해진 그의 몸 지도 위 나 쉬어가던 곳도 그늘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지팡이 짚고 모자 쓰고 넉넉한 옷 가을 같은 옷 입고 지도도 필요 없이// 가끔, 아주 가끔 나 살던 집으로 찾아갔었는데//

그늘 반근 2 / 김영태
슬픔을 저울에 달 때/ 한 근! 하면 어색하다/ 반근이면 족하다/ (한 근은 너무 많지)/ 반근, 젊어지긴 틀린 이 미지수/ 내리막길을 찬란하게/ 미지수가 그 동안 미지수를 가꿨듯이//

헐렁한 옷을 입고 / 김영태
헐렁한 옷을 입고/ (나도 스물, 서른 살 때는 꽉 조이는 옷을 입었단다)/ 마음은 오히려 헐렁해지는/ 것을 내가 나를 감시한다/ 너는 대학에 출강하지 않니? (쥐뿔도 없으면서)/ 춤글장이 후배도 여러 명 길러냈지/ 늘그막에 너는/ 숨어서 땅 위에 다리가 이쁜/ 화초들에게 물을 주고 있지 않니?/ 헐렁한 옷을 입고/ 마음은 언제나 비단/ 세상 구정물 밖에서 노니는/ 백조랑 흑조곁에서/ 사선으로 내려오다 잠시 멎는 플리에/ (마티스가 그렸지, 저 팔 움직임)/ 헐렁한 가방을 열면/ 저승사자가 기다리는 것도/ 그러다 기죽지 말기//

아버지의 연설(演說) / 김영태
장독대 옆에 무료無聊하게 서 있거나/ 등藤나무 밑에 구부리고 있는 분이/ 우리 아버지시다/ 아버지는 장 냄새를 맡으며/ 목운동을 하거나 등나무곁에서/ 연설를 하고 계시지만/ 아버지의 참모습을 찾으려면/ 벽돌 같은 이마가 이유없이 더워지든가/ 기어들어가는 연설문이 뜸하다/ 거칠어지든가/ 옆에서 수군거리는 우리 형제/ 정도는 눈 밖으로 밀려나는가에 있다// 밀려나고 싶지 않다, 아버지의/ 추운 품 안으로 파고들고 싶다//

누군가 다녀갔듯이 / 김영태
하염없이 내리는/ 첫눈/ 이어지는 이승에/ 누군가 다녀갔듯이 비스듬히 고개 떨군/ 개잡초들과 다른/ 선비 하나 저만치/ 가던 길 멈추고/ 자꾸 자꾸 되돌아보시는가//

정적 / 김영태
너도 나도 인간들이/ 제 이름을 지키기 위해/ 양지로 나가는 것도 좋지만/ 음지에 남는 것도 괜찮다/ 나라를 토론장으로 끌고 가는/ 시대일수록 외면해버리면 어떠랴/ 음지에서 겨우/ 밥 먹고 살지만/ (문학판도 마찬가지)/ 양지는 늘 쨍하고/ 음지식물은/ 더 고개 숙여/ 정적을 배운다/ 참으로 정적은 수다스럽지 않으니/ 고개 숙인 만큼 제 값도 있는 법이지//

깡 / 김영태
여봐라/ 세상이 천심이거늘/ 깡 하나로 되겠는가/ 되는 것도 있겠지만/ 비웃음이 모여 검은 구름/ 만들면 비 뿌리지 않겠는가/ 살에 옹이가 박혔는데/ 분홍에 덧난 살에/ 허여멀건 진분홍 남겠는가/ 이쁜 손톱이/ 깡 하나로 다 망가졌지 않은가/ 나라가 되는 것도 있겠지만/ 찬바람 든 빗방울이/ 우박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되겠는가, 이 비웃음 모이면/참을 수 없는 허기가/ 무슨 덩어리로 폭발할지 알겠는가/ 여봐라, 깡은 먹을 수도/ 뱉을 수도 없지마는//

세상은 어슬렁거려야 / 김영태
세상은 어슬렁거려야/ 미움도 적도 없이 어슬렁거려야/ 군대에서 기합받듯/ 모두가 명령뿐이니/ 명령에 복종하라고/ 어슬렁거릴 틈도 꽉 막혀버렸으니/ 답답하다 가슴을 열면/ 청풍이라도 지나가렴/ 강원도 마파람 같은 것/ 사람들은 말 줄이고/ 무언으로 동의할 뿐/ 제 속을 감추고/ 마음 비운 지 오래/ 미움도 적도 없는/ 세상은 어슬렁거려야//

소금 한 줌 / 김영태
여기까지 왔더니/ 손에 잡히는 건/ 소금 한 줌// 이 짠맛을/ 미지근한 물로 헹구고/ 언 듯 꺾이는 칠십/ 손에 잡히는 소금 한 줌//

