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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손가락에 관한 고찰 / 유시경

부흐고비 2021. 8. 27. 08:20

나는 사람을 처음 대면할 때 그의 손 모양을 살피는 경향이 있다. 저 손은 부드러울까, 저 손은 참 일복이 많게 생겼구나. 저 손은 사랑을 많이 받겠다. 저 손은 위안을 많이 주겠구나. 저 손은 한번만 만져본다면 원이 없을 정도로 남자답게 생겼군. 뭐 이런 나만의 쓸데없는 신경작용이라고나 할까.

전동차 좌석에 앉아 앞의 승객들을 바라보기 민망할 때 으레 그의 손등에 눈이 간다. 그들의 손은 노상 스마트폰과 싸우거나 속삭이거나 즐기거나 하는 게 대부분이다. 어떤 청년의 손가락은 참으로 길고 가늘며 여리게 생겼다. 그 손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짊어질까 걱정스럽다가도 아니지, 저 손으로 독서도 하고 예쁜 글도 쓰고 맡은 임무까지 척척 해낸다면 금상첨화지 싶기도 하다.

2017년 가을, 하늘이 청명하게 높아갈 즈음 세상을 뜬 어느 작가의 손을 생각한다. 그의 손가락은 금세라도 부러질 듯 가냘프고 서러운 모양새를 가졌다. 나는 2011년 팔월에 서울 삼청동의 ≪스페이스 선≫이라 하는 지하 갤러리에서 열리던 <마광수 초대전>에 가본 적이 있다. 당시 그 지하 공간엔 관람객이라곤 나 한 사람뿐이었다. 그곳은 사면의 벽이 회색 시멘트로 덧발라진 참으로 소박한 날 것의 공간이었다. 그 위에 천진무구하기 그지없는 크레용 그림 몇 점이 쓸쓸하게 걸려있었다. 마 교수의 화풍은 형식면에서 초지일관 아이의 손으로 그린 그림 같았지만 그것이 추레하다거나 유치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단순명료하고 다소 가년스러워 보이는 하얀 도화지 속 그림들을 들여다보노라면, 이 작가의 철학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자신만큼은 ‘때 묻고 싶지 않다’ 혹은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즉, 스스로 ‘벌거벗은 아기’가 되고픈 갈증이 내재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괜한 측은지심마저 불러일으키는 거였다.

인터넷으로 관찰해보건대 그의 손은 마디마다 비운과 고독으로 점철되어 있는 듯하다. 그 손은 정서적으로 재주와 기량이 능수능란할지언정, 험한 육체노동 같은 건 엄두도 못 낼 것처럼 안타까워 보인다. 마 교수는 <게으름 예찬>이란 수필에서 자신과 같은 창작 예술행위를 ‘게으른 노동’이라 해석했으며 이는 매우 설득력 있는 표현으로 다가온다. 그의 손가락은 근본적으로는 세상을 지배할 순 없었으나 자신의 문학을 완성함으로써 혁명을 하였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결핍의 미학이랄까. 아마도 마 교수의 손은 수많은 폭정(暴政)의 손가락들이 범접치 못할 깊은 고뇌와 정신적인 학대로 상처투성이가 되었던 것은 아닌지.

2017년의 뜨거운 여름날, ≪한국산문≫ 인터뷰 때 김형주 씨와 함께 송경동 시인을 만났었다. 형주 씨가 인터뷰하는 내내 나는 시인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과연 노동자의 손다웠다. 그의 손은 묵직하고 뭉툭하며 구릿빛으로 그을린 데다 손톱의 면은 굉장히 넓고 단단해보였다. ‘저런 손으로 어쩜 이리도 세밀한 문장을 그려낼 수 있을까?’ 실은 놀랍다기보다 내심 부럽고 질투까지 났다. 육체노동으로 찌든 손들이 영혼의 문장을 가까이 한다면 그것은 보다 더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보일 게 틀림없다. 시인의 손가락을 연상하며 그의 시를 읽는 일은 종종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최근 세계를 여행하며 사진전을 열고 있는 박노해 시인의 손은 육체노동자보다는 외려 지식인에 가까운 손으로 보인다. 그의 손은 노동에 절어있으며 또한 문학에 젖어있기도 하다. 대개의 문인들의 손이 학문과 씨름하기에 마디마디 굴곡진 것은 아니리라. 작가의 손이란 한 사람을 사랑하기에 앞서 팍팍한 세상의 무상무념마저도, 그 묵상의 시간까지도 끌어안아야 하는 아주 고된 기계일지도 모른다.

손은 그 사람의 운명과 일생을 좌우하는 듯하다.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은 예술에 전부를 쏟아 붓기에 좋고 두툴두툴 굵은 손가락은 거친 일을 하기에 좋다. 일의 전장에 나가 온몸의 근육을 쓰고 또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 세상의 모든 일에 도전하여 두 가지 세 가지를 해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심심하지만은 않을 터. 그러나 나는 청년의 손가락이 참으로 고와지는 현상에 고소를 금치 못한다. 노동이 부족해지는 사회. 아니 노동의 힘이 넘쳐나서 노동을 거부하는 사회, 그럼에도 대개의 젊은이들이 자본의 지성을 꿈꾸는 이상한 세상이 도래했다.

자동차 ‘수레바퀴’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듯 스마트폰을 부리고 있는 젊은이들의 손가락을 분석한다. 아름답고 아름다우니 아름다워서 아름다워라. 어쩜 이리도 희고 길며 고울 수 있을까. 혹여 저들의 손가락에 ‘펜혹’이라도 하나 달린다면 얼마나 멋스러울까. 내 마음은 금세 ‘심쿵’해질 것이다. 그 손가락과 만나고 싶어질 것이다. 그 손가락과 깍지 끼고 낭만의 상상을 즐기리라. 손가락 주인의 얼굴생김 따윈 관여치 않으리라. 그 손들은 나쁜 짓일랑 전혀 하지 못할 것이다. 허무맹랑한 소문을 퍼뜨리는 일, 비수 같은 문자를 타인에게 날리거나 상처를 후벼 파는 행위들을 결단코 그런 손들은 할 수 없으리라. 나쁜 손이란 가령 하루해 장사치로 살아가는 이 여인의 것처럼 투박하고 못생긴 손이라야 할 터이다.

나의 손은 얼음장처럼 너무 차갑고 거칠어서 실은 남편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였다. 내 손은 살림 잘 하는 손, 바깥일에는 참견하지 않으며 내조의 여왕으로 거듭나야 하는 손, 며느리로서 시제를 모시는 손, 동그란 밥그릇처럼 공손해야 하는 손이었다. 그에 반하는 심경으로 나는 밤잠을 이루기 전, 두 손을 매끄럽게 마사지하는 대신 따스한 문장과 한번이라도 더 만나는 일이 효율적인 위안이 되리라 기대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 몸은 매일 게으른 노동자의 손을 꿈꾼다. 아이처럼 공상하고 상상력을 발휘하기에 좋은 연장인 손가락. 그러나 손바닥보다도 작은 액정 속, 갈고리 같은 폭력의 문자들이 윤회하는 이 시대에 그런 손은 어디에 있는가. 사방을 찾아봐도 피노키오의 코처럼 늘어지고 허우적거리는 무심한 손들만 눈에 띄는구나. 지쳐 쓰러지면 안 되지. 이 난국을 헤쳐 나가려면 손가락을 내려놓지 말아야지. 안 그러면 급변하는 디지털 톱니바퀴 밑에 깔려 죽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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