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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 / 성찬경
呪文 찍힌 잡동사니가/ 탑처럼 쌓이는 유기질 동굴./ 드러누우면/ 북통만한 방이 슬그머니 늘어나/ 팔 다리 뻗을 자리가 열리고/ 내가 찾는 개미 句節이/ 먼지 덮힌 책 갈피에서 기어나오고/ 구불구불 굴절하는 틈서리로/ 달빛이 스민다./ 빗방울이 천정에 海圖를 그리고/ 어린 것들은/ 유년의 마술로 기적 소리를 내며/ 책상 다리 사이로 만국 유람을 한다./ 별구경이나 할까./ 한밤중에 뜰에 나서면/ 나의 外皮인 식물들이 독 바람 속에서도/ 말 없이 푸른 호흡을 하고 있다./ 다행히 가난이 나의 편을 들어주어/ 집이 좁아질수록/ 깊이 뻗는 뿌리.//
나의 별아 / 성찬경 나의 별아./ 너 지금 어디에 있니?/ 내가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는/ 나의 별아./ 너 지금 어디에 있니?// 나의 별아./ 너는 어떻게 생겼니?/ 내가 그렇게 그려봐도 떠오르지 않는/ 나의 별아./ 너는 어떻게 생겼니?// 나의 별아./ 내가 마침내 너를/ 찾아낼 것이라고 믿어도 되겠니?/ 내 마음 하늘 신비로운 빛/ 나의 시의 별아.// |
물질 고아원 / 성찬경
우리집 마당에는/ 갖가지 물질들이 모여/ 편히 쉬고 있다/ 나와 그것들은/ 이제 한 가족이다./ 길에 버려진/ 물질고아들이 측은해 보여/ 하나씩 둘씩 데려온 것들이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마구 데려오는 것은 아니다./ 나의 감정과/ 그것들의 생김새와/ 궁합이 잘 맞아야 한다./ 묘한 곡선./ 경직한 직선./ 의젓한 무게./ 천진한 표정./ 한 때 시계였던 것/ 기타였던 것/ 삼륜차였던 것/ 승용차 백미러였던 것./ 깨진 헬멧./ 파이프./ 유리 조각./ 쇠뭉치./ 아무래도 내 기질 따라/ 광물성 물질이 많은 편이다./ 지금은 그냥 그것들 자체./ 내가 사랑하는 <오브제> 족이다./ 아침 저녁으로 그것들에게/ 다정한 시선을 보내면/ 그것들 역시 다정한 시선으로 맞으며/ 진심으로 나를 따른다./ 나의 애정은/ 시간을 타지 않는/ 이해를 넘어서는/ 절대 애정/ 담담하기 물 같고/ 신의는 쇠/ 나에 대한 저것들의 애정 역시/ 변덕 없는 침묵의 무기질 애정/ 행복한 행복한 물질 고아원./ 나는 이 고아원의 원장이다./ 이 물질고아원에서만은/ 물권이 유린을 당하는 일이 없다/ 세상의 모든 쓰레기 고아들을 다 구제해주고 싶지만/ 내 능력으로/ 그것은 몽상이다./ 사랑은 공간을/ 고무줄처럼 늘어나게 하지만/ 그것은 몽상이다/ 우리집 마당은/ 벌써 너무 초만원이다./ 나는 나와 인연이 닿은 물질고아들을/ 돌보는 수밖엔 없다.//
물권시(物權詩) / 성찬경
<물권>이란 말이 사전에 있는지 몰라./ 호기심이 나서 한번 찾아보니/ 야아, 있긴 있는데, 이건 너무 했다.// 물권: 재산권의 하나/ 특정한 물건을 직접으로 지배하는 배타적 권리./ 즉 사람의 행위를 개입시키지 않고/ 물건에 관한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권리.// 이렇게 정의를 내려놓고 나서 그 예로/ 소유권, 지상권, 영소작권(永小作權)/ 지역권, 유치권, 선취득권, 광업권, 어업권,/ 따위를 열거하고 있으니 이 ‘물권’은/ 내가 생각하는 <물권>과는/ 정반대의 개념일 뿐이다./ 결국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옹호하는 권리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 의식의 경직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산업공해가 안 올 리가 없다.// 전에 어떤 책에서/ 영원한 기성(棋聖)인 오청원(吳淸源) 9단이/ 바둑돌의 권리를 <석권(石權)>이라 했던 일이/ 생각난다./ 물권이건 석권이건/ 목권(木權)이건 지권(地權)이건/ 산권(山權)이건 수권(水權)이건/ 금속권이건 화권(火權)이건 대기권이건/ 또는 무슨 권이건 간에/ 탐욕을 버리고/ 마음이 가난해져야/ 세상의 평화가 오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놀라운 사실이 있다./ 우리의 육신의 자양이 되는 것은/ 공기, 물, 소금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곤/ 모두가 생명체이다./ 물고기나 짐승들은 말할 것도 없고/ 쌀, 보리, 밀, 팥, 콩, 무, 배추, 깨, 온갖 과일,/ 뭣하나 생명체 아닌 것이 없다./ 어떤 목숨이 죽어야 우리가 산다./ 딴 생명의 희생으로 생명이 이어진다./ 눈물로 보답은 못 할망정./ 지구는 우리의 유일한 집./ 온 우주에서 제일 아름다운 집./ 원래는/ 수정같이 맑고 시원한 물 흐르는/ 젖과 꿀 흐르는/ 곰삭은 새우젓 국물도 흐르는/ 송이버섯 향기 이는/ 지구./ 지금은/ 피부도 내장도 썩어들어가/ 빈사상태에 임한/ 지구,// 새 정의를 내려야 한다.// 물권 : 물질도 스스로 영묘한 얼개와 내용을/ 인간처럼 주장할 수 있는 권리/ 더 낳아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부칙 : 1. <물권>을 존중하는 자는/ 번영과 평화를 누린다./ 2. <물권>을 유린하는 자는/ 필히 망한다.//
술 / 성찬경
술//
* 註 : 「一字」일명 「絶對詩」다. 「술」한 자로 시의 제목도 내용도 끝난다. 다만 넓은 백지의 여백이 「술」과 수작한다. 「술」은 「술!」하고 짧게 소리내야 한다. 「바다가 포도주 몇 방울에 취해서 파도가 높아진다」는 폴 발레리의 명시가 있다. 나는 이 시에서 정성들여 잘 빚은 한국의 약주를 생각한다. 술에 취한 백지에서는 어떤 감홍의 파도가 일까.