녹차(綠茶) / 김영태
푸른 풀로 만든/ 물 위에 한 사람이 지나가는 차(茶)/ 하얀 정강이가 잡힐 듯/ 웃고 있는/ 울고 있지만/ 지금은 없어진 꽃//

무덥고 짜증나는 밤 / 김영태
무덥고 짜증나는 밤에 정현종이 쓴 <너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보다....>를 읽는다/ 유쾌해서 핫핫...../ 핫 웃음이 폭발했다 A와 B 중 A가 B에게 충고하는 역설이다/ 이 시가 혼쾌한 것은 (다시 시를 천천히 읽어본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크다는 걸 너를 통해서 안다 너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보다 크다는 걸 나를 통해서 알 수 있을가 (네가 그럴 수 있도록 나는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자연은 노력하지 않아도 안다) 핫핫 핫....../ 밤자는 설치던 1999년 여름 무더위가 싹 가셨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겠다/ 잠시 유쾌했다가 서글퍼진 것은 이 나라 시 일급들 겸양이 문제였다/ 겸손함을 폐기 처분한 망종들이 판치는//

사라지는 사원 위에 달이 내리고 / 김영태
스페인 태생/ 루시아 라카나/ 만 19세, 너의 몸은/ 大理石 같군/ 어떤 흠집도 남기지 않는/ 사원 위에 달이 질 때/ 네 몸은/ 얼어붙은 음악, 아니/ 그 공간에 놓여야 할/ 저 가여운 美/ 누가 그랬던가 건축을/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호수 근처 / 김영태
그대는 지금도/ 물빛이다/ 물빛으로 어디에/ 어리고 있고/ 내가 그 물 밑을 들여다보면/ 헌 영혼 하나가/ 가고 있다/ 그대의 무릎이 물에 잠긴/ 옆으로, 구겨진 수면 위에 나뭇잎같이//

빈배 / 김영태
내 몸을 접어서/ 당신 몸 안에 넣으려고/ 반 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이치입니다 당신의 젊음을/ 훔쳐서야 되겠습니까/ (훔치는 건 자유지만)/ 몸 안에 들어서는/ 밀치지 않는 것만도/ 얼마나 다행입니까/ 고여있는 물에/ 어디 빈 배라도/ 띄우게, 머흘머흘 물 위로/ 흘러가게 내버려둔다면/ 「손을 주세요」/ 춤 제목 아닙니까?/ 쓸만한 것들은 모두 버린/ 지금 빈 배에 소름을 싣고 가려고……//

소 -朴壽根 遺作展 / 김영태
銘筆그림이지만/ 손때가 묻어 있었다/ 수근.....이라고 그저 한글로/ 썼다 아이들이 많은, 바람에/ 헐은 까치머리를 한 아낙네들/ 두서너 명 한결같이 그저/ 앉아 있었다/ 대추나무 밑동에서 조는 샌님/ 木板, 또 그 옆의/ 달구지 하나, 이렇게/ 풀이 죽은 적삼을 입고/ 坐板엔 해가 설핏하다가 진다/ 罪 없는 소나/ 그렸지, 그렇데 그 소가 지금/ 수근.....이라고 슬프게 말한다//

오리 / 김영태
오리가 가고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달도 어정쩡한데/ 남빛 치마를 두른 오리가/ 물살 따라 가고 있다// 오리는/ 주둥이가 빨갛게 벗겨진/ 우리 새끼들 같다/ 우리 새끼들은/ 하늘 개인 날에/ 오종종 물에 뜨는 게/ 춥다// 저만치 비껴 서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달도 사위어가는데//

