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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용래 시인

부흐고비 2021. 8. 31. 08:37

그림 출처: 당진신문

고향 / 박용래
눌더러 물어볼까 나는 슬프냐 장닭 꼬리 날리는 하얀 바람 봄길 여기사 扶餘, 故鄕이란다 나는 정말 슬프냐//

울타리 밖 / 박용래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 듯 길들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천연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殘光이 눈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울안 / 박용래
탱자울에 스치는 새떼/ 기왓골에 마른 풀/ 놋대야의 진눈깨비/ 일찍 횃대에 오른 레그호온/ 이웃집 아이 불러들이는 소리/ 해 지기 전 불 켠 울안.//

밭머리에 서서 / 박용래
노랗게 속 차오르는 배추밭머리에 서서/ 생각하노니/ 옛날에 옛날에는 배추꼬리도 맛이 있었나니 눈 덮힌 움 속에서 찾아냈었나니// 하얗게 밑둥 드러내는 무밭머리에 서서/ 생각하노니/ 옛날 옛날에는 무꼬리 밭에 채였나니 아작아작 먹었었나니// 달삭한 맛// 산모롱을 굽이도는 기적 소리에 떠나간 사람 얼굴도 스쳐가나니 설핏 비껴가나니 풀무 불빛에 싸여 달덩이처럼// 오늘은/ 이마 조아리며 빌고 싶은 고향//

황산메기 / 박용래
밀물에/ 슬리고// 썰물에/ 뜨는// 하염없는 갯벌/ 살더라, 살더라/ 사알짝 흙에 덮여// 목이 메는 白江下流/ 노을 밴 黃山메기/ 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 살더라.​//

마을 / 박용래
난/ 彩雲山/ 민둥산/ 돌담 아래/ 손 짚고/ 섰는/ 성황당/ 허수아비/ 댕기풀이/ 허수아비/ 난.//

오류동 동전 / 박용래
한때 나는 한 봉지 솜과자였다가/ 한때 나는 한 봉지 붕어빵이었다가/ 한때 나는 좌판에 던져진 햇살였다가/ 중국집 처마밑 조롱 속의 새였다가/ 먼 먼 윤회 끝/ 이젠 돌아와/ 오류동의 동전//

쓰디쓴 담뱃재 / 박용래
아무리 굽어 보아도/ 보이지 않는/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헤아릴 수 없는/ 이러한 깊은 층층계에/ 나는 능금처럼/ 떨어져 있다./ 이제 어머니의 자장가는/ 잃어버렸고/ 세정(世情)은 오히려 감상(感傷)이었다// 벗은 나무처럼 서서/ 모호(模糊)한 인생(人生)이/ 너무 시를 쉽게 묶는가보다/ 오늘밤도 소복이 쌓이는//

별리(別離) / 박용래
노을 속에 손을 들고 있었다, 도라지빛./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손끝에 방울새는 울고 있었다.//

가학리(佳鶴里) / 박용래
바다로 가는 하얀 길/ 소금 실은 화물자동차(貨物自動車)가 사람도 싣고/ 이따금 먼지를 피우며 간다// 여기는 당진(唐津) 송악면(松岳面) 가학리(佳鶴里)/ 가차이 牙山灣(아산만)이 빛나 보인다/ 발밑에 싸리꽃은 지천으로 지고//

먼 바다 / 박용래
마을로 기우는/ 언덕, 머흐는/ 구름에// 낮게 낮게/ 지붕 밑 드리우는/ 종소리에// 돛을 올려라// 어디에, 막 피는/ 접시꽃/ 새하얀 매디마다// 감빛 돛을 올려라// 오늘의 아픔/ 아픔의/ 먼 바다에.//

부여 / 박용래
꾀꼴 소리 넘치는 눈먼 석불, 물꼬 보러 가듯 가고 없더라. 질경이 씹으며 동저고릿 바람으로./ 노을 잠긴 국말이집 상머리 너머 세월, 앉은뱅이 꽃./ 언덕 하나 사이 두고 언덕, 징검다리 뿐이더라.//

서산(西山) / 박용래
상칫단 아욱단 씻는/ 개구리 울음 五里 안팎에/ 보릿짚 호밀짚 씹는日落西山에 개구리 울음//

차일(遮日) / 박용래
짓광목 遮日/ 설핏한 햇살// 四, 五百坪 추녀 끝 잇던/ 人內 장터의 바람// 멍석깃에 말리고/ 도르르 장닭 꼬리에/ 말리고// 산그림자 기대/ 앉은 사람들// 황소뿔 비낀 놀.//
* 차일(遮日) : 햇볕을 가리기 위해 치는 포장.