똥 / 성찬경
똥//
* 이 시도 일자시다. 똥 한 글자에 시의 제목도 시의 내용도 다 들어 있다. 요소시의 추구에서 일자일행시가 나오고 거기서 또 일자시가 나온다. 일자시에는 절대시라는 이름이 맞겠다. 세상에 이 이상의 절대시가 또 있을 수 있겠는가. 굵고 긴 똥자루 하나가 ((사윗감으로 최고다)) 뚝 떨어진다. 똥은 땅과 울림의 맥이 통한다.(해설 : 이승하 교수 ‘백년 후에 읽고 싶은 백편의 시’)
시작법(詩作法) / 성찬경
美國産 고기, 마늘, 토마토 주스/ 韓國에서 가지고 온 고춧가루, 인삼 환약/ 따위가 마구 유기질 불을 땐다./ 두 개의 볼 저장고에/ 불의 진액이 찰름 고인다./ 나는 절대 이 진액을 쏟지 않는다./ 정신 통일과 명상으로 이 진액을/ 등뼈의 대롱을 통해 위로 퍼올린다./ 뇌수의 봉우리에 고인 湖水가/ 무섭게 퍼래지고 하늘이 코발트색으로 갠다./ 여기에서 별똥별과 물과 불이, 기쁨과 슬픔이/ 서로 얽혀 연애하며 창조한다./ 꿈의 말이 말굽소리 없이 달린다./ 뉴욕의 地下鐵이 이미 分解되어/ 예쁜 암수 나사다./ 늙은 기억, 어린 기억, 썩은 기억, 빛나는 기억들이/ 元素로 돌아갔다 다시 엉겨/ 무지개를 放射하는 구슬이 된다./ 나는 그것을/ 창세기 이래 詩人 中의 詩人인/ 예수 그리스도의 턱수염에 비빈다./ 그러면 그 속에 목숨의 靈液이 스미고/ 숨이 통한다./ 나는 그것을 時間 속에 던진다.//
나사 1 / 성찬경
길에서 나사를 줍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암나사와 수나사를 줍는 버릇이 있다./ 예쁜 암나사와 예쁜 수나사를 주우면 기분좋고/ 재수도 좋다고 느껴지는 버릇이 있다./ 찌그러진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투박한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큼직한 수나사도 쓸 만한 건 물론이다./ 나사에 글자나 數字나 무늬가/ 음각이나 양각이 돼 있으면 더욱 반갑다./ 호주머니에 넣어 집에 가지고 와서/ 손질하고 기름칠하고/ 슬슬 돌려서 나사를 나사에 박는다./ 그런 쌍이 이젠 한 열 쌍은 된다./ 잘난 쌍 못난 쌍이/ 내게는 다 정든 오브제들이다./ 미술품이다./ 아니, 차라리 식구 같기도 하다.//
나사 2 / 성찬경
단편(斷片)을 이어 문명(文明)을 쌓는 나사/ 너 종지부(終止符). 너를 또 잇는 나사는 없구나./ 세발자전거도 <바이킹1호>도/ 너로 하여 한 단위가 된다./ 단순 유현한 결합의 원리./ 이제 길에 버려진/ 고아 나사여/ 흘허간 당적(黨籍) 번호 cp1038./ 나선(螺線) 홈이 문드러진/ 파시의 파편./ 네게 오늘 전신(轉身)을 주마./ 너를 오브제로 부활시키마./ 너는 이제 정신의 무리에 들라./ 너는 이제 왕자./ 너로 하여 쌓인 문명을/ 너를 쓰다 버린 문명을/ 싸늘히 비웃어라./ 나사여. 나의 금붙이여.//
나사 3 / 성찬경
문맥에서 벗어나/ 의미를 잃은 너./ 모선에서 버림받아/ 영원한 미아가 된 것 이외에/ 딴 의미가 없는 너./ 허나 의미의 영점에서 피어나는 절대 의미./ 야릇한 값의 전환.// 그렇다. 너는 원점./ 너는 다만 질량./ 젖과 숲이 드러난 여체/ 너는 해방/ 자유.// 너에게서 이제 점 연상이/ 성좌처럼 슬픈 불을 켠다./ 너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흔적은/ 상승하는 원형 계단./ 허나 너는 처음부터 하늘에 오를 운명은 아니었다./ 오르려다 역전해서 떨어졌다./ 땅에. 어둠에.// 너에게 자연히 이어지는 말들이 있다./ 골이나 염통의 구실이 아니라 너처럼 나사 구실을 하는 말들./ 가, 을, 에, 로라, 따위의 기능어/ 기능어의 또 붕괴/ 그 부스러기를 주워 모아/ 묵주를 꿰어 볼까./ 목에 걸고 다녀 볼까.// 넘쳐 흐르는 무슨 소리, 무슨 빛깔/ 무슨 골격보다도/ 나의 심성을 두드리는/ 12음의 예술가./ 타악기여./ 주자여./ 타는 손 부는 허파가 보이지 않는/ 벌레 소리처럼/ 다만 맑고 가늘고/ 모질고 둥근/ 순수의 무게여.// 문명의 땅에 떨어진/ 무서운 예언의 비둘기/ 한 조각의/ 나사.//
시에 / 성찬경
너 네 心靈이 맑게 개고/ 그 속에 하늘의 뜻이 비칠 때가 아니면/ 읊어서는 안 된다.// 너의 心靈이 눈을 비비며/ 스스로의 六重 비밀 투구를 뚫고/ 그 속에서 엷은 웃음짓는/ 너의 먼 옛모습을 찾을 때가 아니면.// 너 네 心靈이 활활 타서/ 뼈의 고뇌와 피의 행복을/ 꽃 별 밭 위에 구름처럼 뛰울 수 있을 때가 아니면,// 그래서 이미 너의 心靈이 너의 것만일 수가 없어/ 홀가분하게 나서 뭇 사람의 마음을/ 가난한 마음이 되게 할 수 있을 때가 아니면/ 아아, 읊어서는 안 된다.//
사람 같은 시 / 성찬경
사람 같은 시./ 육신과 영혼이/ 하나인 시./ 영혼의 기둥과/ 육신의 파동이/ 나선으로 껴안으며 상승하는 시./ 감미로움과 고통이 부부인 시./ 신장결석이 사리 사리가 신장결석인 시./ 그리움의 수정水晶./ 수정의 향香./ 탄생에 죽음의 마침표가 찍혀 있는 시./ 신성한 우주의 원소로 돌아가서/ 무시무종/ 무시간의/ 골짜기에서/ 태몽 공장의/ 기술자 노릇을 하는 시./ 쓰고 싶은 시.//
보석밭 / 성찬경
가만히 응시하니/ 모든 돌이 보석이었다./ 모래알도 모두가 보석알이었다./ 반쯤 투명한 것도/ 불투명한 것도 있었지만/ 빛깔도 미묘했고/ 그 형태도 하나하나가 완벽이었다./ 모두가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보석들이었다./ 이러한 보석이/ 발 아래 무수히 깔려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하늘의 성좌를 축소해 놓은 듯/ 일대 장관이었다./ 또 가만히 응시하니/ 그 무수한 보석들은/ 서로 빛으로/ 사방 팔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빛은 생명의 빛이었다./ 이러한 돌밭을 나는 걷고 있었다./ 그것은 기적의 밭이었다./ 홀연 보석밭으로 변한 돌밭을 걸으면서/ 원래는 이것이 보석밭인데/ 우리가 돌밭으로 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것 모두가 빛을 발하는/ 영원한 생명의 밭이/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이다.//