자라의 행방(行方) / 김영태
어찌하여 자네 목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고 아뢰옵기 죄송하오나 사람이 다 사람 같아 보이질 않아 들락날락 그러하옵니다 고얀놈도 있고나 하면 내 안면골상은 어떠냐 펑퍼집합니다 쓸만하다는 거냐 정반대로 아뢰옴을 널리 해량(海量)하시고 살펴구비옵시길 인마, 아뢰옵긴 빼고 간단명료하게 점술 매겨보거라 제 보기에 초랭이 같군입쇼 어떰 면으로 나를 떠보는 수작이냐 우리 양반 풍채도 좋지! 신상은 알랑거리는 기가 후합쇼 방귀를 뀌면 시원하시겠사와요 이건 널리 회자된 우화(偶話)겠다 아니죠 요즘은 달라요 단도직입적으로 가질않아요 직언은 금물 이러하건대 방귀 얘기가 났으니 초랭이 편법은 대단한 시적 은유 동원해서 간다는 사연즉슨 코에다 새끼손가락을 살짝 긋고 한 옥타브 높여 천하의 향기, 아름다운 멜러디, 항문(肛門)의 하프, 이만하면 찬사의 극상입죠 에잇 호래아들놈 네 목이 어째 들락날락하였겠다 시건방지고 진중(鎭重)치 못한 걸 내가 알아 강남으로 가겠어요 건 또 왜? 자리 덜 잡힌 곳에 먼저 나가 속차리고 고정할랍니다 개버릇 남 줄라고 이래뵈도 사람 가릴 줄 알고 사람 발치에서 헹굴 줄 알죠 하면 내겐 개전(改悛)의 정이 보이느냐 선상은 글렀시우 한다는 하회별신가면무극(下回別神假面舞劇) 대사 때나 이제나 초랭이 노는 게 기껏 달걀, 눈알, 새알, 대감통불알이니 여봐라 그래 네가 목을 아주 디밀고 경멸로 끝내기냐 초랭이 보슈 이래봬도 나는 영물(靈物)이여 이꼴저꼴 안 보려고 목은 일찌감치 파장했어두 속이야 멀쩡한즉슨 시인 조사(釣士) 김시철이 나를 잡아다 큰 가마솥에 가두고 눈붙이는 사이 야간 도주를 했습죠 물냄새 오리(五里) 밖에서 맡은 김에 물, 자유, 구름, 이끼, 모래, 수평선이 픠뜩 다가섭디다 자라야 너는 어디 있느냐 이 미물 아닌 영물아 어디 있어 이 손바닥만한 김釣士宅 마당에서 흠집도 안 남기고 승천(昇天)이라도 했더냐 시장(市長)님! 인마 나는 초랭이라니까 어디 네 몰골을 드러내봬야지 내 팔당 저수지에 원대복귀시켜주마 허참 나 여기 벌써 용궁에 와서 안면골살 볼품이 서푼도 안되는 물에 있는 초랭이란 자의 개전의 정에 대해 구수(鳩首會義)를 열고 있는 참이요//

섬 / 김영태
마음은 시들고/ 조그마한 너의 종이가슴에 닿으면/ 구겨지는 내 손을/ 몰래 감추던/ 너의 눈매는/ 다시 아름답다/ 上體를 서로 가눌 수 없을 만큼/ 水深은 깊고/ 물 위에 몇 개 작은 線들이/ 지나가는 지금//

새 / 김영태
가까워지다보면/ 다시/ 날아가는 새/ 하루 종일 마음에 금이 간다/ 할 수 없이 금이 간 곳에/ 날아와 정지해 있는 새/ 몸 전체가 비어 있는/ 이 가을/ 나에게 와서 금을 긋고/ 나같이 조금 망가진 새//

눈 / 김영태
눈은/ 낮은 곳으로 내린다/ 네가 방긋 웃고 있는/ 흰 天地에 제일 많이 내린다/ 너는 빙그르르 돈다/ 빙그르르 도는 너의 무르팍 속에/ 진분홍 가득 들어 있다/ 치켜올릴수록 높이/ 하늘에/ 손바닥만한 푸른 띠도/ 젖는다//

꽃 1 / 김영태
너는 무슨 사연 같고/ 거기에 놓인 자연/ 일부 같고/ 너는 무슨 꽃 같아/ 온몸이/ 제몸에 소름이 돋는 꽃/ 풍경인 마음을 물들이고/ 나를 삼킬 듯/ 그 안에/ 온몸 안의 붉은 벽지가//

빈자리 3 / 김영태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서/ 늘 어슬렁거리는/ 조끼입은 奇人을 만나신 적 있는지요?/ 그 기인의 머리 속은/ 춤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편안합니다/ 머리가 무슨 야심인가/ 출세욕인가 그런 것과 무관했습니다/ 머리가 텅텅 비었다는 것뿐/ 기인이 없어졌을 때 (이 세상에서)/ 빈 자리에 남은 향기 아니겠어요?// 아무도 그 자리에/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었던/ 평생의 그늘 같은 게 아니겠어요//

도망자 / 김영태
이렇게 도망쳐보기도 하고/ 저렇게 없어지기도 하다가/ 제자리에서 제자리로 나는/ 내빼고 있다/ 옆구리에서 옆구리로/ 흐미한 쑥색에서 짙은 감색으로/ 허우적거리는 무당벌레가/ 맴도는 물가에서 다른 잎사귀로/ 빵에서 죽으로/ 거리에서 줏은 향기에서 문풍지 사이로/ 비웃음에서 새끼치는 비웃음/ 넋이야 넋이로다/ 가망(可望)이 절망(絶望)으로//

결혼식과 장례식 / 김영태
한 아이는 꽃처럼/ 밤에 피어 있다/ 무척 두려울 것이고/ 처음으로 꽃으로 밤에/ 피고 있다// 葬禮式 날엔 비가 내렸다/ 멜빵끈을 잡은 환도도 서 있다/ 그 옆에 죽은 리스도 서 있다/ 개 한 마리가 앞발을 들고 서 있다/ 솔 담배를 거꾸로 물고/ 불을 붙이는 사람도 있다/ 대여섯 명//

