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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황동규 시인

부흐고비 2021. 8. 24. 06:27

기항지(寄港地) 1 / 황동규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기항지(寄港地) 2 / 황동규
다색(多色)의 새벽 하늘/ 두고 갈 것은 없다, 선창에 불빛 흘리는 낯익은 배의 구도(構圖)/ 밧줄을 푸는 늙은 뱃군의 실루에트/ 출렁이며 끊기는 새벽 하늘/ 뱃고동이 운다/ 선짓국집 밖은 새벽 취기/ 누가 소리죽여 웃는다/ 축대에 바닷물이 튀어오른다/ 철새의 전부를 남북(南北)으로 당기는/ 마음의 마찰음(音) 끊기고/ 바람 받는 마스트의 검은 깃발/ 축대에 바닷물이 튀어오른다/ 누가 소리죽여 웃는다/ 아직 젊군/ 다색(多色)의 새벽 하늘.//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 황동규
봉준(琫準)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땅의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 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 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불빛 한 점 / 황동규
한창때 그대의 시는/ 그대의 앞길 밝혀주던 횃불이었어./ 어지러운 세상 속으로 없던 길 내고/ 그대를 가게 했지. 그대가 길이었어./ 60년이 바람처럼 오고 갔다./ 이제 그대의 눈 어둑어둑,/ 도로 표지판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표지판들이/ 일 없이 들어오지 말라고 말리게끔 되었어./ 이제 그대의 시는 안개에 갇혀 출항 못 하는/ 조그만 배 선장실의 불빛이 되었군,/ 그래도 어둠보단 낫다고 선장이 켜놓고 내린,/ 같이 발 묶인 그만그만한 배들을 내다보는 불빛,/ 어느 배에선가 나도! 하고 불이 하나 켜진다. 반갑다./ 끄지 마시라.//

오늘 하루만이라도 / 황동규
은행잎들이 날고 있다./ 현관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또 하나의 가을이 가고 있군.// 수리 중인 엘리베이터 옆 층계에 발 올려놓기 전/ 미리 전해지는 호흡을 진정시킨다./ 해 거르지 않고 한 번쯤 엘리베이터 수리하는 곳./ 몇 번 세고도 또 잊어버리는/ 한 층 계단 수보다 두 배쯤 되는 수의 가을을/ 이 건물에서 보냈다./ 그 가을 수의 세 배쯤 되는 가을/을 매해 조금씩 더 무거운 중력 추 달며 살고 있구나.// 2층으로 오르는 층계참 창으로/ 샛노란 은행잎 하나 날아 들어온다./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은행잎! 할 때 누가 검푸른 잎을 떠올리겠는가?/ 내가 아는 나무들 가운데 떡갈나무 빼고/ 나뭇잎은 대개 떨어지기 직전 결사적으로 아름답다.// 내 위층에 사는 남자가 인사를 하며 층계를 오른다./ 나보다 발 더 무겁게 끌면서도/ 만날 때마다 얼굴에 미소 잃지 않는 그,/ 한 발짝 한 발짝씩 층계를 오른다./ 그래, 그나 나나 다 떨어지기 직전의 나뭇잎들!// 그의 발걸음이 몇 층 위로 오르길 기다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집 8층까지 오르는 층계 일곱을/ 라벨의 ‘볼레로’가 악기 바꿔가며 반복을 춤추게 하듯/ 한 층은 활기차게 한 층은 살금살금, 한 층은 숨죽이고 한 층은 흥얼흥얼/ 발걸음 바꿔가며 올라가보자.//

밟을 뻔했다 / 황동규
코로나바이러스로 오래 집콕 하다/ 마스크 산책 나갔다/ 마을버스 종점 부근 벚나무들은/ 어느샌가 마지막 꽃잎들을 날리고 있고/ 개나리와 진달래는 색이 한참 바래 있었다./ 그리고 아니 벌써 라일락!/ 꽃나무들에 눈 주며 걷다/ 밟을 뻔했다/ 하나는 노랑 하나는 연분홍, 쬐그만 풀꽃 둘이/ 시멘트 블록 터진 틈 비집고 나와/ 산들산들 피어 있었다./ 둘 다 낯이 익다./ 노랑은 민들레, 그런데 연분홍은 무슨 꽃?/ 세상 사는 일이 대개 그렇듯/ 하나는 알고 하나는 모른다./ 알든 모르든 둘 다 간질간질 예쁘다/ 어쩌다 지구 사람들 모두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서로서로 거리 두는 괴물들이 되더라도/ 아는 풀 모르는 풀이 함께 시멘트 터진 틈 비집고 나와/ 거리 두지 않고 꽃 피우는 지구는 역시 살고픈 곳!/ 그 지구의 얼굴을 밟을 뻔했다.//

 

시월 / 황동규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금(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석등(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관현악을 위한 4악장 <October(시월)>

황동규 씨의 시 "시월"에 붙여진, soprano와 tenor 독창, 혼성 4부 합창, 그리고 관현약을 위한 4악장의 2005년 작품이다.
詩의 1, 2, 3절을 제1악장으로, 4절을 제2악장으로, 5절을 제3악장으로, 그리고 6절은 제4악장으로 작곡되었다. 그러나 제3악장과 제4악장은 연결되어 연주된다.
작곡자(서경선)는 시에서 받은 신비하고 낭만적인 느낌을 인성(人聲)과 관현악의 색채를 통하여 표현하고자 시도하였다.
초연은 2005년 9월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지휘: 박은성, 교향악단: KBS Symphony Orchestra, 합창: 안산시립합창단 수원시립합창단, 소프라노: 박정원, 테너: 김남두)


꿈 3 / 황동규
4년 2개월 간 연구실에서 동거,/ 작년 사별,/ 석곡란, 1989년 2월 이전 어느 날 생(生),/ 간밤 꿈에 찾아왔음.// 사 년 동안 꽃 한 번 피우지 못하고 가 미안타고?/ 그건 물과 비료 제대로 주지 못한 내 잘못인데,/ 햇볕 알맞게 부어주지 못한 내 잘못인데, 온통 내 잘못인데./ 혹시 나를 데리러 온 건 아니겠지./ 아니 그냥 한번 찾아오고 싶어 왔다고?/ 나 세상 떠나는 날 마중 나오고 싶다고?// 지옥 입구가 온통 찬란해지리.//

꿈의 꿈 / 황동규
지난 몇 해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빗소리./ 아침부터 시작해서 낮을 보내고/ 오후에도 잊힌 듯이 내리는 빗소리./ 오늘은 연구실 창밖 까치집을 적시고/ 그 밑에 새로 준공한 아랫집도 적시고/ 보이지 않아도 몸 뒤척이는 까치 새끼들/ 바알간 발톱까지 적시고/ 발톱에 묻은/ 거미줄 남은 한 가닥까지 적시고/ 더 적실 것이 없어/ 그만 맥을 놓아버린 빗소리.// 발 하나쯤/ 시간 밖으로 내어놓은 빗소리.//