삼금(三吟) / 성찬경
1/ 달빛을 품은/ 그대 마음이/ 고운 모시발로 비쳐 보인다.// 2/ 찬 소파에서/ 찐 번데기처럼 쪼그리고 잠이 드니/ 꿈에 내가 나의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니/ 나는 자꾸 없어지고/ 남는 것은 이를테면 옹달샘 언저리처럼/ 그냥 없는 듯이 투명한 기운뿐이라/ 보기 드문 비밀을 본 듯 숙연해져/ 깨어 보니 썰렁한 어스름일세// 3/ 해 떨어지니/ 고기 잡는 이의 모습이 까맣다/ 산도 까맣다/ 까만 산 속에/ 공간을 빨갛게 녹이는/ 호롱불 하나가/ 왜 나의 마음을 그렇게 사로잡는지/ 모를 일/ 이윽고 호롱불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람은 안 보이고/ 불만 간다//
벌레소리 / 성찬경
잠자면서 나는/ 다시 벌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벌레 음악의 장단이/ 느렸다 빨랐다 하며/ 출렁이고 있었다./ 나는 깊이 가라앉았다./ 앝게 떠올랐다 하고 있었다./ 처음엔 한 가닥 실올이던 그 소리가/ 어둠의 사해에 합주로 번져/ 뭇 성좌가 일제히 빛을 터뜨리듯/ 빛났다./ 나의 영혼도 빛났다./ 이때 나는 아름다운 나그네였다./ 벌레의 대위법의 흐름은/ 먼 길이었다./ 그 아득한 끝에 초생달 같은/ 하늘의 문이 열려 있었다.//
내가 겨울을 / 성찬경
내가 겨울을 가게 한 것이 아니다./ 봄이 절로 온 것이지/ 나는 창조하듯 기다리는 것을 배웠다/ 그때 바람 불고 황량하고/ 육신이 피흘리며 난파할 때/ 나의 심령의 도가니는 오히려 달아 있어,// 나는 부러진 숙명의 칼을 뽑고/ 화려한 저주를 던지며/ 홀아비의 짙은 기쁨을 춤추었다.// 나의 심장 소리도 달라졌다/ 징 박아 돌 깨치는 소리에서/ 차츰 목관음으로// 바람 속에 있었던 나의 가지는 모두 얼어 죽고/ 훍에 묻혔던 움만이 살아서/ 다시 한 살을 먹는다// 역사는 내 둘레에서 이젠 <카멜레온>을 여의고/ 태양에 묶인 유성처럼/ 뱅뱅 돌기 시작한다.// 훈향과 함께 크나큰 것이 보이기 시작하자/ 지금 나는 평화 속에 있다/ 그러나 나는 크게 기쁘지 않다// 나의 영원의 반 토막이 달아났다/ 그러나 나는 크게 슬프지 않다/ 나의 영원의 남은 토막이 졸졸 흘러내린다// 내가 봄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봄이 절로 지나는 것이지/ 나는 기다리듯 창조하는 것을 배운다//
곶됴코여름하나니 / 성찬경
곶됴코여름하나니/ 꽃도 좋고 열매도 풍성하다지만/ 요즈음엔 그날이 그날 같은 나날을/ 공들여 헤쳐나가는 일에 더 마음이 쏠린다./ 이마의 땀방울을 말릴 겨를도 없어/ 부지런히 그러나 무리없이/ 신경과 근육을 부려야 한다./ 몸 노동이건 마음의 노동이건/ 험한 노동이건 또는 예쁜 노동이건/ 요컨대 노동은 근육이다./ 다리는 몸무게를 지탱하고/ 팔은 여러 등급의 무게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은빛으로 물들어가는 인생이다./ 만년필 30g./ 밥 한 공기 200g./ 등산 장비 7kg./ 가만히 만져보는 방울새의 깃털 25mg./ 정말 천상적(天上的)이다./ 각기 다른 무게를 은밀히 음미하는/ 재미의 밀도의 미묘한 파동./ 그런가 하면/ 바라보기만 하는 무게도 있다./ 터키의 역도 영웅 슐레이마눌루 생각이 난다./ 요즈음 남극 바다를 표류한다는/ 제주도만한 빙산은 5억톤./ 지구는 5.975×1021g./ 태양은 2.19×1027톤(지구의 약 33만 배)./ 이 넓은 둥우리의 품안에서/ 내가 들어올릴 수 있는 것은/ 나의 원죄(原罪)값이고/ 그 이상은 은총이다./ 나의 존재의 무게./ 순간 뿌리깊은 고뇌의 그림자가 스친다./ 이 무게를 달 수 있는/ 형이상학적 저울도 단위도 없지만/ 대개의 경우 썩 가볍거나/ 너무 무겁거나 하다./ 사전 하나가 역기 구실을 하는 요즈음/ 무게와 교섭하는 근육의 탄력에서/ 저울 바늘처럼 떨리는 재미를 발견하며/ 나는 나의 둘레의 사물의 숲과/ 한층 더 친해진다.//
몸부림 / 성찬경
칠십 평생 사느라 무한량에 가까운 기운을 탕진했다./ 더러는 그 기운이 微光(미광)어리는 예술의 사리로 갔다./ 나머지는 흔적도 없이 허무에의 제물로 사라졌다.// 진이 거의 바닥나 몸이 몸부림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안으로 스며 이어지는 것은 이를테면 마음의 몸부림이다./ 이 轉位(전위)된 몸부림은 고뇌를 곱게 빻는 파동으로 퍼진다./ 요즈음은 자나깨나 이 파동으로 내가 나를 가눈다.// 70년대를 인생의 황금기로 꽃피우려는 나의 마지막 염원./ 어쩌랴 변환자재한 도깨비 '엔트로피' 놈이/ 눈 깜빡할 사이 70대 10년의 반을 또 먹어버렸다.// 허나 마음이 궁극임을 하늘 걸고 믿는 나는 안 흔들린다./ 관조와 달관의 달구경은 끝내 내 체질이 아니다./ 오늘도 나는 피땀 밴 마음의 몸부림/ 설렘의 파동으로 아늑한 별을 쏜다.//
달 / 성찬경
달이여/ 달이여/ 쏘련제/ 로켓트로/ Hymen을 찢긴/ 아름다운/ 아름다운/ 빛의 호수여//
추사 김정희 선생 / 성찬경
모두들 넋 잃고, 말도 잃고 감탄하다가/ 이윽고 앞을 다투어 붓을 들어/ 있는 솜씨를 다해 題贊한다./ 하나같이 추사의 아득한 경지를 기리며/ 古今이 일반인 高士의 不遇를 비통해하니/ 이들의 시문은 이를테면/ 추사의 主唱에 和答하는 장엄한 交響이랄까,/ 우선은 마치 한 가지에 주렁주렁 열려 있는 열매처럼/ 이 시문을 세한도에 이어서 꾸며/ 그것을 다시 추사에게 보냈다./ 추사는 길게 불어난 세한도를 보고/ 마음의 벗이 四海에 널려 있음을 실감하고/ 얼마나 맑고 황홀한/ 기쁨과 위안을 얻었을 것인가.//