담장 / 박용래
오동꽃 우러르면 함부로 노한 일 뉘우쳐진다./ 잊었던 무덤 생각난다./ 검정 치마, 흰 저고리, 옆 가르마, 젊어 죽은 홍래 누이 생각도 난다./ 오동꽃 우러르면 담장에 떠는 아슴한 대낮,/ 발등에 지는 더디고 느린 원뢰(遠雷).//
*원뢰(遠雷) :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그 봄비 / 박용래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소나기 / 박용래
누웠는 사람보다 앉았는 사람/ 앉았는 사람보다 섰는 사람/ 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 혼자 걷는 사람보다/ 송아지 두, 세 마리/ 앞세우고 소나기에 쫓기는 사람.//

장대비 / 박용래
밖은 억수같은 장대비/ 빗속에서 누군가 날/ 목놓아 부르는 소리에/ 한쪽 신발을 찾다찾다/ 심야의 늪/ 목까지 빠져/ 허우적 허우적이다/ 지푸라기 한 올 들고/ 꿈을 깨다, 깨다/ 尙今도 밖은/ 장대 같은 억수비/ 귓전에 맴도는/ 목놓은 소리/ 오오 이런 시간에 난/ 우, 우니라/ 象牙빛 채찍//

건들 장마 / 박용래
건들장마 해거름 갈잎 버들붕어 꾸러미 들고/ 원두막 처마밑 잠시 섰는 아이/ 함초롬 젖어 말아올린 베잠방이 알종아리 총총 걸음/ 건들 장마 상치 상치 꽃대궁 백발(白髮)의 꽃대궁/ 아욱 아욱 꽃대궁 백발(白髮)의 꽃대궁/ 고향 사람들 바자울 세우고 외넝쿨 거두고.//
* 건들장마 : 초가을에 비가 오다가 금방 개고 또 비가 오다가 다시 개고 하는 장마.

연시(軟枾) / 박용래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枾)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 연시(軟枾) : 물렁하게 잘 익은 감.

산견(散見) / 박용래
해종일 보리 타는/ 밀 타는 바람// 논귀마다 글썽/ 개구리 울음// 아 숲이 없는 산(山)에 와/ 뻐꾹새 울음// 낙타(駱駝)의 등 기복(起伏) 이는 구릉(丘陵)/ 먼 오디빛 망각(忘却).//
* 산견(散見) : 여기저기에 보임.

잔(盞) / 박용래
가을은 어린 나무에도 단풍 들어/ 뜰에 산사자(山査子) 우연듯 붉은데/ 벗이여 남실남실 넘치는 잔/ 해후(邂逅)도 별리(別離)도 더불어 멀어졌는데/ 종이, 종이 울린다 시이소처럼//

육십의 가을 / 박용래
거기/ 그 자리./ 봉선화 주먹으로 피는데/ 피는데// 밖에 서서 우는 사람/ 건듯 갈바람 때문인가,// 밖에 서서 우는 사람/ 스치는 한점 바람 때문인가,// 정말?//

추일(秋日) / 박용래
나직한/ 담/ 꽈리 부네요// 귀에/ 가득한/ 갈바람이네요// 흩어지는 흩어지는/ 기적/ 꽃씨뿐이네요//

겨울밤 /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중학교 2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게재.

저녁눈 / 박용래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고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게재.

 

설야(雪夜) / 박용래
눈보라가 휘돌아간 밤/ 얼룩진 벽에/ 한참이나/ 맷돌 가는 소리/ 고산 식물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 오리오리/ 맷돌 가는 소리//


천(千)의 산(山) / 박용래
댕댕이 넝쿨, 가시덤불/ 헤치고 헤치면/ 그날 나막신/ 쌓여 들어 있네/ 나비 잔등에 앉은 보릿고개/ 작두로도 못 자르는/ 먼 삼십리/ 청솔가지 타고/ 아름 따던 고사리순/ 할머니 나막신도/ 포개 있네/ 빗물 고인 천(千)의 산(山)/ 겹겹이네.//

둘레 / 박용래
산은/ 산빛이 있어 좋다/ 먼 산 가차운 산/ 가차운 산에/ 버들꽃이 흩날린다/ 먼 산에/ 저녁 해가 부시다/ 아, 산은/ 둘레마저 가득해 좋다//