산벚꽃 나타날 때 / 황동규
물오른 참나무 사이사이로 산벚꽃 나타날 때/ 더도 말고/ 전라북도 진안군 한 자락을 한나절 걷는다면/ 이 지상(地上)살이 원(願) 반쯤 푼 것으로 삼으리./ 장수 물과 무주 물이 흘러와 소리 죽이며 서로 몸을 섞는/ 죽도 근처/ 아니면 조금 아래/ 댐의 키가 조금씩 불어나고 있는 용담 근처./ 알맞게 데워진 공기 속에 새들이 몸 떨며 날고/ 길가엔 조팝꽃 하얀 정(精) 뿜어댈 때/ 그 건너 색깔 딱히 부르기 힘든 물오른 참나무들/ 사이사이/ 구름보다 더 하늘 구름 산벚꽃 구름!/ 그 찬란한 구름장들 여기저기 걸어놓고/ 그 휘장들을 들치고 한번 안으로 들어간다면.//

봄바다에서 / 황동규
노량서 시작한 술 끝내니 통영,/ 한려수도를 마음속에 넣고 놀았구나./ 갑판에 소주병들 멋대로 누워 있고/ 소리없이 봄저녁이 와 있다./ 사방 파도들 석양(夕陽) 물에 젖어/ 우리 마음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듯/ 손바닥을 밖으로 밖으로 젖히며 천천히 너울댄다./ (나도 내 마음에서 너울대며 빠져나갔으면!)/ 여기서 그대 그만 내리게./ 바다 위에 큰대자(大字)로 누워 나는/ 알맞게 어두워 '내'가 안 보일 장승포로 가겠네.//

영포(零蒲), 그 다음은? / 황동규
자꾸 졸아든다/ 만리포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다음은 그대 한발 앞서 간 영포./ 차츰 살림 줄이는 솔밭들을 거치니/ 해송/ 줄기들이 성겨지고/ 바다가 몸째 드러난다./ 이젠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영포 다음은 마이너스 포(蒲)./ 서녘 하늘에 해 문득 진해지고/ 해송들 사이로 바다가 두근거릴 때/ 밀물 드는 개펄에 나가 낯선 게들과 놀며/ 우리 처음 만나기 전 그대를 만나리.//

고통일까 환희일까? / 황동규
'요즘 멜 깁슨이라는 자가 만든/ 그대의 수난 영화가 가히 엽기적이라던데./ 지금껏 나는 그대가 고통보다는/ 환희의 존재라고 생각했지.'/ 불타가 입을 열자 예수가 말했다./ '이른 봄 복수초가 막 깨어나/ 눈 속에 첫 꽃잎 비벼 넣을 때/ 그건 고통일까 환희일까?'/ '막 시리겠지.'//

어느 훗날의 시 1 / 황동규
동안(童顔)으로 늙은 얼굴 하나/ 벤치 한끝에 앉아 있다/ 잔디 듬성듬성 문드러져 있는 발 밑에/ 녹지 않은 눈 몇 점 묻어 있는 땅 위에/ 수척한 조그만 새 하나/ 무언가 쪼으며 걸어다닌다./ 발가락이 빨갛게 춥다./ 신문지 한 장이 날려고 날아보려고 애쓰다/ 뒤집힌다.//

방파제 끝 / 황동규
언젠가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이 되리./ 앞에 노는 섬도 없고/ 헤픈 구름장도 없는 곳./ 오가는 배 두어 척 제 갈 데로 가고/ 물 자국만 잠시 눈 깜박이며 출렁이다 지워지는 곳./ 동해안 어느 조그만 어항/ 소금기 질척한 골목을 지나/ 생선들 함께 모로 누워 잠든 어둑한 어물전들을 지나/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

가을 어느 날, 바보처럼 1 / 황동규
어깨 구부정한 사내 하나/ 골목으로 들어간다./ 단층 기와들이 하늘의 선(線)을 긋고 있는 골목/ 담장 위 나팔꽃 줄기 마음놓고 시들고 있는 집/ 세발자전거 하나 지친 듯 넘어져 있고/ 문 앞에 혼(魂)처럼 환한 국화분 하나 놓인 집/ 분에는 검은 띠./ 사내가 문득 문을 두드리지 못하는 집./ 전봇대에 철 지난 광고 그림/ 간신히 들치다 마는 가을 바람./ 누군가 소리없이 폭발한다./ 하늘이 주저앉았다 일어선다./ 고개 돌려보면 아무도 없다./ 철 지난 광고 그림 간신히 들치다 마는/ 가을 바람,/ 바보처럼.//

지워진 마을을 지나며 / 황동규
오랜만에 듣는 저 딱따구리./ 들어가보지 않아도 안다/ 어느 집 마당에/ 꽃다지가 별자리들처럼 모여 있는지./ 어느 담이 해동(解凍)에 무너져/ 천천히 땅에 녹아들고 있는지./ 어느 살구나무, 둥치는 마르고/ 곁가지 하나가 옆집에 넘어가 유령처럼/ 넌지시 피어 있는지./ 어느 흙벽에 기어오르던 도마뱀이/ 도중에 죽은 듯 잠들어 있는지/ 흠집처럼.//

어디선가 미리 본 것 같다 / 황동규
오밤중 전짓불 켜들고 화엄사에 오른다./ 아무도 없음./ 바람에 눈발 날리다 말고/ 뇌세포가 하나씩 불씨 켜드는 추위./ 하늘의 별들이 땅 가까이 내려오다가/ 반절 높이에서/ 번쩍이며 꽃이 되어 피어/ 꽃송이 하나/ 네 사자탑 동산 뒤로 떨어짐./ 바람에 눈발 날림./ 각황전 앞 석등이 눈발을 쌀처럼 받으며 욺./ 내가 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천천히 꼿꼿해짐./ 슬그머니 전짓불이 나간다.// 이 모두를/ 어디선가 미리 본 것 같다.//

최후의 시 / 황동규
오랜만에 남포비석 비(碑)에서/ 기어가던 금이/ 가장자리까지 가지 못하고 멎는다./ 푸른색 유리 잔돌 박힌 곳에서/ 잠시 주저하다/ 방향 약간 바꿔/ 한 뼘쯤 더 기어간다……// 언젠가 지금처럼 시를 쓰다 말련다//

 

 

황동규 연작詩 "풍장" 14년만에 탈고

『냇물 위로 뻗은 마른 나뭇가지 끝/저녁 햇빛 속에/조그만 물새 하나 앉아있다/수척한 물새 하나/생각에 잠겼는가/냇물을 굽어 보는가/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가/조으는가 조으는가/꿈도

news.joins.com

 

 

