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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규동 시인

부흐고비 2021. 9. 2. 09:04

느릅나무에게 / 김규동
나무/ 너 느릅나무/ 50년 전 나와 작별한 나무/ 지금도 우물가 그 자리에 서서/ 늘어진 머리채 흔들고 있느냐/ 아름드리로 자라/ 희멀건 하늘 떠받들고 있느냐/ 8ㆍ15 때 소련병정 녀석이 따발총 안은 채/ 네 그늘 밑에 누워/ 낮잠 달게 자던 나무/ 우리 집 가족사와 고향 소식을/ 너만큼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이제 아무 데도 없다/ 그래 맞아/ 너의 기억력은 백과사전이지/ 어린 시절 동무들은 어찌 되었나/ 산 목숨보다 죽은 목숨 더 많을/ 세찬 세월 이야기/ 하나도 빼지 말고 들려다오/ 죽기 전에 못 가면/ 죽어서 날아가마/ 나무야/ 옛날처럼/ 조용조용 지나간 날들의/ 가슴 울렁이는 이야기를/ 들려다오/ 나무, 나의 느릅나무.//

죽여주옵소서 / 김규동
놀다보니 다 가버렸어/ 산천도 사람도 다 가버렸어// 제 가족 먹여 살린답시고/ 바쁜 체 돌아다니다보니/ 빈 하늘 쳐다보며 쫓아다니다보니/ 꽃 지고 해 지고 남은 건 그림자뿐// 가버렸어/ 그 많은 시간 다 가버렸어/ 50년 세월 어디론가 다 가버렸어/ 이래서 한 잔 저래서 한 잔/ 먹을 것 입을 것/ 그런 것에나 신경쓰고 살다보니/ 아, 다 가버렸어 알맹이는 다 가버렸어/ 통일은 언제 되느냐/ 조국 통일은 과연 언제쯤 오느냐// 북녘/ 내 어머니시여/ 놀다 놀다/ 세월 다 보낸 이 아들을/ 백두산 물푸레나무 매질로/ 반쯤 죽여주소서 죽여주옵소서.//

어머니 오시다 / 김규동
두만강 끝에서 서울까지/ 어머니 오시다/ 소복에 지팡이 짚으시고/ 산 넘고 물 건너 이천리 길/ 어머니 오시다/ 백두산의 머루 다래 오미자 한보따리 챙겨들고/ 40년 전에 집 떠난 자식 찾아/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자식 보러 가오/ 내 땅 내가 가는데/ 길을 막지 마오/ 휴전선에 늘어선/ 이북 병정 이남 병정 나무라기도 하고/ 통사정도 하며/ 경계선을 넘어/ 북조선 어머니 남조선 아들 만나러 오시다/ 백두산 산삼 서너 뿌리 갖고 오던 건/ 휴전선에서 만난 비쩍 마른 남도 병정한테 줬다/ 총 들고 선 양놈 병정보고는/ 너흰 너의 나라로 가거라/ 여기는 죽어도 살아도 우리가 사는/ 조선사람의 땅 아니냐 분풀이도 했다며/ 눈같이 흰 백발 이고/ 가냘피 웃으시는 어머니/ 어머니시여/ 못난 이남 자식은/ 어여쁜 어머니 앞에 다만 꿇어 엎드려/ 꿈일지라도/ 오래 울 수 있게 해달라고 떼를 쓴다/ 어디 보자/ 남조선은 살기 어렵다더니/ 그 많은 세월 견뎌냈구나/ 하지만 흔적 없는 타향살이 웬말이냐/ 기다리다 못해 내가 왔다/ 뜻은 품었으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중늙은이 돼버린 자식은/ 그저 목메어 울 뿐/ 죄스런 40년이/ 뼈에 맺힌다/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꽃처럼 졌던가/ 불속에 뛰어들어 통일을 외쳤던가/ 그들이 바친 땀과 피는/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뤘다/ 그럼에도 이 나이 되도록 살아남아/ 조바심만 하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이 땅의 가장 억울한 사람들 편들어/ 끝까지 싸워라/ 이 나라의 통일이 멀지 않다/ 이 늙은 어미가 다 널 찾아오지 않았느냐/ 사람이 사람끼리 왔다갔다하면 이게 통일이다/ 통일을 어렵게 생각지 마라/ 우리 함께 백두산 밑으로 가자/ 너를 키워준 드넓은 두만강벌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무슨 잘못 있어/ 서로 만나지도 못하느냐/ 어머니는 창밖에 흐르는/ 자동차의 물결을 내려다보았으나/ 바람결이지/ 지나가는 한때의 바람이지 하고/ 알 수 없는 말씀을 되풀이했다/ 올해는 우리 고장 함경도도 풍년이다/ 이제라도 만나면 다들 얼마나 반가워할 것이냐/ 자, 가자 백두산 기슭으로/ 그러면서/ 소복한 어머니는 표연히 앞을 섰다.//

어머니는 다 용서하신다 / 김규동
닭이나 먹는 옥수수를/ 어머니/ 남쪽 우리들이 보냅니다/ 아들의 불효를 용서하셨듯이/ 어머니/ 형제의 우둔함을 용서하세요.//

북에서 온 어머님 편지 / 김규동
꿈에 네가 왔더라.// 스물 세 살 때 훌쩍 떠난 네가/ 마흔일곱살 나그네 되어/ 네가 왔더라/ 살아생전에 만나라도 보았으면/ 허구한 날 근심만 하던 네가 왔더라/ 너는 울기만 하더라/ 내 무릎에 머리를 묻고/ 한마디 말도 없이/ 어린애처럼 그저 울기만 하더라/ 목놓아 물기만 하더라/ 네가 어쩌면 그처럼 여위었느냐/ 멀고먼 날들을 죽지 않고 살아서/ 네가 날 찾아 정말 왔더라/ 너는 내게 말하더라/ 다신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눈물어린 두 눈이/ 그렇게 말하더라 말하더라.//