점묘(點描) / 박용래
싸리울 밖 지는 해가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보리 바심 끝마당/ 허드렛군이 모여/ 허드렛불을 지르고 있었다./ 푸슷푸슷 튀는 연기 속에/ 지는 해가 이중으로 풀리고 있었다./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 징소리/ 도리깨 꼭지에 지는 해가 또 하나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보름 / 박용래
官北里 가는 길/ 비켜 가다가/ 아버지 무덤/ 비켜 가다가/ 논둑 굽어보는/ 외딴 송방에서/ 샀어라/ 성냥 한 匣/ 사슴표,/ 성냥 한 匣/ 어메야/ 한잔 술 취한 듯/ 하 쓸쓸하여/ 보름, 쥐불 타듯.//

삼동(三冬) / 박용래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새어나는 불빛이여 늦은 저녁/ 상(床) 치우는 달그락 소리여 비우고 씻는 그릇 소리여/ 어디선가 가랑잎 지는 소리여 밤이여 섧은 잔(盞)이여/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새어나는 아슴한 불빛이여.//

구절초 / 박용래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에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코스모스 / 박용래
곡마단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는/ 코스모스의/ 지역// 코스모스/ 먼/ 아라스카의 햇빛처럼/ 그렇게/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위도// 참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일생//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소녀의/ 지문//

제비꽃 / 박용래
부리 바알간 장 속의 새,/ 동트면 환상의 베틀 올라 금사(金絲),/ 은사(銀絲) 올올이 비단올만 뽑아냈지요,/ 오묘한 오묘한 가락으로./ 난데없이 하루는 잉앗대는 동강,/ 깃털은 잉앗줄 부챗살에 튕겨 흩어지고 흩어지고,/ 천길 벼랑에 떨어지고,/ 영롱한 달빛도 다시 횃대에 걸리지 않았지요./ 달밤의 생쥐, 허청바닥 찍찍 담벼락 긋더니,/ 포도나무 뿌리로 치닫더니,/ 자주 비누쪽 없어 지더니./ 아, 오늘은 대나뭇살 새장 걷힌 자리,/ 흰 제비꽃 놓였습니다.//

해바라기 단장(斷章) / 박용래
해바라기 꽃판을/ 응시한다/ 삼베올로/ 삼베올로 꽃판에/ 잡히는 허망(虛妄)의/ 물집을 응시한다/ 한 잔(盞)/ 백주(白酒)에/ 무오라기를/ 씹으며/ 세계(世界)의 끝까지/ 보일 듯한 날.//

엉겅퀴 / 박용래
잎새를 따 물고 돌아서 잔다/ 이토록 갈피 없이 흔들리는 옷자락// 몇 발자국 안에서 그날/ 엷은 웃음살마저 번져도// 그리운 이 지금은 너무 멀리 있다/ 어쩌면 오직 너 하나만을 위해// 기운 피곤이 보랏빛 흥분이 되어/ 슬리는 저 능선// 함부로 폈다/ 목놓아 진다//

앵두, 살구꽃 피면 / 박용래
앵두꽃 피면/ 앵두바람/ 살구꽃 피면/ 살구바람// 보리바람에/ 고뿔 들릴세라/ 황새목 둘러주던/ 외할머니 목수건//

상치꽃 아욱꽃 / 박용래
상치꽃은/ 상치 대궁만큼 웃네.// 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잔 한잔 비우고/ 잔 비우고// 배꼽/ 내놓고 웃네.// 이끼 낀/ 돌담// 아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다는// 시인의 이름/ 잊었네.//

꽃물 / 박용래
수수밭/ 수수밭 사이로/ 기우는/ 고향/ 가까운/ 산자락/ 보릿재/ 내는/ 사람들/ 귀향열차/ 뒤칸에/ 매달린/ 노을,/ 맨드라미 꽃물.//

먹감 / 박용래
어머니 어머니 하고/ 외어 본다./ 이 가을/ 아버지 아버지 하고/ 외어 본다/ 이 가을/ 가을은/ 오십 먹은 소년/ 먹감에 비치는 산천/ 굽이치는 물머리/ 잔 들고/ 어스름에 스러지누나/ 자다 깨다/ 깨다 자다.//

