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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어디에 두었지? 좀 전까지 여기 놓여 있던 이면지는 왜 안 보이는 걸까?’

하루가 달라졌다. 아침 설거지를 끝내기도 전에 컴퓨터 앞에 앉는다. 청소기를 돌리다가도 볼 일 급한 강아지처럼 동동거리며 책상으로 돌아온다. 잠자리에 들기 전, 늘어져 가는 양 볼에 바르던 안티에이징 크림조차 건너뛰고 침대에 오른다. 어젯밤 읽다 만 책을 펴고 펜을 찾는다. 요즈음 나는 글을 쓴다. 그리고 남의 글을 읽는다. 어떤 이는 굳어버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누군가는 눌러 두었던 창작에의 소망에 다다르려 페이지를 채울 것이다. 나는 무엇 때문에 글이라는 것을 쓰는가. 그다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지 않은데.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이야기를.

문학을 일상으로 끌어당긴 후 하루가, 일주일이 그리고 한 달이 빨라졌다. 내 안에 숨어 있던 통증을 끄집어내야 할까. 바위에 새겨진 이름처럼 또렷한데, 때론 허상인지 진실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다. 그 애매함과 마주 할 용기가 생긴 것은 수필 공부를 시작한 서너 달 후였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엄마의 무관심에 말을 잃은 아이로 자라났지요.”

문우들이 쏟아내는 아픔이 환영처럼 다가왔다. 힘없이 심장을 부둥켜안은 애처로운 상처를 바라본다. 그들을 미소 짓게 했던 순간이 그려지기도 했다. 늘, 혼자 지구 밖에서 외롭게 표류한다 생각했는데, 나와 다른, 아니 결코 다르지 않은 이들과의 공존을 나이 오십 넘어 알게 되었다. 살아내기 위해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하고 살았던 지난날. 누군가 내밀었던 호의조차 외면하며, 그저 관성의 법칙에 따라 집과 일터만을 오갔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을 보면 부지런하지 않아서 가난하다는 말, 그것은 헛소리였다. 어떤 상황일지라도 열정을 잃지 않으면 꿈은 이루어진다는데, 나의 지난 세월 속에선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버둥거렸던 내가 이젠, 비슷한 이들과 나란히 걷고 있다.

나에게 문학이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경험은 말 그대로 성장이었다. 거대한 시공간에서 존재했던 인간의 이야기, 그들이 알려주는 자연의 순리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나만의 서투른 역사를 써 내려간다. 제목을 붙이고 첫 문장을 떼면, 슬픔은 순식간에 재생된다. 잊고 살았던 환희의 기억은 첫 단어를 따라 나와 온 마음에 퍼진다. 흥미진진한 내면의 소용돌이는 후회를, 때로는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이 경험은 스쳐지나가는 여운으로만 남지 않는다. 어설픈 신념을 단단하게 해주고 그 신념은 삶을 구체화시킨다.

“당신, 어제 찍은 사진에서 활짝 웃었더라. 사진 찍기 싫어했잖아.”

“엄마! 요즈음 훨씬 밝아지셨어요.”

남편과 딸내미가 던지는 말은, 그들이 바랐던 아내의 미소, 어미로부터 느끼고 싶었던 안락함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글을 쓰고, 글을 읽으며 신이 내게 부여해준 본성을 찾아가는 중일수도 있겠다. 때로는 흐트러진 조각을 맞추는 작업이 고달프겠지만, 이 특별함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오십은 글쓰기 좋은 나이’라며 조언해주는 선배, ‘잘 쓰려 하지 말고 잘 살아가라’는 스승의 가르침, ‘함께여서 좋다’는 친구의 말 한마디. 이렇게, 진정한 자기(Self)는 끊임없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소통과 이해로 완성되어 간다는 진리를 배우고 있다. 배워가는 삶. 그 앎이 쌓여 더 가벼워지는 것. 이것이 내가 오늘도 펜을 찾는 이유일 게다.

어느새 양 발등위의 묵직함이 사라졌다. 혹독했던 겨울은 더디지만 지나갈 테고, 봄은 내게 더는 무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사람을 읽고, 사람을 쓰며,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밑반찬 몇 가지 만들어 텅 빈 냉장고에 채워놓았다. 두근두근 떨림으로 발끝이 분주하다. 설거지를 대충 끝내고 미지근한 국화차를 침대 옆 탁자위에 놓았다. 습작한답시고 여기저기 널 부러진 종이 한 장 손에 들었다. 볼펜은 또 어디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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