秋史의 글씨에게 / 성찬경
몸통을 틀며 꼬리를 튕기며 하늘을 찢는 비늘 돋친 용(龍)./ 시기하는 눈알하고 천 길 낭떠러지를 뛰며 오르내리는 성난 호랑이./ 허나 이젠 용(龍)이 너에게 늘어져서 힘을 빌린다./ 너에게 근육(筋肉)을 빼앗긴 호랑이도 더는 뛰지를 못 하는 병신이다.// 어느 천둥벌거숭이가 너의 모험(冒險)을 겁없이 바라보랴. 어느 제왕(帝王)의 횡포가./ 어느 미치광이가. 어느 귀신(鬼神)이 너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흉내내랴./ 비단을 吐하는 누에의 솜씨보다도 쉽사리 네가 마구 뿌리는 그 절묘(絶妙)한 멋을/ 어느 제비의 비상(飛翔)이. 어느 선녀의 너훌거리는 옷자락이 한 번인들 지녀 왔으랴.// 너의 주춧돌도 기둥도 대들보도 그 위에 박힌 온갖 잔 못까지도/ 모두가 山 위에 제멋대로 뒹구는 무심한 광물(鑛物)처럼 스스로의/ 온통 온전한 모양과 무게에 매혹(魅惑)되어 깊은 잠 속에 가라앉는다./ 그러면서도 하늘의 성좌(星座)처럼 어김없이 서로의 자리를 눈뜨고 지킨다.// 규우브니 훠어브니 하는 이십 세기의 회오리바람이 너로 하여 비롯된다./ 데포르마숑이 너로 하여 기계(機械)다운 기계(機械)가 된다. 너로 하여/ 피라미드처럼 쌓인 울적이 무산(霧散)한다. 팽창한 자의식(自意識)이 작열(灼熱)한다./ 벽에 밴 오랜 곰팡내가 가신다. 해풍(海風)이 밀려온다.// 무슨 슬기가 야릇하게 홍소(哄笑)하는 너의 표정(表情)의 뜻을 샅샅이 풀어낼 수 있으랴./ 불순(不純)을 산산이 바수는 무슨 치도곤(治盜棍)이 너처럼 무자비하랴./ 너를 키운 한국(韓國)이란 물, 한국(韓國)이란 땅, 한국(韓國)이란 바람은/ 너의 천둥 같은 나래 소리로 해서 길이 멀리 떨칠 자랑을 간직한다.//
교차 / 성찬경
땅과 하늘의 교차 없이/ 맺어짐이 뭣 있으리오// 번쩍 십자로/ 써는 퍼런 날// 패인 골짜기/ 싸게 도는 피의 여울// 아픔 나누는 것이/ 황홀 나누는 것이// 맺어짐의 신비의/ 극치가 아니리오// 혼이 살 되고/ 살이 혼 되는// 무덤의 어둠을 뚫지 않고/ 어이 다시 난다 하리오//
꽃과 바위 / 성찬경
태양에 제일 가까이/ 접근한 지금 너는/ 피어오른 꽃./ 허나 너도 언젠가는 바위였었지.// 태양에서 제일 멀어져/ 선회하는 너는 지금/ 이끼낀 바위./ 허나 너도 언젠가는 꽃이 되지.//
나쁜 나무 좋은 나무 / 성찬경
나쁜 나무에 좋은 열매 열릴 수 없고/ 좋은 나무에 나쁜 열매 열릴 수 없다./ 마음에 선량한 생각이 깃들면/ 행실의 열매는 향긋하고/ 마음에 나쁜 설계가 숨어 있으면/ 행동의 뿔이 남을 받는다./ 선은 뭐고 악은 뭐냐/ 하고 다지기 시작하면 시간이 바닥난다./ 선악의 피안에서!/ 그럴듯한 표어지만/ 이런 것은 십중팔구 겉멋이다./ 나무의 교훈 중에서 제일 큰 것은/ '절대적 수동성' 이것이다./ 그 안에 얼마나 눈부신 자유가/ 별처럼 빛나고 있는가./ 얼마나 넉넉한 여유가/ 아마존처럼 흐르고 있는가./ 양심의 바늘의 떨림 따라/ 단화單化의 빛을/ 더듬을 일이다.//
이것이 내 식이다 -나는 정신이 멀쩡한 미치광이다.(살바도르 달리) / 성찬경
그렇다. 나는 건전한 기인이다./ 길에서 유리 조각을 주워/ 집에 가지고 와서 잘 씻어 유리병에 넣는다./ 유리병이 차츰 유리 조각으로 차오른다./ 나는 유리병에 '파편, 순수물질, 너는 너다'/ 하고 써붙였다./ 나의 오브제 작업 중에서/ 가장 수준 높은 작품이 나왔다./ 일하다가 그 일보다 더 재미나는 일이 생각나/ 하던 일에 괄호를 여는 기분으로 새 일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더 멋진 일이 생각나/ 또 괄호를 열고 그 일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더욱더 기막히는 일이 생각나/ 다시 괄호를 열고 신종 활동에 착수한다./ 이런 식으로/ 나는 이제 괄호의 첩첩 성곽에 유폐돼 있다./ 나는 'I ruin, I ruin'을 곱씹는 끝없는 방랑자다./ 언제 이 미궁에서 벗어나/ 아득한 처음의 자유를 찾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절대 절망하지 않는다./ 아직도 아슬아슬하게 끊기지 않고 있는/ 희망의 끈을 꽉 잡고 있다./ 나는 결코 시대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 다만 주시한다./ 나의 행위와 대만민국의 헌법과는/ 서로 무해무덕한 관계에 있다./ 불편하면 예술을 잠시 제단 위에 올려놓는다./ 불편이 가시면 다시 내린다./ 즐거움은 먹고/ 슬픔은 맛본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 으뜸가는 매혹의 땅./ 그 곳에 나는 가상의 예술관을 짓고/ 그 안에서 작업한다./ 이 때 피카소는 나의 코치 겸 조수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재능의/ 잔가지밖엔 꽃피우지 못했다./ 그 바람에 수명은 연장됐지만/ 아아, 꿈에 그리는 五體投地의 沒人./ 완전연소./ 그런 때가 끝내 오기는 올 것인가./ 인생의 바탕은 비극./ 현상은 희극./ '슬프지 않은 음악이 어디 있더냐.'/ 슈베르트의 이 말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양혼의 눈으로 악보를 보는 지휘자가/ 명 지휘자지요.'/ 어느 젊은 지휘자의 말, 백 퍼센트 찬성이다./ 인생은 整理와의 전쟁이다./ 엔트로피와의 혈투다./ 필요한 것은 지속의 의지다./ 그것을 얻으면 이미 凡人이 아니다./ 배가 고프다./ 저녁밥은 보나마나 백만불 짜리./ 지금 기쁨! 지금 기쁨! 하고 중얼거린다./ 고백하건대 나는 祈福의 노예다./ 인간이 완벽을 기하기란 불가능하지만/ 결함이 사라질 때까지 작업을 계속할 수는 있다./ 힘 센 놈은 피한다./ 중독의 맛을 모르는 인생은 불쌍하다./ 다만 유행에서 벗어난 중독이라야/ 파산을 면할 수 있다./ 예컨대 매운 고추 맛 중독./ 매운 고추가 정직하고 선량하다./ 아무리 기막히는 얘기라도/ 다 듣고 나면 그렇고 그런 얘기./ 그 사이 감정의 격랑 속에서/ 번롱당한다./ 제발 5분 이내로 줄여주시오./ 시대의 말 노리개 코드, 패러다임./ 유행어엔 관심 없다./ 이것이 내 식이다.//