버드나무 길 / 박용래
맘 천근 시름겨울 때/ 천근 맘 시름겨울 때/ 마른 논에 고인 물/ 보러 가자./ 고인 물에 얼비치는/ 쑥부쟁이/ 염소 한 마리/ 몇 점의 구름/ 紅顔의 少年같이/ 보러 가자.// 함지박 아낙네 지나가고/ 어지러이 메까치 우짖는 버드나무/ 길./ 마른 논에 고인 물.//

강아지풀 / 박용래
남은 아지랑이가 홀홀 타오르는 어느 驛 構內 모퉁이 어메는 노오란 아베도 노란 貨物에 실려 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마른 枕木은 싫어 삐걱 삐걱 여닫는 바람 소리 싫어 반딧불 뿌리는 동네로 다시 이사 간다. 다 두고 이슬 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옛 喪輿 소리 들리어라.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월훈(月暈) /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무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 월훈(月暈) : 달 언저리에 동그랗게 생기는 구름 같은 테.

곰팡이 / 박용래
진실은/ 진실은// 지금 잠자는 곰팡이 뿐이다/ 지금 잠자는 곰팡이 뿐이다// 누룩 속에서/ 광 속에서// 명정(酩酊)만을 위해/ 오오직// 어둠 속에서/ ...... .// 거꾸로 매달려//

종소리 / 박용래
봄바람 속에 종이 울리나니/ 꽃잎이 지나니// 봄바람 속에 뫼에 올라 뫼를 나려/ 봄바람 속에 소나무밭으로 갔나니// 소나무밭에서 기다렸나니/ 소나무밭엔 아무도 없었나니// 봄바람 속에 종이 울리나니/ 옛날도 지나니//

막버스 / 박용래
내리는 사람만 있고/ 오르는 이 하나 없는/ 보름 장날 막버스/ 차창 밖 꽂히는 기러기떼,/ 기러기 땔 보아라/ 아 어느 강마을/ 殘光 부신 그곳에/ 떨어지는가//

고월(古月) / 박용래
유리병 속으로/ 파뿌리 내리듯/ 내리는/ 봄비./ 고양이와/ 바라보며/ 몇 줄 詩를 위해/ 젊은 날을 앓다가/ 하루는/ 돌 치켜들고/ 돌을 치켜들고/ 원고지 빈 칸에/ 갇혀버렸습니다/ 古月은.//

 

모과차 / 박용래

앞산에 가을비/ 뒷산에 가을비/ 낯이선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일없고/ 기인밤/ 모과차를 마시며/ 가을빗 소리//

엽서(葉書) / 박용래
들판에 차오르는 배추보러 가리/ 길이 언덕넘는 것/ 가다가 단풍/ 美柳나무버섯 따라가리.//

꿈속의 꿈 / 박용래
지상은 온통 꽃더미 사태인데/ 진달래 철쭉이 한창인데/ 꿈속의 꿈은/ 모르는 거리를 가노라/ 머리칼 날리며/ 끊어진 현 부여안고/ 가도 가도 보이잖는 출구/ 접시물에 빠진 한 마리 파리/ 파리 한 마리의 나래짓여라/ 꿈속의 꿈은// 지상은 온통 꽃더미 사태인데/ 살구꽃 오얏꽃 한창인데//

시락죽 / 박용래
바닥난 통파/ 움속의 降雪/ 꼭두새벽부터/ 降雪을 쓸고/ 동짓날/ 시락죽이나/ 끓이며/ 휘젓고 있을/ 귀뿌리 가린/ 후살이의/ 木手巾//

샘터 / 박용래
샘바닥에/ 걸린 하현(下弦)/ 얼음을 뜨네// 살얼음 속에/ 동동 비치는 두부며// 콩나물/ 삼십원어치 아침// 동전 몇 닢의 출범(出帆)/ -지느러미의 무게// 구숫한 하루/ 아깃한 하루/ 쪽박으로/ 뜨네.//

폐광근처 / 박용래
어디서 날아온 장끼 한 마리 토방의 얼룩이와 일순 눈맞춤하다 소스라쳐 서로 보이잖는 줄을 당기다 팽팽히 팽팽히 당기다 널 뛰듯 널 뛰듯 제자리 솟다 그만 모르는 얼굴끼리 시무룩해 장끼는 푸득 능선 타고 남은 얼룩이 다시 사금 줍는 꿈꾸다 ---- 폐광이 올려다보이는 외딴 주막//