결혼식 / 김영태
사람들이 한 스무 명 모였을까 말까 했다 열 명이면 어떻고 다섯 명이면 또 어떨라구, 스무 명 중에 나도 끼어서 어깨를 대고 있었다 <얼음집>을 쓴 신부는 조그만 화관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평일처럼 이쁘다 파리의/ 뭉수리공원 느릎나무 밑에서 연못가의 백조를 지켜볼 적이 더 그림 같긴 했지마는, 어느 각도에서 만나도 이쁜 건 이쁜 것 풀을 먹이지 않은 천 같아 보였다. 수원에 있는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고 오느라고(허겁지겁 달려왔겠지--- 에그, 융통성도 없지, 글쎄---) 한 시간 반이 지체된 결혼식날 신랑은 나와 동갑내기 아니 유치원시절과 소학교 때 바로 옆자리의 짝이야 키도 나만하고 머리가 잠수함같이 생긴 그러나 언제나 수석(首席)을 그애는 차지했지 겨울을 몹시 싫어했는데 딸기코가 자주 얼기 때문인 듯 수학 문제를 풀 때보다 불어가 유창하고 여지껏 뭘 했느냐 하면 음악과 동거했던 우디 알렌 외모와 별차이가 안 나는 30년 전 내짝이라니깐 글쎄--- 식(式)이 끝날 무렵쯤 하객들이 한 열 명쯤은 더 불었을까 서로 이마를 맛대고 손으로 초를 만들어서 촛불을 켜주었는데 작은 교회 마당이 무도회(舞蹈會) 저녁같이 여간 신비스럽지가 않았다. 어색하게 허지만 다정하게 잠수함이 팔짱을 끼고 눈을 쳐들다가 신부는 정반대로 눈썹을 내려감을 때//

묘갈(墓碣) A / 김영태
나는 선생의 망연우(忘年友)였다. 잎을 떼자 뒷면마다 먹칠이 가벼워졌다. 마음이 실패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왕복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우주가 다입니까? 쇠를 구부려 그림자 모양을 만들면, 행복은 철(鐵)과 같습니다.// 선생은 위급한 자연이었다. 계절이 희박한 곳을 향해 해빙선 한 척이 깊이 부수며 가로지르는 일은 꼭 시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슬픔의 재능이 아니라 재능의 슬픔입니다. 오늘은 잘 삶은 강낭콩을 가져왔습니다. 만유(萬有)를 걸어둘 모서리를 다듬기 전에, 함께 한 줌씩 가볍게 집어먹기 위해.// 선생은 숨겨진 동물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한 동물은 인력(引力)의 공기를 걸음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었다. 태양은 계부(繼父)다. 그래서 시인과 작사가들은 폭팔로 터져죽은 별에 대해 쓰지 않고 진정한 어머니에 대해 쓴다. 선생과 나는 그들과 같은 광대한 천하관이 없다. 그래서 선생과 나는 의붓된 것을 생각한다. 태양은 계부다. 거기서 '길변흉(吉變凶)'이라든지 '흉번길(凶變吉)'이라든지 온통 덧없는 그림을 지우기 위해, 접시 가득 푸른 콩을 담아왔다.// 축소란 시간이 영원의 상에 시도하는 확대의 최대치이므로, 점점 작아지는 것엔 그것을 붙잡을 긴 끈 또한 준비되어야 한다. 천국에서 온 시인. 작사가, 돌림병 예언자는 국소성을 잃고서야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선생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증발하는 무덤이 찾아왔다. 펼쳐진 음역에 따라 현의 길이를 맞추듯, 잘 고른 길이로 우리는 추모했다. 묘갈에는 'A'라고만 적었다.//

로깡땡 / 김영태
공복에 담배를 피우지/ 5분도 못 참고 불을 땐다우/ 답답해서 에잇 쌍코랑말코랑/ 습해서 어눌해서 건너방 마루아랫방/ 공복에다 멜빵 두룬 생철 가슴에/ 연기만 가득하다우/ 화통(火筒)도 아니고/ 찜똥은 글쎄올시다/ 분하고 서러운 것이/ 얌전하게 제자리걸음이라우/ 열중쉬엇! 차렷!앞으로/ 앞으로 가지 말고 뒤로돌아갓! 제자리 맴돌기/ 토하고 싶을 때도 있다우// "......생각하지 않을 것, 나는 생각하기 싫다. 나는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하기 싫다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한번 떠보는 수작이래도 괜찮다우//