어머니에게 / 김규동
깍두기 한가지만으로/ 밥 한그릇 비우게 되니/ 이 감격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요/ 광주의 음식맛은/ 깍두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무리 싼 값의 밥상이라도/ 정성을 다해요, 전라도 광주는/ 어머니/ 광주 음식맛을/ 못 보여드리는 게 한입니다// 함경도 척박한 고장서 자란 저는/ 맛에 대한 감각이 둔하지요/ 그러니 글을 쓴대도/ 맛있게는 못 써요/ 혀는 맛을 모르고 자랐으니/ 어찌 글의 맛인들 알았겠나요/ 어머니.//

누님 / 김규동
이북에/ 누님 두 분 계십니다/ 큰누님은 이름이/ 김용금(金龍金)이고/ 작은누이는/ 김선옥(金鮮玉)이라 합니다/ 누구시든지 혹 소식 아시는 분은/ 안 계시는지요/ 이 넓은 천지지간에/ 손톱만큼이라도/ 소식 아시는 분/ 안 계실런지요/ 안 계실런지요//

별이 달에게 / 김규동
편지 못 쓰고/ 전화 못해도/ 마음 변한 건 아니라고/ 믿어주오// 시간은 밤새/ 천리나 가버렸구려// 쑥 향기 그윽한 언덕에/ 이슬이 내려/ 적시오 가슴을// 당신은 알 것이오/ 승자가 가는 길과/ 패자가 가는 길이/ 함께 있다는 것을// 떨어지는 불덩이를 안고/ 비스듬히 나는 새/ 새는 죽어서/ 싸늘한 돌에 제 자태를 새겨놓았구려.//

고향 / 김규동
고향엔/ 무슨 뜨거운 연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을 두르고 돌아앉아서/ 산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가는 마을// 마을에선 먼 바다가 그리운 포플러 나무들이/ 목에어 푸른 하늘에 나부끼고// 이웃 낮닭들은 홰를 치며/ 한가히 고전(古典)을 울었다.// 고향엔 고향엔/ 무슨 뜨거운 연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혼가 / 김규동
통일을 못 보고/ 가는 벗/ 잠드시라/ 여기 대동강에서 떠온 물이 있고/ 한강수가 있다오/ 이 물로/ 그대 심장을 식히소서//

아, 통일 / 김규동
이 손/ 더러우면/ 그 아침/ 못 맞으리// 내 넋/ 흐리우면/ 그 하늘/ 쳐다 못 보리// 반백년 고행길 걸은/ 형제의 마디 굵은 손/ 잡지 못하리/ 이 손 더러우면// 내 넋 흐리우면/ 아, 그것은/ 영원한 죽음.//

남과 북 / 김규동
금은 그어졌으나/ 모두가/ 우리 땅이라/ 우리 하늘이라/땅 과 하늘을/ 더 이상 파괴하지 말고/ 사랑하자/ 산천과 사람/ 이름없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형제의 정을 되찾자/ 이것이 살아남는 길이라/ 함께 살아남는 길이라//

아리랑 / 김규동
부르세/ 아리랑…/ 6·25에 희생된/ 형제자매/ 지리산/ 제주도/ 광주/ 그 모든/ 항쟁의 대열에서/ 숨 거둔/ 우리 형제자매/ 원혼이여/구름을 넘어/ 달을 넘어/ 원한을 넘어/ 부르세/ 아리랑……/ 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며 가세/ 흰 뼈/ 이 산하/ 어디서나 일어서서/ 하나되는 위대한 나라 기려/ 부르세/ 한 목소리로/ 아,아리랑을//

육체로 들어간 진달래 / 김규동
먹었단 말입니다/ 연한 이파리/ 무지개 같은 진달래를/ 순이와 난 따 먹었어요/ 함경도의 3월은/ 아직 쌀쌀하나/ 허전한 육체에/ 꽃은 피로 녹아/ 하늘하늘 떨었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평안도 약산 시인은/ 노래했으나/ 밟고 가다니 사치 하잖아요/ 먹었단 말입니다/ 심장으로 들어가게 했지요// 모란이 피기까지는/ 기다리겠노라/ 전라도 강진 시인은 노래했으나/ 도대체 뭘 기다린단 말인가요/ 모란이 뭔지도 모르는 바람 센 땅에서/ 기다릴 것도 없이/ 우린 불붙듯 하는/ 진달래를 따 먹었어요// 여름내 땀 흘려 농사짓고/ 겨울엔 이태준의 『문장』 잡지를 읽는/ 이름 없는 농부의 딸 순이와 나는/ 입술같이 연한/ 진달래 이파리를 따 먹었어요// 순인 북에 있고/ 난 남쪽에 있으나/ 둘의 심장으로 들어간 진달래꽃만은/ 세월이 가도/ 고동치며 돌고 있답니다/ 사시사철 꽃은 피고 있답니다.//

나비와 광장 / 김규동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작은 심장을 죽인/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즈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나비는/ 또 한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본다.//

보일러 사건의 진상 / 김규동
어둠과 보일러ㅡ/ 물체의 형상을 헤아릴 길 없었음은 암흑했다는 까닭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과 인간 들 속에서 시인은 침전으로 굳어간 육체를 보일러의 어느 경사면에 누이고 성좌와의 대화를 최후로 사랑하였다// 높아가는 고압전선의 울음소리는 밤의 인광처럼 척추에 스며들고// 굶주려 넘어지는 생명들과 수없는 임종의 눈 내리는 새벽/ 향락의 극치와 극치의 마찰에서 일어나는 뿌연 암모니아의 빛깔/ 폐문(肺門)이 부은 바다와 하늘, 그리고 다가오는 25시// 광선! "모든 운명의 전말을 똑똑히 보라"/ 기관장의 비명과 그에 따르는 기관사들의 아우성// 폭발!// 아크등의 밝음 속에 시인은 하나의 예감을 육안으로 체험한다// 보일러엔 모세혈관 같은 무수한 절망의 선이 서려 있었던 것을ㅡ// 죽음과 시체들 속에 시인은 끄스른 머리와 떨어진 팔다리의 상처 그대로를 지니고 쓰러졌을 뿐//태양의 음악과 바다의 빛깔/ 오! 새로운 바다의 광선과 태양의 음악만이/ 또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

희망 / 김규동
아직 멀었다/ 끝까지 가야// 이 파도 넘으면/ 보인다 끝이// 노를 저어라/ 팔뚝에 힘을 넣자// 어둠이 깊어야/ 빛살 찬연하나니.//