풍장(風葬) 1 /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風葬)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 우고 옷 벗기 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 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풍장(風葬) 2 / 황동규
아 색깔의 장마비!/ 바람 속에 판자 휘듯/ 목이 뒤틀려 퀭하니 눈뜨고 바라보는/ 저 옷벗는 색깔들/ 흙과 담싼 모래 그 너머/ 바다빛 바다!/ 그 위에 떠다니는 가을 햇빛의 알갱이들.// 소주가 소주에 취해 숲의 숨길 되듯/ 바싹 마른 몸이 마름에 취해 색깔의 바람 속에 둥실 떠……//

풍장(風葬) 3 / 황동규
희미한 길 하나/ 골목에 들어가 길 잃었다가// 환한 한길로 열리듯/ 아픈 이 하나/ 턱 속에 사라졌다가 바람 불 때/ 확하고 뇌 속으로 타오르듯이// 세상이 세워지다 말고/ 헐리다 말고/ 외롭다 말고, 세상이/ 우리 모여 떠들던 광교의 술집과/ 잠 못 들다 홀로 몸 붙이고 잠든 방 사이/ 어디선가 타오른다// 인왕산일까 남산쯤 혹은 낙산 그 너머일까/ 낙산 밑에 밀주 팔던 그 술집일까/ 안방에 담요 뒤집어 쓰고 화끈 달던/ 술항아리일까/ 혹은 우리들보다 더 뜨거운 우리의 골목일까/ 그런 골목, 우리 코트 버리고/ 웃옷 벗어 머리에 쓰고 허리 낮추고/ 불타는 마루를 빠져나와 마당을 빠져나와/ 대문턱에 걸려 넘어져 엎어진 채로/ 세상이 마르고, 세상을 태우고, 세상에 물뿌리는 소리를 듣는다//

풍장(風葬) 4 / 황동규
쓸쓸한 길 화령길/ 어려운 길 석천(石川)길/ 반야사(般若寺)는 초행길/ 황간(黃澗)지나 막눈길// 돌다리 위에 뜬 어리숙한 달/ (그 달?)/ 등지고/ 난간 위에 눈을 조금 쓸고/ 목숨 내려놓고// 이곳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루카치 만나면 루카칠/ 바슐라르 만나면 바슐라를/ 놀부를 만나면 흥부를……// 이번엔 달을 내려놓고.//

풍장(風葬) 5 / 황동규
까마귀 날고 떠들며/ 머리맡에서 서성댈 때/ 한 눈 팔다가 한 눈 파 먹히고/ 팔 휘둘러 쫓으며 비스듬히 누워/ 한 눈으로 보는 세상// 고개 숙이고 나무들이 나직이/ 주고 받는 말 들린다./ 저녁 바람이 차다고/ 가을의 한 가운데가 방금 지나가고 있다고/ 가을의 한 가운데, 저 외마디 구름장을 뱉어내는/ 더 작은 구름장,/ 자지러지며 다시 내 눈을 뱉어낸다./ 뛰고 날고 참 잘들 논다!// 아직도 흥이 남아 있다니!/ 슬며시 돌아누워 날개 달린 자들에게/ 나머지 한 눈까지 내어맡길까./ 아니면 헌 신발을 머리에 얹고/ 덩실덩실 춤추며 내려가 볼까./ 저녁 이슬에 아랫도리 적시고/ 한 족 눈으론 웃고 다른 한쪽은 캄캄히 타오르며/ 맨발로 덩실덩실 내려가 볼까.//

풍장(風葬) 6 / 황동규
그대와 나 숨을 곳은/ 숨죽이고 헤매다 광도(光度) 낮은 저녁 도착한/ 명왕성(冥王星) 밖 폭포 소리 그치고/ 싸락눈 조심히 뿌리는 곳./ 옷 벗은 버드나무들이/ 무릎까지 쓸쓸하게 눈을 맞는 곳.// 누군가 전보를 치고/ DDD 전화를 걸어오고/ 밤하늘 별자리 통해 메시지를 보내오지만/ "모두 용서한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용서라니!/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문득 속력을 내는/ 저 그림자 나라의 빠른 말들 가운데/ 가장 이쁜 말 "용서"를 타고/ 돌아갈 수는 없겠지./ 말을 내리며 둘 다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떨굴 수는 없겠지.// 차라리 태양을 향해 분별없이 달려가/ 겁나는 꼬리를 하나씩 달고/ 이른 저녁 하늘에 나타나/ 생채기처럼, 낙인처럼, 아물다 말다 사라질 것인가?// 겁없이 하늘에 뛰어든 우리/ 아 하늘 귀신 못 면하리라.//

풍장(風葬) 7 / 황동규
풍란(風蘭)이 터진다/ 손가락을 넣으면/ 빵꾸난 주머니 시원 너덜너덜 너덜// 옷꿰맨 곳 터져/ 살 드러나고/ 살 꿰맨 곳 터져/ 뼈 드러나는가// 가만,/ 말 꿰맨 곳 터질 때/ 드러나는 말의 뼈// 실과 바람사이/ 바람과 난(蘭)사이/ 풍란(風蘭)과 향기 사이/ 에서 흰 빛깔과 초록빛깔이 알록달록 가벼이 춤추는/ 뼈들이 골수속에 코를 박고 벌름대는/ 이 향기.//

풍장(風葬) 8 / 황동규
곤히 잠이 두어 시간 나를 데리고 놀다/ 물결처럼 가버린 후/ 투털대는 소리 들린다./ “걔는 죽지 않았어/ 이건 그가 아냐./ 그에게 있었나, 놀부네 제비 낯짝 같은/ 이 웃음이?”/ 발소리 사라지니 기다려 나는 속삭인다/ “내가 채 죽지 않았다면/ 이건 참 큰일인걸.”// 삼문(三門) 벼랑에, 집어쳐라 집어쳐,/ 물기둥 치는 소리// 죽은 자들이 모여 산다는 곳으로/ 안경 없이 찾아가다 문득 길을 잃어/ 안개 낀 골자기와 언덕을 헤매다가/ 시외버스에 실려 풀이 죽어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면/ 플라자 호텔 앞을/ 빈정나라에서 욕나라로 막 들어온/ 멍청한 개처럼 걷다가/ 뜻 없이 컹컹 짖어…// 삼문 벼랑에, 집어쳐라 집어쳐,/ 물기둥 치는 소리//

풍장(風葬) 9 / 황동규
바람이 어디로나 제 갈 데로 불 듯/ 서산 마애불을 만나러 갔다./ 마을마다 댓잎 가장자리는/ 늦겨울 가뭄에 백동(白銅)색으로 익고/ 얼었던 길은 처음으로 녹으며/ 춤추는 봄눈을 대숲으로 날려주었다./ 마른 오징어와 함께 가서/ 오징어는 먹고 소주는 몸 속에 뿌리고 왔다.//