근작낙수첩(近作落穗帖) / 김영태
곡신(谷神)// 水墨으로 가득 찬 뜰, 기교와 위트, 遊戱정신의 넘나듦, 그러나 몽둥이 하나는 늘 가로질러 있거니......나비도 날고 點은 꽃이지만 하여간 그 몽둥이가 내겐 예사롭지 않게 警覺으로 다가온다 谷神 연작에서 만나는 수묵의 힘이라니.....//
달마(達磨)// 걸레스님이 그린 達磨는 분장을 하고 있다 냇물에 발 담근 童僧은 산새 한 마리를 품고 있다 그런가 하면 通話중 이른 가을에 내리는 함박눈도 보인다 남모르게 흔들리던 목소리도//
권력들의 장례풍경(葬禮風景)// 무슨 풍경이 있는가 하면 가령 問喪 온 사람들 시퍼런 옛날 權力들을 볼 때가 있다 수그러들지 않는 목은 대개 뻣뻣하고 아직도 도도하다 사람을 발치에서 흔들었거나 밟았듯이 추호도 반성의 기미는 안보이는데 어떻게 된 세상인지 요즘은 자기가 자신을 치장하는 대신 잡아먹히는 세상이 되어간다 권력 맛이 시퍼런 건 거드름이 제 몸에서 기어나와 갈짓자 걸음 걷듯 눈가림 같은 것인데//
됫박// 대낮인데/ 빵떡이든 크림이든 아무튼/ 그런 별들이 살에 돋아난다/ 그건 소름, 이쁘다/ 네 몸 속 흐르는 물에/ 나는 머리를 담근다 내 머리는/ 됫박 같지만 하느님이/ 여러 가지 색실을 넣어 꿰멨다/ 이리 굴러다니고 저리 밀쳐있던/ 됫박을 너는 다독다독 잠재우지/ 흐르는 물에 헹구지/ 두 번 세 번......//
능선// 측면으로 누워 있을 때 어깨부터 허리 발뒤꿈치까지 가파른 능선 오목한 지점에 내 손이 놓여 있다 복숭아뼈와 하이힐에 몰린 군살까지 머물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시선을......//
구릉(丘陵)과 코냑-레미 마틴// 그대 무릎은/ 흰 구릉이었다/ 구릉에서 피어나던/ 안개/ 안개 살에서 길을 잃어?// 반성문 3// 뉴저지라면/ 아이들이 사는 곳인데/ 선생님도 거기서 사신다/ 선생님 시집 구하러 書店에 갔더니/ 아직 안나왔다고......두세 번/ 헛걸음친 끝에 손바닥만한 시집 한 권을 들고 온다/ 집필실에는 주인도 어딜 가고/ 工藝하는 처녀도 외출/ 난초만 그림자를 드디우고 있다// 적막하다//

피아노 / 김영태
그의 피아노는/ 헐렁한 겨울 쉐타/ 조금은 바래지고/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히피 헤어/ 거위들이/ 뒤둥뒤둥 열심히 걸어가다/ 갑자기 되돌아보는/ 어정쩡하게 안으로 굽은 안장 다리/ 한쪽 허파를 잘라낸/ 텅 빈 그의 마당 구석/ 시든 실비아의 등위에/ 눈이 내린다//

성탄절 / 김영태
말구유간에서 향란이가 아기를 낳았다/ 눈이 내리고/ 나귀가 지나가고/ 백치(白癡)처럼/ 박쥐우산 속에서/ 나는/ 헤어진 살붙이 생각에/ 안 나오는 웃음을 쥐어짰다/ 눈이 내리네----개똥이도 지나가고//

수치(羞恥) / 김영태
비스듬히 눈을 감는다 발을 오므리고 두 팔로 너는 무릎을/ 감싼다 나비는 내가 접은 허공에 비껴 앉는다 허물다 만 드/ 쿠닝의 習作같다 단단한 둔부(臀部)에 생소하게 접히는 線이---//

세상이 그때는 / 김영태
1957년/ 당인리 발전소 앞산 밑에/ 수화(樹和)/ 이봉상(李鳳商)/ 윤효중(尹孝重)/ 개똥이 말똥이도 살았다// 마리나 브라디 닮은/ 눈썹이 없는 치렁머리 급우(級友)는/ 연필로 눈썹을 길게 그리고 다녔다// 진흙탕 논밭길로/ 버스가 황소처럼 달리다 빠졌다/ 닭도 빠졌다 염소는/ 수염을 달고 혼비백산/ 와우산으로 기어 올라갔다/ 갈대가 있었다/ 은물결을 만드는/ 바람도/ 괜찮았다// 호떡 가게가 하나 있었다/ 짱게가 어덯게나 밀가루를/ 잘 치는지, 어깨 위로 한 바퀴 돌려// 나무 간막이 여자 남자/ 변소도 언덕에 있었다/ 똥은 콩밭으로 나르고/ 하던 얘길 게속하랴, 우린 쉬-하랴/ 그랬었다 분주했다// 전천후 장화(長靴)(지금은 판화가가 된)/ 7년 만의 외출 몬로 궁뎅이(조각가 이종각(李鍾珏)/ 열두달 벙거지(이승택(李昇澤)의 등산모)/ 산소 땜쟁이, 집시, 소세지, 거드름뻥, 불여우, 하마, 살/ 작 나간 기미가 보이는 레몬 엘로우만 거듭 복창하는 괴물들/ 만 살았다/ 나는 옆구리로 기어다녔다(예나 지금이나) 심심치 않게 가/ 슴도 뻐겠다 꿰맸다 수증기가 많았다 높이 더 높게 窓을 매/ 달고 깔보는 연습도 그때 했었다 환쟁이 대신 글쟁이가 된/ 지금 뒤돌아볼 것 같으면//