자화상 2 / 박용래
한 오라기 지풀일레/ 아이들이 놀다 간/ 모래서/ 무덤을/ 쓰을고 쓰는/ 강둑의 버들꽃/ 버들꽃 사이/ 누비는/ 햇제비/ 입에 문/ 한 오라기 지풀일레/ 새알,/ 흙으로/ 빚을 경단에/ 묻은 지풀일레/ 창을 내린/ 하행열차/ 곳간에 실린/ 한 마리 눈[雪] 속 양(羊)일레.//

 

자화상 3 / 박용래

살아 무엇하리/ 살아서 무엇하리/ 죽어/ 죽어 또한 무엇하리/ 겨울 꽝꽝나무/ 꽝꽝나무 열매/ 울타리 밑의/ 인연/ 진한 허망일랑/ 자욱자욱 묻고/ '小寒에서/ 大寒사이'/ 家出하고 싶어라 / 싶어라.//
* 꽝꽝나무 : 감탕나뭇과의 상록 활엽 관목.

黃土길 / 박용래
낙엽진 오동나무 밑에서/ 우러러 보는 비늘구름/ 한 권 책도 없이/ 저무는/ 황톳길// 맨 처음 이 길로 누가 넘어 갔을까/ 맨 처음 이 길로 누가 넘어 왔을까// 쓸쓸한 흥분이 묻혀 있는 길/ 부서진 봉화대 보이는 길// 그날사 미음들레꽃은 피었으리/ 해바라기 만큼한// 푸른 별은 또 미음들레 송이 위에서/ 꽃등처럼 주렁주렁 돋아 났으리// 푸르다 못해 검던 밤 하늘/ 빗방울처럼 부서지며 꽃등처럼/ 밝아오던 그 하늘// 그날의 그날 별을 본 사람은/ 얼마나 놀랐으며 부시었으리// 사면에 들리는 위엄도 없고/ 강 언덕 갈대닢도 흔들리지 않았고/ 다만 먼 화산 터지는 소리/ 들리는 것 같아서// 귀대이고 있었으리/ 땅에 귀대이고 있었으리.//

땅 / 박용래
나 하나/ 나 하나뿐 생각했을 때/ 멀리 끝까지 달려갔다 무너져 돌아온다// 어슴푸레 등피(燈皮)처럼 흐리는 황혼(黃昏)// 나 하나/ 나 하나만도 아니랬을 때/ 머리 위에/ 은하/ 우러러 항시 나는 엎드려 우는 건가// 언제까지나 작별(作別)을 아니 생각할 수는 없고/ 다시 기다리는 위치(位置)에선 오늘이 서려/ 아득히 어긋남을 이어오는 고요한 사랑// 헤아릴 수 없는 상처를 지워/ 찬연히 쏟아지는 빛을 주워 모은다.//

하관(下棺) / 박용래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딩구는/ 우렁 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下棺/ 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탁배기 / 박용래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굴렁쇠 아이들의 달./ 자치기 아이들의 달./ 땅뺏기 아이들의 달./ 공깃돌 아이들의 달./ 개똥벌레 아이들의 달./ 갈래머리 아이들의 달./ 달아, 달아/ 어느덧/ 반백(半白)이 된 달아./ 수염이 까슬한 달아./ 탁배기(濁盃器) 속 달아.//

미닫이에 얼비쳐 / 박용래
호두 깨자/ 눈 오는 날에는// 눈발 사근사근/ 옛말 하는데// 눈발 새록새록/ 옛말 하자는데// 구구샌 양 구구새 모양/ 미닫이에 얼비쳐// 창호지 안에서/ 호두 깨자// 호두는 오릿고개/ 싸릿골 호두.//

 



박용래(朴龍來, 1925년~1980년) 시인
충청남도 논산 강경읍에서 태어났다. 1943년 강경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취직했다. 해방 후 1946년에 호서중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1973년 고혈압 때문에 사임하기까지 교사로 일했다. 1980년 7월에 교통사고로 3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가, 그해 11월 21일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별세했다. 충남문인협회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고, 1984년 대전 보문산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1955년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로 박두진의 첫 추천을 받고, 다음 해인 1956년에 〈黃土길〉〈땅〉으로 3회 추천을 완료하여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으로 《싸락눈》《강아지풀》《白髮의 꽃대궁》과 사후에 나온 시전집《먼 바다》와 《박용래 시선》, 한국 대표명시선100 박용래 《일락서산에 개구리 울음》등이 있다. 충청남도 문화상, 현대시학작품상. 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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