사랑사리 / 성찬경
날 괴시는 님의 마음 닮아 내 마음 님 괴고/ 님 괴는 내 마음 닮아 님의 마음 날 괴시니/ 서로 닮아 괴고 괴고 괴고 괴고 괴고 괴고/ 이렇게 더욱더 괴고 괴고 괴고 괴어/ 마침내 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내 마음이 님의 마음 되어 서로 하나로 괴어/ 괴는 불이 뜨겁게 일어 더욱 타고 더욱 달아/ 빨갛게 다는 고비도 넘어 퍼렇게 다는 고비도 넘어/ 마침내 희게 다는 고비에 이르니/ 거기에 또 서로 괴고 괴는 마음의 전기가 흘러들어/ 오래오래 구워져 영글어/ 사기도곤 단단하고 금강석도곤 단단하고/ 이슬도곤 맑고 예쁜 빛을 뿌리리/ 일러 사랑사리일러라.//
지도 3 -리듬 타령 / 성찬경
몸은 굳어 느릿느릿/ 시간을 따라잡지 못하지만/ 마음엔 변함없이 번갯불이 남아 있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프레스토도 있고/ 銳角도 있고/ 급선회도 있다.// 랄랄라/ 랄랄라/ 경쾌한 리듬 따라/ 랄랄라/ 랄랄라// 리듬./ 장단./ 박자.// 모두 맥이 통하는 말들이지만/ 여기서는 '리듬'을 고르기로 한다./ '장단'이나 '박자' 가지고는/ '리듬'이 품고 있는 뜻을 감당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리듬 감각',/ 참 좋은 말인데/ '장단 감각'은 좀 이상하다./ 물론 '리듬'이나 '장단'이나 다 어엿한 뜻의 마을이지만.// '리듬'의 언저리에 떠도는 말./ 파동./ 출렁임./ 돌고 도는 세상./ 여름이 돎을 타고 있다./ 그러니 다시 여름이 오기 전에/ 가을도 오고 겨울도 오고 봄도 오는 거지./ 그러니 여름엔 가을도 겨울도 봄도 다 들어 있는 거지.// 고희를 넘기고 생각해보니/ 인생은 리듬./ 이것 하나 깨닫는데 평생이 걸렸다.// 늦게라도 실감했으니 망정이지./ 리듬 인생 즐겁구나./ 랄랄라/ 랄랄라// 리듬 따라 출렁출렁/ 떴다 가라앉았다/ 그러니 인생이 호습구나* (호습다:알맞게 출렁거려 기분 좋다)// 밑바닥에 닿으면/ 다시 솟는 수밖엔 없다./ 그러니 절망이 희망이지./ 보름달 안엔 초승달의 모습이 제일 많이 들어 있지.// 아뿔사 반세기 전/ 그 땐 인생의 리듬이 무엇인지를 미처 몰랐다.// 한 번 양지바른 봉우리에 오르면/ 따뜻하고 기분 좋아/ 내려올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지./ 리듬을 억지로 비튼 거야./ 그러니 쿵/ 아이구 추락이야.// 바닥에서 끝도 없는 방황의 외줄타기였어./ 음습하고 여기저기 독버섯이/ 색동옷처럼 피어나서 나를 유혹했었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천행이었어.// 절대절명의 하루하루였어./ 오죽하면 굴욕을 꿀물처럼 들이켰겠나./ 무모하게도 리듬에 정면으로 도전한 거야./ 그래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 퍼런 발광체가 눈을 부라렸지./ 그러니 청춘만한 보배가 없는 것 아냐./ 그리곤 地天命의 고개를 넘었으니/ 그것도 결국 天命이었어.// 리듬 타면 즐거워./ 랄랄라 랄랄라/ 리듬 타면 황홀해/ 랄랄라 랄랄라// 저 소리 좀 들어봐./ 목수가 톱질하는 소리./ 사악 사악 사악 사악/ 저게 바로 근육의 음악이지./ 대패질하는 소리./ 싸악 싸악 싸악 싸악/ 저게 바로 노동의 낙원이지.// 리듬 리듬 리듬 리듬/ 리듬 타면 리듬 타면 리듬 타면 리듬 타면/ 거기에 『창세기』가 있어./ 그렇게 그렇게 리듬을 타기만 하면/ 군더더기는 모두 사라지고/ 순간이 순간이 순간이 순간이/ 그냥 그냥 그냥 그냥/ 영원으로 이어져.// 들어 봐 들어 봐/ 저 파도 소리/ 파도 부스러지는 소리./ 한 여름 매미 소리./ 꿀벌 날개 붕붕 소리./ 순간과 영원의 관절/ 그 희귀한 點의 소리.// 리듬 리듬 리듬 리듬/ 리듬 타면 리듬 타며 리듬 타면 리듬만 타면야.....// 아아 아아 아아 아아/ 들어봐 들어봐/ 빙하가 산을 째고/ 기어가는 소리.// 리듬을 타면 리듬을 타면/ 출렁출렁 장단 맞춰 리듬을 타면/ 진폭이 점점 커진다./ 그럴수록 계속 장단 맞춰 리듬을 타면/ 진폭이 끝도 없이 끝도 없이 끝도 없이 무한대로 커진다./ 그것은 무한대의 힘이다.// 그러니 리듬을 탄다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이다./ 리듬을 타면/ 인생은 나선형이 상승 곡선./ 어깨에서 힘을 빼고/ 리듬을 타기만 하면야/ 힘이 너무 안 들어./ 슬슬 저절로 돌아간다./ 그 재미가 참 재미다./ 리듬의 묘리를 깨달은 인생은/ 더 바랄 게 없는 인생이다.// 리듬에서 예술이 나왔어./ 리듬을 타면/ 슬픔도 기쁨이 돼./ 기쁨이 리듬을 타면 리듬을 타면/ 그것이 웬지 슬퍼지거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9번 E 플랫 장조/ KV 271 2악장처럼 말야.// 극미에서 극대까지 돌아가는 원리는 다 리듬이야./ 암캐밍돠 수개미가 리듬 타며 바르르 떨고 있다./ 그 微音을 인간은 못 듣는다./ 하늘의 소용돌이도 다 리듬이야./ 장단 맞춰 돌고 도는 태양계./ 명왕성의 공전주기는 250년./ 태양계가 들어 있는 은하도 돌고 있다./ 은하가 1000억개 쯤 모여 있다는 이 우주도/ 장단 맞춰 돌고 있는데/ 그 규모가 너무도 엄청나게 커서/ 방향을 걷잡을 수도 없다.// 극미와 극대 사이에/ 인간의 리듬이 있다./ 인생의 리듬이 있다.