당부 / 김규동
가는 데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보이리/ 길이//

걸어다니는 이순신 / 김규동
오래도록/ 한곳에 서 있은 장군은/ 걷고 싶다// 세종로/ 이순신 동상이/ 바퀴 달린 거대한 철판을 타고/ 서울역 쪽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장엄하고 아름답다/ 마치 온 서울이 함께 걸어나가는 것만 같다// 수군은 아직/ 거북선을/ 바다에 띄우지 않고 있다.//

어린 손자에게 / 김규동
얘야/ 아니다 그렇지 않다/ 저건 잘못된 충무공이시다/ 장군님은/ 저렇게 무섭게 생긴/ 누굴 위협하는 분 아닐 거야/ 인자하고 따뜻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힘을 빌리는 자상하고 용기 있는 분일 게다 그러기에/ 민중의 처참 보다못해/ 나라를 구하고 스스로 나아가 화살 받으신 분/ 개선장군 소리 듣기를/ 죽음으로 사양한 분/ 배고픈 아이에게 밥 주고/ 팔다리 다친 병사의 아픔 함께 운/ 인정 넘치신 분/ 장군님은 지금 여기 계시지 않아/ 자동차 악쓰며 쫓겨 달리는/ 이 넓은 길엔 계시지 않아/ 장군님은 남루한 옷 걸치고/ 팔도강산 외진 마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농민들 일손 도와주고/ 노동자들이 신음하는/ 공장과 일터를 고루 돌며/ 형제들 손 잡아주고 있지/ 몸에 기름 끼얹고 한몸 불태운/ 이 땅 젊은이들 영혼 붙들고 통곡하고 계셔/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아/ 통일로 가는 이 싸움 속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등뼈 휘도록 일하고 계셔/ 커다란 칼 짚고/ 이 민중 내려다보며 호령하는/ 위엄 가운데는 계시지 않아/ 얘야 이건 눈물 많으신 이순신 장군님 아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낮이나 밤이나 버티고 섰는/ 이분은 장군님과는 물론/ 우리 모두와 무관한/ 차고 음산한 쇠기둥이다.//

잡설 -박인환 / 김규동
나이를 먹으니/ 제 팔자는 개뿔도 모르면서/ 남의 사주팔자 관상 따위를/ 흥미있게 엿보는 괴이한 버릇이 생겼다/ 박인환이 <목마와 숙녀>를 쓴 것은/ 아직 철이 덜 들었거나/ 서양문학에 섣불리 매료된 탓이었을 게다/ 그가 30살에 죽지 않고/ 여태 살았다면/진짜 좋은 민중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길밖에 그가 가야 할 길은/ 없었을 게다/ 모더니즘도 모더니즘이려니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그가/ 민족현실을 저버릴 리 만무했을 게다/ 오장환이니 배인철이/ 그의 눈에는 다 모더니스트였고/ 김기림 역시 두려운 근대파 시인이었다/ 사주관상쟁인 아니지만 가끔/ 옛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며/ 그들의 생애에 이런저런 상념을 담아보는 것도/ 한 기쁨이다/ 인환이 간 지도 30여년/ 그가 살아있다면 틀림없이/ 분단시대를 떠메는/ 참다운 모더니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 대해서만은/ 어쩐지 이런 장담을 해보고 싶다.//

인사 -맹문재 씨에게 / 김규동
등불이 언제까지나 희미한 적 없어요/ 나도 당신과 같은 고통의 길 걸어왔지요/ 청춘은 알지 못할 위대한 길/ 두고두고 생명을 괴롭혀 왔습니다/ 생명은 너무 길었지요// 시인이 왔습니다, 불운으로/ 그가 하늘과 구름 사이로 노래해 주었습니다/ 나는 시인을 따라 밤길을 걸었지요/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은 하나의 길/ 그 고독이 나에겐 그리운 종소리였습니다//시인이여/ 안녕//

정지용의 서울 나들이 / 김규동
광대무변이라더니/ 서울이 정말 그렇구먼/ 내 살던 성북동 골짜기는/ 어떻게 가면 되우/ 어디서 어디까지가 서울인지/ 크고 작은 집에다 자동차 꼭 찼소/ 종로통에서 고층집 쳐다보고 걷다/ 비둘기 밟을 뻔했소/ 처음 대하는 손님같이/ 가깝고도 먼 한양 서울이라오/ 풍요가 좋긴 좋아도/ 왠지 현기증이 날 것 같으이.//

주례사 / 김규동
"싸우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만일 싸움이 시작되면/ 한쪽이 먼저 참으세요"/ 이런 간단한 주례사는/ 처음 들었다/ 그래서 모두는/ 하하 웃었다/ 나지막하나 뜻있는/ 송건호의 주례사였다.//

고무신 / 김규동
옛날에/ 박봉우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의 조선일보 옆골목 입구에/ 떡 버티고 서서/ 히틀러같이 한 손을 펴 꼿꼿이 들고/ 인사를 합니다/ 흰 와이셔츠 소매는 한쪽은 걷어붙였으나/ 한쪽은 때 묻은 채로 손등까지 축 늘어졌습니다/ 그가 쓴 <휴전선>이란 시집을 칭찬해주면/ 꾸벅 절하고, 또 이런 데 저런 데는/ 조금 날렸더라, 비평 비슷한 말 지껄이면/ 삽시간에 얼굴이 창백해져서/ 당장 노기를 내뿜었습니다/ 흰 고무신을 신은 그가/ 뒤도 안 돌아 안 보고 세종로 방향으로/ 달아나듯 하는 뒷모습은/ 꼭 서툰 시골 농부 같은 모습이었지요/ 군사독재 시절/ 데모하다 전경들에 번쩍 들려/ 호송차에 실릴 때의/ 함석헌 선생 고무신 생각이 납니다/ 사람들 머리 위에 고무신만 반짝 희었지요// 시인의 고무신과 함옹의 고무신/ 이 두 켤레 흰 신발을/ 한폭 수묵화같이/ 짙푸른 하늘가에 그려본답니다.//