풍장(風葬) 10 / 황동규
양날개에 가방을 하나씩 달고/ 시외버스를 내린다./ 더 이상 날개가 없어도 좋은/ 날개 편 날.// 말할 수 있을 때 말하고/ 말할 수 없을 때/ 마음놓고 중얼거린다/(아직 놓을 마음이 있다니!)// 나무다리 위에서/ 돌다리를 본다./ 돌다리 위에 올라가/ 돌을 본다.//

풍장(風葬) 11 / 황동규
여기가 어딘가?/ 봄 산(山)이 햇살 속에 겉옷 슬쩍 걸어놓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배의 솜털을 보여준다.// 저 칼로 썰어논 구름장 위에/ 날리는 햇살!// 살아있는 것이 겁 없이 황홀해/ 더 앉아 가지 못하고/ 슬며시 일어서서/ 버스를 내린다.//

풍장(風葬) 12 / 황동규
이 세상 가볍게 떠돌기란/ 양말 몇 켤레면 족한 것을/ 헤어지면/ 기워신고/ 귀찮아지면/ 해어지고/ (소금장이처럼 가볍게/ 길 위에 떠서)// 아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콘크리트 터진 틈새로/ 노란 꽃대를 단 푸른 싹이/ 간질간질 비집고 나온다/ 공중에선/ 조그만 동작을 하면서/ 기쁨에 떠는 새들/ 호랑나비 바람이 달려와/ 마음의 바탕에/ 호랑무늬를 찍는다/ 찍어라, 삶의 무늬를,/ 어느날 누워 깊은 잠 들 때/ 머릿속을 꽉 채울 숨결의 무늬를,/ 그 무늬 밖에서 숨죽인 가을비 내릴 때.//

풍장(風葬) 13 / 황동규
붉은 부리의/ 검은머리물새떼/ 텃새 싫으면/ 나그네새 되고/ 떠돌이 싫증나면/ 다시 붙박이새 되는// 객지에 나가도/ 의연히 고개 들고/ 자기 동네처럼 사는// 선유도 낙조(落照)를 만나러 바다에 나가/ 솔깃이 얕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너는 붉은 잉크빛 출렁이는 바다를 춤추며 건너간다// 진짜 소주병 주둥이의/ 환한 지린내.//

풍장(風葬) 14 / 황동규
오늘 낮에 새들한테 당했다/ 섬 밖 사방에서 날아와/ 떼지어 맴돌다/ 한꺼번에 나에게 달려든/ 저 갈매기표(標) 칼새표(標) 심장들/ 두둥 두둥둥/ 마싹 마른 다리로 벌떡 일어나/ 뒤를 보며 달리다/ 바닷가에 널어논 그물에 걸려/ 벌렁 나자빠져 춤추듯 누웠다// 온통 맥박 투성이의 하늘.//

풍장(風葬) 15 / 황동규
숲에서 나와/ 가까이,/ 땅의 얼굴에 얼굴 가까이,/ 그 얼굴에 볼에 가볍게 볼 비비고/ 그 얼굴에 입에 입 가까이/ 혀 가까이,/ 목구멍 가까이,/ 가볍게/ 몸이 가벼워져 거꾸로 빙빙 돌며 떠오르는 곳/ 회오리 바람이는 곳 내 죽음 통하지 않고 고장 승천하는 곳.//

풍장(風葬) 16 / 황동규
어젯밤에는/ 흐르는 별을 세 채나 만났다/ 서로 다른 하늘에서/ 세 편(篇)의 생(生)이 시작되다가/ 확 타며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오늘 오후 만조(滿潮) 때는/ 좁은 포구에 봄물이 밀어오고/ 죽었던 나무토막들이 되살아나/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다/ 허리께 해파리를 띠로 두른 놈도 있었다// 맥을 놓고 있는 사이/ 밤비 뿌리는 소리가 왜 이리 편안한가?//

풍장(風葬) 17 / 황동규
땅에 떨어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물방울/ 사진으로 잡으면 얼마나 황홀한가?/ (마음으로 잡으면!)/ 순간 튀어올라/ 왕관을 만들기도 하고/ 꽃밭에 물안개로 흩어져/ 꽃 호흡기의 목마름이 되기도 한다.// 땅에 닿는 순간/ 내려온 것은 황홀하다./ 익은 사과는 낙하하여/ 무아경(無我境)으로 한번 튀었다가/ 천천히 굴러/ 편안히 눕는다.//

풍장(風葬) 18 / 황동규
깨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피곤한 날 네 다리와 몸통을/ 지구 중심으로 잡아다니는 손/ 슬며시 잡고 놓아주지 않는것./ (아 빠듯하다.)/ 후 불면 입김이 뜨는것./ 빗방울이 몸을 비벼 무지개로 피는 것.// 한참 딴 데 보다 다시 보아도/ 사그라지지 않는 바람꽃.//

풍장(風葬) 19 / 황동규
아 번역하고 싶다,/ 이 늦가을/ 저 허옇게 깔린 갈대 위로/ 환히 타고 있는 단풍숲의 색깔을.// 생각을 줄줄이 끄집어내/ 매듭진 줄 들고 꺼내/ 그 위에 얹어/ 그냥 태워!//

풍장(風葬) 20 / 황동규
바다는 젖어 있었다./ 바다와 해가 맞물려 출렁거려/ 그 속에서 해당화가/ 왕보석처럼 빛났다./ 색의 창을 슬쩍 여닫는 색의 눈,// 해당화를 보다 말고/ 인간을 향해/ 그냥 인간의 눈 속으로!//

풍장(風葬) 21 / 황동규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속에 사는,/ 미물(微物) 속에서도 쉬지 않고 숨쉬는,/ 혹은 채 살아 있지 않은 신소재(新素材)도/ 날카로이 깎아놓으면/ 원래의 편안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저 본능!// 바람에 흔들리는 저 나무, 저 꽃, 저 풀,/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의 오르내리는 저 목젖이/ 동식물도감의 정밀한 사진들 속에 숨지 않으려는/ 바로 그것!//

풍장(風葬) 22 / 황동규
무작정 떠 있다/ 멍텅구리배./ 오늘은 흔들리지도 않는다./ 허리 근질거림 참다보면/ 바다에 떴는지 하는에 떴는지/ 열(熱)에 떴는지.// 처음으로 나무에서 내려와/ 땅 위에 정신없이 발디딘 원숭이처럼/ 땅 위에 떴는지.// 인간으로 그냥 낡기 싫어/ 뒤로 돌아/ 생명의 최초로 되밟아가려다/ 생명 속에 떴는지.//