// 인생의/ 리듬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을/ 성현이라고도 하고 천재라고도 한다./ 세종대왕도 그 중 한 분이시다.// 길 갈 때 리듬을 찾아야 한다./ 修道와 求道에도 리듬이 있다./ 아우스딩 성인도/ 프란치스코 성인도/ 리듬의 천재였다.// 리듬 따라 생각하고/ 리듬 따라 먹고/ 리듬 따라 걷고/ 리듬 따라 쉴 일이다./ 그러면 혈압이/ 저절로 내려온다.// 리듬은 즐겁다./ 리듬은 기적의 산실이다./ 리듬 타는 사람은 단념하지 않는다./ 평생 배워도 끝이 없는 것이 리듬이다./ 리듬은 뎃생이다./ 리듬이 뒤틀릴 때/ 그 불협화음으로 고막에 금이 간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늘의 리듬. 이보다 더 큰 은총은 없다./ 리듬의 짐미를 아는 이는 참 행복자다./ 푸른 하늘/ 흐르는 구름.// 리듬으로 리듬으로/ 근육이 울퉁불퉁./ 리듬으로 리듬으로/ 마음에 강철 심지가 박힌다./ 리듬 리듬 리듬 리듬/ 리듬에 살고/ 리듬에 죽자.// 랄랄라/ 랄랄라/ 리듬은 기뻐.//
호화생활 / 성찬경
오늘도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슈베르트와/ 세계 일류의 연주가들을 부려먹었다./ 나는 사정없는 주인이었고 그들은 불평없는 머슴이었다.// 리모콘 단추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낯익은 곡들을 듣고 또 듣고 듣고 또 듣는다./ 아아, 어느 제왕이 나 같은 호화생활을 누렸겠는가.// 너무 가혹하지 않아? 가책도 느끼지만/ 나는 이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 미美의 나라가 열리고 슬픔이 빛나지 않는가./ 문제 많은 현대문명이지만/ 이러한 기적을 낳기도 한다./ 나는 오는 날도 오는 날도 호화생활을 이어간다.//
은총을 내려 주시는구나 / 성찬경
은총을 내려 주시는구나./ 야속하다 싶을 만큼 묘하게/ 표 안 나게 내려 주시는구나./ 슬쩍 떠보시고 얼마 있다가/ 이슬을 주실 때도 있고/ 만나를 주실 때도 있고/ 밤중에/ 한밤중에/ 잠 못 이루게 한 다음/ 귀한 구절 하나를 한 가닥 빛처럼/ 내려보내 주실 때도 있다./ 무조건 무조건 애걸했더니/ 이 불쌍한 꼴이 눈에 띄신 모양이다./ 얻어맞아도 얻어맞아도/ 그저 고맙다는 시늉만을 했더니 말이다./ 시늉이건 참이건/ 느긋하게건 절대절명에서건/ 즉시 속속들이 다 아신다. 다 아신다./ 그러니 오히려 안심이다./ 벌거벗고 빌면 그만이다./ 은총을 내려 주시는구나.//
바스락바스락 작업을 한다 -제일 좋은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로버트 브라우닝) / 성찬경
주문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흥얼거리며/ 바스락바스락 작업을 한다./ 단박에 걸작이 나오나./ 바스락바스락 작업을 한다.// 밥먹다가도/ 글자 몇 자 끄적끄적 끄적이기도 하고/ 잠자다가도 생각만 나면/ 신문지를 가위질하여 스크랩 북을 채워나간다.// 바스락바스락 작업하는 재미는/ 내가 지금까지 발견해 온 재미 중에서/ 단연 으뜸가는 재미다.// 80대를 내 인생 최고의 황금기가 되게 하는/ 마지막 남은 나의 전략이 이것이다./ 바스락바스락 작업을 한다.//
우리 우주 / 성찬경
과학자가 말하기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말고도/ 무수히 많은 우주가 또 있을 것이라 하니/ 그렇다면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우주를/ ‘우리 우주’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또 말하기를 이 ‘우리 우주’가/ 어떤 다른 우주의 ‘블랙 홀’ 안일지도 모른다 하니/ 우주 집단이란 한도 없이 넓고 클 뿐만 아니라/ 현기증이 날 정도로 복잡하고 기기묘묘한 것인가 보다.// ‘아날로그’ 시대까지만 해도 ‘우리 우주’는/ 아늑하고 낭만 흐르는 곳이었는데 ‘디지털’ 시대가 되니/ 폭발적으로 팽창하고 요동쳐// 우리 생가 초가삼간 이 지구도 흔들흔들 무너질 지경이다./ 두어라 천지창조 비화의 내막이야 어떻든/ 나는 지구의 고향 이 ‘우리 우주’를 사랑하리라.//
거리가 우주를 장난감으로 만든다 / 성찬경
알맞게 구름이 끼어 있으면/ 해도 잘 익은 감 정도여서/ 오래 보며 놀 수 있다./ 사실은 지구에서 해까지/ 광속으로 8분 걸리는 거리 덕택으로/ 해가 저렇게 예뻐 보이는 것이다.// 개똥벌레의 정기총회 같은/ 하늘의 별자리./ 구경 치곤 세상에서 으뜸이다./ 그러나 저 별까지의 엄청난 광년의 거리가 있기에/ 무시무시한 불덩어리들의 모임이/ 저러한 신비의 향연이다.// 거리만 있다면야/ 장비도 골리앗도 무서울 게 없다./ 막 폭발한 성운의 사진이/ 영혼의 심부까지 스미는 추상화다./ 직업 화가를 난처하게 만드는.// 거리가 있기에 우주 구석구석이 서로 재미나는 장난감이다./ 인간 둘레/ 무량 광명/ 거리가 자비다.//
예수님은 시인 / 성찬경
예수님./ 당신은 진실로 시인중 시인이십니다./ 시인의 위대한 할아버지로/ 세인은 흔히 호머를 꼽습니다만/ 당신은 바로 호머의 아버지이십니다.// 시의 핵심이 은유에 있다면/ 당신의 신묘한 은유를 능가할/ 은유가 세상에 없습니다./ 시의 핵심이 정열에 있다면/ 당신의 그 거룩한 불을 따를/ 불이 세상에 없습니다.// 시의 핵심이 아름다움에 있다면/ 들에 핀 백합과도 같은 당신의 시구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아름다움과 견줄 만한/ 아름다움이 세상에 없습니다.// 시가 생명력의 맺힘이라면/ 진실과 진리의 그릇이라면/ 당신의 말씀의 생명력과/ 감동과 진실과 진리 앞에선/ 모두가 그것을 한번 닮아보려고/ 애쓸 뿐입니다.// 시가 상징의 숲이라면/ 당신의 상징의 숲에 묻히지 않을/ 상징의 숲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늘 고독하셨고 늘 슬프셨습니다./ 갖가지의 감회가 늘 바람처럼/ 파도처럼 설레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모든 시인의 으뜸이시라는 생각이/ 왜 이렇게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짊어지신 십자가가 너무도 무겁고 커서/ 흔히 그 일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예수님/ 당신은 진실로 시인 중 시인이십니다.//