시인은 숨어라 / 김규동
정지용이란 유명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한참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술친구가 찾아오면/ 벽장 속에 숨었답니다/ 친구들이 그만 알아차리고/ 정지용 꽁꽁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를/ 외쳐대고 돌아갔다 합니다.//

3월의 꿈 / 김규동
3월 달이라면/ 해도 30리쯤 길어져서/ 게으른 여우가/ 허전한 시장기 느낄 때다/ 오 함경도의 산/ 첩첩준봉에/ 흰 이빨 드러낸 눈더미/ 아직 찬바람에/ 코끝이 시린데/ 끝없이 흐르는 두만강의 숨소리/ 너무 가깝다/ 느릅나무 검은 가지 사이로/ 멀리 바라보이는 개울가/ 버들꽃 늘어진 눈물겨움,/ 마른 풀 사르는 냄새 나는/ 신작로 길을 홀로 걷고 있는 저분은/ 누구의 어머님인가/ 외롭고 어여쁜 걸음걸이/ 어머님이시여 어머님이시여/ 햇빛이 희고 정다우니/ 진달래도 피지 않은 고향산천에/ 바람에 날리는 봄이 왔나 봐요/ 봄이 왔어요.//

무등산 / 김규동
한 몸이 되기도 전에/ 두 팔 벌려 어깨를 꼈다/ 흩어졌는가 하면/ 다시 모이고/ 모였다간 다시 흩어진다/ 높지도 얕지도 않게/ 그러나 모두는 평등하게/ 이 하늘 아래 뿌리박고 서서/ 아, 이것을 지키기 위해/ 그처럼 오랜 세월 견디었구나.//

두만강(豆滿江) / 김규동
얼음이 하도 단단하여/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못 타고/ 썰매를 탔다./ 얼음장 위에 모닥불을 피워도/ 녹지 않는 겨울 강./ 밤이면 어둔 하늘에/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강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 멀리 들려 왔다./ 우리 독립군은/ 이런 밤에/ 국경을 넘는다 했다./ 때로 가슴을 가르는/ 섬뜩한 파괴음은/ 긴장을 못 이긴 강심 갈라지는 소리./ 이런 밤에/ 나운규는 '아리랑'을 썼고/ 털모자 눌러 쓴 독립군은/ 수많은 일본군과 싸웠다./ 지금 두만강엔/ 옛 아이들 노는 소리 남아 있을까?/ 강 건너 개 짖는 소리 아직 남아 있을까?/ 통일이 오면/ 할 일도 많지만/ 두만강을 찾아 한번 목놓아 울고 나서/ 흰 머리 날리며/ 씽씽 썰매를 타련다./ 어린 시절에 타던/ 신나는 썰매를 한번 타 보련다.//

통일의 빛살 -백두산 / 김규동
하늘 위의 바다/ 일렁이는 구름밭 헤치고/ 드높이 솟은 바다/ 거대한 잔 받들어/ 하늘을 열고 땅을 열어/ 오천년 역사를 이루었나니/ 백두산이여/ 천지, 넘치는 생명의 물이여/ 바람소리 흐느껴/ 빛살 온 누리에 나부끼고/ 그윽한 징소리 넘치게 울려퍼져/ 하나인 숨결 하나인 뜻/ 찬연히 이었나니/ 겨레의 맥박인 백두산이여/ 열두 개의 연봉 병풍처럼 둘러선/ 그 꼭대기/ 병사봉 벼랑 밑/ 삼십리 둘레에 퍼진 검푸른 물은/ 송화강 흑룡강/ 두만강 압록강 끝까지/ 마를 줄 모르는 젖줄 되어 흐르나니/ 크도다 장하도다/ 우리의 산이여/ 자작나무 이깔나무 우거진 밀림 속/ 장백산 굽이굽이/ 겨레의 혼과 입김 면면히 스며/ 삼라만상 도도히 물결치는/ 장엄한 노래/ 백두산은 우리의 힘이고나/ 맑디맑은 천지물은/ 자유와 평화의 애틋한 샘이고나/ 마천령의 힘찬 숨결/ 남으로 길게 뻗어/ 함경산맥 개마고원 넘어/ 태백 차령의 준령 이루고/ 노령 소백의 큰 기둥/ 지리산에 닿아/ 다시 한라로 이어진 오직 하나인 혈맥/ 삼천리 강토 금 없이 연이은/ 하나인 땅이여 하늘이여/ 오, 통일과 만남의 산 백두산/ 희망과 평화의 바다/ 백두산 천지/ 온갖 슬픔 온갖 어둠 사르며/ 이제 새날이 밝는다/ 우리 모두 엎드려 큰절 올리나니/ 이제야말로/ 이 애절한 그리움과 염원 위에/ 통일과 행복의 날을 내려주소서/ 민족의 큰 산 백두산이여.//

백두산에 올라 / 김규동
두 손으로/ 천지 푸른 물을 떠/ 사슴처럼 달게 마시니/ 하얗게 늙으신 어머니는/ 손을 허위허위 저으며/ 얘야/ 천천히 마셔라 천천히 마셔라/ 얼마나 목이 말았으면/ 그처럼 달게 마시느냐/ 그러면서/ 예같이 어여삐 웃으시고/ 동서남북/ 고요한 하늘을 이고/ 수없이 절을 하며/ 이 땅에 해방과 통일이 왔음을/ 고하니/ 짐승도 사람도 산도/ 어느새 하나되어/ 천리에 찌렁찌렁한/ 울림을 그었다/ 보려무나/ 이토록 넓고 큰 산이/ 우리를 지키는 조선의 산이다/ 백두산이란다/ 산에서 난 사람은/ 산에서 사는 게 옳으니라/ 어머니는/ 황철쭉이 금빛 비단을 펼친/ 남쪽 언덕을 황홀히 바라보시며/ 이제는 눈을 감아도 한이 없다/ 40년 만에 돌아온 기구한 자식 보았으니/ 남조선 아들 만났으니/ 그러면서/ 흰 옷자락 나부끼며 너훌너훌 춤을 췄다/ 어헝야 어헝야/ 해방이 왔도다/ 삼팔선이 없어지고/ 해방이 왔도다/ 우리 한몸이 되었구나/ 새 세상 왔구나/ 백살 난 애 어머니의 노랫소리 따라/ 어디선가 북소리 장고소리 징소리/ 일제히 퍼져/ 드높은 산을 꿈속에서처럼/ 아득히 덮어갔다/ 백두산이 큰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송년(送年) / 김규동
기러기 떼는 무사히 도착했는지/ 아직 가고 있는지/ 아무도 없는 깊은 밤하늘을/ 형제들은 아직도 걷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 별빛은 흘러 강이 되고 눈물이 되는데/ 날개는 밤을 견딜 만한지/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버린/ 아름다운 꿈들은/ 정다운 추억 속에만 남아/ 불러보는 노래도 우리 것이 아닌데/ 시간은 우리 곁을 떠난다/ 누구들일까 가고 오는 저 그림자는/ 과연 누구들일까/ 사랑한다는 약속인 것 같이/ 믿어달라는 하소연과도 같이/ 짓궂은 바람이/ 도시의 벽에 매어달리는데/ 휘적거리는 빈손 저으며/ 이 해가 저무는데/ 형제들은 무사히 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쓸쓸한 가슴들은 아직도 가고 있는지/ 허전한 길에/ 씁쓸한 뉘우침은 남아/ 안타까운 목마름의 불빛은 남아/ 스산하여라 화려하여라.//