풍장(風葬) 23 / 황동규
무좀도 몸이 늙으면 자리를 뜬다/ 더 젊은 몸을 향하여./ 무좀 뜬 자리는 흉가(凶家)일까 서가(瑞家)일까?// 아버님이 말씀하신다./ “화장(火葬)은 두 번 죽는 것이니/ 양지 바른 곳에 그냥 묻어라.”// 물론이죠, 허나 속으로 생각한다./ 두 번 죽으면 어떠리./ 세 번, 네 번은?/ 화장불 한 번 견디면/ 지옥불, 초대형 연탄, 마냥 따시리.// 언덕 위로 머뭇머뭇 흐르는 한 줄기 연기.//

풍장(風葬) 24 / 황동규
베란다에 함박꽃 필 때/ 멀리 있는 친구에게/ 친구 하나 죽었다는 편지 쓰고/ 편지 속에 죽은 친구 욕 좀 쓰려다/ 대신 함박꽃 피었다는 얘기를 자세히 적었다.// 밤세수하고 머리 새로 씻으니/ 달이 막 지고 지구가 떠오른다.//

풍장(風葬) 25 / 황동규
희양산 봉암사에 다가갔다./ 늦가을 저녁/ 발목이 깊은 낙엽에 빠지고/ 시냇물 소리도 낙엽에빠지고/ 바람 소리까지 낙엽에 빠지는/ 늦가을 저녁.// 검음 멈추면/ 소리내던 모든 것의 소리 소멸,/ 움직이던 모든 것의 기척 소멸,/ 문득 얼굴 들면/ 하얗게 타는 희양산 봉우리,/ 소리없이 환한.// 주위엔 저 옥보라색./ 빛들이 몸 가벼운 쪽으로 쏠리다 맑아져/ 分光 그만두고 스펙트럼 벗어나 우주 속에 사라졌다가/ 지구의 하늘이 그리워 돌아온/ 저 색!// 때맞춰 하얗게 타는 산봉우리.//

풍장(風葬) 26 / 황동규
달마는 면벽(面壁) 구 년에 왜 마르지 않았는가?/ 달마는 마르는 대신 왜 사지(四肢)의 퇴화를 택했는가?/ 사지는 말없이 그의 고통과 법열(法悅) 속에/ (저 소리없는 신음소리, 아악 소리,/ 내장(內臟)의 웃음소리, 생명의 폭발소리)/ 그 모두를 참으며 세포 하나하나에/ 미소 보내며 기다렸을까?// 기다림이란 무엇인가? 퇴화란 무엇인가?/ 혹시 진화란 퇴화로부터 뒷걸음질치는 것?/ 발 헛디디며 계속 뒷걸음질치다/ 벽에 등대고 선 나의 머리와 사지.//

풍장(風葬) 27 / 황동규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풍장(風葬) 28 / 황동규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혀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가슴 좀 갑갑하겠지만/ 그냥 담고 가리./ 가다가 잠시 발목 주무르며 세상 뒤돌아볼 때/ 도시마다 사람들 가득 담겨 시시덕거리는 것 내려다보며/ 한번 웃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배 잡고 낄길대며 위해/ 지니고 가리.//

풍장(風葬) 29 / 황동규
오대산 적멸보궁 양편 골짜기에/ 숨어서 소리내는 저 물소리/ 오늘은 안개비 때문에 한참씩 번진다/ 삼문(三文) 문인화의 여백 속 같아/ 마음 편하다/ 오늘은 얼레지 꽃들도 꽃잎을 세우지 않았다./ 산동백꽃이 잠복조처럼 피어/ 발길 자주 멈추게 했을 뿐./ 텅 빈 상원사에 내려와/ 물소리의 끝을 약수로 마시노니/ 그 물소리 몸 속에 남아/ 꿈이나 생시나 땅속 오지(奧地)에/ 나를 한참씩 번져 흐르리.//

풍장(風葬) 30 / 황동규
함박꽃 가지에서/ 사마귀가 성교 도중 암컷에게 먹히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머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이 쾌감!/ 하늘과 땅 사이에 기댈 마른 풀 한 가닥 없이/ 몸뚱어리 몽땅 꺼내놓고/ 우주의 공간 전부와 한번 몸 부비는/ 저 경련!//

풍장(風葬) 31 / 황동규
마른 국화를 비벼서/ 향내를 낸다/ 꽃의 체취가 그토록 가벼울 수 있을지/ 손바닥을 들여다 보다가/ 마음이 쏟아진다// 나비나 하루살이 몸에/ 식물의 마음 심은 가벼운 것이 되어/ 떠돌리라/ 비벼진 꽃 냄새 살짝 띠고//

풍장(風葬) 32 / 황동규
가을날/ 풀잎의 한 가닥으로/ 사근사근 말라/ 몸의 냄새를 조금 갈고/ 바삭바삭 소리로/ 줄기와 뿌리에 남몰래 하직을 하고/ 쌍사발 시계가 눈망울을 굴리며/ 빨간 꼬리들을 달고 날아다니는 공간 속으로/ 잠자리채 높이 쳐든 소년이 되어 들어가리.//

풍장(風葬) 33 / 황동규
아내가 내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한다/ 드디어 썩기 시작!/ 먼저 입이 썩고/ 다음엔 항문이 썩으리라.// 마음을 말갛게 말리는/ 저 창밖의 차분한 초겨울 햇빛.// 입도 항문도 뭉개진/ 어느 봄날,/ 돈암동 골짜기 정현기네 집/ 입과 항문 사이를 온통 황홀케 하는/ 술/ 계속 익을까?//

풍장(風葬) 34 / 황동규
옷을 벗어버린 눈송이들이/ 지구의 하늘에서보다 더 살아 춤추는/ 우주의 변두리,/ 혹은 서울의 변두리 밖으로,/ 가고 싶다./ 확대경 속에서처럼/ 큰 눈송이들이/ 공해에 찌든 몸의 옷 벗어버리고/ 속옷도 모두 벗어버리고/ 속살 그대로 날으며 춤추는/ 춤추다 춤추다 몸째 춤이 되는 그곳으로,// 여섯 개의 수정(水晶)깃만 단 눈송이들이.//

풍장(風葬) 35 / 황동규
친구 사진 앞에서 두 번 절을 한다./ 친구 사진이 웃는다,/ 달라진 게 없다고./ 몸 속 원자들 자리 좀 바꿨을 뿐,/ 영안실 밖에 내리는 빗소리도/ 옆방에서 술 마시고 화투치는 조객들의 소리도/ 화장실 가기 위해 슬리퍼 끄는 소리까지도/ 다 그대로 있다고.//

풍장(風葬) 36 / 황동규
내 마지막 기쁨은/ 시(詩)의 액셀러레이터 밟고 또 밟아/ 시계(視界) 좁아질 만큼 내리 밟아/ 한 무리 환한 참단풍에 눈이 열려/ 벨트 맨 채 한계령 절벽 너머로/ 다이빙./ 몸과 허공 0밀리 간격 만남./ 아 내 눈!/ 속에서 타는/ 단풍.//

