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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도독동굴 / 주인석

부흐고비 2021. 9. 4. 02:16

수필가 주인석의 실험수필 2


나는 지금까지 한이 되는 일이 있다오. 밀고는 절대 아니라오. 나도 무척 속이 상해서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오. 배신이란 것이 무엇이오? 믿었던 사람에게 신의를 저버린다는 것 아니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기대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이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배신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오. 그래서 무엇이 배신인지 일의 자초지종을 들려주려 하오.

우리 마을에는 도독동굴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오. 입구에는 큰 바위 두 개가 솟을대문처럼 서 있고 한 사람 정도 빠져나갈 수 있다오. 그곳으로 들어가면 작은 동굴 입구가 보일 것이오. 동굴로 들어가려면 1m 정도 높이를 풀썩 뛰어내려야 하오. 입구는 좁으나 들어가면 5-6명이 앉아서 움직일 수 있는 제법 넓은 공간이 나온다오.

그곳이 모두가 아니라오. 그 공간과 연결된 긴 굴이 뚫려 있다오. 체구가 작은 사람이 앉은걸음으로 굴을 따라 들어가면 또 다시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이곳이 두 번째 공간이라오. 이렇게 동굴은 계속 이어져 있고 마치 대나무 마디처럼 넓은 공간과 좁은 공간이 계속 이어져 나온다오.

적이 알고 뒤따라 들어오더라도 좁은 통로를 막아버리고 넓은 공간에 몸을 숨기면 들킬 염려가 없는 이곳은 자연동굴이라오. 여러 개의 바위들을 짜 맞추어 놓은 것처럼 서로 이를 물고 동굴이 되어 있다오. 동굴 안의 모습은 자연의 신비로움 그 자체라오. 내가 동굴을 이렇게 상세히 설명해 주는 것은 지금은 동굴이 너무 오래되어 무너질 염려가 있고 내부가 좁아서 위험하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오. 내가 한이 맺힌 것은 이 동굴에서 있었던 일이라오.

임진년에 왜란이 나서 마을 사람들은 동굴로 피난을 갔다오. 왜군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쑥대밭을 만들었다오. 일찍이 내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중이었고, 나는 혼자서 딸을 낳아 키우고 있었다오. 나도 살아야겠기에 딸을 안고 동굴로 갔었다오.

“앙아앙, 앙앙앙, 으앙앙앙.......”

난리에 놀란 딸은 아무리 달래도 계속 울어댔다오. 아무래도 딸이 경풍驚風을 맞은 듯하여 나는 젖을 물리고, 딸을 달랬다오. 그래도 딸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그때,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오.

“왜군들이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몰려오겠는데......”

사람들은 점점 더 걱정스런 얼굴로 나와 내 딸을 번갈아가며 보았다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딸을 달랬다오. 그때 마을의 촌장인 남자가 나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오.

“그만 나가시오. 다수를 살리는 길을 모른다 말이오?”

고함을 지른 촌장은 평소 나를 못살게 굴었던 남자라오. 그는 내게 수청을 들라하였다오. 그는 권력을 이용하여 나를 수하에 넣어놓고 부리려 하였지만 나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오. 그는 앙심을 품고 있다가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이용하여 앙심을 드러냈다오. 겉으로 보아 내가 나가줘야 맞는 일이지만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나 외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오. 그를 추종하는 마을 사람들은 그의 말에 모두 동조를 했다오.

나는 굴에서 쫓겨나왔다오. 나는 무섭고 외로운 길을, 딸을 안고 걸어 내려가다가 왜군을 만났다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와는 달리 왜군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듯이 말을 걸었고, 마차를 태워 막사로 데려 갔다오. 배고픈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오. 그리고 이런 저런 일들을 하나씩 캐물으며 혼자 아이를 키우면 힘들겠다며 내 마음을 읽어 주었다오. 그들의 따뜻한 말에 내 마음은 녹아내렸다오.

며칠이 지나자 왜군은 내게 마을 사람들을 해치지 않을 테니 어디 있는지 가르쳐 달라고 했다오. 나는 왜군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말했다오. 그리고 촌장만 벌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오. 나는 마을 사람들이 무사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오. 그런데 방향이 영 어긋났다오.

왜군은 도독동굴을 찾아내 입구에서 큰 소리를 질렀다 하오. ‘촌장에게만 책임을 묻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살려주겠으니 빨리 나와라.’ 그런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오. 촌장은 나가면 모두 죽는다며 아무도 못나가게 회유를 하였다하오. 성질이 급한 왜군은 입구에 불을 지피고 뿌연 연기를 동굴 안으로 몰아넣었다오. 굴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연기에 질식되었고 튀어나온 몇몇 사람만 살아남고 대부분 죽고 말았다오.

이 사건을 두고 지금까지도 나를 배신자라고 하오. 내가 모두 잘했다는 것은 아니라오. 그 후 왜군들은 내게 그들의 수하가 되어 편히 살라고 했지만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누구를 의지하기보다 혼자 해쳐나가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오.