새해의 노래 / 김규동
새해에는/ 우리네 가슴에/ 푸른 강물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백두산 지리산에 내리는 함박눈이/ 온 천지에 펑펑 쏟아져/ 집과 길을 파묻기도 하고/ 새와 짐승과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며/ 지친 우리 걸음걸이도/ 새 힘이 솟게 하세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동강난 강토에 새봄이 오니/ 우리 마음 어찌 무심하랴/ 남녘에도 북녘에도/ 통일의 노래 애타게 울려퍼지니/ 우리의 바람 하늘에 닿으리/ 억울한 분단의 세월 너무 길었나니/ 흩어진 형제들 만나봐야지/ 끊어진 다리 잇고 막힌 길 새로 헤쳐/ 그리운 임들 다시 찾아봐야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넘어나 보세/ 하늘과 땅 사이/ 슬픔과 미련 사이/ 노여움과 원한 사이/ 그 모든 어둠과 설움 위에/ 화해와 해방의 빛 굽이치나니/ 이 고개 넘으면/ 좋은 세상 만나본다네/ 까치 까치 설날은 우리의 새날/ 둘 아니고 하나인 햇님/ 산 넘고 물 건너/ 희망의 새날 맞아 어서 나가세/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나 가세.//

가노라면 / 김규동
가노라면 쉴 데도 있을 테지/ 가노라면 까치가 우는 마을도 있을 테지/ 눈 위에는 짐승 발자국 두어 개/ 산 넘고 들을 건너/ 눈 덮인 길 가네// 가노라면/ 맑은 햇빛 눈부시겠지/ 얼음이 녹고 눈이 녹을 테지// 가노라면/ 달이 뜰 테지/ 여우가 달리는 오솔길도 나올 테지/ 꿈속에서처럼 멀리 기적소리 들릴 테지/ 빙긋 쳐다보고 웃는 길동무도 있을 테지/ 가노라면/ 얼음 밑을 기는 물소리도 만날 테지/ 가노라면/ 큰 산 큰 강물 긴 다리도 만날 테지/ 40년 걸은 이 길을 가노라면/ 아 가노라면/ 보고 싶던 산천 만나게 될 테지/ 새해의 흰 눈 밟고 또 다시 가네/ 흰 길 가네//

눈 나리는 밤의 시(詩) / 김규동
고독(孤獨) 속에서는/ 낡은 서적(書籍)이 풍기던/ 곰팡이 내음새가 풍겼다.// 벗은/ '타이피스트' 아가씨처럼/ 경쾌(輕快)한 솜씨로/ 무한(無限)한 시(詩)를 써갔다.// 먼 시간(時間)의 경과(經過) 뒤에 오는/ 피곤(疲困)과 같은 애수(哀愁)./ 부두(埠頭)가에서는 지금쯤/ 하얀마스트가/ 맥없이 깃발을 내리고 있으리.// 숱한 어저께들처럼/ 검은 공간(空間)을 기웃거리는/ 1953년(年)의 얼굴 얼굴들.// 여자(女子)들은 푸른 물굽이에 안기우며/ 출렁이는 해협(海峽)을 건너갔다고 한다./ 때묻은 활자(活字) 위에/ 함박눈처럼 나리는 밤의 침묵(沈默)!// 전쟁(戰爭)이 지나간 도시(都市)는/ 뭇 연대(年代)의 기억(記憶)속에 잠들어가고,// 모든 전사(戰士)들은/ 황폐(荒廢)한 화성(火星)의 평면(平面)에/ 그들의 대열(隊列)을 짓고 있을 뿐이다.// …눈이 나리는 밤!/ …눈이 나리는 밤의 실내(室內)!//

노을과 시 / 김규동
혼자만 와서 불타는 저녁노을은/ 내게 있어 한 고통거리다/ 가슴을 헤치고/ 혼자만 와서 불타는 저녁노을을/ 원망하며 바라본다/ 노을 속에서는/ 언제나 우렁찬 만세소리가 들리고/ 누님의 얼굴이 환히 비친다/ 이러한 때/ 노을은 신이 나서 붉은 물감을/ 함부로 칠하며/ 북을 치고 농부들같이 춤을 춘다/ 한 컵의 냉수를 마시고/ 오늘도 빈손으로 맞는 나의 저녁노을/ 저녁노을을 쳐다보는 사람은 벌써/ 도시에 없다.//

시인 / 김규동
어디로 가나/ 서툴러/ 사실은 외톨박이/ 쉴새없이 구르는 바퀴를 보며/ 생기를 회복하여/ 나아가거나 낭떠러지/ 모든 게 서툴러/ 상기된 얼굴을 감추려/ 강물로 간다/ 뿌옇게 오염된/ 강물이 복잡하게 썩는다/ 가자/ 그래도 가자/ 어둠의 바다로.//

 