그럭저럭 / 김영태
아이들은 모두 잘 있소 기침을 하다가 그치고 번갈아 설사를 하다 멈추고 할 뿐이지 나도 안녕하오 장독에 된장도 남아돌아 가게 담근 멸치젓도 신통방통 무사하오 시스위 벤지는 죽었다라는 연극을 보러 갔소 눈이 내릴 듯하더니 풀려서 하늘에 앙쾡이를 그리던 날이요 국회의원 선거도 물에 물 탄듯 일등 이등을 냈지만(그야 주권을 뽑는 행사겠지) 시즈위 벤즈가 어디 남아연방(南阿聯邦)에 하나뿐이겠소? 남의 신분증으로 위장해/ 대리로 연명하는 生이 곧 죽은 목숨이지 모멸과 냉소는 볶음밥처럼 튀겨라! 사랑니도 뺐소 이 사이에 터널을 놓았더니 톱나물도 얼씬 안 거려 제가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없겠지 별아저씨가 상(賞)을 타고 대사면(大赦免) 오색 풍선이 경축식날 하늘로 날아가듯 여기 모두는 그럭저럭 파랑 빨강 신호등도 유야무야 아닌 게 분명한 것이 지극하다 빤하고 그러니까 그럭저럭//

적소(謫所) / 김영태
1// 단막극을 쓴 건 순전히 연습이다 나는 평소에도 연습을 많이 하는 편이다 연습을 안 할 때보다 할 때가 나다웁다 하다못해 사는 것도 나에게는 연습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각박함을 허리로 이겨 나가며 춘추복을 해입는 것도 유리컵에 한송이 금잔화가 꽃힌 양식집에 가서 혼자 기울어져 있는 모습도 막연한 연습에 든다 너는 구체적으로 증명이 못되는 나를 경멸한다 아이들도 연습삼아 가끔 아빠! 라고 발성하지만 정이 든 곱슬머리 개마저 내 쌍통이 우그러진 저녁에는 착찹해서 건성으로 짖는다 이 동물의 사랑은 그중 괜찮아 보이는 연습이다 연극은 쉽게 풀어쓰면 언제든지 우리 모습을 다시 보여주기 위해 양념을 치고 간을 맞춰야 한다 짭짜름하게 나같은 싱거운 김장무가 짠지가 되도록/ 물을 주면 금새 풀이 선명해지는 마음의 적소(謫所)에 너는 사랑의 대상으로 변한다 이번만은 연습이 아닌 번민(煩悶)의 눈뜸, 중년의 재고품이 새로 만든 창에서 그 새를 조망(眺望)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다 그저 깨끗하다 빵점답게 깨끗한 큰 山의 창의 넓이를 가려버린다// 2// 날개를 접고/ 너는 가만히 물 위에 뜬/ 새/ 나른하고 가는/ 이상하게 아름다운 단선(單線)으로/ 너는 면(面)이 드러난다/ 할 수 없이/ 그늘이 진다/ 할 수 없이 나는/ 너에게 가서/ 물이 된다/ 날개를 접고 가만히 그늘이 진/ 새//

반지(半紙) / 김영태
언덕을 하나 넘으면/ 작곡을 하는 박교수 댁에 닿게 된다/ 오선지 위에 콩나물대가리만/ 문득문득 떠오르면 되는/ 그 집에 닿게 된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콩나물대가리만// 언덕을 넘어/ 그 양반이 올 때도 있다/ 눈을 뜨고 죽은 듯이 앉아 있는 내 앞에/ 눈을 감고 소죽은 듯 앉아 있다가/ 씩 하고 웃는다/ 나도 씩 하고 웃을까 말까 한다// 아름다운 음악이/ 온 세상 닻을 내리는 곳에/ 콩나물대가리만/ 오선지에 긋는 고슴도치 같은/ 선량한 그 양반과/ 날탕에 호박 같은 내가/ 무거운 머리를 출렁이며 가고 있다// 환도를 따라가는 이쁘고 가련한/ 리스처럼//