풍장(風葬) 37 / 황동규
땅 속에 발목뼈 채 묻히지 못해/ 한없이 떠도는 원혼(寃混)이 된들 어떠리.// 원혼 가운데서도/ 새처럼 가벼운 원혼,// 슬피 울지도 못하고/ 잠투정하듯/ 초저녁에 잠시 우는,// 울다 문득 고막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풍장(風葬) 38 / 황동규
아침에 커피 끓여 마실 때/ 내 입은 위(胃)와 통화한다,/ "지금 커피 한잔 발송한다."/ 조금 있다가 위는 창자와 통화할 것이다./ "점막질에 약간 유해한 액체 바로 통과했음."/ 저녁쯤 항문은 입에게 팩시를 보낼 것이다./ "숙주(宿主)에 불면증 있음."//

풍장(風葬) 39 / 황동규
복수(複數)여행, 항구 끝의 여관들,/ 저 불면의 밤들,/ 아무리 취해도/ 코고는 일행을 끝 점검하고 비로소 자리에 눕던/ 저 불면의 밤들,/ 불면의 끝, 혼자 창 열고 가로등과 함께 훔쳐 본/ 파도에 몸 던지기 직전 눈발 춤추던 바람!// 그러나 이제는 여행 꾸러미 속에서도/ 가볍게 누워 잠든다./ 고추잠자리 마른 풀잎에 내려 졸 듯,/ 마지막 술잔에 내장(內臟)을 하나씩 맡기고/ 누군가 옆에서 인생과 문학을 갖고 놀면/ 귀 열어논 채 잠든다.//

풍장(風葬) 40 / 황동규
선암사 매화 처음 만나 수인사 나누고/ 그 향기 가슴으로 마시고/ 피부로 마시고/ 내장(內臟)으로 마시고/ 꿀에 취한 벌처럼 흐늘흐늘대다/ 진짜 꿀벌들을 만났다.// 벌들이 별안간 공중에 떠서/ 배들을 내밀고 웃었다./ 벌들의 배들이 하나씩 뒤집히며/ 매화의 내장으로 피어……// 나는 매화의 내장 밖에 있는가,/ 선암사가 온통 매화,/ 안에 있는가?//

풍장(風葬) 41 / 황동규
꽃 하도 이뻐 남작화(藍雀花)!/ 노랑 혹은 파랑 나비 모양 꽃 속으로/ 나비의 입을 지나 식도(食道) 속으로/ 회전문 속에 숨어들 듯/ 슬쩍 빨려 들어가면/ 꿀 방울이 보이고/ 그 방울 점점 커지다/ 터진다.// 봄이 온통 달다.//

풍장(風葬) 42 / 황동규
부어주고 왔다 마음 태반을,/ 무주 구천동 백련사/ 비비추에.// 줄기마다 십여 개씩/ 불 막 끈 보랏빛 초롱들을 달고/ 바람처럼 모여 있는 비비추,/ 초롱 하나하나엔 어린 초승달,/ 하얀 손잡이 하나씩.// 비비추, 날 마셔라./ 나는 널 마실 수가 없다./ 길섶에 끌려가 너를 향해 폭발할 뿐,/ 엄동성한 수도관 터지듯./ 뿜어나오는 나를/ 마셔라, 비비추.// 내 다시는 나를 담을 수 없는/ 관(管)이 되어 돌아왔다,/ 너글너글하게.//

풍장(風葬) 43 / 황동규
이제 음악은 다 들었다./ 베토벤의 현악 4중주는 너무 들었고/ 가야금은 산조(散調)에 빠져/ 물 너무 뿌려/ 석곡란을 죽였다./ 어젯밤에는 브람스의 클라리넷 5중주를/ 켜 논 채 잠들었다./ 이제 동서양 소리 모두 잊고/ 풍란(風蘭) 방을 하나 얻어 살다 가고 싶다/ 전축도 전화도 전문(傳聞)도 없이.// 마음놓고 놀다 가는 바람 소리.//

풍장(風葬) 44 / 황동규
바람 소리.// 저 마을 뒤에 엉거주춤 서 있는 산,/ 낯익어 고향 같다./ 개울 간신히 건너는 돌다리/ 낯익어 돌다리 같다./ 눈 반쯤 감고 보면 모두 낯익다./ 바람 소리에 흔들릴까 말까 주저하는/ 저 나무의 몸짓도./ 언젠가 하루 구름 갠 날/ 눈 한번 아주 감으면/ 모든 게 몸서리치게 낯익어지지 않을까?// 아 환한 사람 소리./ 눈 지긋 감아라.//

풍장(風葬) 45 / 황동규
며칠 병(病) 없이 앓았다./ 책장문들이 모두 열렸고/ 책들은 길 떠날 채비하고 줄 서 있었다./ 더러 외투 껴입고 있는 놈도 있었다.// 문밖을 나서니 시야의 초점 계속 녹이는 가을 햇빛./ 간판들이 선명해라/ 지나치는 사람들도 선명해라/ 책을 들고 걷는 저 여자의 긴 손,/ 차도(車道)에 바싹 나와 아슬아슬/ 저 흙덩이의 어깨까지 선명해라,/ 그 어깨를 만지는 시간의 손가락도./ 눈이 밝아졌구나,/ 아 눈이.//

풍장(風葬) 46 / 황동규
내 관악산 보이는 곳에 살며/ 때로는 산이 안개 속에 숨는 것을 보았다./ 이슬비가 안개를 벗기기도/ 안개가 이슬비를 다시 감싸기도 했다./ 언젠가 마음 속 간직해온 것과 헤어져야 할 때,/ 마음의 것들 책상 위에 벌여 놓을 때,/ 서가에 꽂힌 책 위에도 얹어 놓을 때,/ 눈앞에서 금방 사라질 것들!/ 꺼내 놓으라면,/ 관악산부터 내어 놓으리./ 다녀온 암자들도 암자의 약수그릇도 내어 놓고,/ 가을 저녁 어둡기 직전 남 보지 않을 때 땅을 더듬다 말던/ 가랑비도.//

풍장(風葬) 47 / 황동규
1992년 늦가을 저녁/ 이제 아무도 지는 해를 보지 않는다./ 베란다 아래는 사당동 모(某)아파트 주차장/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바람 소리.// 베란다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 벤자민 나무./ 다들 시들할 때 잘도 버티는구나./ 속내의 바람으로 슬쩍 안아본다./ 인간의 체온을 재확인할 뿐./ 사당동 모아파트 주차장의/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바람 소리.// 베란다 공간에 꾸부정한 한 획(劃) 인간.//

풍장(風葬) 48 / 황동규
바람의 손길 한결 서늘해지고/ 날이 저문다./ 마른 풀잎에 포근히 싸여/ 혼자 잠들고 싶을 때./ 피여 잠드지 마라/ 피여 잠드지 마라./ 정상 코빼기까지 차로 오를 수 있는/ 해발 561미터 칠갑산에만 가도/ 별은 하늘 가득/ 별은 하늘 가득/ 하늘과 마음이 만나는 곳이면/ 지평선 넘어서까지/ 하늘에 마음 뺏겨 붙박이된 불꽃처럼/ 주렁주렁 달려 번쩍인다./ 피여 잠드지 마라.//