시의 천국 / 김규동
한 편의 시는/ 연탄 한 개만 한 열기라도 있을까/ 한 백리쯤 걸어도 끄떡없는/ 근력이 있을는지/ 뜻없이 푸른 하늘 아래/ 조용히 흐르는/ 실의를 달랠 수 있을는지/ 헐린 무허건물이/ 가축의 뼈다귀처럼 길가에 나뒹구는 오후/ 바람은 풍경을 손질하느라고 분주한데/ 포켓의 먼지를 털며/ 말의 효력을 믿어서는 안된다/ 흰 이마에 회의와 애탄의 불을 켜들고/ 무거운 입술을 굳게 다문 고뇌의 증인/ 보들레르여/ 절망이 어떻게 빛을 볼 수 있었던가/ 불부짖는 바다는 저 혼자 단애에 부서지고/ 낮과 밤을 잇는 세계의 소식은 불꽃을 튀기건만/ 소리없이 나의 시야를 적시는 빛/ 눈물이여/ 내 시의 천국엔 흰나비 한 마리//

거지 시인 온다 / 김규동
철없는 모더니스트 시절/ 명동에서/ 내 친구들이/ 새까만 얼굴의/ 천상병이 나타나면/ 야, 저기 거지 시인 하나 온다라고/ 우스갯소리 했지요/ 상대 나왔다는 친구가/ 뭐 저러냐/ 너 또 200원 줘라/ 그러잖아도 너 알아보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빈정댔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때 천상병이를 거지 시인이라 놀려주던 친구들은 다 시인이 못되고/ 천상병이는 시인으로 남게 되었군요/ 영원히//

의식의 나무 / 김규동
우리가 보지 않는 동안에도/ 부러지지 않고 서서/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도/ 죽지 않고 서서/ 우리가 죽은 뒤에도/ 말없이 서서/ 하늘로 뻗어오르며/ 구름이 되고 빛이 되어/ 활활 타오르는/ 생각하는 나무여/ 아 부드러운 나무의 뼈.//

들에서 / 김규동
이제 남은 것은/ 홀가분하게/ 길이나 걸어보는 일인가/ 그대 노래하려면/ 분방한 계절의 빛이나 노래하라/ 산천이 애태우지만/ 자동차만 연이어 달리는/ 성남 가는 길은/ 텅 비어/ 십년 하루같이/ 그저 이렇게/ 텅 비어서 살 바에야/ 차라리 같이 죽어나 버리자는/ 아내와 좀 다투고 나서/ 길을 걸으니/ 새삼 살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일어/ 뿌연 하늘도 바라보고/ 먼지 자욱한 도시도 되돌아본다/ 정신과 육체를/ 다지고 도려내어/ 다만 꿈꾸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보자는 것도/ 생명이 남아 있는 탓이라/ 얼마간의 수분과 석회질로 엮어진/ 이 퇴락해가는 물질 속에/ 생명이 남아 있는 탓이라/ 그래도 들리는 것이 있다/ 김규동/ 멈춰서 보라/ 길가의 민들레 풀포기가/ 살포시 말하고 있는 것을.//

달밤 / 김규동
달이 지붕에/ 라이트를 꺼라/ 오늘은 나운규, <아리랑> 찍는 날/ 은박지 천 리에 깔렸다/ 귀뚜라미도 울지 않는다/ 귀뚜라미는 달맞이대회에 갔다/ 낡은 성벽 위에서/ 저리도 구슬피/ 트럼펫 불고 있는 건/ 김기섭일 것이다/ 이상은/ 아까 책 한 권 겨드랑에 끼고/ 저쪽 길로 갔다/ 그의 얼굴이 희었다/ 스틱 짚고 흑백영화 골목길 걸어서// 30년대의 달이/ 새파란 불을 켜들고/ 이깔나무숲을/ 네굽 놓아 달린다.//

밤길 / 김규동
말을 들어먹어야 말이지/ 이제/ 백년도 더 된 것 같다/ 라디오 소리가 귀청에서 떨어진 것이/ 우선 살 것 같다/ 새파란 달빛 아래를/ 아이들 장난감처럼 나니/ 달이 흐뭇해서 웃는데/ 기러기는/ 새발 스치는 바람소리를 내며/ 천리길 다소곳이 난다/ 누가 뼈를 떨구나보다/ 차거운 소리를 내며 강물이 흐른다/ 구레나룻이 검고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자루에 돌배 넣은 것을 둘러메고/ 물가에 와서 무명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린다/ 어둠속에서 수인사하고/ 함께 강을 건너간다.//

밤의 불덩어리 / 김규동
사람을 잘 치는 차가 있기는 있기 때문에 인도를 걸으면서도 불안한 것이니 언제 어디서 이놈이 비집고 나와 들이받을지 예측이 될 턱이 없은즉 두리번거리며 곁눈질로 바퀴란 바퀴를 조심하면서 되도록 걸음을 재촉하는 지가 오래되었거니와 귀신이 다락 구석과 선반 널빤지 위에 숨어 있는 것을 본 이후로는 자동차의 불빛과 경적, 부르렁거리는 숨결소리를 무서워하게 된 것 역시 우연 아니거니와 대도에 넉 줄로 꼬리를 물고 행진하는 숱한 달구지의 물굽이를 벌거벗은 거대한 유령이 타고 앉는 순간 때마침 신호기가 침입자를 얼른 알아보고 즉시 빨간불 파란불을 능란하게 켜들 때 금시 사방에 자갈돌이 뿌려지고 멍석만한 바람덩이가 뺨을 갈려댔으나 운명에 잘 견디는 팔자를 타고났는지라 눈을 지그시 감고 캄캄한 굴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빠져나오는 것이 신기하기는 하나 내 체내에는 어느새 새까맣게 탄 기형의 생물이 수천 마리나 쌓여 그중 어떤 것들은 개구리와 올챙이 비슷하게 생겼는데 좌우로 몸을 틀며 그것이 뱀같이 머리를 내젓는 것을 보게 되고 허공에서 몸을 파르르 떠는 괴물이 또한 숱하니 무슨 수로 이것을 내쫓을지 몰라 속으로 뱀은 연이다 하늘을 나는 연이다라는 헛소리를 두어 번 해보고 나서 앞을 보니 새까만 것이 불덩어리를 달고 시야를 가리는데 에즈라 파운들같이 생긴 꾸부정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서 서툰 한국말로 길을 묻기를 잠실운동장 가는 차 어디 있습니까?였으나 지리에 어두운 나는 몸부림쳐보나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하고 말았는데 다만 깜박 곯아떨어진 잠 속에서 이렇게 외친 게 고작, 스톱 스톱 온갖 힘을 다해 차를 세웠으니 그렇다는 것은 급기야 자동차가 부엌을 지나 안방까지 들이닥쳤으니 딴에는 위급을 면해보느라고 스톱 소리밖에 냅다 지를 게 없었던 것이다.//