산대잡극(山臺雜劇) / 김영태
눈이/ 마지막 끗발처럼 내린다/ 몸이 더워지면/ 가동(稼動)을 하느라고 싱겁게/ 공중으로 손이 올라간다/ 올라가고 내려오고/ 싱겁게 한 발 들고/ 팔굽을 구부렸다 폈다 돌다가/ 손가락 다섯 개도/ 모양내기 바쁘다/ 마지막 끗발 같은 눈이/ 우리를 비튼다/ 대통맞은 병아리같이/ 저의를 감추고/ 본심이 요만조만한데/ 봉산(鳳山)탈 쓰자/ 신명나게 돌다 제물에 식는/ 우리 피라미 같은 것들/ 뜨거운 가마솥에/ 한데 엉켜서/ 부글부글 끓는다는 게/ 막판답다//

창(唱) / 김영태
창(唱)은 본디 목소리가 통성(通聲)으로 크게 구부러지다가 필 적에 신명이 난다. 唱을 들으면 여러 모로 나보담 권세께나 쓰는 청장나리며 우리 목을 세금으로 누르든 바싹 고삐를 조이든 상관없이 날씨마저 구중중해 비만 오락가락하는구나 마음은 이리 한없이 질척거리고 희성(噫聲) 뒤의 겸상으로 높게 한 절 빼다 자지러지는 통에 장고(長鼓)가락 없이도 어깨가 들쑥날쑥 들먹여지긴 하요 에헤랏 놓아 미천한 몸 벌산 밑에 집 한칸 마련하고 원금은 저리가라 이자만 꼬박꼬박 바칠 적에 唱은 나긋나긋 간들어지다 요요히 물줄기를 타고 한시름 토할 마당일 제 쬐그맣고 살이 메지게 이쁜 어디로 보나 숙성하고 야무진 쪽진 박윤초(朴倫初)여사 한판 장내를 휘어잡는 품이 독성(瀆聖)은 그리 곱고 된소린 저리 저물어 아뜩한지 기가 딱 차 눈빛을 타고 맴도는 성깔이 섬뜩해서 잡생각 자주 잊고 뻥해져 내장(內臟)을 세척하는 가락쪽으로 내가 굼뜬 오리같이 비척비척 걸어가 통째 안겨보는 시늉도 하고요//

음악 / 김영태
우리 맏상제는 어느 모로 보나 비틀즈 같은 장발/ 세 살 아래 아이는 뚜껑이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 저 쪽 골방房의 엄마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남편이 살고 있단다/ 지붕과 담을 뒤덮은 죽도화 향기 때문에/ 이 집은/ 가장이 약세弱勢일뿐더러/ 속세에서 떨어져나갔다는 표현이 유지되었다//

마리 로랑생 / 김영태
파리에 가 있는/ 경이 옆에/ 식탁과 개(犬) 옆에/ 새벽녘 푸른 창의 커튼이/ 주름을 만들면서 하얗다/ 모자엔 들꽃이 꽂혀 있다/ 손가락은 여전히/ 길고 투명한데/ 입술이 코 옆으로/ 빠져나가 웃고 있다/ 슬픈 점 하나,/ 사시(斜視)인 마리 로랑생이 그은/ 분홍 반점(斑點) 하나//

브르타뉴 지방 여행 –생말로 / 김영태
시인 샤토브리앙이 태어난/ 성곽 마을/ 바다는 저만치/ 에메랄드빛이다/ 성벽 어디에 지금도/ 海賊 후예가 숨어 있을 것만 같은// 팔려온 노예와 사랑에 빠지는/ 왜 그 있지, <해적> 2인무 바로 그 무대//

편지 -J의 초상肖像 / 김영태
반 고흐 생각을 자주하고 있읍니다 보리 이삭들이 바다로/ 착각되곤 합니다 여기는 영혼과 터럭은 타오르지만 물이 없/ 기 때문에 하루를 마치고 쓰러져 있을 때는 빈 뇌腦 속에 웅/ 덩이를 파고 조금씩 조금씩 물을 저장하고 있읍니다//

발라드 / 김영태
척추 밑에 떨어지는 물방울/ 쇼팽의 흰 손을/ 섬세한 비단 숨결/ 그 숨결에서 떨리는/ 미풍의 살점// 수면에 낭창거리는 햇살/ 바람은 면도날처럼/ 각(角)을 도려내고/ 적막한 물이랑에/ 미키에비츠의 시가 닿을 듯/ 닿을 듯 묻어나는 살점을/ 단단하게 굳은 뼈에/ 풀어지는 혈관/ 돌 속에 물이 흐르고/ 신경의 바늘 끝에서/ 천 개의 화살이 쏟아진다//척추 밑에 떨어지는 물방울/ 낭창거리는 물이랑에/ 영롱하게 춤추는 곡선/ 그 벼랑에서/ 우아한 품위를//