풍장(風葬) 49 / 황동규
늦가을 저녁 아우라지강을 혼자 만나노니/ 나의 유해 예까지 끌고 와 부릴 만하이./ 앞산 한가운덴 잎갈이나무들 위통 벗고 모여/ 마지막 햇빛 쪼이고 있고,/ 주위로 침엽수들 침착히 서서/ 두 강이 약속 없이 만나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다/ 껄끄러운 두 강 만나/ 고요한 강 하나 이룬다/ 빈 배 하나 흔들리며 떠 있다/ 시간이 고이지 않는다//

풍장(風葬) 50 / 황동규
오늘 서가의 지도(地圖)를 모두 버렸다./ 바닷가를 방황하다가/ 우연히 눈부신 눈을 맞으리./ 건너편 섬이 은색 익명(匿名)으로 바뀌다가/ 내리는 눈발 사이로 넌지시 사라지는 것을 보리./ 사라진 섬을 두고,/ 마음에 박혔던 섬도 몇 뽑고/ 마음에 들던 섬부터 뽑고/ 섬처럼 박혀 있던 시간들도 모두 뽑아버리고/ 돌아오리.// 오늘 지도를 모두 버렸다.//

풍장(風葬) 51 / 황동규
수인선(水仁線) 협궤차를 내려 걷는다./ 하늘에서 문득 기러기 소리 그치고/ 산 뒤에 숨는 수척한 산/ 채 사라지려다 만다, 조 숱 적은 머리끝./ 철길이 동네 마당을 막 지나가고 있다./ 아무 일도 없다./ 동네 토종닭들이 겨울 땅을 할퀴고 있을 뿐./ 팔목시계 하나가 발톱에 걸려 나오려다 만다./ 뽑아본다. 침이 가고 있군.// 시간 뒤에 숨어 있는 시간?//

풍장(風葬) 52 / 황동규
싸락눈 내리는 늦겨울 저녁/ 꽃도 병(病)도 없어/ 기계적으로 물 주며 잊고 살던 소심(素心)과/ 최근 들어서는 늘 곁에 놓아두고 두리번 찾던 시간을/ (내 안경 어디 잇지?)/ 다시 만나리./ 한번 만나고 나면 세상의 온갖 선(線)들이 시들해지는/ 부석사 무량수전 가벼이 살짝 쳐든 처마의 선을/ 서로 자리 슬쩍 바꿔/ 두 팔로 받치고 서 있으리./ 싸락눈 맞으며.// 다음엔 마음놓고 금가리.//

풍장(風葬) 53 / 황동규
바둑 훈수 두어도 좀체 화 안 내던/ 화나면 껄껄 웃던/ 중문과 동료 슬몃 세상 떠/ 새벽길에 고향 부여로 가고/ (부여, 부여, 부연 어디 있는가?)/ 늦눈 막 그친 오후/ 연구실 밖 캐나다 단풍싹/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한 붉은 혀들/ 하늘에 흑선(黑線)친 가지에 촘촘히 붙어 있다./ 눈 한 점 살짝 올려논 혀도// 마당에 나가 얼굴 쳐들고 입 벌려/ 눈송이 받아 혀 위에 올려 놓던 어린 날/ 둘러 보아라/ 그 어린 날은 어디 있는가?/ (부여, 부여, 부연 어디 있는가?)// 어디에 가 묻힌들/ 봉천동 네 거리만 못하랴.// 어느 저녁/ 단풍 혀 위에 우연히 얹혀/ 잠시 무중력이 되었다가/ 무심히 한 방울 부연 물로!//

풍장(風葬) 54 / 황동규
그대는 강을 건넜는가?// 낯선 밤여행 길에서/ 전조등을 허리로 때로는 무릎으로 받으며/ 이른봄 성긴 눈발 속에 나타났다 숨었다/ 눈인사하다 건너는/ 길이 먼저 건너는/ 그런 강이 아니고// 갑자기 자갈 위에 그대를 올려놓고 문득 내려놓는,/ 귀기울이면/ 타이어 무게 받으려고/ 등에 힘주고 움츠렸던 자갈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소리.// 그대는 강을 건넜는가?//

풍장(風葬) 55 / 황동규
이른봄부터 국문과 이선생의 오른쪽 눈/ 슬몃슬몃 어두워졌다/ 명문과 홍선생의 망막 지평선 위론/ 모기 두 마리 날기 시작했다/ 눈뜨면 바로 눈앞에 모기 두 마리./ 내 홍선생에게 말했다./ 모기 날음(飛蚊)이 아니라 모기 춤이라 하자.// 눈 속에서 물것이 춤추면/ 한 눈 감아도/ 세상 온통 춤밭 되리./ 어디서 날아와 둥지 틀었는지/ 벤자민 화분에 핀 민들레 꽃도 춤추리./ 민들레 옆에 붙어 있는 풍뎅이 등에/ 한없이 박혀 자지러지게 춤추는/ 고동색(古銅色) 반점!//

풍장(風葬) 56 / 황동규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는 달걀의 세포 분열/ 날개 형상이 그려지기 전/ 어느샌가 눈 언저리에 까맣게 모여드는 세포들.// 세상 뜰 때는 심장 멎기 전/ 눈이 먼저 꺼지지 않겠는가./ 어느 오후 창밖 싱싱한 캐나다 단풍/ 그 옆 느티나무 이층 까치집/ 그 아래서 난폭하게 타고 있는 등(藤)꽃 불떨기/ 아 허파꽈리들 온통 청보라로 익히는 불떨기들을/ 천천히 다시 한번 만나보게 하고/ 동작 그만, 하며 세상 슬몃 눈에 들어와 어두워질 때./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 하나하나 확연했어./ 예쁜 덧니까지도!”//

풍장(風葬) 57 / 황동규
한 보름 비운 사이/ 온통 달개비밭이 된/ 친구의 농장 한 구석에/ 잘못 들어와 핀 바위취들// 어디서나 발 멈추면 보인다/ 달개비에 밀려 시드는 꽃/ 꽃잎 가장자리가 바래고/ 손발이 일그러지고/ 허리가 마르고/ 땅에 박은 식도(食道)가 어둑하다/ 막차가 터미널에 닿고/ 불들이 슬며시 꺼지기 시작한다// 어디서나 발 멈추면/ 마르는 풀의 꺼지는 불이/ 인간의 마음을 덥힌다.//