창가에 앉은 여자 / 김규동
부모 여읜 여자일까/ 집에서 쫓겨났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7년 동안 사귀던 남자와 헤어졌다/ 그 사내는 착한 사람이었다/ 외국으로 떠나가며/ 시간이 가면/ 아픔은 멎고/ 잊게 된다며 여자의 손 잡고/ 울었다오/ 지금은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오/ 3년이 흘러갔소/ 절반은 잊고 절반은 아직 잊지 못해/ 울고 있는 것이오/ 보일까 말까 한 이슬이/ 여자의 눈가에 맺혀 있소.//

보이지 않는 손 / 김규동
한 손님이/ 불빛이 왜 이렇게 어두우냐고 물었지만/ 운전기사는 대꾸가 없었다// 두어 줄 읽던 신문을 무릎에 놓고/ 손님은 차창 밖을 멍청히 내다봤다// 나는 생각했다/ 묻는 말에 대꾸를 않는/ 저 운전기사는 너무 지쳐서 그런 것 같다고/ 손님은 잠깐 졸다가/ 소스라쳐 눈을 떴다 꿈을 꿨던 것이다/ 한 사내가 칼을 들고/ 자신의 몸을 푹푹 쑤시는 꿈을// 거리의 불빛은 새떼처럼 지나가고/ 승객들은/ 꼼짝없이 붙들려가는 사람들모양/ 앞만 보고 앉아 있었다/ 제각기의 생각에 잠겨서/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것들은/ 오직 신밖에 모르는 것들이라고/ 죽음의 계곡을 달리듯이/ 마구 질주하는 이 버스의 운명도/ 사실은 신의 손에 쥐어진/ 가느다란 실오라기에 불과한 게/ 아닐까라고// 우리 모두를/ 한 끈에 묶어쥐고 달리는 이 손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세계 속의 우리 지도 / 김규동
어디서나/ 들려오는 저 소리는/ 무심치 않아/ 날로 새로워지는 산천초목/ 하늘은 높고 바람은 맑아/ 나는 새 한 마리 없어도/ 따뜻한 빛살이 우리 곁에 있나니/ 멀리서 가까이서/ 어디서나 들려오는 저 소리는/ 생명을 키우고 나아가게 하는 소리/ 민주주의는 승리하리라/ 바람 속에서/ 벽 속에서/ 세상 온갖 것 속에서/ 들리는 소리 있어 귀를 기울이면/ 마음은 어느새/ 사물과 한덩어리 되어 흐르나니/ 넓은 대양에 잇닿은 물은 물대로/ 별은 별대로/ 깊게 패인 하늘에 박혀서/ 새날을 기약하니/ 지도를 펴들자/ 남도 북도 없는 세계 속의 우리 지도를/ 금 없이 둥근 겨레의 내일에/ 넘쳐날 행복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자/ 어디서나/ 들려오는 소리 있어/ 귀를 기울이면/ 동에서 서에서 혹은 지구의 끝간 데서/ 착한 마음과 너그러움이 섞이는 소리/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소리/ 자유로운 번영과 평등을 갈구하는 소리/ 한순간의 멈춤도 없이 이어진 생명이/ 환한 역사에 닿았으니/ 빛은 어디서나 우리 가는 길 비추고/ 꿈은 다사로워/ 열려올 통일의 새벽이/ 새삼 벅차고 눈부시다.//

경고 / 김규동
노인은 곧/ 어린아이가 된다/ 떼쓰고 잘 넘어지는// 숨이 차 꼼짝 못하다가/ 복도로 나가려다 현관에서 쓰러졌다// 꽝/ 이마를 벽돌바닥에 찧었다/ 눈썹에서 출혈,/ 바른쪽 눈 보이지 않는다/ 깜깜하다// 의사가 말했다/ 눈에는 상처가 없는데 실명이니/ 그 원인을 모르겠다고/ 안타까운 의사다// 휴업중이라 했는데도/ 청탁서는 온다/ 한쪽 눈 앗아가며/ 그 누군가 단단히 경고하는가보다/ 그 돼먹지 못한 시 이제 그만 쓰라고// 인정사정없는 경고다.//

토끼와 고양이 / 김규동
고양이가 토끼보고/ 너는 만날 풀만 먹고 어떻게 사냐 묻자/ 잘 씹어먹으면/ 풀만큼 맛있고 영양가 높은 게 없단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토끼가 고양이보고/ 너의 그 야옹 하는 울음소리/ 가르쳐줄 수 없느냐 하니/ 그건 안된다 연습을 많이 해야지/ 고양이 잘라 말했습니다./ 고양이는 토끼의 하얀 털이 부러운 듯/ 그다지고 희고 깨끗한 옷을/ 어디서 얻어 입었느냐 하니/ 하느님이 주신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고양이는 시큰둥해서 뒤 울안으로 가버렸습니다.//