야오 씨와의 대화 / 성찬경
이렇게 하늘이 맑고 해가 빛날 때/ 방안에 앉아 있는 건 죄지요,/ 하고 내가 말했다. 죄고 말고요, 이런 때 밖에서 바람을 쐰다는 건/ 바로 덕을 쌓는 거지요./ 하고 야오 씨가 말했다./ 하늘은 꼭 가을처럼 파랗습니다./ 해는 꼭 여름처럼 타고 있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허지만 날씨는 매섭습니다./ 몇 도 쯤이나 될는지?/ 하고 야오 씨가 말했다./ 아마 섭씨 영하 15도는 될 겁니다./ 보세요, 저 눈의 평원은 마치 영원의 도포자락 같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설경은 볼 수가 없지요./ 겨울은 계절의 제왕입니다./ 하고 야오씨가 말했다./ 이런 날씨는 바로 그 겨울의 정화입니다./ 해는 쓰다듬고 바람은 매질합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바로 그런 거지요./ 천국과 지옥은 공존입니다./ 하고 야오씨가 말했다./ 우리는 마치 어린애 같습니다./ 이런 소리 듣는 것 좋아하십니까?/ 하고 내가 말했다. 좋구말구요./ 어린아이 같다는 말 제일 좋습니다./ 고 야오 씨가 말했다./ 야오 씨는 오십객이다./ 야오 씨도 나도 멀리 조국과 처자를 떠나 있는 처지이다./ 우리는 그 후 말없이 해와 하늘과 바람과 눈 속을 서성였다.//
한일자 / 성찬경
마음먹고 붓에 먹물을 듬뿍 먹여/ 한일자 하나 써본다./ 삐뚤빼뚤 굵었다 가늘었다 심지어/ 불결하기 짝이 없는 터럭까지 매달려 있다.// 이것 큰일났구나./ 바로 내 마음 내 모습 아닌가./ 세상에 태어나 한일자 하나/ 제대로 못 쓰고 만대서야 되겠는가.// 나는 요새 남몰래 한일자 쓰는 연습을 한다./ 사람이 아무리 연습해도 완벽한 한일자는 못쓴다./ 완벽한 한일자에 무한히 접근할 따름이다.// 단 한 획, 가장 간명한 꼴/ 따지고 보면 인생은 한일자다./ 흠없는 한일자 하나 남기고 가면 빼어난 인생이다.//
2000년에 쓰는 자화상 / 성찬경
약자의 철학이 그의 무기다/ 그는 숨었는가 하면 나타나고/ 나타났는가 하면 숨는다.// 그의 첫 시집 이름은 『화형둔주곡』이었다./ 장성한 애가 다섯. 저금통 다섯은 있는 셈이다.// ‘상 타면 갚을 테니 빛 얻어 쓰시오’ 아내에게 하는 말이다.// ‘인생이란?’ 누가 물으면/ ‘인생은 지금 여기요’ 하고 답한다.// 그에게 끈질기게 남아있는 한줌의 정욕은/ 이제 완전히 완상용이다.// 값나가는 패물처럼 차고 다니며 가끔 들여다본다./ 그를 제일 매혹시키는 것은 구름 가는 하늘이다.// 변환자재하다. 웅흔하기 그지없다.//
줄타기 곡예사(曲藝師) / 성찬경
휘청휘청 끊길 듯 팽팽한 줄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정신은 소멸하고/ 그 위에 수직으로 세워진 신경이/ 칼날 같은 안식처를 찾아서 찾아서 떨고/ 그 명령을 받아 역시 미시적(微視的)으로 떨리는/ 한걸음 한걸음이/ 태(胎)에서 무덤까지의 도정(道程)처럼 멀구나./ 그러면서도 그것은 긴 절규처럼 일순이다./ 그런 속에서 곡예사는 웃는다./ 밑에서 장단꾼이 업! 하면 업! 하고/ 여! 하면 여! 하고 화답하긴 하지만/ 그러나 곡예사는 외롭구나./ 풍랑 속의 쪽배처럼 외롭구나./ 줄을 뒤로 뒤로 흘려 보내는/ 곡예사는 시시각각 꺼꾸러지지 않고/ 곡예사는 시시각각 기적이구나./ 이때에 줄이 탁 끊어지지 않는다는 우연의 정체를,/ 갑자기 발에 쥐가 나지 않는다는 우연의 정체를,/ 질풍이 난데없이 휘몰아치지 않는다는 우연의 정체를,/ 이 모든 정체를 곡예사는 모른다./ 능동의 고비를 넘어/ 순수한 피동 속에 내맡긴 곡예사는/ 이 깊은 낭떠러지 위에서/ 그처럼 신기하게 안전하구나.// 곡예사여. 곡예사여./ 이윽고 묵숨의 유희를 마치고/ 갈채 속에 무대 뒤로 사라지는 곡예사여./ 이제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대의 수고를 치하하는 이들의 따뜻한 품 안이냐?/ 아니면 그런 것이 오히려 번거로와/ 화장도구(化粧道具)와 못난이역 의상 따위가 황량하게 널려 있는/ 어느 구석 삐걱이는 의자 위에/ 아아, 하고 쓰러지며 부르는/ 쓰디쓴 망각이냐?//
황홀 / 성찬경
이 놀라움 홀연 청정한 눈 내린 백지./ 영롱한 詩想 하나 있어 적어나간다.// 글씨가 절로 태 없이 예쁘다./ 이 귀한 만남에 어울린다.// 형상인가 기운인가 알몸인가 그림자인가./ 그 모습 붙들고도 형언할 길이 없다.// 그것 좇아서 그것 위해서 멀리 흐른 세월./ 목숨의 방울이 많이 날아갔구나.// 보석의 단단함 허나 무르익은 포도향./ 생각에 녹고 스며 혀끝에 달다.// 허무처럼 엷음에도 눈부신 빛 뿜는다./ 시간과 하나 되어 나는 지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몸이 없듯이 편안하다./ 글씨 나르는 손도 깃털처럼 가볍다.// 五行의 운행이 어떻게 서로서로 짝을 찾았기에/ 像과 삶이 하나뇨 몸과 無想이 하나뇨.// 예서 스르르 손이 멎는다./ 여운에 그냥 오래 머문다.//
파동과 묘향 / 성찬경