풍장(風葬) 58 / 황동규
달개비떼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꽃 하나하나를 들여다본다./ 이 세상 어느 코끼리 이보다도 하얗게 이쁘게 끝이 살짝 말린/ 수술 둘이 상아처럼 뻗쳐있다./ 흔들리면/ 나비의 턱 더듬이 같은 수술!/ 그 하나에는 작디작은 이슬 한 방울이 달려있다./ 혼처럼 박혀 있는 진노란 암술/ 그 뒤로 세상 어느 나비보다도/ 파란바비!/ 금방 손끝에서 날 것 같다./ 그래, 그 흔한 달개비꽃 하나가/ 이 세상 모든 꽃들의 감촉을…// 상아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풀잎 끝에서 꼭 한 바퀴 구르고/ 사라진다.//

풍장(風葬) 59 / 황동규
그대는 상자 속을 들여다 보았는가?// 낡은 티셔츠, 벙어리장갑 한 짝,/ 흑백 사진 몇 장,/ 몽당연필 한 자루,/ 붉은 연필로 겉장에 X표 친 노우트,/ 벙어리장갑 또 한 짝,/ 을 들치고 속을 보면/ 어느날 들어간 인사동 골목길/ 연탄 난로 위에 우동이 끓고 있는 조그만 노점 앞에서/ 키 큰 소녀 하나가 떡볶이를 먹고 있다./ 단발머리 위로/ 담장 위로/ 벌겋게 녹슬고 있는 철조망 끝으로/ 타고 오른/ 끝이 살짝 말려 있는 나팔꽃 한 줄기/ 그 위론 예쁘달 것도 귀엽달 것도 없는/ 낮달 하나/ 구역질// 소녀는 계속 먹고 있다./ 시간이 새어나가고/ 아무런 부피도 무게도 자리 뜬/ 한줌의 느낌.//

풍장(風葬) 60 / 황동규
그래 능소화/ 얼굴 약간 구겨진/ 캐주얼 입은 종이꽃같이/ 나뭇가지에 슬쩍 걸터앉아// 아무리 기다려도 다른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여름날// 스캇 라파로의 재즈 베이스 리듬에 기대어/ 세상이 사라져도 끄트머리가 없다면.//

풍장(風葬) 61 / 황동규

풍장(風葬) 62 / 황동규
평생 잠에 발 들여논 적 없는 하루살이들/ 떠오르다 멈춘 큰 풍선처럼 들판에 떠 있다/ 돌을 가로지르는 지방도의 이른 가을/ 늘 보는 구름 두어장 떠 있다/ 하루살이들이 부력을 얻기 위해 고도를 낮출 때/ 자세히 보면 잠에 빠졌는지/ 같이 내려오지 못하고/ 두세 점 겉 떠도는 놈도 있다// 그 참./ 어린 날 물가에서 수제비 뜨던 돌/ 외발뛰기 하던 돌들을/ 눈 껌벅이며 빨아들이던 그 수면 같은 잠.//

풍장(風葬) 63 / 황동규
하루살이 하나 가물가물 내려온다./ 길을 잃었는가/ 생각에 잡혔는가/ 발 헛디뎠는가/ 혼자 헛것처럼/ 가물가물 돌며 내려온다// 하루살이 떨어진 점 위로/ 풀잎 한 장 날려온다.// 풀잎이여/ 하루살이의 얼굴을 덮어다오/ 그의 귀와 귀 사이를 덮어다오/ 그의 죄그만 입술과 입술 사이의 숨을 덮어다오/ 그의 삶의 느낌을 덮어다오/ 이 하루살이를 덮어다오.//

풍장(風葬) 64 / 황동규
잠을 자다 홀연히 깨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거실에 나가 벽 더듬어 불을 켜고/ 냉수 한잔 마시고/ 공연히 달력 한번 쳐다보고/ 말 않으면 모든 말 금시 말라버릴 듯/ 불 끄려다 석곡란에 물 주며/ 몇 마디 말 중얼거리다 말고.// 언제부터인가 가까이 다가오는/ 인간의 뒷모습.//

풍장(風葬) 65 / 황동규
오랜만에 와 멎은 남도(南道) 길// 담양읍 담양천변 장터에/ 적갈색으로 변하는 흑백사진 속 근엄한 노인들처럼/ 버티고 선 오백 년 느티들/ 창(槍) 포개 묶어놓듯/ 밑둥 잘라 묶어 세워논 황죽(黃竹) 위로/ 그 선(線) 위로/ 캄캄히 날려간다 느티잎들//

풍장(風葬) 66 / 황동규
선운사 도솔산 단풍 막 지고 난 뒤/ 나무의 나체들/ 그 하나도 황홀찮은 적막(寂寞)/ 빈 나무들 뒤로 사라지는/ 한 줄기 구겨진 길/ 고개를 돌리는 바람소리// 황홀찮은//

풍장(風葬) 67 / 황동규
산하(山河)는 온통 서걱이는 서리밭길/ 한강과 경기만의 수초(水草)들도 관절을 굽힐// 기러기 몇 마리 마음 놓고 떠 있는/ 하늘/ 바람의 어깨가 만져지는//

풍장(風葬) 68 / 황동규
한번 불다 부력(浮力)놓치고 꺼지는/ 저 바람 소리같이// 눈 희끗희끗 친 끄트럭 밭 건너다가//

풍장(風葬) 69 / 황동규
월악산 중턱 온통 수놓은 눈꽃/ 온 나뭇가지들이 수정(水晶) 피워내/ 찬란히 깎아 빛나는// 혼(魂)이 있다면/ 언젠가 한번은/ 눈꽃처럼 내 몸에 묻었다 날아가리// 마음 온통 찬란해/ 오르페우스처럼 잎만 보고 내려오다/ 송계계곡에 닿기 직전 훌쩍 뒤돌아본다/ 아 사라졌다// 묻었다 갈아가듯//

풍장(風葬) 70 / 황동규
냇물 위로 뻗은 마른 나뭇가지 끝/ 저녁 햇빛 속에/ 조그만 물새 하나 앉아 있다/ 수척한 물새 하나/ 생각에 잠겼는가/ 냇물을 굽어보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가/ 조으는가// 조으는가/ 꿈도 없이//

 



황동규(黃東奎) 시인
1938년 평안남도 숙천에서 출생하였다. 1946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월남하였다. 서울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나왔다. 1958년 《현대문학》에 시 〈10월〉,〈동백나무〉,〈즐거운 편지〉 등을 추천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한밤으로〉,〈겨울의 노래〉,〈얼음의 비밀〉 등의 역작을 발표했으며, 이러한 초기 시들은 첫 번째 시집 《어떤 개인 날》에 수록되어 있다. 이어 두 번째 시집 《비가(悲歌)》, 3인 시집 《평균율》을 간행하였고 《사계(四季)》의 동인으로 활약했다. 그 밖의 시집으로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풍장(風葬)》,《어떤 개인 날》,《외계인》 등이 있다. 현대문학신인상, 한국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호암상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소설가 황순원의 장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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