기러기 / 김규동
얘야/ 숨을 죽이고/ 기러기 울음소리를 듣자/ 이북 고향에서 내려오는/ 저 새의 속삭임을/ 조심조심 밤하늘에 놓이는/ 이 울음은/ 내 어머님의 소식이요/ 네 삼촌과 고모의 안부도 전하는/ 고마운 말이다/ 두만강 끝에서/ 백두산을 스쳐 개마고원 금강산을 넘고/ 아득히 휴전선도 지나/ 한양 서울까지/ 조선의 깊은 하늘을 나는/ 저 부드러운 숨결은/ 바람처럼 물처럼/ 가슴을 적셔주는구나/ 얘야/ 이제는 정말 가야 한다/ 형제들 애타게 기다리는 저 북으로/ 생각하면/ 끊어야 할 것이 어찌 한두 가지냐/ 수많은 것을 끊고/ 이 40년 통한의 슬픔 박차고/ 일어서야 한다/ 7천만이 한몸이 되어/ 이죽음의 사슬을 끊자/ 독재와 억압, 착취와 분노의 어둠을 뚫고/ 외세에 묶인 설움의 세월을 청산하자/ 한라에서 백두까지/ 오, 백두에서 한라까지/ 자주해방의 날 이룩하자/ 얘야 숨을 죽이고 들어보아라/ 오늘밤 북에서 오는 저 손님은/ 이제 때가 왔음을 일러주고 있다/ 통일의 밝은 빛이 트여옴을/ 알려주는구나/ 또 전하기를/ 백살 난 내 어머님도 여태 살아 계시고/ 네 삼촌과 고모도/ 백두산 밑 그 옛터에 잘들 살고 있단다/ 올해는 풍년이 들어/ 누런 들가엔 겨레의 노랫소리 흥청거린다고/ 기러기 끼이욱 끼욱....../ 반가운 소식 전해주는구나.//

새 / 김규동
감나무에/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호 후루룩/ 호 후지작 하고 울었다/ 공해 속의 서울에서/ 푸른빛 새소리 듣다니/ 너무 놀란 탓에/ 지옥 아니면 신선에서 온/ 새일 것이라고 우겼다/ 고운 소리로 우는/ 새소리를 들으며/ 하필이면/ 지옥과 신선을 떠올렸는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인기척에 놀란/ 새는 날아갔다/ 언제 또 다시 온다는 약속도 없이/ 그러나 내 가슴에 남은 새는/ 먼 하늘과 바다를 가르며 날고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날고 있다/ 검푸른 벽 속을 날아간다/ 울음이 굳어버린/ 딱닥한/ 고체가 되어.......//

곡예사 / 김규동
가벼우나 슬픈 음악/ 관객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할 때/ 곡예사의 가슴엔/ 싸늘한 바람이 스친다// 아슬아슬한 새 기술을 부리기 위해/ 파리한 얼굴의 여자와/ 표정 없는 구릿빛 가슴의 사나이가/ 줄을 타고 오를 때/ 얼마나 신기한 기대를 보내는 관중들이었던가// 이쪽 그네에서/ 저쪽 그네로/ 서로 옮겨 탈 순간과 순간// 담배연기 자욱한/ 공간 위에서/ 아 저러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그런 것은 벌써 잊어버린/ 곡예사의 어저께와 오늘// 하얀 손의 여자여/ 곡예사여/ 너의 입술에 어린/ 떨리는 생명의 포말들을 삼키며/ 너는 더욱 잔인해야만 한다// 원폭의 하늘처럼/ 소란한 오늘의 기류/ 그 속에서 오히려/ 네가 지니는 한 오라기의 질서가/ 무한한 기쁨처럼 나를 울린다.//

호남평야 / 김규동
이 넓은 벌판을/ 끝 닿는 데 없이 넓은 벌판을/ 새매 한 마리 날지 않고/ 아쉬움인가/ 어여쁜 눈물자죽 빛내며/ 해는 진다/ 나락은 모두 거둬들였으나/ 땀 흘려 일한 사람들/ 무엇을 나눠가졌을까/ 착한 마음밖에 가진 것 없는 사람들/ 무엇을 나눠가졌을까/ 텅 빈 들판에 남은 건/ 정지된 시간의 흐름이다/ 가슴에 넘치는 고요함이다/ 서울서 온 양복쟁이는/ 여기를 지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딴전만 부리는구나/ 딴소리만 되뇌이며 가는구나.//

지하철의 사상 / 김규동
행복하십니까/ 노인/ 지하철의 당신이여// 폐 끼치기 싫어요/ 아이들에게/ 그러니 어찌합니까/ 지하철 타고 종점까지 갔다/ 돌아오고/ 볼일 다 못 본 사람같이/ 또 종점까지 다시 갔다/ 이렇게 돌아오고/ 가고 오고/ 그러는 거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어쩌구 하는/ 아름다운 노래도 있는 것 같으나/ 죽는 게 어려워요/ 죽으려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아직은 용기가 없으니/ 불쌍한 목숨이구려// 아, 텔레비전이나 들여다보고/ 오가는 자동차 물결이나/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그래봐야 통 사는 재미가 없어요/ 빈 병 빈 종이상자 주워다/ 손자 손녀애들 과자봉다리와 바꿔봐야/ 그것도 이제는 별 재미 없다오// 하루하루/ 연명이나 하자는 이짓이/ 무슨 뜻이겠소/ 죽지 못해 사는 노인이/ 허구헌 날 무료승차 미안하나/ 지하철 타고/ 우르릉우르릉/ 가는 거라오/ 우르릉우르릉/ 오고 있는 거라오.//



김규동(金奎東, 1925년~2011년) 시인
함경북도 종성군 행영읍 행영리에서 태어난 시인은 1948년에 스승 김기림 시인을 찾아 단신 월남하여 교사, 언론인, 출판인으로 활동하고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썼다. 50년대에는 박인환-김차영-조향-이봉래-김경린과 함께 ‘후반기’ 동인을 결성해 음풍농월식 서정 기조의 기존 문단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고 이후 전후 문학의 흐름을 이끌었다. 
주요 시집으로는 『나비와 광장』, 『현대의 신화』, 『죽음 속의 영웅』, 『오늘 밤 기러기떼는』, 『느릅나무에게』 등이 있고, 시선집 『하나의 세상』, 『길은 멀어도』등이 있다. 2011년 시인의 타계 몇 개월 전, 그의 시 432편을 모은 『김규동 시전집』이 창비에서 발간되었다. 평론 활동을 병행하여 『새로운 시론』, 『지성과 고독의 문학』, 『어두운 시대의 마지막 언어』등의 저술을 냈으며, 산문집 『어머님전 상서』, 『시인의 빈 손』과 만년 병상에서의 구술을 통해 작성된 자전에세이 『나는 시인이다』도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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