나는 촌장을 믿었다오. 또, 친절한 왜군도 믿었다오. 공과 사는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촌장이 마을의 대표어른으로 주민인 내게 잘해 준 것은 공이 아니오? 그것으로 끝나야 한다고 보오. 그런데 내게 무리한 요구를 했고 그로 인해 큰일이 벌어졌으며 지금까지도 한이 되어 있다오.

한이 맺힌 이유 중에 하나가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촌장의 말만 믿고 후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오. 촌장이 내게 어떻게 했는지를 전혀 모르고 나를 배신자라고만 생각한다는 것이오. 나는 촌장에게 주민으로 최선을 다했고, 왜군에게도 마을 사람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결국 내 목숨까지 내놓았다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지나온 일과 내 행동에 대해서 털끝만큼도 후회하지 않는다오. 배신이라는 말에 대해 수십 번도 더 생각해 보았다오. 어떤 경우에 써야 합당한 말인지 정녕 모른단 말이오?

아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까지 간사할 수가 있단 말이오? 일제강점기, 그 절박한 상황에도 사심을 가지고 한 사람을 사지로 몰았으니 하물며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야 더 말하여 무엇하리요?

나는 일전에 한통의 문자를 받았다오. 내가 힘들었을 때, 공감해 주며 함께 도반이 되었던 사람이라오. 그는 학업에 정진하였고, 나는 정성을 다해 그를 보살펴 주었다오. 좋은 결과를 얻은 그는 내게 고맙다고 난리가 났다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는 한동안 홀연히 내 곁을 떠나 이 곳 저 곳을 배회한다는 소리를 들었다오.

그런 그가 보낸 뜻밖의 문자에 나는 놀라서 나자빠질 뻔 했다오. 그는 내가 아는 촌장을 모시고 있다면서 그것을 내게 자랑처럼 말 하더이다.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으니 실리를 쫓는다고 어찌 나무랄 수 있으리오? 같은 계열의 일이라면 힘이 있는 쪽으로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당연지사요, 더군다나 미관말직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리요?

어지간한 강단을 가지지 않고는 목숨을 내 놓고 자신을 지키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오. 이것이 힘없는 사람들의 현주소라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 것이오. 나 또한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의 희생에 가담했으니 배신자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소. 이런 일을 두고 어찌 미혹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으리오?

“알게 모르게 오래도록 배신을 일삼아 왔으니 하루아침에 신의를 지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오.”

울산 진하마을, 해수욕장의 남쪽 솔밭 동굴은 범을 잡았다 하여 범굴, 박쥐가 많이 산다고 박쥐굴, 도독동이라는 마을 명칭을 따와서 도독동굴이라 부르기도 한다오. 도독은 장군의 진지 또는 벼슬을 칭하는 말인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이곳에 살았다고 도독동이라 부른다하오. 이곳을 들어가 보며 느껴지는 바가 있어 도독동굴 이야기로 그 뜻을 부연해 보았다오.


실험수필을 쓰면서 / 주인석

 
수필에다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를 접목시키고, 가전체 소설 형식을 빌려 스토리텔링화한 수필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필+구전된 이야기+가전체 소설 +스토리텔링 = 실험수필입니다. 저는 신춘문예 등단 이후, 수필에다 구전된 이야기를 입혀 스토리텔링 책을 4권 출간했습니다. <울산사랑길><감포깍지길><울산어울길><간절곶소망길> 외에 수필집으로는 <낀>이 있습니다.
 
수필의 형식을 약간 벗어나 실험적 수필을 쓴 것은 지금까지 수필이 너무나 형식적이고, 비슷한 내용이 많아 지루하고, 사적인 이야기에 치우쳐 있음을 탈피하자는데 큰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구전된 이야기가 지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수필 형식으로 꼭 풀어보겠다는 제 의지는 스토리텔링기법이었습니다.
 
가전체 문학에서 차용한 의인화 기법은 남녀노소 누구나 재미있게 읽으며 교훈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할머니세대가 사라지면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도 함께 소멸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라면 아무리 바빠도 끝까지 듣고 맞장구쳐주며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그냥 녹취록 기록하듯이 옮겨 적기만 하면 문학작품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필과 접목시켜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든 문학의 전환점에는 시끄러운 말들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수필이니, 수필이 아니니 왈가왈부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은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교시의 문학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구전된 이야기에 저의 체험을 덧붙여 주제문을 확실히 살렸습니다. 그러니 구전된 문학을 접목시켰다하여 수필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구전된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화하여 가전체 소설을 접목시켜 실험수필로 쓰게 된 배경과 목적을 밝히는 바입니다.
 
이에 덧붙여 실험수필에 선구자로 나서주신 많은 원로작가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특히, 실험수필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으신 윤재천선생님과 오차숙선생님은 우리 시대 실험수필의 큰 기둥이 되어주셨고, 새내기 수필가인 저는 서까래 몇 개를 보태지만 집 한 채를 짓는 것만큼 기쁩니다. 실험수필이 널리 알려져서 수필이 문학의 변두리로 내몰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설픈 작품 세 편을 보탭니다. 변변찮은 사람의 작품을 실어주심에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이 부끄럽습니다.

 
                                                                                                                              2013년 9월 19일 가을
 
                                                                                                                                       수필가 주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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