콘트라바스 / 김영태
허풍쟁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나/ 숨 쉬는 악기樂器, 너그러운/ 인간 같은 이 악기가 나는 좋다/ 비 오는 날은/ 내 몸이 퉁퉁 부었다/ 콘트라바스도 부었다/ 너를 껴안고 싶다/ 둘이 웃었다/ 가브리엘 포레 곡은/ 그 뚱뚱한 몸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도 그날은/ 그날따라 아름다워 보였다//

발레 모음곡 / 김영태
모든 눈들이/ 다 울음은 아니다/ 눈을 치켜 뜨면 눈망울이 바로/ 울음인 눈도 있다/ 서 있는 다리 옆으로/ 한없이 올라가다 제 키 위로 멎는/ 아랍풍 물방울 천에 비치는/ 脚線도 있다/ 육감적인 제 몸을/ 안을 듯하다 버리는…//

춤 / 김영태
깨알 같은 글자가/ 막혀 있는 머리는 우습다/ 깨알 같은 상형 문자는 암호 같다/ 點, 콤머, 물음표, 가끔 용을 쓰면/ 감탄 부호도 된다/ 생떡을 살짝 데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물 흐르는 소리 들린다/ 천천히, 그러다가 경련하듯/ 우습지도 않은 것들이/ 첨벙대니 우습다/ 가나다라--- 웃긴다 계속해서 마바사하//

우물가의 여인들 -南貞鎬 안무 / 김영태
빨래를 하러 나온 처녀들은/ 빨래 담은 북 속에/ 머리를 들이박고 下體로 꽃피거나/ 징검다리 圓舞를 만든다/ 허리띠를 풀고 유방도 조금……/ 지린내 구린내가 나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의 그 다섯 님프들은//

수준미달(水準未達) / 김영태
아내는 내 바람기를 지워버리려고 한다 내 바람기는 연필로 그려놓은 것이 대부분인데 손쉽게 지워지는 것도 있고 식초나 산(酸)을 써야 뿌리를 뽑히는 것도 있다 출장 며칠을 가급적 바다에서 보냈으면 하는 내 꿈을 아내를 핀세트로 끄집어 내었다. 내 몸에 식초를 발랐다 나의 비좁은 어깨의 전체 넓이를 아이들이 걸터앉아 버렸다. 이 철부지들의 뒤는 너무 어둡고 바다 모래 위에 다 드러나 있는 비밀스러운 나족(裸足)은 절망적으로 밝고 가련하다 이중섭의 뜻으로 그린 바닷가 동자(童子)들의 가죽 같은 발바닥, 미친 모래, 변칙적인 찔레꽃, 그 안에 흐르는 피의 근본적인 야성에 비하면 내 자숙자제(自肅自制)는 초라한 헛간의 풀 같기만 하다//

숨 / 김영태
무엇이든지 손아귀에 든 것은/ 보기 안 좋다/ 공기든 정치든/ 못생긴 모과머리든// 더구나 권력이 내친김에/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손아귀에 잡을 리도 없겠지만/ 손아귀에 든다는/ 착각은 보기 안 좋다/ 못생긴 모과머리도/ 타고난 이유가 있고// 백년을 바라보는 종이신문의/ 말할 권리 입을/ 틀어막지는 못하듯/ 공기든 나무의 초록이든/ 움직이는 숨이든/ 이 숨소리든 무엇이든지//
* 생전에 발표한 최후 시, 월간조선 2007.6월호 게재



김영태(金榮泰, 1936년∼2007년) 시인, 화가, 무용평론가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복고교,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59년 ≪사상계≫에 시 <시련의 사과나무> <설경> <꽃씨를 받아 둔다>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해 18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1966년부터 자유극장 동인으로 활동했고 1969년부터 무용평을 기고했다. 1976년부터는 음악펜클럽 동인으로 활동했다. 1971년 이후 7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현대문학상, 시인협회상, 서울문화예술평론상(무용), 허행초상(무용평론상), 현대무용진흥회 댄스 하트 어워드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유태인(猶太人)이 사는 마을의 겨울≫ ≪바람이 센 날의 인상(印象)≫ ≪초개수첩(草芥手帖)≫ ≪객초(客草)≫ ≪북(北)호텔≫ ≪여울목 비오리≫ ≪어름사니의 보행(步行)≫ ≪결혼식과 장례식≫ ≪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 ≪매혹≫ ≪남몰래 흐르는 눈물≫ ≪고래는 명상가≫ ≪그늘 반근≫ ≪누군가 다녀갔듯이≫
* 첨부된 그림 모두는 김영태 시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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