밝고 따뜻한 빛, 맑고 깊은 소리,/ 은은한 향기,/ 셋이 성가정 3화음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퍼져나간다.// 지혜와 궁극과 덕의 봉우리가 만난다./ 아아, 이 때의 장관은 말로 하기 어렵다./ 만남의 신비가 신비의 으뜸이다./ 황홀한 파동만이 떨릴 뿐이다.// 소리는 사라지고 여운은 길다./ 여운은 기억과 더불어 간다./ 여운 속에 백세의 꽃이 피어오른다.// 보라 푸른 하늘 저 깊은 평화./ 그런 세상 어딘가./ 마음 안 세상이다.//
마음의 바다 / 성찬경
마음의 바다에선/ 공간은 나뭇잎 정도이고/ 시간은 바람 정도이고/ 기적은 寒暖計한난계 정도이다./ 과거는 경부선이고/ 미래는 경의선이다./ 마음의 바다에선/ 黃骨황골과 幼年유년의 뼈가/ 예쁘게 접붙여진다./ 거룩한 殺意살의에 무지개가 솟고/ 의인의 피가 죽순으로 피어오른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빨간 곡예사가 되고/ 비밀이 솔솔 새어나와 흐른다./ 마음의 바다에선/ 화산이 터져도/ 개미 새끼 하나 죽지 않는다./ 빙산에 불이 붙고/ 불의 혀가 얼어붙는다./ 화살이 구름에 콱 꽂힌다./ 광물의 三部合唱삼부합창이 아름답다./ 마음의 바다에선/ 온갖 것이 뒤집혀 들끓어도/ 온갖 것이 整然정연하게/ 잔잔하기만 하다./ 죽은 듯 고요하기만 하다.//
열구지탕(悅口之湯) / 성찬경
한 열흘 아내가 피정(避靜) 가 있는 동안/ 나는 부엌 주인이다. 전권을 행사한다./ 절대자유 실험가다. 요리왕이다./ 요리의 근본원리를 완전 터득한다.// 요리는 세 가지다. 날 요리 발효 요리 불에 댄 요리./ 끓이는 요리는 물과 불의 합작이다./ 다 나오라 냉장고 깊은 곳 해묵은 것들./ 버섯 당근 은행 마늘 고추 꾸미 닭다리.// 부글부글 끓인다. 전기냄비가 나의 여의주다./ 셀러리만은 날로 먹는다. 절대 끓여서는 안 된다./ 간은 새우젓으로 한다. 짜면 물을 붓는다.// 뭍 바다 하늘 맛이 얼싸안고 춤을 춘다./ 태초에 맛이 있었다./ 열구지탕 아닌가.//
황산(黃山) / 성찬경
황산! 황산! 황산!/ 중국 황산에 가기도 전에/ 나는 헤아릴 수도 없이 여러 번 황산을 마음속에 그려봤다.// 이 친교로/ 황산은 내 마음 한복판에 마치 뚜렷한 기억처럼/ 형언하기 어려운 명산으로 자리 잡았다.// 황산이 차츰 가까워진다./ 황산 근처에 오니/ 포도송이 모양의 가로등이 인상적이다.// 2012년 7월 7일./ 마침내 황산은 내 눈앞에/ 상상이 아니라 현실의 산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황산! 황산! 황산!/ 어느 산도 따를 수 없는 저 깊은 계곡! 흐르는 구름!/ 비교를 절하는 높고 우람한 바위 무리의 위용!// 이빨 부러진/ 톱날 같은 능선의/ 기기묘묘한 선(線)의 질주,// 저것이 연화봉(蓮花峰), 광명정(光明頂), 옥병봉(玉屛峰)/ 천도봉(天都峰), 단하봉(丹霞峰), 시신봉(始信峰)/ 저것이 송림봉(松林峰), 비래석(飛來石), 무송타호(武松打虎)…// 현실의 황산은/ 미리 그려본 모든 환상(幻想)의 호아산을/ 다 포용하고도 남았다.// 이윽고 황산에 어둠이 내린다./ 소리 없이 황산이 어둠 속에/ 장엄하게 장엄하게 가라앉는다.// 황산이여, 작별이다./ 아마 내가 그대를/ 다시 찾는 날은 내 생전 오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황산은 내 안에서/ 은은한 여운 닮은 비경으로 남아/ 나의 미(美)의 비의(秘儀)에 얼마나 큰 구실을 할 것인가!//
영물 / 성찬경
호랑이 구렁이 두루미 개미 제비 귀뚜라미/ 영물스런 이름들이다./ 영물이란 영험한 징조를 보인다는 뜻이리니/ 인간이 자랑하는 영성도 짐승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으리라.// 전에 고양이가 너무 늙었다고 걱정했더니 그 길로 사라졌다./ 착한 것이었는데 사람 마음 꿰뚫는 독심술이 섬뜩했다./ 짐승들은 지진이나 큰물을 미리 안다 하니 신비한 초능력이다./ 영물 아닌 짐승이 없다.// 인간은 부끄럽다 과식과 거짓말과 탐욕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소만한 성인 봤나./ 짐승의 거동은 대인풍인데 인간은 소인배의 수준이다.// 산천초목은 물론이요 나는 돌멩이 하나도 잠자는 영성이라 여긴다./ 모든 것을 품은 우리 고향 이 우주 자체가/ 몸집 큰 한 마리의 영물 아닌가.//
파편의 노래 / 성찬경
너는 파편이다/ 너는 뼈도 살도 아니다./ 파괴의 창조가 너의 유일한 인과因果다./ 파편인 너에게서는 파편이 나올 뿐이다./ 그 파편에서 또 파편이 나올 뿐이다./ 갈수록 너는 부스러기다./ 너는 순종가계純種家系에 속한다./ 너는 인간 허영의 가치체계에서 완전 해방되어 있다./ 세상에서 노예가 아닌 것은 너뿐이다./ 너는 탈속脫俗의 으뜸이다./ 너는 너다./ 네 안에 너를 분열시킬 또 하나의 네가 없다./ 너는 맑음의 얼굴이다./ 너에게는 무無의 안개가 서린다./ 네 앞에서는 으리으리한 모든 것이 누더기다./ 너는 방랑의 종점이다.//
성찬경(成贊慶, 1930년~2013년) 시인
충청남도 예산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영문과 졸업했다. 1956년 《문학예술》에 시 <미열> 등이 조지훈 시인의 추천 완료로 등단한 이후 <아무도 나를>, <다빈치의 독백>, <삼신 할머니>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성균관대 교수를 지냈다. 한국시인협회상, 현대시학 작품상, 월탄문학상, 공초문학상, 빛과 구원의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화형둔주곡(火刑遁走曲)》 《벌레소리송(頌)》 《시간음(時間吟)》 《영혼의 눈 육체의 눈》 《반투명》 《황홀한 초록빛》 《소나무를 기림》 《묵극》 《나의 별아 너 지금 어디에 있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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